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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6 12:15
전편: https://hygall.com/611389221
배가 육지에 닿았을 때는 아침 해가 막 떠오를 즈음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물결에 반사되며 배를 희미하게 비췄다. 선실 문이 덜컥 열리며 로건이 나왔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눈가를 문질렀다.
갑판은 텅 비어 있었다. 찰스는 어제 밤늦게까지 갑판에 앉아 있더니 지금은 방에서 깊이 잠든 듯했다.
“지금 갈 거야?”
로건이 배에서 내려 육지에 밧줄을 묶는 동안 웨이드가 뒤에서 나왔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충혈된 상태였다. 밤새 잠을 설친 티가 역력했다.
“응. 찰스는 아직 자니까 얼른 가서 약만 받아오려고.”
로건이 낮게 말했다.
“근처 병원 사람한테 미리 연락해 놨어.”
그는 밧줄을 단단히 묶고 다시 배 위로 올라섰다.
웨이드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바다를 오래 본 탓인지 약간 흔들리는 듯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했다.
“…같이 가.”
로건이 이마를 찌푸리며 그를 돌아봤다.
“뭐하러. 그냥 찰스 옆에 있어.”
“아니, 그냥.” 웨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여기에만 있었더니 토할 것 같아.”
로건은 고개를 갸웃하며 웨이드를 잠시 살펴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같이 가던지.”
그들은 간단히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배에서 내렸다. 해안가는 고요했고, 아침 공기가 쌀쌀하게 그들을 감쌌다. 웨이드는 로건의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배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육지의 소음이 낯설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아침을 시작하며 바삐 움직이고, 대화 소리가 거리 곳곳에 퍼졌다. 로건은 웨이드와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장장 일주일 동안 한 구석에 방치된 낡은 차가 그들의 목적지였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웨이드는 자연스럽게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뭐해?” 로건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긴. 운전하려고 하잖아.” 웨이드가 안전벨트를 매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길은 알고?”
“당신이 알려주겠지.” 웨이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로건은 웨이드를 한참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고 조수석으로 가 앉았다.
“네비게이션에 찍어줄게.”
“그거 고장났어.”
“뭐?” 로건이 놀란 표정으로 대꾸하며 네비게이션 화면을 쳐다봤다. 까맣게 꺼진 화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리더니 머리를 감쌌다.
“아… 씨, 진짜.”
“직접 안내해줘야겠는데,” 웨이드가 로건을 힐끔 보며 짐짓 장난스럽게 말했다.
“…일단 출발해. 빨리 갔다 오게.” 로건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죠.” 웨이드가 말하며 엑셀을 밟았다. 차는 힘차게 굴러가며 금세 바다를 등지고 육지로 나아갔다.
“야, 오른쪽!” 로건이 핸드폰 화면을 보며 급히 외쳤다.
“뭐?”
“오른쪽으로 꺾으라고!”
웨이드는 당황한 얼굴로 핸들을 움켜쥐며 속도를 줄였다.
“아… 잘못 들었네.”
“뭐하는 거야.” 로건이 핸드폰을 꽉 쥐고 짜증을 냈다.
길 안내는 계속됐지만, 오늘 웨이드는 이상하게도 방향 감각이 엉망이었다. 로건이 “왼쪽!” 하면 웨이드는 오른쪽으로 꺾고, “직진!” 하면 웬 뜬금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야, 대체 길을 어디로 가는 거야?” 로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아니, 내 느낌에는 여기야.” 웨이드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하, 저기서 왼쪽,” 로건이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왼쪽? 여기서?” 웨이드가 엉뚱하게 대꾸했다.
“아니! 저기서 틀라고!”
“아, 그래. 여기서,” 웨이드는 핸들을 돌렸다.
“야!”
한참을 그렇게 삐걱대며 길을 돌아다니자, 로건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 지도를 보며 길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차는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야, 멈춰봐.” 로건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멈추라고. 뭐 하자는 거야?”
“뭘.” 웨이드는 시치미를 떼며 핸들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너 일부러 그러잖아. 왜 그러는데.” 로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웨이드는 우물쭈물하다가 핸들을 쥔 손을 조심스레 풀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기분 좋은 사람 얼굴이 그렇게 울상인가?” 로건이 쏘아붙였다.
그 말에 웨이드는 순간 말을 잃었다.
로건은 웨이드를 한참 동안 노려봤다. 며칠 전부터 그의 신경은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웨이드와 찰스가 자꾸 몰래 무언가를 얘기하던 모습, 자신이 다가가면 입을 닫아버리던 그들. 게다가 답지 않게 우울해 보이던 웨이드와, 이상하리만치 다정하게 굴던 찰스까지. 모든 게 어딘가 불길했다.
“너…”
로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의 눈빛은 웨이드를 꿰뚫는 듯했다.
“너 내려.”
“…뭐?”
“내리라고, 이 새끼야!”
웨이드는 잠시 굳어 있더니, 로건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슬그머니 차에서 내려 뒷자석으로 옮겨탔다.
로건은 곧장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거칠게 엑셀을 밟았다. 차는 금세 속도를 내며 도로 위를 달려갔다. 그는 눈을 좁히며 도로 위로 시선을 고정했지만, 마음속엔 끊임없이 불안이 휘몰아쳤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로건의 두 손이 핸들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웨이드와 찰스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 썬시커에 남아 있는 찰스에게 있을 것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거야…” 로건은 낮게 중얼거리며 속도를 더 높였다.
웨이드의 헛된 운전 덕에 항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로건은 발을 내디디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기운. 하지만 더 이상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의 잔재.
마비.
그 짧고 강렬한 느낌이 로건의 모든 감각을 소름 돋게 했다.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지만, 그럴수록 불안은 더 크게 치솟았다. 뒤따라 내린 웨이드가 로건의 팔을 붙잡았다.
“로건, 잠깐만.”
로건은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을 거칠게 뿌리친 뒤 썬시커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로건의 발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익숙하게 몸을 침범하는 무언가가 서서히 그를 옥죄어 왔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차가운 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젠장, 찰스. 안 돼.”
로건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허리를 숙인 채 겨우 발을 뗐다. 무언가가 그를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이 마비. 그것은 오랜 친구가 발산하는 능력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그 능력의 영향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찰스의 존재감과 함께 어둡고 무거운 불길함이 그를 짓눌렀다.
지금 당장 그를 찾아내야 한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마비의 고통은 점점 더 강해졌고, 그의 마음속 불안은 한층 더 커졌다. 로건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웨이드는 몇 걸음 뒤에서 그를 따라왔다. 말을 걸려다 그저 한숨을 내쉬며 뒤를 쫓았다. 썬시커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로건의 가슴은 터질 듯이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선실의 문 앞에 섰다.
“로건!”
웨이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로건의 귀를 찔렀다. 마비로 인해 뻣뻣하게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썬시커 쪽으로 향하던 로건은, 웨이드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들어가지 마.” 웨이드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리는 공포와 애처로운 간청이 섞여 있었다.
“놔.” 로건이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려 했지만 웨이드는 더욱 강하게 그를 붙잡았다.
“너… 뭘 알고 있는 거야. 말해, 지금 당장.”
“찰스가 부탁했어.” 웨이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교수님이 부탁했다고.”
그 말에 로건은 잠시 멈칫했다. 이 모든 것이 찰스의 부탁 때문이라니. 뭔가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억눌렸던 분노와 불안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뭘!!!”
로건의 외침과 함께 세상이 휘청였다. 순식간에 그의 시야가 하얗게 번지더니, 귓가에서 웨이드의 목소리도, 바다와 썬시커의 소음도 모두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로건은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공간. 주변에는 그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적막 속에서 혼자 서 있는 느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낯설고 불안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찰스가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찰스가 아니었다. 병약한 노인이 아닌, 그의 기억 속 젊고 강인했던 찰스 자비에. 엑스맨을 이끌던 시절, 그가 믿고 따랐던 지도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찰스?” 로건이 입술을 열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게 다 무슨... 왜,”
젊은 찰스는 묵묵히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한없이 따뜻했지만, 그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뇌가 서려 있었다.
“로건.”
찰스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그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난 내 마지막을 내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어.”
로건의 눈썹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찰스는 말없이 로건을 바라봤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돼요.” 로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안됩니다.”
“로건, 나는 그럴 수 있어.” 찰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러고 싶어.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 것보다, 끝까지 내가 모두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 내 방식으로 마무리 짓고 싶어.”
“안돼요… 찰스.” 로건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간힘으로 억누르는 고통이 담겨 있었다.
찰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로건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나보다 더 방황했던 내 제자.”
그 순간 그의 심장은 거대한 바위에 짓눌리는 것처럼 쿵 하고 떨어졌다.
“희망을 놓지 말게.” 찰스는 차분히 말했다.
로건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제 희망은 당신이에요.”
찰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다른 희망이 생겼잖아.”
“절 버리시게요?” 로건이 간신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끊어질 듯했다.
“버리는 게 아니야.” 찰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따스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놓아주는 거지.”
찰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로건은 그 모습을 보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찰스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균열이 여기저기 생겨나며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건은 그곳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건 찰스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로건.” 찰스가 로건을 끌어당겨 품 안에 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했다.
“내가 원해. 로건, 자네도 날 놔줘야 할 때가 왔어.”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귓가에 닿는 따스한 숨결이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고마웠어. 잘 지내.”
로건은 찰스의 품에서 몸을 떨며 벗어나려 했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충격과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아니에요. 찰스. 안 돼요.”
로건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찰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순간, 로건의 뒤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를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로건이 현실로 튕겨져 나왔다.
“로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보았다. 웨이드였다. 웨이드는 필사적으로 로건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거 놔! 이 새끼야! 놓으라고!!”
로건이 몸부림쳤지만 웨이드는 더욱 단단히 그를 붙잡고 문 쪽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로건의 머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그의 가슴은 터질 듯했고, 찰스를 향한 절망감이 점점 그를 덮쳐왔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더 이상 생각할 힘조차 없어지려는 순간, 선실 안쪽 창문을 통해 찰스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살짝 찡그리면서도, 마지막으로 로건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손짓은 작별의 인사였다.
안녕, 로건.
“놔!!! 이거 놔!! 찰스!!! 가지 마요!!! 안 돼요!! 제발!!”
웨이드의 팔에 갇힌 로건의 외침은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웨이드는 기어이 로건을 갑판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아...아... 씨발…”
로건의 입에서 한숨처럼 터져 나온 욕설은 공허한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는 힘없이 몸을 풀고 벽에 기대어 섰다.
웨이드가 조용히 말했다. “찰스가 부탁했어. 당신이 절대 허락 안 해줄 거라고.”
로건의 눈이 불길처럼 번졌다. 순간 그의 주먹이 날아가 웨이드의 턱에 꽂혔다.
“입 다물어, 웨이드.”
웨이드는 쓰러지진 않았지만,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로건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찰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손이 문고리를 잡았지만, 열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섰다. 숨소리마저도 무겁게 맴돌았다.
이 모든 게 거짓이길 바랐다.
그는 간절히 생각했다. 그냥 꿈이라면. 지난 모든 악몽 중 하나일 뿐이라면.
그러나 그 희망은 방에서 새어 나오는 익숙한 혈향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 향기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로건의 정신을 찌르며 그를 뒤흔들었다.
손잡이를 쥔 손이 떨렸다. 두려움과 현실을 부정하려는 몸부림이 섞인 그 손은, 그러나 결국 천천히 돌아갔다.
찰스.
로건의 속삭임은 그의 마지막 기도처럼 공허한 방 안에 흩어졌다.
찰스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로건은 천천히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찰스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생명력이 사라진 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빠르게 식어갔다. 로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마치 방금 잠들어 꿈속으로 떠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 평온한 얼굴은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듯했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찰스…”
그는 간신히 말을 뱉었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그 한 단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을 쥐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이대로라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뒤에서 웨이드가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로건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로건.”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위로하려는 의도였지만, 로건의 감정을 무너뜨리는 방아쇠가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방울씩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에 굴복했다. 로건은 고개를 떨군 채 찰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무너져 내리며, 그는 그렇게 오래 억눌렀던 슬픔에 무너졌다.
"저리 가."
로건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저리 가…"
붉어진 눈으로 웨이드를 밀어내며 문을 닫은 로건은 다시 찰스의 곁으로 돌아갔다. 웨이드는 닫힌 문 앞에서 망설였다.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문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서 있었다.
그리고, 문틈으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용했다. 억누르려는 듯, 삼키려는 듯한 흐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내 울음은 거칠어졌고, 결국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터져 나왔다.
웨이드는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다시 한번 느꼈다.
폐공장에서 발걸음을 옮기던 그날 들었던 그의 울음소리처럼, 로건은 또다시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 로건이 문을 열었을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지런히 놓인 종이 한 장이 있을 뿐이었다.
로건이 무릎을 굽혀 종이를 주워들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종이를 들여다보던 로건은 그 글을 몇 번이고 읽더니 다시 접어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어느새 해가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들었다.
담배불이 천천히 사그라들며 로건의 속을 깊이 채웠다.
로건에게.
지금쯤 나에게 화가 많이 났겠군. 자비에 학교에 있을 때 자네는 선생 노릇을 하면서도 화가 나면 주체하지 못하고 벽을 부숴먹곤 했지. 지금도 불쌍한 벽을 부수고 있지는 않겠지?
로건, 깊이 설명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선택을 하게 된 나를 용서하게. 자네가 별로 좋아할만한 계획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자네가 화를 내거나 슬퍼하면 나도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었어.
웨이드에게도 화 내지 말아. 내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니까.
자네를 처음 만난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네. 바에 앉아 술을 마시던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오래 산 사람 치고 혼란과 쓸쓸함이 더 많이 보여서 자네를 대할 때면 늘 의아했네. 처음 엑스맨 스쿨에 들어와 나를 만난 날. 처음 자네에게 손을 올리고 기억을 읽은 날. 처음 자네의 악몽을 잠재워줬던 날. 모든 학생들을 기억하지만, 로건, 자네는 나에게 정말 특별한 학생이었어.
몇 주 전, 눈을 감았는데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더군. 처음엔 충격이었고, 다음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왔어. 그리고 눈을 뜨니 자네가 보였어. 미안하단 말을 전해주지 못한 것 같아. 그 모든 짐을 지고 어떻게 버텼나. 안그래도 고통과 상처가 가득했던 자네의 삶에 위로가 아닌 또다른 짐을 준 것 같아 미안했네.
그렇다고 내가 자네 때문에 이 선택을 하는 건 아니야. 오래 생각해왔던 결말이었네. 난 느낄 수 있었어. 점점 잠드는 시간이 많아지고 내 정신은 내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 전에 나로서 결말을 맺고 싶었어.
로건. 내 소중한 학생이자 오래된 친구이자 감히 가족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
또다른 희망은 언제나 있어. 그러니까 이제 자네의 삶을 살아가. 나중에 만나면 다른 이야기들을 잔뜩 들려주길 기대하겠네.
안녕.
사랑을 담아, 찰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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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육지에 닿았을 때는 아침 해가 막 떠오를 즈음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물결에 반사되며 배를 희미하게 비췄다. 선실 문이 덜컥 열리며 로건이 나왔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눈가를 문질렀다.
갑판은 텅 비어 있었다. 찰스는 어제 밤늦게까지 갑판에 앉아 있더니 지금은 방에서 깊이 잠든 듯했다.
“지금 갈 거야?”
로건이 배에서 내려 육지에 밧줄을 묶는 동안 웨이드가 뒤에서 나왔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충혈된 상태였다. 밤새 잠을 설친 티가 역력했다.
“응. 찰스는 아직 자니까 얼른 가서 약만 받아오려고.”
로건이 낮게 말했다.
“근처 병원 사람한테 미리 연락해 놨어.”
그는 밧줄을 단단히 묶고 다시 배 위로 올라섰다.
웨이드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바다를 오래 본 탓인지 약간 흔들리는 듯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했다.
“…같이 가.”
로건이 이마를 찌푸리며 그를 돌아봤다.
“뭐하러. 그냥 찰스 옆에 있어.”
“아니, 그냥.” 웨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여기에만 있었더니 토할 것 같아.”
로건은 고개를 갸웃하며 웨이드를 잠시 살펴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같이 가던지.”
그들은 간단히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배에서 내렸다. 해안가는 고요했고, 아침 공기가 쌀쌀하게 그들을 감쌌다. 웨이드는 로건의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배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육지의 소음이 낯설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아침을 시작하며 바삐 움직이고, 대화 소리가 거리 곳곳에 퍼졌다. 로건은 웨이드와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장장 일주일 동안 한 구석에 방치된 낡은 차가 그들의 목적지였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웨이드는 자연스럽게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뭐해?” 로건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긴. 운전하려고 하잖아.” 웨이드가 안전벨트를 매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길은 알고?”
“당신이 알려주겠지.” 웨이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로건은 웨이드를 한참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고 조수석으로 가 앉았다.
“네비게이션에 찍어줄게.”
“그거 고장났어.”
“뭐?” 로건이 놀란 표정으로 대꾸하며 네비게이션 화면을 쳐다봤다. 까맣게 꺼진 화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리더니 머리를 감쌌다.
“아… 씨, 진짜.”
“직접 안내해줘야겠는데,” 웨이드가 로건을 힐끔 보며 짐짓 장난스럽게 말했다.
“…일단 출발해. 빨리 갔다 오게.” 로건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죠.” 웨이드가 말하며 엑셀을 밟았다. 차는 힘차게 굴러가며 금세 바다를 등지고 육지로 나아갔다.
“야, 오른쪽!” 로건이 핸드폰 화면을 보며 급히 외쳤다.
“뭐?”
“오른쪽으로 꺾으라고!”
웨이드는 당황한 얼굴로 핸들을 움켜쥐며 속도를 줄였다.
“아… 잘못 들었네.”
“뭐하는 거야.” 로건이 핸드폰을 꽉 쥐고 짜증을 냈다.
길 안내는 계속됐지만, 오늘 웨이드는 이상하게도 방향 감각이 엉망이었다. 로건이 “왼쪽!” 하면 웨이드는 오른쪽으로 꺾고, “직진!” 하면 웬 뜬금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야, 대체 길을 어디로 가는 거야?” 로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아니, 내 느낌에는 여기야.” 웨이드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하, 저기서 왼쪽,” 로건이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왼쪽? 여기서?” 웨이드가 엉뚱하게 대꾸했다.
“아니! 저기서 틀라고!”
“아, 그래. 여기서,” 웨이드는 핸들을 돌렸다.
“야!”
한참을 그렇게 삐걱대며 길을 돌아다니자, 로건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 지도를 보며 길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차는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야, 멈춰봐.” 로건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멈추라고. 뭐 하자는 거야?”
“뭘.” 웨이드는 시치미를 떼며 핸들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너 일부러 그러잖아. 왜 그러는데.” 로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웨이드는 우물쭈물하다가 핸들을 쥔 손을 조심스레 풀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기분 좋은 사람 얼굴이 그렇게 울상인가?” 로건이 쏘아붙였다.
그 말에 웨이드는 순간 말을 잃었다.
로건은 웨이드를 한참 동안 노려봤다. 며칠 전부터 그의 신경은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웨이드와 찰스가 자꾸 몰래 무언가를 얘기하던 모습, 자신이 다가가면 입을 닫아버리던 그들. 게다가 답지 않게 우울해 보이던 웨이드와, 이상하리만치 다정하게 굴던 찰스까지. 모든 게 어딘가 불길했다.
“너…”
로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의 눈빛은 웨이드를 꿰뚫는 듯했다.
“너 내려.”
“…뭐?”
“내리라고, 이 새끼야!”
웨이드는 잠시 굳어 있더니, 로건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슬그머니 차에서 내려 뒷자석으로 옮겨탔다.
로건은 곧장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거칠게 엑셀을 밟았다. 차는 금세 속도를 내며 도로 위를 달려갔다. 그는 눈을 좁히며 도로 위로 시선을 고정했지만, 마음속엔 끊임없이 불안이 휘몰아쳤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로건의 두 손이 핸들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웨이드와 찰스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 썬시커에 남아 있는 찰스에게 있을 것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거야…” 로건은 낮게 중얼거리며 속도를 더 높였다.
웨이드의 헛된 운전 덕에 항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로건은 발을 내디디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기운. 하지만 더 이상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의 잔재.
마비.
그 짧고 강렬한 느낌이 로건의 모든 감각을 소름 돋게 했다.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지만, 그럴수록 불안은 더 크게 치솟았다. 뒤따라 내린 웨이드가 로건의 팔을 붙잡았다.
“로건, 잠깐만.”
로건은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을 거칠게 뿌리친 뒤 썬시커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로건의 발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익숙하게 몸을 침범하는 무언가가 서서히 그를 옥죄어 왔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차가운 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젠장, 찰스. 안 돼.”
로건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허리를 숙인 채 겨우 발을 뗐다. 무언가가 그를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이 마비. 그것은 오랜 친구가 발산하는 능력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그 능력의 영향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찰스의 존재감과 함께 어둡고 무거운 불길함이 그를 짓눌렀다.
지금 당장 그를 찾아내야 한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마비의 고통은 점점 더 강해졌고, 그의 마음속 불안은 한층 더 커졌다. 로건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웨이드는 몇 걸음 뒤에서 그를 따라왔다. 말을 걸려다 그저 한숨을 내쉬며 뒤를 쫓았다. 썬시커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로건의 가슴은 터질 듯이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선실의 문 앞에 섰다.
“로건!”
웨이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로건의 귀를 찔렀다. 마비로 인해 뻣뻣하게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썬시커 쪽으로 향하던 로건은, 웨이드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들어가지 마.” 웨이드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리는 공포와 애처로운 간청이 섞여 있었다.
“놔.” 로건이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려 했지만 웨이드는 더욱 강하게 그를 붙잡았다.
“너… 뭘 알고 있는 거야. 말해, 지금 당장.”
“찰스가 부탁했어.” 웨이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교수님이 부탁했다고.”
그 말에 로건은 잠시 멈칫했다. 이 모든 것이 찰스의 부탁 때문이라니. 뭔가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억눌렸던 분노와 불안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뭘!!!”
로건의 외침과 함께 세상이 휘청였다. 순식간에 그의 시야가 하얗게 번지더니, 귓가에서 웨이드의 목소리도, 바다와 썬시커의 소음도 모두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로건은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공간. 주변에는 그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적막 속에서 혼자 서 있는 느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낯설고 불안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찰스가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찰스가 아니었다. 병약한 노인이 아닌, 그의 기억 속 젊고 강인했던 찰스 자비에. 엑스맨을 이끌던 시절, 그가 믿고 따랐던 지도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찰스?” 로건이 입술을 열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게 다 무슨... 왜,”
젊은 찰스는 묵묵히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한없이 따뜻했지만, 그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뇌가 서려 있었다.
“로건.”
찰스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그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난 내 마지막을 내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어.”
로건의 눈썹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찰스는 말없이 로건을 바라봤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돼요.” 로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안됩니다.”
“로건, 나는 그럴 수 있어.” 찰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러고 싶어.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 것보다, 끝까지 내가 모두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 내 방식으로 마무리 짓고 싶어.”
“안돼요… 찰스.” 로건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간힘으로 억누르는 고통이 담겨 있었다.
찰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로건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나보다 더 방황했던 내 제자.”
그 순간 그의 심장은 거대한 바위에 짓눌리는 것처럼 쿵 하고 떨어졌다.
“희망을 놓지 말게.” 찰스는 차분히 말했다.
로건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제 희망은 당신이에요.”
찰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다른 희망이 생겼잖아.”
“절 버리시게요?” 로건이 간신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끊어질 듯했다.
“버리는 게 아니야.” 찰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따스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놓아주는 거지.”
찰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로건은 그 모습을 보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찰스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균열이 여기저기 생겨나며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건은 그곳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건 찰스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로건.” 찰스가 로건을 끌어당겨 품 안에 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했다.
“내가 원해. 로건, 자네도 날 놔줘야 할 때가 왔어.”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귓가에 닿는 따스한 숨결이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고마웠어. 잘 지내.”
로건은 찰스의 품에서 몸을 떨며 벗어나려 했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충격과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아니에요. 찰스. 안 돼요.”
로건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찰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순간, 로건의 뒤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를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로건이 현실로 튕겨져 나왔다.
“로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보았다. 웨이드였다. 웨이드는 필사적으로 로건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거 놔! 이 새끼야! 놓으라고!!”
로건이 몸부림쳤지만 웨이드는 더욱 단단히 그를 붙잡고 문 쪽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로건의 머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그의 가슴은 터질 듯했고, 찰스를 향한 절망감이 점점 그를 덮쳐왔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더 이상 생각할 힘조차 없어지려는 순간, 선실 안쪽 창문을 통해 찰스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살짝 찡그리면서도, 마지막으로 로건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손짓은 작별의 인사였다.
안녕, 로건.
“놔!!! 이거 놔!! 찰스!!! 가지 마요!!! 안 돼요!! 제발!!”
웨이드의 팔에 갇힌 로건의 외침은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웨이드는 기어이 로건을 갑판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아...아... 씨발…”
로건의 입에서 한숨처럼 터져 나온 욕설은 공허한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는 힘없이 몸을 풀고 벽에 기대어 섰다.
웨이드가 조용히 말했다. “찰스가 부탁했어. 당신이 절대 허락 안 해줄 거라고.”
로건의 눈이 불길처럼 번졌다. 순간 그의 주먹이 날아가 웨이드의 턱에 꽂혔다.
“입 다물어, 웨이드.”
웨이드는 쓰러지진 않았지만,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로건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찰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손이 문고리를 잡았지만, 열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섰다. 숨소리마저도 무겁게 맴돌았다.
이 모든 게 거짓이길 바랐다.
그는 간절히 생각했다. 그냥 꿈이라면. 지난 모든 악몽 중 하나일 뿐이라면.
그러나 그 희망은 방에서 새어 나오는 익숙한 혈향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 향기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로건의 정신을 찌르며 그를 뒤흔들었다.
손잡이를 쥔 손이 떨렸다. 두려움과 현실을 부정하려는 몸부림이 섞인 그 손은, 그러나 결국 천천히 돌아갔다.
찰스.
로건의 속삭임은 그의 마지막 기도처럼 공허한 방 안에 흩어졌다.
찰스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로건은 천천히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찰스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생명력이 사라진 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빠르게 식어갔다. 로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마치 방금 잠들어 꿈속으로 떠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 평온한 얼굴은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듯했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찰스…”
그는 간신히 말을 뱉었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그 한 단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손을 쥐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이대로라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뒤에서 웨이드가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로건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로건.”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위로하려는 의도였지만, 로건의 감정을 무너뜨리는 방아쇠가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방울씩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에 굴복했다. 로건은 고개를 떨군 채 찰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무너져 내리며, 그는 그렇게 오래 억눌렀던 슬픔에 무너졌다.
"저리 가."
로건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저리 가…"
붉어진 눈으로 웨이드를 밀어내며 문을 닫은 로건은 다시 찰스의 곁으로 돌아갔다. 웨이드는 닫힌 문 앞에서 망설였다.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문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서 있었다.
그리고, 문틈으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용했다. 억누르려는 듯, 삼키려는 듯한 흐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내 울음은 거칠어졌고, 결국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터져 나왔다.
웨이드는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다시 한번 느꼈다.
폐공장에서 발걸음을 옮기던 그날 들었던 그의 울음소리처럼, 로건은 또다시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 로건이 문을 열었을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지런히 놓인 종이 한 장이 있을 뿐이었다.
로건이 무릎을 굽혀 종이를 주워들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종이를 들여다보던 로건은 그 글을 몇 번이고 읽더니 다시 접어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어느새 해가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들었다.
담배불이 천천히 사그라들며 로건의 속을 깊이 채웠다.
로건에게.
지금쯤 나에게 화가 많이 났겠군. 자비에 학교에 있을 때 자네는 선생 노릇을 하면서도 화가 나면 주체하지 못하고 벽을 부숴먹곤 했지. 지금도 불쌍한 벽을 부수고 있지는 않겠지?
로건, 깊이 설명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선택을 하게 된 나를 용서하게. 자네가 별로 좋아할만한 계획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자네가 화를 내거나 슬퍼하면 나도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었어.
웨이드에게도 화 내지 말아. 내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니까.
자네를 처음 만난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네. 바에 앉아 술을 마시던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오래 산 사람 치고 혼란과 쓸쓸함이 더 많이 보여서 자네를 대할 때면 늘 의아했네. 처음 엑스맨 스쿨에 들어와 나를 만난 날. 처음 자네에게 손을 올리고 기억을 읽은 날. 처음 자네의 악몽을 잠재워줬던 날. 모든 학생들을 기억하지만, 로건, 자네는 나에게 정말 특별한 학생이었어.
몇 주 전, 눈을 감았는데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더군. 처음엔 충격이었고, 다음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왔어. 그리고 눈을 뜨니 자네가 보였어. 미안하단 말을 전해주지 못한 것 같아. 그 모든 짐을 지고 어떻게 버텼나. 안그래도 고통과 상처가 가득했던 자네의 삶에 위로가 아닌 또다른 짐을 준 것 같아 미안했네.
그렇다고 내가 자네 때문에 이 선택을 하는 건 아니야. 오래 생각해왔던 결말이었네. 난 느낄 수 있었어. 점점 잠드는 시간이 많아지고 내 정신은 내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 전에 나로서 결말을 맺고 싶었어.
로건. 내 소중한 학생이자 오래된 친구이자 감히 가족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
또다른 희망은 언제나 있어. 그러니까 이제 자네의 삶을 살아가. 나중에 만나면 다른 이야기들을 잔뜩 들려주길 기대하겠네.
안녕.
사랑을 담아, 찰스가.
웨이드로건 덷풀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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