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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3 20:03

※ 현대펄럭패치 주의, 소설체 주의 및 사망소재, 이성애 결혼 및 2세 소재 등 주의
XX= 죽은




1.

 

온천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과거의 영광이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온천 사우나를 지나 아파트 단지가 나오고, 단지의 무료한 오후를 책임지는 백화점을 지나면 곧 동래 사거리가 나온다. 지상으로 나온 오래된 도시철도 역사는 바깥에서 보면 꼭 노란 물탱크를 떠오르게 했는데, 교차하는 육차선로와 팔차선로 못지않게 오 분에 한 번씩 수많은 사람들을 토해내는 게 물이 아니라 사람 탱크 같았다.

 

노란 역사 4번 출구와 딱 붙어있는 황금 역세권 꼬마빌딩에는 2층부터 5층까지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에 안과까지 들어차 있었는데, 늘 그렇듯 1층은 약국이 떡하니 있었다. 서울이었으면 온누리 약국 체인이 들어섰을 곳이나 한강의 콧바람이 이곳 남해까지 이르기에는 끗발이 조금 딸렸다. 부산은 그런 동네다. 스타벅스보다 토박이 브랜드 커피 체인점이 더 많고, 생일 케이크를 산다 하면 파리바게뜨 따위보다 이흥용 제과점에 가는 것이 부산 사람의 습성이다. 그러니 5층 중에 4층이 병원인 이 자리에 온누리 약국보다 남포동에서 시작한 남룡생당이 들어온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게다.

 

동래구 남룡생당 2호점은 외동아들을 위해 남포동 남 선생께서 임대 자리부터 알아본 탓에 이미 한차례 동래 공인중개사들 입을 오르내렸다. 길목 좋고 입지 좋은 곳을 고르고 고른 끝에 수맥에 풍수지리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들어선 남룡생당 2호점이 개업하던 날, 남포동 남 선생의 오랜 지인부터 골프 클럽에서 얼굴만 아는 유지까지 앞다퉈 오 만원 짜리 화환으로 인맥을 과시하기 바빴다. 덕분에 좁은 동래 골목의 울퉁불퉁한 인도가 화환으로 가득 차서 이틀 동안은 뭇 구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남포동 남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옛스러운 현판이 아닌, 온누리 맹키로 아기자기 현란한 간판이 올라가던걸 보며 손수 떡을 돌리던 젊은 약사는 초장부터 밉보이는 대신 직접 그 무용한 꽃 무더기를 치우기로 했다. 약사 선생이 땀을 뻘뻘 흘리며 화환 무더기를 빌딩 계단 1층 아래의 비스듬한 여윳공간에 쌓아두기까지 무슨 구의원에 시의원에 어느 병원 원장에 교수에 화려한 직함들을 다 알아보기도 어려웠는데, 노인네들의 인맥 자랑이 정작 귀한 자식에게는 가운 팔 걷어붙이고 힘쓸 짐 덩어리 밖에 안되었다. 그래서 남룡생당 2호점은 각 층 병원 식구들이 한 아름 시루떡을 얻어먹은 후로도 사흘이나 지나서야 처음으로 케토톱 파스 두 포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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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 화환을 전부 짐짝처럼 포개놓은 약사가 그 화환 만큼은 치우질 않았기에 2층 우리들 내과에서 근무하는 김 조무사는 오래도록 출근길에 그 화환과 마주했다. 그 마지막 화환은 꼭 오래전 여중 시절에 배웠던 서양의 슬픈 소설 속 마지막 이파리 그림처럼 그 자리에 붙박이로 남아 꽂아놓은 생화가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남룡생당 2호점 자동문 옆에서 손님들을 반겼는데, 덕분에 김 조무사는 어디선가 동준이란 이름이 들려오면 반갑게 아는 척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

 

새로 온 약사님이 얼마나 얌전하니 어여쁜지는 우리들 내과 단골 명단 1번인 오 씨 할머니가 꼬마빌딩 층층을 돌며 수다를 떨어댄 덕에 개업 이주일 만에 소문이 싹 돌았다. 비싼 차를 탈 만도 하건만 검소하니 국산 차를 타고 야구르트 아주머니 한테도 깍듯이 인사를 한다 하더라. 백반집에 밥을 시켜 먹으면 그릇을 꼭 다 헹구어서 문밖에 두는 게 여간 야무지질 않다. 곱상하고 하얀 얼굴에 새카만 머리가 꼭 얼마 전에 벡스코에서 디너쇼를 한 탤런트같이 잘생겼다. 오 씨 할머니의 호들갑이야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꼬마빌딩의 조무사부터 각 병원의 단골들까지 그의 말을 반쯤 흘리듯 받아주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십중팔구는 배가 나오거나, 안경을 쓰거나 바코드 머리를 한 늙은 의사들이 가득한 동래 꼬마빌딩에 홀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카만 머리를 한 훤칠한 남룡생당 외동아들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아니 글쎄, 1층 약사 선생 있잖아요. 어린 아들래미가 있더라고."

"결혼을 했단 말이가."

 

관심은 곧 가십이 된다. 한자 단어에서 시작된 한국말과 로마 단어에서 시작된 영어가 서로 모양이 닮은 것은 관심이 가는 곳에는 가십이 생기는 이치를 일찍이 알았던 옛날 사람들의 장난이 아닐까. 동래 꼬마빌딩의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남 씨 집안의 약사님에게 쏠리니 소문이 탄생하지 않을 리 없었다. 특히나 딱 결혼할 나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하던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먼저 소문이 탄생하였다. 그 왜 유치원에서 아들 집에다 대려다 준다 아이가. 그 왜 럭키 동래 유치원. 그래. 그 차가 5시 되면 뭔 머스마 하나를 요요 요 앞에 내려준다 안카나. 나는 처음에는 뭔 놈 유치원이 얼라를 길바닥에 내려놓나 했는데 그 아가 요 1층으로 쏙 하고 들어가데. 그 집 아들인기라. 소문의 근원지인 오 씨 할머니가 김 조무사가 건네준 뜨끈한 쌍화차의 알루미늄 뚜껑을 뜯으며 말하니 옆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아이고, 우리 딸래미로 확 낚아채려고 했더니.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면 될 거 아이가?"

 

이런데는 또 정 씨 아저씨가 빠지질 않았다. 몇 년 전에 부도를 맞은 유명 대기업의 임원까지 달았다고 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는 정 씨는 노인이라 하기에는 동래 꼬마빌딩에서 끗발이 모자랐고 아저씨라고 해 주기에는 아저씨라는 단어에 미안하게 나이를 먹었다. , 요즘 말로는 할저씨라 한답디다. 중학교 3학년, 1학년 아들과 딸을 키우는 박 조무사는 아들들에게 배운 신조어를 알려줄 기회가 있어 신이 난 듯 정 씨에게 일렀는데, 정작 그 말을 들은 정 씨는 영 마뜩잖아했다. 정년을 꽉꽉 채워 협력사라는 곳에서 전무님 소리까지 듣고 퇴직을 한 주제에, 새치 샴푸가 없으면 집 밖엘 나오지 못하는 그에게도 할-로 시작하는 표현이 불쾌하였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정 씨 아저씨는 옛날에는 삼성이니 엘지니 보다 잘 나갔다던 유명 대기업 상무 자리는 오지랖과 넉살로 얻은 것이라기도 한 것인지, 자기가 손수 확인해 보겠다며 기어이 소화제 하나 묵지 뭐-, 하며 남룡생당 약사 선생에게 확인을 하러 뛰쳐나갔다. 2층 우리들 내과 조무사 선생들하고 한참 오후 수다를 떨 시간이었다. 정 씨 아저씨는 집에서 왜 소일거리 하지 않으시고 뭔 병원을 요 앞 백화점보다 더 자주 다닌대요? 김 조무사의 뒷담이 딸랑거리는 손님 종의 잔상을 이었다.

 

정씨가 흡사 패잔병의 장수처럼 돌아온 것은 오 씨 할머니가 뜯어놓은 쌍화차를 절반 정도 마셨을 때였다. 30년 전 중공업 현장을 호령하던 정 씨는 그 참하다던 남룡생당 외아들에게 뭔 말을 듣고 온 것인지, 나가던 기세가 아깝게 터덜터덜 아들이 사줬다던 비싼 신발을 직직 끌며 돌아온다. 3층 소아과에서 내려온 애기엄마와 5살 해바라기반 친구에게는 무뚝뚝한 얼굴로 텐텐을 쥐여주며 먹기 싫어도 약 잘 챙겨 먹으라며 약봉지에 잔정을 넣어주던 약사 선생이 정 씨 아저씨에게는 쌀쌀맞기가 이를 데 없었던 모양이다. 김 조무사가 뜨끈하게 댑혀놓은 쌍화탕을 손수 까서 건네주자 받아마시는 주름진 손이 또 서글펐다.

 

"결혼 안 했단다."

"그럼 얼라는, 내 잘못 봤단 말이가."

"아아니, 지 아들 아니라 안카요."

 

그런거 왜 묻냐 카든데, 딸 있는 엄마가 직접 가 물어 보소. 풀죽은 정 씨가 우리들 내과의 개업부터 함께 한 쇠가죽 소파 에서 등을 돌려 앉기 무섭게, 띵동- 하는 소리가 경쾌히 울리더니 원장 선생님 방에서 박 조무사가 정 씨의 이름을 부른다. 정필규 선생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에구구. 무릎을 짚고 일어나 팔자걸음으로 어중어중 원장실로 향하는 정 씨 뒤에서 오 씨 할머니가 얘기한다. 요즘은 이걸 다 그 머시깽이고, 키오스크라 안카나. 그거로 다 처리한다 카드라. 늙으면 서러워 살겠나. 내 죽을 때 까지는 우리 간호 선생님이 등록해주이소.

 

 

 

3.

 

우리들 내과는 화, 목요일은 8시까지 야간진료를 보고 월수금은 저녁 6시 반 까지 진료를 봤다. 그러니 김 조무사와 박 조무사는 소문의 그 남룡생당의 증손자, 혹은 수수께끼의 얼라를 볼 기회가 없었다. 애기 하나 보자고 하던 일을 멈추고 약국으로 내려가기에는 명분이 없었고, 서울대를 졸업하셨다던 우리들 내과의 원장 선생님은 워낙 짠돌이라 성업하는 내과의 주사부터 접수까지 조무사 두 명으로 해결하려고 한 통에 여유시간조차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출출한데 찐빵이나 하나씩 먹고 합시다. 바람은 시립고 찹고 축축하니 비가 내려 꼬마빌딩 단골들조차 찾질 않는, 일 년에 며칠 없는 한산한 날이었다. 웬일로 원장 선생님이 카드를 넘겨 준 덕에 김 조무사와 박 조무사는 원장 선생님이 좋아한다는 동래시장 만둣집에서 찐빵을 한 아름 사 오는 길이었다. 찐빵이 머꼬 찐빵이. 하여간 우리 원장 선생님 짠 건 알아줘야 한다. 뜨끈뜨끈한 검은 봉다리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조금이라도 시간을 죽이고자 경보보다 천천히 걷기가 몸에 좋다던데-. 따위의 속설도 봉지에 담아 주고 있는 사이 꼬마빌딩의 대가리가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지훈이 내일 봐요~. 선생님께 인사!"

 

두분 조무사가 동래 꼬마빌딩 앞에서 노란색 승합차가 멈추는 것을 본 것은 꼬마빌딩을 백 보 쯤 남겼을 때였다. 동래 럭키 유치원. 밝은 노란색 차에 무지개색 페인트로 쓰인 글씨에 김 조무사가 저거-, 하고 입을 떼는 사이 경쾌한 하원 인사와 함께 승합차에서 남자아이 하나가 쏙 하고 내린다 싶더니 남룡생당의 유리문이 딸랑하며 열렸다. 노란 승합차에서 내린 어린 남자아이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꼬마빌딩을 향해 달음박질을 하자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약사 선생이 황급히 뛰어나오며 아이를 받아든다. 윤기가 차르르한 머리가 벡스코에서 디너쇼를 한 오 씨 할머니가 좋아한다는 트로트 가수만큼 시커멓다던 그 약사 선생이었다.

 

그때 박 조무사는 김 조무사님이 평소에도 그렇게 행동이 빨랐는지 잠시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뜨끈한 찐빵 봉다리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간 김 조무사님은 남룡생당 2호점의 손님 종 딸랑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기 전에 호기롭게 문을 열어젖힌다. 평소와 같이 침착한 표정으로 카운터를 보고 있는 약사 선생이 김 조무사와 뒤늦게 따라온 박 조무사를 바라본다. 박 조무사는 첫눈에 생각한다. 잘생겼다 잘생겼다 카더니, 눈매가 너무 날카로운데.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희 아시나 몰라? 이 층에 우리들 내과에서 왔어요. 우리 원장님이 찐빵을 사주셨는데 좀 드셔보라고."

"찐빵!"

 

어느샌가 박 조무사 뒤로 조그만 인영이 달라붙자 박 조무사가 새된 가슴을 붙잡고 큰소리를 겨우 삼킨다. 약간 까무잡잡하고, 나이는 만 4세에서 5세 정도 되었을 밝은 남자아이였다. 교정 젓가락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지 왼손에는 뽀로로 젓가락을 들고 있었는데, 약사 선생은 익숙한지 나무라지도 않았다. 박 조무사가 찐빵을 꺼내 받아 온 종이컵에 담아 주자 받는 손이 꽤 야무지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하며 당황한 약사 선생의 곤란함이 뒤따른다.

 

"지훈아,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합니다."

"어휴, 아드님이 잘생겼네. 엄마를 닮았나 봐."

"아니,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아빠는 안 잘생겼어?"

 

까르르 뒤따르는 웃음소리가 약국을 덮었다. 찐빵을 받아 든 아이는 뜨거운 김에 호호 거리며 채 한 입을 베어 물지 못하고 있었는데, 카운터에서 나온 약사 선생은 조무사님들께 음료수라도 준비해 둘 걸 그랬다며 박카스 두 병을 건네고는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아 몸소 찐빵을 갈라 속 까지 후후 불어준다. 지훈이는 이렇게 멋있는 아빠를 둬서 좋겠다~. 누구의 목소린지 모를 목소리에 아이가 고개를 들어 김 조무사와 박 조무사를 올려다본다.

 

"훈이 삼촌 아빠 아닌데."

 

새카맣고 진한 눈썹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저들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맹랑했다. 약사 선생이 아이를 안아 들더니 옅은 미소를 띄고 대신 답한다. 친구 아들입니다. 그 미소가 어딘가 슬픈 데가 있더라. 박 조무사는 훗날 그날을 회상하며 덧붙였다. 마치 무언가를 짐작했다는 듯한 언사였으나 사람 사람 마다의 뒷사정은 모르는, 한 낮의 수다 주제로 약사의 사정을 짐작할 뿐인 완벽한 타인의 어림짐작 치고는 톤이 과했다.

 

 

 

4.

 

동래 롯데캐슬 정문 입구로 들어가는 검은 K7의 번호판이 입구 게이트에 찍히자 바가 열린다. 방문 차량입니다. 시뻘건 글씨로 뜬 전광판임에도 정문 경비소의 수위 아저씨는 K7을 막지 않았다. 익숙하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싶더니 105동 지하 주차장까지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흠집 하나 없는 검은 차량은 온통 어린이집에서나 틀 법한 노래로 가득 차 있었는데, 간간히 어린아이의 높은 목소리가 음악 사이에 들어가 있었으나 바깥에서는 그런 사정을 알 리 만무했다.

 

105동 지하 자동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노년의 여성을 확인하자 조수석의 창문이 스스럼없이 내려갔다. 할머니! 아기자기한 음률 사이로 아이의 높은 소리가 반가운 얼굴을 부르자 할머니라 불린 여성은 한달음에 K7까지 뛰어 갈 기세였으나,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새 K7은 빈 자리를 찾아 한 번에 후면주차를 마무리한다. 운전석에서 빠져나온 훈이 조수석의 지훈을 내려주고, 노란색 유치원 가방을 어깨에 둘러 매고는 지훈의 손을 꼭 잡은 채 중년여성에게 향했다.

 

"훈아, 맨날 고마워서 어떡하노."

"별거 아닙니다. 어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내야 멀쩡하지. 아저씨가 문제다."

"이거, 별거 아닌데 아저씨랑 같이 드세요. 종합 영양제입니다."

"니는 왜 맨날 빈손으로 안 오고 이런걸 다 챙겨주노. 아이고 고맙다. 저녁은 묵었나."

"집에 가서 먹으려구요."

"밥 굶고 다니면 쓰나. 병어조림 했다. 묵고 가라."

 

그때 훈은 오래지 않은 어떤 과거를 떠올렸다. 훈이 니 오늘 끝나고 우리 집 안 올라나. 내 고등어조림 기가 막히게 한다 아이가. 모양이 쬐끔 이상할 수는 있는데 우리 최 여사한테 배운 솜씨라 맛은 보장한다. 치 어제 들은 것만 같은 생생한 목소리에 훈이 잠시 추억에 웃었다가, 짧은 회상을 밀물처럼 덮는 깊은 감정의 무게에 흔들려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겨우 붙들었다.

 

"삼촌 자고 가?"

 

훈이 감정을 붙드는 사이 할머니의 품에 안겨있던 지훈이 어느새 훈의 옆으로 다가와 훈의 손을 다시 잡아왔다. 작고, 말랑하고, 아이의 피부 이상으로 이 부드러움을 표현할 방법이 없는 순수한 살결과 뜨끈한 온기가 훈을 현실로 불러오는 동시에 또 다른 추억의 장을 열어준다. 지훈이 갓 세상의 공기를 마셨을 때, 의사의 손을 떠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온 지훈에게 훈이 처음으로 손가락을 내밀었을 때, 신생아의 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제 검지손가락을 세게 잡아 오던 어린 손아귀의 감각이 훈의 한켠에 남아있었는지 지금도 선연했다.

 

아가 니 닮아서 힘만 드럽게 세다.

지훈이라 지었다. 강 지훈.

예쁘네.

끝자를 내 돌림을 할까 하다가 아빠랑 아들이랑은 돌림자 쓰는 거 아니라 카대? 뭐 우리는 돌림자고 항렬이고 아무것도 없대서 그냥 내가 짓고 싶은 대로 지었다.

그렇다고 친구 이름을 자기 아들 이름에 붙이는 놈이 어딨노.

. 니 그러니까..., 지훈이 대부 아이가 대부. 갓 파더.

 

니 그 안 봤나. 알파치노 나오는 영화 있다. 아니 그 니가 그 말론 브란도 라는 게 아이고. 지훈이 니 조카아이가. 잘 봐도. 너의 일부를 받아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감당할 수 없는 감격으로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고 몸집을 키워가던 질투라는 추한 감정을 지우던 내게 그 말이 얼마나 기쁜 동시에 원망스러웠는지. 훈은 다시금 곱씹는다. 지훈의 손이 선사하는 온기를 느끼며 언젠가 남훈 2세가 태어나면 자기도 역시 남훈 2세의 대부를 할 거라며 품속의 지훈을 더 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네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네 무지의 잔인함에 한없이 추락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훈이가 할머니 말씀 잘 듣는다고 약속하면 자고 가지."

 

수 년이 지났음에도 너와 나, 지훈이 얽힌 추억은 언제나 갑자기 파도처럼 일상을 밀치고 들어와 기억의 모음을 온통 헤집어놓고는 했다. 남포동 남룡생당에 뛰어들듯 들어와 아버지를 옆에 두고 내게 내 아빠 된다며 자랑하던 모습과 남룡생당을 뛰어다니며 자기가 애기 아빠라며 손님 한명 한명에게 축하를 받던 바보 같은 모습. 부모님이랑 장모님 다음으로 니한테 제일 먼저 말하는 거라며 바보 같이 웃다가도, 소주 한 잔에 제수씨의 건강을 걱정하며 애기를 낳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그 속을 비춰 보이던 네 약한 어깨. 순간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동시에 상영되었지만, 훈은 이제 마음속으로 기억의 일부를 되새기면서도 의연히 당신의 흔적이 남은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다.

 

훈은 지훈의 손을 꼭 마주 잡고는 지훈의 할머니에게 눈으로 말 없이 약조한다. 늦지 않게 들어가겠다 약속하며 지훈을 앞세우자 105동 지하 스크린도어가 열린다. 아무렴, 세월이 주는 아픔의 풍화에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단장의 슬픔이 더욱 깊어질 이 무렵에 동준의 부모님께는 자신이 멀쩡히 살아 숨쉬는 모습이 그 자체로 고통일 수 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감히 품기엔 죄스러우나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부정적 감정. 어쩌면 누구보다 훈이 잘 알고 있을 이율배반의 감정이었다.

 

훈은 문뜩 핸드폰을 켜 달력 앱의 날짜를 확인한다. 돌아오는 토요일은 동준의 두 번째 기일이었다.

 

 

 

 

5.

 

"내 결혼한다!"

 

남룡생당의 손님 종은 부릅뜬 물고기의 눈이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절 처마 끝에서 수행자들에게 지나가는 바람을 알려주고 있어야 할 풍경이 남포동 남룡생당 유리문 끄트머리에 매달려 매일같이 끊이질 않는 객의 왕래를 알려주게 된 까닭은 그저 남포동 남 선생께서 우리 집에도 범어사의 영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열반에 드신 지 오래된 스님께서는 큰 시주를 턱턱 내놓는 할아버지의 청 아닌 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골동품을 감정한다는 TV쇼에 나가면 제 몸값을 제대로 받을 텐데. 그 연식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동그란 눈의 놋쇠 청어는 낚싯밥 대신 오늘도 딸랑이는 종소리로 오가는 손님들의 소식을 부지런히 물어다 나르는 중이었다.

 

다만 오늘 소식은 남룡생당의 하얀 약사 가운을 세 번째로 물려받은 이에게는 다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풍경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뒤따르는 우렁찬 목소리에 소화제를 찾던 중년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카드를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매대를 향해 곧장 걸어오던 강 경장이 허리를 숙여 은색 체크카드를 주워 주는 사이, 남 약사는 당혹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겨우 갈무리했다. 그 심정도 모르고 아크릴 창 뒤로 몸을 일으키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내 결혼한다고, 훈아."

"... 그렇나.“

"지난번에 얘기했다 아이가. 프로포즈 한다고."

 

봄을 맞아 활짝 핀 꽃처럼 차마 넘볼 수 없는 행복이 몽우리를 벗어나 가득히 터져 나온다. 그 행복을 오롯이 받아주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은 이른 봄을 질투하는 늦은 추위와 같았다. 영원히 겨울이면 좋겠다. 차갑고. 건조하고. 살을 에는 추위에 익숙해져 모든 것이 얼어 그 상태 그대로 영원할 것만 같은 겨울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말 그대로 피어나는 꽃을 시샘하는 추위처럼 물러날 때를 모르는 마음이 깊은 곳에서 아우성쳤다.

 

"내 결혼식 사회는 니가 봐주면 좋겠다."

 

매일 아침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미련함을 알약 대신 삼켜내는 사람에게 그 말은 너무한 게 아닌가.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나올 데를 가리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려는 마음이 또 낄 데를 모르고 불뚝 고개를 든다. 그 눈치 없는 것의 머리를 누르는 것은 익숙했다. 남 약사는 강 경장에게 피로회복제와 요즘 많이 찾는다는 비싼 비타민제를 들이밀었다. 좀 있으면 아버지 오시니까 땡땡이 그만치고 후딱 복귀나 해라. 무뚝뚝한 대답에 돌아오는 소리는 볼멘소리 뿐이었다. 사흘 만에 잠복 끝내고 왔는데, 매정하구로. 내 지금 복귀해도 퀴퀴한 서 말곤 갈 곳이 없다. 플라스틱 뚜껑에 담긴 동그란 알약을 털어 넣고 귤빛이 도는 액체 역시 한 번에 삼켜 넘기는 동준의 목울대는 그 나이대의 건장한 남자들 이상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 꿈틀대는 목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 약사는 고개를 돌린다. 동준이 오기 전에도 확인했던 재고 수량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욕심과 인내 사이에서 자신을 갈무리했다.

 

"바쁘나, 남후이. 한산한 거 같은데. 간만에 싸우나나 갈까."

 

찌뿌둥 해 가 뭔 잠복을 설라 해도 슬 수가 없네. 뜨뜻하게 함 지져야 이 결리는 거라도 좀 풀리지 않겠나. 밤샘의 흔적 덕에 뭉치고 엉긴 곱슬머리가 반질반질하다. 훈은 언제부턴가 동준과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옷을 벗으면 하루하루 시커멓게 겹쳐 써놓은 제 음험한 흑심이 들킬까 무서웠다. 아 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젓자 뒤 따라오는 칭얼거림은 어린이집 시절부터 떨쳐내지 못하는 동준의 버릇 중 하나였다. 그러니 넘기는 데에도 이골이 났어야 했건만 오늘은 조금 힘들었다. 동준이 들이닥친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예민하고 신경질 적인 못난 성정에 남 약사는 온 몸의 힘이 빠지는 듯한 허탈감과 패배감을 느낀다. 간신히 백기를 들었다.

 

"...생각해 볼 테니까 남의 영업 방해하지 말고 니 그 덩치나 좀 치워라. 할매들이 니보고 동주이는 아가 껄렁하드니 평일에 여서 죽치고 있냐고, 힘쓰는 직업 하냐고 걱정하시더만."

"무슨 소리고. 백 메다 앞에서 차타고 가 봐도 딱-, 대한민국 경찰이다 아이가."

"지랄은. 내 세금이 아깝다."

"내 요 앞 사거리에서 교통정리하던 꼬라지부터 봐 놓고는 와 기억을 못하는데."

 

정오가 살짝 지나 길어진 해가 남기고 간 조각들이 시트지로 붙여놓은 녹색 정십자 사이로 들어와 호루라기 부는 시늉을 하며 동준의 얼굴을 비췄다. 군청색 정복을 입고 사거리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땀을 뻘뻘 흘리던 강동준. 뚱뚱한 경찰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선글라스를 쓴 강동준. 형사소송법 한 페이지에 밑줄을 수십번을 치며 남훈의 방에서 대자로 누워있던 강동준. 촌스러운 갈색 레자 자켓을 입은 강동준. 익숙하게 비타민 젤리를 찾으며 칭얼거리는 강동준. 늦은 밤 소주 냄새를 풍기며 샷다를 내리는 훈에게 달려들다가 아버지의 핀잔을 듣는 강동준. 계산도 안 한 피로회복제를 뜯으며 쥐꼬리만한 형사 월급 나오면 한 번에 갚는다고 되려 당당한 강동준.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좁은 봉고 대신 남룡생당의 황톳빛 나무 의자에서 꾸벅꾸벅 무거운 고개를 끄덕이는 강동준.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될 강동준.

 

"언제고?"

 

훈이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말하자 그제야 동준이 웃었다. 훈의 기억 속에 잊지 못할 순간이 또 새겨진다. 그 기억은 무디고 단단한 돌과 같아서, 새겨놓은 동준의 순간이 세월 앞에 무뎌지기까지 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6.

 

가지고 있던 정장 중 제일 좋은 걸 골라 입고 간 것에 소꿉친구의 결혼식이라는 명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신랑 강 동 준. 하얀 공단 천에 수 놓인 글씨 앞에서 서성이니 익숙한 옛 친구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민다. 동준이 햄이 장가 간다는 게 말이 되냐며, 동준햄을 거둬주신 그 날개 없는 천사분은 누구냐며 장난기 어린 도발을 건네는 대룡. 오 년째 공시 준비를 하던 여자친구가 올해는 느낌이 좋아서, 곧 자기도 좋은 소식으로 너희를 부를 것 같다는 성호. 농구부 놈들 중 가장 먼저 결혼에 골인한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한 팔에는 제랑 꼭 닮은 딸을 안고 온 평일. 어느새 모여든 그리운 얼굴 사이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동준이 나타났다. 왁스를 잔뜩 먹인 머리에 니 머리 잘랐나, 하고 얼빠진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군대를 다녀온 후로 이게 머리 기르는 데는 좋다면서 검은콩두유를 매일 두 포씩 마셔가며 기르고, 팀장 형사의 타박에도 자르질 않던 머리였다. 어색한 듯 쑥스러운듯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는 그 손길에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그녀가 훈을 만날 때면 늘 동준의 긴 곱슬머리를 타박하던 기억이 났다. 훈은 동준과의 오랜 추억을 되새겨주는 그 머리가 싫은 적이 없었다.

 

"니가 꼭 신랑 같다. 뭐 이리 빼입고 나왔노."

"."

"훈이가 오늘 사회 보기로 했다. 축사도 해줄 낀데."

"맞나."

", ."

 

축사. 축하의 의미를 담은 말이나 글. 훈은 잠시 자신이 진정으로 동준의 결혼을 축하할 수 있을지, 그런 자격이 되는지 고민했다. 준비해 온 종이 모서리를 한참이나 구깃거리고 있으니 예식장 직원이 능숙하게 훈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장인이 없다던데, 동준이네 비해서 여자 쪽 집안이 좀 모자라는 거 아이가. 툭툭 튀어나오는 무례함을 감추시기에는 조금 연로하신 아버지를 말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다. 훈이 아버지, 요즘은 그런 말 하면 욕먹어요. 동준이네도 다 왔는데.

 

식이 시작된다. 신랑의 가장 친한 친구로 자신을 소개하고 신랑과 신부에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 될 오늘을 위해 참석해 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 후 신랑의 입장을 알렸다. 어둑한 버진로드 끝에서 빛을 등진 채 걸어오는 동준이 보였다. 심장이 뛴다. 쿵쾅대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목젖을 밟고 올라와 이빨 사이를 비집고 나와 군중들 사이에 존재감을 과시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동준보다도, 혹은 신부보다도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비밀이었다.

 

"갑자기 동준이가 형법 책을 들고 저희 약국으로 쳐들어온 날이 생각납니다."

 

어떤 말로 축사를 시작해야 할 지를 모르다 튀어나온 말은 참 뜬금없었다. 그러나 멈추기에는 쿵쾅거리는 심장이 훈을 채근했기에 말을 이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제가 한 첫 마디를 맞출 수 있겠냐고 좌중에 질문을 던지니 멀리서 대룡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니 누구 쳤나, 아입니까? 콩트 프로그램을 보는 것 처럼 좌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준이 대룡을 향해 주먹을 흔들어 보인다. 훈이 그런 동준과 대룡을 바라보다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농구를 그만둔 동준이는 갑자기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아실 수도 있겠지만, 약국집 아들인 저와는 달리 저는 동준이가 제 대신 계속 농구를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런데 멀쩡하게 대학 리그에서 농구하던 이 친구가 갑자기 예상도 못한 길을 선택하더군요. 형사소송법이다 형법이다, 교통 관련 법은 또 얼마나 어렵던지, 세 번을 떨어진 이 친구가 저희 약국에 자기 전용 책상을 만들어놓고 공부를 한 끝에 합격을 했으니 강 경장님의 탄생에는 남룡생당의 지분도 조금은 있는 게 아닌 가 싶습니다.

처음 교통과 순경을 단 저 친구의 근무지도 저희 약방 앞 사거리였습니다. 그 고생을 하고 처음으로 맡게 된 곳이 출근 시간이고 퇴근 시간이고 구분도 없이 꼬리물기로 아비규환이 되는 것으로 유명한 사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제 예상과는 달리 1년 동안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다하더군요. 지나가는 몰상식한 운전자들에게 짭새라는 멸칭을 들어도, 거친 위협 운전에 사고가 날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어도 못 하겠다는 소리는 않더니 어느 날 갑자기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밝은 얼굴로 약국 문을 열었습니다. 그 분이,

 

거기까지 말을 한 훈은 잠시 숨을 골랐다. 종이 없이도 추억을 풀어 놓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단어 하나를 입 밖으로 꺼내 놓기가 예상치 못하게 어려웠다.

 

...제수씨 였습니다. 동준이가 여기 있는 분들께는 자기 연애담을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듣기론 꽤나 소설에 나올법한 첫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제수씨가 장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는 길에 성질 나쁜 아저씨한테 보복 운전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죄가 있다면 지정 속도를 지킨 잘못밖에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다들 돌아가시는 길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천천히 귀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인연이 만들어 질 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쨌든, 우리 준법 의식과 정의감 넘치는 강 순경님께서는 직무에 충실하신 와중에 용기를 낼 줄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희 약국에 제수씨와 함께 들어오더니, 우물쭈물하며 제게 제수씨를 소개해 주던 모습이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모든 것이 화려한 가운데 고개를 들자, 신이 난 강아지처럼 상기된 동준과 예식대 앞에서 수줍은 얼굴로 볼을 붉히고 있는 그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처음 동준이 그녀를 소개해주겠다며 다짜고짜 남룡생당의 문을 두드렸던 날과 다르지 않았다. 단발 정도로 기른 동준의 반 곱슬머리와 대비되던 갈색이 도는 얇고 긴 생머리의 여성. 이 시간이 지나면 동준의 아내가 될 사람. 훈은 가볍게 목을 축였다. 훈의 손안에서 미리 준비해 왔던 종이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자신의 손에서 배어 나온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찢어지고 구겨진 종이 쪼가리에는 유치원부터 시작한 동준과 훈의 추억이 가득 적혀 있었다. 다만 그 추억은 오늘의 주인공이 아닐 뿐이다. 초대하지 않은 객을 눈치도 없이 들이밀 만큼 훈은 감상적이진 않았다.

 

"훈아!"

 

어떻게 축사를 끝냈는지, 식은 또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른 채로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폐백을 마친 동준이 아내의 손을 잡고 곧장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늘 같은 모습이다. 주변에 다른 것은 안 보인다는 듯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며 곧게 달려오는 동준의 모습은 빠진 젖니를 주머니에 넣고 함께 뚝방길을 달리던 시절부터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이고, 동준아. 주변에 인사도 좀 돌리고 해야지. 강동준, 내는 안 보이나? 경주마처럼 직진하는 동준의 주변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튀어나와 새신랑의 인사를 가로채갔다. 덕분에 훈은 놀란 가슴을, 단정해지지 못하는 얼굴을 갈무리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고맙다, 진짜."

"."

"신혼여행 다녀와서 바로 연락할게."

"...어디로 간다 캤지?"

"발리로 간다. 오늘 밤에 바로 가는데."

 

허니문 베이비로 조카 바로 안겨줘도 놀라지 말고. 그 장난스러운 장담이 또 꾹꾹 눌러 밟아 겨우 감춰둔 속을 사정없이 파헤친다. 훈은 마치 지뢰로 가득한 끝없는 고지를 하염없이 포복하며 기어가는 고립된 병사가 된 듯한 지독한 피로감을 느낀다. 다른 이에게는 평범한 일상일 한 마디가, 행동 하나하나가 훈의 전신을 뒤흔들고 헤집어놓는 것을 견디고 있노라니 고요한 파열의 난장 속에 사정없이 당한 머리가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귓전이 비닐 막 수십 겹을 겹쳐 놓은 것 처럼 먹먹했는데, 웅웅대며 울리는 동준의 낮은 목소리가 용케 감각의 실종을 뚫고 훈에게 도달했다.

 

"축하한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입으로 내 뱉는 말과 마음속에 새기는 말이 다른 것도 익숙했다. 수 없는 인내로 십 여 년이 넘게 참아온, 갈 길 없는 감정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발악을 이겨낸 훈이 동준의 단단한 어깨와 팔을 붙잡자 곧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는 포옹이 뒤따른다. 훈은 동준의 등 뒤에 서 있는 그의 아내를 볼 자신이 없어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된 만큼 동준의 뜨거운 목덜미가, 그 체온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떨리는 눈꺼풀 뒤로 눈치 없이 흘러나온 눈물과 함께 배어 나온 오래된 질척한 감정을 곱씹어 흘려보낸 후 맞붙었던 몸을 떼자, 더없는 행복으로 만개한 동준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잘 다녀오고."

 

그것이 그날 본 어떤 것 보다도 아름다웠다.

 

 

 

7.

 

"이게 내 욕심이 아닌가 싶다."

 

"그게 뭔 말이고."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 오겠다던 엄포가 무색하게 동준이 온 남포동을 뒤집을 것 처럼 임신 소식을 알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어느 여름날이었다. 방문객의 과격한 행동에 놋쇠 물고기가 요란하게 성을 내는 것도 무시하고 2세의 소식을 알리던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었는데, 그 어떤 때보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긴 황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동준은 훈이 내민 박카스조차 거절했다. 푹 숙인 고개에 다시 기르기 시작한 더벅머리가 가늘게 떨린다.

 

"와이프가 몸이 너무 약한데, 아를 갖는다는 게 내 욕심인 거 같다."

"...그게 왜, 니 혼자 결정한 거도 아이다 아이가."

"모르겠다, 훈아."

 

재빨리 창밖에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팻말을 달아놓고 오니 동준은 여전히 약국 의자에 앉아 몸을 잔뜩 수그리고 있었다. 다리를 덜덜 떨며 제 큰 손 사이에 얼굴을 묻은 어깨가 유난히도 약해 보여, 훈은 말 없이 동준의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손가락 사이에 묻힌 목소리가 간신히 삐져나온다.

 

"면역력 수치가 이상하게 안 좋다고... 그럴 수 있는 기가. 안 그래도 마르기만 한 사람이 요즘은 어떻게 할 지를 모를 정도로 비쩍비쩍 말라간다. 자다가 한 밤에 갑자기 일어나 볼 때 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내 작은 소리는 잘 못 듣거든. 산 사람 숨소리가 이렇게 작아도 되는가 싶고, 손발이 이래 차도 되나 싶고,"

"... 별일 없을 거다. 제수씨 강한 사람이다."

"아가 내를 닮아 성격이 안 좋나. 그래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가 지 엄마한테 뭐가 그리 맘에 안든다꼬..."

 

그의 아내가 그닥 건강한 체질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선 굵은 그와 대비되는 어딘가 색채가 옅은 수채화 같은 병약한 미가 눈에 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설마 별일이 있을까,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했다. 훈은 동준의 어깨를 감싸주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손을 거둔다.

 

", 딴 생각 하지 마라. 아빠가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맞나."

"그래."

 

친구에 불과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언은 많지 않았다. 가벼운 무력감이 두 친구를 감싼다. 그날 훈은 아버지가 일정이 있다는 핑계로 약국 문을 일찍 닫았다. 동준이 술에 취하기 전에 잔을 꺾고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려보내며 동기에게 겨우 물어 알아낸 영양제 몇 개를 쥐어 주는게 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8.

 

지훈이 태어나던 날 동준은 누구보다 많이 울었다. 진통이 온 동준의 아내와 동준을 제 차에 태우고 새벽부터 병원으로 달려간 훈은 24시간이 넘는 진통을 동준과 함께 기다렸다. 그렇게 엄마에 아빠에 삼촌까지 갖은 고생은 다 시키며 태어난 지훈이 세상의 첫 공기를 마셨을 때, 동준은 아내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교회도 절도 다니지 않으면서 아내의 무사함을 온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감사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동준의 가족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훈은 감히 끼어들 수 없음을 안다. 그래도 분만실 밖 벤치 끄트머리에 동준의 부모님과 장모님 다음으로 제 자리가 있다는 작은 특권에 만족했다가, 그런 하잘것없는 만족에 기뻐하는 자신을 자조했다. 제 일같이 달려와 준 게 고맙다고, 훈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손등을 어루만지는 동준의 어머니를 볼 낯이 없어서 발 끝과 등이 꺼진 분만실 문만 몇 번을 바라보았다. 뱃 속에 자리 잡은 시커먼 구렁이가 내장 틈새로 고개를 들이미는 것만 같은 고통이 손을 맞잡은 훈의 배 언저리를 괴롭히다가 늑골을 타고 올라와 심장께를 쿡쿡 찌른다. 그 고통의 근원이 질투임을 알기에 훈은 한없는 자괴감으로 동준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울 순간을 괴로워했다.

 

"...!"

 

영원할 것 같은 탄생의 기쁨을 마치고 마침내 문밖으로 나온 동준을 마주했을 때, 그래서 훈은 마치 들켜서는 안 될 일을 들킨 사람 처럼 놀랐다. 훈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초록색 위생복을 입고 신생아실로 향하는 동준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으로 첫 손주를 뒤따르는 동준의 부모님과 장모님 뒤에서 그저 허락된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족이 아닌 제게 허용된 한계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혹사당한 몸이 피로를 호소했다. 고갯짓으로 동준에게 인사를 건넨다.

 

위생복 차림의 동준이 달려와 훈을 끌어안은 것은 순간이었다. 억세게도 훈의 어깨와 등을 가득 끌어안는 팔은 늘 단단했던 모습이 무색하게 벌벌 떨리고 있었다. 훈 이상으로 피로에 지친 남자의 팔은 이제 책임질 생명을 탄생시키고, 제 손으로 받아 안아 든 손이었다. 훈은 그때 동준의 포옹이 이전과 달라진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자신은 아마도 평생 건널 수 없는 인생의 임계점을 갓 지난 동준의 떨리는 팔이 지고 가야 할 무게를 느낀다. 동준의 목덜미에서 김이 피어오를 것 같은 뜨거운 체온을 느끼던 훈은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읊조리는 말을 듣는다.

 

"고맙다, 훈아."

"내가 뭘 했다고..."

"고맙다, 정말... 정말로."

"아이다..."

 

. 너는 얼마나 잔인한가. 더 이상 자신이 맞잡아 줄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질 그 팔을, 훈은 조용히 부여잡았다.

 

 

 

9.

 

훈이 지훈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서였다. 신생아실을 퇴원한 아이도, 조리원을 나온 동준의 아내도 모두 건강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휴가를 얻을 수 없던 동준 대신 동준의 부모님이 아이와 며느리를 돌봐주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동준이 직접 아이를 안고 남룡생당의 문을 열 줄은 정말 몰랐다. 그날은 반가운 객을 알리는 풍경의 소리가 유달리 경쾌했던 것 같다.

 

동준은 아이의 이름을 지훈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돌림자 같은 것 없는 집안이라고 제가 짓고 싶은 대로 지었다는 말에 친구 이름을 지 아들 이름에 붙이는 놈이 어디 있느냐고 타박을 하면서도 이유 모를 기쁨과, 부러움과, 원망과, 질투가 한데 섞여 차오르는 통에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어색한 손길로 동준의 품에 얌전히 안겨있던 아이를 향해 천천히 손가락을 내밀자 뭘 그리 조심스럽노. 니 조카다 조카. 확 안아 들어라, 하는 타박이 뒤를 따른다.

 

동준의 타박에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검지 손가락을 내밀자 부드럽고 통통한 손이 훈의 손가락을 덥석 잡았다. 신생아치고는 제법 단단하게 제 손가락을 움켜쥐는 손아귀 힘이 야무졌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새콤한 젖내와, 한없이 부드럽고 순수한 살결과 뜨끈한 온기가 손가락을 타고 훈의 뇌간에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생명이 주는 경이로움이 훈의 머리부터 발끝을 한 순간에 관통하는 감각이 찌릿했다.

 

"아가, 니 닮아서 힘만 드럽게 세네..."

 

네 일부를 받아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 눈앞에 있었다. 전신을 통과하는 감당할 수 없는 감동과 경탄에 훈은 그때 동준과 지훈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었다. 동준의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다시금 내려다본다. 아직 눈조차 겨우 뜨는 지훈의 도톰한 입술이 동준을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울고 싶던 것이 감격 때문인지, 혹은 아직까지 뱃속의 뱀을 채 쫓아내지 못한 제 못남 때문인지. 훈은 오래도록 답을 내리지 못했다.

 

 

 

10.

 

나는 가끔 음험한 생각을 했다.

 

"지훈이 훈이 삼촌 인사 해야지. , 안녕 하세요. 안녕."

 

남룡생당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네가 더없이 기쁜 얼굴로 내게 시험 합격을, 운명 같은 사람과의 만남을, 그녀와의 결혼 소식과 임신 사실을 차례로 알릴 때 마다 나는 평온한 얼굴로 더 없이 음험한 생각을 했다. 상상 속의 나는 카운터 앞 남룡생당의 긴 나무 의자에 앉은 네게 박카스를 권하고, 병 표면에 이슬이 맺힌 박카스를 한 번에 마시는 네 등 뒤로 돌아 남룡생당의 문을 잠근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푯말을 돌려 놓은 후 남룡생당 제조실 유리 찬장에 늘 있던 갈색 병을 들어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손수건에 클로로포름을 흠뻑 적신다.

 

"지훈이 오랜만이네."

 

그건 네가 선물한 물건이다. 약대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남룡생당 카운터에 섰던 내게 남 약사님 첫 손님은 제가 되겠다며 쏠라씨를 찾던 네가 돈 대신 내밀었던 물건이며, 아직 공시생 신분이던 네가 공사판에서 삼 일을 구른 끝에 사 온 물건이기도 했다. 부산 최고 약국인 남룡생당 주인인 약사 선생님께서 이 정도는 들어 줘야 가오가 산다며 허세를 부리던 네게 그때 나는 어떤 말로 타박을 했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가 벌써 머리숱이 빽빽하다."

"내 닮은 거 아이겠나."

"맞나."

 

늘 품에 넣어 다니는 그 손수건을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상상 속의 나는 클로로포름이 손바닥 가득 뚝뚝 흘러넘치도록 아낌없이 손수건을 적신다. 그리고는 차갑게 젖은 손으로 제조실 문을 열고, 내 비참함을 모르는 너의 무지 뒤로 다가간다. 오른팔로는 다가올 미래를 모르는 네 목과 어깨를 단단히 움켜잡고 왼손으로는 마취약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 손수건으로 너의 입과 코를 틀어막는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사람은 그 정도 마취제로는 손쉽게 기절하지 않는다. 수 분에서 수 십 분, 너는 나를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할 것이다. 등 뒤에 매달린 나를 떼어내기 위해 네가 발버둥 치고, 몸을 뒤틀며 약국을 휘젓고 다니면 오랜 세월이 담긴 남룡생당 가판대는 난장판이 될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도 운동을 멈추지 않는 네게 내가 손쉽게 굴복할 수도 있을 테지만 상상 속의 나는 너를 붙든 팔을 놓치지 않는다.

 

"니 닮아 낯도 안 가리나 보다."

"지훈이가 니는 알아보는기다. 저번에 왜, 우리 팀장님 앞에서는 쉬지도 않고 울었다 아이가. 내 민망해 혼났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오래전에 본 다큐멘터리 속 어느 한 장면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굶주린 암사자가 무리에서 떨어진 어린 버팔로를 사냥하는 장면이었다. 뿔에 찔리고 발굽에 밟히면서도 주둥이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던 암사자의 절박함에 결국 젊은 버팔로는 패배를 선언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패배는 죽음이다. 버팔로의 육중한 몸이 초원에 쓰러진 후, 버팔로의 신선한 피로 물든 암사자의 주둥이가 곧바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제수씨도 잘 지내셨습니까."

 

참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는데 어째서 내게는 기색조차 없을까. 그저 공상으로 끝날 오래된 상상을 다시 심장 아래 깊이 묻어두고 돌아온 내 앞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행복을 맘껏 누리는 동준의 가족이 환한 햇살을 등지고 있었다.

 

 

 

11.

 

중학교 때 부터 동준은 오래된 홍콩영화를 좋아했다. 우울한 영국 영화 아니면 격정적인 감정만 소용돌이치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던 훈과 동준의 영화 취향은 참 너무 다르기도 달랐다. 훈이 보고 싶은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면 동준은 상영시간 동안 열 번이 넘게 하품을 하다가 영화가 끝난 후 감성에 젖어있는 훈에게 롯데리아나 가자고 산통을 깨 놓기 일쑤였고, 훈은 동준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본 영웅본색을 다시 틀면 영화가 유치하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동준의 홍콩영화에 대한 동경은 주윤발을 흉내 낼 요량으로 아버지의 담배를 훔쳐 와 놓고는 훈의 부루마블 세트에서 빼 온 가짜 돈에 불을 붙이다가 약한 화상을 입고서도 멈추질 않았다.

 

동준이 형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한참 예민한 감수성의 시기에 지겹도록 본 홍콩영화 속 멋진 형사들의 모습이 그에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 두꺼운 수험서를 잔뜩 들고 남룡생당에 들이닥쳤던 동준이 세 번의 낙방 끝에 마침내 수사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성냥개비를 잘근잘근 씹으며 또 다시 어느 시절의 형사들의 모습을 흉내 내던 동준을 바라보며 훈은 이상하게도 널 보면 떠오르는 건 영웅본색의 주윤발이 아니라 무간도의 양조위라고 생각했다.

 

"...동준아."

"...훈아."

 

동준과 그의 가족이, 그리고 동준의 아이가 세상 모든 비극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지훈이 두 돌을 앞둔 어느 겨울이었다. 몇 년 만에 유행한 독감으로 남룡생당에도 예방접종을 맞고 타이레놀을 찾거나, 아니면 콜록대는 기침과 함께 병원 처방전을 들고 들어오는 손님이 많았다. 길게 늘어선 줄에 정신없이 조제와 계산을 반복하던 훈은 잠깐 짬을 내어 동준에게 문자를 남겼다. 요즘 독감 때문에 손님 많으니까 당분간은 지훈이는 데리고 오지 말라는 문자에 답장이 온 것은 보낸 날로부터 이틀이나 지나서였다.

 

떠올려보면 동준은 그때 팀을 옮기기 직전 담당하던 사건들을 마무리하느라 몹시도 바빴던 것 같다. 지훈의 탄생과 함께 동준은 자신의 꿈이던 강력범죄 수사과를 포기했다. 직업적 소명도, 긍지도, 책임감도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는 동준이었으나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었다. 팀장과 상의 끝에 바뀌는 해에는 사이버 수사과로 팀을 옮기기로 한 동준은 진행하던 사건들의 수사를 마무리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것 같다. 간신히 받은 전화에 와이프보다 피의자들을 더 많이 만난다고 농담 할 정신머리가 그때는 남아있었다.

 

비극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한다. 동준이 한 달 가까이 야근을 반복하던 사이 동준의 아내는 유행하던 독감에 걸린다. 집 밖으로는 잘 나가지도 않던 사람이 어디서 옮아왔는지를 모르겠다고 말 할 때 까지만 해도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 매 해 계절은 바뀌고 독감은 유행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것은 훈도 마찬가지였다. 동준의 부탁으로 죽을 포장하여 동준의 신혼집 앞에 갖다 놓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인터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안부를 들을 때 까지만 해도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색이 된 얼굴로 남룡생당에 뛰어 들어온 동준이 아내가 기침을 하다 피가 섞여 나왔다고 말할 때 까지만 해도, 아니 동준의 아내가 독감 합병증으로 폐렴을 얻었을 때도 그랬다. 자주 생기는 일이니 환자 건강에 신경 쓰고, 애기는 할아버지 집에 맡겨두라는 말이 무섭게 갑자기 증상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훈은 지훈을 임신하던 당시 동준이 털어놓았던 걱정을 떠올린다. 와이프가 몸이 너무 약한데, 아를 갖는다는 게 내 욕심인 거 같다... 면역력 수치가 이상하게 안 좋다고... 약해진 동준의 목소리가 어제처럼 생생했다.

 

어딘가 색채가 옅은 한 폭의 수채화를 떠오르게 하는 병약한 아름다움을 가진 동준의 아내. 그러나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기에 훈은 피어오르는 불안함을 애써 외면했다. 어쩌면 제 말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새벽에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병원 복도에서 아내의 임종을 지키고 쏟아낸 모든 감정을 말라붙은 눈물 자국으로만 남겨둔 남자를 보았을 때, 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음을 느꼈다.

 

"참는 자에게는 복이 온다던데,"

"...."

"내한테는 언제쯤 그 복이라는 게 올까."

 

그때 느꼈던 고통의 이름이, 가슴 중앙부터 명치 아래까지 예리한 송곳으로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고통의 이름이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임을 차마 동준에게 고백할 수 없었다. 침묵으로 있을 수 밖에 없던 훈은 여전히 동준의 옆에 나란히 앉아 떨리는 어깨를 기대게 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질문한다.

 

그때 나는 그녀의 죽음을 온전히 추모하기만 했는지.

 

혹시 내 비뚤어지고 음험한 마음이 백만분의 일이라도 잘못된 기대를 갖지는 않았는지.

 

한없이 짧았던 그 가족의 행복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을 수 있었는지.

 

훈은 여전히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12.

 

어쩌면 비극은 응보와 나란히 걸으며 응보의 손가락이 닿는 자를 가엾이 여겨 애정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비극의 관심을 받은 것은 동준일까, 혹은 자신일까. 그녀의 이른 죽음을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복이라고 찰나의 찰나에서조차 생각한 적이 진실로 없었던가.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영안실에서 다시금 그 비통한 후회를 반복하게 될 것을, 훈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부탁 하나만 하자."

 

그날 부산에는 눈 대신 비가 내렸다. 윗 지방이었으면 무릎까지 쌓일 눈이 왔을 텐데, 부산의 하늘에서는 비통함으로 폐허가 된 남자 대신 울기라도 하듯 겨울비가 끊임없이 내렸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화장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읊조리던 동준의 입술은 형편없이 말라붙고 찢어진 틈에 피딱지가 잔뜩 엉겨 붙어 엉망이었다. 퀭하게 패인 제 눈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훈이 대답을 고르는 찰나를 기다리지 않고 동준은 말을 잇는다. 그 목소리가 답지 않게 작아서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혹여나 잃어버릴까봐 훈은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나란히 쓴 검은 우산살 꼭지에서 끝없이 빗물이 흘러내려 어깨를 적셨다. 훈은 젖은 어깨를 무시하고 동준 쪽으로 우산을 조금 더 기울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나란히 서서 모든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질 때 까지 하염없이 굴뚝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지훈이 부탁한다."

"...."

"너 밖에 없다, 훈아... "

"...."

"너 밖에..."

 

그 부탁에 대한 책임을 질 시기가 어찌 그렇게 빨리 왔는지, 늘 성질이 급했던 그에게 기다림이란 너무도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3.

 

아내의 장례식을 마친 동준은 신혼집을 정리하고 부모님이 계신 동래로 이사를 준비했다.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아내의 흔적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훈이 독립을 계획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결혼조차 하지 않은 외동아들이 난데없이 동래 쪽에 제 약국을 따로 개업하겠다는 뜻을 비췄을 때 훈의 어머니는 의아해했고, 아버지께서 은퇴하실 때 까지 늘 그래왔듯 아버지를 돕다가 그대로 남룡생당을 잇는 게 어떻겠냐며 아들을 설득했으나, 완강한 의지에 가로막혀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을 따랐다. 그러나 훈의 아버지가 고갯짓으로 아들의 독립을 불허했기에 훈의 독립은 좌절된다. 덕분에 훈은 한동안 남포동 남룡생당의 셔터를 다 내리고 나서야 동래 동준의 본가로, 혹은 동준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넓은 신혼집으로 찾아가 지훈의 육아 또는 동준의 이사를 도왔다.

 

시간이 흐른다고 모든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상처는 영원히 낫지 않는다. 장례식 이후 계절이 세 번은 더 바뀌는 동안 훈은 저도 모르게 동준의 아내에 대한 기억을 잊었다. 동준 가정의 행복했던 시간도, 옅은 수채화 같은 아련한 그녀의 아름다움도 훈의 기억 속에서 흐려져 갔지만, 동준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동준에게 남은 일 년이 안되는 시간 동안 훈은 동준을 바라 볼 때 마다 늘 시퍼렇게 날을 벼린 차가운 칼날을 떠올렸다. 남룡생당에 찾아와 멍청한 웃음으로 칭얼거리던 강 경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14.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훈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물었다.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동준이 가끔 말하던 팀장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훈이 다 늘어진 비디오테이프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음에도, 그리하여 그에게 허용된 비참한 대답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반복해서 잔인한 진실을 들려주었다. 마치 그것이 그가 져야 할 책임이자 의무라도 되는 것 처럼.

 

왜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 건지. 짧지만 긴 전화를 반복한 훈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의문이었다. 망연한 훈의 시선이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 석글자에 머무른다. 방금 전화를 마친 그 전화번호의 주인을 알리는 화면의 글씨가 낯설었다. 강 동 준. 거짓이었다. 왜냐면, 방금 전화에 따르면 이제 그 이름 석 자의 주인은 영영 제게 전화를 걸 수도, 제가 거는 전화를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훈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 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물었다. 어째서 지금 당장이라도 저 하늘이 무너져버리지 않는 것일까. 네 부고를 알리는 전화가 왔는데 내 세상도 같이 무너져버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운전을 할 수 없었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자신 대신 누군가 불러 준 택시를 탔다. 소식을 듣고 입을 틀어막던 어머니였는지, 아니면 조용히 가게 문을 닫던 아버지였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몸을 둥글게 말고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고 오열했다. 그로서 네가 돌아올 수 있다면 눈물 따위 탈진할 때 까지 흘려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불가능하단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택시는 동래의 어느 병원에서 멈췄다. 세상이 온통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평생 그렇게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하얀 외벽의 병원은 거대한 관처럼 보인다. 동준의 관일 수도, 혹은 자신의 관일 수도 있었다. 훈은 그때 그 모든 과정이 일평생을 살아온 그 순간의 제 존재에 대한 사형선고라는 사실을, 그리고 선고를 받아들이고 집행에 이르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걸어가는 내내 이대로 멈추고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대로 돌아가면 이 모든 일을 고약한 농담이라고 속일 수 있지 않을까. 역시 불가능하단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되물었다.

 

팀장은 훈을 알아봤다. 아마 동준이 평소에 제 얘기를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팀장은 침묵으로 훈을 안내한다. 수 많은 병자의 우울과 가족의 지난한 피로로 가득한 로비를 지나 좁은 복도와 문을 몇 번이나 지나갔다. 그러자 너무도 익숙한 두 중년이 보인다. 그 어떤 고통을 사람으로 빚어낸다 하더라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형상을 이길 수 있을까. 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동준의 어머니가 제 팔을 붙잡고 한참을 울도록 허락했다. 벗지도 못하고 온 하얀 약사 가운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었고, 동준의 아버지가 그녀를 훈으로부터 떼어놓아도 통곡은 그칠 줄 몰랐다.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시죠."

 

엄중히 닫힌 영안실의 문이 열리기 전에, 그리하여 잔인한 현실로부터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받아들여야만 순간이 왔을 때 훈은 지훈이 세상의 첫 공기를 마시건 어떤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병원의 굳게 닫힌 문밖에서 동준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초록색 위생복을 입고 제 손으로 새로운 생명을 안아 들었던 그 팔이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았던 순간이 열리는 영안실 문 위로 겹친다.

 

"...동준."

 

그제서야 훈은 동준을 마주한다.

 

"강동준."

 

차가운 철제 염습대 위에 흰 천을 덮고 누워있는 그를.

 

"동준아."

 

자는 듯한 평온한 얼굴로 창백하게 식어버린 그를...

 

"동준아. 강동준..."

 

네가 죽어버린 세상을 무너뜨릴 힘이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네가 없어도 멀쩡하게 굴러가는, 여전히 해가 뜨면 도로 위로는 차가 지나다니고 땅 밑으로 지하철이 지나가며 너를 빼놓은 수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삶을 계속하며 등교를 하고 출근을 하고 걸어 다니고 식사를 하고 숨을 쉬고 잠을 자는 그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네가 떠나버린 오늘의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수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태양이 떠오르면서 잠에서 깨어난 너를 제외한 수백 수천 수억의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그 모든 것을, 네가 없이도 이 세상은 멀쩡히 돌아가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오르는 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억울함인지, 혹은 너 없는 세상이 여전히 멀쩡하게도 굴러가는 괴리에서 느껴지는 문자 그대로의 역겨움인지. 훈은 치밀어오르는 토기를 느끼며 염습대 앞에 결국 주저앉고 만다. 무력함이 두 다리를 앗아간 것만 같았다.

 

 

 

15.

 

마치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동준의 사인은 자상에 의한 과다출혈 및 그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이었다. 검시관이 동준의 유해를 덮은 흰 천을 들어 보이자 복부에 생긴 검붉은 흠집이 보였다. 골반빼와 배꼽 사이로 세로로 길게 난 긴 틈은 길게 봐주어도 손가락 정도의 길이였지만 몇 개의 긴 흔적이 동준의 배 위에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훈은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회백색을 띄는 배 위로 손을 올렸다가, 한참이나 그 틈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염을 하기 전이라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핏자국은 탁한 갈색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고, 흠집 사이로 보이는 속살은 더 이상 시뻘겋지 않았다.

 

"강 경장이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동준을 찌른 것은 그 자신도 마약 중독자인 중간 운반책이라는 자였다. 전과가 몇 개였는지, 그 마약 조직에 대한 수사가 어느 단계였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동준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는 분명 조직 이동을 했을 것이다. 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직업적 소명에도 회의를 느끼던 동준이었는데. 며칠 전만 해도 엄마 없이도 지훈을 훌륭하게 키워내 보겠다며 제게 애써 괜찮은 척을 했었는데. 그랬던 녀석이었는데.

 

"강 경장이 초동수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덕에, 몇 년 동안 단순 유통으로밖에 처리하지 못하던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수사에 속도가 붙으며 일손이 부족하여 서에서 수사 협조를 요청했었습니다. 이번 사건만 마무리 된다면 자기도 이제 강력계에 빚은 없는 거라고..."

 

동준은 지혈 대신 자신을 찌른 범인을 붙드는 것을 선택했다고 했다. 동준은 순직으로 두 계급 특진했다. 강동준 경위의 영정 사진은 동준이 몇 년 전 수사과 발령 후 찍었던, 훈이 어색하다고 놀렸던 정복 차림의 사진이었다. 지훈은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의 죽음도 이해하지 못했다.

 

동준의 동료들은 자해하려는 범인을 제압하여 법원의 피고인 석에 세우는 것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범인의 첫 번째 공판이 열리던 날, 훈은 법원 앞까지 갔던 발걸음을 돌렸다. 기소까지 꼭 일 년이 걸린 첫 공판일에는 비가 내렸다. 다른 지역에서 내렸다면 무릎을 덮는 폭설이 되었을 겨울비가 온종일 내렸다.

 

 

 

16.

 

동래구 남룡생당 2호점은 외동아들을 위해 남포동 남 선생께서 임대 자리부터 알아본 덕에 한차례 동래 공인중개사의 입을 오르내린 거로 개업 전부터 유명했다. 길목 좋고 입지 좋은 곳을 고르고 골라 개업한 남룡생강 2호점이 개업하던 날, 남포동 남 선생의 오랜 지인부터 얼굴만 아는 유지까지 보낸 화환이 좁은 동래 골목 인도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동래구 남룡생당 2호점의 개업일로부터 일 년하고도 이 주 전의 어느 날이 남 약사의 오랜 친구인 강동준 경위의 기일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개업일 이틀 전, 훈은 동래구의 어느 꽃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개업 축하 화환을 주문하자 축하 문구와 보내시는 분 이름은 뭐로 할까예-. 하는 질문이 곧 뒤를 따른다. 훈은 한참을 망설이다 가슴에 묻으려 했으나 묻지 못한 이름을 겨우 말했다. 꽃집 주인의 의아함이 수화기를 넘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말을 못하던 훈은 겨우 자신을 추스르고 서랍 깊은 곳에 넣어 둔 갈색 종이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을 채운 내용물은 동준 명의의 예적금 통장 몇 개와 몇 장의 서류였다. 서류를 정리하던 훈은 낱장 짜리 서류를 들어 스탠드 아래에서 한참을 바라본다. 그것은 동준이 자필로 작성한 위임장이었다. 위임장 오른쪽 끝에는 도장이 없다며 직접 찍었던 동준의 지장 자국이 진하게 남아있다. 그 흔적이 조금이라도 닳을까, 다시 봉투에 밀어 넣는 훈의 손길은 더 없이 조심스러웠다.

 

"니 내랑 했던 약속 있다 아이가. 기억나나."

 

대답할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언젠가 그가 자기 명의 약국을 개업하면 제일 크고 비싼 화환을 보내주겠다던 약속도 지킬 사람이 돌아오지 못하기에 공허한 말로만 남았다. 그래서 훈은 동준을 대신하여 그의 이름으로 가장 작고 값 싼 화환 하나를 주문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겠지. 강동준이."

 

녀석은 매일 아침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미련함을 삼켜대던 사람에게 끝까지 가혹하고 이기적인 부탁만 하고 떠났다. 지훈의 앞날을 부탁하며 남겨 둔 통장과 위임장 따위의 서류는 언제 준비했던 것일까. 여전히, 대답할 자는 돌아오지 못한다. 훈은 손가락 두 마디 만한 포스트잇에 날짜와 화환의 가격을 적은 후 동준의 예금 통장 첫 번째 장 위로 붙였다. 이 빚은 저승에 가 돌려받을 게다.

 

 

 

17.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짧은 해가 진 지 오래였다. 어머님을 도와 식사 상을 정리하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던 훈을 붙잡은 건 지훈이었다. 할머니 말 잘 들으면 자고 간다며. 동준을 닮은 도톰한 입술이 삐죽댄다. 가슴 한편이 아렸다.

 

어머님 입장에서는 동준의 친구인 저를 보는 모든 순간이 괴로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훈의 고집에 결국 어른 두 명이 두 손을 들었다. 훈은 다시 한번 지훈이 잠들 때 까지만 있다가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한 후, 지훈이 제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거실에 깔린 어린이 매트 위로 올라온다. 통통한 볼이 장난기로 가득했다.

 

"삼촌이랑 뭐 하고 놀까?"

 

그러자 지훈은 배시시 웃으며 일 전에 사주었던 미니 농구대를 가리킨다. 다시금 아릿해지는 가슴 한 켠의 통증을 애써 외면한 채, 훈은 앉은 자세로 농구공 모양 탱탱볼을 튀기는 척 하였다. 공을 뺏으려는 지훈의 몸짓에서 자꾸만 누군가 겹쳐 보였지만 훈은 애써 외면했다. 한참을 공을 던지며 놀던 지훈이 미니 골대에 공을 집어넣고 나서야 만족한 듯이 활짝 웃으며 훈의 무릎 위로 앉았다. 둥근 이마에 가득 맺힌 땀방울 조차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지훈이 이렇게 운동을 잘 해서 나중에 선수 되면 어떡하지?"

"선수?"

"키도 쑥쑥 커서, 농구선수 하면 딱 좋겠다."

"싫은데."

 

축구선수? 아니면 아빠처럼 경찰? 품 안에 안긴 지훈을 어르며 화장실로 가는 내내 지훈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계속했다. 공룡 모양 칫솔에 짠 딸기맛 치약은 남룡생당 동래점에서 멋대로 들고 온 물건이었다. 훈이 가르쳐주는 대로 윗니 아랫니 양치질에 혀 까지 닦은 지훈의 고민은 여전히 입 안 가득 남아있는 딸기시럽 맛과 박하 향이 사라지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울 때 까지도 이어졌다.

 

"있잖아, 삼촌."

"?"

 

턱 끝까지 올라온 이불에 감기는 눈을 이겨내지 못하던 지훈이 갑자기 훈을 부른다. 이쪽으로 와 보라는 듯 손짓을 하다가 귀를 빌려달라고 하는 통에 훈은 지훈의 부드러운 볼 위로 귀를 갖다 댔다. 지훈의 통통한 손바닥이 훈의 오른쪽 귀를 감싼다.

 

"난 크면 약국 주인하고 싶어."

 

삼촌처럼 약국 주인할래. 마치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한 속삭임 뒤로 쌍꺼풀 진 맑은 눈과 짙은 눈썹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훈은 그 얼굴 위로 동준과 그의 아내를 겹쳐 본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썰물처럼 들어 차다가 서서히 빠져나간다. 그 끝에 남은, 이제는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슬픔을 가슴 한 켠에 쌓아 두고는 지훈의 손을 잡고 볼에 입을 맞췄다. 누구를 닮았는지, 여전히 그 나이대 아이답지 않게 센 손아귀의 온기가 뜨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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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훈동준 풍전
밖에서 보면 나붕 맞음

2024.04.23 22:2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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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네 ..아련한 분위기 미쳤다
[Code: d0f1]
2024.04.23 23: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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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내가지금 뭘읽은거야 현대문학교과서에 실어야만... 애들이 살아있네 살아있었네...남후이 동주이는 말할 것도 없고 동준이 와이프며 풍전애들이며 남룡생당 2호점 주변 동네사람들마저도 진짜 쩌 어드메서 살아숨쉬는 사람 같음 붕키도 푸산 살았던거같음...
[Code: bb21]
2024.04.23 23: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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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반에 훈이 시점에서의 동준이에 대한 생각이랑 감정이 호흡처럼 흐르고 있고 그 속에서 이미 떠난 동준이가 생동감을 얻고...근데 문제는 훈이의 아픔도 뜯긴 심장 펄떡대듯 살아날뛴다는거임 벌새끼죽는다... 아니 남룡생당 2호점 앞 치우지 못한 화환 보고 마 니 동주이아이가 하고 쳐웃다가... 그 화환 정체 밝혀지고 2차로 죽다...동준이 2호점 여는 것도 못 보고 갔어 2호점 첫손님도 돼주고싶었을텐데...
[Code: bb21]
2024.04.23 23:17
ㅇㅇ
모바일
동준이 닮아 농구 좋아하고 힘쎄고 입술 도톰한 지훈이 동준이도 아내분도 엿보이지만 삼촌처럼 약국 주인 되고 싶은 지훈이... 동준이가 이미 죽고 없는 시점에서, 동준이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지만 죽음이 끝은 아니라는 느낌도 든다 ㄹㅇ 형언할수없는감정이 들어차다 빠져나간다 댓달고 다시읽으러올라가야지.. 좋은글 고마워 센세
[Code: bb21]
2024.04.25 03:36
ㅇㅇ
모바일
미칫나.,.,.,.,.,.,.,.,,..
[Code: ff39]
2024.04.25 03:36
ㅇㅇ
모바일
진짜 도라이될것같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ff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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