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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20:58
전편- https://hygall.com/611435007  (그녀가 그를 사랑할 이유는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외벽이 모두 낡고 부식되어 허물어져 가는 빈 건물. 슬럼가의 사람들도 피해갈 것 같은 그 건물 안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들리고 있었다.




- 제발 한번만 살려주십쇼! 제가 아이작님께 그동안 얼마나 충성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랬었지. 최근 한달은 빼고. 

- 그들이 협박해서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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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또 그들이 협박하면 그때도 어쩔수없이 배신할건가?

- 네,네? 아뇨? 그럴리가...



오스카는 의자에 묶여있던 남자에게 그대로 몸을 돌려 출입구로 향했고, 오스카가 남자에게서 멀어지자 빈 건물에는 총성이 울렸다.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밖에 대기한 차에 올라탄 오스카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조금 초조해졌다.



- 집으로. 

- 네. 알겠습니다.



시간에 맞추려면 빠듯했지만 낡은 건물의 곰팡이 냄새와 매캐한 화약냄새, 비릿한 피냄새가 스며든 옷을 입고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오늘 하루종일 오스카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상대조직에 정보를 팔아넘긴 쥐새끼가 걸렸고 그를 해결하느라 허니와의 약속시간에 늦을 지도 몰랐다. 날카로워진 신경에 창문 밖을 보자 그를 바라보던 투명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미워하던 상대의 눈물을 무심코 닦아 주려던 그 작고 하얀 손이.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오스카는 어떤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지 고민했다.

















불청객이 허니의 아파트를 방문했던 날, 허니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허니는 수많은 금융기관으로부터 그녀의 채무가 모두 변제되었다는 문자를 받았고, 같은 날 오후에는 집주인으로부터 자신이 너무 했던 것 같다며 특별히 월세 없이 아파트에 계속 지낼 수 있게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모든 것은 계약서에 서명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계약서 하나에 일어난 변화에 허니는 기쁨보다는 허무함을 느꼈다. 아둥바둥 살아왔던 나날들이 하루면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였다는 것과 앞으로 남은 인생의 채권자는 오스카 아이작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인생목표, 삶의 과업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허니는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밤늦게 전화를 걸었다. 


- 저...

- 네. 허니, 말해요. 

- 아...


계약서에 있던 번호를 전화를 걸었지만 오스카가 직접 받을 줄 몰랐기에 허니는 잠시 당황하다가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 제 빚들이 모두 정리되었다고 들었어요. 그..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오스카 아이작이 그녀를 협박해서 계약서를 쓰게 만들었는데 그 계약서로 인해 그녀의 빚들이 정리되었다, 이걸 감사하다고 해야하나? 모든 건 오스카 아이작의 뜻대로 이뤄진 결과였고 그 댓가는 앞으로 허니 스스로가 지불해야 했다. 


- 우리 계약서의 내용이었잖아요.  당연한 거예요.

- 그렇죠...  저 낮에는 일을 하려고 해요. 

- 제가 제안한 금액이라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 지금까지 제가 생활비를 벌면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 일상을 유지하고 싶어요. 

- 새로운 걸 시작할 수도 있어요. 학교에 가거나 무언가를 배워본다던가.

- 해왔던 대로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 허니가 원한다면. 대신 전처럼 무리하게 일하면 안돼요. 나에게 할애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 알고 있어요.

- 허니.

- 네? 

- ... 잘자요. 

- ...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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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았던 인사가 돌아오고 통화가 종료되자 오스카는 긴장을 풀고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를 이토록 긴장하게 만드는 게 러시아 마피아나 경찰도 아니고 누구 하나 속여본 적 없이 인생을 살아왔을 것 같은 허니라니.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떨리던 손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허니는 하루만에 그녀의 방식대로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에게 어떻게든 의존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 씁쓸했지만 좋은 밤을 보내라는 단순한 인사 하나에 오스카의 마음은 손쉽게 풀어져버렸다.



다시 생각해봐도 바보같은 계약이었다. 시작부터 상대방의 빚부터 갚아주는 멍청한 계약을 다른 누구도 아닌 오스카 아이작이 썼다니. 그의 경쟁자나 그와 한번이라도 계약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웃기지도 않는 만우절 농담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스카에게 허니는 예외였으니까. 그녀의 빚은 오스카에겐 카페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 가격과 다르지 않았다. 그정도 값어치의 돈을 내고서 허니에게 믿음을 수 있다면,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게 진심인지 그녀가 한번이라도 생각해줄 수 있다면 오스카는 몇십번, 몇백번이라도 값을 치룰 용의가 있었다. 
















-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허니는 서점의 유일한 동료이자 사장에게 퇴근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추워진 날씨에 겉옷을 여미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길에 주차된 고급스러운 차와 그에 기댄 채 서 있는 오스카를 발견했다. 허니는 오스카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고 곧 오스카도 허니를 발견하고선 그녀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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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하아...제가 늦었나요?

-  아니요. 시간이 남아서 마중나왔어요. 갈까요?

오스카는 허니를 에스코트하며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고 허니는 거리낌없이 차에 올라탔다. 





 


 
- 여기 있는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은 거예요?

- 대부분은... 네.



오스카의 저택에서 식사를 한 두 사람은 서재로 자리를 옮겼고 허니는 오스카의 서재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고급스러운 표지의 책들과 빈티지한 가구들. 은은한 조명과 벽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까지. 모든 게 완벽한 퍼즐처럼 맞춰진 공간이었다. 허니는 그림 앞에 멈춰섰고 허니의 뒤를 따라 걷던 오스카도 같이 그림 앞에서 멈췄다. 커다란 캔버스를 채운 몇개의 도형과 강렬한 색감. 작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림임은 틀림없었다.


- 이 비슷한 그림을 책에서 봤던 것 같아요.

- 허니가 책에서 봤던 그 작가의 작품이 맞을 거예요. 어때요, 이 그림이 마음에 드나요?

- 책에서 봤을 땐 그냥 그랬는데 실제로 보니까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도형이랑 몇가지 색밖에 없는데 감정들이... 저를 덮쳐오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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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감정들이 오스카를 닮았다는 말을 허니는 차마 하지 못했다. 강렬함, 외로움, 고독. 


오스카와 만난지 몇달이 지나면서 허니는 그를 조금은 편안하게 대하게 되었다. 그녀의 걱정처럼 잠자리나 스킨쉽이 강요된 적은 없었고 그들은 친구, 혹은 처음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일주일에 몇 번, 몇 시간씩 만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스카는 항상 허니의 안부를 물으며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고 그를 보면 긴장하던 허니 또한 그와 만남이 잦아지면서 그가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살아남기 바빴던 허니에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드물었고 그랬기에 허니 또한 이런 친밀한 관계에 목말라 있었는지 모른다. 오스카가 허니에게 바라는 관계와는 달랐지만 허니는 그녀 나름대로 오스카와 보내는 시간이 즐겁게 느껴졌고 그에 대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오스카는... 이 그림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요?



아직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한 듯 보였지만 허니의 입술에서 나오는 제 이름에 오스카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질문에 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글쎄요. 이 그림을 보고나서 다른 그림을 봐도, 눈을 감아도 이 그림이 떠올라서요. 그래서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볼 수 있게.



오스카에겐 허니 또한 그러했다. 그녀가 없을 때에도 그녀가 생각났기에,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그녀를 지워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그녀를 묶어두었다. 이제 오스카가 눈을 감고 그림을 떠올릴 때면 그림 앞에 서있는 허니도 같이 떠오를 것 같았다.   














- 아, 추워.


해가 저문 슬럼가의 거리는 스산했고 바람은 피부를 뚫고 들어오려는 듯 시리고 차가웠다. 허니는 발을 구르며 추위와 싸우고 있었고, 얼어붙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7시 30분. 허니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벌써 약속시간이 30분 지나 있었다. 오스카에게 5번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목소리 대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만 5번 들어야했다. 이미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다린 시간이었지만 언제나 허니보다 먼저 도착하던 오스카가 연락도 없이 오지 않는다는 게 허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 안되겠다.


허니는 폰을 꺼내 둔해진 손가락으로 오스카에게 메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전화를 해도 연락이 없었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문자를 쓰고 있는데, 검은 세단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허니 앞에서 멈춰서더니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내렸다. 



- 허니 비님?

- ...

- 아이작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약속장소에 못나오시게 되어 허니님을 자택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타실까요?


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어딘가 긴장되어 있고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 했다. 허니는 불안한 감각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차에 올라타야 했다. 












오스카의 집에는 수많은 조직원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이 표정은 굳어있었고 날카롭고 빠른 대화소리만이 저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총기가 들려있었고, 허니는 전에 방문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저택의 분위기에 잔뜩 긴장한 채 수행원의 뒤에 바짝 붙어 그를 따라갔다. 익숙한 응접실과 서재를 지나 더 안쪽 복도로 들어간 그들은 문 앞에 멈춰섰고 남자가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안쪽에는 몇명의 사람들과 그 가운데 피가 베어나온 붕대를 어깨에 감은 오스카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 광경에 놀란 허니는 가만히 서있었고 허니를 본 오스카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으며 치료를 위해 풀어헤쳤던 셔츠를 정리했다.


- 다들 나가봐.


방이 순식간에 비워지고 오스카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 허니. 어서 와요.


오스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정신을 차린 허니는 성큼 방안으로 들어갔다. 오스카는 허니의 손을 잡아 소파로 이끌어 앉히고선, 그녀의 손을 잡았다. 


- 너무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일이 생겨서 나갈 수 없었어요. 당신 손이 아직도 차가워요. 추운 곳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요.


허니의 손은 이미 충분히 녹은 상태였지만 오스카는 그녀 손에 냉기가 남아있다는 듯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 제 손은 이제 따뜻해요. 그것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피가...


가까이서 본 오스카의 상태는 심각했다. 어깨를 두텁게 감싼 하얀 붕대에서는 선홍색의 핏자국이 번져있었고 그의 귀와 뒷 목에도 상처와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보였다. 허니가 손가락으로 귀와 목의 핏자국을 가리키자 오스카는 옆에 놓여져 있던 수건을 들어 문지르려 했다. 


- 어... 제가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허니가 상처에 눈을 떼지 않고 오스카에게 손을 내밀자 오스카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에게 수건을 건넸다. 허니는 수건을 들어 핏자국을 조심스레 닦아내기 시작했고 오스카는 자연스레 허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수건이 상처를 건드렸는지 오스카의 몸이 움찔거렸다.

- 미안해요, 아파요?

- 괜찮아요. 계속해요. 


어느새 그들은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고 오스카는 시선을 내려 허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상처를 유심히 보는 그녀의 눈에는 연민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의 다정함이 오스카로 하여금 부질없이 부서질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어쩌면 허니가 그를 희망고문 하는 것이 아닐까. 오스카는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거짓된 다정함이 그를 다 부서진 심장을 끌어안고 버티게 만들었으니까.



- 여기 상처난 부분에 피가 굳긴 했는데 깊어보여요. 치료해야하지 않을까요?


허니는 오스카에게 알려주려는 듯 상처주변을 자극이 없을 정도 살짝 손으로 짚었고 오스카는 그 간지러운 감각에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 피가 굳었으면 문제없을 거예요.


치료가 끝났는지 허니는 손을 거두었고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기만 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오스카가 물어보자 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 늘 있는 일이죠.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요. 


적들이 늘 오스카의 목숨을 노리긴 했지만 최근에는 그 빈도가 잦았다. 물론 이 도시의 지배자가 되기까지 수많은 견제와 위기가 있었지만 그가 지배를 공고히 한 이후에 그의 도시에서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시도가 위협적으로 느껴졌고 점점 더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오스카는 허니의 손에서 물수건을 가져가 그녀의 손에 묻은 자신의 핏자국을 천천히 닦아냈다. 쉬지 않고 일을 했을 손이지만, 하얗고 아름다웠고 순결한 자의 손이었다. 오스카는 죄악으로 더렵혀진 제 큰 손으로 하얀 작은 손을 감싸고선 더러운 피를 닦아냈다. 이 손의 주인은 다정하고 친절했고 그로 인해 자유를 뺏기게 될 터였다.


- 그리고 날 노리는 사람이 많다는 건, 이제 허니도 안전하지 않다는 거죠.

- 저요?

- 나에게 의미있는 건 당신 밖에 없으니까. 


핏자국이 지워진 작은 손에 오스카는 입을 맞췄다.


-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도록 해요. 일도 쉬는 게 좋겠어요.


계약서를 쓰면서까지 저택을 벗어나려던 허니는 갑작스런 오스카의 제안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 일은 쉴테니까 그냥 집에 있으면 안되나요? 외출도 하지 않고 지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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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당신 목숨으로 도박하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빨리 해결할테니 답답하더라도 이곳에서 참고 기다려줘요.


부탁하는 어조였지만 허니는 오스카의 말이 입밖에 나온 이상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당장 그녀에게는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공포감보다 빼앗겨버린 그녀의 자유에 대한 상실감이 더 컸기에 그녀는 침울한 표정을 고개를 끄덕였고 오스카는 몇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 이 방이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허니의 임시거처는 오스카가 지내는 층보다 위인 저택 3층에 위치해 있었고, 오스카는 직접 그녀가 머물 방을 안내해주었다. 


- 여름... 같아요.


허니의 감상은 오스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무겁고 장엄한 겨울과 같은 이 저택에 그녀를 닮아 사랑스럽고 따뜻한 공간이 필요했기에 특별히 만든 방이었다. 어둡고 무거운 저택과 다르게  밝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이 방은 지하 세계에 여름을 가져온 것 같았고, 허니와 잘 어울리는 퍼즐조각들로 이뤄진 듯 보였다.


- 이걸로 허니가 감수해야하는 불편함을 다 보상할 순 없겠지만 그냥 집처럼 편하게 지내줘요.












허니는 일종의 감금을 당했지만 생활하는데 불편한 건 없었다. 급하게 오느라 생필품과 옷들을 챙기지 못했지만, 언제 준비한 것인지 허니 방의 옷장에는 그녀가 좋아할 법한, 하지만 그녀의 월급으로는 구할 수 없는 법한 브랜드의 옷들이 걸려있었고. 생필품들도 구비되어 있었다. 오스카는 허니를 담당하는 고용인을 배치하여 그녀를 보살피게 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해줬기 때문에 허니는 태어난 이후 가장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스카는 허니가 이대로 저택에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지길 바랐다. 이 일련의 사건이 지나더라도 그의 곁에 남길, 이곳을 그녀의 집으로 받아들여주기를.


그러나 그의 희망은 곧 작은 소란으로 인해 깨지게 되었다. 















이른 저녁, 허니는 정원을 산책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오는 중이었고 저택 안쪽 복도에서 큰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도망쳐 나오기 시작했다. 




-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 거기 서!!! 


급하게 뛰쳐나온 듯 그는 계단에서 내려오던 허니를 피하지 못하고선 부딪히며 넘어졌고, 둘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강한 충격에 부딪혔던 쪽의 어깨를 잡으며 인상을 쓰던 허니는 옷과 손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 피?


고통도 잊은 채 몸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자신과 부딪힌 남자의 몰골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정장 곳곳은 피가 물들어 셔츠의 하얀색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의 손가락은 뭉개져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기괴한 괴물의 가면을 쓴 것처럼 타박상과 열상으로 눈코입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얼굴은 역시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남자는 허니가 자신을 구해줄 동앗줄이라도 된다는 듯 그녀쪽으로 기어오며 살려달란 말만 반복했다.


- 살려, 살려줘!! 제발!!!


남자의 피묻은 손이 허니의 발목을 잡았을 때 다른 조직원이 그들을 발견하고선 소리쳤다. 


- 이쪽이야! 


조직원들은 피범벅이 된 남자의 몸을 잡아당겼고 남자는 허니를 잡으며 버티려고 했지만 곧 조직원들의 손에 강제로 몸이 일으켜세워졌다. 그 아수라장 앞에서 허니는 몸을 뒤로 밀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 허니.


절규와 고함소리로 가득했던 저택의 복도는 오스카의 한마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피가 묻은 제 발목을 바라보고 있는 허니를 제외한 조직원과 피투성이의 남자마저도 오스카를 바라봤다. 조직원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물러나며 오스카는 허니곁으로 다가왔고 바닥에 쓰러진 허니와 조직원들에게 잡힌 남자를 보고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오스카는 허니가 볼 수 없게 몸을 돌렸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턱과 옆사람에게도 들리정도 거친 숨소리가 그의 분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허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하지만 또렷하게 부하에게 명령했다.


- 내가 직접 손볼테니까... 죽이지마.


조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남자를 끌고갔고,  오스카는 쓰러진 허니 앞으로 다가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 괜찮아요? 허니. 다친 곳은?

- 괜찬..괜찮아요.


대답과 달리 허니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공황상태에 빠진 허니의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그녀의 상태를 답하고 있었다. 


- 방까지 부축해줄게요.

- 혼자 갈 수 있어요.

- 내가. 부축해줄게요.


오스카는 허니를 방까지 부축했지만 스치듯 그와 몸이 닿을 때마다 굳는 허니를 보며 입술을 씹었다. 그녀의 침대에 그녀를 앉힌 뒤 오스카는 그녀와 눈을 맞추려고 했지만 허니는 그를 보려하지 않았고 오스카는 그녀의 눈에서 어떠한 감정이라도 읽어보려 했다.  


- 그는 조직을 배신한 배신자였어요. 당신은 그와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스카의 설명에도 허니는 반응이 없었고 오스카는 오늘은 그만 물러서기로 했다.


- 쉬어요, 허니.


오스카는 방을 나섰고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에게 허니의 옷을 갈아입히고 씻길 것을 명령했다.


- 피가 묻은 옷은 다 버려.



오스카는 허탈해졌다. 그들의 관계는 다시 계약서를 쓰던 날로 돌아가버렸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그를 향해 웃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를 걱정하며 다정한 말도 건네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녀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치며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려 해도 그것들은 이렇게 여지없이 쏟아져 나와 그녀를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 젠장.



참아지지 않는 분노와 좌절감에 오스카는 주먹으로 옆의 벽을 세게 쳤고 숨을 크게 고르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녀는 계약으로 그에게 묶여있고 당분간은 이 저택을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당분간이란 시간도 오스카가 원한다면 더 길어질 수 있었다. 상처를 받는 것에는 익숙하니까 그는 다시 허니의 외면과 경멸을 참으며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할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스카의 마음은 조금 편해졌고 처리해야할 문제가 떠올랐다. 그 배신자만 아니었다면 오스카가 이렇게 화를 낼 일도 없었고 허니는 평소처럼 그와 같이 앉아 저녁을 먹을 수도 있었다. 허니가 그를 무서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게 다 그 배신자의 탓인 것만 같았다. 사랑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오스카는 셔츠의 소매 단추를 하나둘 풀며 배신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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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카? 오스카! 


허니는 불이 꺼진 저택 복도를 내려오며 오스카의 이름을 불렀다. 몇분 전, 고용인들도 대부분 퇴근해서 조용한 밤, 저택에 몇발의 총성이 들렸다. 방에서 자고 있던 허니는 총성에 놀라 일어나 문을 잠그고선 방구석에 숨었고, 그 뒤로 총성이 몇 번 더 울렸다. 허니는 신고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가 자신이 갱단의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선 폰을 내려놓고 숨죽이며 총성이 멈추길 기다렸다. 마지막 총성으로부터 몇분이 지난 났을 때, 허니는 방문을 열었고 저택의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니 자신도 위험하고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섭고 두려운 순간에도 허니는 단지 오스카가 무사한 지 알고 싶었고, 그가 보고 싶었다. 그가 갱단의 두목이라는 것, 그와의 계약서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고, 허니는 그저 그가 평소처럼 허니에게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그녀를 안아주길 바라며 그를 찾아 계단을 내려갔다.







- ...읍!


1층으로 내려가는 길, 익숙한 얼굴의 조직원들이 총에 맞아 복도 여기저기 누워있었고 침입자들의 시체들도 널부러져  있었다. 허니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걸어갔고 그녀의 하얀 실내화는 피에 젖어 붉게 물들어 발자국을 남겼다.




탕-!!



1층 안쪽에서 들리는 갑작스런 총성에 허니의 몸은 움츠러 들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총성이 있는 방향에 오스카가 있을 거라고. 허니는 죽은 시체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것을 챙겼고 잠시 뒤 총성이 났던 방향으로 달려갔다.













방 안쪽에는 침입자로 보이는 한 남자와 오스카가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흉기에 찢긴 오스카의 팔에서 피가 흘렀고 침입자는 칼을 들며 오스카를 책상으로 밀어붙였다. 순간 오스카가 균형을 잃고 책상 위로 넘어졌고 침입자는 끝을 내려는 듯 칼을 들고 있던 팔을 크게 위로 올렸다. 




탕 - !! 




한번의 총성이 울렸을 때 침입자는 몸이 무너져 오스카의 위로 쓰러졌고 오스카는 잠시 그 상태로 숨을 고르다 침입자의 몸을 옆으로 밀어내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총성이 났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총을 든 채 서 있는 허니를 볼 수 있었다.


- 허니. 허니, 괜찬..

- 오스카. 내가 사람을 쐈어요. 내가 사람을 죽였어.


허니는 곧 손에서 총을 떨어뜨리고선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오스카는 허니에게 다가가 우는 그녀를 껴안았지만 허니는 진정되지 않았고 그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첫 살인에 대해 혼잣말을 반복했다.



- 내가 사람을 죽였어.. 어떡해..내가..

- 허니. 날 봐요. 제발 날 봐요!

- 오스카.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나는.. 난!!

- 아니요. 당신은 날 살린 거예요. 당신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겠죠. 나를 살린 것을 후회하지 말아요. 당신이 나때문에 후회하는 걸 보고싶지 않아요. 

- 오스카, 오스카. 당신을 살린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그런데 내가 죄를 저질렀다는 것도 변하지 않잖아요. 




허니는 눈 앞의 오스카가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에게 매달리듯이 껴안았고, 오스카는 허니를 품에 안았다. 적들의 습격으로 그는 꽤나 피해를 입었다. 저택을 지키던 경호원들과 몇몇의 고용인들을 잃었고 본인도 부상을 입었으며, 허니는 당분간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동시에 그는 입가에 자꾸 떠오르는 미소를 허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를 품에 더 꼭 껴안아야 했다. 허니가 그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그녀는 이제 태양 아래에서 걸어다닐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계약서로도 잡히지 않던 그녀의 세계가 한 번의 총성으로 바뀌었고 허니는 지하세계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단 한번도 신을 믿어본 적이 없던 오스카였지만 지금 그는 신의 존재를 믿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의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손으로 석류를 먹었다. 그녀의 고결하고 맑은 영혼은 햇빛이 가득한 지상을 꿈꾸겠지만 그 몸은 오스카 옆에 머무르리라. 아직도 지상의 봄과 여름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그녀를 안은 채 오스카는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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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가 감히 당신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어요? 그 누구도 당신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도 없을텐데. 


그가 그녀를 이 빛 하나 없는 지하세계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지하세계의 욍에게도 반려는 필요했고, 그가 살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했다. 그런 그를 두고 누가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이 자신의 손에 잡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작너붕붕


 
2024.11.24 21: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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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Code: 86a5]
2024.11.24 22: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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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진짜 읽는내내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어요 센세ㅠㅠㅠㅠㅠ 진심 이건 명작이야ㅠㅠㅠㅠ 아니 허니가 오스카를 위해 사람을 죽인걸 페르세포네가 석류먹은 걸로 비유하다니 센세는 천재야...이런 말 밖에 표현못하는게 아쉬울 정도로 존잼이다 진짜ㅠㅠ
[Code: d2c6]
2024.11.25 00: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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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미쳐따 허니 오스카 걱정부터 하더니 오스카 살리려고 사람 죽인 거까지...!
[Code: 26c9]
2024.11.25 05: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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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ㅏ 미친 마스터피스 센세 오작이 너무 간절해보여서 찌찌 부여잡고 스크롤 내렸다 센세가 내 여름이고 겨울이다
[Code: 7a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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