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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22:41
전편 https://hygall.com/604637852
시린 하늘 아래 고요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인기척에 눈을 뜬 남계인이 내키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그는 어쩌고 있느냐?”
“조용해지셨지만 식사를 하지 않으십니다.”
남계인은 한숨을 쉬며 단정하게 손을 모은 또 하나의 조카를 내려다보았다.
둘째 조카는 3천개의 가규를 하나도 어긴 적이 없었고, 무예며 시며 못 하는 것이 없었으나 다만 융통성이 너무 없고 인간에게 냉담했다.
남희신이 너무나도 아쉬운 그는 애를 겨우 돌려줬다 싶더니 이렇게나 홀려놨다는 생각에 성이 났다.
삼독성수가 남희신을 놓아주었다.
운몽의 수사들은 의식 없는 남희신을 데려다놓고 예전에 오갔던 혼서와 예물들을 돌려준 다음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장 돌아온 조카가 반가웠던 것도 잠시.
남희신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되돌아가겠다고 말했고, 남계인이 파혼서를 보여주며 막자 길길이 날뛰었다.
결국 그를 외진 별채에 감금하는 수밖에 없었고 여러 명의 수사들이 굳게 감시하도록 했다.
이후 한 자리에 모인 고소 남씨의 수뇌들은 남희신을 돌려준 강징의 심사를 파악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였다.
남희신이 돌아온지 며칠이 지나, 남계인이 그를 찾았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수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물과 음식을 조금 먹은 모양이었다.
“희신.”
남계인이 들어가서 부르자, 남희신이 단정하게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쳐다보는 눈빛은 날카로웠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집으로 가득했다.
“얘야. 제발 정신 차리거라. 곧 모두가 합심하여 사악한 삼독성수를 수진계에서 몰아낼 것이다.”
남희신은 그 말을 듣고 이를 세게 깨물었다.
이윽고 눌러 참는 듯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입니까?”
남계인이 턱을 쳐들며 말했다.
“기산 온씨를 제거한 이래로 삼독성수는 비겁하게 얻은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핍박했다. 게다가 비밀리에 세가들을 해치려는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모함입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고집스레 삼독성수를 감싸고 도는 조카에게 답답해진 남계인이 언성을 높이자, 남희신도 힘을 주어 대답했다.
“부인이 그런 짓을 할 리 없습니다!”
눈빛이 번뜩하며, 노한 남계인이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소리를 쳤다.
“미쳤다고 그를 부인이라 부르느냐! 네가 정말로 그와 사이가 좋다면 왜 너를 보냈겠느냐! 분명 네가 거사에 방해가 될까봐 쫓아낸게야!”
남희신은 욱하며 까만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그는 숙부의 말에 곧바로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남계인이 소매를 뿌리치며 나가고 나자 꼿꼿하던 몸이 수그러들며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징은 그가 어리고 어리석다 말했지만, 남희신은 어릴지언정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수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부인을 보아 왔고, 느껴 왔다.
그 동안에는 알 필요가 없고 볼 수도 없어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랐지만, 천신제 사건을 겪고 또 운심부지처로 돌아와서 수진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자 올곧고 영민한 눈에는 모든 일이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천천히 자리로 돌아온 남희신은 차로 목을 축이고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야말로 어린애처럼 난동이나 부리고 감정에 빠져 자포자기할 여유 따윈 없었다.
강징과 혼인을 하고, 그에게 말액을 건넸을 때. 이제부터는 제가 평생 당신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지 않은가.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남희신의 가슴에 불이 번지듯 뜨끔한 아픔이 지나갔다.
부인이 너무 그리운 마음속에 시시각각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희신은 사뭇 다정해진 강징 뿐만이 아니라 초반의 냉담하고 가시돋힌 모습까지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모든 강징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그의 자태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의 눈빛을 상기하면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마침내 애가 타는 한숨을 흘리며 남희신은 마치 강징이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가만히 속삭였다.
부인. 도대체 왜 그렇게 순진하십니까.
군중이 얼마나 옹졸하고 시기심이 많은지, 이미 겪어보셨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안일하셨단 말입니까...
***
그 동안, 남희신은 당연히 몰랐고 강징도 알지 못했다.
현재 운몽 지역을 제외한 바깥 세상에서는 무척 무겁고 불길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강징이 암묵적으로 수진계의 정점에 선 후로 모든 선문가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정하게 느끼고 있었다.
범인을 알 수 없는 천신제 사건은 그러한 위기감을 순식간에 극대화시켰다.
강징은 마음이 혼란스러운 바람에 조사에 시들해졌지만, 오히려 다른 가문들은 사건 조사에 열을 올렸다. 그들에게는 운몽 강씨가 가장 의심스러웠고, 정말로 운몽 강씨가 범인이라 하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천신제를 다시 지내자 말한 것도 삼독성수가 아니었던가.
만에 하나 운몽 강씨가 아니라 해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럴 경우에는 삼독성수가 누구에게 이 사건을 뒤집어씌워 죄를 물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범을 잡는 데에는 강징보다 여타 가문의 사람들이 더욱 급급한 상황이었다.
사건의 진위를 알지 못하고, 강징의 속내도 알지 못하는 채 불길한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운몽 강씨가 볼모로 잡아놓고 있던 남희신을 되돌려보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드디어 삼독성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생각되자, 수진계 전체가 좌불안석으로 들썩거렸다.
그 때, 운몽 강씨가 거대 세가들을 죄다 쓸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은밀한 정보가 들어오자 더이상은 겉보기뿐인 평화도 유지될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반응하여 중심을 굳힌 가문은 청하 섭씨였다.
고소 남씨는 이제껏 삼독성수가 볼모로 쥐고 있는 후계자가 걱정되어 미적거렸지만, 그가 돌아왔으니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난릉 금씨는 삼독성수에게 무척 우호적으로 굴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 가문 사람들은 얼추 논의를 마치고 대략의 윤곽을 잡은 후에야 금광선에게 접선했다. 너구리같은 금광선이 운몽 강씨에 진심일 리 없지만, 현재 득세하고 있는 삼독성수와 한줄 핏줄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무시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하고 부유한 난릉 금씨의 협력 없이는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 뻔했다.
아무튼 금광선은 말을 듣자마자 대뜸 이 편으로 돌아섰다. 사람들은 그런 태도가 다행스러운 한편으론 미덥지가 않았지만 어차피 사일지정부터 되풀이되었던 일이었다. 결국은 저마다의 이기적인 이유로 싸우는 것이고, 목적이 부합하는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뿐이니.
아무튼 금광선도 삼독성수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리란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조용히, 그리고 빈틈없이 최선을 다해 운몽 강씨에 맞설 준비를 했다.
***
남희신이 연화오로 돌아올 때마다 정겹게 바라보던 누각의 옆에는, 누각과 거의 같은 높이로 바른 담 위에 지어진 정자가 있었다.
밤이 깊어 선부 내에 간간이 켜 놓은 석등 외에 사방은 캄캄했다.
달도 희미하여 눈을 가늘게 떠도 멀리 짙게 드리운 그림자가 호숫가를 덮은 숲그림자겠거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낮고 절도 있는 걸음으로 순찰을 도는 수사들의 발소리 외에는 완전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아이도 없고, 가족도 없는.
정련된 수사들, 혹은 수련중인 수련수사들 뿐인 선부는 하나의 군대나 다름없었다.
강징은 등불빛에 비치는 상을 한 번 훑어본 다음 맥없는 손짓으로 술잔을 들었다.
술상은 검소한 편이라도 제법 맛깔나게 차려져 있었지만 기름이 도는 냄새를 맡아도 가슴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다시 한 잔을 쭉 들이킨 강징이 매운 술기운에 눈시울을 붉히며 가볍게 기침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강징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가슴 아픈 모습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을 허용했다.
사실은 술을 배울 시절도, 술을 마실 여유도 없었던 생활만 이어온 탓에 잘 마시지 못했다.
그래도 누각 아래를 지날 때마다 생각하곤 했더랬다.
시간이 나면 연화호를 끼고 있는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저 곳에서 희신과 잔을 나눠 보아야지, 하고.
술은 뜨겁고 버석버석한 속을 전혀 달래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강징은 억지로 쏟아부었다.
원한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억누를 수 있었다.
무시당하고 짓눌릴 때면 부족한 자신을 탓하고 혹사시키며 버텼다.
하지만 운명이 채우기를 허용하지 않는 이 상실감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희신을 떠나보낸 뒤, 강징은 매일같이 이어지는 정무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천신제 사건도 더는 추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음철을 지닌 강징이 연화오에 버티고 있는 한, 두 번 다시 운몽 강씨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 테니.
술기운보다는 졸음이 쏟아져서 가물거리던 눈이 흠칫 뜨여졌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한 불빛과 어둠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였다.
강징은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착각이 아니었다.
깔려있던 어둠이 검은 갑각을 둘러쓴 벌레처럼 뭉글뭉글 움직여 오더니, 순식간에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오고 번쩍이는 금붙이들이 나타났다.
가까운 등불 외에는 고요하던 선부를, 마치 멀리 호수로부터 도사리고 있던 어둠이 덮쳐든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불이 번지듯 소음이 일어나고 고함소리,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강징은 정자를 딛고 선 채 날카로운 눈으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마치 생명이 꺼져가는 듯 흐려지던 눈에 순식간에 번쩍이는 빛이 돌아왔다.
강징이 정자를 박차고 뛰어내리는 순간,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그가 내려앉은 자리에서 강력한 돌풍이 일어나 일시에 수십명의 사람들을 나자빠지게 만들었다.
강징이 길게 휘파람을 불자 기계처럼 훈련이 된 수사들은 즉각 소리의 중심으로 진을 치며 모여들었다. 잠들었던 수사들도 귀에 익은 소집음에 번쩍 눈을 뜨는 동시에 패검을 불러들이며 뛰쳐나와 대열에 합류했다.
내부자들이 재빠르게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수백개로 늘어난 불빛들이 산자락에 앉은 연화오를 거대하게 밝혔다.
관목들이 와작 부서져나가고 매섭게 검기가 몰아치는 소리,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검은 호숫물처럼 가라앉아 있던 공간은 완전히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강징은 수사들을 모아 방어진을 치도록 지휘하며 예리하게 적을 살폈다.
침략자들은 갖가지 빛깔의 복색으로, 복면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강징은 죄다 알았다.
여러 선문가들의 수사들이 섞여서 쳐들어왔는데 신분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많은 가문들이 연합을 하여 전쟁을 치르러 온 것이 틀림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강징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름아닌 조카 금여란이었다.
거의 적지와 같은 집에 떨어뜨려놓은 조카를, 강징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사들을 조종하여 상처입는 일 없이 뒤로 물러나게 하는 한편 더욱 날카롭게 적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 난릉 금씨의 수사들도 적잖이 섞여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약 반시진이 지난 후.
삼독성수와 운몽 강씨의 사람들은 연화오를 버리고 뒷산으로 후퇴했다.
연화오에서 퍼져나오는 불빛이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깨우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소 용기가 있는 사내들이 살펴보니, 수십명의 사람들이 연화오를 둘러싸고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었다.
또한 밤이 새도록 선부에서 타오르는 불빛은 시시각각 강해지기만 했다.
시린 하늘 아래 고요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인기척에 눈을 뜬 남계인이 내키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그는 어쩌고 있느냐?”
“조용해지셨지만 식사를 하지 않으십니다.”
남계인은 한숨을 쉬며 단정하게 손을 모은 또 하나의 조카를 내려다보았다.
둘째 조카는 3천개의 가규를 하나도 어긴 적이 없었고, 무예며 시며 못 하는 것이 없었으나 다만 융통성이 너무 없고 인간에게 냉담했다.
남희신이 너무나도 아쉬운 그는 애를 겨우 돌려줬다 싶더니 이렇게나 홀려놨다는 생각에 성이 났다.
삼독성수가 남희신을 놓아주었다.
운몽의 수사들은 의식 없는 남희신을 데려다놓고 예전에 오갔던 혼서와 예물들을 돌려준 다음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장 돌아온 조카가 반가웠던 것도 잠시.
남희신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되돌아가겠다고 말했고, 남계인이 파혼서를 보여주며 막자 길길이 날뛰었다.
결국 그를 외진 별채에 감금하는 수밖에 없었고 여러 명의 수사들이 굳게 감시하도록 했다.
이후 한 자리에 모인 고소 남씨의 수뇌들은 남희신을 돌려준 강징의 심사를 파악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였다.
남희신이 돌아온지 며칠이 지나, 남계인이 그를 찾았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수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물과 음식을 조금 먹은 모양이었다.
“희신.”
남계인이 들어가서 부르자, 남희신이 단정하게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쳐다보는 눈빛은 날카로웠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집으로 가득했다.
“얘야. 제발 정신 차리거라. 곧 모두가 합심하여 사악한 삼독성수를 수진계에서 몰아낼 것이다.”
남희신은 그 말을 듣고 이를 세게 깨물었다.
이윽고 눌러 참는 듯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입니까?”
남계인이 턱을 쳐들며 말했다.
“기산 온씨를 제거한 이래로 삼독성수는 비겁하게 얻은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핍박했다. 게다가 비밀리에 세가들을 해치려는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모함입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고집스레 삼독성수를 감싸고 도는 조카에게 답답해진 남계인이 언성을 높이자, 남희신도 힘을 주어 대답했다.
“부인이 그런 짓을 할 리 없습니다!”
눈빛이 번뜩하며, 노한 남계인이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소리를 쳤다.
“미쳤다고 그를 부인이라 부르느냐! 네가 정말로 그와 사이가 좋다면 왜 너를 보냈겠느냐! 분명 네가 거사에 방해가 될까봐 쫓아낸게야!”
남희신은 욱하며 까만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그는 숙부의 말에 곧바로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남계인이 소매를 뿌리치며 나가고 나자 꼿꼿하던 몸이 수그러들며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징은 그가 어리고 어리석다 말했지만, 남희신은 어릴지언정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수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부인을 보아 왔고, 느껴 왔다.
그 동안에는 알 필요가 없고 볼 수도 없어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랐지만, 천신제 사건을 겪고 또 운심부지처로 돌아와서 수진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자 올곧고 영민한 눈에는 모든 일이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천천히 자리로 돌아온 남희신은 차로 목을 축이고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야말로 어린애처럼 난동이나 부리고 감정에 빠져 자포자기할 여유 따윈 없었다.
강징과 혼인을 하고, 그에게 말액을 건넸을 때. 이제부터는 제가 평생 당신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지 않은가.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남희신의 가슴에 불이 번지듯 뜨끔한 아픔이 지나갔다.
부인이 너무 그리운 마음속에 시시각각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희신은 사뭇 다정해진 강징 뿐만이 아니라 초반의 냉담하고 가시돋힌 모습까지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모든 강징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그의 자태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의 눈빛을 상기하면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마침내 애가 타는 한숨을 흘리며 남희신은 마치 강징이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가만히 속삭였다.
부인. 도대체 왜 그렇게 순진하십니까.
군중이 얼마나 옹졸하고 시기심이 많은지, 이미 겪어보셨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안일하셨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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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남희신은 당연히 몰랐고 강징도 알지 못했다.
현재 운몽 지역을 제외한 바깥 세상에서는 무척 무겁고 불길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강징이 암묵적으로 수진계의 정점에 선 후로 모든 선문가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정하게 느끼고 있었다.
범인을 알 수 없는 천신제 사건은 그러한 위기감을 순식간에 극대화시켰다.
강징은 마음이 혼란스러운 바람에 조사에 시들해졌지만, 오히려 다른 가문들은 사건 조사에 열을 올렸다. 그들에게는 운몽 강씨가 가장 의심스러웠고, 정말로 운몽 강씨가 범인이라 하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천신제를 다시 지내자 말한 것도 삼독성수가 아니었던가.
만에 하나 운몽 강씨가 아니라 해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럴 경우에는 삼독성수가 누구에게 이 사건을 뒤집어씌워 죄를 물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범을 잡는 데에는 강징보다 여타 가문의 사람들이 더욱 급급한 상황이었다.
사건의 진위를 알지 못하고, 강징의 속내도 알지 못하는 채 불길한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운몽 강씨가 볼모로 잡아놓고 있던 남희신을 되돌려보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드디어 삼독성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생각되자, 수진계 전체가 좌불안석으로 들썩거렸다.
그 때, 운몽 강씨가 거대 세가들을 죄다 쓸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은밀한 정보가 들어오자 더이상은 겉보기뿐인 평화도 유지될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반응하여 중심을 굳힌 가문은 청하 섭씨였다.
고소 남씨는 이제껏 삼독성수가 볼모로 쥐고 있는 후계자가 걱정되어 미적거렸지만, 그가 돌아왔으니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난릉 금씨는 삼독성수에게 무척 우호적으로 굴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 가문 사람들은 얼추 논의를 마치고 대략의 윤곽을 잡은 후에야 금광선에게 접선했다. 너구리같은 금광선이 운몽 강씨에 진심일 리 없지만, 현재 득세하고 있는 삼독성수와 한줄 핏줄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무시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하고 부유한 난릉 금씨의 협력 없이는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 뻔했다.
아무튼 금광선은 말을 듣자마자 대뜸 이 편으로 돌아섰다. 사람들은 그런 태도가 다행스러운 한편으론 미덥지가 않았지만 어차피 사일지정부터 되풀이되었던 일이었다. 결국은 저마다의 이기적인 이유로 싸우는 것이고, 목적이 부합하는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뿐이니.
아무튼 금광선도 삼독성수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리란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조용히, 그리고 빈틈없이 최선을 다해 운몽 강씨에 맞설 준비를 했다.
***
남희신이 연화오로 돌아올 때마다 정겹게 바라보던 누각의 옆에는, 누각과 거의 같은 높이로 바른 담 위에 지어진 정자가 있었다.
밤이 깊어 선부 내에 간간이 켜 놓은 석등 외에 사방은 캄캄했다.
달도 희미하여 눈을 가늘게 떠도 멀리 짙게 드리운 그림자가 호숫가를 덮은 숲그림자겠거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낮고 절도 있는 걸음으로 순찰을 도는 수사들의 발소리 외에는 완전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아이도 없고, 가족도 없는.
정련된 수사들, 혹은 수련중인 수련수사들 뿐인 선부는 하나의 군대나 다름없었다.
강징은 등불빛에 비치는 상을 한 번 훑어본 다음 맥없는 손짓으로 술잔을 들었다.
술상은 검소한 편이라도 제법 맛깔나게 차려져 있었지만 기름이 도는 냄새를 맡아도 가슴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다시 한 잔을 쭉 들이킨 강징이 매운 술기운에 눈시울을 붉히며 가볍게 기침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강징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가슴 아픈 모습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을 허용했다.
사실은 술을 배울 시절도, 술을 마실 여유도 없었던 생활만 이어온 탓에 잘 마시지 못했다.
그래도 누각 아래를 지날 때마다 생각하곤 했더랬다.
시간이 나면 연화호를 끼고 있는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저 곳에서 희신과 잔을 나눠 보아야지, 하고.
술은 뜨겁고 버석버석한 속을 전혀 달래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강징은 억지로 쏟아부었다.
원한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억누를 수 있었다.
무시당하고 짓눌릴 때면 부족한 자신을 탓하고 혹사시키며 버텼다.
하지만 운명이 채우기를 허용하지 않는 이 상실감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희신을 떠나보낸 뒤, 강징은 매일같이 이어지는 정무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천신제 사건도 더는 추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음철을 지닌 강징이 연화오에 버티고 있는 한, 두 번 다시 운몽 강씨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 테니.
술기운보다는 졸음이 쏟아져서 가물거리던 눈이 흠칫 뜨여졌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한 불빛과 어둠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였다.
강징은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착각이 아니었다.
깔려있던 어둠이 검은 갑각을 둘러쓴 벌레처럼 뭉글뭉글 움직여 오더니, 순식간에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오고 번쩍이는 금붙이들이 나타났다.
가까운 등불 외에는 고요하던 선부를, 마치 멀리 호수로부터 도사리고 있던 어둠이 덮쳐든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불이 번지듯 소음이 일어나고 고함소리,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강징은 정자를 딛고 선 채 날카로운 눈으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마치 생명이 꺼져가는 듯 흐려지던 눈에 순식간에 번쩍이는 빛이 돌아왔다.
강징이 정자를 박차고 뛰어내리는 순간,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그가 내려앉은 자리에서 강력한 돌풍이 일어나 일시에 수십명의 사람들을 나자빠지게 만들었다.
강징이 길게 휘파람을 불자 기계처럼 훈련이 된 수사들은 즉각 소리의 중심으로 진을 치며 모여들었다. 잠들었던 수사들도 귀에 익은 소집음에 번쩍 눈을 뜨는 동시에 패검을 불러들이며 뛰쳐나와 대열에 합류했다.
내부자들이 재빠르게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수백개로 늘어난 불빛들이 산자락에 앉은 연화오를 거대하게 밝혔다.
관목들이 와작 부서져나가고 매섭게 검기가 몰아치는 소리,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검은 호숫물처럼 가라앉아 있던 공간은 완전히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다.
강징은 수사들을 모아 방어진을 치도록 지휘하며 예리하게 적을 살폈다.
침략자들은 갖가지 빛깔의 복색으로, 복면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강징은 죄다 알았다.
여러 선문가들의 수사들이 섞여서 쳐들어왔는데 신분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많은 가문들이 연합을 하여 전쟁을 치르러 온 것이 틀림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강징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름아닌 조카 금여란이었다.
거의 적지와 같은 집에 떨어뜨려놓은 조카를, 강징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사들을 조종하여 상처입는 일 없이 뒤로 물러나게 하는 한편 더욱 날카롭게 적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 난릉 금씨의 수사들도 적잖이 섞여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약 반시진이 지난 후.
삼독성수와 운몽 강씨의 사람들은 연화오를 버리고 뒷산으로 후퇴했다.
연화오에서 퍼져나오는 불빛이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깨우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소 용기가 있는 사내들이 살펴보니, 수십명의 사람들이 연화오를 둘러싸고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었다.
또한 밤이 새도록 선부에서 타오르는 불빛은 시시각각 강해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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