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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 14:41
씨이발....한 번만 참을걸...
머리를 부여잡고 단전 끝에서부터 올라온 한숨을 푸욱 뱉었다.
진짜 한 번만 참을걸...계속 꾸역꾸역 참아왔던 거 그냥 한 번만 더 참아볼걸...
[지원해 주심에 감사하나 불합격하셨습니다.]
선명하게 빛나던 문자가 이내 조금씩 어두워지더니 잠금화면 뒤로 가려졌다. 불합격이라고 문자라도 준 게 어디냐..연락도 없이 까인 수많은 전적들을 생각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시 후두둑 떨어진 앞머리가 눈을 간지럽혔다.
백우는 소위 국민 배우라 불리던 주지우의 매니저였다. 쏟아지는 영화와 드라마, 광고 스케줄로 늘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녔다. 일이 이정도로 많으면 매니저를 한 명 더 붙여줄 법도 하건만 이 국민 배우님의 성깔이 워낙 지랄맞은지라 회사에서는 모르쇠 그에게 모든 일을 떠넘겼다. 결국 백우는 혼자 운전하고, 스케줄을 정리하고, 주지우의 심부름을 하고, 비위를 맞추고, 하다 하다 도망친 스타일리스트의 일까지 해야 했다.
잠은 커녕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주린 배를 부여잡고 근 두 달만에야 퇴근한 백우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기절했었다. 내일은 오후에나 스케줄이 시작되고 주지우는 집까지 잘 데려다 놓았으니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금방이라도 과로사로 죽을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최근 큰 사고는 치지 않는 주지우가 다행이라 생각한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근데 그 사이에 이 새끼가 뺑소니를 쳤다. 그러고는 대뜸 저한테 전화해서 하는 말이
-야! 이거 니가 했다 그러면 안 되겠냐?? 나 이거 알려지면 매장이야 씨발!
이러는 거 아니겠는가. 아니 그럼 나는 매장 안 되나? 기껏 집 안까지 잘 모셔다 놓았건만 왜 다시 기어나와서는!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일인 거 그냥 이 새끼 뭐 공황장애니 우울증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다니 뭐니 구라 좀 쳐서 대충 형량 낮추는 걸로 끝나게끔 도와주면 되는 거였다.
근데 이제 저도 눈이 돌아버린 게지. 이 미친놈이 뺑소니 친 것도 모자라 그걸 남한테 덮어씌우겠다고?
더는 이 미친 새끼를 사회에 풀어두고 싶지가 않았다. 만인에게 천사같은 연예인이라 예쁨 받으며 떵떵거리며 사는 꼴을 더 보기가 역겨웠다. 그래서 다 까발렸다. 이 새끼의 민낯을.
놈이 저지른 수많은 사건사고와 구라들. 그리고 뭣보다 지금까지 제게 저지른 갑질과 폭언, 폭행까지 싸그리 다. 그간 이를 악물고 참으며 그냥 혼자 분풀이나 하려고 모아뒀던 모든 기록들을 증거로 제출했다.
각종 녹음본들과 메시지, 사진들까지. 병원 갈 시간은 별로 없었어서 진단서 개수가 적은 게 아쉬웠다. 코뼈 부러진 것도 한참 뒤에나 치료했을 정도였으니까.
혹시라도 기사 하나 나지 않을까봐 그간 그 새끼의 사고를 덮어주려 신발 밑창이 닳도록 찾아가 빌었던 기자에게까지 넘겨버렸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이냐.
그래 이 미친 새끼는 제가 원하던 대로 매장이 되긴했다. 문제는 이제 자신이었다. 제 아티스트와의 기록을 하나하나 저장하는 데다 이걸 곧바로 법원과 기자에게 넘겨버리는 음침하고 뒤통수나 치는 매니저를 고용할 회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원래 회사에서 잘려버린 거야 뭐 당연한 일이었고. 이직을 하려 해도 "아, '그' 매니저?" 라는 한 마디가 면접관 중 하나에게서 나오면 그대로 결과는 기다릴 것도 없었다.
아니 씨발 뭐 얼마나 캥기는 게 많으면 이래??
연예계가 더러운 거야 몸소 체험해 왔다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재취업이 안 될 줄은 몰랐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아직 빚이 산더미인데...다니던 대학은 입학 일주일만에 반강제로 자퇴하고 시작하게 된 매니저 일이었던지라 다른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는 거야 그 새끼 뒷바라지와 뒷수습 때문에 차고 넘쳤으나 역시나 위와 같은 이유로 취업이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경력을 속이기엔 8년 동안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고졸이 되어버리는지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한 번만 더 참아볼 걸 그랬다. 그러다가도 아니 분명 난 피해자인데 왜 같이 매장이 되어버렸지? 라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했다.
그냥 죽을까...
평생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면서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사채빚만 덜컥 넘겨주고 사라진 애비라는 작자가 원망스러웠다. 그걸 또 그대로 덥썩 넘겨받은 엄마도. 그럴 거면 그렇게 바로 죽지나 말지..
현관문이 쾅쾅 부서질듯 두드려지는 소리를 들으며 힘없이 추욱 늘어졌다. 빚쟁이들의 욕설이 철문을 뚫고 쩌렁쩌렁 울렸다.
어차피 이렇게 쥐 죽은 듯 살 거면 그냥 진짜 죽어도 괜찮지 않으려나..꼬르륵 울리는 소리가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판판한 배를 꾸욱 손바닥으로 눌렀다.
야 진짜 안에 없나 본데? 에이씨...시간 버렸네.
오, 다행히 이만 물러가려나 보다.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지잉-
뱉은 숨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허겁지겁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무음 모드를 해놓는다는 걸 깜빡했다. 제발, 제발...간절히 빌었으나 현관문은 다시 부서질 듯 후드려 맞는다. 씨발 되는 일이 없네.
"형 밥은 먹고 다녀요?"
초췌한 몰골을 보곤 기겁을 한 수현이 물었다. 힘없이 대충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뭐...있으면 먹고 아님 굶고.."
"안 되겠네. 일반 밥부터 먹읍시다."
손목을 붙잡혀 질질 보양식 집으로 끌려 갔다. 그렇게 잡아 당기면 지금 피멍투성이 내 몸이 너무 아픈데..말하고 싶었으나 괜히 걱정을 안겨주기 싫어 꾸욱 참았다.
형 진짜 몸보신 좀 해야겠어요. 그나마 붙어있던 볼살까지 깡그리 사라져 버렸네. 제 몫의 닭다리까지 주욱 뜯어 넘겨준 수현이 홀쭉 패인 볼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혹시라도 급히 먹다 체해 이 아까운 걸 다 게워내기라도 할까봐 입 안에서 녹아 내리는 고깃살을 꼭꼭 씹으며 백우가 고맙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나저나 갑자기 웬일이야? 지금 한창 바쁜 시기 아닌가?"
수현은 우연히 친해진 가수였다. 주지우가 한동안 출연했던 예능에 함께 나오던 패널이었는데 우연히 그가 곤란한 상황에 엮인 걸 보고 도와줬더니 그 뒤로 형형 하면서 살갑게 구는 귀여운 동생이었다. 곧 앨범 나올 거라고 했던 날짜가 이맘때 쯤이었던 거 같은데. 후루룩 국물을 마시던 수현이 그 질문에 움찔하더니 잠깐 뜸을 들이곤 입을 열었다.
"아 형 요새 혹시 일...해요?"
아 갑자기 고기가 쓰다...
뻣뻣해진 모가지를 겨우 좌우로 돌렸다. 이제는 더 이력서를 넣을 곳도 없었다. 제 딴엔 절망적인 사실인데 수현의 표정은 반대로 밝아졌다.
"다른 게 아니고 저랑 친한 형이 데뷔를 할라 하는데 매니저가 영 안 구해진다 해서요. 아무래도 이제 막 연예판에 뛰어드는 거라 좀 이 판에 노련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길래...혹시 생각 있어요?"
"내가 생각 있음 뭐 해. 어차피 내가 누군지 알면 그쪽에서 깔 건데."
"아니이- 형이 그래도 이쪽 업계에선 완전 베테랑이잖아요. 아 그리고 막말로 그 새끼가 범죄자지 형이 범죄자예요?! 형이 주눅들 게 뭐 있어!!"
"아 거 가수라고 광고하냐? 목소리 줄여라."
고기를 수현의 입으로 황급히 쑤셔 넣으며 백우가 작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큰소리에 이쪽을 힐끗대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더 내려 앞머리로 눈을 가렸다. 아니 진짜 그렇잖아. 지금까지 계속 피해받으면서 살았던 건 형인데 왜 앞으로도 형만 피해를 받아야 하냐고. 씩씩대며 고기를 아작아작 씹어대는 얼굴을 보며 백우가 한숨을 작게 뱉었다.
"그래서...뭐 하는 사람인데?"
"하게요?!"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는...그래도 궁금은 하잖아."
궁금은 개뿔. 그냥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줘야 이 녀석이 진정을 할 거 같아서였다. 그의 생각대로 단순한 수현은 금세 방실방실 웃으며 그 사람에 대해 떠들어댔다.
"원래 연극판에 있던 형인데 이번에 우리 소속사에서 정식 데뷔하기로 했어요. 형보다도 나이가 많긴 한데 연기 실력 하나는 진짜 끝내줘요. 그 거장 나근경 감독 알죠? 그분 새 영화에 오디션 보고 딱! 붙었거든요. 연기도 끝내주는데 얼굴도 완-전 끝내줌. 진짜 사기캐인 형이라니까요."
배우라...주지우와 같은 업종. 조금이나마 있던 희망도 재가 되어 날아갔다. 체념조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수현의 웃는 얼굴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형 그럼 하는 거죠?! 회사에 말 전할게요!"
아니 그니까 내가 한다 해서 될 리는 없다니까는...하지만 더 말하기더 지쳐 그냥 입 안에 고기를 쑤셔 넣었다. 어차피 까일 텐데 뭐. 집에 가서 일단 택배 알바라도 알아 봐야겠다. 고기와 함께 향신료가 딸려왔다보다. 윽 입 배렸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수현이 말한 그 매니저 자리? 당연히 안 됐다.
잔뜩 시무룩해져 전화를 건 수현에게 되려 괜찮다 위로를 해주기까지 했다. 애초에 되겠나...이제 막 데뷔한 파릇파릇한 새싹에게 제 연예인 매장시킨 매니저를 붙여준다는 게. 아픈 허리를 콩콩도 아니고 쾅쾅 두드렸다. 와 진짜 급전 필요한 거 아니면 택배 상하차 알바는 하는 게 아니라더니 진짜 죽을 맛이다. 그래도 덕분에 빚쟁이들은 몇 번 '비교적' 순순히 돌려보낼 수 있었다. 굴러다니는 페트병에 찬물을 채워 얼굴에 난 멍을 문지르며 풀썩 드러누웠다. 딱딱한 매트리스에 부딪힌 허리가 짜르르 울렸다.
아 배고파. 생각할 뿐 움직이진 않는다. 어차피 먹을 것도 없거든. 잠이라도 어서 들어야겠다 생각하며 돌아누웠다가 천둥처럼 울리는 배 때문에 결국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멍을 문지르던 물을 꿀꺽꿀꺽 빈속으로 들이붓고 있을 때였다.
무음으로 바꿔둔 핸드폰 화면이 번쩍였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를 빤히 보다 전화를 받았다. 혹시 아직 남았을 찌꺼기를 원하는 기자나 전 회사 사람일까봐 말없이 가만히 귀만 기울이고 있자 상대쪽에서 여보세요? 물어왔다.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백우 씨 맞나요?
□□이라면 수현의 소속사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의문을 가지면서 떨떠름하게 그렇다 답했다.
-결례인 줄 알면서도 연락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다른 게 아니라 딱 세 달만 일해줄 수 있으실까요?
"..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여러 과정을 거쳐 겨우 뽑은 매니저가 혼자 귀가를 하던 중 교통사고가 나버렸다고 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지라 아예 그만 두지는 않아도 되지만 어쨌든 세 달 간은 꼼짝 없이 병원 신세라 했다. 급히 다른 후보군들에게 연락을 돌려봤으나 모두 이미 다른 일을 구했거나 거절을 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보루였던 백우에게까지 연락이 내려온 거였다.
-당장 내일부터 스케줄 시작인데 미룰 수도 없어서요.
"아.."
-급여는 물론 감사 보너스까지 확실히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충 얼마쯤..."
그냥 가볍게 물어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을 들은 두 눈이 커졌다.
일단 오늘은 프로필 촬영 정도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차키를 건네주고는 바쁜듯 휙 사라지는 대표의 뒷모습에 얼떨떨 목인사를 한 백우는 조용히 복도를 걷고있었다. 미팅룸에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미팅룸이 어딘지를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물어볼래도 다들 바쁜듯 우다다 뛰면서 사라지는 몇몇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 두리번 한참을 걷던 그의 눈에 드디어 미팅룸 팻말이 보였다. 구석에도 짱박아뒀네. 짜증과 안도를 섞은 한숨을 뱉은 백우가 뛰듯이 발을 움직였다. 이미 약속시간에서 10분이나 지난 참이었다.
문 앞에 도착한 뒤 조금은 긴장의 숨을 뱉고는 노크를 위해 손을 들었을 때였다.
"아니요. 아직 안 오셨어요. 워낙 방이 안쪽에 있어서 길을 못 찾았을 수도 있으니 제가-"
벌컥 열린 문에 퍽 얼굴을 부딪히고 말았다. 아 씨발 여기 멍 난 데인데. 웅웅 울리는 통증으로 얼굴을 붙잡고 휘청였다. 중심을 놓치기 직전 제 팔뚝을 꽉 잡아 세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 거기도 빚쟁이한테 잡혀 휘둘리느라 멍든 데거든요! 악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꾹 참고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세요?"
잔뜩 놀란 두 눈이 시야 안에 가득 들어찼다.
아..얼굴 하나 제대로 스타감이네.
이게 자신의 담당 배우 주일룡에 대한 백우의 첫인상이었다.
룡백 주일룡 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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