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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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 20:02
크로커다일과 욘디 중에 상대적으로 도청이 취약한 쪽은 후자였다. 고잉 메리 호에서 우솝이 발명품을 시험하다 엿듣게 된 건 욘디의 목소리였다고 했다.
“그렇게 나미씨 일행이 온천섬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은 게 사보랑 에이스였대. 루피 일에 가장 빨리 움직일 사람들이니까.”
베포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순전히 힘으로 떨어트려놓은 두 사람이 진정된 다음이다. 의자를 끌어다 앉은 상디는 조로가 궁금했을 법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루피가 사법섬을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정체가 발각된 루피가 간신히 탈출해 숨은 곳은 출항 직전의 재래 화물선이었다. 이미 만실로 적재된 화물칸에는 정형화 전의 내식성 스테인레스 스틸과 고품질 강철 등이 커다란 나무 상자에 가득 차있었다. 이것들의 전면에는 목적지, 워터세븐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는데 중상을 입은 루피는 그중 하나를 열어 안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박스 안에서 다 죽어가던 루피를 발견한 건 워터세븐의 시장 겸 세계 최대 조선 회사인 갈레라 컴퍼니의 설립자인 아이스버그였다.
“아이스버그랑 동문인 프랑키라는 사람이 에이스한테 몰래 연락했었대. 아이스버그라는 사람, 연줄이 좋긴 한가 봐. 직함도 그렇고 바다열차를 발명한 조선공의 제자였으니까 뭐. 스승이랑 제자인 아이스버그, 프랑키 이 셋이 만들었다며? 바다열차 말이야.”
입이 심심했는지 담배를 꺼내물던 상디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바다열차 덕분에 운송이 편해진 건 사실이니까. 이스트블루의 낙후된 섬끝 마을에서 드레스로자까지 싱싱한 생귤을 받아볼 수 있는 것도 바다열차의 역할이 매우 컸다. 상디는 귤 얘기만 하면 활짝 미소짓던 나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는 곧 백곰에게 불도 안 붙인 담배를 빼앗기기에 이른다. 제 얼굴만 한 손이 그것을 뭉그러트리는 건 보면서 상디는 혀를 찰 뿐이었다. 베포가 다른 손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조로를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상디는 결국 인상을 쓴 채 말을 이었다.
“아이스버그가 연줄로 접한 정보는 마리조아에서 은밀히 해군 하나를 수색 중이라는 거였어. 일정 날짜를 전후로 출항한 배의 도착지를 헤집는다고 말이야. 해군 역시 마리조아에 적극 동조해서 수색은 빠르게 진행됐대. 찾는 해군은 왕녀 시해범인데 왕실의 명예가 실추될 걸 의식해 조용한 수색을 원한다는 얘기가 먹혀든 거라나. 아이스버그는 그 해군이 루피고 저희 섬에도 곧 수색대가 닥칠 거라는 걸 예상한 거지.”
하지만 루피는 그와 갈레라 컴퍼니를 구해준 은인이었다. 또한 아이스버그와 프랑키는 루피가 저항도 못하는 일반인을 헤칠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쿠아라구나가 밀려들던 그 밤에 상관도 없는 임무에 끼어들어 루치, 카쿠를 돕지는 않았을 테니까. 당시 그는 루치, 카쿠와 함께 아이스버그를 죽이고 갈레라 컴퍼니를 장악하려는 지하 조직을 상대하느라 찾고 있던 마물을 놓치고 말았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것이 아닌 의지를 갖고 얘기하던 마물을. 그럼에도 당신이 살아서 다행이라며 화통하게 웃던 밀짚모자를 아이스버그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에이스가 도착할 때까지 루피를 숨겨두려 했는데 발각된 거래. 갈레라 컴퍼니에 스팬담이 심어둔 사람이 있던 모양이야. 에이스가 섬에 도착한 건 루피가 붙잡힌 직후였고.”
“그사람들은 에이스 연락처를 어떻게 안 거래?”
“어떻게는 무슨. 그 형들이 루피 일에 얼마나 극성인지는 마리모 너도 잘 알 거 아냐. 이년, 아니 이제 햇수로는 삼년인가 전에 루피가 워터세븐에서 신세를 졌다더라.”
물론 루피는 지하 조직과 싸우다 얻은 상처로 갈레라 컴퍼니에서 보살핌을 받았지만 외부인인 상디가 아는 정보는 이정도였다. 에이스는 내부 사정을 다 알면서도 동생을 돌봐준 인사를 한다며 워터세븐을 찾았고. 윗선의 예쁨을 받느라 책상머리에 묶여 살다시피하던 사보에 비하면 에이스가 여러모로 움직이기 편한 건 사실이었다. 때문에 루피가 신세진 사람들을 찾아가 감사를 전하는 건 주로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조로도 상디의 말에 바로 수긍하는 추임새를 넣은 것 아닌가. 이후 신문기사를 보고 상황을 유추한 사보가 수배범 에이스 중령을 직접 잡아오겠다는 거짓말로 군을 이탈하고 두 사람이 이차 루피 탈환을 위한 계획에 돌입했을 때 나미 일행을 만난 거였다.
“그래서 루피는 무사한 거지?”
“하… 그게 무사한 건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뭐야, 무슨 일 있어? 혹시 위독한 거면 로우한테 부탁해보는 건 어때?”
“아서라. 퍽이나 치료해주겠다.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말 함부로하지 마라. 로우 걔가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 녀석인지도 모르면서.”
그순간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고막을 때리는 굉음에 로우가 인상을 쓸 때 조로가 말했다.
“베포 너 괜찮냐? 안 다쳤어?”
“미안, 형수. 발을 헛디뎌서… 죄송합니다. 금방 치울게.”
“내가 치울 테니까 넌 여기 앉아있어. 지금 그거 치우다 네가 다치겠다. 귀신 소리라도 들었어? 뭐 그렇게 놀란 얼굴이야.”
“어… 그게… 어어? 이럼 안 되는데…….”
“잔말말고 마리모 말대로 해. 너 얼굴이 파랗게 질렸어.”
차마 저희 대장이 착하고 순진하다는 말에 놀랐다고 할 수 없던 베포가 우물대는 사이 상디까지 거들고 나섰다. 베포가 대장바라기이기는 해도 그 성정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로우, 조로같이 제 식구들에나 무해한 곰돌이였지 괜히 2분대장 자리를 차지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깨진 도자기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니 긴 다리를 꼬아앉은 로우는 혀를 찼다. 좀전에는 귀를 붉히더니 이젠 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모양새가 신경질적이었다. 이때 흔들리는 우차 안, 맞은편에 앉아 지켜보던 베르고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이었다.
“너 이러는 거 크로커다일도 알고 있나?”
“알든 말든 관심없으니까 알아서 해.”
베르고의 말에 로우는 간단히 답할 뿐이었다. 귀 한쪽에 이어폰을 꽂은 채 집중하던, 오늘따라 유독 잘생긴 얼굴을 하고서. 음영진 눈그늘은 여전했지만 날렵한 턱선과 적절한 이목구비의 조화는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날카로운 눈꼬리와 한겨울 눈산처럼 시린 눈빛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축감을 느끼게 한다고 해도 도피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했다. 서늘한 눈매가 아니었으면 미모에 반해 덤벼드는 놈들이 한트럭이었을 거라나. 베르고는 로우에 관해 은근히 팔불출인 도피를 떠올리며 선글라스를 추켜올렸다. 현재 이들은 재건 중인 왕의 대지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마물떼 습격 사건의 조사차 나온 해군과도 조우할 예정이었다. 만 하루의 시간차를 두고 왕의 대지와 사법섬에 벌어진 마물떼 습격 사건은 신문에 대서특필돼 지금도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었다. 덕분에 세계정부 내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던 회의에서는 사법섬 일을 도피의 소행으로 추측하던 루치의 의견이 힘을 받지 못했다. 하필 세 명의 재판소장 중 도피측 사람이 마물에게 죽임당한 것도 루치에게는 걸림돌이었다. 그에 반해 마리조아측 재판소장은 멀쩡히 살아있는데다 늙은 왕이 이 둘을 보호하라며 보낸 사병도 문제였다. 시류와 반 오거는 선악을 떠나 실력만큼은 명성이 자자한 자들이었으니 자칫하면 마물이 습격할 걸 알고 이 둘을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 좋았다. 하필 늙은 왕은 신임 재판소장 임명식에 불참 통보를 하기도 했으니까. 실로 한동안 조용하던 마리조아와 드레스로자가 화두였던만큼 세계경제신문을 비롯한 황색언론에서는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기 바빴다. 그로인해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산되기도 했고 말이다. 로우는 현재 이런 일들을 전부 떠맡은 상태였다.
“왕의 대지에서 로우 넌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가 이뤄질 거다. 이후에는 회견이 있을 예정이고. 아직 많이 어수선하기는 해도 중앙궁 내 회견장은 사용 가능할만큼 정리됐으니 그곳에서 일정을 마무리한다.”
“쓸데없이 입 놀리는 녀석들은 없을테지?”
“그래. 입단속은 시켰으니까 그건 걱정할 거 없어.”
로우는 왕의 대지를 습격할 때 몇몇 마물이 오메가를 언급했던 걸 두고 묻는 거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전부 이 얘기를 들었으니까. 호위대 소속이 아무리 소수 정예라 하나 규모가 커지면서 최근 몇년간 들어온 정예대원 및 예비대는 가족으로 볼 수 없었다. 때문에 마물이 언급한 오메가의 정체가 새나갈까 로우는 입단속을 시켰다. 볼사리노 역시 전투 직후 마물이 말한 오메가를 언급했는데 이때 로우는 모르쇠로 잡아뗐다. 그러니 여기서 더 말이 번지지만 않으면 놈들이 찾는 오메가가 조로라는 건 묻힐 것이다. 로우는 이런 말들이 퍼져 행여 조로가 언론에 조롱이라도 당할까 걱정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오메가에게 유독 야박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은 여전했으니 제 오메가를 두고 도청도 서슴치 않는 행태는 베르고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오래전 베르고와 크로커다일은 몇번 술을 마시다 입을 맞추고 서로의 것을 빼준 게 다인 인연이었다. 물론 내심 호감도 있었지만 로우의 첫발정기 때 놈이 도피에게 끌려간 걸 알고는 바로 접은 마음이었다. 일찍이 도피를 봐온 베르고는 아무리 녀석이 로우의 향에 발정했기로서니 ‘가족’의 구성원은 절대 억지로 취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런데 사법섬을 다녀온 뒤 크로커다일이 부탁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왜 조로한테 성교육을 시키지 않는지 물어보라니 원…….’
자기가 로우에게 물어보려 하면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는 한량새끼가 방해된다며 짜증을 부린 크로커다일이다. 동시에 도피 성교육도 네가 해준 거 아니냐며, 그러니 당연히 로우도 네 소관이라는 양 탓을 하는 통에 베르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도 도피는 먼저 궁금한 걸 줄줄 물어대서 답해준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뻔뻔함 속에 초조함이 엿보였던지라 그는 크로커다일의 말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크로커다일은 진심으로 로우가 도피를 닮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연애 관련으로는 특히 더.
“로우 너 말이다.”
결국 고심하던 베르고가 입을 달싹일 때 로우는 검지를 치켜들었다. 한쪽으로 돌아간 동공이 이어폰 속 대화에 집중함을 뜻했다. 무슨 얘기를 듣는지 로우의 미간 주름이 한층 깊어질 때 우차의 잔잔한 진동이 멈췄다. 왕의 대지 앞에 당도했음을 느낀 로우가 대놓고 혀를 차며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홀로 사라져버리니 문을 열고 나타난 펭귄이 어리둥절해했다.
“어? 대장은요?”
“하… 먼저 올라갔다.”
“아아, 얼른 나오세요, 베르고씨. 우리 대장 늦는 거 싫어하잖아요.”
펭귄은 이런 일이 익숙한 양 태연한 반응이었다. 가뿐한 몸놀림으로 먼저 리프트 앞에 서는 녀석에 베르고만이 긴 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그에게는 로우가 도피보다 더한 금쪽이였다.
우차가 멈춘 건 상디에게서 다시 루피 이름이 거론될쯤이었다. 로우는 조사차 온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도청용 이어폰을 빼야 했다. 그는 호위대 중 베르고 다음 실력자인 베포를 곁에 뒀음에도 루피가 거론되니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감기가 나은 뒤의 조로는 방 안에서 근력운동을 시작한 참이다. 하루하루 조금씩 강도를 높이는 녀석은 제 심장이 얼마나 버텨줄는지를 가늠하는 듯했다. 오메가라는 특성상 주기를 따라 널뛰는 면역력을 생각하면 회복기로 일이년의 기간을 잡는 게 맞았지만 괴물같은 건강체인 조로는 이를 훨씬 앞당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우는 내심 조로의 회복기가 당겨지는 게 싫었다. 녀석이 조금만 더 지금처럼 약한 채로 있었으면 했다. 의사인 제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얌전히 저를 기다리는 지금처럼. 로우가 수족이나 다름없는 호위대를 줄줄이 붙여도 몸상태를 이유로 드니 조로는 수긍했다. 이는 참격 하나 제대로 날리지 못하는 처지를 제대로 파악했음이다. 조로는 쓸데없는 데 자존심 세우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파악에 빠른 타입으로 그에 따른 대처 또한 융통성이 있었다. 때문에 지금 조로는 뭐든 로우의 판단에 따라주는 편이었다. 로우는 순순한 녀석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고. 로우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임시 거처인 기와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시간은 벌써 달이 중천에 뜬 밤이었다. 일찍 오려고 했건만 취조도 회견도 시간이 지연되면서 일정이 주루룩 뒤로 밀린 탓이었다. 그로인해 로우는 현재 매우 심기 불편한 상태였다. 기세에 눌려 그 옆에 멀쩡히 있는 것 또한 베르고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조로의 성교육은 언제 시킬건지를 묻기 위해 고민 중이었다. 그때였다.
“거기 잘생긴 오빠. 시간 있어?”
“무슨ㅡ! 아니, 로우 여기에는 오해가……!”
뒤에서 들려온 중저음은 껄렁한 말투와 달리 고막에 착 감기는 음색이었다. 이 감미로운 음색의 주인은 도피였다. 야밤에 나타난 도피는 딱 붙는 드로즈 위로 걸친 핑크색 실크 가운이 전부였다. 그리고 조형수가 늘어선 정원 한가운데서 베르고는 저를 더러운 것 보듯 하는 로우의 눈초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펭귄이 말실수를 한 이래 베르고는 부하에게 오빠 소리를 종용하는 변태 상관으로 소문이 돌았다. 당시 문제의 원흉인 펭귄이 제대로 된 해명도 없이 그저 잘못했다며 머리를 숙인 탓이었다. 그로서도 베르고에게 오빠 소리 좀 해보라는 말은 할 수 없음에 선택한 차선책인 셈이다.
“왜 그래, 오빠. 나는 부하가 아니라 네 취향이 아닌가?”
“도피, 내가 펭귄 그놈이 미쳐서 헛소리한 거라고 설명했잖냐. 그만 놀려라.”
“정말 더러워 죽겠네. 너희 둘이 정분 나서 뒹굴든 말든 내 알 바 아닌데 일 가르치라고 맡긴 내 식구 핑계는 좀 빼지? 그리고 그딴 말 내 앞에서 하지 마. 고막 썩는 것 같으니까.”
“로우야, 부러우면 너한테도 해줄까? 오…….”
“섐블즈.”
로우는 베르고를 두고 퍼진 소문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질색팔색하며 사라지던 녀석의 자리에 남겨진 건 엄지손톱만 한 조약돌이었다. 로우가 자주 오가는 곳에는 편의에 따른 능력 사용을 위한 물건들이 있었다. 도피는 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귀여운 자식.”
잔잔한 웃음 뒤 나지막히 들려온 음성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상디가 돌아간 뒤였다. 조로는 펭귄을 통해 로우가 늦는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이윽고 해가 졌을 때 혼자였던 그를 찾아온 건 슈거였다. 물론 나귀를 대동하고서. 장난감 수레를 실내까지 타고 온 녀석에 헐레벌떡 뒤를 따른 건 인간형 몸에 코끼리 얼굴을 한 장난감이었다. 일미터 남짓한 녀석은 손걸레로 바퀴자국을 지우기 바빴다. 그 뒤에서 영감이 자국이 덜 지워진 곳이 있다며 호통치는 소리에 함께 안으로 들어오려던 코끼리는 쩔쩔매며 움직였다. 카펫이 깔리지 않은 자리에서 팔굽혀펴기 중이던 조로는 마침 등장한 녀석들에 눈을 반짝였다.
‘뭘 노려봐? 눈빛 되게 무섭네.’
팔굽혀펴기를 멈추지 않으며 이쪽을 보고 씩 웃는 조로에 슈거가 움찔했다.
“야, 정지. 뭐야, 염라. 할 말 있으면 해.”
“조로랜드…….”
“조용히 해!”
수레에서 내려온 슈거가 손수레 앞쪽에 자리한 워커 옆에 섰다. 그리고는 조로를 향해 울먹이는 녀석을 발로 툭 치며 복화술로 말했다. 이때쯤 조로는 팔굽혀펴기 횟수만 삼백이 넘어가고 있었다.
“문부터, 헉, 닫아.”
“무, 문은 왜?! 뭐하려고?”
때리려나? 당황한 슈거가 불쑥 떠오른 생각에 숨을 죽였다. 바닥에 바퀴자국이나 실컨 내주려고 들어왔던 게 후회되던 순간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와서 처음 본 날을 제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궁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살도 근육도 내려서 덩치가 한결 작아진 듯했지만 외형이 열살 남짓한 아이인 슈거의 눈에는 다 커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냥 튈까 생각도 했으나 야차같은 눈이 이쪽을 주시하는 것만으로 발이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일정하게 운동을 이어가던 조로는 삼백사십을 넘어섰다.
“영감님이, 보면, 잔소리한다고, 삼백사십오, 얼른.”
“내가 왜? 염라, 네가 닫…! 야! 왜 네가 닫아?!”
“조로랜드가 닫으랬뜹니다.”
“너 누구 편이야? 어?? 나귀 주제에 감히 내 말보다 염라 말을 들어?! 너 포도 주는 게 누구야?”
“슈거랜드입리다.”
“근데 왜 나 말고 염라 말 들어?!”
“…….”
“뭐해? 어서 열어!”
“네…….”
“됐으니까 둘 다 시간 괜찮으면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줘.”
슈거의 성화에 기가 죽었을 뿐 다시 문을 열려던 워커의 행위는 순순했다. 그때 몸을 일으킨 조로가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다가왔다. 흰 반팔티에 긴바지를 입은 조로의 몸이 땀에 푹 젖었다. 겨우 이 정도에 가슴이 뻐근하다는 게 몸 상태를 실감하게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조로의 얼굴에 난감함이 비쳤다. 지금 상태라면 누구를 지키긴커녕 제 몸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은 조로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리를 좁히던 조로의 시선에 겁을 집어먹었던 슈거는 잠시 뒤, 워커와 함께 너른 등 위에 앉아있었다. 두툼한 타올을 사이에 두고 말이다.
‘놀이기구 타는 것 같네.’
“사백이십오, 사백이십육…….”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정한 흔들림에 잠이 솔솔 오는 것만 같다. 손바닥만 한 녀석은 일찌감치 남의 등에 대자로 누워 자는 중이었다. 그런 녀석을 한심하게 보던 슈거도 어느새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덤덤한 목소리가 자장가 같다고 생각하던 아이도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도피를 피해 방에 도착한 로우는 묘한 얼굴이었다. 씻은 지 얼마 안 된 냄새를 풍기고 자는 건 제 오메가가 맞을진대 각기 자리를 차지한 두 녀석은 이해가 안 돼서다. 툭하면 들러붙는 소인족은 그렇다쳐도 왜 슈거까지 옆에서 자고 있는지 로우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두 녀석에게 팔을 내주고 잘만 자던 조로는 더더욱 그랬고. 로우는 조로가 늦은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저를 기다리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조로는 로우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머리만 닿으면 바로 잠들고는 했으니까. 오히려 자리를 가리고 잠을 설치는 쪽은 로우였다. 알파에 능력자라는 특성상 이삼일은 날을 새도 끄떡없다는 것까지 더해지니 이는 로우가 더욱 잠을 등한시하도록 만들기도 했고. 그랬던 이가 꼬박꼬박 눈을 붙이게 된 건 조로 덕분이었다. 자는 녀석과 있노라면 절로 눈이 감기고는 했으니까. 때문에 로우는 사실 오늘 하루정도 굳이 잠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집무실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해도 충분한 시간이지 않던가. 그럼에도 벌써 이십분째 침대 옆에서 장승처럼 서있는 건 그 또한 조로가 아쉬워서다. 소인족만 있었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치우고 들어앉았으련만 슈거가 합세하니 섣불리 손쓰기도 어려웠고. 역시 잠귀가 밝은 아이는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눈을 뜰 것이다. 로우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오늘은 포기해야 되나…….’
조로의 가슴을 침대 삼은 소인족만 치우고 집무실로 가려던 로우가 손을 펼쳤을 때다. 아래로 향한 손바닥에서 푸른빛 감도는 원형이 생성될 때 조로가 눈을 떴다. 느린 깜빡임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에는 졸음이 여전했다.
“조로야…….”
쉿. 조로가 입모양으로만 의사를 전달함에 로우도 조용해졌다. 곤히 잠든 두 녀석을 의식했음이다. 잠결에도 기척을 바로 눈치챈 조로였으나 로우인 걸 알아서 신경쓰지 않은 거였다. 한데 몇십분째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니 억지로라도 잠을 떨치고 눈을 뜬 거였다. 포기하던 순간에 조로와 눈이 마주친 로우는 머리 위로 귀가 쫑긋 선 듯한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조로는 그런 녀석이 귀여워서 짧게 웃었다. 루피가 그때그때 느낀 감정을 요란하게 표현한다면 로우는 자세히 관찰해야만 보인다는 걸 조로는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리고 가슴에 엎어져 잠든 워커를 한 손에 잡고 침대로 옮긴 조로가 팔베게를 하고 잠든 슈거의 머리를 슬며시 들어올려 빠져나왔다. 그런 뒤 침대를 빠져나온 조로가 제 앞에 설 때까지 로우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제 왔어?”
말 없이 빤히 보기만 하는 녀석에 조로가 먼저 입을 연 다음이었다. 아직 졸음이 실린 눈이 달빛에 의지해 시간을 확인할 때 허리를 감싼 팔이 있었다.
“섐블즈.”
감미로운 음성과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을 대신해 조약돌 두 개가 침대 위로 떨어졌다.
“잠…! 천천히, 읍!”
부지불식간에 이동한 곳은 방 중앙의 책상 위에 서류더미가 가득했다. 책이 빼곡한 책장 앞에는 가죽이 덧씌워진 카우치가 있었는데 로우는 입을 맞추면서 조로를 그곳으로 몰았다. 달려들듯 입술을 부비던 녀석에 뒷걸음질하던 이가 뭔가에 걸리듯 기우뚱할 때는 허리를 받친 팔이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턴을 하듯 부드럽게 몸을 돌린 로우에 자리가 뒤바뀌니 조로는 그와 마주보고 앉는 모양새가 됐다.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는 힘에 조로는 로우를 다리 사이에 두고 무릎을 꿇어앉은 상태였다. 뒤통수를 움켜쥔 손 때문에 입술 역시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고.
“……!”
입술을 헤집고 들어온 혀는 매우 뜨겁고 또 버거웠다. 조로는 녀석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알지 못했지만 맞춰주려 애썼다. 그럼에도 잡아먹을 듯 파고드는 녀석이 버거워서 자꾸 몸이 밀린다. 이에 애가 닳는지 몸을 옥죄는 손힘도 강해졌다. 로우는 거칠한 손이 어깨며 팔을 한참이나 달래듯 쓸어준 뒤에야 진정한 듯 입술을 뗐다. 두 사람은 뒤엉킨 타액에 흠뻑 젖은 입술이 발갛게 부어있었다. 홀린듯이 조로를 보던 로우가 손을 뻗어 입술을 닦아줬다. 부드럽지만 강인함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무슨 일 있었냐? 왜 갑자기 흥분하고 그래?”
“그냥. 조로 널 보니까…….”
로우는 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로 역시 얼버무리는 대답에 더 추궁하는 말은 없었다. 대신 얇은 잠옷바지 위로 불룩하게 솟은 존재감을 느꼈는지 몸을 움직거렸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맞춘듯 접붙은 위치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할래?”
시원하게 해버리는 게 낫지 이렇게 가만있는 게 더 어색했던 조로다. 그에 물어보지만 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조로를 물끄러미 보던 그는 이제야 알아차린 사실이 있었다.
“조로 너 내 잠옷 입었네?”
“아아, 애들 있는데 팬티만 입고 잘 수는 없잖아. 그래서 빌렸다. 허락 없이 입어서 미안.”
“아니, 잘했다 조로야.”
이번에는 부드럽게 뒤통수를 누르는 손에 다정한 입맞춤이 있었다. 짧게 부딪힌 뒤 떨어진 입술은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다. 생각해보면 조로는 잘 때 내의용 흰티와 드로즈만 입고 잤다. 잠옷이랄 게 없었으니 로우의 것을 빌렸음이다. 어쩐지 팔다리가 길더라니 그래서였구나 싶은 게 조로 얼굴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제 옷이라는 자각도 없었던 거다. 이제야 파악한 사실에 로우는 강한 만족감을 느꼈다. 조로는 남의 볼을 쓰다듬으며 올려다보는 두 눈이 이유 모를 광기로 가득찬 것에 깨름칙함을 느꼈고 말이다.
“내 옷이 다 네 옷인데 뭘. 아무거나 다 입어도 돼, 조로야.”
“근데 네 옷 크더라. 전에 입을 때는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냥 내 옷 입을 걸 그랬나 생각하며 조로가 말을 돌렸다. 본인 역시 왜 로우 옷을 입었나 의문이 들어서였다. 씻고 나온 뒤 욕실과 연결된 옷방으로 갔을 때 자연스레 로우의 옷이 눈에 들어왔었다. 원래 로우처럼 잠옷이니 평상복이니 구분하는 성격도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로우의 잠옷을 입은 거였다. 조로는 이제와 스스로도 이해 못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를 깨닫자 괜스레 얼굴이 홧홧해져서 로우의 주의를 다른 데 돌리려 했다. 그가 꺼낸 말은 알라바스타에서 플라밍고 호를 타고 드레스로자로 건너오던 작년 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 그땐 그랬지…….”
“로우 너 왜 갑자기 죽상이야.”
“네가 나랑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때는 지금처럼 근육이 빠지지도 않았으니까. 눈도 두 개였고… 역시 큰가슴근이 줄어서…….”
사보와 에이스 앞에서 기죽지 말라고 번듯한 옷을 입히려 했던 때를 떠올린 로우의 시선은 조로의 가슴에 못박인다. 타고난 신장차로 인해 로우의 옷을 입은 조로는 소맷단도 바짓단도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슴만은 팽팽해서 단추가 터지려 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소매 길이가 더해진 것도 사실이다. 등근육은 물론 삼두, 이두 역시 전만 못하니 녀석이 제게 온 고작 일년여 사이 얼마나 많은 일을 당했는지가 선명하다. 애써 생각지 않으려 한 일들이 스침에 로우의 낯빛이 금새 어두워졌다. 조로는 과중한 책임감에 짓눌려 사는 놈이 안쓰러워 머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힘없이 끌려온 얼굴이 가슴에 기대었다.
“야, 이까짓 가슴 금방 키울 수 있어. 그러니까 넌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라. 나보다 고작 오년 더 산 놈이 뭐 그리 죽상이야. 사내자식이 그렇게 매가리 없어도 돼?”
“아프지만 마라, 조로야. 난 네 지금 모습도 다 좋으니까.”
“그래 그래, 알았다. 네가 내 몸 좋아하는 거 나도 다 알지. 평생을 갈고닦은 몸인데 이런 몸이 어디 쉽냐?”
로우를 토닥이며 말하는 음성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오랜 수련의 성과를 로우가 알아봤다는 사실이 그를 무척 기쁘게 한 모양이다. 물론 조로의 몸이 매우 취향인 건 사실이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던 로우는 하고픈 말이 많았다. 그럼에도 목구멍에 차오른 얘기를 삼키는 건 조로에게 안긴 지금이 너무 좋아서였다.
“하… 그래, 조로야. 부탁인데 지금도 충분하니까 제발 무리만 하지 마라. 알았지? 일이년만 참으면 돼. 그 뒤에는 네 심장 내가 완벽히 고쳐줄 테니까.”
“그래, 알았어. 네 말대로 조심할 테니까 너야말로 걱정 좀 그만해.”
지금도 로우가 가만히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조로는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아픈 자신보다 녀석이 더 조바심내고 있다는 것 역시도. 그래서도 조로는 로우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시커먼 사내자식이 뭐 예쁘다고 제 식구로 받아 책임을 다하려는지 아등바등하는 놈이 안쓰러워서. 루피를 구하려 뛰쳐나간 일에 후회는 없지만 그로인해 망가진 몸에 제가 더 안절부절못하는 로우를 보자면 조로는 미안함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을 빌미로 저를 냉궁에 내친다 해도 조로는 원망하는 마음조차 일절 없었으련만. 그런데 도리어 금이야 옥이야 감싸고 도니 조로는 로우가 더 안쓰러워졌다. 하니 이런 몸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조로는 기꺼이 로우에게 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제 무엇이든 쓸쓸한 녀석에게 위로가 된다면.
한조각
“그렇게 나미씨 일행이 온천섬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은 게 사보랑 에이스였대. 루피 일에 가장 빨리 움직일 사람들이니까.”
베포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순전히 힘으로 떨어트려놓은 두 사람이 진정된 다음이다. 의자를 끌어다 앉은 상디는 조로가 궁금했을 법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루피가 사법섬을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정체가 발각된 루피가 간신히 탈출해 숨은 곳은 출항 직전의 재래 화물선이었다. 이미 만실로 적재된 화물칸에는 정형화 전의 내식성 스테인레스 스틸과 고품질 강철 등이 커다란 나무 상자에 가득 차있었다. 이것들의 전면에는 목적지, 워터세븐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는데 중상을 입은 루피는 그중 하나를 열어 안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박스 안에서 다 죽어가던 루피를 발견한 건 워터세븐의 시장 겸 세계 최대 조선 회사인 갈레라 컴퍼니의 설립자인 아이스버그였다.
“아이스버그랑 동문인 프랑키라는 사람이 에이스한테 몰래 연락했었대. 아이스버그라는 사람, 연줄이 좋긴 한가 봐. 직함도 그렇고 바다열차를 발명한 조선공의 제자였으니까 뭐. 스승이랑 제자인 아이스버그, 프랑키 이 셋이 만들었다며? 바다열차 말이야.”
입이 심심했는지 담배를 꺼내물던 상디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바다열차 덕분에 운송이 편해진 건 사실이니까. 이스트블루의 낙후된 섬끝 마을에서 드레스로자까지 싱싱한 생귤을 받아볼 수 있는 것도 바다열차의 역할이 매우 컸다. 상디는 귤 얘기만 하면 활짝 미소짓던 나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는 곧 백곰에게 불도 안 붙인 담배를 빼앗기기에 이른다. 제 얼굴만 한 손이 그것을 뭉그러트리는 건 보면서 상디는 혀를 찰 뿐이었다. 베포가 다른 손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조로를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상디는 결국 인상을 쓴 채 말을 이었다.
“아이스버그가 연줄로 접한 정보는 마리조아에서 은밀히 해군 하나를 수색 중이라는 거였어. 일정 날짜를 전후로 출항한 배의 도착지를 헤집는다고 말이야. 해군 역시 마리조아에 적극 동조해서 수색은 빠르게 진행됐대. 찾는 해군은 왕녀 시해범인데 왕실의 명예가 실추될 걸 의식해 조용한 수색을 원한다는 얘기가 먹혀든 거라나. 아이스버그는 그 해군이 루피고 저희 섬에도 곧 수색대가 닥칠 거라는 걸 예상한 거지.”
하지만 루피는 그와 갈레라 컴퍼니를 구해준 은인이었다. 또한 아이스버그와 프랑키는 루피가 저항도 못하는 일반인을 헤칠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쿠아라구나가 밀려들던 그 밤에 상관도 없는 임무에 끼어들어 루치, 카쿠를 돕지는 않았을 테니까. 당시 그는 루치, 카쿠와 함께 아이스버그를 죽이고 갈레라 컴퍼니를 장악하려는 지하 조직을 상대하느라 찾고 있던 마물을 놓치고 말았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것이 아닌 의지를 갖고 얘기하던 마물을. 그럼에도 당신이 살아서 다행이라며 화통하게 웃던 밀짚모자를 아이스버그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에이스가 도착할 때까지 루피를 숨겨두려 했는데 발각된 거래. 갈레라 컴퍼니에 스팬담이 심어둔 사람이 있던 모양이야. 에이스가 섬에 도착한 건 루피가 붙잡힌 직후였고.”
“그사람들은 에이스 연락처를 어떻게 안 거래?”
“어떻게는 무슨. 그 형들이 루피 일에 얼마나 극성인지는 마리모 너도 잘 알 거 아냐. 이년, 아니 이제 햇수로는 삼년인가 전에 루피가 워터세븐에서 신세를 졌다더라.”
물론 루피는 지하 조직과 싸우다 얻은 상처로 갈레라 컴퍼니에서 보살핌을 받았지만 외부인인 상디가 아는 정보는 이정도였다. 에이스는 내부 사정을 다 알면서도 동생을 돌봐준 인사를 한다며 워터세븐을 찾았고. 윗선의 예쁨을 받느라 책상머리에 묶여 살다시피하던 사보에 비하면 에이스가 여러모로 움직이기 편한 건 사실이었다. 때문에 루피가 신세진 사람들을 찾아가 감사를 전하는 건 주로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조로도 상디의 말에 바로 수긍하는 추임새를 넣은 것 아닌가. 이후 신문기사를 보고 상황을 유추한 사보가 수배범 에이스 중령을 직접 잡아오겠다는 거짓말로 군을 이탈하고 두 사람이 이차 루피 탈환을 위한 계획에 돌입했을 때 나미 일행을 만난 거였다.
“그래서 루피는 무사한 거지?”
“하… 그게 무사한 건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뭐야, 무슨 일 있어? 혹시 위독한 거면 로우한테 부탁해보는 건 어때?”
“아서라. 퍽이나 치료해주겠다.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말 함부로하지 마라. 로우 걔가 얼마나 착하고 순진한 녀석인지도 모르면서.”
그순간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고막을 때리는 굉음에 로우가 인상을 쓸 때 조로가 말했다.
“베포 너 괜찮냐? 안 다쳤어?”
“미안, 형수. 발을 헛디뎌서… 죄송합니다. 금방 치울게.”
“내가 치울 테니까 넌 여기 앉아있어. 지금 그거 치우다 네가 다치겠다. 귀신 소리라도 들었어? 뭐 그렇게 놀란 얼굴이야.”
“어… 그게… 어어? 이럼 안 되는데…….”
“잔말말고 마리모 말대로 해. 너 얼굴이 파랗게 질렸어.”
차마 저희 대장이 착하고 순진하다는 말에 놀랐다고 할 수 없던 베포가 우물대는 사이 상디까지 거들고 나섰다. 베포가 대장바라기이기는 해도 그 성정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로우, 조로같이 제 식구들에나 무해한 곰돌이였지 괜히 2분대장 자리를 차지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깨진 도자기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니 긴 다리를 꼬아앉은 로우는 혀를 찼다. 좀전에는 귀를 붉히더니 이젠 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모양새가 신경질적이었다. 이때 흔들리는 우차 안, 맞은편에 앉아 지켜보던 베르고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이었다.
“너 이러는 거 크로커다일도 알고 있나?”
“알든 말든 관심없으니까 알아서 해.”
베르고의 말에 로우는 간단히 답할 뿐이었다. 귀 한쪽에 이어폰을 꽂은 채 집중하던, 오늘따라 유독 잘생긴 얼굴을 하고서. 음영진 눈그늘은 여전했지만 날렵한 턱선과 적절한 이목구비의 조화는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날카로운 눈꼬리와 한겨울 눈산처럼 시린 눈빛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축감을 느끼게 한다고 해도 도피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했다. 서늘한 눈매가 아니었으면 미모에 반해 덤벼드는 놈들이 한트럭이었을 거라나. 베르고는 로우에 관해 은근히 팔불출인 도피를 떠올리며 선글라스를 추켜올렸다. 현재 이들은 재건 중인 왕의 대지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마물떼 습격 사건의 조사차 나온 해군과도 조우할 예정이었다. 만 하루의 시간차를 두고 왕의 대지와 사법섬에 벌어진 마물떼 습격 사건은 신문에 대서특필돼 지금도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었다. 덕분에 세계정부 내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던 회의에서는 사법섬 일을 도피의 소행으로 추측하던 루치의 의견이 힘을 받지 못했다. 하필 세 명의 재판소장 중 도피측 사람이 마물에게 죽임당한 것도 루치에게는 걸림돌이었다. 그에 반해 마리조아측 재판소장은 멀쩡히 살아있는데다 늙은 왕이 이 둘을 보호하라며 보낸 사병도 문제였다. 시류와 반 오거는 선악을 떠나 실력만큼은 명성이 자자한 자들이었으니 자칫하면 마물이 습격할 걸 알고 이 둘을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 좋았다. 하필 늙은 왕은 신임 재판소장 임명식에 불참 통보를 하기도 했으니까. 실로 한동안 조용하던 마리조아와 드레스로자가 화두였던만큼 세계경제신문을 비롯한 황색언론에서는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기 바빴다. 그로인해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산되기도 했고 말이다. 로우는 현재 이런 일들을 전부 떠맡은 상태였다.
“왕의 대지에서 로우 넌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가 이뤄질 거다. 이후에는 회견이 있을 예정이고. 아직 많이 어수선하기는 해도 중앙궁 내 회견장은 사용 가능할만큼 정리됐으니 그곳에서 일정을 마무리한다.”
“쓸데없이 입 놀리는 녀석들은 없을테지?”
“그래. 입단속은 시켰으니까 그건 걱정할 거 없어.”
로우는 왕의 대지를 습격할 때 몇몇 마물이 오메가를 언급했던 걸 두고 묻는 거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전부 이 얘기를 들었으니까. 호위대 소속이 아무리 소수 정예라 하나 규모가 커지면서 최근 몇년간 들어온 정예대원 및 예비대는 가족으로 볼 수 없었다. 때문에 마물이 언급한 오메가의 정체가 새나갈까 로우는 입단속을 시켰다. 볼사리노 역시 전투 직후 마물이 말한 오메가를 언급했는데 이때 로우는 모르쇠로 잡아뗐다. 그러니 여기서 더 말이 번지지만 않으면 놈들이 찾는 오메가가 조로라는 건 묻힐 것이다. 로우는 이런 말들이 퍼져 행여 조로가 언론에 조롱이라도 당할까 걱정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오메가에게 유독 야박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은 여전했으니 제 오메가를 두고 도청도 서슴치 않는 행태는 베르고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오래전 베르고와 크로커다일은 몇번 술을 마시다 입을 맞추고 서로의 것을 빼준 게 다인 인연이었다. 물론 내심 호감도 있었지만 로우의 첫발정기 때 놈이 도피에게 끌려간 걸 알고는 바로 접은 마음이었다. 일찍이 도피를 봐온 베르고는 아무리 녀석이 로우의 향에 발정했기로서니 ‘가족’의 구성원은 절대 억지로 취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런데 사법섬을 다녀온 뒤 크로커다일이 부탁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왜 조로한테 성교육을 시키지 않는지 물어보라니 원…….’
자기가 로우에게 물어보려 하면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는 한량새끼가 방해된다며 짜증을 부린 크로커다일이다. 동시에 도피 성교육도 네가 해준 거 아니냐며, 그러니 당연히 로우도 네 소관이라는 양 탓을 하는 통에 베르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도 도피는 먼저 궁금한 걸 줄줄 물어대서 답해준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뻔뻔함 속에 초조함이 엿보였던지라 그는 크로커다일의 말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크로커다일은 진심으로 로우가 도피를 닮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연애 관련으로는 특히 더.
“로우 너 말이다.”
결국 고심하던 베르고가 입을 달싹일 때 로우는 검지를 치켜들었다. 한쪽으로 돌아간 동공이 이어폰 속 대화에 집중함을 뜻했다. 무슨 얘기를 듣는지 로우의 미간 주름이 한층 깊어질 때 우차의 잔잔한 진동이 멈췄다. 왕의 대지 앞에 당도했음을 느낀 로우가 대놓고 혀를 차며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홀로 사라져버리니 문을 열고 나타난 펭귄이 어리둥절해했다.
“어? 대장은요?”
“하… 먼저 올라갔다.”
“아아, 얼른 나오세요, 베르고씨. 우리 대장 늦는 거 싫어하잖아요.”
펭귄은 이런 일이 익숙한 양 태연한 반응이었다. 가뿐한 몸놀림으로 먼저 리프트 앞에 서는 녀석에 베르고만이 긴 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그에게는 로우가 도피보다 더한 금쪽이였다.
우차가 멈춘 건 상디에게서 다시 루피 이름이 거론될쯤이었다. 로우는 조사차 온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도청용 이어폰을 빼야 했다. 그는 호위대 중 베르고 다음 실력자인 베포를 곁에 뒀음에도 루피가 거론되니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감기가 나은 뒤의 조로는 방 안에서 근력운동을 시작한 참이다. 하루하루 조금씩 강도를 높이는 녀석은 제 심장이 얼마나 버텨줄는지를 가늠하는 듯했다. 오메가라는 특성상 주기를 따라 널뛰는 면역력을 생각하면 회복기로 일이년의 기간을 잡는 게 맞았지만 괴물같은 건강체인 조로는 이를 훨씬 앞당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우는 내심 조로의 회복기가 당겨지는 게 싫었다. 녀석이 조금만 더 지금처럼 약한 채로 있었으면 했다. 의사인 제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얌전히 저를 기다리는 지금처럼. 로우가 수족이나 다름없는 호위대를 줄줄이 붙여도 몸상태를 이유로 드니 조로는 수긍했다. 이는 참격 하나 제대로 날리지 못하는 처지를 제대로 파악했음이다. 조로는 쓸데없는 데 자존심 세우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파악에 빠른 타입으로 그에 따른 대처 또한 융통성이 있었다. 때문에 지금 조로는 뭐든 로우의 판단에 따라주는 편이었다. 로우는 순순한 녀석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고. 로우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임시 거처인 기와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시간은 벌써 달이 중천에 뜬 밤이었다. 일찍 오려고 했건만 취조도 회견도 시간이 지연되면서 일정이 주루룩 뒤로 밀린 탓이었다. 그로인해 로우는 현재 매우 심기 불편한 상태였다. 기세에 눌려 그 옆에 멀쩡히 있는 것 또한 베르고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조로의 성교육은 언제 시킬건지를 묻기 위해 고민 중이었다. 그때였다.
“거기 잘생긴 오빠. 시간 있어?”
“무슨ㅡ! 아니, 로우 여기에는 오해가……!”
뒤에서 들려온 중저음은 껄렁한 말투와 달리 고막에 착 감기는 음색이었다. 이 감미로운 음색의 주인은 도피였다. 야밤에 나타난 도피는 딱 붙는 드로즈 위로 걸친 핑크색 실크 가운이 전부였다. 그리고 조형수가 늘어선 정원 한가운데서 베르고는 저를 더러운 것 보듯 하는 로우의 눈초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펭귄이 말실수를 한 이래 베르고는 부하에게 오빠 소리를 종용하는 변태 상관으로 소문이 돌았다. 당시 문제의 원흉인 펭귄이 제대로 된 해명도 없이 그저 잘못했다며 머리를 숙인 탓이었다. 그로서도 베르고에게 오빠 소리 좀 해보라는 말은 할 수 없음에 선택한 차선책인 셈이다.
“왜 그래, 오빠. 나는 부하가 아니라 네 취향이 아닌가?”
“도피, 내가 펭귄 그놈이 미쳐서 헛소리한 거라고 설명했잖냐. 그만 놀려라.”
“정말 더러워 죽겠네. 너희 둘이 정분 나서 뒹굴든 말든 내 알 바 아닌데 일 가르치라고 맡긴 내 식구 핑계는 좀 빼지? 그리고 그딴 말 내 앞에서 하지 마. 고막 썩는 것 같으니까.”
“로우야, 부러우면 너한테도 해줄까? 오…….”
“섐블즈.”
로우는 베르고를 두고 퍼진 소문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질색팔색하며 사라지던 녀석의 자리에 남겨진 건 엄지손톱만 한 조약돌이었다. 로우가 자주 오가는 곳에는 편의에 따른 능력 사용을 위한 물건들이 있었다. 도피는 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귀여운 자식.”
잔잔한 웃음 뒤 나지막히 들려온 음성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상디가 돌아간 뒤였다. 조로는 펭귄을 통해 로우가 늦는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이윽고 해가 졌을 때 혼자였던 그를 찾아온 건 슈거였다. 물론 나귀를 대동하고서. 장난감 수레를 실내까지 타고 온 녀석에 헐레벌떡 뒤를 따른 건 인간형 몸에 코끼리 얼굴을 한 장난감이었다. 일미터 남짓한 녀석은 손걸레로 바퀴자국을 지우기 바빴다. 그 뒤에서 영감이 자국이 덜 지워진 곳이 있다며 호통치는 소리에 함께 안으로 들어오려던 코끼리는 쩔쩔매며 움직였다. 카펫이 깔리지 않은 자리에서 팔굽혀펴기 중이던 조로는 마침 등장한 녀석들에 눈을 반짝였다.
‘뭘 노려봐? 눈빛 되게 무섭네.’
팔굽혀펴기를 멈추지 않으며 이쪽을 보고 씩 웃는 조로에 슈거가 움찔했다.
“야, 정지. 뭐야, 염라. 할 말 있으면 해.”
“조로랜드…….”
“조용히 해!”
수레에서 내려온 슈거가 손수레 앞쪽에 자리한 워커 옆에 섰다. 그리고는 조로를 향해 울먹이는 녀석을 발로 툭 치며 복화술로 말했다. 이때쯤 조로는 팔굽혀펴기 횟수만 삼백이 넘어가고 있었다.
“문부터, 헉, 닫아.”
“무, 문은 왜?! 뭐하려고?”
때리려나? 당황한 슈거가 불쑥 떠오른 생각에 숨을 죽였다. 바닥에 바퀴자국이나 실컨 내주려고 들어왔던 게 후회되던 순간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와서 처음 본 날을 제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궁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살도 근육도 내려서 덩치가 한결 작아진 듯했지만 외형이 열살 남짓한 아이인 슈거의 눈에는 다 커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냥 튈까 생각도 했으나 야차같은 눈이 이쪽을 주시하는 것만으로 발이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일정하게 운동을 이어가던 조로는 삼백사십을 넘어섰다.
“영감님이, 보면, 잔소리한다고, 삼백사십오, 얼른.”
“내가 왜? 염라, 네가 닫…! 야! 왜 네가 닫아?!”
“조로랜드가 닫으랬뜹니다.”
“너 누구 편이야? 어?? 나귀 주제에 감히 내 말보다 염라 말을 들어?! 너 포도 주는 게 누구야?”
“슈거랜드입리다.”
“근데 왜 나 말고 염라 말 들어?!”
“…….”
“뭐해? 어서 열어!”
“네…….”
“됐으니까 둘 다 시간 괜찮으면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줘.”
슈거의 성화에 기가 죽었을 뿐 다시 문을 열려던 워커의 행위는 순순했다. 그때 몸을 일으킨 조로가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다가왔다. 흰 반팔티에 긴바지를 입은 조로의 몸이 땀에 푹 젖었다. 겨우 이 정도에 가슴이 뻐근하다는 게 몸 상태를 실감하게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조로의 얼굴에 난감함이 비쳤다. 지금 상태라면 누구를 지키긴커녕 제 몸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은 조로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리를 좁히던 조로의 시선에 겁을 집어먹었던 슈거는 잠시 뒤, 워커와 함께 너른 등 위에 앉아있었다. 두툼한 타올을 사이에 두고 말이다.
‘놀이기구 타는 것 같네.’
“사백이십오, 사백이십육…….”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정한 흔들림에 잠이 솔솔 오는 것만 같다. 손바닥만 한 녀석은 일찌감치 남의 등에 대자로 누워 자는 중이었다. 그런 녀석을 한심하게 보던 슈거도 어느새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덤덤한 목소리가 자장가 같다고 생각하던 아이도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도피를 피해 방에 도착한 로우는 묘한 얼굴이었다. 씻은 지 얼마 안 된 냄새를 풍기고 자는 건 제 오메가가 맞을진대 각기 자리를 차지한 두 녀석은 이해가 안 돼서다. 툭하면 들러붙는 소인족은 그렇다쳐도 왜 슈거까지 옆에서 자고 있는지 로우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두 녀석에게 팔을 내주고 잘만 자던 조로는 더더욱 그랬고. 로우는 조로가 늦은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저를 기다리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조로는 로우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머리만 닿으면 바로 잠들고는 했으니까. 오히려 자리를 가리고 잠을 설치는 쪽은 로우였다. 알파에 능력자라는 특성상 이삼일은 날을 새도 끄떡없다는 것까지 더해지니 이는 로우가 더욱 잠을 등한시하도록 만들기도 했고. 그랬던 이가 꼬박꼬박 눈을 붙이게 된 건 조로 덕분이었다. 자는 녀석과 있노라면 절로 눈이 감기고는 했으니까. 때문에 로우는 사실 오늘 하루정도 굳이 잠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집무실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해도 충분한 시간이지 않던가. 그럼에도 벌써 이십분째 침대 옆에서 장승처럼 서있는 건 그 또한 조로가 아쉬워서다. 소인족만 있었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치우고 들어앉았으련만 슈거가 합세하니 섣불리 손쓰기도 어려웠고. 역시 잠귀가 밝은 아이는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눈을 뜰 것이다. 로우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오늘은 포기해야 되나…….’
조로의 가슴을 침대 삼은 소인족만 치우고 집무실로 가려던 로우가 손을 펼쳤을 때다. 아래로 향한 손바닥에서 푸른빛 감도는 원형이 생성될 때 조로가 눈을 떴다. 느린 깜빡임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에는 졸음이 여전했다.
“조로야…….”
쉿. 조로가 입모양으로만 의사를 전달함에 로우도 조용해졌다. 곤히 잠든 두 녀석을 의식했음이다. 잠결에도 기척을 바로 눈치챈 조로였으나 로우인 걸 알아서 신경쓰지 않은 거였다. 한데 몇십분째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니 억지로라도 잠을 떨치고 눈을 뜬 거였다. 포기하던 순간에 조로와 눈이 마주친 로우는 머리 위로 귀가 쫑긋 선 듯한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조로는 그런 녀석이 귀여워서 짧게 웃었다. 루피가 그때그때 느낀 감정을 요란하게 표현한다면 로우는 자세히 관찰해야만 보인다는 걸 조로는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리고 가슴에 엎어져 잠든 워커를 한 손에 잡고 침대로 옮긴 조로가 팔베게를 하고 잠든 슈거의 머리를 슬며시 들어올려 빠져나왔다. 그런 뒤 침대를 빠져나온 조로가 제 앞에 설 때까지 로우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제 왔어?”
말 없이 빤히 보기만 하는 녀석에 조로가 먼저 입을 연 다음이었다. 아직 졸음이 실린 눈이 달빛에 의지해 시간을 확인할 때 허리를 감싼 팔이 있었다.
“섐블즈.”
감미로운 음성과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을 대신해 조약돌 두 개가 침대 위로 떨어졌다.
“잠…! 천천히, 읍!”
부지불식간에 이동한 곳은 방 중앙의 책상 위에 서류더미가 가득했다. 책이 빼곡한 책장 앞에는 가죽이 덧씌워진 카우치가 있었는데 로우는 입을 맞추면서 조로를 그곳으로 몰았다. 달려들듯 입술을 부비던 녀석에 뒷걸음질하던 이가 뭔가에 걸리듯 기우뚱할 때는 허리를 받친 팔이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턴을 하듯 부드럽게 몸을 돌린 로우에 자리가 뒤바뀌니 조로는 그와 마주보고 앉는 모양새가 됐다.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는 힘에 조로는 로우를 다리 사이에 두고 무릎을 꿇어앉은 상태였다. 뒤통수를 움켜쥔 손 때문에 입술 역시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고.
“……!”
입술을 헤집고 들어온 혀는 매우 뜨겁고 또 버거웠다. 조로는 녀석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알지 못했지만 맞춰주려 애썼다. 그럼에도 잡아먹을 듯 파고드는 녀석이 버거워서 자꾸 몸이 밀린다. 이에 애가 닳는지 몸을 옥죄는 손힘도 강해졌다. 로우는 거칠한 손이 어깨며 팔을 한참이나 달래듯 쓸어준 뒤에야 진정한 듯 입술을 뗐다. 두 사람은 뒤엉킨 타액에 흠뻑 젖은 입술이 발갛게 부어있었다. 홀린듯이 조로를 보던 로우가 손을 뻗어 입술을 닦아줬다. 부드럽지만 강인함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무슨 일 있었냐? 왜 갑자기 흥분하고 그래?”
“그냥. 조로 널 보니까…….”
로우는 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로 역시 얼버무리는 대답에 더 추궁하는 말은 없었다. 대신 얇은 잠옷바지 위로 불룩하게 솟은 존재감을 느꼈는지 몸을 움직거렸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맞춘듯 접붙은 위치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할래?”
시원하게 해버리는 게 낫지 이렇게 가만있는 게 더 어색했던 조로다. 그에 물어보지만 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조로를 물끄러미 보던 그는 이제야 알아차린 사실이 있었다.
“조로 너 내 잠옷 입었네?”
“아아, 애들 있는데 팬티만 입고 잘 수는 없잖아. 그래서 빌렸다. 허락 없이 입어서 미안.”
“아니, 잘했다 조로야.”
이번에는 부드럽게 뒤통수를 누르는 손에 다정한 입맞춤이 있었다. 짧게 부딪힌 뒤 떨어진 입술은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다. 생각해보면 조로는 잘 때 내의용 흰티와 드로즈만 입고 잤다. 잠옷이랄 게 없었으니 로우의 것을 빌렸음이다. 어쩐지 팔다리가 길더라니 그래서였구나 싶은 게 조로 얼굴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제 옷이라는 자각도 없었던 거다. 이제야 파악한 사실에 로우는 강한 만족감을 느꼈다. 조로는 남의 볼을 쓰다듬으며 올려다보는 두 눈이 이유 모를 광기로 가득찬 것에 깨름칙함을 느꼈고 말이다.
“내 옷이 다 네 옷인데 뭘. 아무거나 다 입어도 돼, 조로야.”
“근데 네 옷 크더라. 전에 입을 때는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냥 내 옷 입을 걸 그랬나 생각하며 조로가 말을 돌렸다. 본인 역시 왜 로우 옷을 입었나 의문이 들어서였다. 씻고 나온 뒤 욕실과 연결된 옷방으로 갔을 때 자연스레 로우의 옷이 눈에 들어왔었다. 원래 로우처럼 잠옷이니 평상복이니 구분하는 성격도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로우의 잠옷을 입은 거였다. 조로는 이제와 스스로도 이해 못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를 깨닫자 괜스레 얼굴이 홧홧해져서 로우의 주의를 다른 데 돌리려 했다. 그가 꺼낸 말은 알라바스타에서 플라밍고 호를 타고 드레스로자로 건너오던 작년 봄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 그땐 그랬지…….”
“로우 너 왜 갑자기 죽상이야.”
“네가 나랑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때는 지금처럼 근육이 빠지지도 않았으니까. 눈도 두 개였고… 역시 큰가슴근이 줄어서…….”
사보와 에이스 앞에서 기죽지 말라고 번듯한 옷을 입히려 했던 때를 떠올린 로우의 시선은 조로의 가슴에 못박인다. 타고난 신장차로 인해 로우의 옷을 입은 조로는 소맷단도 바짓단도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슴만은 팽팽해서 단추가 터지려 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소매 길이가 더해진 것도 사실이다. 등근육은 물론 삼두, 이두 역시 전만 못하니 녀석이 제게 온 고작 일년여 사이 얼마나 많은 일을 당했는지가 선명하다. 애써 생각지 않으려 한 일들이 스침에 로우의 낯빛이 금새 어두워졌다. 조로는 과중한 책임감에 짓눌려 사는 놈이 안쓰러워 머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힘없이 끌려온 얼굴이 가슴에 기대었다.
“야, 이까짓 가슴 금방 키울 수 있어. 그러니까 넌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라. 나보다 고작 오년 더 산 놈이 뭐 그리 죽상이야. 사내자식이 그렇게 매가리 없어도 돼?”
“아프지만 마라, 조로야. 난 네 지금 모습도 다 좋으니까.”
“그래 그래, 알았다. 네가 내 몸 좋아하는 거 나도 다 알지. 평생을 갈고닦은 몸인데 이런 몸이 어디 쉽냐?”
로우를 토닥이며 말하는 음성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오랜 수련의 성과를 로우가 알아봤다는 사실이 그를 무척 기쁘게 한 모양이다. 물론 조로의 몸이 매우 취향인 건 사실이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던 로우는 하고픈 말이 많았다. 그럼에도 목구멍에 차오른 얘기를 삼키는 건 조로에게 안긴 지금이 너무 좋아서였다.
“하… 그래, 조로야. 부탁인데 지금도 충분하니까 제발 무리만 하지 마라. 알았지? 일이년만 참으면 돼. 그 뒤에는 네 심장 내가 완벽히 고쳐줄 테니까.”
“그래, 알았어. 네 말대로 조심할 테니까 너야말로 걱정 좀 그만해.”
지금도 로우가 가만히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조로는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아픈 자신보다 녀석이 더 조바심내고 있다는 것 역시도. 그래서도 조로는 로우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시커먼 사내자식이 뭐 예쁘다고 제 식구로 받아 책임을 다하려는지 아등바등하는 놈이 안쓰러워서. 루피를 구하려 뛰쳐나간 일에 후회는 없지만 그로인해 망가진 몸에 제가 더 안절부절못하는 로우를 보자면 조로는 미안함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을 빌미로 저를 냉궁에 내친다 해도 조로는 원망하는 마음조차 일절 없었으련만. 그런데 도리어 금이야 옥이야 감싸고 도니 조로는 로우가 더 안쓰러워졌다. 하니 이런 몸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조로는 기꺼이 로우에게 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제 무엇이든 쓸쓸한 녀석에게 위로가 된다면.
한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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