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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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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년간 모르고 살아왔던 감정들이 불쑥 찾아온다 한들, 고집스런 인생은 쉬이 변하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순환이, 나아지지 않는 형편이 그것을 반증했다. 로버트는 전처럼 묵묵히 생애를 꾸려나갔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벌떼와 마주해야 했다. 수십, 수백마리의 날개 소리가 한데 뭉쳐 가슴에 달라붙었다. 사색이 깊어질라치면 웅웅-소리가 들려왔다. 과제를 하다 막히거나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리조트 복도에서 청소기를 돌릴 때도 어김없이 번잡한 날갯짓 소리가 지겹도록 파고들었다가 휑한 구멍만 남기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자기야 이게 뭐야 네그로니로 달라했잖아."

 

바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애교 섞인 콧소리로 방금 나온 술잔을 가리키며 메이슨에게 불평 아닌 불평을 쏘았다. 가게에 한 주걸러 오는 단골 중 한명이었는데 오로지 메이슨이 일할 때 와서 그가 주는 술만 받았다. 실수임이 명명한 일에 메이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잭은 지금 달달한게 더 필요하잖아요. 이거 이름이 뭔지 알아요?"

"뭔데?"

 

방금까지 투정하던 것도 잊고 잭이 호기심 어린 눈을 치켜떴다. 메이슨이 그런 그에게 허리를 숙이며 속삭였다. 달콤한 윤기가 도는 말투와 매력적인 보조개도 빼놓지 않았다.

 

"잭 허니(Jack Honey)요."

 

잭의 입꼬리가 늘어날 대로 늘어나고 눈가는 홍채의 흔적도 보이지 않을 만큼 접혔다. 뭐야 정말-하는 앙탈에 걸걸한 웃음이 섞여들었다. 미샤가 옆에서 남몰래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이슨은 금세 자신의 일상을 조잘대기 시작한 잭에게 장단 맞추느라 바빴다. 사실 그로 인해 생겨난 단골손님은 잭뿐만이 아니었다. 이 가게의 드높은 수요 가운데에는 메이슨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릇 장사란 업종을 차치하고서라도 유입만큼이나 유지가 중요한 법이었다. 메이슨의 외모와 붙임성 좋은 영악함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쟁취할 수 있었다. 속이 불편한 듯한 표정을 좀처럼 풀지 못하는 미샤도 그의 수완만은 폄하하지 못했다. 순리가 행하듯 애정을 빼앗기고야 마는 사람들과 그것들을 욕심껏 주워섬기면서도 절대 포화에 이르지 않는 그를 볼 때마다 로버트는 다시금 벌떼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몇곱절은 더 광대해져 자칫 경적 같았는데, 메이슨이 타인의 애정에 일말 거리낌 없게 될 수 있도록 그의 태초부터 비할 수 없는 원초적 사랑을 주었을 남자가 어느 때보다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철부지마냥 널브러진 채 잠든 아들을 향해 내리는 눈빛이 로버트의 기억엔 아직 선연히 남아있었다. 별다른 목마름 없이 자랐음에도 그 장면을 불러올 때면 로버트는 부러움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러나 대상은 메이슨이 아니었다. 그걸 헷갈릴 정도로 로버트는 어리석지 않았고 감정의 정의 또한 뚜렷이 인지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남자의 여생에 옆구리를 붙이고 나란히 걸어갈, 본 적은 없지만 여러모로 완벽할 게 분명한 여성을 경외 섞인 부러움으로 보고 있었다. 저가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염치를 모르고 자생하는 감정을 어찌하랴. 그 방도는 로버트 자신에게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색이 바래고 버석해져 떨어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애들아, 잠깐만."

 

옷을 갈아입고 퇴근할 채비인 직원들을 별안간 사장이 불러 모았다. 간판불을 내린 로버트가 뒤늦게 그의 가까이 서자 사장의 보기 드문 어두운 얼굴이 보였다. 선뜻 입을 떼기가 어려운지 분주한 동공으로 머뭇거리는걸 모두 아무 말 없이 기다린 것도 그 이유였다.

 

"음,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네. 평생을 잔병치레 하나 안 겪으신 분인데 갑자기......아무튼 너희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일주일 정도 가게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 더 걸릴 수도 있고....모르겠다, 참."

 

착잡하고 당혹스러운 한숨이 길게 흐르자 숙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적막을 환기시키는 재주가 남다른 메이슨도 잠자코 분위기에 따랐다. 섣불리 말문이 열리지 않는 상황에서 사장과 제일 오래 알고 지낸 미샤가 다정한 위로의 말투를 꺼냈다.

 

"가족이 우선이지 뭐가 더 있겠어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세요."

"맞아요 사장님. 그리고 너무 걱정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그래, 그래 고맙다. 상황 보고 되도록 빨리 정리해서 연락줄게."

 

눈치좋게 잇따른 메이슨의 말까지 듣고나서 사장은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샤와 메이슨은 복닥거리는 기류로 탈바꿈하기 위해 가게문을 나서고도 한참동안 쉼없이 조잘거렸다. 결국 기가질린 사장이 너네 집 안가니? 제발 좀 가라. 하고 성화를 부리고 나서야 둘은 마지못해 뒤돌아 흩어졌다. 거리의 어둠 속을 씩씩하게 뚫어 나아가는 뒷모습들에 사장은 픽-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 저었다.

 

"너도 뭐 할 말 있냐?"

 

그때까지도 발을 붙이고 조용히 남아있던 로버트에게 사장이 물었다. 위로든 뭐든 얼른 하고 꺼지라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말투와 눈빛이었다. 로버트는 어깨에 둘러진 가방끈을 괜히 한번 고쳐잡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냥 잘 다녀오시라구요."

"오냐, 그러마."

 

사장은 로버트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면서도 따스한 투로 말했다. 존재감을 티 내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아이가 사장은 늘 신경 쓰였다. 메이슨 덕에 평일은 주말보다 바쁜 날이 됐는데 다부진 덩치의 제이미도 가끔씩 힘이 들어 굼뜨는 일을 그보다 한참 마르고 살갗이 여린 로버트는 내색 한번 비추질 않으면서 늘 빠릿하게 해냈다. 지금도 입바른 위로를 삼키고 덤덤히 인사만 건넸을 아이는 이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얼렁 가기나 해라."

"네."

 

로버트가 헝클어진 머리를 내리누르며 돌아섰다. 듬성듬성 나 있는 가로등 빛이, 높다랗게 펼쳐진 도심의 밤하늘에 별대신 자리 잡은 빌딩탑이 집으로 향하는 내내 로버트의 발자욱을 따라다녔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씁쓸한 사장의 모습은 오래도록 마음에 밟혔다. 작달막한 방 한구석 위로 등을 붙인 로버트는 비눗방울처럼 걷잡을 수 없이 퐁퐁 떠오르는 생각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무수한 방울 안에는 병색이 완연한 부친의 손을 애처로이 붙잡은 사장도, 고향에서 기울어진 가세를 간신히 받치고 서 있을 그의 부모님도 고여있었다. 그 밖에 화려한 불을 뿜는 거리 속 홀로 초라하게 서 있을 가게의 모습과 최대한으로 어림잡은 가게의 이주치 시급을 뺀 월급 숫자도 저변에 부유하고 있었다. 졸음이 정신 끄트머리만 남기고 먹어 치워갈 무렵, 아주 찰나로 남자의 존재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곧 아득히 사라지고 말았다.

 

 

 

저녁을 먹으며 구인 광고를 훑어내리던 로버트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눈을 덮었다. 가게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다른 일을 알아볼까 했지만 며칠째 뒤져보아도 그만큼 단기로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게다가 기간을 명확히 확정 짓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그럴듯한 공고가 눈에 띄어도 망설여졌다.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받치고 내리감은 눈으로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있던 로버트는 불현듯 지쳐버린 자신과 조우해야 했다. 두 달이 가까운 시간 동안 쉴 틈 없는 나날을 이어온 그였다. 더해서 최근엔 생경한 심적 체력까지 소모해야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만히 닫았던 시야를 열자 쏟아질 듯 낮은 천장이 보였다. 그곳에 발라놓은 벽지가 야금야금 머금었을 세월의 찌꺼기를 헤아리며 그는 생각했다. 아, 조금만 쉬어볼까.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메이슨이었다.

 

-오렌지, 놀자!

 

이 무슨 질기고도 질긴 우연이란 말인가. 로버트는 저돌적으로 투척 된 메이슨의 음성에 놀라움과 더불어 섬찟한 예감이, 퍼지는걸 느꼈다. 아마 휴대폰이 그토록 간질증성을 일으킨 건 우연의 끈덕짐을 그보다 먼저 알아채고 진저리가 나서이지 않을까.

 

"지금?"

-응. 다른 사람들도 다 온대.

 

메이슨이 말하는 다른 사람들이 가게의 직원들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로버트는 끼고 싶지 않았다.

 

"글쎄, 오늘은 좀......"

-왜? 무슨 일 있어?

"어어, 과제가......"

-과제? 너 다 끝났다며.

"으응. 그렇긴 한데-"

 

예감이 로버트를 관통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핑계로 내세울 그럴듯한 거짓말엔 영 소질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둘러 거절하려는 그의 서투른 낌새는 금방 들통이 났다.

 

-그러지말구 그냥 와라, 응? 우리 얼굴 본지도 오래됐잖아. 그리고 사장님이 미샤 누나한테 연락이 왔대. 궁금하지 않아?

"괜찮으시대?"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궁금하면 우리 집으로 와. 어딘지 알지? 그럼 오는 걸로 알고 끊는다, 이따 봐 오렌지!

 

몸을 굳히고 너네 집? 하고 되묻는 로버트의 목소리는 평소의 성량보다 배는 컸지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상대방만큼이나 멋대로 끊긴 전파를 당혹과 절망으로 인해 한동안 넋 놓고 붙잡던 로버트가 책상에 왼쪽 볼을 갖다 박았다.

 

"어떡하라는 거야......"

 

딱딱한 책상에 볼이 눌린 탓에 불쑥 튀어나와 버린 입술이 막막함을 웅얼대며 토해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대책 없는 강단과 터무니없는 친화력을 가진 메이슨을 진심으로 미워하고 싶었다. 그러나 로버트 플로이드가 예기치 못한, 그것도 아주 허망한 결말이 되어버린 첫사랑을 겪어버린 것에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사랑에는 많은 것들이 탓할 주체가 되지만 그 중 정말 잘못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운명적이라 생각했던 남자와의 만남을 이루어지게 한 메이슨, 메이슨을 만난 일자리, 일자리를 구하게 된 형편. 이 모든 것에 불만을 토하면서도 메이슨의 집까지 가는 경로와 시간을 계산하는 간사한 머릿속처럼 말이다. 그도 이러한 모순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세 번째 거대한 저택 앞에 섰을 땐, 스산한 새벽도 아니고 화사한 낮도 아닌 어슴푸레한 저녁이었다. 친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 사는 집을 이렇게 여러 번 방문한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손님으로서 공식적인 초대를 받은 것이 세 번째 방문에서야라니. 뻣뻣하게 굳어 초인종을 누르는 로버트의 품 안엔 책 두 권이 가지런히 안겨 있었다. 메이슨의 타고난 성질에 미루어 보아 잔뜩 상기된 말투에서 거창한 디너파티가 아니라는 것쯤은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오늘도 로버트가 벨을 울리고 가장 먼저 반겨주는 사람이 남자라면 허름한 빈손으로 마주하기 싫었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는 맛볼 수 없었던 과일을 사기엔 사정이 빠듯했고 요리에도 순 허당이었다. 그렇게 안경이 벗겨질 때까지 머리를 벅벅 문지르고 괴롭히며 고심한 결과가 고작 책 두 권이었다. 한 권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전공 관련한 논문들과 재판 사례를 엮은 것이고, 한 권은 사랑을 자각하자마자 급하게 사들였던 로맨스 책들 중 하나였다. 내용은 인쇄소에서 일하는 남자와 식료품점 딸이 만나 두세 번의 만남을 거치고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되는, 그런 고루하고 평범한 단편이었는데 개연성도 미흡하고 문장은 미사여구들 뿐이어서 마지막까지 뭐가 그렇게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책을 덮고도 로버트는 그들을 생각게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결말에 다다라서야 혀가 얼얼할 정도의 키스를 하고 웃는 그 행복감만큼은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책은 여전히 아리송했으나 그 속의 연인을 향한 부러움을 앓던 로버트는 현저히 낮을 확률을 상상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를테면 아들의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할 남자를. 호기심이 일어 손가락을 굽히고 책을 꺼내 펼쳐볼 남자를.

 

 

 

"오렌지- 왜 이리 늦어!"

 

후- 후- 현관 앞에 서는 짧은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몰아쉰 숨이 턱 막힐 정도의 허탈함이었다. 메이슨이 문을 홱 열어젖힘과 동시에 반색 어린 타박을 놓았다. 로버트는 실망감에 굳어지는 양 볼을 올리려 애쓰며 멋쩍은 사과를 했다. 메이슨의 반가운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웬 책?"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영국 판사가 쓴 책인데 도움이 많이 됐거든. 다른 한권은, 그냥......"

 

로버트는 무어라 말을 이을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모든 페이지에 사랑이 적혀있는 책을 들고 온 저의를 그 자신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메이슨은 잠시 머리통을 갸웃대며 의아해하더니 이내 곧 그에게서 책을 빼 들곤 고맙다며 웃었다. 지난번과 같이 로버트는 집주인의 뒤꿈치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섰다. 조금 달랐던 건 로버트는 앞서 걷는 이의 얼굴을 훔쳐보지 않았고, 복도 왼쪽의 두 번째 방 대신 깊숙한 곳 정면으로 패인 문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메이슨이 계단을 오르며 조잘댔던 것처럼 방 안엔 로버트 빼고 이미 모두가 와 있었다.

 

"오랜만이야, 오렌지."

"오랜만이에요, 미샤."

 

창고 용도로 쓰이는 듯한 방이었다. 낡았지만 내핍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 골동품들이 먼지 하나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샤는 여느 날과 같은 느슨한 텐션으로 모두가 둘러앉은 가운데에서 로버트를 향해 팔을 흔들어 보였고, 로버트도 입꼬리를 살포시 올려 인사했다.

 

"로버트, 미샤 옆에 앉아. 얼르은!"

"응? 으응..."

 

노바가 로버트의 팔을 미샤 옆으로 잡아끌었다. 첫 만남 때 어깨를 얼얼할 정도로 두드리던 그 억센 손길에 로버트는 무력하게 떠밀리고 말았다. 날갯죽지까지 눌러대며 기어코 그를 자리에 앉힌 그녀가 뿌듯한 표정으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엉겁결에 한쪽 무릎만 꿇은 채 어정쩡한 자세를 부동하고 있는 로버트의 정신을 미샤가 바닥을 툭툭 치는 손짓으로 환기시켰다.

 

"경쟁자를 하나라도 줄이려는 모양인데, 신경 쓰지 마."

 

제대로 엉덩이를 붙이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고 미샤가 목소리를 낮췄다. 속삭임에는 비웃음과 애잔함이 같이 느껴졌다. 로버트는 어쩔 수 없는 반사작용으로 노바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메이슨의 어깨에 붙어 저번보다 더욱 활기찬 생기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참, 미샤. 사장님은 뭐라셔요?"

"응? 메이슨이 말 안 했구나? 많이 안정되셨다나 봐. 그래도 가게 문 열려면 이주는 더 있어야 한다는데."

 

다행이다. 로버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지막히 움츠러드는 소리로 말했다. 메이슨과의 통화에서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육성이 주는 확신은 또 달랐다.

 

"자, 로버트도 왔으니까 다시 시작하자."

 

제이슨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로버트의 등장으로 조금씩 분산되었던 분위기를 모았다. 각자가 내뿜는 공기가 어쩐지 예열되어 떠다니는 것 같더라니 그가 오기 전 벌써 몇 잔은 거나하게 들이킨 듯했다. 제이슨이 건배를 위해 술잔을 들어 올리자 당황한 로버트는 급한 마음에 두리번거리다 그의 뒤에 널브러진 빈 병을 잡고 말았다. 장난기로 번들대는 시선들이 그에게 쏠리더니 제각각 다른 자세로 쓰러져 웃음을 터뜨렸다. 로버트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하하- 오렌지, 그만큼 마시려 작정한 거야 아님 벌써 취한 거야?"

 

메이슨이 웃음 끝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미샤가 빈 컵을 찾아 술을 따르고 로버트 손에 쥐여 주었다. 노바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휘파람을 불었다. 잘 어울리네- 빙글대기도 했다. 미샤는 들은 체도 않고 술을 들이켰다. 로버트도 미세하게 파도치는 호박 빛깔 액체를 들여다보다 약을 삼키듯 고개를 훽 젖혀 마셨다. 오오- 감탄하는 소리가 주위에서 놀리듯이 터져 나왔다. 뜨겁게 달궈진 돌멩이가 식도를 타고 배꼽 바로 위까지 굴러가는 게 느껴졌다. 나쁜 기분도, 좋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때 노바가 게임을 하자며 로버트가 들었던 빈 병을 가리켰다. 동의의 뜻으로 다들 바투 붙어 앉았다. 로버트는 입안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알코올 내를 간신히 참으며 그들을 따라 했다.

 

 

 

1시간 가까이 병을 돌렸으나 로버트가 있는 방향으로는 주둥이가 당최 오질 않았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야기를 듣던 그는 술이 떨어지자 내심 안도했다. 자신에겐 흥분을 돋울만한 이야깃거리도, 유려한 말솜씨도 없었기 때문이다. 술을 가지러 내려가는 메이슨의 뒤를 로버트가 얼른 붙었다. 둘만 있을 기회를 엿보던 노바가 샐쭉이는 눈치가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어쩌면 1층에서 볼 수도 있을 얼굴이 들뜬 취기에 아른거려 참을 수 없었다.

 

"일단 세 병만 챙겨갈까?"

"으응."

"과자 몇 개도 가져가야겠다."

 

오렌지, 뭐해? 메이슨이 넘겨준 과자 봉지들을 한 아름 품에 안고 두리번대던 로버트가 놀란 듯 퍼드득 몸을 떨었다.

 

"저어- 메이슨."

"응?"

"부모님은 안 계셔?"

"당연히 없지. 아빠가 알면 나 죽을지도 몰라."

 

그렇구나. 로버트는 수긍하는 척을 했다. 메이슨이 말하는 것처럼 남자가 아들에게 큰 화를 쏟아부을 것 같진 않았다.

 

"걱정 마. 아빠는 내일까지 안 와."

 

시무룩하게 구겨진 얼굴을 잘못 해석한 메이슨은 엉뚱한 안심을 심어주었다. 어느 새 방까지는 몇 걸음 남아있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소음이 문에 막혀 웅웅거렸다. 문지방을 넘어서자 구석에 메이슨이 대충 던져놓은 그의 책 두 권이 보였다. 한순간 로버트는 주체 못할 감정에 눈총까지 받아 가며 메이슨의 뒤꽁무니를 쫓은 저 자신이 처량해 자기혐오까지 겪었다. 자리에 앉은 로버트는 누군가 채워놓은 술잔을 다시 한번 벌컥 들이켰다. 혀만 조금 아릿할 뿐, 처음과 같은 열감은 없었다.

 

 

 

눈 안에 갇힌 모든 것들이 아지랑이가 되어 흩날렸다. 모든 소리는 그의 고막을 두드리기만 할 뿐, 뚫지는 못했다. 로버트는 뻑뻑한 눈두덩이를 부벼보기도 하고 물을 빼내듯 귀를 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자꾸만 침잠해가는 게 감각인지 의식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자 로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이슨은 노바와 올리비아를 청중으로 두고 떠들고 있었고 미샤와 제이미는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떠들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로버트의 부재는 오래도록 발견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잠시 화장실을 위해 자리를 뜨는 사람처럼 인사 없이 최대한 간결한 몸짓으로 방을 나섰다.

 

"이제 가니?"

 

계단을 내려올 때도 신발을 찾아 발을 끼워 넣을 때도 휘청임 한번 없던 그의 몸이 난데없는 음성에 크게 휘어지다 주저앉았다. 아일랜드 식탁에 반쯤 비운 물컵을 내려놓은 남자가 로버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을 가득 채운 적막 속 들리는 남자의 느릿한 옷자락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로버트는 남자가 코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자신의 소망을 비디오처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손이 참 많이 가네."

 

남자는 로버트의 허리를 감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동안 들었던 다정한 어조는 아니었다. 서늘한 남자의 체향이 예고도 없이 훅 끼쳐오고 로버트에게 사랑을 일깨워줄 수 있도록 이바지한 단단한 가슴팍이 그의 손날 부분에 닿아 있었다. 그때 위층에서 일제히 터진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위쪽을 쳐다보았지만 로버트는 시선을 어디에 둘 지 몰랐다. 쯧. 구부러진 미간으로 남자는 혀를 찼다. 단순히 침입자들에 대한 짜증이라기보다는 피곤에 절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죄송, 죄송해요."

 

로버트는 그때까지 애매하게 벗어나지 못한 남자의 품에서 멀어졌다. 둘 사이의 간격은 벌어졌지만 코끝에 붙은 체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바로 해 푹 숙이고 있어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혼내줄까."

"네?"

 

낮은 목소리가 섬짓하게 내려앉았다. 로버트의 눈과 남자의 눈이 맞닿자 어두운 녹안이 그의 걸음걸이처럼 느릿하게 로버트의 얼굴을 훑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킨 로버트는 다시 내보내는 법을 망실한 듯 그대로 굳어졌다. 나체로 서있는다 하더라도 이토록 파헤쳐지는 느낌은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메이슨 말이야. 보나 마나 내가 없다고 일을 벌였겠지."

 

 남자는 피식 웃더니 삽시간에 한층 가벼운 분위기로 전환됐다. 그는 반 쯤 얼이 나간 로버트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계속 있으면 너도 혼날 텐데."

 

 로버트가 불에 덴 듯 볼을 부여잡고 목을 뒤로 물렸다. 그 일련의 행동에 남자는 입꼬리가 패이도록 올리며 웃음 지었다. 로버트는 신발에 발을 제대로 끼우지도 못하고 허둥대다가 급박한 심정으로 뛰쳐나왔다. 그 후에도 그는 시리고 메마른 공기를 한참이나 빠르게 갈랐다. 남방 하나만 걸친 몸은 차가워지는데 녹색빛이 닿았던 얼굴은 점점 뜨거워져 갔다. 아까 마신 첫 모금의 술이 다시 얼굴로 역류하여 곳곳에 뻗치는 것 같았다. 폐가 심장처럼 느껴질 만큼 뛰던 로버트는 그 자리에 멈춰 무릎을 접고 앉았다.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려 침을 꼴딱꼴딱 넘기면서도 좀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어떡해에......"

 

 로버트는 울먹이며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명백하게, 확실하게, 분명하게 거대한 사고에 휘말렸는데 대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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