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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3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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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첸차오->원래 이름이 뭔지 모르겠는데 대강 읽는법 거꾸로 찾아서 정전조로 씀->이름이 증검교라고 알려주셔서 수정함
자환->조비의 자라서 이름 대신 자환으로 씀





“깜짝 방문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로버트가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했다.

‘자환’은 은행장인 아버지조차 어렵게 대하는 큰손이었다. 그런 상대를 몇 시간이라 해도 맡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로버트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로버트는 남에게 머리를 숙여 본 적이 없지만, 남이 머리를 숙일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알았다. 차를 타다 바치고, 담뱃불을 붙여 주고, 원하는 형태의 유희를 세팅하고….

그러나 무엇을 차려 놔도 자환은 별 반응이 없었다. 로버트가 자신의 소개를 했을 때와 똑같이 무심한 표정이라, 그의 기억 속에 남는 것부터가 난관임을 깨닫게 했다.

로버트가 자신 있는 예술품 관련 얘기로 물꼬를 트려다 실패하기를 몇 번. 그림과 조각을 통틀어 흥미가 있다던 조사 결과가 어긋난 건가 생각할 때였다.

“카르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비서가 전해준 말에 로버트가 저도 모르게 예민해졌다.

“그 말을 지금 전해야 하는 건가?”

윽박지르는 말투를 감추기 위해 목소리를 낮췄지만 이를 악문 소리는 새어나갔다. 비서가 당황하면서도 전해 달라던 말은 전하려 들었다.

“그게, 도자기 한 점이 생겼는데 선상 파티에서 공개하겠다고, 도련님께서 참석하셔서 감정해주셨으면 한다고….”

정일언의 의도는 뻔했다. 새로 얻은 장난감을 자랑하겠다는 것이다.

로버트가 얇게 입술을 뒤틀었다. 귀중한 보물을 온도도 습도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선상 파티에서 공개하겠다니. 천박한 졸부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술품을 보는 눈만 없는 게 아니라 관리하려는 생각도 없는 게 틀림없었다.

“안 간다고 해.”

로버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환이 ‘잠깐.’ 하며 끼어들었다.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로버트의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로버트가 제공한 그 무엇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던 자환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인 게 일언의 일이라니, 어쩐지 찜찜했다.

“소더비의 자문 일도 하시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예술품을 보는 눈은 정확하시겠지요.”

그렇지요? 묻는 자환의 시선이 로버트를 주시했다. 그렇다면 로버트가 할 대답은 정해졌다.

“…그럼요. 흥미 있으시면 함께 참석하시죠.”

남에게 제 의견을 강요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강요받은 적은 처음인 로버트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환은 전혀 동요가 없는 것이, 자신보다도 카르멘이나 정일언에게 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 한층 더 불편했다.

*

저녁부터 시작한다는 일언의 선상 파티에, 로버트는 물론이고 자환까지 참석했다.

일언은 로버트가 와줄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신나게 악수를 했다. 온몸이 붕붕 흔들릴 정도로 손을 흔드는 내내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비딱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이런 인간에게 관심을 두다니, 자환이 잘못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제 생각을 확인받으려 자환을 본 순간.

“…이런 쪽의 예술품은 잘 못 보시는 듯한데.”

자환이 로버트에게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입도 눈도 웃는 모양을 하고 있으나 기묘하게도 분위기는 서늘했다. 그러나 그 분위기도 일언에게 한걸음 다가서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일언 씨.”
“아, 예. 로버트의 지인분이시라고요.”

일언은 자환이 내민 손을 덥석 맞잡았다. 경계심 하나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이 해맑아 보이기까지 했다.

예술품.

로버트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자환은 일언을 가리켜 그리 말한 것이었다. 아름답지만 천박하고 예쁘지만 경박한 인간 정일언을.

첫만남이라 껍데기에 홀린 건 아닐까.

로버트는 자환이 과대평가했다고 생각했다가, 그가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보다 더 대단한 사업가라는 점을 떠올렸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그의 눈에는 보였나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로버트에게는 아주 못마땅하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자환은 달랐다. 흥미진진한 눈빛을 감추지 않은 자환은, 악수를 위해 잡은일언의 손을 놓지 않고 더욱 끌어당겼다. 어어 하면서도 끌려온 일언이 거의 자환의 품에 들어갈 것처럼 가까워졌다.

마지막에 멈칫 하며 발을 멈춘 일언 덕에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까지만 가까워진 상태에서, 자환이 조용히 속삭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님께.”

아버님. 짧은 단어로도 일언은 순식간에 아주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가 결말까지 짐작해냈다.

조 회장이 그 대신 호텔에 머무른 것으로 만들라던 장남이 바로 눈앞의 ‘자환’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인지 자신을 보고 싶어 한 듯했다.

흠칫한 일언이 몸을 뒤로 뺐다. 순간이나마 당황했던 표정은 얼른 정리한 후였다. 자환은 여태 쥐고 있던 손을 느리게 놓으며 일언의 손등을 슬쩍 문질렀다.

“아버님이 직접 홍콩으로 날아오실만 하군요.”
“하하, 농담도.”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어버린 일언이 잡힌 손을 스윽 뺐다. 의외로 자환은 쉽게 놓아주었다.

뜻밖의 손님이 방문한 것은 이때였다.

“잠시 협조 부탁드립니다.”

초대 없이 요트에 올라탄 이들의 선두에는 계원이 서있었다. 팀원의 손에서 체포 영장을 건네 받아 펼치는 계원에게, 일언이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염정공서의 등장으로 분위기를 망쳤다는 생각보다, 자환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게 차라리 반가웠다.

“이거 참, 수사관님, 이렇게 자꾸 쫓아다니시면 곤란합니다.”

입꼬리만 미약하게 들어올린 계원이 일언의 얼굴을 빤히 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둘만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바보같은 일인데도.

일언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계원은 오늘의 목표를 찾았다.

“증검교 씨, 함께 가시죠.”

계원이 일언을 지나 ‘증 형’에게 체포 영장을 내밀었다.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놀란 증검교가 들고 있던 와인까지 주르륵 쏟았다.

“증 형이요?”

일언의 눈까지 동그래졌다. 놀라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몰랐던 모양이었다. 홱 돌아보며 그 말이 진짜냐고 확인하는 몸짓에서는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계원은 일언의 표정에서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게 되었음을 놀라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일언에 대해 파악하는 일이 쉬워졌다. 일언이 모두에게 물러진 것인지, 자신이 일언에게만 예민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흥미로운 파티네요.”

때를 놓치지 않은 자환이 일언에게 속삭였다. 한 팔로 일언의 어깨를 감아 당긴 자세였다.

“조 사장님이시군요.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계원이 먼저 알아보았다는 티를 냈다. 자환이 가볍게 눈썹을 움직였지만 대꾸하지는 않았다.

로버트는 ‘조 사장’이 자환을 가리키는 말인 줄 몰랐던 듯했다. 자환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의 정체를 자신보다 염정공서가 먼저 알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정일언조차 아는 듯하니 더더욱 놀랐다.

티를 내면 곤란하니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잘게 떨리는 뺨이나 정신없이 꿈틀거리는 손가락에서 동요가 드러났다.

일언과 로버트는 유대 관계가 그리 강력하지 못하다.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한 계원이 자환을 한번 더 찔러보았다.

“중국에서 여기까지 넘어오시려면 힘드셨을 텐데요.”

무시로만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자환이 계원을 마주보았다. 웃는 낯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미간에서 희미한 짜증이 읽혔다.

“힘들 게 있겠습니까. 마카오에서 넘어온 건데요. 이 부분은 변호사를 통해 이미 소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변호사 분이 일을 참 잘 하셨더라고요. 아주, 깔끔하게.”

계원의 말에 뼈가 있었다. 변호사가 행적을 덮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여기서 끝내지 않고 파헤칠 것이다. 숨은 뜻이 명확했다.

자환은 자신의 눈앞에서 적대적으로 나오는 이를 보고도 넘길 만큼 마음이 넓지 않았다.

“염정공서 분이시라고요.”

자환이 계원을 똑바로 보았다. 지나치게 잘난 얼굴부터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몸, 단정하지만 명품은 아닌 차림까지 눈에 담았다.

보통 사람에게는 불편함을 넘어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유계원’에게서는 어려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름이…?”
“유계원입니다.”
“…그래요, 유계원.”

자환이 여전히 계원과 눈을 마주한 채로 들고 있던 와인잔을 돌렸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와인에서 그을린 냄새와 아몬드 향기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기억해두죠.”

악의적인 단어는 전혀 없는데도 오싹한 울림이었다.

모르면 평범하게만 들리는 말을 빠르게 알아들은 사람은 일언이었다.

기억되면 안 된다. 사람의 목숨을 개미 목숨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다. 차라리 기억되지 않고 언제 보든 처음 보는 낯선 이로 흘러가는 게 낫지, ‘기억된’ 사람은 거슬리는 순간 바로 처리될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손가락으로 개미를 눌러 죽이는 것과 사람 치우는 게 비슷한 난이도의 일이었다.

계원이 반응하기 전에, 일언이 앞으로 나섰다. 자환의 시선을 강제로 잡아끌기 위해서였다.

경쾌한 걸음과 가벼운 말투는 평소의 정일언과 똑같았다. 그러나 일언이 속으로 긴장했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계원이 유일했다.

“이거 서운합니다. 저런 사람보다 저를 기억해 주시죠.”

일언이 한쪽 손을 자환의 팔에 얹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게 하기에는 다소 성급한 터치였으나 자환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일언의 다른 쪽 팔이 계원에게 붙잡혔다. 그의 예민한 촉에도 위험이 걸렸다. 하지만 거기에 일언이 나설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힐끔 돌아본 일언이 ‘끼어들지 마.’ 분위기로 말했다. 계원은 같이 눈빛으로 나무라는 대신 말로 했다.

“정일언 씨. 그 사람이 누구인 줄 알고 그럽니까.”

한위 그룹은 아주 수상쩍었다. 시쳇말로 뒤가 구렸다.

몇 대를 이어져 내려오던 한 그룹이, 몇 번의 헛발질로 인해 현 회장에게 거의 넘어갔다. 그 헛발질을 현 회장인 ‘조 회장’이 밑그림부터 차곡차곡 그렸다는 말이 있었다. 기업명까지 한위로 바뀌었는데도 이전 관계자들은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런 조 회장의 후계자로 일컬어지는 조 사장, 일명 ‘자환’은 더욱 음습한 소문이 있었다. 뭐가 됐든 일단 남의 손에서 빼앗아오는 조 회장과는 달리 가족을 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본래 삼남이던 자환이 현재 장남이 된 것은 두 형이 ‘사고사’ 했기 때문인데, 과연 사고사가 맞는 건가 하는 얘기도 나왔다. 자환의 동생도 죽었는데, 매번 사고사라고 밀어붙이기에는 지나치게 수상했다.

하지만 계원은 정보를 접하면서도 깊이 팔 수가 없었다.

염정공서는 부패 수사를 위한 기관이다. 당장 파헤쳐야 할 일이 산적했는데 타국 사람인 자환의 살인 혐의를 길게 물고 늘어질 수도, 수사할 여건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제 발로 위험에 뛰어들려는 일언을 말리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꾹. 일언의 팔을 붙든 계원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일언이 팔을 뿌리치려 해봤지만 단단히 얽힌 손가락은 강력했다.

‘내 말을 들어.’ 계원이 눈으로 말했다. 일언의 눈치라면 자신의 뜻을 알아들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언은 계원의 뜻을 외면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대단하신 분인 것 같은데, 더 잘 됐잖습니까.”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이었다.

“정일언 씨.”
“그쪽 초대한 적 없습니다. 멋대로 오셨으면 해야 할 일이나 하고 빨리 가시죠.”
“…하.”

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일언이 언제 제 말을 잘 들어준 적이 있었던가. 기대를 하는 게 사치였다. 그 와중에도 일언이 자신을 가리킬 때 호칭도 이름도 죄 생략하는 게 일부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거기서 한술 더 뜬 일언이, 염정공서 사람들에게 붙들려 있는 증 형에게 말을 던졌다.

“그러게 형님, 왜 말도 없이 일을 벌이고 그랬어요? 변호사 붙여줄 테니까 말 잘 하세요, 나랑은 상관 없다고.”
“나도 잘 해보려고 그런 거야!”
“그래서요? 결과가 이 꼴인데?”

일언이 양 팔을 펼쳐 어깨를 으쓱 했다.

“너…!”

와락 달려들려던 증검교가 덜컥 멈췄다. 양쪽에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있는 이들에게 붙들려 움직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얄밉게 웃은 일언이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뭐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증검교, 그래봤자 이번 일은 자신과 전혀 관계 없다고 발을 빼는 일언, 연이어 닥친 상황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혼란스럽게 눈을 굴리는 로버트까지.

소란과 혼란 속에서 자환 역시 일언의 의도를 눈치 챘다. 조금 전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던 수사관이 무사히 빠져나간 것이다. 그가 일언을 말리는 모습이나 일언이 대놓고 막아서던 모습을 보면 제법 재미있는 뒷얘기가 숨어있을 것 같았다.

몸을 숙인 자환이 일언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인이기만 한 줄 알았더니 영리하기까지.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런. 조 사장님의 흥미를 끌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요.”
“내 흥미가 필요 없다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거짓말을 아주 잘 하시네요.”

일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하하! 자환에게서 시원스러운 웃음이 터졌다. 조금 웃음이 잦아들면 ‘거짓말, 거짓말이라. 내가 거짓말….’ 하며 곱씹다가 또 웃었다.

당황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진정한 자환이 일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렇게 말하고도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일 겁니다.”

직설적인 협박은 우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족속답지 않게 노골적인 언사였다.

“내 눈앞에서 당당하게 사람을 빼돌린 것까지 포함하면, 살면서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군요.”

게다가 자환은 호감 역시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일언이 사르르 녹아내릴 듯 웃었다. 속내를 들켰다고 벌벌 떨던 이들과는 아주 달랐다.

“그럼 혼내실 건가요?”
“제가 미인에게는 약한 편이라.”

자환이 반쯤 마신 와인잔을 일언에게 내밀었다. 가만히 쳐다보면서도 일언은 받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화내시면 무서운데요.”

간접적인 거절이었다.

거절당한 것조차 처음이다. 자환이 이제는 대놓고 치근덕거렸다. 그는 생애를 통틀어 ‘처음’을 이렇게 많이 겪게 해주는 상대가 처음이었다.

“이제 와서 몸을 사리려는 겁니까? 아직 기억이 다 안 지워졌는데? 아까 그 사람, 이름이….”

자환은 일언이 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까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일언이 눈을 살짝 치떴다.

“저한테만 불리한 얘기네요. 회장님께서 아드님께 회초리를 들 일도 없으실 테니 들켜도 저만 혼날 텐데요.”
“그렇지는 않을 걸요.”

자환이 일언의 손을 잡아 강제로 제 잔을 쥐여주었다. 테이블에서 마시던 것과 같은 와인을 찾아와 더 따르기까지 했다.

“회장님이 저를 별로 안 좋아하셔서.”

일언의 어깨가 움찔했다. 바짝 긴장했다는 티가 났다.
자환은 이제 웃음기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싱글벙글했다.

“이걸 단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또 처음인데.”

그렇게 대놓고 힌트를 주는데 못 알아듣는 쪽이 바보 아닌가.

일언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자환은 조 회장의 총애를 얻지 못해도 후계자가 되었으며, 여전히 조 회장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가 굳건하다. 그가 조 회장의 총애에 기대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 동시에, 조 회장이 못마땅해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고 형제들을 몰아낼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일언이 조 회장을 방패로 내세우는 전략이 안 먹힐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자환은 자신이 한 마디만 해도 열 마디를 알아듣는 영리한 상대를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미모만 해도 마음에 꼭 들었는데 지성까지 갖췄다니, 건방진 행동도 너그럽게 용납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아끼는 이유를 알겠다. 그리고 자신의 취향이 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것도 알겠다.

“보통은, 회장님과 사이가 안 좋다고 하면 경계가 풀리더라고요? 더 멍청한 놈들 중에는 아버지에게 줄을 대려고 나를 무시하려는 놈도 있었죠.”

자환이 농담처럼 툭 던졌다.

일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말뜻을 파악했다.

바보같은 짓이다. 아마 그들은 자환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어쩌면 유계원은 이런 부분을 먼저 알고 경고하려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

취조실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증검교는 변호사가 올 때까지 입을 열지 않겠다고 했지만, 제법 단호하던 말투와 달리 행동이 초조해 보였다.

일언과 협업할 때에야 일언이 부리는 수작의 혜택을 공유했지, 혼자 나섰다가 염정공서에 걸리니 뾰족한 수가 없었다. 변호사를 보내주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변호사가 자신을 위해 제대로 일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다리를 떠는 그는 불안정한 부분을 다른 이들이 이용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변호사는 언제 오는 거야?”

막힌 장소에서 불만을 터뜨려 봤자 변호사가 더 빨리 도착할 리는 없었다.

담배 연기가 뿌옇게 공간을 채우다 못해 재떨이를 한번 갈고, 커피를 내온 잔이 세 개 나란히 쌓일 때쯤, 변호사보다 먼저 계원이 들어왔다.

계원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나중에 꼬투리가 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은 채, 표정으로 대신 말했다.

당신은 이제 그리 유용한 패가 아니라는 사실. 더 크고 훌륭한 패를 가득 쥔 정일언은 언제 당신을 버려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 혼자 가는 게 억울하다면 최대한 다른 이를 많이 끌어들이도록 증언하라는 부분까지.

“변호사는?”
“글쎄요. 아직 안 왔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는 정일언 씨의 사람이겠죠?”
“그게… 그게 무슨 뜻이지?”
“당신의 증언이 정일언 씨의 귀에 들어갈 거라는 뜻입니다.”

계원은 일언이 증검교의 증언을 제멋대로 이용해먹을 거라거나 오히려 증검교에게 다른 죄까지 뒤집어씌울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증검교의 불안은 스스로 구석에 몰리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달칵. 녹음기가 돌아갔다. 한동안 한숨만 푹푹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던 증검교가, 결국 입을 뗐다.

“내가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사업은 신뢰니까. 그렇게 말했던 사람이 정일언이라는 게 우습긴 한데….”

허, 한숨이 섞였다가, 목소리가 줄어들었다가 다시 커졌다가,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히죽거리고 때로는 나름의 영광에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계원은 묵묵히 그의 목소리를 담았다. 그가 정일언 모르게 일을 시작한 이유는 조만간 갈라서게 될 것 같아서이고, 갈라서는 이유는 정일언과 사이가 소원해졌기 때문이며, 소원해진 이유는 딱 한 번 정일언을 배신해서라고.

“배신이라고요?”

계원이 은근한 미소로 되물었다. 사기꾼 사이에 대단한 의리나 우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돈으로 시작된 우정이라면 돈으로 파투나는 것이 당연했다. 배신 같은 단어를 쓸 정도로 거창한 일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담배 한 대를 더 청한 증검교가 하는 말은 계원의 예상과 달랐다. 불 붙인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그는 생각보다 쉽게 털어놓았다.

“투자자들 중에는 취미가 독특한 분도 있거든. 하룻밤과 투자금을 맞바꿀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니겠나.”

계원의 입가에 걸려 있던 은은한 미소가 순간 사라졌다.

일언이 필요에 따라 몸을 판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게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전혀 달랐다.

“내 주식만 해도 몇 번을 담보로 잡혔는데, 닳지도 않는 몸뚱이 정도면 나쁠 것도 없지. 나이 먹어도 제법 예쁘장해서 팔리는 걸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지.”

증검교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각이 없었다. 사기를 치면서도 투자라고 생각했던 것과 똑같았다.

그가 후욱 뱉어내는 연기로 인해 공기가 뿌얘졌다.
아니, 어쩌면 분노가 잠시 눈앞을 흐린 것일 수도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계원의 턱에 근육이 섰다.

“…그럼, 전주는?”

숨을 고르고 물어본 것인데도 조금 말이 빠르게 나왔다. 다행히도 증검교는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했는지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거기까지는 모르지. 나는 투자자 몇몇만 아는 거고, 그 대단하신 쩐주님들은 코빼기도 못 봤어. 정일언이 혼자 독차지하고는 하나도 안 나눠줬으니까.”

계원이 점점 사그라드는 불똥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의 눈에 어떤 감정이 비치는지 모르는 채로 상대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계원일언 덕화조위 유덕화양조위 화양비
골드핑거 금수지
2024.04.23 20: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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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담을 예측할수가 없다 삼국지 다 아는데도 자환이 어떻게 나올지 또 계원이도 어떻게 할지 일언이가 주도적으로 뭔가 할 위치도 아니고
[Code: d51b]
2024.04.23 21:2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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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다 꺄항 선개추 경건하게올려욧 헉헉
[Code: a291]
2024.04.23 22: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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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오옷!!!!!! 기대하던대로 조회장 아들내미 등장!!!!!ㅠㅠㅠㅠㅠ 역시 아빠랑 취향 같아서 미인에 환장하는구만ㅌㅌㅌㅌㅌ 노골적으로 직진해서 일언이 당황해하는거 꼴린다ㅌㅌㅌㅌ 계원이 정형 잡으러 온 와중에도 자환이 시커먼 속내 알아채고 은근 감싸주려는거 넘좋다ㅠㅠㅠㅠㅠㅠ
[Code: d0e0]
2024.04.24 00: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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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일언 미친거아니냐 존재자체가 개꼴이야 예쁜데 영악해
[Code: 9a37]
2024.04.24 00: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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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언이 이제 여기저기 끼여서 구르게생겼네🤭 ㅋㅋㅋㅋ 근데 이제 일언이가 타의로 몸 팔던거 들어서 계원이 화나면 어케되는거죠? 아 흥미진진하다 센세ㅠㅠㅠㅠ
[Code: bd3c]
2024.04.24 00: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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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형 한자 이름 찾아보니까 증검교曾剑桥 라고 나오더라...!(소곤소곤)
[Code: bd3c]
2024.04.24 01: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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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ㅆ 헉 코맙읍니다 코맙읍니다 부족한 검색실력 탓에ㅠㅠㅠㅠㅠㅠ 이름 수정해둘게오.......!
[Code: 5cc0]
2024.04.26 00: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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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싸움 눈치싸움 하는거 미쳐따 ㅠㅜㅜ 조회장 가족 콩가루력(?)무슨일이야 진짜 조회장이 최종빌런인줄 알았는데 자환은 뭐이건 형제고뭐고 없냐고 북정은이냐고 하 근데 취향도 유전이라는게 왜케 존꼴이냩ㅌㅌㅌㅌㅌㅌㅌㅌ 정일언 예쁜게 죄다 예쁜데다가 확실히 돈과권력 앞에서 쫄지도않고 영리하고 영악하게 구는게 정일언의 재능이란.. 다크다크하네 🤦‍♀️🤦‍♀️🤦‍♀️ 한마디 하면 착착 알아들어서 말이 통하는게 재능이면서 동시에 본인도 차라리 잊혀지고 피해갈수 있는 존재가 되진 못하는게 좀 안됐기도 퓨퓨 근데 일부러 유계원 이름도 안부르고 일케 위험인물에게서 보호하려고 하는게 ㅠㅜㅜㅜㅜ 일언같이 계산적인 인물이라도 계산적이 되질 못하고 일단 이사람을 보호하고 보는게 찐사랑 아니냐구 ㅜㅜ 근데 유계원은 일언이 일케 허겁지겁 나서서 자길 보호하려고 하는데 ㅋㅋㄴ이런상황에서도 당황하는거 잘 파악하게 됐다고 만족스러워하고있궄ㅋㅋㅋ 이미 자신들만의 세계가 있어버렷 💦💦💦💦💦
[Code: 2401]
2024.04.26 00: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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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마지막에 증검교가 유계원한테 일언을 팔아넘긴 이야기 진술하는거는 그자리에서 죽빵 맞을뻔한거 아니냐 하 닳지도 않는 몸뚱이라 팔아넘겼다니 적이요 그게 본인거냐고요 하 정의구현 해줘야하는데 팀장님 빨리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세요 ㅜㅜㅜ그리고 유계원이 조회장이랑 자환한테 어떻게 접근할지도 너무 궁금하다 하 정일언은 엮여도 이런 인간한테 엮이냐....는 정일언도 사람목숨 쉽게다루는 스케일의 사기꾼이긴 하지만 ㅜㅜㅋㅋㅋㅋㅋ 센세가 붕키을 혐생에서 구해주교 있다는걸 센세는 알까 ㅠㅜㅜ하아 유계원이랑 정일언의 긴장감 팽팽하면서도 간질간질한 관계 너무 조와 본편의 목마름을 해소해준다구 ㅠㅜㅜ
[Code: 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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