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터행맨 루행 







...

"너를 본 적 있어, 그렇지? 왜 자꾸 그렇게 날 따라다니는 거야?"



잔뜩 취한 필멸자(必滅子)는 자신의 앞을 서성거리는 불멸자(不滅子)를 향해 손가락질헀다. 꽤나 취한 얼굴임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불멸자는 대답했다. 



"이 삶을 준 게 너니까, 내가 너의 수호신이 되어야지"



그 말을 하는 불멸자는, 어딘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원망, 증오, 그리움, 그리고 애정이 가득한 모순된 눈으로. 


...



루스터는 기시감 속에 일생을 살았다. '그'를 가장 처음 만났던 것은 아마 아주 어릴 때 갔던 놀이공원이었다. 길을 잃은 꼬마에게 친절히 풍선을 쥐어주고, 앙앙 우는 아이를 달래던 오지랖 넓던 남자.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금발과 녹안은 금세 잊혀졌지만, 그가 쥐어쥔 빨간 풍선은 뇌리에 생생히 남았다. 

그다음으로 그를 만났던 것은 예니곱살이 되어 처음으로 어머니의 생일선물을 준비할 때였다. 며칠간 모은 용돈으로는 꽃다발 하나 사기도 부족한 돈이었지만, 넉살 좋던 꽃집 사장은 코묻은 아이의 돈을 받고 풍성하고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어줬다. 어머니가 기겁을 하며 꽃집으로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그 꽃집은 없어진 이후였다. 


그 뒤로도 종종 루스터에게는 보통사람에게는 쉬이 가질 수 없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닥 눈에 띄는 것도 아닌 행운이 종종 찾아왔다. 마지막에 넣은 골은 반드시 버저비터로 인정된다던가, 섬찟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가 오발탄을 피했다던가, 지나가다 산 로또가 4등쯤에 당첨된다던가 하는. 그래서 루스터는 자신이 타고난 행운의 총량이 딱 이만큼인줄로만 알았다. 



그야, 정작 본인에게 일어난 큼지막한 일들은 그대로 절망이 되어 다가왔으니까. 아버지는 군대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꿈꾸던 해사는 4번이나 낙방했고, 결국 관심도 없던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아득바득 이를 갈며 수병부터 올라왔더니, 탑건에는 웬....



"이야, 루스터? 오늘도 때깔좋다?"


이쑤시개를 씹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금발 녹안을 보며 생각했다. 어쩜 나는 이렇게 지지리도 복이 없나.




"어, 그래. 너도 오늘 퍽 건강해보인다."




적당히 말을 받아주면서도 머리가 팽팽 굴러갔다. 어색하진 않았나, 걸릴 만한 말은 없었나. 




...



그가 "행맨"이 수호신, 이라는 걸 알게 된 계기는 꿈이었다. 꿈에서 루스터는 행맨을 만났던 첫 순간부터 고스란히 다시 재생시키고 있었다. 모든 꿈이 끝나고 급박하게 문을 두들기자, 행맨은 동그래진 눈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늦은 밤에?"


다만 예상치 못했던 건, 편안한 차림의 행맨은 처음이었던지라 그 질문을 받자마자 루스터는 어떠한 말도 따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젠장, 이건 생각도 못했는데. 



"....술 마실래? 할 말이 있는데, 맨정신에는 못하겠어."
".....그러던가."


활짝 열린 문으로 한발짝 들어왔다. 기필코, 비밀을 알아내리라는 결심과 함께. 




...


결심이 무색하게도 패자는 루스터였다. 행맨은 마셔도 마셔도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만취한 루스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를 본 적 있어, 그렇지? 왜 자꾸 그렇게 날 따라다니는 거야?"



똑바르지 못한 눈으로 행맨을 올려다보았다. 행맨의 눈은 복잡해보였다. 




"이 삶을 준 게 너니까, 내가 너의 수호신이 되어야지"



그의 말에는 가시가 길게 돋혀있었다. 내가 언제 너에게 그런 삶을 줬냐며 따지기도 전에 눈이 감겼다. 아직 할 말이 많았는데....




...



행맨은 멍청히 잠든 자신의 수탉을 내려다보았다. 재수없는 수탉같으니라고, 꿈을 보고 불현듯이 달려왔던 게 분명하다. 먼 옛날, 불멸자가 되기 전 행맨이 그랬던 것처럼. 




따지고보면 행맨은 불멸자 중에서도, 그 중 수호신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출생이었다. 그는 날때부터 불멸자나 신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종교의 박해를 피해 미국까지 건너온 이민자 중 한 명이었다. 행맨의 삶은 풍족했으나, 그의 종교는 번번히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종교인들이 길을 나서자 독실한 신자였던 그도 따라나섰을 뿐이다. 




처음 발을 디딘 곳에서 행맨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다. 이주민이 물밀듯 밀려오던 미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없었다. 고층 건물에 올라가 지붕을 짓는 위험천만한 일일수록 페이가 높았기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그곳에 올랐다. 안전이니, 노동자의 인권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무용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는 99층 빌딩의 꼭대기에서 밥을 먹다가 추락했다. 옆자리의 인부가 장난을 치다가 툭 어깨가 밀렸고, 두 손에 음식이 가득했던 행맨은 다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떠밀렸다. 아, 죽는구나. 눈을 감은 순간 천천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의아함에 눈을 뜨자, 그래. 루스터가 자신을 안고 있었다. 찬란한 다섯쌍을 날개를 펴고, 괜찮냐고 상냥히 물어왔다. 




첫 눈에 반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




멍청한 수탉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1층으로 내려왔다. 익숙하게 식탁에 앉은 루스터는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집주인이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 이야기 들려줘."
"꽤나 뻔뻔하네."
"재밌잖아. 내가 너의 첫사랑이었다는 게"
"지금은 아니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괜찮아."
"....어째서?"
"지금 내 첫사랑은 너니까."



까치집을 잔뜩 지은 머리에 해사하게 웃는 멍청한 수탉은 자신이 지금 고백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잠시간 내가 말이 없자, 루스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각 못했으면, 됐다"



애써 고개를 돌리자 수탉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콜사인이 수탉이라고 진짜 본인이 수탉이라도 된 줄 아는건가. 행맨은 식탁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뒤의 이야기는 안 길어,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니까 네가 나한테 불멸자의 삶을 떠넘기고 대신 죽었어. 그뿐이야."
"엥? 뭔가 많이 생략된 거 같은데?"
"썩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냥 묻어두는 걸로 하지."
"....우리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나?"
"........."


시선을 피하지만 그는 여전히 못박힌듯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 해야 할까.



"나만 널 사랑하고 있었지"
"아니었을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제 너는 기억도 없는 필멸자일뿐이야."
".......그러지 않고서야, 신의 자리까지 넘기면서 널 살렸겠어?"
"..........."


다시 행맨의 입이 다물렸다. 그래, 그 일은 행맨에게 있어서 가장 큰 역린이었다. 사랑하지도 않던 그는 왜 나에게 신의 자리를 넘겼을까. 왜 날 살렸을까 하는.



"뭐, 과거의 이야기는 이제 됐어. 지금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
"다시 한번 말해두겠는데, 나는 너랑 연애며 결혼이며, 아무것도 할 생각없어"
"나도야."
"뭐? 그럼 아까 고백은?"


그는 대답을 하지않고 씩 웃었다. 아뿔싸, 이게 함정수사였나. 입술을 잘근잘근 물자, 그는 손을 뻗어 입술을 매만진다.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어느 과거의 그가 나에게 해주던 것이 생각나 입을 멈추었다. 그떄도 이렇게 너는 다정하게 날 멈추었지, 언제나.




"일단 친구부터 하자고, 급하게 가지 말고."
"친구도... 할 생각없어, 누가 인간이랑 친구해?"
"네가 나한테 이 삶을 준 게 나니까 책임지라며, 지금 책임지고 있는건데."
".....그런 말 한적 없어"



그렇게 말하는 행맨의 귀는 새빨개져있었다. 루스터는 웃었다. 아직도 너는 그렇게 부끄러움을 타는구나.




...



루스터가 불멸자였을 적에, 그리고 행맨이 제이크였던 시절에,  행맨은 루스터에게 많이 서운해했다. 그는 수호신이라는 이유로 온갖 곳에 오지랖을 부렸고, 그건 자신과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이쿠, 조심해야지."
"감사합니다!"




저봐, 잠깐 눈 돌린 새에 저기까지 가서는 자전거를 잡아주고 있다. 저런 다정함은 나에게만 부려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언제나 수호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이에게 저렇게 다정했다. 




"미안, 넘어질 것 같길래."
"....아니야."
"화났어? 미안해, 응?"
".........아니야, 화 안났어......"



내가 너에게 뭐라고 화를 내겠어.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루스터가 걸음을 멈춰세우고는 황급히 뒷골목으로 향한다. 뭐지, 의아해할 틈도 없이 골목에서 그는 어깨에 이마를 기댄채 애교를 부려댄다. 



"너는 내가 제일 아끼는 존재야, 알잖아."
"......알아, 그러니까 아무 말도..."
"제발, 너를 그렇게 낮추지 마. 제이키, 내가 제일 아끼는 건 너야."



왜 아끼기만 해, 날 사랑한다고 해야지, 그런 마음을 담아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난감함을 표한다. 제이키, 난......


"아냐, 됐어. 듣고 싶지 않아"
"제이크, 제이크!"




그때 그랬으면 안됐는데, 그렇게 루스터의 손을 놓치고 온 이후로 루스터는 사라졌다.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잘 읽는 자가, 어째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지. 거짓으로라도 사랑한다고 해주었다면, 난 기꺼이 눈치채지 못하고 웃어줬을 텐데.




루스터가 다시 나타난 것은 몇 년 뒤였다. 행맨은 전염병에 걸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허무하게. 통장에 쌓인 돈도, 내 명의의 집도 모두 남겨줄 사람 없이 이렇게 쓸쓸히. 마지막으로 널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귀신같이 루스터가 나타났다. 조금 핼쓱해진 루스터는 선선히 웃으며 말했다. 



"제이크, 죽지마."
"...어..떻..게"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나의 자리를 물려줄거야. 너는 불로불사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겠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의아한 눈이자 루스터는 서글프게 웃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줄래, 환생한 나를 꼭 찾으러 와주겠다고....."



눈이 감겼다. 얼굴 어느 즈음에 축축한 것이 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신의 눈물이라니,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비어냥거리듯 눈을 감았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



"행맨, 사랑해."
".........나...ㄷ"



컥, 행맨은 목이 졸리는 기분에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일까, 이건. 의아해하는 나에게 루스터는 서글픈 눈으로 날 바라본다. 


"....신은, 한 명의 인간만 사랑하지 못해"
"......뭐?"
"한 명의 인간만을 사랑한다면, 신계로 끌려가 벌을 받지. 지금 네가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아마 본능적으로 처벌을 막기위한 조치일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행맨, 날 사랑해줄 필요는 없어. 사랑은 내가 할테니까, 너는 그냥 받기만 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루스터는 아리게 웃었다. 눈 앞의 사내는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한 듯 했다. 왜 자신이 신의 자리를 넘겨줬는지, 왜 다시 사랑을 고백해오는지, 왜 이런 걸 알고 있는지에 대해. 어리숙한 어린 신이니 당연했다. 루스터는 행맨에게 이전 생의 기억을 듣던 날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우주가 태어날 때부터 창조신과 함께했던 수호신 중 한 명이었던 루스터는, 처음으로 인간을 사랑했다. 자신의 막강한 파워를 알고 있으니, 처벌은 당연히 가혹했다. 그날, 행맨이 떠나기 전 그에게 사랑을 소리쳤지만 행맨에게는 닿지 못했고 루스터는 신계로 이송되었다. 루스터는 처음으로 불멸을 후회했고, 사랑을 깨우쳤다.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음에도 루스터의 마음은 확고해져갔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없다면, 그에게 불멸을 주어야지. 




단지 그것뿐이었다. 지극히 불멸자의 시각으로, 인간이니 불로불사를 원할 거라는 그런 사고.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루스터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행맨을 가만히 보듬었다. 어리숙한 신은, 영문도 모른 채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


루스터는 가장 오래된 신답게 편법을 많이 알았다. 조금 돌아오긴 하겠지만, 필멸자가 될 방법이 있다던 그는 신계로 향하는 행맨을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배웅했다.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해서, 행맨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오래 시간을 쓴 줄 몰랐다. 


"나 왔어, 루스터"


그래서, 다시 인간계로 돌아왔을 때 루스터는 이미 땅에 묻히고 난 이후였다. 쓸쓸함에 묘비를 어루만지다가, 문득 루스터의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누구세요?"
"이 사람의... 오래된 친구. 너는 왜 여기 있니?"
".....친구를, 만나러요."


아, 이렇게나 오래되었던가. 행맨은 루스터의 모습과 닮은 청년을 올려다 보았다. 


"...루스터?"
"지금은 그런 이름이 아니지만, 행맨."
"......어떻게....."
"원래 인간이 되기란 그렇게 걸려, 나는 지금 2번의 생을 다시 살고 3번째 생이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너도, 날 오래 기다렸으니 비슷한 걸로 하자."



루스터는 행맨을 부드럽게 껴안고는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이전 생에는 못해줬던 그 말들을 가득 속삭여주었다. 행맨 역시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나도 사랑해....



마침내,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다. 







...



불멸자 루스터가 필멸자 행맨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루스터는 행맨을 구하고자 필멸자가 되고, 불멸자가 된 행맨이 필멸자 루스터를 기다리고, 필멸자 루스터는 다시 필멸자가 될 루스터를 기다려 겨우 사랑을 하게 된 둘.... 보고싶다... 상상할 땐 재밌었는데 막상 푸니까 개노잼인듯 미안........

2024.04.20 23:4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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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돌고 돌아 결국 서로에게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거 최고다ㅠㅠㅠㅠㅠ결국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사랑하니까 계속 근처에서 맴돌고 기다리고 지켜주었던 거잖아...오래 기다린만큼 영사해라ㅠㅠㅠㅠㅠㅠ
[Code: d8fa]
2024.04.21 00: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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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 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ㅠㅠㅠ 세기에 걸친 사랑이다 오래 걸렸지만 같이 행복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ㅠㅠㅠㅠ
[Code: e315]
2024.04.21 00: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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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문학이야............ 디스 이즈 예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b72e]
2024.04.21 01: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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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말그대로 영원히 사랑할일만 남았구나🥺
루행 영사해ㅠㅠㅠㅠ
[Code: 72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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