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sd 겸 1화: https://hygall.com/630020857

*종교 잘 모름 ㅈㅇ, 오류가 있거나 사실과 다를 수 있음 ㅈㅇ
*실존인물 등장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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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의 세 번째 날, 아침의 대소란을 뒤로 한 채 도착한 시스테나 성당의 정원에는 가벼운 비가 내렸다. 베네치아의 총대주교 고프레도 테데스코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이제 남은 것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트랑블레는 도저히 새 이름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분열된 진보가 이를 갈아 합산하기라도 한다면, 이제는 완전히 끝장이라는 것을 보수파의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그리하여 자신은 끝까지 알도 벨리니에게 투표해야 한다는 것 또한.

버스가 움직이는 그 잠깐 사이에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주머니 속에서 알도 벨리니가 쥐어준 약병이 자꾸만 짤랑, 하는 소리를 내며 그 존재감을 알렸다. 식당에서 나올 때, 버스타기 전에 잠깐 제 방에 들리겠다고 해야 하는 거였는데. 투표를 앞두고서 수면제 같은 걸 먹을 수는 없었으니까. 창 밖으로 내리는 비가 점차 굵어졌다, 얕아졌다 춤을 추는 것마냥 제 주머니 안의 알약도. 몸이 섬찟 떨려 시선을 멍하니 앞좌석의 벨벳 시트덮개에 고정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자 노력 했다. 어차피 그래 봐야 볼 수 있는 것은 맨들맨들한 뒤통수 뿐이면서.

- 투표는 한 시간 뒤에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 

성당 경내를 울리는 로렌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정원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비를 싫어하면서 비를 보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 때문에. 아니, 제 나이를 생각한다면 - 어쩌면 이 장소에서 이 풍경을 보는 것 또한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저는 끝내 과반을 넘지 못할 테니 남은 것은 저들 중 하나가 될 터였다. 아데예미가 너무 처음부터 끌어내려져서 그런 게지, 아니면 제가 너무 안일하게 투표할 생각을 해서일까. 

- 저는 교황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 그럼 저 남자에게 주란 말입니까?
- 이건 전쟁입니다!

끝내는 너도 나도, 원하지 않는 힘에 전쟁이라는 곳에 이름을 올리게 된 셈이었다. 이것 또한 벨리니가 모시던 그분의 생각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제 교황이 자리를 내어준 것도, 그 후임자인 벨리니의 교황이 아데예미와 트랑블레를 끌어내리며 벨리니를 최전선에 올려두게 된 것도, 전부가 다 정해진 순리를 따르는 거라면.

어쩔 수가 없잖나, 꺼져갈 날만 기다리는 이 미약한 생물은.  

비 오는 풍경이 유명한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꽤 오래 살았던 주제에 자신은 비가 내리는 걸 유난히도 싫어했는데, 이제 그만해야 할 때가 됐다는 말을 들었던 날에도 비가 왔기 때문에. 그렇지만, 하고 말끝을 늘이는 제게 성하는 조용히 내뱉었다. 자네는 할 만큼 했어,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는 법이라네. 자네도 알겠지만 - 이제는 그만 놓아줄 때가 된 거야.

나도, 자네도.


꽤 오래 전, 같은 위치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를 내려다보며 고프레도 테데스코는 다시 한 번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된 셈이었다. 그때의 비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나긋한 목소리로만 그에게 남았음에도, 결국 테데스코는 비를 매우 싫어하게 된 것까지가 알도 벨리니가 지은  의 결말이었다.

- 말도 안 되는 논평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 테데스코.
- '그 녀석'은 성하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면 안달이 난 사람인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벨리니 추기경이지, 테데스코.
- .... 


죄를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면 안 된다는 걸 알잖나, 고프레도.

그렇지만요, 그래도 너무 미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애초에 사랑과 미움이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작게나마 중얼거렸으나 제 장관은 대답하지 않은채로 그저 가벼이 웃었다. 마치 제게는 용서하지 못할 죄 같은 건 없다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역시, 가끔은 용서하지 못할 위인도 있는 법이라는 걸 알았다. 끝내 자신은 인간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영예의 이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베네딕토 17세라니, 우습지도 않지.

역시 두통약을 챙길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쌀쌀했고, 바람이 선선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 주머니에서 제 것이 아닌 약병이 자꾸만  익숙하지 않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기 때문에. 제가 이 망할 두통을 언제부터 겪게 되었는지 그는 명확하게 알았다. 다시금 언급하지만 시작은 명확했으나 결말은 알 수 없는 상흔이기 때문에. 십 몇 년 전쯤 있었던 일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비방과 말도 안 되는 내부폭로, 그리고 신문에 올라온 수많은 잔인한 논평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딱 하나의 이름, 가장 메인을 차지한- 

알도 벨리니.    

-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 계속 언론에 오르내리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다 당신이 퍼트린 거잖아, 네가 논평을 쓴 거잖아. 그러나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제 안으로 가라앉았다. 끝내 이해하고 만 거지, 알도 벨리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교황은 인간이었고 물리적으로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었으며 고립되었기에, 부패는 끝내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 원흉으로 지적된 것은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이었다. 저와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올라온 수많은 동족들. 그렇게 고프레도 테데스코, '전차의 대포'이자 '장관의 행동대장'은 다시 한 번 숙청의 칼을 갈았다. 같은 언어를 말하는 동지들을, 제 수족과도 같은 어리고 나이든 사제들을 잘라내면서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그는 절대 모를 터였다.

연인 간의 사이가 슬슬 벌어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고프레도 테데스코는 대외적인 갈등을 은밀한 곳까지 끌어오고 싶지 않아 했는데, 제 머리를 시도때도 없이 두드려대는 수많은 고발들을 다시 한 번 침대에서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프레도, 오늘은 푹 자. 속삭이는 끌어안은 몸이 따듯했고 목소리가 나긋했다. 그리고 그가 타주는 따듯한 우유 한 잔에 수면제를 집어먹고 잠들었다 일어난 제가 마주한 것은.

제 스승을 힐난할 자료를 끌어모으고 노트북을 두드리던 자.       

- 저는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 테데스코.
- 그러니 저는 교황이 될 수 없겠지요.
- ...
- 그러니 저는 제 교황명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교황명, 교황이 된다면 어떤 이름을 할까. 사제라면 한 번은 생각해 본다는 그 일. 교황이 되고 싶어도, 되고 싶지 않아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제가 선택할 교황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고프레도 테데스코는 사실 그것을 단 한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는데, 그것은 애초에 늘-. 

너무나도 완벽한 교황이 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건강이 좋지 않다고, 교황이 되기에는 어려운 조건들만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그의 형제까지도, 그를 모시던 수많은 사제들까지도. 하지만 고프레도 테데스코는 알았다 - 요제프 라칭거는 완벽한 교황의 재목이었다. 그는 사제이자 신학자였으므로, 그만큼 카톨릭이 걸어온 길을 잘 아는 이도 없었고,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도 없었다.

- 성하.  

그러니 피를 묻히는 건 자신 하나뿐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불명예한 이름을 얻는다고 해도, 원리원칙만 따지는 멍청한 노인네라는 소리를 들어도, 자신은 끝내.

- 저는 교황 같은 건 될 수 없어요.
- 고프레도.
- 저를 용서하세요...

나는 언제나 자네를 용서한다네.

끝내 이것은 딱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죄악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러니까 어치파 들을 생각이 없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딱 한 번, 똑같은 인간이 되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끝없이 내뱉어지는 입은 뱀과 같고, 자꾸만 움직이는 펜은 칼과 같았다. 그럼에도 알도 벨리니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것 또한 사실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너도 한 번 당해보라지, 식의 유치한 행동은 당연하게도 깊은 생각을 거치고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자신은 결국 죄인을 용서하지 못했으므로, 너도 나를 용서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러면 결국에는 등가교환이었다. 그 또한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낮게 키득거렸던 것도 같았다. 그가 했던 수많은 일들이 결국에는 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알았으면서, 비겁하게도. 제가 아는 가장 대단한 남자에게 죄가 아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배웠음에도. 하지만 끝없는 등가교환을 요구하는 알도 벨리니는 제게, 

마치 선악과 같았으므로.


- 이제는 라칭거라고 부르게, 늘 그랬듯이.
- 하지만...
- 20년을 넘게 그렇게 불러 왔잖나, 라칭거 추기경, 하고.
- 물러나신다고 해도 존칭은 모두 유지되게 하겠다고,
- 이제는 그런 건 필요 없다네.

나는 자네와 오랜 친우가 되고 싶다네.

그러니 꾸준히 바티칸에 들러 주겠나?
- ....
- 내가 미안한 건 딱 하나야,

자네가 바티칸에 남고 싶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사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때문에. 눈 앞의 스승은 유쾌하게 웃는 듯 했으나 테데스코는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제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제가 바티칸에서 했던 직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하나의 흠집조차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은 딱 하나,

그건 전부 그를 위해서.    

걸터앉은 벽돌이 축축하고 기댄 기둥이 차가웠다. 어쩌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지, 그러면 베네치아로 돌아가 병가를 기념으로 바티칸에 돌아오지 않는 거야. 그렇게 오래 앓다가, 끝내는 은퇴하겠다고 말하면 모두가 환영할지도 몰라. 눈 앞의 익숙한 거북이가 발을 동동거리며 빠른 걸음을 옮겼다. 저 녀석은 어디를 가는 걸까, 끝없이 바티칸 행 기차를 타던 저처럼 누군가를 만나러 갈까, 너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죄악 없이 그 곳까지 갈 수 있는 티켓을 끊을 수 있다면 저는 쉬이 그 길을 택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죄악을 저지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까지도, 전부 다 그의 가르침이었으므로.

- 테데스코?
- ...

아직 안 돼, 자네는 아직 할 일이 있잖나, 고프레도.

또 다시 제발 저도 가여이 여겨 달라고 빌었던 것만 같았는데. 분명히 잠깐 졸았던 것만 같았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새 옆에 앉은 추기경이 제 이마를 짚으며 뭐라뭐라 빠르게 속삭였다. 이탈리아어는 아니고, 라틴어도 아니지. 그러면. 

-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양입니다.
- 아아, 아니요...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부실하지 않은 곳이 없지요. 

그래, 영어겠지. 제 등을 가볍게 쓸어내는 손을 보며 몽롱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같은 언어'를 쓰는 다른 사람일 거라고 가볍게 생각해 버렸던 거였다. 그는 자신을 고프레도라고 부르기를 허용받은, '살아남은' 유일한 남자였다. 아, 그는 이제 그러고 싶지 않을 테니 이제는 저를 고프레도라고 부를 사람은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몰랐다.

- 곧 투표가 시작될 텐데,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잠도 깰 겸 한 바퀴 마저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니 먼저... 

자리를 일으키며 생각했다, 이제 두통이 없는 거 같은데, 아까 내가 그가 준 수면제를 먹었던가, 하고. 그건 주머니 안에서 짤랑거리며 흔들리는 소리를 내고 있으니 사실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리지, 왜 이렇게-. 이제 다 늙어빠진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비명이라도 지르던가. 역시나 빨리 가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손발이 다 잘린 노인네가 몸에 좋지 않은 것만 해대며 뭘 얼마나 살겠다고. 곧 세 번째 날, 여섯 번째 투표가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곧 결판이 날 터였다.

모든 것은 신의 섭리대로, 카톨릭이 걸어온 길 그대로.

-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늦지 않게 오시지요.

제가 잠든 그 잠깐 사이, 어느 순간 밝아진 햇살 사이로, 익숙한 인영 둘이 정원 내를 걸으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어쩌면은. 어차피 당선될 사람은 로렌스가 유력했다. 나쁘지 않지, 책임감 있고, 중도에 가까운 진보 인사니까. 진보는 끝내 로렌스의 즉위로 타협을 보았을 테니,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은 다시 표가 나올 수 없는 자에게 투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끝내 진보가 분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 이 콘클라베가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겠지만, 콘클라베를 이끌어가는 이는 단장님이어야 합니다.
- ... 벨리니 추기경.
- 교황이 되고 싶은 야망을 살펴 보아야하는 것은 자신 쪽이었는데, 주제넘게 단장님에게 마음 속 깊은 곳을 살펴보라는 만용까지 부렸다.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교황이 되고 싶었을까, 너는 나를 '용서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알도 벨리니에게 자신은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이라는 게지. 저는 알도 벨리니를 사랑했고 그를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이행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저는 교황이 될 수 없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알도 벨리니는. 이 모든 과정들이 우스웠다. 보수의 패망은 부패고 진보의 결말은 분열이었다. 그러나 결국, 각각의 최종점에 올라선 사람은,

단 하나의 비리조차 저지르지 않기 위해 죽어라 발버둥친 자신과, 의심을 통한 결합을 주장한 로렌스.
  
- 생각해 두신 교황의 이름이 있으신가요?
- ... 
- 로렌스 단장.
- 요한으로 하겠습니다.

요한이라, 꽤 괜찮은 이름이지. 베네딕토보다는 한참이나.

두통이 자꾸만 몸을 할퀴고 지나쳐서, 정말이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

- 테데스코 추기경, 자네 아픈가?
- 아니, 멀쩡해. 조금 졸릴 뿐이야. 어제 밤에 잠을 조금 설쳤거든.
-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 자네는 교황이 될 텐데. 

그럴 리가 있나. 시스테나 성당 안에서 이루어질 여섯 번째 투표, 자리에 착석한 추기경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이 원하는 자의 이름을 적어내게 될 터였다. 하나씩 하나씩 이름을 적는 소리 사이로, 끝내 제가 꾹꾹 눌러적는 것은.

알도 벨리니.   

저와 같이 고민하던 로렌스가 제 쪽을 빤히 쳐다보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고, 저는 반으로 접은 제 종이를 볼에 붙인 채로 그를 도발했던 셈이었다. 그는 내가 이 안에 무엇을 적었다고 생각할까, 제 이름? 아니면 하다못해 당신?  그는 결국 정답을 맞출 수 없겠지만 저는 알았다. 그가 저 종이 안에 적은 이름이 무엇인지, 앞으로 택할 이름이 무엇인지. 자리에서 일어난 로렌스가 투표용지를 넣으며 천장화를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 -.

펑.

큰 소리와 함께 세상은 전부 암흑이었다.

- 고프레도, 일어나, 고프레도!

아수라장이 된 경내, 왁자지껄한 소리에 귀를 스치고 지나치는 것은 익숙한 목소리. 이것이 징벌이었는가 아니면 신의 계시였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고프레도! 똑같이 회색 재를 잔뜩 뒤집어쓴 주제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쪽을 돌아보는 익숙한 얼굴이 슬로우모션 처럼 눈 앞을 스쳤다. 너는 나를 걱정해? 왜? 왜 자꾸 기대하게 만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자네는 아직 할 일이 있잖나, 고프레도.

소중한 사람이 선물했다며 그토록 아끼던 손수건을 찣어 피가 흐르는 제 이마를 지혈한 것은 알도 벨리니였다. 그는 재를 잔뜩 뒤집어쓴 것 말고는 다친 부분이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마가 따갑고 아팠으나 더 문제는 깨질 것처럼 머리를 두드리는 두통이었다. 다친 것은 자신 하나뿐인가,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가 다시금 내려섰다. 이게 만약 분노라면, 저만 다쳤다는 건 -.
 
-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
- ....
-기억하느냐고 물었잖아, 고프레도 테데스코.
- 그게 중요해?

이 지경까지 와서?

- 한 번이라도 협조 좀 해.
- 그레고리오 신학교의 강론 시간이던가. 내가 하는 강론에 자네가....
- ....

저는 알도 벨리니예요.

눈 앞의 어린 벨리니가 생생하게 입을 열었다. 저, 벨리니라는 이름을 보시면 알겠지만 저도 이탈리아계예요. 미국에서 왔지만... 미국은 카톨릭의 교세가 약하지만 저는 이탈리아 가정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성당에... 중얼거리는 입술이 붉고, 한참이나 내려간 시선이 저보다 낮았다.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키가 작네, 문득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가, 아, 교황청에서 알게 되면 바티칸에 불려갈 만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신도들이 쉬이 홀릴 수 있는 미남을 바티칸에 가둬둔다는, 대중들도 흔히 아는 그 우스갯소리마냥.

- 저도 노력한다면 사제님 같은 성직자가 될 수 있을까요?
- 아무렴.

그리고 동시에 무엇을 떠오르게 한 거였다. 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시죠? 저는 고프레도 테데스코예요. 이탈리아인이지만 이름을 보면 아시듯이... 독일인이라는 특성도* 가지고 있어요. 우물쭈물 목소리를 끌어내던 어린 사제인 자신,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테데스코'는 독일인이라는 뜻

너는 분명히 훌륭하고 청빈한 성직자가 되겠지. 나는 얼굴만 보면 알 수 있단다. 

아아, 그래. 해맑게 웃는 어린 수도사에게 손을 내밀어 주던 고매한 어른을.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 자신은 정말이지 우스울 정도로 강한 우연에 묶여 있었다. 원리원칙을 따지는 이전 교황의 최측근,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생각하는 이후 교황의 최측근. 그리고-

결국에는 닿지 못할 이상향을 바라보는 것도. 

- ... 그래.
- 발랑 까진 꼬마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해, 지금 보면.
- ....
- 그러니 당신은 잘 하겠지. 용서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 ....
- 이 나이쯤 되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어, 바티칸은 지친 몸으로는 어렵고 힘들거든. 

- 그때가 되면,
- 응?
- 같이 체스를 둘 수 있을까.

당신 체스 잘 두잖아.

너만큼은 아닐걸. 퇴위 이후 바티칸에 들릴 때마다 테데스코는 라칭거 추기경과 정원을 구경하며 맥주를 들이키고, 가볍게 체스를 두고는 했다. 그와 저는 늘 호각을 이루며 서로 승률을 겨루었기에, 자신은 제 체스 실력을 누가 훈련시켜 주었는지 꾸준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셈이었다. 비가 오는 날을 귀신같이 피해서 오는 제게 추기경은 어떤 얼굴을 했던가.

- 제발 같이 두고 싶다고 말해줄래...
- ...

알도 벨리니, 단 한 번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제게 체스를 권하고 있었다. 역시 그에게는 용서가 너무나도 쉬웠다.

그는 제 표의 존경을 받을 남자니까, 교황이 될 수 있는 야망을 되돌아볼 남자니까.

- 로렌스 단장님이 모두 모이라고 하십니다.

감기라도 걸렸는지 호흡이 가쁘고, 열이 자꾸만 오르는 것 같았다. 부축하는 손길이 제 덩치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그러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또한 우습게도. 저쪽에서부터 젊은 사제들이 걸어와 제 몸을 벨리니에게서 건네 받고, 자신은 가방을 이 곳에 들고오지 않았음을  아주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새 교황이 우리를 기다리며 자신의 발언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 지지부진한 운명의 결말이 코앞이었다.
   

*

이걸 이어쓰네... 시점이 고프레도 테데스코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벨리니의 입장이 너무 제한적으로 나오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싹 다 속마음 보여줄걸 그랬음;; 벨리니도 당연히 자기 사유가 있어서 교황청의 부패를 폭로한 거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게 우직한 충신인 테데스코에게는 어떻게 작용했을까... 싶은 것. 반대로 테데스코도 결국 벨리니가 했던 것과 같은 결의 일을 하겠지만, 벨리니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점차 캐붕 되어가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하죠오

콘클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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