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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 이후로 폐인이 된 칸과, 집착광공이 되어가는 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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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이 입원한 지 며칠이 지나자, 커크는 조바심을 냈음.

 - 왜 이렇게 안 낫는 거야?

 - 짐, 시간을 좀 줘. 저놈이 당한 부상을 생각하면...

그렇게 말하는 본즈도 난감해했음. 칸의 회복은 생각보다 훨씬 더딘 편이었음. 물론 온몸이 산산이 부러지고 피떡이 된 채 실려왔으니 쉽게 나아질 수는 없겠지만, 강화인간의 재생능력을 감안하면 매우 느린 회복이었음.

게다가 스스로 나아지려는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였음. 칸은 본즈가 기계로 주입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수면제를 투여하지 않는 한 잠도 자지 않았음. 만약 네가 자살하면 네 크루들이 사는 행성을 폭격해버리겠다고 커크가 엄포를 놓은 탓에, 칸은 자살이나 자해를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음. 침대에 틀어박힌 채 초점 없는 퀭한 시선으로 벽을 바라보기만 했음.

본즈는 결국 진단할 수밖에 없었음. 이건 마음의 병이라고. 보통 사람들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멘탈이 박살나면 몸도 함께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칸이라도 그런 면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음. 강화인간이 왜 그리 약해빠졌냐고 커크가 투덜거리자 본즈는 어이없어했음.

 - 왜 또 화가 난 거야, 짐... 네가 원하던 대로 다 됐잖아.

그 말대로 커크는 원하던 복수를 성취했음. 칸은 모든 것을 잃었고 정신적으로도 무너졌음. 이제 더 이상 커크에게 감히 건방진 태도를 보이지도 않고 말대꾸도 하지 않았음. 하지만 통쾌한 것도 하루이틀이지. 커크는 자기가 찾아와서 아무리 툭툭 때리고 엉덩이를 쭈물거리며 추행해도, 칸이 창백한 인형처럼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 영 재미가 없어졌음. 칸이 시들시들 말라가는 것을 보면 이러다 정말로 죽을까봐 불안하기도 했음.

또 다른 문제는 엔티호 내의 여론이었음. 이번 사건으로 칸에게 동정심을 품게 된 사람은 본즈만이 아니었음. 평소에 칸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사건만은 너무 끔찍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고, 커크는 분위기 관리를 위해서라도 칸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할 필요를 느꼈음.

 - 뭐 필요한 거 있어? 원하는 건?

 - ......

 - 진짜야. 원하는 게 있다면 말을 해. 내가 들어줄게.

칸의 마르고 건조한 음성이 돌아왔음.

 - ...내 크루들의 소식을 전해줄 수 있나.

커크는 기가 막혔음.

 - 그놈들이 널 이 지경으로 만들고 떠났어. 근데도 그놈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한 거야?

 - 그들은 거짓말과 연기에 속았고, 약물에 중독되어 욕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만, 칸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때문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커크는 알고 있었음. 그래서 칸과 크루들을 완전히 갈라놓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칸의 마음은 그들에게 가 있는 것이었음. 왠지 그 사실은 커크의 도전의식을 자극했음. 대체 저 인간의 마음에서 그 빌어먹을 크루들을 몰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마음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날부터 커크는 매일 다른 산뜻한 꽃다발을 들고 메디베이에 방문했음. 더 이상 칸을 때리지도 괴롭히지도 않으면서 다정하게 말을 걸었고, 칸이 요청한 대로 크루들의 소식도 전달해 주었음. 칸은 커크가 갑자기 이렇게 달라진 것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했음. 본즈도 이상하게 여겼음.

 - 뭐하는 짓이야, 짐. 왜 갑자기 잘해주는데?

 - 실험 같은 거야. 저놈이 날 좋아하게 만들어보고 싶어.

지금까지 칸에게 저지른 짓들이 있는데 그게 되겠냐고 반문했지만, 커크는 진지하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음.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라, 아무리 부당한 학대를 당해도 그 환경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면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 그 가해자와 애착을 형성하게 되는 일이 많았음. 비록 지금은 칸이 자기 크루들을 못 잊고 그리워하지만, 커크가 잘해주고 친절을 베풀면 칸 본인이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결국 커크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음. 게다가 커크는 젊고 미남에다 인기도 많으니까.

 - 어때?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일지도 몰라. 저놈이 자기 크루들은 잊고 날 대신 사랑하게 되는 거야.

칸의 자기 크루들에게 하는 것처럼 나한테 한다면 굉장하지 않겠냐고, 커크는 눈을 빛냈음. 본즈는 처음에는 만류했지만 결국 커크가 하는 대로 맞춰주기로 했음. 이제껏 커크가 칸을 학대하는 것이 내내 불편했던 차에, 이유야 어쨌든 커크가 칸한테 잘해준다면 좋은 일이었음.

며칠 후, 칸은 파리하게 야윈 몰골로 퇴원 판정을 받고 절뚝거리며 메디베이를 나왔음. 앞으로도 계속 약 먹고, 통원 치료 받고, 위험한 활동을 삼가고, 음식도 가려 먹어야 한다는 조건들이 잔뜩 붙은 채였음. 자연히 칸을 보살필 사람이 필요해졌는데, 커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원하면서, 이제부터 칸을 함장 쿼터에서 함께 지내도록 했음.

여기까지는 커크의 계획대로였지만, 그 다음부터는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았음.

첫날 밤부터 삐걱거렸음. 잘 시간이 되어 커크가 칸을 침대로 데려가자, 칸은 당연히 커크가 자기 몸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며 옷을 벗으려 했음. 커크는 당황하면서 그게 아니라 진짜로 잠만 자려는 거라고 설명했음. 그렇게 어찌어찌 잠자리에 드는 데는 성공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침대에는 커크 혼자뿐이었고 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음. 알고 보니 칸은 밤새 구금실로 돌아가서는 그 차갑고 딱딱한 침대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음. 설마 함장의 푹신한 침대가 자기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커크가 술루의 온실에서 훔쳐온 싱싱한 사과를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칸한테 대신 줬는데, 사실은 그게 최근 온실에 도는 외계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술루가 쥐약을 뿌려둔 사과였던 일도 있었음. 칸은 커크가 사과를 내밀자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가 순순히 받아먹고 몇 분 후에 토하면서 쓰러졌음. 기겁하면서 본즈를 호출한 커크는 뒤늦게 진상을 파악하고는 뒷목을 잡아야 했음. 칸은 그게 쥐약 든 사과라는 걸 알았지만, 커크가 자기 괴롭히려고 일부러 먹이려는 거라고 생각해서 얌전히 응했던 거였음.

이런 식이라, 칸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커크의 계획은 영 잘되지 않았음. 칸은 커크를 두려워했고, 커크가 곁에 있는 한 경계를 늦추지 못했음. 뭔가 해줄 때마다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긴 했지만, 그것이 커크 자체에 대한 호감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음.

커크는 오기로 불타올랐음. 스타플릿 최강의 플레이보이로서, 이제껏 커크가 꼬셔서 함락시키지 못한 상대는 거의 없었음. 칸의 호감을 사려면 대체 뭘 해줘야 할까.

 - 갖고 싶은 건 없어? 하고 싶은 거라던가.

 - 괜찮다, 캡틴.

 - 그러지 말고. 아무리 너라도 평생 네 크루들만 지키면서 살지는 않았을 거 아냐. 개인적인 취미라도 없어? 300년 전 인간들은 뭘 하고 놀았어?

한참 구슬린 끝에, 마침내 칸이 요청한 것은 "책을 읽고 싶다"는 것이었음. 독서라면 패드로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칸은 패드가 아니라 진짜 종이로 인쇄되고 장정된 책을 원했음. 300년 전의 옛날 출신인 칸은 자기가 살던 시대의 아날로그한 분위기를 그리워했음.

칸이 자기 크루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부탁하는 것은 처음이라, 커크는 짜릿한 성취감을 느꼈음. 마침내 커크가 골동품 시장에서 밀턴의 "실낙원" 한 권을 구해다 안겨주었을 때, 칸은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감사했고, 커크는 처음으로 칸을 웃게 한 것이 뛸 듯이 기뻤음.

 - 짐, 요즘 칸이랑 너무 시간을 많이 보내는 거 아냐?

본즈가 지적할 때마다, 커크는 단지 칸이 날 좋아하게 만들려는 실험일 뿐이라는 기존의 변명을 고집했음. 하지만 제3자인 본즈의 눈에는 보였음. 지금 이 관계에 대책없이 빠져들고 있는 쪽은 칸이 아니라 커크였음. 커크는 절대 자기가 칸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하루종일 칸 생각만 하면서 어떻게 하면 칸을 기쁘게 할까 고민하는 게 대체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본즈는 문득 오싹해졌음. 강화인간의 피를 투여받은 인간은, 모든 질병에서 치유되는 대가로 그 강화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집착하게 되지. 커크의 경우에는 이미 칸에게 원한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집착이 복수심으로 나타났음. 하지만 복수가 해소된 뒤에 그 집착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한 인간에게 집착하는 것의 종착점은 결국 사랑이 아닐까. 본즈는 커크가 칸을 지나치게 증오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칸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기에, 지금 상황이 몹시 불안해졌음.

 - 짐, 제발 적당히 좀 해. 지금 네 모습을 좀 보란 말이야. 무슨 첫사랑에라도 빠진 것처럼 굴고 있잖아.

이제는 커크도 더 이상 자기 감정을 부정하기 어려워지고 있었음. 하지만 사랑이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음. 칸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던 커크의 목적은, 점점 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번져가기 시작했음.

 - ...날 좋아한다고 말해.

 - 좋아한다, 캡틴.

 - 날,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 사랑한다, 캡틴.

칸은 너무도 쉽고 건조하게, 커크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음. 그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기에 커크는 허무했음.

 - 난 함장이야. 이 함선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야. 너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어.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하지만 칸은 그저 지친 얼굴로 커크를 응시할 뿐이었음.

칸도 알고 있었음. 이 어린 함장이 자신에게 정신없이 빠졌으니, 그 마음에 응해준다면 훨씬 자기 삶이 나아질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가족같은 크루들에게 윤간당하고 버림받은 뒤, 칸은 멘탈이 무너져서 삶에 대한 의욕 자체가 사라진 상태였음. 전부 지쳤고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음.

 - 내게 아무것도 해줄 필요 없다, 캡틴.

 - 그럼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데? 내가 뭘 하면 날 사랑할 거야?

 - 그대는 이미 날 가졌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칸은 커크의 소유물이었음. 커크가 어떤 명령을 하든 저항하지 않았음. 커크가 키스를 원하면 키스해 주었고, 몸을 원하면 기꺼이 다리를 벌렸음. 하지만 커크는 칸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원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음. 커크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칸의 그 마음을, 칸의 크루들은 처음부터 내내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커크는 불타는 질투를 느꼈음. 그놈들은 칸이 자기들을 위해 어떤 희생을 감당했는지 까맣게 모른 채 잘먹고 잘살고 있을 텐데. 칸의 희생을 받을 자격이 없는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그래서 커크는, 칸을 극진히 보살피는 것과 별개로, 칸을 가족같은 크루들에게 윤간당하도록 했던 사건을 "후회"하지는 않았음. 사과도 하지 않았음. 그것은 칸의 인생에서 그놈들을 쫓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일이었음. 그 사건 때문에 칸이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이렇게 시들어가는 것은 참 안됐지만, 그건 이제부터 커크가 칸을 더 행복하게 해줘서 새로운 삶을 찾아주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칸도 커크를 사랑하게 되겠지.



커크의 그 계획을 방해한 것은 외부적 요인이었음.

함장이 죄수한테 홀딱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는 소문이 함선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었음. 커크가 칸을 학대하던 시절에는 칸을 동정하는 여론이 있었지만, 이제는 반대로 칸이 받는 특혜에 대해 불만이 터져나왔음. 칸의 신분은 여전히 함선의 죄수인데, 왜 죄수 주제에 구금실에 갇혀지내지 않고 함장 쿼터에서 안락하게 지내고 있느냐고.

한동안은 동정 여론으로 잠잠했었던, 칸에 대한 추행과 괴롭힘이 조금씩 은밀하게 재개되어갔음. 커크가 함장 업무를 위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엔티호의 크루들이 찾아와서 칸을 주무르고 박고 쑤셔댄 후 돌아갔음. 함장의 애첩 맛을 한 번 보자고, 대체 얼마나 허리를 잘 놀렸으면 함장님을 이렇게 제대로 유혹했냐고 웅성거리면서.

그렇게 어느 날, 메디베이에 진료 받으러 간 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걱정되어 찾아나선 커크는, 복도 구석에서 칸이 여러 명의 크루들에게 둘러싸여 박히고 있는 광경을 마주쳤음. 커크는 눈이 뒤집혀서 달려가 그들을 칸에게서 떼어놓고 주먹을 휘둘렀음. 그들은 처음에만 잠시 당황했을 뿐 나중에는 오히려 뻔뻔하게 맞섰음.

 - 왜 이러세요, 함장님! 분명히 예전에는 저희들한테 이래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 맞아요. 칸은 누구나 마음대로 따먹어도 되는 거라고 하셨으면서. 왜 이제는 혼자만 따먹으려 하시는 건데요?

커크는 말문이 막혔음. 분명히 예전에는, 칸을 구금실에 가둬놓고 모두에게 공공재로 사용하도록 권장했었지.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커크는 그때는 자기가 칸을 이렇게 사랑하지 않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커크는 칸이 아직 부상에서 회복 중인 환자니까 인도적 차원에서 괴롭히면 안 된다는 이유를 댔음. 하지만 그건 커크 본인에게도 영 설득력이 없게 들렸음. 크루들은 반발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함장을 올려다보았고, 그 중 한 명은 더러워서 못 견디겠다며 사표를 냈음. 커크는 그 사표를 수리해 주었음.

그리고 다음날.

 - 짐!! 큰일이야! 당장 패드 켜봐!

사표를 내고 엔티호를 떠난 그 크루가, 스타플릿에 커크 함장을 정식으로 고발해버린 것이었음. 고발 내용이란, 커크 함장이 함선 내의 죄수에게 수시로 가혹행위를 가하며 성적으로 유린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정부로 삼아 귀여워하며 함장 쿼터에 들여앉혔다는 것.

스타플릿의 젊은 영웅이 저지른 스캔들에 언론이 들썩이기 시작했음. 커크의 함장 직무는 정지되었고, 스타플릿 본부의 청문회에 출두하라는 통지서가 내려왔음. 커크는 욕설을 연발하며 결국 지구로 떠나야 했음. 자기가 없는 동안 칸을 잘 보살펴달라고 본즈에게 신신당부하면서.

 - 알았지, 본즈? 내가 없는 동안 아무도 칸을 괴롭히지 못하게 해줘. 그리고 매일 약도 챙겨 먹이고...

자기 경력이 무너지는 것보다도 칸의 안전을 더 걱정하는 커크의 모습을 보면서, 본즈는 뒷목을 잡았음. 예전의 커크라면 아무리 연애를 즐기더라도 절대 경력에 해가 갈 정도로 선을 넘지 않았을텐데. 지금 칸을 향한 집착은 사랑보다는 정신병에 더 가깝게 보였음. 커크의 혈관 속을 도는 칸의 피가 그렇게 만들었음.

커크에게 칸의 혈청을 투여했던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점에서, 본즈는 이 사태에 책임감을 느꼈음. 자기가 초래한 일이니 자기가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들었음.

(짐이 결단을 내릴 수 없다면, 내가 대신...)

다음날 새벽, 본즈는 자고 있던 칸을 흔들어 깨워서 함께 셔틀크래프트에 올랐음. 두 사람이 탄 우주선은 엔티호를 벗어나 멀리 날아갔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어느 촌구석 행성이었음. 크게 번화하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행성연방에 가입되어 있고 워프 문명도 존재했음.

 - 닥터, 여기는...?

본즈는 가져온 배낭을 칸에게 넘겨주었음. 안에는 며칠간 버틸 식량과 물, 그리고 약간의 자금이 들어 있었음.

 - 이거 받아.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 네 크루들에게 가도 되고. 다시는 엔터프라이즈에 돌아올 생각 마.

본즈는 칸을 이 행성에 버리고 가려는 것이었음. 커크에게는 칸이 도망쳤다거나 죽었다고 거짓 보고를 하겠지. 이제 커크를 구할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라고 생각했음.

 - 너, 너만 없으면 돼. 너 때문에 짐이 이렇게 이상해졌단 말이야. 너만 없어지면 혹시 원래대로...

칸은 슬프고 지친 얼굴로 본즈를 바라보았음.

 - 닥터, 나를 제거한다고 캡틴 커크가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알던 캡틴 커크는 이미 사망했다.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못한다.

 - 안돼, 그럴 리가 없어. 짐은... 짐은 죽었을 때 겨우 스물여섯 살이었어. 알아?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 어렸다고.

끝까지 커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본즈는 떠났음. 칸은 행성의 땡볕 아래에 우두커니 남겨졌음.

(이제 어떻게 할까...)

칸에게는 갈 곳이 없었음.

본즈는 "네 크루들에게 가라"고 했었지. 칸을 이 행성에 버린 것도 사실 그 부분을 배려한 선택이었음. 정보에 따르면, 강화인간들은 여기서 좀 떨어진 세티 알파 V라는 행성에 정착해 살고 있지만, 때때로 우주선을 타고 이 행성에 들러서 필요한 물자들을 사 간다고 했음. 칸이 여기서 버티다 보면 그들과 합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음.

하지만 칸은 솔직히 이제 자기 크루들에게 가고 싶지 않았음. 칸이 기억하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무자비하게 그를 두들겨패고 능욕하던 것이었음. 무엇보다 커크가 들려준 말에 따르면, 그들은 떠나면서도 칸을 더러운 창부라고 욕했고 다시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했다지. 칸은 자기가 찾아가도 크루들 쪽에서 거부할 거라고 생각했음.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칸은, 결국 그 행성의 시장바닥 뒷골목에 웅크린 채 하루를 보냈음. 저녁이 되자 한 외계인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음.

 - 어이, 하룻밤에 얼마야?

칸처럼 얼굴 반반한 남자가 이러고 있으니, 매춘부로 오인한 것이었음. 칸은 멍하니 그 외계인을 올려다보았음.

과거의 오만하고 자존심 높은 칸이었다면, 감히 자신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한 죄로 반쯤 죽여놓았겠지. 하지만 그 동안 있었던 일들로 멘탈이 망가진 칸은, 과연 자기가 정말로 창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음. 커크 함장에게, 엔티호 크루들에게, 심지어 자기 크루들에게조차 이리저리 돌려지며 따먹힌 몸인데, 저런 생판 모르는 외계인에게 한번 더 따먹힌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날 칸은 처음으로 돈을 받고 자기 몸을 팔았음.

그렇게 며칠이 흘렀음. 이 행성의 물가나 시세를 정확히 모르는 칸은, 손님들이 주는 대로 받으면서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굴렸음.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한 몸이 여기저기 통증을 호소했지만 신경쓰지 않았음. 사실 지금의 칸은 자기 인생 자체를 별로 신경쓰지 않았음.

(피곤하군...)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음. 계속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마지막 손님을 상대하고 난 칸은, 오늘 좀 일찍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평소에 노숙하던 뒷골목으로 향하려 했음. 그때 생각지 못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음.

 - 파종할 씨앗이 더 필요해. 겨울옷도 몇 벌...

그의 크루들. 강화인간들이 두런두런 장을 보고 있었음. 칸은 크게 눈을 뜬 채 그들을 우두커니 바라보았음. 새로 산 싱싱한 과일 바구니를 짊어진 와킨, 생선 꾸러미를 든 카티, 낙타 비슷한 외계 동물의 고삐를 잡은 오토.

(잘 지내고 있구나.)

반가움에 눈물이 났음. 칸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하지만 다가서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음. 그 순간, 강화인간 한 명이 문득 칸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음.

 - ...칸?!!

강화인간들의 시선이 확 쏠렸음.

 - 맙소사, 칸...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들 모두 자기 눈을 의심했음. 이제껏 칸이 엔티호에서 커크 함장과 알콩달콩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병색이 가득한 누더기 차림의 노숙자는 대체 뭐냐고. 무엇보다 칸의 찢겨진 옷이며 체취를 보면 방금 손님을 받고 나온 매춘부의 몰골이었음. 그들이 충격에 빠져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칸은 비척대며 뒷걸음질을 쳤음.

그리고 도망치기 시작했음.

강화인간들이 소리를 지르며 뒤쫓아갔음. 칸은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지금 몸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추적을 따돌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음. 마침내 붙잡히는 순간 칸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버렸고, 넋이 나간 채로 헐떡거리며 그들에게 빌기 시작했음.

 - 너희, 너희들도 나와 하고 싶다면 하게 해 주마. 너희들이라면 무료로 해줄 수도 있으니...

 - 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칸은 왜들 저리 놀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음. 그들도 솔직히 하고 싶을 텐데. 이 행성뿐만 아니라 엔티호까지 포함해서, 그 동안 칸을 둘러싼 사람들은 죄다 그와 떡치고 싶어하는 사람들뿐이었는데. 칸이 창백한 손으로 주섬주섬 옷을 벗으려 하자 그들은 기겁하면서 막았음.

 - 제발, 칸! 그때 일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 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떻게 이런...

크루들의 표정이 절망과 분노로 물들자 칸은 겁이 났음. 그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음. 하고 싶으면 대준다는데도 왜 이렇게들 화를 내는 걸까.

 - 화내지 마라. 제발. 원하는 거라면 다 해주마...

숨은 더욱 가빠졌고 칸은 눈앞이 아득해졌음. 결국 그를 둘러싼 크루들의 품으로 쓰러지는 것으로 기억이 끊겼음.

 - 칸!!!




베니칸 존해리슨텀 베니텀 커크칸

* 밀턴의 실낙원은 토스에서 칸이 인용했던 책.

* 와킨, 오토, 카티는 토스에 등장하는 칸의 부하들 이름임. 세티 알파 V는 토스에서 칸이 부하들과 함께 정착한 행성.

삼나더 https://hygall.com/589815023
2024.03.30 01:3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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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렇게까지 찌통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 칸이 돈받고 몸파는거 진짜 충격이야ㅠㅠㅠㅠㅠㅠㅠ
[Code: f0a8]
2024.03.30 09:21
ㅇㅇ
모바일
이다음에 어케되는지 진짜 궁금하다..... 강화인간크루들이 칸 데려가서 부둥부둥해주겠지?ㅠㅠㅠㅠ제발ㅠㅠ
[Code: 3e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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