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https://hygall.com/520958967

#기억잃고업보쌓는행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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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결혼을 먼저 입에 올린 건 행맨이었다. 소령을 단 행맨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일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자신의 여식을 소개시켜주겠다는 사람들에게 치였다. 그렇게 치이고 나면 돌아와서 밥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우리 그냥 결혼하자.' 였다. 밥은 항상 그런 행맨을 달래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 나랑 결혼하는 게 싫어. 베이비?"

“그럴 리가.”



오늘도 어김없이 군 행사에 불려 갔다 온 제이크는 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식탁에 앉아 간단한 식사 중이었던 밥은 오늘도 가서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뭐야. 지금 21세기라고. 우리가 결혼한다고 군대에서 내쫓기는 것도 아니고, 배우자 혜택도 똑같이 받을 텐데 뭐가 문제야. 나도 당당히 로버트 플로이드가 내꺼라고 자랑하고 내세우고 싶어. 이제 만나는 사람 있다고 말하는 것도 다들 안 믿는 눈치란 말이야. 실제로 데려오거나 보여준 적 없으니까."

"......"

"베이비는 내가 이러다 다른 사람이랑 선이라도 봤으면 좋겠어?"




무심한 표정으로 빵을 베어 물던 밥의 턱이 그대로 동작을 정지했다. 제이크는 장난 식으로 물었지만 그게 밥의 가장 큰 공포였다. 자신과 달리, 이전엔 계속 여자를 만났던 행맨이니 언제든 저와의 관계에 지쳐 주류사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 편이 행맨에게도 더 좋을 것이었다. 결혼은 애정의 결실일수도 있지만, 우호관계를 쌓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쉬웠으니까.


그에 비해 저와 행맨의 결혼은 어떤가. 둘 중 하나가 여자였다면 좋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행맨의 집안도 제 집안 못지않게 세를 떨치는 세러신이었고, 저 역시도 플로이드가 아니던가. 물론 요즘은 둘 다 같은 성별이어도 결혼 자체가 가능한 세상이긴 하지만 플로이드 가는 그걸 받아드릴 집안이 아니었다. 행맨 말처럼 단순히 결혼으로만 생각하기엔 밥에게 이름 뒤에 달리는 패밀리 네임부터가 너무 무거웠다.




"......내, 내가 계속 결혼 안 하겠다고 하면 우리 관계는 지속되기 어려울까?"



장난 반 진담 반 투정이나 한 번 부리려던 건데 돌아온 질문에 아차 싶었다. 그제야 제이크는 제가 또 겁 많은 연인을 생각의 늪에 밀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말은 안 해도 자신과의 관계를 불안해하는 밥에게 우리 둘도 이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공표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지 공포심을 심어주려던 건 아니었다.



제이크는 마시던 물병을 내려놓고 밥에게 다가가 그대로 품안에 끌어안았다. 미약하게 떨리는 몸을 토닥이자 로버트가 참고 있던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하늘에서는 당당하고 냉철한 이 WSO는 무슨 일인지 제 품안에서는 늘 유리구슬 같았다. 



“베이비. 나는 우리 관계를 공고히 하고 싶은 거지, 그냥 결혼이 하고 싶은 게 아냐.”

“그러면?”

“우린 이미 같이 살고, 하루 종일 얼굴 보면서 지내니까 결혼한다고 큰 차이는 없겠지만. 집 밖을 나서면 달라질 게 많을 걸.”

“.......”

“결혼해서 법으로 엮이면 너도 나도 사회적 안전망에 걸리는 거라고 생각해. 예를 들어 네가 무슨 일이 있거나하면 지금은 내가 바로 알 수 없잖아, 하지만 우리 둘이 부부가 되면 그 연락을 가장 먼저 받는 건 내가 될 거야. 그리고 난 네 보호자가 되겠지."

"......."

"아, 물론 널 당당하게 미스터 세러신이라고 소개할 수도 있을 테고."



조근조근 뱉어오던 진지한 말끝에 달리는 본심이 잔뜩 섞인 얘기에 밥이 행맨의 품 안에서 손가락을 세워 쿡쿡 찔러왔다. 행맨은 웃으면서 그 손가락을 잡았다.





"......결혼해서 우리가 부부가 된다고 좋은 일만 있진 않을 거야."

"나쁜 일만 있지도 않겠지.

“나쁜 일이 더 많을 수도 있어. 아무리 겉으로는 소수자 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모를 일이잖아.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어. 게다가 너희 집안이나 우리 집안에서-”

"미스터 세러신은 벌써부터 걱정이 많네.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제이크 행맨 세러신이야."





대답대신 팔을 둘러 제이크의 허리춤을 끌어안은 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우는 건가 싶어 고개를 낮춰 보았으나 밥은 고집스레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제이크는 그런 밥이 귀여워 정수리에 뽀뽀를 쏟아 부었다. 다섯 살이나 어리고 막내였다는 걸 잊고 지내다가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티가 났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 걸까. 우리 베이비는.”

"....안해...내가..."

"응? 뭐라고?"

“......미안하다구. 내가 너무 겁쟁이라.”



여전히 제 품 안에서 웅얼거리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 밥이었다. 제이크는 그런 밥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렸다.



“겁쟁이씨. 미안하면 뽀뽀 3회 실시합니다. 실시.”




능글거리는 말투에 아까까지 꽉 끌어안았던 건 어쨌는지 휙 떨어져 나오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행맨을 흘겼다. 그러고는 이제 빨리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오라면서 손을 휘휘 내저어 내쫓은 밥이었다. 제이크는 먼저 귀엽게 굴 때는 언제고 이럴 때마다 자신을 파렴치한 보듯 쳐다보는 게 웃겨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걸어놨던 자켓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옷 끝이 붙들렸다.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자신을 잡은 밥을 쳐다보자 고개를 내려달라는 듯 손을 팔랑거렸다. 



“베이.ㅂ....”


쪽. 쪽. 쪽. 제이크가 내뱉으려던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밥의 입술이 빠르게 제이크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이 세 번 닿고는 사라졌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 상황을 살피던 제이크는 말한 거 다 갚았다는 듯 다시 가라고 손을 내젓는 밥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뒷목을 잡아 제게 고개를 돌리게 만들고 입술을 겹쳤다. 


자연스럽게 입을 열고 혀가 섞였다. 혀 밑 여린 살들을 헤집자 그 쪽이 연약한 밥이 행맨 쪽으로 몸을 가볍게 붙여왔다. 그걸 놓치지 않고 안경 쪽으로 손을 옮겨 자연스럽게 안경을 벗겨냈다. 식탁 위에 내려놓으려는데 밥이 그 위로 손을 겹쳐서 막았다. 그리곤 팔뚝을 툭툭 두드리며 그만하라는 신호에 아쉽게 떨어져 나왔다. 떨어져 나온 후에 제이크는 움직이지 않고 로버트를 빤히 바라봤다. 



“난 밥 먹을 거야. 씻고 옷 갈아입고 와.”

“그럼 난 씻고 와서 베이비 먹으면 되겠다.”



제가 벗겨낸 탓에 안경 없이 큰 눈을 깜빡 거리던 로버트는 평소라면 징그럽다며 밀어냈을 음담패설에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긍정도 없었지만 밥도 그런 행맨을 같이 바라보다가 한 번 더 가볍게 입술에 입 맞출 뿐이었다. 제이크는 끝까지 로버트스러운 행동에 한 번 웃고는 다시 안경을 씌워줬다.







*






그 뒤로도 끝없이 졸라대던 행맨의 프로포즈는 밥이 7개월 동안 항모에 있다 다시 르무어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당연히 밥은 여전히 대답을 않은 상태였다. 




비슷한 시기에 항모에 나가 있다가 밥보다 몇 개월 먼저 들어온 행맨은 홈커밍에 마중을 나온다고 했다. 밥은 자기도 못나갔으니 굳이 오지 않아도 좋다고 했지만 그 말을 들을 행맨이 아니었다. 사실 꽤 오랜 기간 얼굴을 보지 못해 애가 닳은 건 로버트도 마찬가지여서 열성적으로 말리지 않기도 했다.




전투기에서 내리자마자 뛰어 나오는 사람들에 밥은 바쁘게 눈으로 행맨을 찾았다. 수고했다는 말을 주고받고 가족 혹은 친구들과 만나 신난 동료들 사이에서 장미꽃 한 송이와 성조기 깃발을 든 행맨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밥은 저도 모르게 신나서 뛰어가 그대로 안길 뻔한 것을 참고 행맨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네. 베이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표정을 한 행맨은 밥의 눈앞에 들고 있던 작은 성조기 깃발을 살랑거리며 흔들었다. 그러나 밥은 고개만 끄덕일 뿐 불만이 가득한 상태로 입술만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그런 밥이 귀여워 손에 들고 있던 장미꽃을 들려주고는 살짝 품에 안았다가 어깨를 두드리며 떨어져 나왔다. 남들이 보기에도 친한 동료사이 정도에 누구나 할 법한 인사였다. 다들 그 ‘행맨’이 누군가를 마중 나왔다는 사실에 이미 수군거리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밥인 것을 확인하자 의아해하면서도 이해하는 눈치들이었다. 




“좀 웃어줘. 나 오늘 나오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빨리 집에 갈래.”



제가 쥐어준 장미꽃만 손끝으로 굴리며 꼼지락 대는 밥을 바라보던 행맨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가냐는 동료들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준 밥이 앞장서서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눈앞에 선 인물 때문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로버트!”



인자한 얼굴이지만 묘하게 각이 잡힌 태도와 반듯하게 틀어 올린 머리. 뒤에 서있던 행맨은 보자마자 밥의 어머니라는 것을 눈치 챘다.




“엄마.”

“아들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이게 얼마만이니.”



어설프게 서있던 로버트는 팔을 벌린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 품에 안겼다. 밥의 품에서 놓아주마자 꽃다발을 건넨 밥의 어머니는 저번보다 마른 것 같다, 이번 배치에서 힘든 점은 없었냐 등등 질문이 쏟아냈다. 한참을 질문에 대답하던 밥은 아직도 현실감이 없는지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제 어머니를 바라보곤 오신다는 말씀 없으시더니 왜 왔냐고 물었다. 


“왜 오기는. 네가 말을 안 해주니까 못 온 거지. 가끔은 아들 보러 올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바쁘신 줄 알았는데.”

“네 아버지가 바쁘지. 내가 바쁘겠니. 그리고 내가 안 오면 우리 아들 이렇게 맞아줄 사람도 없잖아. 그러게 엄마가 얘기 했잖니. 얼른 결혼했으면 너도 저렇게 애도 낳고-”

“안녕하세요.”




한바탕 시작되려는 잔소리에 밥이 또 한숨을 푹 내쉬려는데 뒤에 서있던 행맨이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이런 식으로 제이크를 제 가족에게 소개할 생각은 없었던 밥이기에 놀라서 말을 잊었다. 로버트가 놀라거나 말거나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제이크는 어머니께 손을 내밀었다.


“아드님이랑 같은 미션 나갔던 소령 제이크 세러신입니다.”

“세러신?”


밥의 어머니는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며 행맨의 라스트 네임을 되뇌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는 제이크는 손을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텍사스 주지사를 지내신 알버트 세러신이 제 할아버지십니다.”

“아, 그 ‘세러신’가의 자제분이시군요. 반가워요.”

“오늘 오시는 줄 몰랐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제가 안 나와도 될 뻔했네요.”

“세러신 소령이 우리 밥을 마중 나온 거였나요?”



밥의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알고 있는지라 의아하다는 듯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들이 제이크 세러신과 알고 지낸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거니와, 마중 나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밥은 이마를 긁적이기만 했다. 



“네. 아, 편하게 제이크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어머님도 잘 아시겠지만, 한 번 나가면 만나기 어려워서요. 시간 날 때 맞춰서 보는 편입니다.”


마치 준비한 것처럼 잘 둘러대는 행맨의 말에 밥은 혀를 내둘렀다. 이제 핑계 댈 것도 없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당황한 티 하나 없이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술술 내뱉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밥은 속으로 정치인 집안이라더니 저런 건 따로 배우는 건가 하면서 툴툴 거렸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이렇게 나와 주는 사람이 있긴 해서. 난 또 우리애만 혼자 맞아주는 사람 없을까봐 걱정했거든.”

“그럴 리가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밥 동생처럼 여기는 동료들이 많아서 잘 챙겨줍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래요? 쟤가 좀 유별난 구석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형들을 주로 잘 따르긴 했는데, 여기 와서도 그런가보네요.”

“아, 엄마.”



꽤 흥미로운 주제에 행맨의 눈이 묘하게 변하자 밥이 못 말린다는 듯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왜 맞잖아. 너 어릴 때도 그 아발론 가 아들 뒤만 졸졸 쫓아다니고, 나중엔 걔 쫓아서 해군 사관학교 간다 해서 내가 얼마나 속이 터졌는데. 아니, 엄마가 공군인데 굳이 해사를 간다는 게 말이 되니?”

“빌리 말입니까?”

“어, 맞아요. 빌리를 알아요?”

“네. 탑건 동기였습니다. 밥이랑 셋이 같은 미션에 나간 적도 있고요.”

“어머, 그럼 서로 잘 알겠네. 우리 애랑 빌리랑 어릴 때부터 친해서 좀 유난이거든요.”

“......그건 빌리를 쫓아간 게 아니라 그때 빌리가 나한테 해군에 대한 환상을 심어줘서 그런 거라고요.”

“어쨌든 간에. 간 건 맞잖니.”

“어머니는 공사 가라고 말씀 안 하셨나 봅니다. 

“제이크도 친하니까 알지 않아요? 로버트가 좀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전혀 군인이 되고 싶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공대나 갈 줄 알았는데, 해사를 지원해서 얼마나 놀랐던지. 얘는 아마 내가 말렸어도 갔을 거예요.”




진짜 그랬냐는 의미로 행맨이 눈썹을 까딱이자 밥은 뭘 묻냐면서 눈을 굴렸다. 집에 가면 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백퍼 절 놀리느라 바쁠 게 뻔했다. 가뜩이나 저를 애 취급하는 행맨이 얼마나 이걸로 우려먹을까 싶어서 아득해진 로버트였다. 그 사이, 멀찍이 서있던 수행비서가 다가와서 밥의 어머니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볼을 부풀렸던 로버트는 나직막히 숨을 뱉어내며 말했다.



“안 바쁘시다더니.....”

“네 얼굴 보러 올 시간 정도는 있단 얘기였지. 원래 밥이라도 같이 먹고 가려 했는데 안 되겠네.”



어리기만 했던 막내아들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훑은 그는 로버트의 뺨에 손을 대면서 밥 좀 잘 챙겨 먹으라고 일렀다. 예민하기는 꼭 아빠를 닮아가지고 좀만 성에 안 차면 곡기부터 끊는다는 잔소리도 함께였다. 행맨 역시 여러 번 뭐라고 했던 습관이어서 그 말을 들은 행맨은 어디서부터 온 건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우리 집으로 한 번 놀러 와요. 남편이 좋아하겠네. 롭이 제이크랑 친한 거 알면.”

“영광이죠. 초대해주시면 언제든 가겠습니다.”

“우리 로버트 잘 챙겨줘서 내가 더 고마운 걸. 아참, 제이크는 결혼 했어요? 내가 원래 이런 질문 잘 안 하는데. 궁금해서.”

“아, 엄마!”

“왜. 물어보지도 못하니? 실례되는 거였다면 미안해요.”

“하하. 괜찮습니다. 아직 안 했는데 하고 싶어서 얘기 중입니다.”



행맨이 은근슬쩍 밥을 보면서 대답을 해왔다. 그에 어머니는 약간 아쉽다는 기미를 보였다. 보나마나 없다고 했으면 누군가를 엮어주려고 하셨던 것이 틀림없었다. 제가 어머니였어도 아마 그랬을 것이었다. 행맨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아주 훌륭한 상대였으니 말이다. 젊은 나이에 소령을 달고 앞이 창창한 청년. 게다가 훤칠한 외모에 집안도 끝내줬다. 

거기까지 떠올린 밥은 뭔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지, 이게 섭섭한 게 맞나. 제 속임에도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내뱉고 싶은데 차마 꺼낼 수는 없어서 입술만 꾹꾹 씹었다. 



“잘됐네. 얼른 해요. 군인은 가정이 있는 게 좋아요. 나라에 헌신하는 것도 좋지만, 가정을 먼저 지킬 수 있어야 나라 지킬 힘도 나는 거니까. 나도 그랬어요.”

“말씀 감사합니다. 제 파트너한테도 전해줘야겠네요.”

“......엄마. 바쁘신 것 같던데. 얼른 가세요.”



밥이 참다못해 한 마디 하자 간만에 본 엄마를 이렇게 자꾸 보내려고 하냐면서 타박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옆에 선 비서에게 건네받은 서류를 밥에게 들려줬다. 이게 뭔가 싶어서 꽃다발을 옆에 끼고 펼쳐보던 밥의 표정이 곧장 굳었다.



“이거 주려고 오신 거예요?”

“말을 또 왜 그렇게 해. 네가 집엘 하도 안 오니 내가 온 거지. 아들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가지고 가세요. 저 관심 없어요.”

“관심 없어도 봐. 그 중 셋은 골라서 추려 보내.”

“엄마!”

“그렇게 불러도 안 돼. 아까도 말했잖아. 너도 가정이 있어야 얼른 안정을 찾고 동료가 아니라 저렇게 가족들이 와서 널 맞아주지. 제이크도 결혼하고 나면 누가 너 맞아주러 오겠어. 그 전에 제대나 하면 모를까.”

“그때도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알아서 한다고요.”

“......네가 퍽이나 알아서 하겠다. 제이크. 옆에서 로버트 좀 설득시켜 봐요. 내 말은 도통 듣지를 않아서.”




가만히 서있던 행맨은 여부가 있겠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뒤에 행맨의 시선은 밥이 받아든 서류에 얼마간 꽂혀있었다. 



“아, 이번 크리스마스는 집에 와라.”

“선약 있어요.”

“만나는 사람도 없으면서 무슨 선약. 또 집에서 혼자 박혀 있으려고 그러지.”

“.......”

“그런 걸로 알고 갈 거야. 알겠지? 그건 꼭 골라서 보내고. 3명이다. 3명. 더 있어도 괜찮고. 아, 먼저 가볼게요. 재밌게 놀아요.”

“네. 들어가세요.”




끝까지 대답을 않는 밥의 어깨를 당겨 품에 안은 어머니는 양 볼에 비쥬를 날리고 비서에게 가자는 고갯짓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어머니가 사라짐과 동시에 스트레스가 가득 얹힌 밥은 안경을 벗어 쥐고 눈가를 문질렀다. 그런 밥의 뒤로 다가온 행맨이 어깨를 토닥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우.”

“......우리 엄마 장난 아니지.”

“어. 말투는 생각보다 다정하신 것 같은데 기백이 있으시네.”

“중령이셨다니까. 우리 아빠도 엄마 못 이겨.”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든 것들을 바리바리 주워든 밥이었다. 어머니가 쥐어주고 간 서류를 당장에라도 바닥에 내던지고 싶다는 얼굴이었는데 그럴 순 없었는지 비행 가방에 쑤셔 박았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꽃다발도 살짝 뭉개져 있었는데 제가 준 꽃 한 송이만 최대한 상하지 않게 들고 있는 걸 보고 행맨은 슬쩍 웃었다. 연인을 연인이라고 말도 못하게 돼서 속이 조금 상할 뻔했는데 이런 작은 부분을 발견하면 또 사그라졌다. 제이크는 속으로 먼저 반한 게 아무래도 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이 밥은 손이 조금 가뿐해진 기분에 이제 가자면서 고개를 돌려 행맨을 쳐다봤다. 눈이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왜 그러냐는 의미로 고개를 갸우뚱 한 밥이었으나 행맨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소개팅 나갈 건가. 플로이드 대위?”

“......짜증나 진짜.”






*





집에 돌아와 행맨과 한바탕 회포를 푼 밥은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상념에 빠졌다. 어제 제 어머니가 하고 간 말들 때문에 분명히 신경 쓰일 텐데 행맨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아침잠에 정신 못 차리는 저를 이불로 둘둘 말아서 그 위로 여기저기 입맞춤을 쏟아내고는 아침 운동을 하러 나간 참이었다.


평소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어제 일을 겪고 나니 밥은 모든 게 다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에 만나고도 그 흔한 반가움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연인이 마중 나와도 그저 동료라고 소개해야하는 사이. 게다가 그 연인 앞에서 결혼을 종용 받기까지. 저 사람의 연인이 나라고 밝히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이런 건지 몰랐다.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숨기고 싶지 않아하는 행맨에게 너무 과한 부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갑자기 행맨이 투정 식으로 말하던 것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제가 육지에 있을 때도, 항모에 나가 있을 때도 이런 자리가 몇 번이나 있었을 텐데. 행맨은 그때마다 얼마나 답답하고 비참했을까. 하물며 ‘제이크 세러신’이.





“......행맨 이름 값 못하네.”


로버트는 싱숭생숭한 마음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그 언젠가 피닉스가 제게 행맨이 왜 행맨이라고 불리는지 아냐고 묻던 것과 자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던 행맨의 모습이 겹쳐 지났다. 



종종 ‘제이크가 언젠가 날 선택한 걸 후회하게 될까봐, 날 떠나겠다고 할 수 있으니까’ 란 말들을 하곤 했는데,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그냥 이기적인 거였다. 상처받기도 싫고, 손에 든 건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아서 상대의 마음을 스스로의 잣대로 가늠하고 결단 지었다. 마치 자신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하면서 말이다.  


사랑에 늘 자신만만한 제이크 세러신과 그렇지 못한 겁쟁이 그 자체인, 로버트 플로이드.


제이크는 그동안 자신을 얼마나 많은 회피와 불안 속에서 건져 올리고, 참고 인내하며 지냈던 것일까. 2년이란 시간 동안 참을성 있게 제 곁에 있어준 행맨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이걸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로버트는 속에서 꾹꾹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히 밀어냈다.


그 사이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건지 행맨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이비. 아직도 안 일어난 거야?”



부르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아직 자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침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밥은 이대로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몸을 더 웅크렸다. 야속하게도 행맨은 오자마자 침대로 직행해 이불에 둘러싸인 밥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일어나야지. 밥 먹자.”



보통 이런 식으로 들러붙으면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들썩이는 밥이었다. 행맨은 미동도 없는 게 이상해 어디 아픈가 싶어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다.



“베이비 어디 아픈......왜 그래. 왜 울어?”


밥은 여전히 다정함을 가득 담은 행맨의 얼굴을 보자마자 쭉쭉 짜내던 눈물대신 울음을 터트렸다. 밥의 우는 모습에는 여전히 면역이 없는 행맨인지라 잔뜩 당황해서 아무런 말없이 우는 얼굴만 손으로 닦아줬다. 품에서 한참을 울던 밥은 흐느낌이 잦아들 때쯤 훌쩍거리며 행맨을 불렀다.



“있잖아. 제이크.”

“어? 어. 이제 좀 괜찮아? 왜 그래. 응? 무슨 일인데.”

“.......나랑 결혼할래?”
















-
쵸큼 늦었다! 
행맨이랑 프리츠는 탑건 동기인 설정. 걍 내맘임.



행맨밥 파워풀먼
 
2023.01.26 13:43
ㅇㅇ
이렇게 연애랑 결혼해놓고...어떡함...ㅠㅠㅠㅠㅠㅠㅠ
[Code: aa10]
2023.01.26 13:44
ㅇㅇ
모바일
아 과거 얘기 읽을수록 현실이 믿기지 않음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근데 한편으론 행맨 기억찾고 구르는거 너무 보고싶은 나맨밥...
[Code: c585]
2023.01.26 19:31
ㅇㅇ
아아ㅏㅇ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불 속에서 눈물 흘리다가 제이크 얼굴 보고 엉엉 우는 밥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런 존재였는데 서로에게ㅠㅠㅠㅠㅠ
[Code: 622f]
2023.01.26 19:32
ㅇㅇ
하지만 난 지금 밥이 구르는 것도 좋아요 센세 흐흐흐흐흐흐흐흫흐흐흐흐 굴러!!! 굴러!!!!!!! 더 굴러!!!!!!!!!!!!!!!!! 업보를 쌓아라 행맨!!!!!!!!!!!!!!!!
[Code: 622f]
2023.01.27 00:16
ㅇㅇ
모바일
아 맘아프고 좆도 아파
[Code: ac39]
2023.01.28 13: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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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눈물콧물 찔찔 흘리고 있어 센세 이렇게 가슴아프게 이어졌는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제이크야 빨리 기억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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