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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5 17:17
때로 애정이 넘쳐서 탈이 나기도 한다. 과거의 펭귄, 샤치, 베포가 그랬다. 이 셋은 로우가 처음 거둔 아이들로 각자의 상처가 있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에 동질감을 느낀 로우는 궁에 데려와 먹고 잘 곳을 내줌은 물론 필히 배우도록 했다. 부모가 의사인 집에서 태어나 배움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던 로우였으니까. 펭귄, 샤치, 베포 역시 나름 그가 정해준 혹독한 일정을 잘 따라줬는데 몸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 일이 빈번했다. 처음 데려왔을 때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병약한 몸에 자주 아프기도 했고 말이다. 이에 로우는 셋을 아낀 나머지 매번 제 능력으로 치료해줬는데 이년여쯤에 문제가 터진 거였다. 남들보다 더 자주 질병에 취약해지고 작은 상처도 자연치유가 유독 더뎠으니 말이다. 눈에 띌만큼 증상이 심각해지기 전에도 세 명의 몸은 서서히 문제점을 드러냈던 게 사실이다. 다만 전혀 생각지 못한 일에 의심을 않았을 뿐. 더욱이 이때의 문제는 로우가 아닌 치료받는 쪽이었다.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단순명료한 사실을 간과했으니 말이다. 문제가 터진 이년여쯤에는 신체 건장하고 십대밖에 안 된 베포에게서 악성으로 의심되는 종양이 발견됐으니, 이를 이상히 여긴 궁정의장이 NK세포 검사를 제안한 것도 당연했다. NK세포는 바이러스 및 암세포에 대응하는 백혈구로 T세포와도 역할이 유사했다. 쉽게 말해 선천 면역을 담당하는 중요 세포인 셈이다. 그런데 검사 결과 자잘한 상처도 수시로 로우에게 치료받았던 세 명의 NK세포 활성도가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한정된 기한에 얼마나 자주 로우의 치료 능력에 노출됐느냐가 제일 큰 원인이었는데 생각도 못한 부작용을 찾은 셈이다. 당시 암세포가 빨리 발견된 것도 로우가 잦은 배앓이를 하던 베포의 몸을 스캔한 덕분이었다. 때문에 종양은 로우가 제거했지만 이후 궁정의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는 한동안 세 명에게서 손을 뗐다. 셋 모두 아직 어린 십대였고 요리장인 제프를 비롯해 영감과 궁정의장이 살뜰히 보살핀 덕분인지 이들의 면역력이 정상 수치로 돌아온 건 일년만이었다. 그제야 로우도 비로소 마음을 놓게 됐으며 동시에 궁정의장과 함께 이 전례 없던 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계기도 됐다. 덕분에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은 면역력과 호르몬의 상관관계였으니 로우의 치료 능력에 제일 취약한 존재는 비능력자인 오메가였다. 발정기마다 호르몬에 의해 면역력이 떨어지며 큰 편차를 보인다는 게 유추된 원인이었다.

“나 태어나서 감기 처음 걸려봐.”

최근 로우는 종종 ‘오’라거나 ‘빠’와 비슷한 웅얼거림을 들었다. 불필요한 관심은 주지 않던 이는 사실 다른 분대원들의 웅얼거림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펭귄이나 샤치, 베포였기에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 돌렸을까. 이마저도 목소리가 다 기어들어갔으니 무슨 말했냐 되물으면 이들은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조로가 감기에 걸린 건 이런 요상한 날이 지속되던 일월의 마지막주였다. 때는 봄꽃이 피는 걸 시샘한다는 꽃샘추위의 계절이었다.

“…….”

로우는 궁을 재건하는 것부터 도피가 사법섬을 개판으로 휘저은 것까지 신경쓸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최근 남자가 조로를 보는 건 가족 식사가 있는 점심 때라거나 잠잘 때뿐이었다. 조로가 감기로 앓아누운 일이틀은 가족 식사도 건너 뛰어서 로우는 오늘 다저녁에야 그를 본 거였고 말이다. 와서는 바로 조로의 상태부터 확인했는데 그러던 중 들린 음성에 로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웃자고 한 소리에 침울해진 녀석을 보면서는 조로도 뻘쭘해졌고. 그래서 더 부러 말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열 때문에 붉어진 볼을 쓰다듬는 손의 애틋함이 겸연쩍어서.

“근데 나 이제 다 낫지 않았나? 그렇게 바로 얼굴 찌푸리지는 말고. 로우 너 요즘 맨날 인상 쓰고 다닌다면서?”
“그 말은 누구한테 들었는데? 분대원인가?”
“뭐, 그렇지. 다들 널 걱정하니까.”
“쓸데없는 소리에 일일이 신경쓰지 마라, 조로야. 그래서 너한테 일러바친 놈은 누구지?”
“알아서 뭐하게? 혼이라도 내려고?”

조로는 중간중간 잔기침을 하면서도 끝까지 로우의 말을 농으로 들었다. 덕분에 내내 웃음기 섞인 얼굴을 보면서 범인을 색출해 주둥이 나불댈 시간도 없게 일을 더해주려던 로우의 생각도 꺾여버린다. 조로가 웃었으니 됐다 싶어진 거다. 대신 바쁜 로우를 대신해 형수의 말벗이 돼준다며 조를 짜 들락거리는 2, 3, 4분대를 대표해 분대장들에게 자중하라는 당부는 해야 겠다 마음먹는다. 조로를 돌보라 붙여둔 영감도 왕세자비뿐인 침실에 분대원들이 들락대는 것을 두고 툴툴댔으니까. 궁이란 원래 잘해도 뜬소문이 도는 곳이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로우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느니,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느니 등의 저를 두고 하는 입방정은 관심조차 없으면서도 조로의 평판에는 섬세했다. 조로의 경우 뒤에서 수근대거나 주어가 빠진 돌려말하기 식은 절대 알아먹지 못하는 쪽이었고. 때문에 시종들 사이 ‘색광’이란 단어가 불쑥 튀어나와도 조로는 슈거가 한 말이라며 킬킬댈 정도였다. 지난날 오해한 슈거가 로우를 죽인다고 날뛰었던 일을 떠올리며 웃는 거였다. 당시 조로는 의식을 잃고 또 한고비를 넘겼건만 슈거한테 쩔쩔매던 로우 모습이 가장 큰 재미로 남은 모양이다. 펭귄, 샤치, 베포는 이런 조로를 볼 때면 우리 대장이 너무 어린 상대를 좋아하는 것 같아 괜히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세명은 명실공히 대장바라기였으나 언젠가 궁정의장이 얘기한 대로 운이 좋았다면 평범하게 살았을 거라던 걸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로가 계속 로우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지만 말이다.

“그래도 열은 내려서 다행이다, 조로야.”
“거봐. 내가 몸 하나는 튼튼하댔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재킷을 벗는 로우에게 조로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얼굴이 붉어진다 싶던 이는 반나절만에 고열과 격한 기침을 동반해서 독감을 의심케도 했다. 결과는 단순 감기였을지나 꽃샘추위의 높은 기온차가 원인이었다. 사법섬에서의 일로 피치 못하게 로우의 치료를 받은 이래 면역력이 바닥을 친 조로는 환절기의 기온차도 이기지 못하는 상태였다. 타고난 건강체라는 말처럼 상태가 호전되는 속도도 빨랐으나 로우는 속없이 웃는 놈을 보자니 착잡하기만 했다. 현재 상태를 알아듣게 설명해주려니 행여 조로가 저를 원망하진 않을까 싶어서였다.

“조로야, 이제부터 네 몸 상태에 대해 할 얘기가 있으니 잘 들어라.”

하지만 더는 무턱대고 조로를 가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특하게도 지금껏 얌전히 말을 따라준 건 고마웠지만 녀석도 답답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로우는 제게 쏟아질 원망의 말도 감수하고자 마음먹고 무겁게 입을 열였다. 여전히 별생각 없어봬는 조로를 앞에 두고서.




“정말 안 되는 거야?”
“일이년뿐이다, 조로야. 그 뒤에는 내가 다시 널 고쳐줄 수 있어. 그때까지만 참자.”
“야! 그런 게 어딨냐?! 내가 뭐 때문에 여태 네 말에 고분고분 따랐는데ㅡ!!”

내내 로우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던 조로가 다시 기침을 시작했다. 심장부근을 움켜쥐며 몸을 숙이는 녀석에 로우가 부축하듯 손을 뻗는다. 큰 손으로 등을 쓸어주고 차분한 음성으로 진정하라 다독이니 마디가 거친 손이 드레스 셔츠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올려다보는데 그 얼굴에 자리한 결손이 왜 이리 애틋한지 모를 일이었다. 새로 맞춘 의안이 있는 왼쪽 눈꺼풀을 손끝으로 덧그리면서 로우는 절로 목울대를 울렸다. 나머지 눈도 없다면 녀석은 온전히 제게 의지하게 될까. 로우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제 손을 벗어날 수 있을 사랑스런 녀석의 사지를 잘라내고픈 욕망에 시달렸다. 이렇듯 드물게 조로가 매달릴 때면 요동치던 환희가 이성을 마비시켰다.

“하…… 조로야.”

그러나 탄식같은 숨소리에 로우는 비틀린 욕망을 꾸역꾸역 삼켰다. 조로 역시 본능적으로 꺼림칙함을 감지했는지 셔츠를 움켜쥔 손이 슬쩍 물러나려 했다. 로우는 자연스레 그 손을 감싸듯 움켜쥐었다. 잠시 진정된 기침이 다시 나옴에 조로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는 했는데 너 내 얘기 다 이해한 건 맞지?”
“물론이지! 내가 넣은 약물 때문에 간이 상했고 네가 다시 손보기 전까지 술을 못 마신다는 거 아냐!”
“네가 원하는 것만 골라 들었지만 그래도 잘했다, 조로야. 네 간을 삼분의 이나 절제했어. 통상적으로 간은 한달 안에 적정 크기로 재생되지만 넌 남겨둔 부분도 겨우 제 기능을 하는 수준이다.”
“너니까 나 살렸다는 얘기도 들었어! 너 아니었으면 난 그때 죽었을 거라는 것도 말이야! 그래, 그건 정말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내가 너한테 피해를 줬다는 것도 알아! 알지만ㅡ!”

또다시 격한 기침을 하는 녀석에 로우는 멈췄던 손을 움직여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등에서 어깨로 손을 움직여 자연스레 제쪽으로 기대게 만들었다. 순순히 딸려오는 육신이 이토록 기꺼울 수 있을까.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는 로우의 눈빛이 심연처럼 짙게 물들었다. 로우는 알고 있다. 눈앞의 녀석이 제 도움따위 필요없을만큼 몸도 마음도 굳건하다는걸. 때문에 지금의 나약함이 좋았다. 안전한 이곳에서 온종일 저를 기다리기만 하는 조로가. 그는 기침을 쏟아내고 소강상태에 접어든 녀석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가는 걸 조절하며 정수리에 입술을 꾹 눌렀다. 조로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싶다. 녀석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입에 넣고 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콤한 살갗을 있는 힘껏 깨물어 배어나오는 피를 핥을 수만 있다면. 지금 상태로는 반항해도 저를 이길 수 없을 텐데. 약해진 조로를 두고 심연 속에 감춰둔 가학심이 자꾸 고개를 드는 것에 로우는 그저 품안의 상대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턱관절이 불거지도록 잇새를 물고 참을 인을 새기던 로우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아로새겨졌다. 비록 산 채로 잡아먹히기 직전의 당사자는 다시 로우의 치료를 받을 때까지 금주라는 말만 머리 속에 가득했대도 말이다.




일년, 아니 어쩌면 이년. 이는 조로의 면역력이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이었다. 그동안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훈련도 전처럼 해서는 안 되고 로우가 재차 손보기 전까지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다만 로우는 저강도의 꾸준한 운동은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이때만 해도 조로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오히려 말을 전하는 쪽에서 한번에 치료해주지 못한 것과, 저로 인해 조로의 면역계에 이상이 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기색이었고. 하지만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조로가 걱정한 건 로우였다.

‘너야말로 괜찮아? 네가 널 치료해도 문제 생기는 거 아냐?’
‘그건 괜찮아. 조로야. 자가치료에 이상반응을 보일 수는 없지.’

악마의 열매를 먹고 발현된 능력은 그 즉시 몸과 동화된다. 때문에 로우가 펼치는 치유 능력은 본인에게 있어 자연치유나 같았으니 부작용이 있을 리 없다. 단지 수술수술 열매의 가장 큰 단점일 체력소모만 일어날 뿐이다. 이에 조로는 대놓고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여태 들은 얘기에도 문제는 그것뿐이었다는 양. 여기서 제일 큰고비를 넘겼다 싶었던 로우는 설마하니 금주령에 조로가 떼를 쓸 줄 몰랐음이다. 어떻게든 억지를 쓰면 술을 마셔도 된다는 의사선생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물론 로우도 허락은 받고 술을 마시려 한 조로의 노력은 가상했다. 심장이 더 큰일인데 그걸 차치하고 술타령이라는 것이 속터지게 만들어 문제였지. 이런 속내도 모르고 밤새 잔기침을 일삼으며 제가 앞으로 잘할테니 술을 먹게 해달라던 조로는 유독 철이 없어 보였다. 스물둘이 된 지 고작 두달여가 지났을 뿐이니 어린 건 사실이라지만 의젓한 모습을 많이 봐와선지 로우는 이때만큼 상대의 나이를 실감한 적도 없었다.

“야, 마리모. 너는 내가 진짜……!”
“진짜 뭐, 인마.”
“인마? 뭐 낀 놈이 성낸다더니 와…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그럼 하지 마, 뱅글 눈썹 자식아.”
“너야말로 뭔데 입이 댓발 나와서 심통이냐? 어이, 왕자. 쟤 왜저래? 평소랑 다른데?”

침대 옆에 멀찍이 선 상디가 지긋한 시선을 주자 로우는 긴 숨을 내쉬었다.
상디는 조로를 사법섬 이후로 거진 두달만에 보는 거였다. 그사이 조로는 호되게 앓은 첫감기를 떨쳐냈다. 지난날 고잉 메리 호를 타고 사법섬을 탈출한 상디는 레이주의 배를 타고 드레스로자 본섬 동쪽 바다에 위치한 발라티에로 도착한 뒤 지속적으로 조로와의 면담을 요청했었다. 이를 계속 반려한 건 로우였는데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싶더니 성질이 완전히 뒤틀린 녀석이 있었다. 눈치 빠른 상디는 로우 왕자가 저를 화받이로 쓰려 함을 짐작했다.

“조로야는 한동안 술을 못 먹게 됐다.”
“……뭐어?!”

짧은 침묵 뒤 고함이 더더욱 로우를 죄인으로 몰았다. 고작 술이 뭐라고,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이참에 완전히 끊어보는 건 어떻겠느냐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가 조로의 화를 키운 장본인이었으니까. 이후로는 말도 안 하려는 조로에 궁여지책으로 내동 무시로 일관했던 상디를 부르게 된 거였다. 루피가 무사히 탈출했다는 로우의 말을 믿고 그이상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내심은 궁금할 게 많을 속을 알기에. 사실은 일이 이지경만 되지 않았다면 절대 상디를 부를 일은 없었다. 소리내 말한 건 아니지만 루피에 관해 조로를 봐주는 것도 사법섬까지라고 선을 그었으니까. 조로도 이 암묵적인 선은 느꼈으리라.

“마리모, 너 혹시… 죽는 거냐?”
“한동안이다, 한동안! 일이년만 기다리면 그깟 발암물질 덩어리 다시 지겹도록 먹을 수 있어!”
“네 그런점이 문제라는 거야! 술을 모욕하지 마!”
“그래!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발효음료를 모욕하지 마라!”

죽음을 언급하는 상디에 발작한 건 로우였다. 조로의 죽음이라니. 등줄기를 타고오르는 소름이 끔찍하다. 그에 화를 내보지만 돌연 편을 먹고 달려두는 두 사람이 더했다. 결국 기세에 밀린 로우가 주춤할 때 그가 한 말 덕에 한시름 놓은 상디가 먼저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는 루피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술귀신 마리모에 대해 익히 들어왔었다. 때문에 놈이 술을 못 먹게 됐다는 말에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킨 그는 이제 꼴 좋다는 얼굴로 정장 재킷 안쪽에 손을 넣었다. 전보벌레를 꺼내든 상디가 로우에게 눈을 돌렸다.

“안 바쁘냐?”

말과 함께 고갯짓한 쪽에는 장지문 앞으로 펭귄, 베포가 서있었다. 이중 베르고가 보낸 펭귄은 연신 손목시계를 보며 조급한 티를 냈다. 정장에 코트까지 빼입은 로우의 일정이 얼마나 빡빡한지야 드레스로자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감시로 백곰 하나 붙였으면 됐지 뭘 왕자까지 지키고 섰어. 누가 쟤 들고 튀기라도 한대?”
“그런 전적은 이미 있지 않나? 검은다리야. 너야말로 내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있는 건가?”
“그럴리가 있겠냐! 같이 듣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시든가!”

과거 전적을 들먹이는 로우에 상디가 혀를 차며 전보벌레를 던졌다. 로우가 가뿐히 받아드는 걸 본 조로는 그것이 사법섬에서 발신기와 함께 받은 전보벌레임을 알아봤다. 조로는 저것을 마지막으로 기절한 루피의 옷 속에 숨겨뒀었다. 녹음 전용 전보벌레는 상디가 여벌로 준비한 것이었다. 루피의 탈출이 최우선인만큼 그를 통해 직접 해명을 듣지 못할 때를 대비한.

“내가 저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상디는 로우가 전보벌레 몸체에 붙은 재생 버튼을 누를 때 이를 갈며 말했다. 이는 그가 연거푸 조로의 면회 요청을 한 이유 중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이어 잠자고 있던 전보벌레가 눈을 뜨니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피, 너 마리조아 궁에서 샤를리아 왕녀를 본 적 있어?’
‘사라다? 난 고기가 좋은데.’
‘…뭘 그렇게 빤히 봐?’
‘역시 예쁘다, 조로.’

녹음된 대화는 이게 끝이었다. 다시 잠들듯 눈을 감는 전보벌레에 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점을 찍는다. 상디를 비롯해 펭귄, 베포가 저희 대장 눈치를 볼 때도 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내리고 앉은 조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 손에 턱을 받치고 있었다. 사법의 탑 의무실에서 녹음한 대화는 상디의 요구를 충족시켰잖은가. 적어도 조로는 그리 생각했다. 대놓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로우를 의식하지 않는 것 또한 그 하나뿐이었고. 하니 여기서 가장 속이 터지는 건 상디였다. 드디어 조로를 만나러온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에 없이 삼엄하게 세워둔 호위대를 보지 않았나. 상디가 본 로우는 사법섬 일 전후로 사뭇 달랐으니 그는 이제 마리모가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외부 일정 때문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끔하게 차려입은 로우가 검은색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나는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본다.”
“어, 그래.”

조로는 긴 다리가 성큼성큼 방을 가로지르는 모양새를 따라 시선을 주며 답했다. 비죽 올라간 입꼬리하며 해가 중천인데도 도포 한장 걸친 마리모는 천하태평이 따로없었다. 정작 앞을 지나치며 전보벌레를 던져주던 왕자와 눈이 마주친 상디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데. 그는 마리모를 이대로 둬도 정말 괜찮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때 상디를 지나친 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포, 넌 검은다리가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하면 사정 봐주지 말고 밟아버려라.”
“아이 아이!”

답지 않게도 말이 과격했지만 베포나 펭귄은 납득한 모양이었다. 역시 전보벌레에 녹음된 대화를 듣고 화가 난 게 분명하다. 상디가 골치 아프다는 양 한손으로 머리를 마구 흐트릴 때였다.

“진짜 잘생기긴 했네.”

로우가 문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잘빠진 뒤태를 향해 흘러나온 음성은 조로의 것이다. 키도 크고 비율이 좋아서인지 로우는 수트나 긴 코트를 걸칠 때 특히 태가 났다. 거적때기를 걸쳐도 예쁠 몸이었다, 로우는. 조로는 절대 외모를 두고 품평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취향은 가지고 있었다. 로우가 딱 들어맞는다는 건 그도 안 지 몇달 안 된 사실이다. 이나마도 대개는 속으로 생각하고 마는 정도였으니 들리게 말한 건 이번이 두번째였다. 그래서일까, 문지방에 걸친 구둣발이 멈춘 로우의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장 누구 하나 죽인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순식간에 순풍에 돛단듯 훈훈하다. 덩달아 볼이 발그레해진 펭귄, 베포가 각자 손을 올려 입을 가릴 때도 조로는 한손에 턱을 괸 채 비죽 웃을 뿐이었다.

“…오늘 일찍 올 테니까 먼저 잠들지 말고 기다려줘, 조로야.”
“그래. 오빠도 무리하지 말고.”
“……!”

로우 주변 공기가 눈에 띄게 화사해졌다. 그는 이제 목덜미까지 빨개진 채 고개만 작게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상디가 여기 있기 정말 싫다는 생각을 할 때 펭귄이 조로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더니 급히 로우의 뒤를 쫓는다. 베포 역시 존경의 눈초리를 할 때 조로는 손을 까딱여 녀석을 불렀다. 우물쭈물하던 백곰은 어느새 조로의 발치에 앉아 쓰다듬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쯤에 상디는 마리모를 향한 걱정을 완전히 접었다. 저놈은 바다 한가운데 던져도 거뜬히 살 놈이구나 싶어서. 그러다 문득 손에 쥔 전보벌레를 발견한 그는 다시 인상을 쓰며 본론에 들어갔다.

“마리모 넌 하라는 건 않고 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거나 녹음한 거냐?”
“바로 끈다고 했는데 좀 늦었나봐. 그리고 답은 충분했지 않냐? 네가 쪽팔릴 게 뭐 있다고? 샤를리아 왕녀가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 어떻게 범인일 수 있냐?”
“멍청한 마리모는 루피가 원래 사람 이름 잘 못 외우는 것도 모르시나봐?”
“저기….”
“누가 모른대? 네놈이야말로 에로 요리사 이름 떼야 되는 거 아니냐? 너 샤를리아 왕녀의 얼굴도 몰라?”
“모를리가 있냐! 나는 한번 스치기만 해도 레이디의 얼굴은 기억할 수 있어! 그게 숙녀분을 향한 내 예의다! 너야말로 그렇게 말하는 의도가 뭐냐, 썩을 마리모! 황천에 한쪽발 담가보니 그렇게 좋든? 내가 아예 두발 다 담그게 해줘?”
“저….”
“할 수 있으면 어디 해보시던가, 에로 요리사. 그전에 네가 먼저 황천구경할 테니 나는 언제든 환영이다.”
“뭐, 이자식아? 네가 환자라고 해서 내가 봐줄 거란 생각은 버리지 그래? 내게 손댈 수 있는 건 오직 레이디뿐이니까 말이야!”
“손 말고 검으로 팰 건데?”
“오냐, 그럼 나는 발로만 패주마!”

정신이 들고 로우에게 돌려받은 검은 항시 조로 곁에 있었다. 병치례 중에도 검 돌보기를 게을리 않은 그가 화도일문자를 집어들며 일어서니 상디도 코앞까지 다가왔다. 언제든 사달이 날 듯한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달싹였던 베포는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 백곰을 코앞에 두고 기세등등한 두 사람이었다.




고잉 메리 호에서 전보벌레를 재생한 뒤 당황한 상디의 편을 들어준 건 나미 일행이었다. 의식이 없는 루피를 대신해 비책을 선보인 상디는 대놓고 쌍둥이 삼형제의 비웃음을 샀다. 그리고 레이주는 샤를리아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것에 루피를 때려서라도 깨우려 했다.
해왕류도 맨손으로 때려잡는 레이주였다. 정말 열받았을 때의 누나는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잘 알던 쌍둥이들이 침묵할 때 그 앞을 막듯이 나선 건 방금까지 비웃음당하던 상디였다. 그에게 루피는 친구였다. 모진 고문에 상처투성이었던 녀석은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온몸의 수분이 빨려 미라처럼 변해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녀석을 욕조에 두고 담가놓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레이주는 다른 사람들이 루피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욕실로 처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아끼는 동생이라도 이번엔 봐줄 생각 없던 레이주의 앞을 막아선 건 나미였다.

‘루피는 샤를리아 왕녀를 만난 적도 없어요, 레이주님!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레이주는 당장이라도 상디를 한대 치고 지나갈 기세였으나 그 사이로 파고든 나미에는 그녀도 바로 손을 내리고 물러섰다. 그녀에게 레이디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다. 위협조차 해서는 안 된다. 설령 다른 이를 향한 폭력일지라도 숙녀분들과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행해져야 함이었다. 때문에 레이주는 충분히 나미를 피해 상디를 공격할 수 있었음에도 물러나기를 택한 거였다. 저 가녀린 아가씨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안타깝지 않은가. 그에 레이주는 야차같던 얼굴을 지우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를 이해해줘, 나미. 샤를리아 왕녀가 위험에 빠진 건 나 때문일 테니까. 난 분명히 나서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 했지만 내 말을 들을 상대였어야지.’

지난날 샤를리아를 마리조아에 데려다주고 그곳에 잠시 머물 때 레이주는 전과 다른 냉대를 받았다. 늙은 왕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수족 일부가 묘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들은 마치 제르마가 빼돌린 마물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으며 레이주를 감시하기도 했다. 대놓고 레이주를 못마땅해하던 늙은 왕에는 샤를이 다 무안해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늙은 왕은 왕녀 역시 거스를 수 없었음이니 괜한 불란을 피하고자 했던 레이주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기로 했을 때 샤를은 미안해 죽으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레이주를 붙잡고 제가 마물에 대해 알아보겠노라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물론 레이주는 가만있으라고 했으나 샤를이 말을 들을 왕녀였던가. 제가 의심가는 점들을 파헤쳐 아비의 누명도 풀어줄 것이라 당차게 말하던 이에 결국 레이주는 왕녀의 측근 하나를 꼬드기기 이른다. 네 웃전에게 일이 생기거든 귀띔해달라고. 감언이설과 미인계에 넘어간 측근은 일찍이 궁에 들어와 샤를을 보살핀 열살 연상의 여성이었다. 그런 이에게서 들은 정보이니 레이주도 의심키 어려운 거였다.

‘레이주님 마음 다 이해해요! 하지만 루피는 거짓말 안 해요! 아니, 못해요! 그러니 루피는 샤를리아 왕녀를 만난 적도 없는 게 분명해요!’
‘…밀짚모자는 사람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던데?’
‘그것도 맞지만 샤를리아 왕녀는 예외라고요! 그 사람은 샹크스란 사람을 닮았잖아요? 오래전 최후의 전투 때 검은수염과 동귀어진했다는 붉은머리 해군이요! 루피가 해군이 돼서 온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건 다 그사람을 찾기 위해서라고요! 그런 루피니까 샤를리아 왕녀만큼은 절대 잊어버릴 리 없어요! 녀석이라면 조로가 물었을 때 먼저 신나서 떠들었을 거예요! 제 말을 못 믿겠다면 차라리 제가 인질이 될게요! 그러니 제발 루피를 내버려두세요! 부탁드려요! 그애는 이미 충분히 위험하다고요!’

필사적인 숙녀의 모습이란 조금의 거짓도 찾을 수 없음이었다. 이렇듯 레이주는 나미를 믿었다. 때문에 루피를 순순히 놔줬지만 이로써 오히려 더 오리무중인 샤를이 걱정됨은 당연했다. 그 철딱서니 없는 왕녀가 나대다 늙은 왕의 역린을 건드린 건 아닐까 하는. 이 일에 자신의 책임도 있음을 느낀 레이주는 때문에 샤를의 상태를 알고 나아가 안전을 확보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연락을 한 거였다.

“훗훗훗. 제르마의 왕세녀께서 내게 볼일이 있으시다니?”
“빠른 시일 안에 비밀회담을 가졌으면 합니다, 돈키호테 국왕. 우리나 당신이나 상대해야 되는 적은 같으니까요. 단, 로우 왕자는 이 회담을 모른다면 좋겠군요.”
“내가 그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을텐데.”
“내가 차를로스 왕자를 당신 앞에 대령해드린다면요?”

그순간 당장이라도 연결을 끊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레이주 역시 이를 알았음이라. 젊은 왕이 차를로스 왕자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으니. 그는 또한 마리조아 궁 안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한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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