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448
2024.11.19 17:01
돌이켜보면 조로는 비비를 많이 울렸다.

‘조로 네가 무슨 생각에서 그러는지는 아는데 비비 이제 겨우 열네살이야. 아직 어린애라고. 그러니까 비비한테 네 마음이 어떤지 잘 설명해주란 말이야. 비비가 계속 울고 있으면 너도 속상하잖아.’

비비의 막사에 한참을 머물다 나온 귤빛 단발머리 소녀, 나미가 조로를 나무랐다. 조로는 카루와 함께할 작전의 최종 점검을 끝낸 상태였다. 카루의 등에는 비비와 비슷한 크기의 지푸라기 인형이 망토를 두른 채 매여 있었다.
때는 십년 내란의 막바지로 가프에 이어 대참모 츠루가 합류한 국왕군은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는 상황이었다. 수도 탈환까지 코앞에 둔 상황에 반란군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전투도 치열해짐은 당연했다. 승세가 국왕군에 기우는만큼 적의 수괴가 네펠타리 비비를 노리는 수 또한 더욱 비열해졌고. 공주를 손에 쥐는 순간 이 전쟁은 끝난다. 네펠타리 국왕은 다 이긴 전쟁도 마다하고 바로 투항할 것이다. 뿐이랴, 공주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알라바스타의 왕이 될 명분 또한 확실하다. 적의 수괴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내란 초기부터 어린 공주를 찾는 데 혈안이 돼있었다. 때문에 조로는 본진과 떨어져 비비가 은닉한 장소를 둘러싼 적군에 이가람 등과 함께 대비해둔 수를 쓰려는 거였다. 통보하듯 알린 사실에 비비가 격렬하게 반대함은 당연했고. 하지만 그 항변이 통할만 한 상황이던가.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최우선은 비비 공주를 거프와 츠루가 있는 본진으로 무사히 탈출시키는 거였다. 이를 위해 나미도 루피도 우솝도 적군을 교란시킬 일행에 합류하겠다 나선 것 아닌가. 물론 이 셋의 주장은 안전 문제와 인력 부족을 이유로 반려당했다지만.
이때 이미 정식 군인이었던 로빈을 비롯해 약 일년에 걸쳐 가프에게 인정받은 에이스와 사보는 본진에서 정예병으로 활약 중이었다. 때문에 몰래 숨어서 온 루피, 나미, 우솝은 비비 일행에 묶여 보호받는 입장이었다. 그런 것치고 막상 일이 생기면 훌륭히 제 몫을 해내는 아이들이었다지만 말이다. 조로가 이번 작전을 수행하면서 마음 놓였던 것도 세 명 덕분이었다. 이들이 함께하고부터 비비가 눈에 띄게 밝아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정말 이대로 갈 거야? 비비 얼굴도 안 보고??’

나미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조로가 카루에 올라탔다. 이곳은 대수층형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군락을 이룬 대추야자 나무가 숲이 된 장소였다. 때문에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오던 적군도 이쪽 진영을 세세히 파악하지는 못한 상태다. 남은 수가 있다면 승산이 있는 지금 써야 하는 것이다.

‘비비를 부탁해. …그리고 루피도. 나랑 같이 간다고 고집부려서 내 막사에 재워놨어. 한 대 치면 금방 일어날 거야. 가자, 카루.’
‘꾸엑!’
‘재우기는 무슨! 기절시킨 거면서! 어유, 저 답답이 진짜! 루피 깨우는 건 일도 아닌데 조로 너야말로 꼭 살아서 돌아온다는 말 정도는 하고 가야지!! 그래야 나도 애들한테 해줄 말이 생기잖아!!’
‘둘 다 가지 마!!’

시간이 다 됐다. 멀리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조로는 카루를 재촉했다. 일찍이 비비가 선물해준 물통을 목에 건 카루가 부착된 빨대로 물을 쭉 마시더니 우렁찬 소리를 냈다. 이어 나미가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릴 때 꼬박 하루를 막사에서 꿈쩍 않던 비비가 나타났다.

‘조로, 카루! 이대로 가면 둘 다 죽을지도 몰라. 나만 두고 가지 마, 제발. 부탁이야…….’
‘비비…….’
‘꾸엑…….’

비비는 울어서 퉁퉁부은 얼굴이었다. 나미가 그런 상대에게 다가와 지친 어깨를 안아줬다. 속이 가득 찬 물통처럼 씩씩하던 카루 역시 금방이라도 내딛을 듯하던 발이 멈췄다. 그때 조로가 향하던 반대편에서 함성과 함께 병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양동 작전의 시작이었다. 저쪽에서 일부 병사가 먼저 길을 뚫듯이 적군을 칠 때 반대편에서 조로는 카루를 타고 전력질주한다. 비비 하면 상징적으로 연상되는 것이 카루와 삼검류를 쓰는 잔디머리 소년이었으니 이 둘이 반대편에서 모습을 보이면 적은 속아넘어갈 것이다. 비비 공주는 저쪽에 있을 거라고. 이틈에 진짜 비비를 비롯한 사람들은 조용히 눈을 피해 움직인다. 카루가모는 알라바스타에서 가장 빠른 육상 동물이었으니 고작해야 말이 전부인 적군은 조로를 쫓기 바쁠 터였다. 승산은 있다.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태양을 보면서 조로는 확신했다.

‘가자!’
‘꾸엑!’
‘조로!! 카루!! 가지 마!!!’

조로의 재촉에 카루도 드디어 땅을 박차고 나갔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뒤에서 비비가 소리 높여 울고 있었다.




도피에게 크로커다일의 위치를 알린 건 영감이었다. 그 또한 도피와 로우만을 위하는 충실한 종이었으니. 더욱이 영감은 시종 특유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 지우기에 도사였다. 패기의 피읖도 모르면서 견문색에 능한 자들조차 놓칠 때가 많을 정도로. 마치 원래 그곳에 있던 물건인 양 스며들어서 로우가 버린 물건을 잘도 갖다모으는 사람 아니던가. 그래선지는 몰라도 이번 왕의 대지 습격 사건에 영감의 숙소 근처는 유독 피해가 심했다. 물롤 바지런한 영감은 이때도 가능한 많이 들고 튀었다지만 로우가 어릴 때부터 키를 쟀던 나무 기둥만은 어쩌지 못했다. 부러지고 불에 타 밑둥만 남은 걸 보고서는 정인인 양 끌어안고 훌쩍였다고. 또한 그 밑둥은 현재 영감의 방에도 있었으니 어쩌다 시종들이 시시덕대는 말을 들은 로우는 못 들을 걸 들었다며 귀청소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영감이 목숨처럼 여기는 쓰레기들을 강제로 버리는 등의 일은 않았다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던 크로커다일은 도피의 등장에 제 실책을 통감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영감의 존재감을 놓친 것을. 아니나 다를까, 삼각팬티 바람의 도피가 한 손으로 조로의 턱을 붙들고 ‘진짜’가 맞는지 살필 때 크로커다일은 개방된 문 뒤로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민 영감을 알아챘다. 그가 반쯤 고개 돌리니 영감은 재빨리 문 뒤로 숨어버렸다. 크로커다일이 마른 한숨을 쉬던 순간이었다.

“둘이 왜 여기 있어?”

로우였다. 일을 마친 녀석은 크로커다일의 뒤에 나타났다. 피곤에 찌든 목소리가 밤을 꼬박 새웠음을 증명할 때 문 뒤쪽에서는 영감이 눈을 빛내며 머리를 내밀었다. 오매불망 기다린 왕자님을 보겠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로우는 언제든 도피고 악어고 공격할 태세였다. 그는 조로를 공격하고 엉망으로 방치한 두 사람에게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물론 도피나 악어가 그런 로우를 신경쓰는 것도 아니었고. 이런 이유로 조로가 모르고 있던 바깥 상황은 관료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만 피말리는 하루하루였다. 특히 로우와 매일같이 얼굴 봐야 하는 요직인사들은 더 죽을맛이었고. 조로와 냉전 중이던 이주 동안 로우는 세치 혀로 사람 여럿을 잡았다.

“낯짝도 두겁지, 둘 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나 없는 때를 노려?”
“로우! 너……!”
“조로야!”

팽창한 룸이 사위를 감쌀 때, 도피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하지만 무반응이던 크로커다일을 포함해 셋 모두에게 숨막힐 듯한 전운이 돌던 게 사실이다. 그에 이를 포착한 조로가 나섰으나 급작스런 행동변화는 아직 몸에 무리가 갔다. 도피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려 한 조로는 가슴에 손을 댄 채 멈춰 있었다. 룸이 사라지고 로우가 조로에게로 뛰어가기까지 이 모든 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귀곡을 한쪽에 세워둔 이는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레 조로를 살폈다.

“갑자기 움직이는 건 아직이라고 했잖냐, 조로야. 큰소리를 내는 것도 흥분하는 것도 무리다. 네 심장이 못 버틴다.”
“와… 되게 아프네 이거.”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무의식에 흘린 말에 걸터앉은 로우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비 맞은 고양이가 따로없었다. 맞은편에서 이를 본 도피는 지하선착장에서 조로에게 상처 입힌 일이 떠올라 심란해졌다. 그날 어깨가 빠졌던 조로는 저 얼굴을 숨겨주려 했음이 분명하다. 이토록 약한 로우의 모습은 도피도 처음이었다. 역시나 조로는 이번에도 로우의 머리를 감싸 품에 당겼다. 분명 냉전 중이었을진대 순순히 딸려오던 로우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조로는 심장을 옥죄는 통증이 가신 얼굴로 다른 두 사람을 돌아봤다.

“로우가 무례했던 건 용서하십쇼, 크로커다일 경. 두 사람도 로우한테 썩 잘한 건 아닌 듯하니까. 그러니 못한 얘기는 다음에 했으면 합니다. 내일부터는 저도 식사자리에 동참할테니까요.”

그 말에 조로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로우가 움찔했다. 조로는 모르고 한 말이지만 로우는 다섯주 동안 다른 두 사람과 밥 한끼 같이 먹은 적 없다. 물론 도피는 돌아온 뒤에도 점심 때면 항상 로우의 자리를 남겨놨지만 말이다. 하니 내일이 기대된 이는 대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순순히 물러날 수밖에.

“그렇다는데 우리도 이만 갈까?”

그는 무려 크로커다일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며 다독이기도 했다. 끝물이라도 겨울이건만 헐벗은 놈의 체온이 더 후끈함에 크로커다일은 심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손을 내치지는 않았다. 체온이 서늘한 그에게 겨울은 늘 쥐약이었으니까. 이를 잘 알던 도피는 능력으로 의자에 걸쳐둔 코트까지 가져와서 방을 빠져나가던 악어에게 둘러주기도 했다. 참으로 살뜰한 손놀림이었다.




도피와 악어가 나가고 둘만 남은 방에서 로우는 뒤늦은 어색함을 느꼈다. 아직 냉전 중임이 떠오른데다 로우는 제 말을 듣지 않는 조로에게 화가 난 상태다. 그럼에도 품에 안겨 가만있는 건 오랜만의 스킨십이 너무 좋아서였다. 조로의 가슴이다. 더없이 그립던 체취와 얼굴을 감싸는 안온함이 이렇게 기꺼울 수가 없다. 진작 허리를 두른 팔까지 더해 파고든 머리통에 조로가 검은 점박이 무늬의 모자를 벗길 때도 로우는 얌전하기만 했다.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앉은 조로는 모자에 눌려있던 풍성한 검은머리를 손가락으로 흐트렸다. 그에 품을 더 파고드는 머리통이 조로는 귀엽기만 했다. 로우는 덩치 큰 고양이 같았다.

“또 로우 네 신세를 졌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그리고 걱정시켜서 미안해.”
“……나도 화내서 미안했다, 조로야.”

가운을 비집고 파고드는 로우에 한 눈을 동그랗게 뜬 조로가 웃음을 흘렸다. 로우는 왕자로 자랐다. 사과의 말이 드문 입장이라는 거다. 돌이켜봐도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은 대개 조로의 몫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직접적인 언급을 않았을 뿐 로우는 상황을 이해시키려는 노력만은 최선을 다했었다. 조로도 이 필사적인 모습을 늘 보아오지 않았나. 때문에 그는 도리어 로우가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밤새 자란 턱수염이 가슴을 간질이는 걸 느끼며 조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에 다소 긴 머리를 빗질하듯 쓸어넘기면서 다른 손은 로우의 턱에 갖다대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손바닥을 스치는 까슬함이 기분 좋았다. 그리운 가슴에 얼굴을 치대고 다정한 손길을 받던 로우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그는 언제 화가 났었나 싶게 한껏 풀어진 얼굴이었다. 낮은 숨소리가 더해지니 골골 소리를 내는 고양이가 따로없었다. 그런 이의 얼굴은 또 밤을 샜는지 눈밑 그늘이 짙기만 하다. 이러니 조로는 로우가 걱정이었다.

“루피는 내 가족이야.”

편안한 침묵이 맴돌던 공간에 조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몸을 뗀 로우는 구두를 털고 침대로 완전히 올라온 뒤 재킷과 셔츠를 벗어 바닥에 떨구던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벨트를 시원스레 뺐던 그의 회색 동공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로우는 침대에 누우면서 한번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가운 차림의 조로는 저를 당기는 힘에 순순히 따라줬다. 마주보고 누운 조로의 가슴에 로우의 얼굴이 파묻혔다. 허리를 바투 당겨안던 팔 힘에 조로의 몸이 쉽게 딸려갔다. 생사를 오간 동안 살이 꽤 내렸기는 해도 키만 180인 성인 남성이건만 조로를 다루던 로우는 매번 힘들이는 기색 하나 없었다. 옷을 입히고 세워두면 낭창하니 모델같은 느낌인데 실제 만져보면 단단하기가 돌덩이였으니 알파란 원래 이런 족속인가 싶어졌다, 조로는. 조금 전의 젊은 왕도 그렇고 말이다. 조로는 허락만 떨어지면 훈련 강도를 더 높이리라 마음먹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가 한창 내전 중일 때 나랑 카루가 미끼로 나서야 했던 적이 있어. 카루는 기억해? 비비가 항상 데리고 다니던 대왕오리처럼 생긴 녀석 말이야.”
“알고 있어. 너희 나라에 서식하는 카루가모 종이라는 것도. 빠르기로 손꼽히는 놈들이잖아.”
“역시. 잘 아네. 아무튼 그래서 미끼가 된 카루랑 나는 적이 쳐놓은 덫에 걸려 붙잡힌 처지였어. 죽을 뻔했지.”

도움에 감사 인사를 한다거나 잘못한 일을 사과한다거나, 응당 해야 될 말은 바로바로 전하는 조로였다. 하지만 변명이라 생각되거나 구구절절한 속엣말은 쉬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 나미의 나무람을 들으면서도 조로는 비비를 보지 않고 떠난 거였다. 결국 살아돌아왔을 때도 나미는 조로를 두고 매정하다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조로를 이해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네가 변명이라 생각하는 말을 쓸데없다 여기는 건 알지만 남겨진 사람한테는 그 말이 동아줄이 될 수도 있어! 모든 사람들이 다 너처럼 마음이 강한 건 아니라고! 네가 이번에 정말 잘못됐다면 비비는 평생 지우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았을 거야!’

조로가 돌아왔을 때 나미는 안도하면서 동시에 불같이 화를 냈었다. 덩달아 걱정시킨 루피의 머리통을 쥐어박는 것도 잊지 않고서. 조로는 당시를 회상하며 로우의 머리를 빗질하듯 쓸어줬다.

“그때 루피가 나타났었어. 다른 사람들을 뿌리치고 막무가내로 날 구하겠다며 뛰쳐나왔대. 덕분에 나랑 카루가 살았던 거야.”
“…밀짚모자한테 빚을 졌군.”
“그래, 맞아. 루피한테 빚을 진 셈이지.”
“아니, 나 말이야. 내가 놈에게 빛을 졌다고. 너를 살려줬으니까.”

가슴에 파고든 머리가 들린다. 자연스레 시선이 부딪힐 때 조로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로우는 낮은 숨을 흘리고는 다시 얼굴을 가슴에 파묻었다. 이어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조로의 체취가 폐부 깊숙이 들어찼다. 로우는 녀석이 갑자기 꺼낸 과거사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말이 좋아 미끼지 죽으러 간 것 아닌가. 로우는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을 겪은 녀석에 마음이 쓰인다.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밀짚모자가 아닌 자신이 조로를 구하러 갔을 거라며 로우는 자책했다. 그사이 조로는 얘기를 마무리했다. 그는 로우의 말을 이해 못했지만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다.

“가족이니까 루피를 구하러 간 거야, 나는.”

조로도 나름 생각이라는 걸 했다. 로우는 원체 여리고 예민한 녀석이니 별별 생각을 다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렇게 내린 결론은 과정이야 어쨌든 결혼한 사이에 조로가 루피를 구한다고 뛰쳐나갔으니 왕자로서 체면을 많이 구겼겠지 싶었다. 조로는 이 점에 관해 로우의 시름을 덜어주려 함이었고. 가족이라면 충분히 납득할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말 끝나기 무섭게 로우는 조로를 누르며 위를 선점했다. 뒤로 누인 시야에 미간을 찌푸린 로우가 있었다. 그는 짙은 구렛나루와 거뭇하게 올라온 턱수염마저 멋진 남자였다.

“그럼 왜 뛰쳐나간 거지? 이유를 설명했다면 난 너를 도왔을 텐데.”
“이럴까봐 뛰쳐나온 것도 모르냐? 루피는 엄연히 왕녀 시해범으로 붙잡힌 범인이라고. 왕자인 네가 범죄에 가담해서 어쩌자는 건데?”
“정체를 숨기고 도울 방법은 많아. 그러니 넌 내게 머리 숙였어야 해.”

그럼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겠지. 로우는 목구멍에 걸린 마지막 말을 삼키며 얼굴을 내렸다. 반쯤 몸을 겹치고 누은 이가 역시 허리를 감으며 심장 위에 머리를 옆으로 누인다.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조로의 심장은 지금도 빈맥과 서맥을 오가는 심방세동 증상을 보였다. 이는 돌연사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런 건 다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지.”

일이 실패하면 다 소용없다. 로우가 불규칙한 심장소리를 들을 때 이번엔 조로의 한숨이 짙어졌다. 모든 일에는 언제든 실패의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조로는 언제나 그 일말의 확률에도 마음을 다잡아 놓고는 했다. 이렇듯 그의 거침없던 행보는 흔들림 없던 마음가짐 덕분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이든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힘이 필요하다.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라도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하면 조로는 주저앉을 바에 헤쳐나가는 쪽을 택하리라. 그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일이 실패했다면 내 정체도 탄로났을 거야.”

역시 변명의 말은 달갑지가 않다. 행동했으면 그만이지 거기 대고 이해를 바라며 호소한단 말인가. 때문에 조로는 떨떠름한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로의 가슴에 귀를 대고 있던 로우가 눈만 깜빡이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상체를 일으킨 로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조로의 말뜻을 다 이해했음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롤로노아야?!”

하지만 도리어 화가 더 난 모양새였다. 두성으로 내지르는 고함에 조로는 눈을 감아야 했다.




일이 실패했다면 정체도 탄로났을 거다. 드레스로자의 왕세자비라는 정체가. 이렇게 되면 로우도 해군과 마리조아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늙은 왕과 젊은 왕의 앙숙 관계를 생각한다면 최악으로 마리조아가 드레스로자를 칠 빌미를 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일의 경우 왕세자비가 멋대로 도망쳤으며 드레스로자는 이 일과 무관하다는 진짜 방패를 세우기 위해. 이런 이유로 조로는 돌아와서도 정말 죄값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사내자식이 살아 돌아왔다고 구구절절히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잖은가. 다만 여기서 조로가 로우의 다정함에 기대한 건 알라바스타나 비비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때문에 착한 녀석의 마음을 알고 이용한 건 잘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조로는 이 말을 꺼냈다가 로우에게 도리어 더 혼났다. 그렇게 또 한주가 흘러 일월의 중반이 훌쩍 지날쯤에 조로는 여전한 훈련 금지령과 한낮, 삼십분 산책이 외출의 전부였던지라 갑갑해 죽으려고 했다.

“저기… 형수… 나 지금 업무 시간인데…….”
“그래서 뭐. 간다고?”
“…아뇨, 죄송합니다.”

휴식시간에 잠시 들렀다가 붙잡힌 베포는 무려 형수와 한침대에 있었다. 정확히는 생체베개가 된 꼴이라지만. 왕세자비와 2분대장이 한 시간 넘게 침실에서 단둘이라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하던 영감이 지원군을 불러온 것도 이때였다. 형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슬며시 열린 장지문 틈으로 얼굴을 내민 건 샤치였다. 그는 서글서글한 웃음과 재치 있는 입담이 매력적이었다.

“나 들어가도 돼요?”
“당연하지. 애들 교육은 다 잘되고 있지?”
“음… 그게 말이죠… 하고는 있는데 대장이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샤치가 안으로 들어서니 베포는 구세주라도 본 얼굴이었다. 죽부인을 끌어안듯 한 침대 위 모양새에 샤치는 다가오는 내내 베포를 향한 위로어린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딱히 친구를 구하러 온 게 아니었다. 영감의 도움 요청에 선뜻 따라나선 것도 다 제 볼일 때문이었으니까. 정신이 든 형수를 보고 안도와 기쁨의 눈물을 짜냈던 왕실 호위대는 현재 생각지 못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위기는 조로가 로우와 또 싸우는 것처럼 화해한 일주일 전에 시작됐다. 순전히 본인의 생각이지만 얼추 몸도 회복했건만 로우가 아무것도 허락치 않아 좀이 쑤셨던 조로는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오른 거다. 마침 펭귄, 샤치, 베포가 바쁜 대장을 대신해 무료한 왕세자비의 말벗이 돼주기를 자처했으니 조로는 생각을 실현하는데 어려울 게 없었다.

“안 좋아하다니 무슨! 너희는 여태 너희 대장 취향도 하나 모르고 뭐했냐? 진짜 효과 있다니까? 내가 해봤는데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
‘형수니까 효과 있는 거겠죠.’

베포와 샤치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함구했다. 그래도 저희 둘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3분대장인 범고래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따르지 않는 중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제일 큰 문제는 펭귄이었다. 그는 현재 크로커다일과 한창 토론 중인 베르고를 두고 머리를 싸매는 중이었다.

‘나더러 어떻게 저 인간병기한테 오빠 소리를 가르치라는 건데?! 나 형수한테 크게 잘못한 거 있나? 그래서 그런 거야?! 지금이라도 형수한테 가서 뭔지 모르지만 잘못했다고 싹싹 빌까?’

베르고는 로우와 언성 높이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또 일분대장이기도 했고. 때문에 조로는 손윗사람이 할 만한 호칭은 아니지만 로우는 왕자니까 괜찮을 거라며 베르고에게도 비법을 전수해주라 했었다. 곧바로 안색이 변하던 펭귄에는 나름 배려한다며 내가 직접할까 묻기도 하지 않았나. 이때 펭귄, 샤치, 베포가 필사적으로 말렸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런 이유로 졸지에 베르고를 떠맡게 된 펭귄은 온종일 오빠 생각만 했다.

“그럼 새로 짓는 네 거처에 변동사항은 이게 전부라는 거지? 크로커다일.”
“그래, 매번 자료 옮기는 것도 일이니까 아예 지하에 자료실을 만들었으면 해. 내 침실이랑 서재, 집무실에서 전부 오갈 수 있도록.”
“좋아. 그럼 더 이견 없는 거로 알고 돌아갈게.”

그 말을 끝으로 베르고는 뒤를 돌아봤다. 펭귄이 한아름 안고 있던 안건은 크로거다일의 몫이었다. 여기서 또 한번 걸러진 문서가 왕자에게 오르는 것이다. 한데 펭귄은 못 박힌 듯 서있기만 했다. 크로커다일도 빤한 시선을 보내던 그때 베르고가 다가와 펭귄을 툭 건드렸다.

“너 뭐하는…….”
“오빠!!!”

베르고가 정신 차리라며 한마디 할 때 펭귄이 소리쳤다.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두 사람을 돌아보는 모양새가 부산스럽다. 그러다 뒤늦게 제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깨달은 녀석의 얼굴이 빨개졌다. 말이 나온 건 크로커다일이었다.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베르고.”

그는 취향을 존중한다는 뉘앙스였다.











한조각
[Code: d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