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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2 23:25
우리 동생이 알파라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걘 그렇게 날 사랑하게 생겨먹었다.
형 혼자 다니지 말라고!
LP 가게 손님들이 죄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리암을 쳐다본다. 쪽팔리게... 리암은 씩씩대며 (누가 봐도 나 화났어요~ 싶은 쿵쾅거리는 발소리도 함께) 노엘 앞에 섰다. 더듬더듬 리암의 얼굴을 만지니 겨울인데도 뜨겁다. 아마 날 찾느라 여러 군데 뛰어다녔겠지. 병신은 난데 왜 병신 같은 짓은 니가 더 하는 거 같지.
존나 자주 갔던 길이라 상관없어
어쩌라고? 존나 자주 갔던 길이면 4K 화질로 보이기라도 하냐? 장님 주제에
니 진짜...
몇 마디 더 붙이려다 말았다. 리암 신경이 곤두서있는 건 어쨌든 내 탓도 있기 때문이다. 어제 집에서 혼자 계단에서 굴렀다. 리암 팬티 밟고... 아니 생각해 보면 그건 내 탓이 아닌데 씨발?
안 보여도 리암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린다. 내 손에 들린 LP를 가져다 지 가방에 구겨 넣는다. 그리고 깍지를 껴 옆에 단단히 붙들어맸다. 그새 또 리암의 페로몬이 새어 나왔다. 시원하고 날카롭다. 노엘은 저도 모르게 리암 팔에 붙어 페로몬 냄새를 맡았다. 제 형 머리통이 가까워지자 리암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서로 맞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다.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
어, 그래 리암 니네 형 잘 챙기고... 근데 아무 일 없었어 걱정 말아라
리암은 주인아저씨 말을 씹은 채 후다닥 가게 밖으로 나왔다. 밖은 그새 눈이 쌓여 더 고요하고 새하얗다. 리암은 제 품에 가두듯 형을 감싸 안고 천천히 걸었다. 말려봤자 집까지 이딴 모양새로 가야 한다는 걸 그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알았다. 리암이 일부러 부드러운 페로몬을 내보낸다. 노엘은 모른 척 리암의 팔을 주먹으로 퍽 쳤다.
야, 니 페로몬 조절해
일부러 푸는 거거든
쓸모 없거든
아니거든 니 지금 존나 안정되고 있거든
리암이 콧방귀를 꼈다. 그래, 잘났다 각인한 것도 아닌데 자랑스러워하고 지랄이야... 혼자 픽 웃은 노엘의 얼굴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리암의 표정도 미세하게 풀린다. 밖에 나와있을 땐 집보다 훨씬 노엘을 신경 쓰게 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보다 얌전히 기대주는 게 좋아 가끔은 돌아서 집에 가기도 했다. 예민한 노엘에게 금방 들켰지만.
배 안 고프니까 헛짓거리 하지 말고 나 잔다
아 왜!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엘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곧바로 자기 방에 직진해 침대에 누웠다. 옷도 안 벗고 자냐며 리암의 잔소리가 잇따랐다. 아 그럼 니가 벗겨주던가... 노엘이 웅얼거렸다.
니 피곤하잖아
그니까 벗겨달라고
니 피곤하다매!
변태새끼 진짜 아 니랑 못 살아 꺼져
노엘이 리암 가슴팍을 밀쳐 방 밖으로 쫓아냈다. 진심이 아닌 건 알았다. 집에 오자마자 강박적으로 갈무리한 페로몬을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그래도 그냥, 짜증 나서. 노엘은 고민하다 리암 옷장을 열어 아디다스 져지, 버킷 햇 하나를 챙겨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옅게 리암의 페로몬이 느껴진다. 찌를 것처럼 아픈 눈동자가 잠시 안 아프다. 리암 말이 맞다. 리암 페로몬을 맡고 있으면 장님이 된 눈이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딱히 계기가 있던 게 아니다.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상이 전부 암흑이었다. 그게 끝이다. 리암을 떠나 독립해 살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아마 리암이 울었었지. 아닌가. 웃었나.
그 이후로 리암의 과보호가 심해졌다. 집에서도 부엌엔 절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런 주제에 요리는 또 존나 못해서 일주일 내내 참다 참다 시리얼이나 처먹겠다며 리암이 만든 음식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리암이 왜 또 성질이냐 식탁을 엎을 줄 알았는데 들리는 건 미안하다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내가 약자가 됐다는 걸 비로소 인정하게 된 계기였다.
한동안, 그래서 방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기타 연주는 커녕 어떤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보다 리암의 사과를 듣고 난 후, 내 스스로 리암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인정하게 된 후 더 우울했다. 늘 형이었고 우위에 있던 사람인데. 네 동경을 받던 사람인데. 그때부터 눈 주위가 죽을 듯이 시리고 아팠다. 눈깔을 파내고 싶을 정도로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밤낮 안 가리고 소리를 지르며 온갖 가구를 다 때려 부수고 다녔다. 리암은 그런 날 안으며 애원했다. 피투성이 손을 잡고 한참 쓸어내렸다. 천천히 페로몬을 풀며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 자신 안에 가뒀다. 기분이 참 좆같았는데 그것과 달리 통증이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빳빳했던 몸이 한여름 고드름처럼 녹는다. 나는 그대로 리암 품에서 기절했다.
형 오메가 같다
일어나자마자 리암한테 들은 개소리 때문에 속이 안 좋다.
생긴 건 니가 더 오메가 같으니까 닥쳐
나 형 페로몬 하나도 안 불편해 형도 그렇지 알파끼리 그럴 수 있는 거야?
운명 아니고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제발 닥쳐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시체처럼 누워 리암과 대화하고 있으니 어쩐지 눈이 보이던 예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어 왜
나는 형이 금방 좋아질 줄 알았어
지랄... 나 손가락 까딱 못하는 거 안 보여?
형한테 좋은 냄새나 알파 냄새 아닌 거 같애
리암이 쇄골에 코 박고 연신 킁킁댔다. 길게 기른 머리 때문에 간지러워 반사적으로 웃어버렸다. 노엘이 소리 내서 웃자 리암은 잠시 멍하니 형의 초점 없는 눈을 응시하다 같이 웃었다. 손을 뻗어 형의 속눈썹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저도 눈을 감았다. 형이 보는 세상처럼 깜깜하다. 근데 하나도 안 무서워. 형도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도망갈 거지 니는 비겁하니까
어 그니까 말하지 마
이런 건 말하고 싶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되는 거야 노엘
사랑해 노엘
비겁한 건 내가 아니라 리암 너야. 두 눈 똑바로 뜨고 있었을 땐 몇 초 마주치지도 못하고 고개 돌렸으면서 장님 되니까 뻔뻔하게 구는 거 봐. 내가 모를 줄 알아? 노엘이 여전히 자신의 눈가에 있는 리암의 두터운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손등에 튀어나온 뼈를 만지기도 하고 손톱 아래를 간지럽히기도 했다. 괜찮은 관계인가? 정상적인 사랑인가?
그래도, 더 이상 아프지 않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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