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91302408
view 1439
2024.04.18 05:29
팩트 하나: 인게임에서는 매번 비버뱅 아저씨를 폭파시키느라 공작송이 버섯을 따본 적이 없음.
하지만 가폭남의 사망 vs 버섯 따기 하면 전자의 만족감이 후자를 압살하는거 아닌가?
물론 잘하면 버섯도 따고 가폭남도 저세상으로 날려보낼 수 있으니 성실한 붕들이라면 품을 좀 들여서라도 시도해보길 바란다


Baldur's Gate 3_20240324195118.png


3막 아스타리온 승천 ㅅㅍㅈㅇ?


---------------------------------------------


 

너는 아주 오래간만에 해묵은 관용표현을 돌이킨다. '하여간 입이 방정이다.' 너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대충 거짓말을 던진 대가로 수많은 모험가들의 편도행 여행길이 되어버린 암흑의 땅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게일의 행선지는 언더다크가 맞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가 네 말에 눈치껏 동의했다고 생각했지만, 여태껏 군말 없이 네 길동무가 되어주고 있으니 그만큼은 정말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 여정으로 게일의 바람은 충족시키지 않겠나, …라는 식으로 너는 필사적인 자기합리화에 몰두하는 중이다. 


 

솔직히 말해 너는 나흘간 게일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것을 빚졌다. 만일 그가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생긴다면(생긴다면 말이지만), 너는 할 수 있는 한 그를 도와주고 싶다. 더군다나 언더다크로 내려가는 길에 꽤 강해보이는 일행과 임시로 합류하게 되었으니 마침 운이 좋게 되었다 싶다. 너는 게일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후에 홀로 잽싸게 지상으로 도망나오면 되는 것이다. 젠타림 운송 작전의 소규모 버전인 셈이다. 동료를 도와주고, 마음의 빚도 내려놓고,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이타심도 충족시켜주고. 일석삼조로 완벽하군.


 

물론 세상만사가 너의 생각대로 느긋하게 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생애 처음 방문한 언더다크의 땅은… 야광 버섯이 많고, 야광 버섯이 엄청나게 많고, 게다가 그 야광 버섯이 폭발하기까지 하는 땅이다, 정도의 감상이다. 게일은 능숙하게 화염살을 던져 비버뱅이라는 이름의 폭발 버섯들을 정리한다. "이 땅을 거닐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해. 개중 비버뱅은 특히나 위험하지! 이 연두색의 둥근 버섯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무해해보이지만, 마이코니드가 아닌 개체가 접근하면 순식간에 팽창하며 화염을 쏟아내거든. 그뿐만이 아냐. 그후 씨앗 퍼지듯 확산하는 유독가스는 독에 내성이 없는 생명체가 마시면 즉시 중독 증세를 유발하는데…," "알았으니까 설명은 거기까지 하자. 지금 네가 그 유독가스를 다 마시게 생겼다고." 다행히도 그후 대니가 모두에게 독 보호 마법을 걸어준 덕분에 너희는 짙푸른 가스 더미를 수월하게 헤치며 나아간다.


 

제라드는 끊임없이 설명을 쏟아내는 게일의 폭넓은 지식이 순수하게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는 게일이 지닌 수다의 포문을 손쉽게 열어준다. 


 

"게일, 언더다크에 관해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이곳을 자주 방문했습니까? 아니면 장기간에 걸친 연구의 결과인가요?"


"오, 지금으로부터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군('그에게 오래전이면 십년 전의 일쯤 되려나', 너는 엿들으면서 생각한다). 그때는 다른 동료들이 내 곁에 있었어. 그들과 많은 모험을 했지. 정말 많은 모험을 말이야. 언제 한번은 언더다크로 내려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이 신비스러운 땅을 묘사하던 수많은 서적들이 거짓을 진술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지. 실로 경이로운 나날이었어. 이론과 실제가 눈앞에서 완벽하게 결합하던 때의 황홀경이란! 지금도 그걸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내 어휘력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야."


"이 땅에는 아름다운 것들만 있지는 않지요. 여기서 상대한 것 중에 특별히 고역스러웠던 생명체는 없었습니까?"


"그건 고민해봐야겠는걸…," 게일은 몹시 심각하게 고민에 잠기더니 마침내 하나를 떠올린다. "아하, 그러고보니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오던 후크 호러들이 있었군. 그 녀석들은 정말 고약했어. 늘 어둠 사이에 매복해있다가 우리들을 기습했던 탓에, 제대로 무기를 꺼내들지도 못한 채로 놈들과 마주해야 했거든. 게다가 녀석들이 지원군을 부르는 소리를 내지르면 상황이 정말, 정말, 정말 곤혹스러워졌고 말야."


"후크 호러라, 저는 놈들이 남긴 흔적만 본게 전부입니다. 실제로 맞서봤다니 대단하군요. 놈들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독수리처럼 생긴 부리, 깃털이 난 목, 등까지 휘어지는 더듬이, 키틴질의 갑옷을 갖춰입은 몸체, 그리고 앞다리에는 한 쌍의 낫이나 다름없는 갈고리를 달고 있지. 새와 딱정벌레와 사마귀를 합쳐놓은 것 같은 모양새랄까! 가끔은 아이들의 악몽에 나오는 괴물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렇습니까?" 제라드가 놀라워하며 덧붙인다. "당신의 설명에 따르면, 딱 저렇게 생겼겠군요?"


"그렇지, 정확해." 게일이 유쾌하게 동의한다. "그런데 저건 진짜같이 생겼는걸."


너는 딱딱거리며 울려퍼지는 메아리에 소름돋아하며 묻는다. "…설마 저게 모형은 아니겠지?"


 

30초 후에 너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일사분란하게 무기를 꺼내든다. 천만다행으로 준비가 늦지는 않았다. 게일의 설명처럼 후크 호러가 기괴하기 짝이 없는 포효를 내지르자 제라드가 거침없이 전진하고 너는 암석 뒷편으로 몸을 숙인다. 제라드의 뒤를 따라 대니가 활을 꺼내들고 사격 범위권으로 달리는 것이 보인다. 두 사람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후크 호러의 도약력과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물이다. 아마 게일은 둘에게 그것을 경고하려했지 싶다. "이봐, 너무 무턱대고 거리를 좁히면 안 돼! 자칫하면-" 그때 어린아이들의 악몽에나 나올 것 같은 괴생명체가 허공으로 뛰쳐오른다.


 

후크 호러의 도약은 거의 비행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놈은 사정권으로 도달한 팔라딘과 클레릭을 덮치듯이 바닥에 착지한다. 그 충격에 대니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며 넘어진다. 제라드는 위태롭게 비틀거리지만, 적어도 대지에 두 발을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그가 매섭게 내지른 도끼는 번번히 허공을 가를 뿐이다. 어둠에 녹아들어있는 후크 호러가 그토록 민첩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너는 처음 알게 된다. 


 

너는 신속하게 활을 꺼내 화살을 매긴다. 암석이 네 전신을 단단히 가려주고 있는 덕분에, 너는 언제든지 놈의 허점을 칠 수 있다. 너는 제라드가 후크 호러의 연속 날질에 당해 나가떨어질 때를 노려 원거리 공격을 시도하려 한다. 그 순간 놈의 눈이 번뜩이며 너를 향해 돈다. 너는 그만 욕을 뱉고 싶어진다. 아니 씨발, 니가 지금 여길 보면 안 되지! 


 

게일의 마법이 타이밍 좋게 놈에게로 작렬한다. 마치 시간의 손아귀에 압착당한 양 후크 호러의 움직임이 멎는 것이 보인다. 괴물 포박 주문이 틀림없다. 너는 고난도의 주문을 소마법 쓰듯이 써버리는 게일의 담대함에 놀라면서 아예 암석 위로 올라가버린다. 고지대의 이점은 네가 놈의 신체 어디에든 화살을 박아넣기 쉽게 만들어준다. 너는 아예 화살을 괴물 척결 특화로 바꿔 잡고 시위를 당긴다. 화살촉이 손끝을 떠나는 순간부터 확신이 선다: 너는 치명타를 먹일 것이고, 후크 호러가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는 소리가 사위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것이다.


 

네 예상대로 된다. 이어지는 제라드의 참격이 놈을 확실하게 끝장낸다. 허나 그것이 상황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전장 건너편을 응시하는 게일의 시선을 따라가니 속속들이 지원군이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다. 어둠 사이로 번뜩이는 네 개의 불덩이가 등장하자 게일이 외친다. "데오니, 빛 마법을 할 줄 안다면 저들에게로 던져! 저들의 시신경은 빛에 과민해!" 


 

대니가 즉각 조언에 따른다. 그가 시전한 햇빛이 두 마리의 후크 호러에게로 작렬하자, 놈들이 시각을 잃은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보인다. 밝은 빛 때문에 원거리 적중률도 떨어질 듯해 너는 단검 두 자루를 뽑아들고 놈들에게로 돌격한다. 그러나 한 놈이 과감하게 빛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너는 검 한 자루를 포기하고 빠르게 피리를 뽑아든다. 통해라!


 

네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불협화음의 속삭임이 놈에게 적중한다. 행운의 신, 타이모라여 만세! 너는 공포의 이름을 하고 공포에 잔뜩 사로잡혀있는 아이러니에게 달려든다. 반격당할 걱정 없는 표적에게 실컷 칼침을 먹여준 다음에도, 공포에서 벗어난 후크 호러는 시야를 막는 강렬한 빛 때문에 결코 너를 후려치지 못한다. 놈의 낫질을 민첩하게 피하며 카운터를 먹여주는 내내 너는 거의 고양감에 사로잡힐 것 같다. 남아있는 한 놈 역시 제라드의 강타와 대니의 상처 유발에 당해 빈사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햇빛이 점점 가물어들며 너희 모두가 무력하게 어둠의 손아귀에 넘어가기 직전, 게일이 먼곳에서 주문을 왼다. 전격의 살기넘치는 격류가 너희를 휩쓸고 지나가자 남아있는 것은 세 마리의 묵직한 고깃덩어리 뿐이다. 


 

너는 제자리에 냅다 주저앉는다. 전신을 계속 긴장 상태에 두고 있었더니 삭신이 쑤신다. 제라드가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이 들린다. "당신들은 괴물을 상대하는 지식이 굉장하군요. 놈들을 처치하는 능력도 상당하시고요." 너는 그 설명이 너를 제외하고 게일에게나 어울린다고 받아넘기려다가, 피로함에 대자로 누워버린다. 



 

불 마법으로 모닥불을 피워놓고 구운 염소 고기와 치즈를 뜯어먹으면서, 너희는 밤새도록 영웅심에 사로잡힌 것처럼 떠들어댄다. 대니가 아침의 군주를 향해 침묵 기도를 드리는 동안, 제라드는 너희에게 다종다양한 주제로 질문을 던지고, 게일은 아는 것들을 다섯 문장 이상씩 설명하고, 너는 양념을 곁들이듯 첨언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져대는 시간을 보낸다. 


 

너희의 밤은 어제보다 소란스럽다. 제라드는 너와 게일의 공통점을 신기할 정도로 자극한다: 칭찬에 약하다는 점이다. 아마 본인은 자각 없이 순수하게 감탄하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 너는 세계를 다섯 번쯤 구한 용사처럼 오만방자해져 있다. 아아, 그렇지. 후크 호러는 처음 상대해본 거였는데 말이야. 놈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게 어렵진 않더라고. 내 실력 진짜 끝내주지? 얼마든지 칭찬하시게나. 실상 그것은 게일의 조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덕분인데도 너는 주어지는 칭찬을 마다할 생각이 없다. 최근 네 분수 이상의 칭찬을 다수 받은 부작용인지 너는 매사에 퍽 기고만장해져 있다. 제라드는 순진하게도 감탄사를 내뱉는다.


 

"훌륭하십니다! 저희가 돕겠다고 나섰습니다만 오히려 도움을 받을 정도였지요. 실로 유능하신 분들이군요. 또 어떤 재주를 가지고 계십니까?"


"흠, 귀가 좋아서 염탐을 좀 할 줄 알고, 피리도 꽤 불줄 알고, 변변치 않지만 글을 쓰는 재주도 가지고 있다네." 이전의 너였다면 마지막 것은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날 밤 게일이 건넸던 말들이 네게 자신감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글을! 문학적 소양도 갖춘 여행자분이셨습니까?" 


 

제라드의 눈빛이 동녘에서 처음 뜨는 아침 해처럼 번쩍인다. 아, 참으로. 남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외경의 빛이란 얼마나 달콤한가! 


 

"제 은사께서도 '검을 휘두르는 재주는 금치산자에게도 있다. 진정한 전사라면 정신과 육체를 쌍둥이 형제처럼 수양해야 마땅하다'라며 지적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곤 했습니다. 저도 틈이 날 때마다 책을 가까이하며 독서를 제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요."


게일이 화색이 도는 목소리로 응수한다. "그분 참 현명한 은사셨군! 책이야말로 세상을 응축시켜놓은 지혜의 장서長書라 할 수 있지. 독서를 한다는 건,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비밀을 내 손으로 직접 더듬어 탐독해가는 양이나 다름없어. 수백 수천 번을 경험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지."


"그 말씀이 옳습니다. 혹시 무슨 글을 쓰시는지요? 사실 제 눈앞에 계신 분이 대단한 작가님이신 것은 아닙니까?"


"뭐,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니다마는!" 다행 중 불행으로 네 흥이 극에 달했다. 너는 얼간이같은 콧소리를 내뱉고는 배낭에서 책을 꺼낸다. 첫 출간의 기념으로 지니고 다니는 <밤의 은밀한 속삭임 1권> 초판본이다. "이 책이야. 한번 읽어볼래? 감상은 천천히 말해줘도 되니까 말이야."


 

제라드가 호기심이 빛나는 눈으로 네 책을 받아든다. 그는 모범적인 자세로 독서에 골몰하기 시작한다. 너는 들뜬 기분으로 네 책에 집중하는 그를 바라보지만, 책이 여섯 장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그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지기 시작한다. 일곱 장째부터는 단정한 입매가 너비를 벌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인다. 그의 피부가 목깃에서부터 서서히 색을 바꾸고 있는 듯하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네가 그 팔라딘에게 그런 책을 건네버린 순간부터가 크나큰 실수였음이 분명하다. 너는 곧이어 게일과 함께 포물선을 그리며 저편으로 날아가는 <밤의 은밀한 속삭임 1권>을 응시하고 있다. 


 

너는 떨떠름한 얼굴로 제라드를 돌아본다.


 

"어…, 책에서 갑자기 이빨이 튀어나왔거나 한 건 아니지? 난 또 신종 미믹이 생겼나 하고."


"그,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티플링의 붉은 피부가 작열 광선 수백 개를 동시에 맞은 양 달아올랐다. 제라드는 저를 멍하니 주목하는 세 쌍의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 느낌이다. 그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목청을 높여 외친다.


 

"설마 저 책을 저 말고도 다른 분들에게 읽혔습니까?! 저런… 저런 것을요!!"


"응? 1권이 제일 잘 팔렸긴 해."


"'1권'이라고요?!"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라하다가 재차 경악한다. "'제일 잘 팔렸'다고요!!"


네 안에서 서서히 불쾌함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어, 그럼 안 되는 이유라도 있냐? 도대체 뭐 때문에 유난을 떨고 있는 거야. 통속소설 처음 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라드는 아예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있다. 그의 입술이 온갖 모양으로 율동치며 횡설수설 내뱉는다. "저는 절대로, 절대로, 이런 정서를 유독하게 하는 외설물이 세간에 나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홉 지옥이여 맙소사, 그래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허? '정서를 유독하게 하는 외설물'이라고?"


"이봐, 두 사람 다 진정하고……,"


"아니오, 진정할 수 없습니다!! 설마 당신들도 이런 외설물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한 것입니까?! 정녕 저만 이런 글을 처음 접한 것입니까!!"


 

게일의 난감해하는 시선과 대니의 덤덤한 눈초리를 받자 그는 숫제 충격받은 얼굴이다. 팔라딘의 낯이 순식간에 울긋불긋한 수준을 넘어 창백해지는 과정이 네 눈에 고스란히 잡힌다. 그의 뒷말은 쪽수 싸움에 밀린 건달의 것처럼 비굴하게 들린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잠시 다른 곳에 가 있겠습니다!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가 중갑 밑창의 육중한 발소리를 내며 어둠 사이로 사라진다. 너는 그가 황급히 달아나는 뒷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보다가 중얼거린다. 황당함이 극에 달한 나머지 불쾌한 감정이 사라져버렸다.


 

"저건 또 신인류네."


 

게일이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외설물을 포용하는 능력이 만인에게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 네 소설이 신실한 팔라딘에게는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수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하고 말이야."


 

하기야 남들 보는 앞에서 정사 장면이 적나라하게 들어가는 외설 소설을 건네준 건 좀 심했나? 너는 턱을 괴고 자문한다.


 

"앞으로 다시는 같은 이야기로 그를 자극하지 말자고. 어쩌면 저 친구의 경우에는, 민망함이 주체 못할 수준으로 과해지면 등에 짊어진 동반자를 꺼내 들고 너와 네 책을 두 쪽 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 그럼 얘는 뭐지? 라는 표정으로 대니를 바라보자, 그는 땅에 떨어진 책을 주워 먼지를 털고 있다. 너는 그에게서 책을 받아든 다음 떫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한다. 어, 고맙다.


 

 

네 불쾌한 심기는 오래지 않아 풀린다. 먼저 조리도구를 씻으러 물가로 떠난 게일을 따라가기 위해 네가 식기를 주워올리는 동안(대니는 너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제 배낭에서 책을 꺼내 읽고 있다. 셀다린이라도 드로우가 재수없긴 매한가지인가보다) 요란법석하게 도망갔던 팔라딘이 야영지로 걸어들어온다. 떠날 때와는 다르게 완연히 풀이 죽은 기색이라, 순간 너는 그가 도시 전설에 등장하는 도플갱어라도 되는 건가 싶어진다. 


 

네가 뭐라고 비아냥을 뱉기도 전에 제라드가 선수를 친다. 그는 예절 교본에나 나올 것 같은 각도로 네게 허리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생애 처음 받아보는 정중한 사과는 입안 가득 차 있던 빈정거림을 잃게 만든다. 너는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자 싶은 마음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외딴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다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그 책은 당신의 작품이지요. …그것이 무슨 내용이었건 간에, 당신의 노고가 들어간 창작물을 함부로 대하고 악랄한 비난으로 폄하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 음, 허어.


 

"제 무신경함이 당신의 기쁨과 자부심을 손상시켰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알았으니까 거기까지만 해. 면역 없는 사람한테 야설을 냅다 들이민 내게도 잘못이 있는 거니까." 


 

너도 잘못했고, 나도 잘못했네. 둘 다 똑같이 잘못한 거로 하자. 상황 끝, 됐지? 너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한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이다. 너는 게일의 말을 듣고 난 후로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던 참이다. 단지 골이 난 감정이 더 커서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제라드는 외려 자기가 더 의외라는 표정이다. 저렇게 정공법으로 사과하는 사람한테 계속 화를 낼 수 있는 사람도 있나? 너는 엉뚱한 궁금증이 들 것같다.


 

"……정말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저는 당신께 날선 말로 지탄받아 마땅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 그만하자. 야설 하나 때문에 싸우는 것도 웃기잖아. 그렇게 미안하면 이거 정리하는 거나 좀 도와." 너는 양손 가득한 냄비와 식기를 들여보이며 씩 웃는다. 만일 게일이 네 곁에 있었더라면 이 훈훈한 화해 장면을 목격하고 만족스러워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너 힘 세지? 이쪽은 약골이거든. 설거지까지 해달라곤 안 할 테니까, 운반하는 건 도와주라."


 

제라드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색채가 어렸다가 가라앉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추락을 의미하는 침잠이 아니라, 망막 안쪽의 일부로 영원히 자리하는 듯한 침잠이다. 이윽고 그가 네 손에서 식기를 받아드는 대신 경건한 자세로 자리에 앉는다. 너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실례가 안 된다면 부디 자리에 앉아주시겠습니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잡아내고 의혹에 잠긴다. 대관절 무슨 이야기를 꺼내놓을 생각이기에 이토록 진지한 투로 사람을 붙잡는 것일까. 그러나 짧은 고민 끝에 너는 그다지 참신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실을 하나 떠올린다: 네가 호기심이라는 주인과 종신계약을 한 노예라는 사실이다. 너는 결국 지저분한 식기들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다.


 

팔라딘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연한 목소리로 서두를 꺼낸다.


 

"방금의 사과는… 다소 이기적인 의도가 있었습니다. 사죄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은 명백했습니다만, 한켠으로는 여러분이 제게 불쾌함을 느끼고 가버리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제 간사함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제 예상보다 너그러운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저는 제 죄와 진실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이제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저는 하퍼의 일원입니다. 아니, 하퍼의 일원'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옳겠군요. 현재로서는 집단과 따로 떨어져 페이룬 전역을 배회하고 있는 신세입니다. 가끔은 저 스스로를 하퍼라고 칭해도 마땅한 것인가 회의적인 심정이 되곤 한답니다."


 

너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찬다. 하퍼라니, 그들은 검은 태양의 해에 다수의 고위 하퍼들이 몰살당한 이후 사분오열된 채로 대륙 전역에 흩어졌다. 돈이 되지 않는 정보는 기억에 잘 담아두지 않는 너마저도 그 사건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것 봐, 페이룬에 고난 하나 안 겪어본 녀석은 없다니까. 너는 묵묵히 제라드의 사연을 듣는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팔라딘으로서 복수를 위해 맹세했습니다. '더 큰 악과 맞서싸우라. 사악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복수하라. 네 힘을 세계에 환원하라.'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대의를 위해 악과 대적하였다가 무참히 도륙당한 제 동지들을 위해,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마시고 적의 심장을 내지르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저 자신을 제련하기 위한 맹세였습니다. 


허나 맹세를 지키기 위한 여정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페이룬에서 가장 현명하고 강한 고위 하퍼들을 잃어버린 결사단은 애처로울 정도로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러운 진실입니다만, 우리들은 집단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위대한 축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웅들이 전사하자 경외심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독이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네더브레인의 추락 사건과 같이, 우리 개인이 합치면 더욱 큰 힘을 이끌어낼 것이 분명한데 말입니다.


수많은 동지들이 복수에 동참해달라는 저의 간청에 거절의 의사를 표했습니다. 자헤이라 님이나 라셰멘의 민스크가 선홍빛 궁전에서 살아돌아오지 않는 한 제 맹세가 이루어질 일은 요원하다고 말입니다. 그들의 심경은 이해합니다. 뭇사람들이 우리들을 일컫어 패배주의자라고 칭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퍼들은 너무 많은 절망을 겪었습니다: 불과 반 세기만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오래전에 유실된 고대의 유물 취급하게 될 정도로 말입니다.


저는 끊임없이 저와 의지를 함께 해줄 이들을 찾아 떠돌았습니다. 동료 신도들을 잃고 네버윈터에서 홀로 수행 중이던 데오니시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미력한 몸뚱이 하나만 이끌고 제 무덤을 세울 땅으로 향하고 있었을 테지요.


…단순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돌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의 장황한 연설에 질려 떠나시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과 게일은 강합니다. 그리고 지혜롭습니다. 고작 전투 한 번의 합을 맞춰보았을 뿐이지만 저는 거기서 눈앞이 아뜩해질 정도의 가능성을 엿봤습니다. 그러니 부디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제게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같은 실력자들이 제 여정에 함께해주셨으면 하고 간절히 바랍니다. 


그 어떤 보상도, 생환도 보장드릴 수 없는 제 뻔뻔스러움을 용서하십시오. 제 적은 몹시 강대한 자입니다. 그의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심에 함께 맞서싸워달라고 애걸할 수밖에 없는 저의 처지를 연민해주십시오. 동정이라도 충분합니다. 하물며 조롱하기 위함이라도 좋습니다. 그저 제가 그의 심장에 최후의 말뚝을 박을 때까지만 힘을 빌려주시면 됩니다. 그리 해주신다면 제 남은 평생을 당신과 게일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지독한 침묵이 너희 사이로 가라앉는다. 불현듯 건너편을 보니 대니가 책을 읽는 것을 멈추고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마치 네 대답을 종용하는 것처럼.


 

너는 제라드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묻기 위해 입술을 연다. 그러나 네가 하려는 것은, 네가 깨닫게 된 사실을 남의 입을 통해 확인받으려는 행위나 다름없다. 너는 그가 말하려는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


 

"그 '적'이라 함은?"


"세간에서 뱀파이어 군주라 함은 그 주인을 죽이고 종복을 다스려 100년 이상의 세월을 군림한 자를 지칭해 부르지만, 불과 50년의 군림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유혈로 그러한 칭호를 획득한 자가 있습니다." 


 

제라드의 음성에는 이제 확신이 가득 차 있다. 그는 굳은 의지와 함께 원수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검은 태양의 주인 아스타리온입니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스게일 블러드위브

2024.04.18 05:51
ㅇㅇ
모바일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센세가 돌아오셨다
[Code: 241c]
2024.04.18 07:28
ㅇㅇ
모바일
하어어어엉 미친 동료가 애인죽이러가자는데요!!!!!!
[Code: 61d2]
2024.04.18 08:10
ㅇㅇ
모바일
존잼이야 센세!!!!!!
[Code: c3c4]
2024.04.18 08:32
ㅇㅇ
모바일
분명 스크롤바도 작고 내용물도 정말 많은데 재밌어서 너무 빨리 읽어버렸네 센세 전투묘사 왤케 잘하는거야 개추 1개만 할 수 있는거 너무 아쉽다
[Code: a552]
2024.04.18 08:56
ㅇㅇ
모바일
50년???헐 센세 점점더 흥미로워진다 센세 사랑해ㅐㅐㅐㅐ
[Code: 66fe]
2024.04.18 09:26
ㅇㅇ
허헉 게일은 지금 여기 없잖아 게일이 아스 죽이러하자 하는 소리 들으면 반응 어쩔거야ㅠㅠㅠㅠㅠㅠㅠ성실해서 고마워요 센세 억나더까지 함께하자
[Code: ac87]
2024.04.18 13:16
ㅇㅇ
모바일
승천아스게일 단어부터 존맛인데 게일이 이미 도망친 후야 존맛레전드 동료의 목적을 게일이 알게된 후 반응이 궁금하다ㅠㅠㅠㅠ 50년동안 쌓였을 서사도 궁금 게일은 어떤 일을 겪고 아스 곁을 떠날 결심을 했을까ㅠㅠ
[Code: 115c]
2024.04.19 09:32
ㅇㅇ
모바일
뱀파군주 될려면 100년은 되야하는데 아스 50년만에 뱀파군주 됐구나 열심히 살았네
[Code: 91f0]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
글쓰기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