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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6 21:27
헬렌에게 지난 3주간은 비현실적인 날들과 오르락 내리락하는 감정들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새벽녘에 쉴드의 연락을 받은 스티브로부터 아스가드르 멸망과 급하게 편성된 대규모 임무 소식을 듣고 느낀 불안감이 시작이었다. 스티브로부터 확실하게 들은 건 그가 와칸다로 간다는 것과, 반즈와 클린트도 그쪽으로 간다는 얘기였다. 나머지는 생텀으로 가서 다시 나뉜다는 것 같았다. 헬렌으로서는 누가 정확히 어디에 가는지가 알고 싶었다기보다는, 스티브 외에는 반즈와 롤린스가 어디로 가는지가 알고 싶었던 것이지만 그걸 스티브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고 질문 없이 들을 수 있는 내용은 반즈에 대한 것이 전부였다. 일단 행방을 알아야 쉴드 본부 내의 입소문으로 누가 무사히 돌아올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테니까. 이런 저런 내용을 조합해보면 어쩐지 롤린스는 스트라이크 알파팀과 소속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 같으니까 다음날 출근해서 알파팀이 와칸다와 생텀 중 어디로 임무를 배정 받았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다음날 어찌저찌 알파팀이 생텀로 갔다는 건 알아냈지만 정작 그녀를 놀라게 한 건 그게 아니라, 한 인턴 연구원이 쭈뼛대며 들고 온 낯익은 짐가방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헬렌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맞이한 인턴은 스티브의 필체로 주소지가 적힌, 몇 번의 주말 여행 때 사용한 적 있는 짐가방을 조심스레 내밀더니 '럼로우...씨가 전해달라고 하셨는데요'라고 했다. 마치 럼로우를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보였고, 주변에 럼로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데도 겁에 잔뜩 질려 보였다. 헬렌은 럼로우가 굳이 제 3자를 통해가면서까지 급하게 물건을 돌려준 점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다. 하지만 인턴에게서 가방을 받았을 때, 그 안에 뭔가가 들어있는 무게감이 느껴져 곧장 개인 연구실로 들어가 내용물을 살펴봤었다.

부서진 마스크 조각이 들어있는 상자와 평범한 군용 나이프. 내용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스크 상자는 다시금 살펴보자 자신이 그에게 건넸던 사진첩이 상자 바닥에 숨겨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왜 그가 그걸 돌려줬는지는, 아니 왜 돌려줘야 한다고 느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내내 돌려줘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몰랐다. 받았을 때에도 원래는 받지 않으려 했었으니까. 하지만 군용 나이프는 왜 들어있는 것일까? 헬렌은 천천히 나이프 커버를 열어보았다. 잘 손질된 칼날 한쪽에 작게 일련번호가 찍혀있었다. ...어쩌면 이 번호로 트래킹되면 곤란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엇이 곤란한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 곤란한 처지였는지는, 그 다음날에 곧장 알게 되었다. 23일에 온갖 뉴스 채널이 하이드라 수뇌부 브록 럼로우 체포 뉴스로 도배가 되었으니까. 왜 그가 그렇게까지 새이디 사진첩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는지, 일련번호가 있는 나이프를 가지고 있을 수 없었는지,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가 함정에 빠진 거라고, 그가 함정에 빠져서 누명을 뒤집어 쓴 거라고 했겠지만... 헬렌은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브록 럼로우는 스스로 누명을 쓰고 있는 거라는 걸 그녀는 속보를 보자마자 알았다. 모든 게 잘 맞아 떨어지는 퍼즐 조각들처럼 잘 설명되었으니까. 그렇게 아꼈던 아이를 왜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으려고 했었는지. 왜 딱 한 번, 스티브가 그렇게 닦달을 해서 그가 없을 때 딱 한 번 왔던 치료 세션에서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서 봤었는지, 왜 자신에게 '청문회'가 끝나면 떠날거라고 했었는지. 왜 아이의 사진을 받을 수 없다고 했고, 그런 방식으로 돌려줬던건지. 왜 롤린스와 반즈와 진작에 떠나지 않고, 그들이 계속 쉴드 일을 하게 했던 건지.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그는 분명 거래를 했을 것이다. 퓨리 국장과 롤린스와 반즈, 새이디의 안전을 두고 거래를 했을 것이다. 자신이 연구지원을 두고 거래했던 것처럼. 어차피 크로스본즈로 개조되어 착취당하는 동안 몸이 망가져 얼마 가지 못할 테니 여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보내는 대신 그들의 안전을 위해 오명을 쓰고 죽는 걸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헬렌은 처음에는 스티브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으려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럼로우는 오랜시간 이걸 준비했을 것이다. 이건 그가 롤린스와 반즈, 새이디에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것이자, 아마 이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일 테다. 이게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끼어들어서 막아서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그게 대체 누구를 위한 일일까?

럼로우의 체포 이후로 약 3주간 뉴스는 온통 그의 재판에 대한 얘기들 뿐이었다. 아니, 뉴스 외에도 온갖 미디어에서 죄다 그 얘기 뿐이었다. 첫 일주일은 재판이 공개 재판, 배심원 재판이 될 것이고, 생중계 될 것이며, 배심원 선정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얘기로 한가득이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서로 원색적인 비난에 가까운 여론전이 치열한 가운데 한때는 바닥을 기었던 쉴드에 대한 평가는 이제 찬양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 와중에 비록 저화질이지만 체포 당시의 정황을 담은 SWAT 팀의 바디캠 영상이 유출되었는데(유출이 아니라 계산된 유포였을 것이다) 이는 럼로우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에 더 불을 붙였다. 도주할 요량으로 아파트를 싹 다 비워두고 짐을 챙겨뒀고, SWAT 팀을 향해 총을 발포하는 모습이 보이는 12초 가량의 영상 속에는 야구모자와 후드를 눌러쓴 럼로우의 모습이 비춰졌다. 흐릿한 화질이었지만 화상자국으로 뒤덮인 마른 몸이 주는 인상은 그를 악마화하기에는 충분했다.

2주차에는 주요 참고인 소환과 증언들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생중계가 시작되었다. 자극적인 증언 내용들이 편집되어 숏폼 클립이 되어 돌아다니고 밈이 되어 돌아다녔다. 개중에는 럼로우가 하이드라 수뇌부로서 대량살상이나, 테러, 암살, 살상등을 설계하고 직접 수행하며 필요 이상의 잔학성을 즐겼다는 식의 증언과 언급들이 있었다. 몇몇개는 그가 쉴드의 이중첩자로서 실제로 수행하긴 한 내용들이었을테지만, 그런 진실은 중요치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그가 89년에 육군에 입대했고, 92년에 쉴드에 들어왔고, 93년부터는 하이드라 소속이었다는 점이었다. 요컨대, 인생의 절반 넘는 시간을 군인으로 살았는데, 그 대부분을 하이드라로 살았다는 거였다. 아니, 하이라로 살아온 세월만 인생의 절반이 넘었다. 사람들은 그가 수뇌부로 똑 떨어진 인물도 아니고,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서 수뇌부가 된 인물이라는 점을 더욱 소름끼쳐했다.

3주차가 되어 본인이 직접 소환되자, 여론은 점점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유출된 바디캠 영상이 아닌, 고화질의 4K 법정 생중계 영상으로 주황색의 헐렁한 긴팔 죄수복을 입고, 까슬하게 자란 수염에 파리한 안색과 버석하게 메마른 화상자국으로 뒤덮인 마른 체격의 브록 럼로우가 등장하자 실시간 댓글창은 폐쇄해야 할만큼 난폭한 말들이 오고갔고, 결국 트위터와 레딧 페이지에서도 범죄자가 대상이라지만 그런 언행은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가이드라인이 내려올 만큼의 거친 반응들이 나올 정도였다. 어쨌든 대중들은 그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다. 특히나 그가 '가짜 눈물 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는 인터넷은 물론이고 신문 같은 전통적인 언론 채널들도 폭발할 것처럼들 굴었다. 하지만 헬렌은 그가 그런 사건을 일으킨 건, 정말로 몸이 그만큼 안 좋은 사건이 있었다는 뜻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도 쉴드에서는 그를 돌봤던 의료진들이 (혹은 그 의료진들과 아는 사이인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의견이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두명이 '근데, 재판 받을 수 있는 몸 상태는 되긴 하는 거야?'라고 말이 나오긴 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일반적인 여론 사이에서도 시간 문제이지 않았을까. 대중의 감정이 조금만 진정이 되었어도 누구 한 사람이라도 상식적인 소리를 할 수 있었을텐데. 럼로우가 재판 중에 이마를 괴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거나 한 건 관심이 없어서 따분한 걸 숨기지 않는 거만함 같은 게 아니라, 아파서 제대로 앉아있는 게 힘들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론이 흘러가는 걸 봐서는... 사형 판결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무죄를 내릴 배심원은 없을 것이고, 판사 또한 가석방 없는 종신형 같은 걸 내줄 리가 없었다. 사형을 내리겠지.

헬렌은 일기를 쓰던 것을 마무리하고 노트를 덮은 뒤 잠시 그대로 앉아 서재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앉아있는 책상 바로 맞은 편에는 스티브의 책상이 있었다. 벌써 그가 와칸다로 떠난 지 3주 째였지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스가르드가 멸망했다는 얘기 이후로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야 임무 중에는 보안 문제도 있고 해서 당연히 개인적인 연락은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언제쯤 돌아오게 되는 걸까? 재판이 끝날 때까지 오지 못하도록 퓨리가 일부러 손을 써뒀을까? 아니면 이번에는 정말로 뭔가가 일이 큰 걸까? 쉴드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단순히 럼로우의 재판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텀으로부터는 하루가 멀다하고 포털이 열려서 보강 인원가 물자가 오고가고 있었지만, 처음에 갔던 인원들은 소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워 듣기로는 토니와 알파팀은 아예 우주로 향했다는 것 같았다.

우주... 어떻게 들으면 참 비현실적인 얘기들이었다. 포털이니 우주니 외계인이니. 자신은 이렇게 평범한 2층 집의 서재에 앉아있는데. 헬렌은 제 책상의 나뭇결을 손으로 쓸어보다가 다시 일기장 노트 표지를 매만졌다. 일기는 언제나 쓰고 있었다. 퓨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에도 늘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에 자물쇠를 채운다거나 하는 식의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숨겨두거나 하지도 않았다. 늘 보이는 데에 두었다. 심지어 영어로 써두고 있었다. 스티브가 한 번이라도 엿보거나 읽었을까? 차라리 읽기를 바랐다. 차라리 그가 알았으면 했다. 그와의 삶이 진심이었던 순간들이 분명 있지만, 시작은 퓨리와의 거래였다는 걸.

럼로우의 체포 뉴스 속보를 본 순간... 순간적으로 이제는 럼로우가 없을테니까 이제 이 일기장들을 치워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가도 곧 그것과 이건 별개라는 걸 알았다. 그가 그렇게 없어진다고 해서 그 빈 자리가 마땅한 자신의 것이 되어도 괜찮다는 뜻은 결코 아니니까. 오히려 그가 자신을 그렇게 희생해서 비워둔 자리이기 때문에 더더욱 거래 따위가 없었던 것 마냥 꿰찰 수 없는 자리인 것이다. 헬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장에 있던 여러 권의 일기장 중에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그 중에 페이지를 찾아내 퓨리에게 스티브를 만날 것을 처음 제안 받았던 날짜의 일기에 책갈피를 끼운 뒤 스티브의 책상에 올려두고는 새이디를 픽업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데이케어가 3시까지이고, 4시에 치료 세션이 있으니 지금 나가면 시간이 딱 맞았다.












+뉴욕은 2004년에 사실상 사형 폐지했지만 아무튼 이 무순에선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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