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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22:01
그날 후로도 사장님은 변한게 없다. 언제나처럼 빵을 굽고, 가게를 꾸린다. 해롤드가 오면 카운터에 앉아서 정산을 하거나 레시피북을 보거나... 속이 뒤집힌다. 그날 얼빠진 행동을 하는걸 보고 어린애 취급을 하는걸까? 생각해보니 넋이 나가서 계산도 사장님이 했다. 데이트 신청을 해놓고 상대가 계산하게 한것도 병신 같은 짓이다. 그렇게 무안을 당하고도 해롤드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창피한것보다는 사장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니까.
그래도 첫사랑이 기혼자였라는 사실에 해롤드는 꽤 충격받았다. 하필 기혼자라니. 인터넷 게시판 글에서 떠도는 삼류 연애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에 잠도 못자고 수업도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고백도 못하고 차였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수고했어. 파이랑 크림번 몇개 넣었어."

"네."

"잘 가."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몇달이나 지켜봤지만 사장님은 누군가와 함께 사는것 같지 않았다. 고지서도 전부 사장님 이름 뿐이고, 퇴근 시간에 누군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내가 사장님을 좋아하는걸 눈치챈건가? 거절하기 민망해서 적당히 밀어낸건가? 그런거면 더 기분 나쁘다. 완전 어린애 취급 당한거니까. 그런 적당한 거짓말에 속아넘어갈만큼 바보는 아니다.
남편이 골라준 웨딩링을 끼고 다니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고, 좋아하는 가게지만 혼자 오기는 힘들어서 오랜만이라고 했다. 주말에도 외출은 하지 않고 모든 명의는 자신의 이름 뿐이다. 사장님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괜찮으세요?"

"응?"

"열 나는것 같은데요, 사장님."

"좀 더워서 그런것 같아."

퇴근을 하려던 중에 문득 사장님을 봤더니 평소와 조금 달랐다. 늘 창백하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있었다. 푸르스름할 정도로 창백하던 눈가가 붉다. 그러고보니 오늘 사장님은 내내 앉아있었다. 평소에는 쉬는게 지겨운 사람처럼 손님이 없어도 조리실이나 비품실을 오가면서 일을 하던 사람인데... 해롤드는 불쑥 손을 내밀어 사장님의 이마를 짚었다. 뜨겁다.

"열 나네요. 병원 가셔야겠는데요."

"그래? 그럼 마감하고..."

"당장 가셔야죠. 가요, 제가 운전..."

"택시 탈게. 해롤드는 들어가봐."

"그럼 택시 잡을게요. 옷 갈아입으세요."

"아니, 해롤드. 나 괜찮아. 먼저 가봐."

"열이 좀 높은게 아니시잖아요. 병원 다녀와서도..."

"괜찮..."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사장님이 비틀거리다가 다시 주저앉는다. 다리다. 다리가 안좋은것 같다. 해롤드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비품실에 걸린 사장님의 옷을 가져와서 어깨에 걸쳐주고, 택시를 호출했다.

"다니시는 병원은 어디세요?"

"그냥 내가..."

"도착지 지정해야해서 그래요. 사장님 호출앱도 안쓰시고, 이 상태로 큰길로 나갈수도 없잖아요."

"...A 대학병원."

대학병원이라고? 상태가 많이 안좋은것 같은데. 다행히 택시는 금방 잡혔고, 사장님 대신 가게를 정리한 해롤드는 문을 잠그고 택시에 사장님을 밀어넣고 옆에 앉았다.

"넌... 왜 따라오니."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면서 혼자 가시게요? 입원이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그정도는 아니..."

"눈이나 좀 붙이세요."

가디건을 벗어서 무릎을 덮어주자 더이상 뭐라고 말하기도 곤란한지 사장님이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이런 상황에도 연락하는 사람이 없다. 역시 사장님은 거짓말을 하는게 분명하다.
사장님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다리가 뻣뻣했다. 이러고 혼자 가겠다고 고집 부린게 우스울 정도다. 팔을 잡아 부축하자 옷 아래로 뼈대가 잡혔다. 응급실에 도착하고 접수를 하는게 익숙한듯, 사장님은 담당 교수의 이름을 댔다. 다행히 당직인지 교수가 내려오기로 하고 베드가 비워졌다. 열을 재고, 인턴과 간호사가 오가며 몇번이고 같은 질문을 한 뒤에야 교수가 왔다. 밝은 갈색 곱슬머리에 턱이 갸름한 젊은 의사는 다시 한번 체온을 확인하고 응급실 담당의에게 처방을 부탁했다.

"약은 드셨어요?"

"네... 아침에."

"일단 다리를 봐야하니까..."

"..."

"이 분은 누구신지?"

"가게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잠깐 자리 좀 비워주시죠. 옷을 벗어야 하니까."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해롤드가 약간 뒤로 물러나자 간호사가 베드 옆 커튼을 쳤다. 움직여보세요, 굽혀보세요... 얇은 천 뒤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건지. 곧 의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가 않는다. 해롤드는 불안했다.
곧 의사가 커튼을 젖히고 나왔지만 무어라 말을 걸기도 전에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사라진다. 이불을 덮고 누운 사장님은 죽은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간호사가 와서 가느다란 팔에 바늘을 꽂아 수액을 달고, 튜브에 주사를 놓았다.

"항생제랑 해열제예요. 맞다가 어지러우면 말씀하시고, 두시간 정도 걸리실거예요. 수액 다 맞으시면 처방 받고 퇴원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간호사가 자기를 뜨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물론 응급실은 환자며 의사, 간호사가 오가며 떠들썩했지만 침대 하나만큼의 진공이 존재했다. 간이 의자에 앉은 해롤드는 아무말 없이 자리에 앉은 사장님을 바라보았다. 다 큰 성인이 열이 38도씩 오르는것도 큰일인데, 그걸 종일 내색도 안하고 있던게 기가 찬다. 분명 오늘도 새벽부터 나와서 일을 했을건데... 내버려뒀으면 가게에서 쓰러졌을거고, 무슨 일이 났을지 모른다. 매대에서 쓰러졌으면 손님이 봤을지도 모르지만 조리실이나 비품실이었으면 정말 큰일이었을거다. 머리라도 다쳤으면 최악일거고.
온갖 끔찍한 생각이 부글거리는 와중에 먼저 침묵을 깬건 사장님이었다.

"해롤드, 고마워. 그만 들어가봐."

"아뇨, 집에 가셔야죠. 기다릴게요."

"약 맞으면 금방 괜찮아져. 집에는 혼자 갈 수 있..."

"왜 혼자 가시려구요?"

"..."

"거짓말하신거 다 알아요. 누워계세요."

"거짓말이라고? 내가 무슨..."

"나중에 이야기해요. 저랑 입씨름하느니 주무시는게 속편할걸요."

몸도 안좋으니 기운이 없겠지. 결국 사장님이 스르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다. 이제 보니 비쩍 말랐다. 목이나 팔은 뼈대가 드러날만큼 말랐고, 열이 나는데도 백짓장 같은 얼굴에... 그러고보니, 이 사람 뭘 먹긴 하는건가? 마트에도 며칠에나 한번씩 가고, 가게에 널린 빵을 먹는것도 본적이 없다. 새로 빵이 나오거나 한가한 시간이면 해롤드에게는 간식이라며 빵을 줘도 사장님은 먹지 않는다. 몸도 안좋은데 입도 짧으니 아플 수 밖에 없겠지.

"저기... 잠깐 나가줄래?"

"왜요."

"옷은 입어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두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수액팩이 납작해지고 퇴원 준비를 하는데, 사장님이 머뭇거린다. 그러고보니 아까 바지를... 얼른 구석에 등을 돌리고 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잠시 뒤 돌아선 해롤드는 섬뜩해졌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한쪽 다리는 사람의 다리가 아니라 오래된 숲 속, 다 죽어버린 고목 토막 같았다. 어쩌면 정반대로 막 도축되어 상해가는 생고기 토막 같기도 했다. 시야에 낯선 모습이 잡히자마자 놀라서 다시 뒤돌아서긴 했지만 이미 망막에 새겨진 장면은 만화경 속 풍경처럼 점점 더 끔찍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대화는 없었다. 어느새 한밤중이었고, 사장님은 피곤해보였다. 택시에서 내리자 선득하게 차가은 밤공기에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사장님이 가디건을 건내주었다. 가게 앞에 선 사장님은 여느때와 똑같아 보였다.

"고마워. 그럼 내일 보자."

"어디 가시게요."

"...집에 가야지?"

"거짓말. 가게로 가실거잖아요."

"..."

"안돼요. 오늘은 쉬셔야해요. 내일도 쉬세요."

"아니, 마감도 못..."

"청소는 다 해뒀고 문도 잘 닫았어요."

"해롤드, 나는..."

"이리 오세요, 집에 가게."

그러고보니 항상 정적을 깨는건 사장님이고, 침묵을 요구하는건 해롤드다. 반대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이상하다. 어쨌든 몸도 안좋은데 가게 타령을 하는건 봐줄 수 없다. 해롤드는 사장님이 도망가지 못하게 팔을 붙잡아 부축하고, 눈이 마주치지 않게 고개를 돌린채 집으로 향했다. 유난히 깜깜한 밤 골목에는 고양이 한마리 보이지 않고, 가로등 불빛만 동그라니 내리고 있었다.

"...집에 왔네. 됐지? 늦게까지 미안. 내일 보자."

"부축해드릴게요. 잘 못걸으시잖아요."

"아니, 대문 앞인데 무슨..."

"현관 앞에 계단 있잖아요. 올라가시기 드실테니까 도와드릴게요."

"어...?"

"업히세요."

"아니, 난..."

"그게 더 빨라요. 아니면 안아드려요?"

별로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도 한참이 걸렸다. 부축을 해도 도통 속도가 나질 않으니 당연하다. 사실 아까전부터 답답해서 들쳐업고 싶은걸 꾹꾹 참았다. 머뭇거리는 사장님 손에서 열쇠를 뺏아든 해롤드는 거의 반강제로 사장님을 업고 대문을 연다. 요즘 시대에 열쇠라니, 구식을 넘어 참신할 정도다.
자그만 정원을 지나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얼굴로 피가 몰렸다.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은은하게 스며들어있었다. 어색하게 벽을 더듬어 불을 켠다. 벽도, 천장도 짙은 나무로 마감된 집이다. 이러니까 어두울 수 밖에... 이런 집이 요즘도 있나? 드라마 세트장 같다.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사장님이 등에서 내려온다.

"이제 됐지? 가."

"누우세요. 침대까지..."

"그정도는 걸을 수 있어. 그리고 침실까지 들어올 생각이야?"

"어..."

"도와주는건 고맙지만 열도 떨어졌고 갑자기 집 안까지 들어오는건 기분이 안좋아. 내 입장도 생각해줘."

"그건... 그렇지만..."

"변변찮게 대접도 못해서 미안해. 그럼 가봐."

벽에 기대어 선 사장님은 단호했다. 해롤드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현관을 나섰다. 새까맣게 어둠이 내린 작은 정원을 지나 대문을 닫고 나와서야 힘이 빠졌다.
어두운 길을 터덜터덜 걸어오면서도 머리가 복잡하다. 아주 잠시였지만 확실히 본 그 끔찍한 흉터가 눈 앞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당장이라도 울컥 피를 쏟아낼것 같던 모습에 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온 해롤드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현관에 놓인 실내화는 한켤레 뿐이었다. 그런 집에 다른 사람이 살리가 없다. 분명 사장님은 혼자다. 아파도 연락할 사람도 없고, 실내화가 하나 뿐인 사람이 동거인이 있을리가 없지. 겨우 반지 같은걸로 속이려고 들다니... 좀 화가 나긴 하지만 귀여우니까 용서해줘야지. 그렇게 아프면서도 고집을 부리는걸 보면 어린애 같다.
시트에 드러누운 해롤드는 상쾌한 기분으로 핸드폰을 집어든다. 지도 속 작은 점은 미동도 없었다. 잠들었을까? 그럴리가 없지. 아마 머릿속이 복잡해서 한숨도 못잘거야. 밤새 한숨도 못자면 좋겠네. 내 생각으로 가득차서 숨도 못쉬면 좋겠어. 나를 다시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괴로워하면 좋겠어...
어쩐지 기분이 좋다. 해롤드는 열린 창 밖으로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맥주캔을 땄다.



수증기깡식
2024.04.18 00:32
ㅇㅇ
모바일
세상 사람들 내센세가 성실수인이에요........................
[Code: e61d]
2024.04.18 23:04
ㅇㅇ
모바일
아니 해롤드야…. 복흑.. 미쳤다.. ㅇ<-<
[Code: 51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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