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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8 12:58
전편
https://hygall.com/611423220
밤이 깊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도 가라앉아갔다.
다툼의 잔재가 어지럽게 널린 마당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무수한 건물을 남김없이 침범하고 털었다.
그 중 태풍의 눈처럼 운몽 강씨의 대청에 모인 사람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였다.
단번에 선부에서 운몽 강씨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을 쫓아내는 것이 계획은 아니었다. 뜻밖에 삼독성수가 신속하게 후퇴를 해 버렸는데, 강징을 둘러싸고 물러간 무리들은 마치 산 속으로 녹아들어가버린 것처럼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죽였거나,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자들을 생포한 수는 채 1/5도 되지 않는 듯했다.
연화오를 점령하긴 했지만 삼독성수의 팔 하나도 쳐내지 못한 형국이라 도대체 뭘 해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가 별다른 저항 없이 신속하게 물러나버린 행동도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연화오를 뒤지던 자들이 속속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던 것과 다르게 연화오의 내부에서는 전쟁 준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섭명결의 부사가 손을 모으며 낭랑하게 말했다.
“집무실을 다 뒤집어 엎어 보았지만 수상한 장부는 찾지 못했습니다.”
곧이어 들어온 고소 남씨의 수사들 몇몇이 비슷한 내용을 전했다.
“딱히 군량미나 전쟁을 준비하는 무기들은 없었습니다.”
이는 삼독성수가 수진계 전체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와는 상반되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남망기는 연신 말없이 수염만 쓰다듬는 숙부의 뒤에 서서 가만히 보고 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조용히 물러나와 모습을 감추었다.
선문가들의 연합 군대는 밤이면 완전한 어둠에 잠기는 호수 너머의 숲 속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망기는 어검을 하여 새까맣게 어두운 가운데서도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어 지상으로 내려갔다.
숲은 잠시 사람들이 모이는 지점으로 사용되었을 뿐, 죄다 연화오로 몰려가버린 후에는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다만 남망기가 거침없이 나아가서 도달한 장소에는 두 명의 고소 남씨 수사가 서 있었다.
남계인은 이까지 조카를 데려오면서도 끝내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영력을 봉쇄한 다음, 두 명의 사람을 남겨 그를 지키게 했다.
남망기가 다가가자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남희신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이 바라보는 두 눈 위의 이마가 맑게 비어 있었다. 남망기는 말액을 두르지 않은데다 몇년 새 어른이 다 된 형장이 낯설었다. 그렇지만 담담한 시선을 마주하자,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보아주던 부드러운 감정이 희미하게나마 읽히는 듯했다.
“내가 맡을 테니, 연화오로 가거라.”
짤막한 명을 들은 수사들은 고개를 숙인 다음 날렵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수사들이 가버린 후,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몰아쳤다. 어둠이 짙은 가운데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흩날리자 흡사 먹물이 쓸어내리는 것 같았다.
남망기가 입을 열었다.
“형장. 말액을 어찌하신 겁니까?”
엄격한 머리가 단순한 규칙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본래의 가문을 완전히 저버린 것인지를 묻고 싶은 것일 터였다.
“내 말액은 부인의 것이다.”
남희신이 도로 시선을 돌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다 붙박으며 대꾸했다.
남망기는 아무 말없이 남희신의 옆얼굴만 바라보았다. 마치 그 얼굴에서 답을 구하는 듯이.
이윽고 그가 대략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희신은 굳어버린 듯 가만히 있었지만, 강징이 수하들을 끌고 잠적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가볍게 목울대가 움직였다.
남망기는 말을 하는 동안 점차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낯선 감정은 물러나고, 예전의 감정이 돌아왔다.
그의 눈에 남희신은 예전과 같이 믿음직스럽고 선량한 형장으로 보였다.
“형장, 삼독성수를 믿으십니까?”
“믿는다.”
남희신이 잘라내듯 뚜렷하게 대답하자, 남망기가 머뭇거리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때,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았던 일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물에도 불에도 꿈쩍 않는 함광군이었지만, 남희신이 매섭게 노려보자 움찔하며 피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인은 위험천만하게 화살이 쏟아지는 중에도 서슴없이 아이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것을 어찌 감히!”
이어서 무섭게 번쩍이는 눈으로 남희신이 다그쳤다.
“망기, 너는 나보다 많은 경험을 했을 테니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보다 경험은 없어도, 부인만은 잘 안다.
네가 네 눈으로 부인이 포악한 짓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마치 도전하는 듯 빛나는 남희신의 시선을 맞받아보는 남망기의 눈에도, 두려움이나 흔들림은 없었다.
남망기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족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함께 날아올랐다.
“삼독성수는 놀라서 물러난 게 아니오. 아주 침착하고 똑똑하게 수하들을 챙겨 사라진 것이외다.”
무척 추운 날씨임에도 건물의 문이며 창이 활짝 열려 있었고, 바깥에서 수비하고 있는 수사들에게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잇달아 터져나왔다.
“분명 산 속에 숨어 있소. 어디 굴이라도 파 놓은 것이겠지.”
연화오의 뒤에 서 있는 산은 아주 크고 넓었다. 그래도 어검으로 날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적을 피해 그 많은 인원이 도망갈 길은 없었지만,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어 산을 뒤지게 해도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도시 찾지 못했다.
“암, 산 속에 있을 것이 틀림없지. 분명 그의 질자가 걱정되어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일 거요.”
누가 청하지 않아도 편한 상좌에 앉은 금광선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이제 어쩌지요? 그 넓은 산을 수색해서 찾아낼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든 인원을 총동원하여 끝장을 내야지.”
“조심합시다. 혹시 어딘가 집안으로 연결되어,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닐까요?”
주요 세가의 인물들은 분분이 한 마디씩 던졌지만 도움이 되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되레 소리높인 외침에 숨길 수 없는 불안감과 조급함이 나타나 있어, 분위기는 더욱더 나빠지기만 했다.
“진정들 하시오. 신중해야 합니다, 이미 기습에 실패한 거나 다름없으니.”
가만히 있던 섭명결이 무겁게 입을 열어 말했다.
“요사스러운 자 같으니, 이 오밤중에 깨어 있긴 왜 깨어 있었던 건가?”
“그런데... 삼독성수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어찌된 거요?”
“맞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괜히 나서서 벌집을 쑤신게 되지 않소?”
문득 겁먹은 느낌이 든 의견이 거론되자, 사람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는 것 같았다. 수진계 전체가 연합해도 삼독성수를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일이 이렇게 되자 전진도 후퇴도 하기 어려운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애초에 그 정보는 어디서 들어온 겁니까?”
“그리고 천산의 습격 사건은? 그건 삼독성수의 짓이 맞는 거요? 누구 알아낸 사람 없소?”
점점 불안한 소리들만 터져나오자, 금빛 소매를 들어올린 금광선이 소리를 높여 외쳤다.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 하시오! 그런 게 뭐가 중요합니까? 아무튼 삼독성수는 횡포를 부려왔으니, 언제든 그를 처리하는 건 정당한 일이오!”
“처리하지 못하면? 음철의 위력을 다들 봤잖소!”
이미 좌중에 짙게 깔린 불안은 누를 수가 없어, 웅얼거리는 소리가 뒤를 물고 늘어졌다.
“걱정할 것 없소, 우리는 그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그가 여란을 애지중지하니, 그 아이를 내세우면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거요.”
금광선이 턱을 세우면서 오만하게 내뱉은 소리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일변은 안심하고, 일변은 못마땅하게 여기는 느낌이었다.
남계인이 말했다.
“대의를 위한 일이라곤 하나, 어찌 어린애를 희생시킨단 말입니까? 무엇보다 금여란은 당신의 손자가 아닙니까.”
금광선이 턱을 쓰다듬으며 교활하게 웃었다.
“당연하신 말씀을. 내가 어찌 손자를 해치겠소? 다만 그를 속여 유리한 점을 이끌어내자는 것뿐이오.”
그들의 문답을 들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더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배로 늘어나고, 옆 사람과 의심스러운 듯 대화하는 목소리로 어지러워졌다.
그럴 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어 젖혀지자, 눈이 둥그래진 사람들의 시선이 한 점에 모였다.
“희신! 누가 풀어준 거냐! ...망기, 네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던 남계인이 말을 흐리며, 남희신의 바로 뒤에 따라 들어오는 남망기에게 손가락을 들었다.
남희신은 서슴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왔다.
그가 미간에 은은한 노기를 띄우며 외쳤다.
“도대체 뭣들 하는 짓입니까?”
남희신의 호통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떠들어대던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남희신이 볼모로 운몽 강씨에 잡혀 있는 줄로만 알았지, 그가 삼독성수가 정에게 주었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희신이 거칠게 몇 마디 더 윽박지르자, 사람들은 대번에 상황을 알게 되었다.
“부인은 아무도 공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증거도 없으면서 함부로 남의 선부에 쳐들어온 겁니다!”
“입 다물거라!”
새파랗게 질린 남계인이 나무랐지만 남희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는 더이상 고소 남씨가 아닙니다. 운몽 강씨입니다! 그러니 운몽 강씨를 해치겠다면 저도 죽이십시오!”
“조용하지 못하겠느냐! 희신!!”
남희신은 아랑곳없이 주위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다그쳤다.
“그가 사일지정 이래로 누군가를 해친 적이 있습니까? 말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충격에서 깨어나며 점차 남희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연화오에서 예상했던 불온한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그의 말이 거슬리면서도 귀에 들어박혀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수진계 전체에 강징에 대한 불신과 공포감이 만연해 있는지라 사람들은 그가 뭔가 포악한 짓을 한 적이 있지 않나 머릿속을 더듬어 보며 술렁거렸다.
그렇지만 기실 강징은 금자훈과 남희신을 볼모로 잡았던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속으로 얼마나 불만에 차 있든 제발이 저려 고분고분 따랐기 때문에 해를 끼칠 이유도 없었다.
다만 불야천에서 음철을 지니고 기산 온씨를 쓸어버리던 강만음의 모습이 너무나 무시무시했었고, 그 후 그가 계속 오만하게 굴어왔기 때문에 사람들 스스로 눈치를 보며 굽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강징의 언동이 아무리 포악해도 기산 온씨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을 궂힌 적이 없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가 공격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쳐들어왔는데, 그것조차 사실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제풀에 강징에게 앞을 내어주고 손해를 보거나 공물을 바쳐왔던 사람들은 그래도 악감정을 앞세워 설득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남계인과 같이 머리가 있고 인품이 있는 사람들은 남희신의 말에 한자락 의심이 솟아나며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너는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냐?”
남계인이 갈등 깃든 말투로 묻자, 남희신이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그에게 사과하십시오! 그의 가문이 약화되자마자 핍박했으니, 기산 온씨와 다를 게 무엇이었습니까?”
“희신!”
조카로부터 가차없는 질타를 듣고 얼굴이 붉어진 남계인이 꾸짖자, 남희신이 그를 향해 돌아서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숙부! 그가 제 목숨을 구해준 일을 잊으셨단 말입니까?”
남희신의 말에 사람들이 가볍게 숨을 삼키며 또 한차례 술렁거리는 물결이 퍼지자 남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는... 그때 무척 어리지 않았느냐.”
남희신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객이 들어 저를 해치려고 했는데, 부인께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비난하고 겁박했단 말입니다. 저는 다 보고 들었습니다!”
현재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가주들 중에는 바로 그때 강징을 둘러싸고 몰아붙이던 사람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어찌할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며 뭘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어 하는 사람들에게 홱 돌아선 남희신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들은 도대체 왜 나를 부인에게 보냈습니까! 제가 그를 염탐하고 배신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는 이미 너무 많이 배신당했습니다. 저는, 저만은 절대로 그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정히 싸우겠다면 저를 놓아주십시오! 부인에게 돌아가야겠습니다!”
“남환!!!”
남계인이 무섭게 불렀지만 남희신은 두 번 다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금방이라도 밖으로 나가 버릴 것처럼 발을 내딛자, 남계인이 손을 내저으며 소리질렀다.
“그를 붙잡아라!”
깜짝 놀란 사람들이 물러나는 동시에 명을 받은 고소 남씨의 수사들이 중앙으로 달려나왔다.
급박해진 상황에 놀란 남망기가 피진을 뽑아들었지만 아무래도 같은 가문을 공격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곧장 남희신이 뒤로 소매를 흩뿌리자 남망기는 한가닥 강하게 밀려오는 돌풍에 밀려나며 그만 손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남희신은 남망기를 밀쳐낸 다음 적극적으로 검을 든 수사들 앞에 나섰다. 남계인의 명을 받고 나온 수사들은 남망기와 마찬가지로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지만 남희신이 거푸 내력을 뿌려대자 별 수 없이 손을 움직여야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고소 남씨의 후계자는 키가 훌쩍 컸고 사내다운 풍채를 다 갖추고 있었지만 얼굴이 맑았고 불같이 따져대던 말투나 목소리에도 얼마간 싱싱한 애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숙련된 고소 남씨의 수사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청년의 움직임은 정교하며 상당한 수준의 내력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아직 패검을 뽑지도 않은 상태였다.
남희신은 온 힘을 쏟아 매섭게 움직였지만 단지 영력을 불어넣은 열빙을 사용하여 팽팽하게 맞서기만 했다. 기회를 보아 이 곳을 빠져나갈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대치하는 수사들은 빽빽하게 남희신을 둘러싸고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남희신은 어려서부터 운심부지처에서 수준높은 수련으로 기본기를 닦았고, 연화오로 떠나온 후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전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수를 상대하게 되자 금세 피로가 쌓이며 위태로운 느낌이 엄습했다.
문득 저 편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의 숙부를 힐끗 본 남희신은 개중에 약한 수사를 찍은 다음 갑자기 그를 향해 소나기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대략 남희신과 동년배로 보이는 젊은 수사는 순간 눈이 어지러워지자 긴장감이 심해지며 상대의 안위는 걱정할 여유가 없게 되고 말았다.
쩡 하고 열빙이 부서져나가는 동시에 피가 튀자 남계인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그를 다치게 하지 마라!”
잇따른 상황과 남희신이 했던 말들로 마음이 어수선해 있던 사람들은 그의 외침에 선득한 느낌이 들었다.
고소 남씨의 수사들도 남희신을 다치게 할 생각은 절대로 없었기 때문에, 그가 상처를 입자 놀라서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잠시 남희신은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피를 뚝뚝 흘렸다. 그러나 공격하던 손과 마음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의 의식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다가 한순간 번개같이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 발 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뒤쫓아갔지만 남희신은 연화오의 지리에 밝았다. 그는 재빨리 건물 뒤로 돌아나간 다음 석등이 없는 다음, 그 다음 골목으로 신속하게 미끄러져나갔다.
쫓아나간 사람들이 산 쪽의 건물 뒤로 뛰어오르는 하얀 그림자를 보았다 싶자, 그것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대청에서는 수십명이 모인 가운데 먹먹한 침묵만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계산들로 머릿속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필사적이던 남희신의 기백이 주박술이라도 건 것처럼, 그들은 움직이지 못했고 말도 하지 못했다.
바닥에는 날카롭게 뿌려진 남희신의 핏자국이 금을 그은 것처럼 남아 있었다.
이윽고 불규칙적인 숨소리를 낼 정도로 정신을 차린 후에도 사람들은 우물쭈물하며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남희신은 피가 흐르는 팔을 붙잡고 운몽 강씨들이 물러났다는 뒷산으로 파고들어가며 미친듯이 강징을 불러대었다.
그를 찾을 집념에만 사로잡힌 남희신은 어검을 할 생각도 못하고 흥분하여 사방팔방으로 헤메면서 피만 쏟았다.
마침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가물해져서 쓰러질 때, 그를 받아준 것은 거친 흙바닥이 아니라 부드러운 품 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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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도 가라앉아갔다.
다툼의 잔재가 어지럽게 널린 마당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무수한 건물을 남김없이 침범하고 털었다.
그 중 태풍의 눈처럼 운몽 강씨의 대청에 모인 사람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였다.
단번에 선부에서 운몽 강씨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을 쫓아내는 것이 계획은 아니었다. 뜻밖에 삼독성수가 신속하게 후퇴를 해 버렸는데, 강징을 둘러싸고 물러간 무리들은 마치 산 속으로 녹아들어가버린 것처럼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죽였거나,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자들을 생포한 수는 채 1/5도 되지 않는 듯했다.
연화오를 점령하긴 했지만 삼독성수의 팔 하나도 쳐내지 못한 형국이라 도대체 뭘 해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가 별다른 저항 없이 신속하게 물러나버린 행동도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연화오를 뒤지던 자들이 속속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던 것과 다르게 연화오의 내부에서는 전쟁 준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섭명결의 부사가 손을 모으며 낭랑하게 말했다.
“집무실을 다 뒤집어 엎어 보았지만 수상한 장부는 찾지 못했습니다.”
곧이어 들어온 고소 남씨의 수사들 몇몇이 비슷한 내용을 전했다.
“딱히 군량미나 전쟁을 준비하는 무기들은 없었습니다.”
이는 삼독성수가 수진계 전체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와는 상반되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남망기는 연신 말없이 수염만 쓰다듬는 숙부의 뒤에 서서 가만히 보고 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조용히 물러나와 모습을 감추었다.
선문가들의 연합 군대는 밤이면 완전한 어둠에 잠기는 호수 너머의 숲 속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망기는 어검을 하여 새까맣게 어두운 가운데서도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어 지상으로 내려갔다.
숲은 잠시 사람들이 모이는 지점으로 사용되었을 뿐, 죄다 연화오로 몰려가버린 후에는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다만 남망기가 거침없이 나아가서 도달한 장소에는 두 명의 고소 남씨 수사가 서 있었다.
남계인은 이까지 조카를 데려오면서도 끝내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영력을 봉쇄한 다음, 두 명의 사람을 남겨 그를 지키게 했다.
남망기가 다가가자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남희신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이 바라보는 두 눈 위의 이마가 맑게 비어 있었다. 남망기는 말액을 두르지 않은데다 몇년 새 어른이 다 된 형장이 낯설었다. 그렇지만 담담한 시선을 마주하자,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보아주던 부드러운 감정이 희미하게나마 읽히는 듯했다.
“내가 맡을 테니, 연화오로 가거라.”
짤막한 명을 들은 수사들은 고개를 숙인 다음 날렵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수사들이 가버린 후,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몰아쳤다. 어둠이 짙은 가운데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흩날리자 흡사 먹물이 쓸어내리는 것 같았다.
남망기가 입을 열었다.
“형장. 말액을 어찌하신 겁니까?”
엄격한 머리가 단순한 규칙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본래의 가문을 완전히 저버린 것인지를 묻고 싶은 것일 터였다.
“내 말액은 부인의 것이다.”
남희신이 도로 시선을 돌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다 붙박으며 대꾸했다.
남망기는 아무 말없이 남희신의 옆얼굴만 바라보았다. 마치 그 얼굴에서 답을 구하는 듯이.
이윽고 그가 대략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희신은 굳어버린 듯 가만히 있었지만, 강징이 수하들을 끌고 잠적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가볍게 목울대가 움직였다.
남망기는 말을 하는 동안 점차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낯선 감정은 물러나고, 예전의 감정이 돌아왔다.
그의 눈에 남희신은 예전과 같이 믿음직스럽고 선량한 형장으로 보였다.
“형장, 삼독성수를 믿으십니까?”
“믿는다.”
남희신이 잘라내듯 뚜렷하게 대답하자, 남망기가 머뭇거리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때, 아이를 방패막이로 삼았던 일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물에도 불에도 꿈쩍 않는 함광군이었지만, 남희신이 매섭게 노려보자 움찔하며 피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인은 위험천만하게 화살이 쏟아지는 중에도 서슴없이 아이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것을 어찌 감히!”
이어서 무섭게 번쩍이는 눈으로 남희신이 다그쳤다.
“망기, 너는 나보다 많은 경험을 했을 테니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보다 경험은 없어도, 부인만은 잘 안다.
네가 네 눈으로 부인이 포악한 짓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마치 도전하는 듯 빛나는 남희신의 시선을 맞받아보는 남망기의 눈에도, 두려움이나 흔들림은 없었다.
남망기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족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함께 날아올랐다.
“삼독성수는 놀라서 물러난 게 아니오. 아주 침착하고 똑똑하게 수하들을 챙겨 사라진 것이외다.”
무척 추운 날씨임에도 건물의 문이며 창이 활짝 열려 있었고, 바깥에서 수비하고 있는 수사들에게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잇달아 터져나왔다.
“분명 산 속에 숨어 있소. 어디 굴이라도 파 놓은 것이겠지.”
연화오의 뒤에 서 있는 산은 아주 크고 넓었다. 그래도 어검으로 날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적을 피해 그 많은 인원이 도망갈 길은 없었지만,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어 산을 뒤지게 해도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도시 찾지 못했다.
“암, 산 속에 있을 것이 틀림없지. 분명 그의 질자가 걱정되어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일 거요.”
누가 청하지 않아도 편한 상좌에 앉은 금광선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이제 어쩌지요? 그 넓은 산을 수색해서 찾아낼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든 인원을 총동원하여 끝장을 내야지.”
“조심합시다. 혹시 어딘가 집안으로 연결되어,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닐까요?”
주요 세가의 인물들은 분분이 한 마디씩 던졌지만 도움이 되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되레 소리높인 외침에 숨길 수 없는 불안감과 조급함이 나타나 있어, 분위기는 더욱더 나빠지기만 했다.
“진정들 하시오. 신중해야 합니다, 이미 기습에 실패한 거나 다름없으니.”
가만히 있던 섭명결이 무겁게 입을 열어 말했다.
“요사스러운 자 같으니, 이 오밤중에 깨어 있긴 왜 깨어 있었던 건가?”
“그런데... 삼독성수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어찌된 거요?”
“맞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괜히 나서서 벌집을 쑤신게 되지 않소?”
문득 겁먹은 느낌이 든 의견이 거론되자, 사람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는 것 같았다. 수진계 전체가 연합해도 삼독성수를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일이 이렇게 되자 전진도 후퇴도 하기 어려운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애초에 그 정보는 어디서 들어온 겁니까?”
“그리고 천산의 습격 사건은? 그건 삼독성수의 짓이 맞는 거요? 누구 알아낸 사람 없소?”
점점 불안한 소리들만 터져나오자, 금빛 소매를 들어올린 금광선이 소리를 높여 외쳤다.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 하시오! 그런 게 뭐가 중요합니까? 아무튼 삼독성수는 횡포를 부려왔으니, 언제든 그를 처리하는 건 정당한 일이오!”
“처리하지 못하면? 음철의 위력을 다들 봤잖소!”
이미 좌중에 짙게 깔린 불안은 누를 수가 없어, 웅얼거리는 소리가 뒤를 물고 늘어졌다.
“걱정할 것 없소, 우리는 그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그가 여란을 애지중지하니, 그 아이를 내세우면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거요.”
금광선이 턱을 세우면서 오만하게 내뱉은 소리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일변은 안심하고, 일변은 못마땅하게 여기는 느낌이었다.
남계인이 말했다.
“대의를 위한 일이라곤 하나, 어찌 어린애를 희생시킨단 말입니까? 무엇보다 금여란은 당신의 손자가 아닙니까.”
금광선이 턱을 쓰다듬으며 교활하게 웃었다.
“당연하신 말씀을. 내가 어찌 손자를 해치겠소? 다만 그를 속여 유리한 점을 이끌어내자는 것뿐이오.”
그들의 문답을 들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더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배로 늘어나고, 옆 사람과 의심스러운 듯 대화하는 목소리로 어지러워졌다.
그럴 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어 젖혀지자, 눈이 둥그래진 사람들의 시선이 한 점에 모였다.
“희신! 누가 풀어준 거냐! ...망기, 네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던 남계인이 말을 흐리며, 남희신의 바로 뒤에 따라 들어오는 남망기에게 손가락을 들었다.
남희신은 서슴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왔다.
그가 미간에 은은한 노기를 띄우며 외쳤다.
“도대체 뭣들 하는 짓입니까?”
남희신의 호통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떠들어대던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남희신이 볼모로 운몽 강씨에 잡혀 있는 줄로만 알았지, 그가 삼독성수가 정에게 주었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희신이 거칠게 몇 마디 더 윽박지르자, 사람들은 대번에 상황을 알게 되었다.
“부인은 아무도 공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증거도 없으면서 함부로 남의 선부에 쳐들어온 겁니다!”
“입 다물거라!”
새파랗게 질린 남계인이 나무랐지만 남희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는 더이상 고소 남씨가 아닙니다. 운몽 강씨입니다! 그러니 운몽 강씨를 해치겠다면 저도 죽이십시오!”
“조용하지 못하겠느냐! 희신!!”
남희신은 아랑곳없이 주위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다그쳤다.
“그가 사일지정 이래로 누군가를 해친 적이 있습니까? 말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충격에서 깨어나며 점차 남희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연화오에서 예상했던 불온한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그의 말이 거슬리면서도 귀에 들어박혀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수진계 전체에 강징에 대한 불신과 공포감이 만연해 있는지라 사람들은 그가 뭔가 포악한 짓을 한 적이 있지 않나 머릿속을 더듬어 보며 술렁거렸다.
그렇지만 기실 강징은 금자훈과 남희신을 볼모로 잡았던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속으로 얼마나 불만에 차 있든 제발이 저려 고분고분 따랐기 때문에 해를 끼칠 이유도 없었다.
다만 불야천에서 음철을 지니고 기산 온씨를 쓸어버리던 강만음의 모습이 너무나 무시무시했었고, 그 후 그가 계속 오만하게 굴어왔기 때문에 사람들 스스로 눈치를 보며 굽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강징의 언동이 아무리 포악해도 기산 온씨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을 궂힌 적이 없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가 공격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쳐들어왔는데, 그것조차 사실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제풀에 강징에게 앞을 내어주고 손해를 보거나 공물을 바쳐왔던 사람들은 그래도 악감정을 앞세워 설득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남계인과 같이 머리가 있고 인품이 있는 사람들은 남희신의 말에 한자락 의심이 솟아나며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너는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냐?”
남계인이 갈등 깃든 말투로 묻자, 남희신이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그에게 사과하십시오! 그의 가문이 약화되자마자 핍박했으니, 기산 온씨와 다를 게 무엇이었습니까?”
“희신!”
조카로부터 가차없는 질타를 듣고 얼굴이 붉어진 남계인이 꾸짖자, 남희신이 그를 향해 돌아서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숙부! 그가 제 목숨을 구해준 일을 잊으셨단 말입니까?”
남희신의 말에 사람들이 가볍게 숨을 삼키며 또 한차례 술렁거리는 물결이 퍼지자 남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는... 그때 무척 어리지 않았느냐.”
남희신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객이 들어 저를 해치려고 했는데, 부인께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비난하고 겁박했단 말입니다. 저는 다 보고 들었습니다!”
현재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가주들 중에는 바로 그때 강징을 둘러싸고 몰아붙이던 사람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어찌할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며 뭘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어 하는 사람들에게 홱 돌아선 남희신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들은 도대체 왜 나를 부인에게 보냈습니까! 제가 그를 염탐하고 배신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는 이미 너무 많이 배신당했습니다. 저는, 저만은 절대로 그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정히 싸우겠다면 저를 놓아주십시오! 부인에게 돌아가야겠습니다!”
“남환!!!”
남계인이 무섭게 불렀지만 남희신은 두 번 다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금방이라도 밖으로 나가 버릴 것처럼 발을 내딛자, 남계인이 손을 내저으며 소리질렀다.
“그를 붙잡아라!”
깜짝 놀란 사람들이 물러나는 동시에 명을 받은 고소 남씨의 수사들이 중앙으로 달려나왔다.
급박해진 상황에 놀란 남망기가 피진을 뽑아들었지만 아무래도 같은 가문을 공격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곧장 남희신이 뒤로 소매를 흩뿌리자 남망기는 한가닥 강하게 밀려오는 돌풍에 밀려나며 그만 손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남희신은 남망기를 밀쳐낸 다음 적극적으로 검을 든 수사들 앞에 나섰다. 남계인의 명을 받고 나온 수사들은 남망기와 마찬가지로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지만 남희신이 거푸 내력을 뿌려대자 별 수 없이 손을 움직여야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고소 남씨의 후계자는 키가 훌쩍 컸고 사내다운 풍채를 다 갖추고 있었지만 얼굴이 맑았고 불같이 따져대던 말투나 목소리에도 얼마간 싱싱한 애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숙련된 고소 남씨의 수사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청년의 움직임은 정교하며 상당한 수준의 내력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아직 패검을 뽑지도 않은 상태였다.
남희신은 온 힘을 쏟아 매섭게 움직였지만 단지 영력을 불어넣은 열빙을 사용하여 팽팽하게 맞서기만 했다. 기회를 보아 이 곳을 빠져나갈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대치하는 수사들은 빽빽하게 남희신을 둘러싸고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남희신은 어려서부터 운심부지처에서 수준높은 수련으로 기본기를 닦았고, 연화오로 떠나온 후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전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수를 상대하게 되자 금세 피로가 쌓이며 위태로운 느낌이 엄습했다.
문득 저 편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의 숙부를 힐끗 본 남희신은 개중에 약한 수사를 찍은 다음 갑자기 그를 향해 소나기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대략 남희신과 동년배로 보이는 젊은 수사는 순간 눈이 어지러워지자 긴장감이 심해지며 상대의 안위는 걱정할 여유가 없게 되고 말았다.
쩡 하고 열빙이 부서져나가는 동시에 피가 튀자 남계인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그를 다치게 하지 마라!”
잇따른 상황과 남희신이 했던 말들로 마음이 어수선해 있던 사람들은 그의 외침에 선득한 느낌이 들었다.
고소 남씨의 수사들도 남희신을 다치게 할 생각은 절대로 없었기 때문에, 그가 상처를 입자 놀라서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잠시 남희신은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피를 뚝뚝 흘렸다. 그러나 공격하던 손과 마음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의 의식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다가 한순간 번개같이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 발 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뒤쫓아갔지만 남희신은 연화오의 지리에 밝았다. 그는 재빨리 건물 뒤로 돌아나간 다음 석등이 없는 다음, 그 다음 골목으로 신속하게 미끄러져나갔다.
쫓아나간 사람들이 산 쪽의 건물 뒤로 뛰어오르는 하얀 그림자를 보았다 싶자, 그것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대청에서는 수십명이 모인 가운데 먹먹한 침묵만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계산들로 머릿속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필사적이던 남희신의 기백이 주박술이라도 건 것처럼, 그들은 움직이지 못했고 말도 하지 못했다.
바닥에는 날카롭게 뿌려진 남희신의 핏자국이 금을 그은 것처럼 남아 있었다.
이윽고 불규칙적인 숨소리를 낼 정도로 정신을 차린 후에도 사람들은 우물쭈물하며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남희신은 피가 흐르는 팔을 붙잡고 운몽 강씨들이 물러났다는 뒷산으로 파고들어가며 미친듯이 강징을 불러대었다.
그를 찾을 집념에만 사로잡힌 남희신은 어검을 할 생각도 못하고 흥분하여 사방팔방으로 헤메면서 피만 쏟았다.
마침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가물해져서 쓰러질 때, 그를 받아준 것은 거친 흙바닥이 아니라 부드러운 품 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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