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트오버 vs 자운이 '잘 발달된 수도권' vs '낙후된 지방/할렘가'라던가, 단순히 같은 나라 안에서의 계급 갈등이라면서 식민주의랑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

본국 vs 식민지로 보는 감상이 정확한게 맞음 ㅇㅇ

우리가 펄럭인으로서 일제시대를 겹쳐봐서 그런거다?
아니, 절대로 그런 단순한 차원이 아님.

아케인 작가들부터가 세부적인 배경 설정과 원문 대사에서 사용한 단어 선택으로 필트오버가 자운을 식민지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임.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씀.



일단 아케인의 설정은 인게임과 조금 다름.

아케인에서 필트오버는 대륙 마법사들이 대량학살을 일으킨 사건 이후 전란을 피해서 온 개척자들이 모여 건설되었고, 시즌1 4화에 나오는 '진보의 날' 축제가 필트오버 건국 200주년 기념일임. 여기서부터 인게임과 설정이 다른데 이 정보는 전부 시즌1에서 하이머딩거와 제이스의 대사로 직접 말한 정보임. 즉, 필트오버는 이 지역 토착주민이 아니라 외부인들이 이주해서 건국한 도시국가란 말임.

반면에 자운은? 인게임과 다르게 시즌1에서는 이름도 없이 필트오버의 지하도시, 아랫동네로 불림. 그리고 '자운'은 인게임에 없었던 아케인의 오리지널 캐릭터인 실코가 독립국가를 구상하면서 지은 걸로 나오는데, 여기서 정확히 원어 명칭을 쓰면 "Nation of Zaun"임. 그런데 저 원어 명칭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음.

일단 첫번째, '자운'이라는 이름은 실코가 옛지명을 따서 지었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임. 라이엇의 설정에 따르면 지하도시가 자리한 지역이 과거부터 토착적으로 불려온 이름은 "오쉬라 바'자운(Oshra va'zaun)"이었음.

그리고 두번째는 앞에 붙은 Nation인데, 이 단어는 현실 정치학적인 용어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라는 걸 의미함.

그러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지하도시 사람들이 개척자들인 필트오버인과는 다른 민족공동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임. 그래서 작중에 실코와 세비카가 아직 세워진 나라도 없는데 괜히 지하도시 사람들을 '자운인'으로 부른게 아니었던 거고, 그걸 들은 사람들도 그게뭔데씹덕아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거임.

그리고 저 단어가 굳이 언급된다는 건, 필트오버 vs 지하도시가 단순하게 같은 나라 안의 자본가 vs 노동자나, 수도권 vs 비수도권의 갈등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이라는 것을 외치고 있는거임. 물론 이렇게 탈식민주의가 제국주의에 맞서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계급적 투쟁의 성격도 포함됨. 그렇기 때문에 작중에 독립 운동과 혁명 얘기가 같이 나오는 것임.

간단히 말하면 실코는 사회주의 계열이 아니라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캐릭터고, 이해하기 쉽게 펄럭 역사로 치환하자면 Kim9랑 사상 계열이 같다고 보면 됨.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얘가 말하는 대사들은 거의 대부분 프란츠 파농을 대놓고 캐릭터 모티프로 했구나를 알 수 있을 정도인데 이건 뒤에서 쓸게.)


암튼 그런데 여기서 더 흥미로운 건 지하도시를 통치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나라'라고 강조하는 필트오버에서도, 정작 자기들끼리의 대화에서는 지하도시 사람들을 같은 나라 국민으로 치지 않는 다수의 발언을 한다는 사실임.

대표적으로 시즌1에서 멜과 제이스는 분쟁이 일어났을 때 자신들이 지켜야 할 "우리의 시민들(our people, 정확히는 '국민'으로 번역하는게 맞음)"을 필트오버인으로 한정하는 대사를 말함. 또 시즌2에서 의원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사를 보면 필트오버 집행자들이 지하도시를 '침략(invade)'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볼 수 있음.

생각해봐, 너네 같은 나라 안에서 아무리 심각한 분쟁이 생겨도 어떤 지방 도시를 침략하자고 표현함? '진압'이면 몰라도 '침략'이란 단어는 이럴때 안 씀. 왜? 침략이라는 단어는 정치외교적으로 남의 나라 영토에 쓰는 용어이기 때문임. 그리고 필트오버 의회는 필트오버와 지하도시 양쪽을 다스리면서, 분쟁이 생기니까 '필트오버인'은 우리가 지켜야할 국민에 속하고 '자운인'은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전제해놓고 대화를 나눈다고? 저건 정말 전형적으로 식민지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임.


물론 이런데도 자운과 필트오버가 같은 운명 공동체라고 우기는 입장에서는 두 도시가 같은 땅을 나눠쓰기 때문에 두 국가로 나눠질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함. 근데 실상은? 역시나 전혀 그렇지 않음. 왜냐

인게임과 다르게 아케인에서는 자운의 위치가 필트오버의 바로 밑 지하에 있지 않기 때문임. 빌딩이나 아파트의 윗층-아랫층처럼 같은 지면을 쓰면서 상하로 포개져서 사는 구조가 아니라는 거임.

물론 자운이 지하에 있기는 해. 하지만 그 지하는 필트오버와 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는 별도의 지역임. 이렇게.
IMG_6981.jpeg
이건 애니 작중에서 나온 지도고
IMG_6934.jpeg
아래는 제작진이 더 보기 쉽게 만든 지도인데, 저 진분홍 표시는 내가 강을 따라서 표시해놓은 거임.

이 지도에서는 강을 기준으로 왼쪽이 자운이고 오른쪽이 필트오버임. 가운데 동그라미가 두 도시를 이어주는 다리고. 즉 강을 경계로 완전히 양분되어 있는 국토를 볼 수 있음.


근데 이게 아니어도 위치 묘사는 애니 작중에 이미 여러번 묘사됨.

가령 바이가 시즌1 5화에서 파쿠르를 하는 장면에서도 필트오버에서 지하도시로 갈 때 화면의 왼쪽에서부터 강을 건너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지하로 가는 이동경로를 보여줬고, 시즌2 3화에서 집행자들이 가스 작전을 할 때도 화면의 왼쪽에 위치한 필트오버에서 배기관을 오른쪽으로 타고 내려가면서 지하로 향하는 이동경로가 나옴. (왼쪽/오른쪽이 저 지도와 정반대인건 카메라 방향 때문에 그럼.)

또 밴더와 실코의 과거에도 지하도시 사람들이 필트오버에 항의하기 위해 '강을 건넜다'가 학살당해서 실패로 끝났고, 시즌1에서 지하도시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도 집행자들이 다리 위에 팬스를 침. 이 모든게 다 지리적으로 '필트강'이 두 도시를 완전히 분리하는 경계가 되기 때문임.

덧붙여 시즌2에서도 징크스와 세비카가 필트오버에 가스를 다시 돌려줬을 때 두 도시가 강을 경계로 지상에서 완전히 다른 위치인 묘사가 나오고, 자운이 잘 살게 된 평행세계에서도 사람들이 지상에서 햇빛을 받으며 상업이 번창한 거리 모습이 나오는 것도 이것 때문임.

다시 말해서 필트오버와 자운은 엄연히 영토가 분리되어 있음.

물론 같은 강물을 쓰고 공기는 바람에 흐르고 지하에도 통로가 연결되어 있지. 하지만 이건 현실에서도 인접국들은 다 나눠쓰는 자원들이고 인프라를 연결해서 쓰기도 함. 산, 강을 경계로 각자 다 다른 나라인데 국도랑 송유관 연결해서 사는 유럽처럼 겁나 가까이 살아도 독립국으로 살아가는게 가능한 지리라는 거임. 그렇기 때문에 자운은 필트오버와 반드시 같은 국가 공동체로 묶여야 할 이유가 없음.



그리고 실제로 아케인을 제작한 프랑스는 필트오버와 자운의 관계와 매우매우매우 소름끼치게 유사한 식민지배 역사의 전적이 있음.

바로 알제리임.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프랑스는 알제리를 다스리면서 얘네를 '본토'로 취급함. 뭔말이냐. 좆본이 펄럭을 다스린 것처럼 총독부가 따로 다스린게 아니라 프랑스 의회가 알제리를 직접 통치하면서 하나의 나라로 취급했다는 거임.

하지만 실상은? 알제리 사람들에게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았고 프랑스 사람들과 달리 교육 기회에서도 배제당함. 그러면서 자원은 착취해 프랑스의 발전에 필요한 것만 쏙쏙 가져가고 환경오염은 모르쇠함. 당시 절대다수의 알제리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 살았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얘네가 열등해서 그렇다고 여김.

한마디로 프랑스 의회가 여기도 똑같은 본토라고 다스리면서 "우리는 하나의 나라"라는 허울만 있었지, 여느 식민지와 상황이 똑같았던 거임. 여기까지 읽으면 아케인에서 필트오버가 지하도시를 착취해온 역사와 그러면서 의회에서 하는 말이랑 거진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임.

이렇게 프랑스의 지배를 100년 넘게 받던 알제리는 참다참다가 1954년 '붉은 제성인의 날'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주장한 민족해방전선이 혁명을 일으킴.

IMG_6495.jpeg
시즌1 결말이 이렇게 연출된게 과연 정말 우연일까 싶어지지만 아무튼 다시 현실 역사 비교로 돌아가서

아까 실코는 독립된 자운을 "Nation of Zaun"이라고 명명했잖음? 알제리에서 실제로 독립전쟁을 일으킨 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의 Nationale가 저 Nation임. 그리고 이 조직은 아케인으로 치환하면 정확히 실코와 (시즌2 3막 내용을 제외한) 세비카, 징크스와 행적이 비슷함.

지금이야 우리가 '알제리'라고 국가 이름을 부르지만, 저 당시에 알제리 사람들은 애초에 '우리가 하나의 국가 공동체'라는 개념이 없었음. (과거에 왕조가 있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였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권을 가진 하나의 민족 또는 독립적인 국가야! 하는 정체성이 없었음.) 근데 이 민족주의 개념을 도입해서 "프랑스의 착취를 벗어나려면 우리도 국가로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게 민족해방전선이었음. 그리고 처음에 이 해방전선은 독립을 이루는 방법으로 외교를 중시함. 근데 그게 안되니까 무력투쟁을 선택해서 알제리 전쟁을 시작함.

여기까지만 봐도 시즌1에서 실코의 주장과 같다는게 느껴질 거임.

근데 이것보다 더 결정적인 부분이, 아케인 작가들이 노골적으로 실코의 모티프를 실존인물한테서 따왔구나 할만큼 캐릭터의 주장이 실제 알제리 독립운동가의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임.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양웹에서도 말이 나온 적 있음. 봐봐
"식민지에서 억압적 지배를 공식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경찰과 군인이다. (...) 그들은 억압을 덜어주지도 않고 지배를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질서를 유지한다는 '양심'에 따라 처신하지만, 실은 바로 그들이 폭력을 우리의 가정과 마음 속에까지 가져온다. 결국 착취당하는 이들이 직접 역사를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금지된 구역으로 밀고들어갈 때는 바로 그 폭력을 내세우고 구사할 수밖에 없다."

"본국인은 식민지인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즉 군대와 경찰력으로 제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마치 식민지 착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우리를 악의 본질로 생각한다. 가치관이 부재한 사회가 아니라 윤리 의식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해방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폭력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민족해방전선은 식민주의의 손아귀는 칼을 목에 들이대야만 느슨해진다고 말한 바 있는데, 알제리인은 그것이 폭력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파농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인용한 거임. 파농은 프랑스에서 유학한 엘리트 지식인이었는데,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해방전선에서 활동하면서 알제리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됨. 윗글처럼 무력투쟁의 중요성을 설파하긴 했지만 해방전선 내부에서는 정치와 외교 협상을 담당했음. 그리고 알제리가 독립하기 전에 죽었음.

실코의 필트오버스러운 유창한 언어나 고상한 에티튜드, 시즌1 내내 무력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치외교적 방법론을 중시한 점, 자운이 독립하기 전에 죽은 것, 무엇보다 필트오버의 억압 체제에서 벗어나려면 지하도시가 자운이라는 국가로 독립해야 하고 이걸 위해서는 폭력적인 수단도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상이 전부 어디서 모티프를 따왔는지 짐작할 수 있음. 그냥 마구 추측하는게 아니고 이건 파농이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워낙 탈식민주의 사상가로 유명하기 때문임.


게다가 펄럭인인 우리가 보기에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알제리 독립전쟁의 초반에 민족해방전선은 대중한테 인기가 없었음ㅎ 이것도 아케인의 전개랑 비슷함. 왜냐면 일반적인 알제리 사람들은 프랑스의 평화적인 해결책을 원했고 독립? 그거 왜 해야 하는데? 그리고 니들이 뭔데 우릴 대표해?? 이랬거든.

게다가 알제리 내부적으로도 파벌 통합이 안됐음. 독립 투쟁을 한 해방전선이랑 사이가 나빴던 파벌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알제리민족운동(MNA)은 아케인으로 치환하면 벤더나 에코, 점화단이랑 유사함. 왜냐면 해방전선이 프랑스랑 공존을 추구하는 온건파가 독립을 방해한다고 생각해서 얘네를 제거하는 활동을 했거든. 시즌1에서 실코가 밴더 제거하고 점화단도 없애려 한 거랑 유사한거임.

그런데 알제리 혁명이 터지니까 프랑스군이 해방전선을 전부 족치겠다고 밀고 들어옴. 실제로 '치안 유지'를 위한 '평화 작전'이라고 국제사회에 선전함. 하지만 아니었던게 이후에 다 드러남ㅋㅋㅋㅋ 당시 프랑스 정보장교가 쓴 유명한 문장이 있음. "그곳에서 고문은 일반적이고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질서 유지와 방어를 위한 군사적 정당행위였다." 또 프랑스 경찰이 통행금지에 항의하는 알제리 사람들 이백명을 죽인 학살 사건도 벌어짐.

이쯤되니까 알제리에서는 원래 해방전선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독립을 원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반대파벌도 생각을 바꿔서 얘네랑 손잡음. 아케인 시즌2에서 자운인들이 점점 징크스쪽으로 뭉치고 원래 실코 일당을 극혐했던 에코 부하가 나중에 세비카랑 같이 활동하는 것처럼 ㅇㅇ




암튼 이밖에도 소름끼치는거 많은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간단히 정리하면

1. 필트오버는 원주민이 아니라 개척자가 세운 200년밖에 안된 국가임
2. 반면 '자운(Nation of Zaun)'이라는 국호는 원주민들의 역사를 반영한 옛지명 + 필트오버와 다른 민족 정체성을 암시함
3. 실코와 세비카가 쓰는 용어들은 대놓고 민족주의 독립운동 계열임을 보여줌.
4. 의원들이 쓰는 용어들은 필트오버가 지하도시를 식민지로 여겨야 쓸 수 있는 단어들임.
5. 자운은 필트오버와 강을 맞댄 인접국으로서 독립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이 충분함.
6. 프랑스가 실제로 식민지배를 한 역사에서 모티프를 따왔나 싶을만큼 비슷한 부분이 매우매우 많음.


이 정도면 필트오버 vs 자운이 왜 단순하게 번창한 수도권 vs 낙후된 비수도권 같은 지역 다툼이거나, 원래부터 한 나라 안에서 귀족,부르주아 vs 천민,노동자 같은 계급 갈등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확실히 아닌지, 왜 본국 vs 식민지로 보는 감상이 훨씬 정확한지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함.
Notice WebP 확장자 업로드 기능 지원 안내 [63] ㅇㅇ 11-20 198581
글쓰기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