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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0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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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칼럼을 외면해버린 건 오스틴을 문학 수업에서도 가만히 있게 만들었어. 아마 칼럼은 알았겠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다시 고개돌리지 않는 오스틴이 왜 그러는지를. 그렇게 생각하면 스스로가 비겁한 겁쟁이처럼 느껴졌음. 하지만 뒷자리의 칼럼에게 느끼는 마음은 그런 부끄러움보다는 미안함이 컸기에 더 죄인이 된 기분이었지. 칼럼은 오스틴이 교실에 들어올 때에도 수업이 시작한 후에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 인사를 하는 대신 오스틴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책을 읽고 있었고, 수업 중에는 갑자기 쪽지를 불쑥 내밀어서 실없는 필담을 시작하거나 하지도 않았음. 수업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교실을 나갔는데 그때도 오스틴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지. 오스틴은 칼럼의 존재를 처음 인식한 어느 파티를 떠올림. 아직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였던 그 때. 알파와 오메가들의 파티에 눈치없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안주거리가 됐던 그 베타가 칼럼이라는 걸. 다시 생각하니까 마음이 쓰라렸음. 칼럼은 갑자기 그에게 드리워졌다가 다음날이면 사라져버리는 시혜적이고 변덕스러운 호의에도 익숙한 사람처럼, 또 어떤 선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걸 이미 잘 알고있는 것처럼 굴었음. 아마 칼럼은 오스틴이 자신에게 다시 선을 그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어쩔 수 없지. 베타잖아. 칼럼은 오스틴이 눈길만 찌푸려도 바로 물러나 시야에서 사라져줄 준비가 되어있을 테니.
자신이 한순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밀어내는 거라고 칼럼이 생각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오스틴은 말 그대로 죽고 싶은 심정이 됐지. 상처 받은 거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남은 수업은 전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기억이 안 남. 수업이 완전히 마치는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한무더기로 쏟아져나오는 복도에서 오스틴은 가방을 대충 멘 채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냈음. [엘리엇 시 분석하는거 뭐로 할지 정했어?] '아까는 내가 무시해서 미안' 이런 말도 아니고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과제 얘기나 하려는게 자신이 봐도 뻔뻔해 보였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그냥 텍스트 몇 자로 끝내고 싶지도 않았음. 그리고 칼럼이 다시 자신에게 반응해줄지 확인이 먼저 필요하기도 했고. 변명 같겠지만.
[그럴리가]
[도서관 가서 읽어보고 정하려고]
칼럼은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오스틴이 원하는 바를 다 아는 듯이 대답했지.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오스틴은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었음. [우리집에 책 다 있는데] 오스틴은 답장했고, 오스틴이 먼저 취하기 어려운 액션을 대신 하는 데에 재주가 있는게 아닐까 싶은 칼럼이 답장을 보내왔음. [그럼 너희집에서 빌려가도 돼?] [시집에 낙서 안할게 걱정마ㅋㅋ] 장난스러운 말투로 돌아온 걸 느끼면서 오스틴은 락커를 열어서 책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뒤이어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함. [정문에서 기다릴게]
집에 같이 오는 길에는 오늘 문학 수업에서 나눠줬던 지난 에세이 강평 과제의 점수 같은 거나 얘기하면서 시시덕거렸지. 지난번에 같이 공부를 했을 때하고는 다르게 이번에는 오스틴의 방으로 함께 올라갔음. 시집이 거기에 있다는 건 좋은 핑계가 되어줬음. 칼럼이 방바닥에 가방을 내려두고 방 안을 조금 둘러보는 사이에 오스틴은 한쪽 벽에 붙은 커다란 책장에서 T. S. 엘리엇의 책을 찾았음. 몇권을 꺼내고 뒤를 돌자 책상 근처에 서있던 칼럼도 뒤를 돌아 오스틴을 봤음. 어디서 많이 본 안경을 쓴 채로 웃고 있었지.
"이거 안 버렸네."
원래 본인 것이었으면서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웃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말이었지. "...그걸 왜 버려."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스틴은 얼굴에 약간 열이 오름. 사실 가끔 저녁에 공부하거나 책을 읽다가 집중이 안 되고 어지러울 때면 가끔 그걸 써본다는 건 칼럼은 모르겠지. 도수도 없는 안경을 써볼 때마다 생각함. 언제부터 이런 거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걸까? 불편했을텐데. 원래 베타들 중에는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애들이 많기야 하지만... 그걸 써보는 건 칼럼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기에 좋은 놀이였고 안경을 벗어서 책상위에 다시 고이 접어 놓으면서 지금은 맨얼굴만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음. 걔는 눈이 되게 다정하니까 이런 거 쓰고 다니면 손해지....
"뭐, 이젠 네 거니까."
웃으면서 안경을 벗어 원래 있던 곳에 둔 칼럼은 오스틴의 손에서 책을 가져감. 여기 앉아도 돼? 침대를 눈짓으로 가리키는 칼럼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칼럼이 자리를 잡고 앉았음. 한쪽 구석에 쌓아둔 책더미에서 가장 위에 있는 시집을 들고 오스틴에게 내민 칼럼은 오스틴이 그걸 받아들자 자신은 다른 책을 들고 벽에 기대 앉으려다가 자리를 좀 둘러봄.
"침대 되게 넓네. 굴러다녀도 되겠다."
내 침대는 이렇게 앉으면 벽에 등이 딱 닿거든. 그렇게 덧붙이면서 웃은 칼럼은 침대 위에 모로 누웠음. 한쪽 팔꿈치를 괸 채로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받쳐 짚고 다른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면서 읽기 시작했지. 오스틴은 칼럼이 건넨 시집을 아무 페이지나 펴고 눈을 억지로 옮기면서 생각함. 옆으로 누워도 내 침대보다 커다랗게 보이는데 굴려다녀도 되기는.... 건전하게 과제를 할 시간에 이상한 생각이 들까봐 정신을 다잡는데에 오스틴은 조금 오랜 시간을 씀.
과제에 필요한 작품에 표시를 해둬야 하니 책갈피를 찾으려고 고개를 들었던 오스틴은 칼럼이랑 눈이 마주침.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리는 걸 까먹어버렸음. 대신 바보 같은 말만 튀어나와.
"왜... 왜 쳐다봐?"
칼럼은 대답 대신에 그냥 웃기만 함. 웃지 말라고 하면 너무 화내는 것 같겠지? 그런 마음에 또 반응하는 방법을 잊은 오스틴이 눈빛을 책으로 옮겼다가 다시 올려서 눈을 마주쳤다 하니 칼럼은 다시 책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툭 말을 던짐. "그냥." 그러면서도 정말 '그냥' 본 건 아니라는듯이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다가 오스틴은 담아두었던 말을 꺼냄.
"아까 학교에서... 모르는 척 해서 미안."
몇 시간이나 속에서 맴돌던 말이라는 걸 칼럼이 알아줄까? 뜬금없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오늘이 완전히 지나버리기 전에는 해야할 말이고... 왠지 지금은 말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고.... 하지만 고뇌하는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질 틈은 없었음.
"괜찮아. 네 잘못도 아니고."
너무나 담백한 대답에 오스틴은 허탈함 섞인 안도를 느낌. 변명을 해도 칼럼은 다 받아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속에 있던 말을 조심조심 더 꺼내기 시작했지.
"친구들이― 아니 사실 걔들을 친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걔네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서... 너한테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응. 알아, 나랑 친하게 지내는 거 위험하잖아."
시집을 탁 덮고 책더미에서 다른 책을 꺼내고 거기에 방금까지 다 본 것을 올려두는 칼럼이 몸을 일으켜서 다시 침대 위에서 앉은 자세를 했음.
"나야 괜찮으니까 널 위해서는 그냥 비밀로 하자."
"비밀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까지 하면 내가 너한테 미안하단 말이야. 오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투정하는 말투가 된 것에 스스로도 놀랐음. 하지만 본인을 배제시켜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런 취급이 지극히 당연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은 칼럼의 태도가 속이 상하는 건 맞았기 때문에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겠지.
"그럼 너 친구들이랑 있을 때만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하자. 어때?"
타협안이랍시고 칼럼이 제시하는 내용도 여전히 속상했기 때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오스틴의 얼굴에 칼럼이 얕게 웃는 소리가 쏟아짐.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 건 나도 아니까 괜찮아. 너한테는 그런 거로 상처 안 받아."
"정말이야." 하며 진심을 담아서 웃는 얼굴이 다정해서 결국 오스틴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
집에 같이 가서 과제를 하자는 핑계도 몇 번 더 지나자 굳이 댈 필요가 없어졌음. 둘은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까지 느릿느릿 학교 안을 서성이다가 정문에서 만나면 같이 오스틴네 집에 가는 고정된 스케줄에 익숙해짐. 집 거실에서 같이 영화를 볼 때도 있었고 오스틴이 수영장 청소를 하는 걸 칼럼이 도와줄 때도 있었음. 어떤 날은 오스틴의 방에서 그냥 얘기만 계속 하기도 함. 오스틴의 방에 가면 칼럼은 이젠 익숙하다는 듯이 오스틴의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기도 하거나, 아니면 그냥 잠에 들 때도 있었음. 책을 읽다가 곁눈질을 하니 본인 침대에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 묻고 자고 있는 칼럼을 볼 때 오스틴의 기분이 어떤지는.... 그런 날에는 칼럼이 가고난 후 밤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울 때면 혼자 귀끝이 빨개지곤 하는 걸로 봐선 뻔한 일이지.
오스틴의 부모님이 칼럼을 보게된 날도 몇 번 생겼는데 오스틴은 칼럼이 베타라는 얘기를 굳이 하진 않았음. 베타인 애랑은 놀지 말라고 할만큼 꽉 막힌 부모님은 아니지만 먼저 그걸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칼럼은 겉보기에는 알파라고 생각될 체격인 탓인지 오스틴의 부모님은 본인들의 아들이 베타에게 푹 빠져있단 사실은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어. 그 대신 오스틴에게 "걔는 네 남자친구니?"라고 물어서 부모님이랑 같이 저녁 먹던 오스틴을 매우 당황스럽고 부끄럽게 만들었을 듯. "그냥 친구예요. 같이 문학 수업 듣다가 과제 파트너를 해서 친해지다 보니까―" 하면서 열심히 변명하는 얼굴은 새빨개졌지만 대충 남자친구냐는 질문에 음식 삼키다가 사레가 들려서 기침했던 탓이라고 넘어감.
아무튼 누가 보기에는 꼭 데이트하는 사이로도 보일 법한 그 관계에 열중하고 매일같이 칼럼이랑 나눈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 가끔 떠오르는 칼럼의 다정한 말이나 빤히 쳐다보다가 웃는 표정 같은걸 자기 전에 건져올려서 그 말은 무슨 의미로 한 걸까, 왜 그렇게 웃는 거지 하고 곱씹어보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오스틴은 점점 친구들의 파티에 가자는 요구를 거절하기 시작했음. 시험 준비 때문에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파티 가는 걸 연달아 피하는 것이 느껴진 건지 어느날은 오메가 친구가 "나랑 노는 거 싫어졌어?" 하면서 울먹이는 흉내를 내고 거기에 다른 알파 친구들도 서운하다느니 하며 유난스럽게 구는 탓에 또 결국 끌려가기도 했지만 그 친구들보다는 칼럼이랑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게 사실임. 하나 주의해야 했던 건 칼럼이랑 만나는 일이 아무리 보는 눈 적은 방과후에 이루어진다고는 해도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힐 거라는 사실이지만.
어제 파티 진짜 재미있었는데 왜 안왔냐고 하는 친구한테 다음엔 가겠다고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넘어가던 날이었지. 탄산수 병의 뚜껑을 따고 있을 때 앞쪽의 드링크바를 오가는 커다란 뒷모습이 보였음. 친구들 앞에서는 칼럼과 서로 아는 티를 안 내기로 정햇고 그렇게 한 지 오래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시야에 걸리는 걸 무시하지 못하겠는건 시선보다도 마음이 더 먼저 가니까 그럴 수밖에. 그래도 나름대로 아주 잠깐 흘긋거리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너 쟤랑 친해?"
그 말에 탄산수 병 입구를 입에 대려다가 고장난듯 멈춘 오스틴이었음.
"누구?"
"그 베타, 너 따라다니는 것 같았던―"
방황하는 손으로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 병을 다시 뚜껑을 닫아 트레이 위에 올려놓으면서 오스틴은 친구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음.
"있잖아, 조이가 어제 말해줬는데 너랑 쟤랑 학교 끝나고 같이 걸어가는 걸 이번주에 두 번이나 봤대!"
진짜냐고 묻는 눈빛이 단지 궁금함으로 빛나는 건 아니어 보였음. 이미 아는 게 많아 보이는 상태에서 떠보듯이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지. 변명할 거리도 잘 생각이 안 났음. 겨우겨우 짜낸 말은 선생님이 시켜서 공부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는 것이어서 친구들이 그 말을 믿지 않을거란 것도 알았음.
"진짜? 억지로 저런 애랑 같이 있어야 되는 거 너무 싫겠다~"
그 말에 나머지 알파들이 깔깔 웃어대는 걸 보면 어제 파티에서 자신과 칼럼이 무슨 사이인지 자기들끼리 얘기한 게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자기 애인이랑 눈빛을 주고받는 풋볼팀 주장을 필두로 다들 한마디씩 놀리듯 거들기 시작함.
"어쩌다 저런 병신새끼한테 봉사하게 된 거야?"
"야, 저러다가 저새끼가 니가 자기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냐?"
"근데 원래 베타새끼들 좀만 잘해줘도 기어오르잖아."
"내말이. 아마 지금쯤 저새낀 얘랑 사귀는 줄 알걸."
"소름끼치잖아 그런 소리 좀 하지마―"
마치 이 테이블에 오스틴이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만 나누는 대화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 같았지. 옆에 앉아있던 채드가 어깨에 팔을 휙 걸치더니 그 손으로 볼을 매만지면서 어딘가 화내는 기색의 목소리로 얘기함.
"오스틴. 조심해야지. 안 그러면 저새낀 니가 지한테 대주고 싶어하는 줄 알 거 아냐. 그렇게 되면 좋겠어?"
오스틴이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얼굴을 보자 그런 저급한 얘기는 한 적 없다는 듯 웃으면서 "화났어?" 하는 게 더 기분나빴음.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마.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오스틴은 나름대로 그게 칼럼에 대한 이야기를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음. 마치 베타인 애랑 사귄다는 오해를 받는게 수치스럽다는 듯이 구는거. 더 얘기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불쾌해하는 표졍으로 밥을 좀 먹으려다가도 음식이 입에 들어가질 않는 기분이라 트레이 위는 그대로였음. 자기들끼리 또 눈빛을 주고받는 애들 사이에서 더 앉아있는 것도 싫어져서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고 일어나려고 하던 그때였지.
"터너!"
채드가 오스틴의 등 뒤를 향해 크게 소리치면서 손을 들어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 가라앉음. 고개를 돌리자 트레이를 반납하고 식당을 나가고 있던 칼럼이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음. "여기야!" 하면서 채드는 다시 큰 소리로 칼럼을 부르면서 손은 마치 개를 부르듯이 꺼덕거렸음. 칼럼은 순진하게도 오스틴과 눈이 마주친 것을 신호로 알았는지 채드의 부름에 걸어오기 시작했지. 테이블 위로 긴 그림자가 지자 채드는 여전히 오스틴의 어깨를 점령한 채로 자신의 옆에 자리를 만들어 칼럼에게 앉으라며 짐짓 친절한 척을 함.
"오스틴이 그러는데 둘이 친하다면서."
"아... 그랬구나."
칼럼이 오스틴을 쳐다봤음. 웃으면서. 그건 마치... 오스틴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서 기뻐하는 그런 표정이었음. 오스틴을 보면서 웃는 얼굴을 가지고 알파들이 무슨 표정을 주고받는지는 모르는 것처럼.
"얘랑 친구면 우리랑도 친구지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지."
"난 채드고, 넌... 난 너 성밖에 모르네. 이름이?"
"칼럼, 칼럼 터너."
"워, 이름 되게 멋있네. 키도 크고. 넌 풋볼할 수도 있었겠다."
베타주제에 안 어울리게 좋은 이름과 체격을 가지고 있긴 해도 그건 너한테 아무 쓸모 없을 거란 뜻으로 조롱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칼럼은 나머지 알파들이랑도 한번씩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내내 웃고있었음. 그리고는 곧 다시 시선이 오스틴에게로 돌아왔음.
"왜 하나도 안 먹었어? 어디 아파?"
고개를 살짝 낮춰서 눈을 맞추면서 살피는 얼굴에는 온통 걱정뿐이어서 오스틴은 그게 더 괴로웠음. 좋아하는 애를 바보 만드는 것에 동참하고 있다는것에 자기혐오감이 들만큼.
피상적인 대화를 조금 주고 받던 무리에서 칼럼은 먼저 일어났겠지. 화학실습실은 멀어서 자기는 이제 가봐야겠다면서. 칼럼이 자리를 뜨기 전에 오스틴에게 "이따 끝나고 봐."하는 얘기를 하고 카페테리아를 나간 후 테이블은 잠깐 정적 후에 아주 큰 웃음소리로 떠들썩해짐. 봐봐, 저새끼 너랑 지가 사귀는 줄 알잖아. 누군가 그렇게 비아냥대는 사이에서 오스틴은 그냥 얼굴만 하얗게 질려있었음. "아, 저새끼 진짜 황당하네." 하며 아주 재미난걸 발견했다는 듯 떠들던 채드가 말함.
"저런 건 주제파악을 좀 하게 만들어줘야 되는데. 안 그래?"
오스틴한테 하는 말이었지. 뭘 꾸미려는 건지 몰라도 감이 좋지 않았음. 오스틴은 그낭 내버려두자고 했지만 그 얘기가 딱히 먹히지는 않았을거야.
"너 쟤한테 가서 우리 둘이 어떤 사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봐. 저새끼 대답 골때릴것 같아."
"...왜 그런 걸 해야 되는데."
"뭐 착각하고 있으면 우리가 고쳐줘야지. 응? 베타가 그러면 안 되니까. 우리도 이제 쟤 친구잖아."
어깨에 걸쳐져있던 손이 허리로 내려와서 오스틴은 불에 덴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음. 테이블을 떠나려는 팔이 붙잡혀서 흔들린 트레이 위가 지저분해졌어. 할 거지? 그렇게 묻는 채드의 손이 너무 세게 손목을 쥐어서 오스틴은 다급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손을 쳐냈음. 트레이를 반납하고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로 올라가는 동안 칼럼이 자신과 사귄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더라고 그런 거짓말로 친구들에게 둘러대면 의외로 일이 간단하게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지.
칼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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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칼럼을 외면해버린 건 오스틴을 문학 수업에서도 가만히 있게 만들었어. 아마 칼럼은 알았겠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다시 고개돌리지 않는 오스틴이 왜 그러는지를. 그렇게 생각하면 스스로가 비겁한 겁쟁이처럼 느껴졌음. 하지만 뒷자리의 칼럼에게 느끼는 마음은 그런 부끄러움보다는 미안함이 컸기에 더 죄인이 된 기분이었지. 칼럼은 오스틴이 교실에 들어올 때에도 수업이 시작한 후에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 인사를 하는 대신 오스틴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책을 읽고 있었고, 수업 중에는 갑자기 쪽지를 불쑥 내밀어서 실없는 필담을 시작하거나 하지도 않았음. 수업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교실을 나갔는데 그때도 오스틴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지. 오스틴은 칼럼의 존재를 처음 인식한 어느 파티를 떠올림. 아직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였던 그 때. 알파와 오메가들의 파티에 눈치없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안주거리가 됐던 그 베타가 칼럼이라는 걸. 다시 생각하니까 마음이 쓰라렸음. 칼럼은 갑자기 그에게 드리워졌다가 다음날이면 사라져버리는 시혜적이고 변덕스러운 호의에도 익숙한 사람처럼, 또 어떤 선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걸 이미 잘 알고있는 것처럼 굴었음. 아마 칼럼은 오스틴이 자신에게 다시 선을 그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어쩔 수 없지. 베타잖아. 칼럼은 오스틴이 눈길만 찌푸려도 바로 물러나 시야에서 사라져줄 준비가 되어있을 테니.
자신이 한순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밀어내는 거라고 칼럼이 생각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오스틴은 말 그대로 죽고 싶은 심정이 됐지. 상처 받은 거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남은 수업은 전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기억이 안 남. 수업이 완전히 마치는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한무더기로 쏟아져나오는 복도에서 오스틴은 가방을 대충 멘 채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냈음. [엘리엇 시 분석하는거 뭐로 할지 정했어?] '아까는 내가 무시해서 미안' 이런 말도 아니고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과제 얘기나 하려는게 자신이 봐도 뻔뻔해 보였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그냥 텍스트 몇 자로 끝내고 싶지도 않았음. 그리고 칼럼이 다시 자신에게 반응해줄지 확인이 먼저 필요하기도 했고. 변명 같겠지만.
[그럴리가]
[도서관 가서 읽어보고 정하려고]
칼럼은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오스틴이 원하는 바를 다 아는 듯이 대답했지.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오스틴은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었음. [우리집에 책 다 있는데] 오스틴은 답장했고, 오스틴이 먼저 취하기 어려운 액션을 대신 하는 데에 재주가 있는게 아닐까 싶은 칼럼이 답장을 보내왔음. [그럼 너희집에서 빌려가도 돼?] [시집에 낙서 안할게 걱정마ㅋㅋ] 장난스러운 말투로 돌아온 걸 느끼면서 오스틴은 락커를 열어서 책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뒤이어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함. [정문에서 기다릴게]
집에 같이 오는 길에는 오늘 문학 수업에서 나눠줬던 지난 에세이 강평 과제의 점수 같은 거나 얘기하면서 시시덕거렸지. 지난번에 같이 공부를 했을 때하고는 다르게 이번에는 오스틴의 방으로 함께 올라갔음. 시집이 거기에 있다는 건 좋은 핑계가 되어줬음. 칼럼이 방바닥에 가방을 내려두고 방 안을 조금 둘러보는 사이에 오스틴은 한쪽 벽에 붙은 커다란 책장에서 T. S. 엘리엇의 책을 찾았음. 몇권을 꺼내고 뒤를 돌자 책상 근처에 서있던 칼럼도 뒤를 돌아 오스틴을 봤음. 어디서 많이 본 안경을 쓴 채로 웃고 있었지.
"이거 안 버렸네."
원래 본인 것이었으면서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웃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말이었지. "...그걸 왜 버려."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스틴은 얼굴에 약간 열이 오름. 사실 가끔 저녁에 공부하거나 책을 읽다가 집중이 안 되고 어지러울 때면 가끔 그걸 써본다는 건 칼럼은 모르겠지. 도수도 없는 안경을 써볼 때마다 생각함. 언제부터 이런 거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걸까? 불편했을텐데. 원래 베타들 중에는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애들이 많기야 하지만... 그걸 써보는 건 칼럼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기에 좋은 놀이였고 안경을 벗어서 책상위에 다시 고이 접어 놓으면서 지금은 맨얼굴만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음. 걔는 눈이 되게 다정하니까 이런 거 쓰고 다니면 손해지....
"뭐, 이젠 네 거니까."
웃으면서 안경을 벗어 원래 있던 곳에 둔 칼럼은 오스틴의 손에서 책을 가져감. 여기 앉아도 돼? 침대를 눈짓으로 가리키는 칼럼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칼럼이 자리를 잡고 앉았음. 한쪽 구석에 쌓아둔 책더미에서 가장 위에 있는 시집을 들고 오스틴에게 내민 칼럼은 오스틴이 그걸 받아들자 자신은 다른 책을 들고 벽에 기대 앉으려다가 자리를 좀 둘러봄.
"침대 되게 넓네. 굴러다녀도 되겠다."
내 침대는 이렇게 앉으면 벽에 등이 딱 닿거든. 그렇게 덧붙이면서 웃은 칼럼은 침대 위에 모로 누웠음. 한쪽 팔꿈치를 괸 채로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받쳐 짚고 다른 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면서 읽기 시작했지. 오스틴은 칼럼이 건넨 시집을 아무 페이지나 펴고 눈을 억지로 옮기면서 생각함. 옆으로 누워도 내 침대보다 커다랗게 보이는데 굴려다녀도 되기는.... 건전하게 과제를 할 시간에 이상한 생각이 들까봐 정신을 다잡는데에 오스틴은 조금 오랜 시간을 씀.
과제에 필요한 작품에 표시를 해둬야 하니 책갈피를 찾으려고 고개를 들었던 오스틴은 칼럼이랑 눈이 마주침.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리는 걸 까먹어버렸음. 대신 바보 같은 말만 튀어나와.
"왜... 왜 쳐다봐?"
칼럼은 대답 대신에 그냥 웃기만 함. 웃지 말라고 하면 너무 화내는 것 같겠지? 그런 마음에 또 반응하는 방법을 잊은 오스틴이 눈빛을 책으로 옮겼다가 다시 올려서 눈을 마주쳤다 하니 칼럼은 다시 책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툭 말을 던짐. "그냥." 그러면서도 정말 '그냥' 본 건 아니라는듯이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다가 오스틴은 담아두었던 말을 꺼냄.
"아까 학교에서... 모르는 척 해서 미안."
몇 시간이나 속에서 맴돌던 말이라는 걸 칼럼이 알아줄까? 뜬금없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오늘이 완전히 지나버리기 전에는 해야할 말이고... 왠지 지금은 말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고.... 하지만 고뇌하는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질 틈은 없었음.
"괜찮아. 네 잘못도 아니고."
너무나 담백한 대답에 오스틴은 허탈함 섞인 안도를 느낌. 변명을 해도 칼럼은 다 받아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속에 있던 말을 조심조심 더 꺼내기 시작했지.
"친구들이― 아니 사실 걔들을 친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걔네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서... 너한테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응. 알아, 나랑 친하게 지내는 거 위험하잖아."
시집을 탁 덮고 책더미에서 다른 책을 꺼내고 거기에 방금까지 다 본 것을 올려두는 칼럼이 몸을 일으켜서 다시 침대 위에서 앉은 자세를 했음.
"나야 괜찮으니까 널 위해서는 그냥 비밀로 하자."
"비밀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까지 하면 내가 너한테 미안하단 말이야. 오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투정하는 말투가 된 것에 스스로도 놀랐음. 하지만 본인을 배제시켜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런 취급이 지극히 당연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은 칼럼의 태도가 속이 상하는 건 맞았기 때문에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겠지.
"그럼 너 친구들이랑 있을 때만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하자. 어때?"
타협안이랍시고 칼럼이 제시하는 내용도 여전히 속상했기 때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오스틴의 얼굴에 칼럼이 얕게 웃는 소리가 쏟아짐.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 건 나도 아니까 괜찮아. 너한테는 그런 거로 상처 안 받아."
"정말이야." 하며 진심을 담아서 웃는 얼굴이 다정해서 결국 오스틴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
집에 같이 가서 과제를 하자는 핑계도 몇 번 더 지나자 굳이 댈 필요가 없어졌음. 둘은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까지 느릿느릿 학교 안을 서성이다가 정문에서 만나면 같이 오스틴네 집에 가는 고정된 스케줄에 익숙해짐. 집 거실에서 같이 영화를 볼 때도 있었고 오스틴이 수영장 청소를 하는 걸 칼럼이 도와줄 때도 있었음. 어떤 날은 오스틴의 방에서 그냥 얘기만 계속 하기도 함. 오스틴의 방에 가면 칼럼은 이젠 익숙하다는 듯이 오스틴의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기도 하거나, 아니면 그냥 잠에 들 때도 있었음. 책을 읽다가 곁눈질을 하니 본인 침대에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 묻고 자고 있는 칼럼을 볼 때 오스틴의 기분이 어떤지는.... 그런 날에는 칼럼이 가고난 후 밤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울 때면 혼자 귀끝이 빨개지곤 하는 걸로 봐선 뻔한 일이지.
오스틴의 부모님이 칼럼을 보게된 날도 몇 번 생겼는데 오스틴은 칼럼이 베타라는 얘기를 굳이 하진 않았음. 베타인 애랑은 놀지 말라고 할만큼 꽉 막힌 부모님은 아니지만 먼저 그걸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칼럼은 겉보기에는 알파라고 생각될 체격인 탓인지 오스틴의 부모님은 본인들의 아들이 베타에게 푹 빠져있단 사실은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어. 그 대신 오스틴에게 "걔는 네 남자친구니?"라고 물어서 부모님이랑 같이 저녁 먹던 오스틴을 매우 당황스럽고 부끄럽게 만들었을 듯. "그냥 친구예요. 같이 문학 수업 듣다가 과제 파트너를 해서 친해지다 보니까―" 하면서 열심히 변명하는 얼굴은 새빨개졌지만 대충 남자친구냐는 질문에 음식 삼키다가 사레가 들려서 기침했던 탓이라고 넘어감.
아무튼 누가 보기에는 꼭 데이트하는 사이로도 보일 법한 그 관계에 열중하고 매일같이 칼럼이랑 나눈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 가끔 떠오르는 칼럼의 다정한 말이나 빤히 쳐다보다가 웃는 표정 같은걸 자기 전에 건져올려서 그 말은 무슨 의미로 한 걸까, 왜 그렇게 웃는 거지 하고 곱씹어보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오스틴은 점점 친구들의 파티에 가자는 요구를 거절하기 시작했음. 시험 준비 때문에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파티 가는 걸 연달아 피하는 것이 느껴진 건지 어느날은 오메가 친구가 "나랑 노는 거 싫어졌어?" 하면서 울먹이는 흉내를 내고 거기에 다른 알파 친구들도 서운하다느니 하며 유난스럽게 구는 탓에 또 결국 끌려가기도 했지만 그 친구들보다는 칼럼이랑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게 사실임. 하나 주의해야 했던 건 칼럼이랑 만나는 일이 아무리 보는 눈 적은 방과후에 이루어진다고는 해도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힐 거라는 사실이지만.
어제 파티 진짜 재미있었는데 왜 안왔냐고 하는 친구한테 다음엔 가겠다고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넘어가던 날이었지. 탄산수 병의 뚜껑을 따고 있을 때 앞쪽의 드링크바를 오가는 커다란 뒷모습이 보였음. 친구들 앞에서는 칼럼과 서로 아는 티를 안 내기로 정햇고 그렇게 한 지 오래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시야에 걸리는 걸 무시하지 못하겠는건 시선보다도 마음이 더 먼저 가니까 그럴 수밖에. 그래도 나름대로 아주 잠깐 흘긋거리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너 쟤랑 친해?"
그 말에 탄산수 병 입구를 입에 대려다가 고장난듯 멈춘 오스틴이었음.
"누구?"
"그 베타, 너 따라다니는 것 같았던―"
방황하는 손으로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 병을 다시 뚜껑을 닫아 트레이 위에 올려놓으면서 오스틴은 친구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음.
"있잖아, 조이가 어제 말해줬는데 너랑 쟤랑 학교 끝나고 같이 걸어가는 걸 이번주에 두 번이나 봤대!"
진짜냐고 묻는 눈빛이 단지 궁금함으로 빛나는 건 아니어 보였음. 이미 아는 게 많아 보이는 상태에서 떠보듯이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지. 변명할 거리도 잘 생각이 안 났음. 겨우겨우 짜낸 말은 선생님이 시켜서 공부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는 것이어서 친구들이 그 말을 믿지 않을거란 것도 알았음.
"진짜? 억지로 저런 애랑 같이 있어야 되는 거 너무 싫겠다~"
그 말에 나머지 알파들이 깔깔 웃어대는 걸 보면 어제 파티에서 자신과 칼럼이 무슨 사이인지 자기들끼리 얘기한 게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자기 애인이랑 눈빛을 주고받는 풋볼팀 주장을 필두로 다들 한마디씩 놀리듯 거들기 시작함.
"어쩌다 저런 병신새끼한테 봉사하게 된 거야?"
"야, 저러다가 저새끼가 니가 자기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냐?"
"근데 원래 베타새끼들 좀만 잘해줘도 기어오르잖아."
"내말이. 아마 지금쯤 저새낀 얘랑 사귀는 줄 알걸."
"소름끼치잖아 그런 소리 좀 하지마―"
마치 이 테이블에 오스틴이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만 나누는 대화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 같았지. 옆에 앉아있던 채드가 어깨에 팔을 휙 걸치더니 그 손으로 볼을 매만지면서 어딘가 화내는 기색의 목소리로 얘기함.
"오스틴. 조심해야지. 안 그러면 저새낀 니가 지한테 대주고 싶어하는 줄 알 거 아냐. 그렇게 되면 좋겠어?"
오스틴이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얼굴을 보자 그런 저급한 얘기는 한 적 없다는 듯 웃으면서 "화났어?" 하는 게 더 기분나빴음.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마.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오스틴은 나름대로 그게 칼럼에 대한 이야기를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음. 마치 베타인 애랑 사귄다는 오해를 받는게 수치스럽다는 듯이 구는거. 더 얘기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불쾌해하는 표졍으로 밥을 좀 먹으려다가도 음식이 입에 들어가질 않는 기분이라 트레이 위는 그대로였음. 자기들끼리 또 눈빛을 주고받는 애들 사이에서 더 앉아있는 것도 싫어져서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고 일어나려고 하던 그때였지.
"터너!"
채드가 오스틴의 등 뒤를 향해 크게 소리치면서 손을 들어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 가라앉음. 고개를 돌리자 트레이를 반납하고 식당을 나가고 있던 칼럼이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음. "여기야!" 하면서 채드는 다시 큰 소리로 칼럼을 부르면서 손은 마치 개를 부르듯이 꺼덕거렸음. 칼럼은 순진하게도 오스틴과 눈이 마주친 것을 신호로 알았는지 채드의 부름에 걸어오기 시작했지. 테이블 위로 긴 그림자가 지자 채드는 여전히 오스틴의 어깨를 점령한 채로 자신의 옆에 자리를 만들어 칼럼에게 앉으라며 짐짓 친절한 척을 함.
"오스틴이 그러는데 둘이 친하다면서."
"아... 그랬구나."
칼럼이 오스틴을 쳐다봤음. 웃으면서. 그건 마치... 오스틴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서 기뻐하는 그런 표정이었음. 오스틴을 보면서 웃는 얼굴을 가지고 알파들이 무슨 표정을 주고받는지는 모르는 것처럼.
"얘랑 친구면 우리랑도 친구지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지."
"난 채드고, 넌... 난 너 성밖에 모르네. 이름이?"
"칼럼, 칼럼 터너."
"워, 이름 되게 멋있네. 키도 크고. 넌 풋볼할 수도 있었겠다."
베타주제에 안 어울리게 좋은 이름과 체격을 가지고 있긴 해도 그건 너한테 아무 쓸모 없을 거란 뜻으로 조롱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칼럼은 나머지 알파들이랑도 한번씩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내내 웃고있었음. 그리고는 곧 다시 시선이 오스틴에게로 돌아왔음.
"왜 하나도 안 먹었어? 어디 아파?"
고개를 살짝 낮춰서 눈을 맞추면서 살피는 얼굴에는 온통 걱정뿐이어서 오스틴은 그게 더 괴로웠음. 좋아하는 애를 바보 만드는 것에 동참하고 있다는것에 자기혐오감이 들만큼.
피상적인 대화를 조금 주고 받던 무리에서 칼럼은 먼저 일어났겠지. 화학실습실은 멀어서 자기는 이제 가봐야겠다면서. 칼럼이 자리를 뜨기 전에 오스틴에게 "이따 끝나고 봐."하는 얘기를 하고 카페테리아를 나간 후 테이블은 잠깐 정적 후에 아주 큰 웃음소리로 떠들썩해짐. 봐봐, 저새끼 너랑 지가 사귀는 줄 알잖아. 누군가 그렇게 비아냥대는 사이에서 오스틴은 그냥 얼굴만 하얗게 질려있었음. "아, 저새끼 진짜 황당하네." 하며 아주 재미난걸 발견했다는 듯 떠들던 채드가 말함.
"저런 건 주제파악을 좀 하게 만들어줘야 되는데. 안 그래?"
오스틴한테 하는 말이었지. 뭘 꾸미려는 건지 몰라도 감이 좋지 않았음. 오스틴은 그낭 내버려두자고 했지만 그 얘기가 딱히 먹히지는 않았을거야.
"너 쟤한테 가서 우리 둘이 어떤 사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봐. 저새끼 대답 골때릴것 같아."
"...왜 그런 걸 해야 되는데."
"뭐 착각하고 있으면 우리가 고쳐줘야지. 응? 베타가 그러면 안 되니까. 우리도 이제 쟤 친구잖아."
어깨에 걸쳐져있던 손이 허리로 내려와서 오스틴은 불에 덴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음. 테이블을 떠나려는 팔이 붙잡혀서 흔들린 트레이 위가 지저분해졌어. 할 거지? 그렇게 묻는 채드의 손이 너무 세게 손목을 쥐어서 오스틴은 다급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손을 쳐냈음. 트레이를 반납하고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로 올라가는 동안 칼럼이 자신과 사귄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더라고 그런 거짓말로 친구들에게 둘러대면 의외로 일이 간단하게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지.
칼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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