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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20:20

 늘 그렇듯, 오늘은 연중 하루 전화선을 뽑고 휴대 전화 전원을 꺼 두는 날이다. 현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죽을 만큼 달콤하고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올해로 십오 년을 맞이하기까지 우리 두 사람은 이 날을 참으로 열심히 지켰다. 특히나 남편은 연중 이날을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닐까 심히 의심이 될 정도로 극성이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남편이 대령일 적에 수하에 있던 사람이 자잘한 실수를 해서 결국 그해에는 결혼기념일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당연히 그러려니 했다. 사실 당시에 스물다섯 밖에 안 됐던 터라 조금 아쉽긴 했지만 세상 일이 마음대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평소와 같이 일과를 마치고 그저 저녁 식사나 근사하게 할 요량으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서점에서 사 온 신간과 남편이 아침에 읽던 조간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때우니 어느새 시계의 시침은 오후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지루해지며 약간의 졸음이 오려던 참에 돌연 차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졸음도 확 달아나서 현관으로 가서 “여보, 고생 많았어요!” 하고 반갑게 맞이했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많이……힘드셨죠?”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남편의 눈이 혼탁했다. 분노와 흥분, 죄책감과 안심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과 공포를 주었다. 그렇게 형형한 눈빛을 하고서 남편이 입을 열었다.

 

 “여보, 내가 그 새끼 반 죽여 놓고 왔어. 정말 미안해.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그리고 정말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었다. 바로 다음날 그 사람 연락처를 알아내서 바로 사과하러 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그 사람의 거듭되는 사죄였다. 아직도 궁금하다. 당신, 그날 대체 이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부인, 저의 불찰로 일 년에 하루 밖에 없는 날을 망쳐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후로 남편은 5월이 되면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둥 요즘 것들은 빠져 가지고 글러먹었다는둥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안쓰러운 부하들을 들볶아 댔다. 당신 이제 영관급도 아니고 장성급이니 정신 좀 차리라고 바가지를 긁으면 지금 그 새끼들 편을 드는 거냐며 밤에 온갖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여튼 간에 부끄러움은 순전히 내 몫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왜냐고? 나도 남편 못지 않게 그날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날만큼은 남편과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사실 그날 뿐만은 아니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의 인간관계는 우리 두 사람 서로로 족하다. 말하자면, 인간관계가 필수불가결하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사귀는 것은 사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함께 있는 것은 서로에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생활이다. 하지만 365일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인 관계로 암묵적으로 딱 하루 일탈의 날을 정한 셈이다. 번거로운 전화도, 불청객의 방문도 없는 오롯이 두 사람만의 날을.

 

 

 

 

 

 

 

 토스트, 반숙 달걀, 소시지, 오렌지 주스. 조반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출했다. 신혼 때는 아침부터 요란하게 시작해 보기도 했지만, 십오 년 차에 들어선 지금은 이 단출한 조반 정도로 시작하는 것이 흡족했다. 스톤은 소장으로 전역을 하고도 식사를 후딱 해치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벌써 커피를 내려 와서는 담배 한 대를 물었다. 

 

 정말이지 스무 살 신혼 때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목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담배는커녕 마주 앉아서 물 한 잔 함께 마시기 거북했던 사이가 시나브로 지독한 연초의 냄새까지 사랑스럽게 허락해 줄 수 있게 될 줄은 누구 알았을까. 마지막 빵 한 조각을 먹고 나 역시 스톤에게 커피 한 잔을 받았다. 그 뒤로 커피를 홀짝거리며 담배를 피는 스톤을 구경했다. 한쪽 팔꿈치를 식탁에 괸 채 두 손가락 사이에 연기가 나는 담배 개비를 끼운 스톤의 표정에는 왠지 모르게 수심이 가득했다. 눈의 초점은 어느 곳을 향해 있지도 않았고 마치 영혼이 메말라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늘같은 날에 그러면 못쓰죠, 여보. 

 

 “여보, 저도 한 대 주실래요?”

 

 그러자 스톤의 표정이 일변했다. 담배 때문에 스톤의 표정이 이렇게 바뀐 건 그날 이래로 처음이다. 

 

 

 담배는 제 앞에서 피세요.

 어차피 담배 못 끊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집에서 하세요. 한 곳에서만 핀다면요.

 스무 살 어린 아내한테 밤마다 못하는 일이 없으시면서 겨우 담배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세요?

 

 

 스톤은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한숨을 쉬고 나서 담배 한 개비를 내게 건넸다. 건네받은 담배를 입에 물자 스톤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서 손을 뻗어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여 줬다. 담뱃불이 붙자마자 빨간 불씨가 피어나고 사그라지기를 되풀이했다. 한동안 담배 연기를 들이쉬고 내쉬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늘 되게 좋은 날인데.”

 

 “응.”

 

 “여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잖아요. 나도 그렇고.”

 

 “맞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침울해요.”

 

 스톤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손가락에 쥐고 있었던 담배를 아예 입에 물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오늘은 조금 힘들었다. 십오 년 간 함께한 세월로도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일? 재단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동료들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 무슨 비보라도 전하려고 하는 걸까?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스톤의 이름을 부르려던 참에 스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올해가 십오 년이 됐잖아요.”

 

 “그렇죠.”

 

 혹시 이혼이라도 하자고 하는 걸까? 그러면 어떡하지……어떡하긴, 앞으로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자 네 제삿날이지, 이 개새끼야. 소장 스톤 하퍼, 스무 살 어린 아내랑 십오 년 살고서 이제 와서 튀겠다니 양심 따위 개나 줬습니까? 네 입에서 ‘이’ 한 자라도 튀어나오는 순간 즉각 살처분이다, 변태 군인 아저씨. 내가 너한테 해 준 밥이 몇 끼고 너랑 보낸 밤이 얼만데.

 

 “요즘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혼해야겠다는 생각? 개새끼야, 뒈질 줄 알아라.

 

 “무슨 생각이요?”

 

 스톤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십이 넘은 이후로 스톤은 더욱 과묵해졌고 더욱 신중해졌다. 매력적인 점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나이 차이가 어느 정도……아니 사실 남들이 알면 깜짝 놀랄 만큼 있는 만큼 더욱이 언동을 삼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 나는 스톤의 배려에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라서 생각보다 스톤의 고충에는 무감각하다. 그래서 감히 추측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나는 스톤이 선물해 준 익숙함에 젖어서 그동안 참으로 안온하게 살아왔다. 하여튼 생각하는 건 괜찮은데 이혼은 씨발 안돼. 너 내 거야, 스톤 하퍼.

 

 “십오 년 전에는, 십오 년 뒤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내가, 언젠가부터 타성에 빠진 걸까요. 언젠가부터는 무언가 항상 당신에게 해 주는 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슬퍼요.”

 

 아, 그런 거였구나. 요즘 옆 건물에 있는 정신과의랑 매일 점심을 먹으면서 온갖 종류의 기상천외한 환자 일화를 들어서 그런지 나까지 이상한 망상에 빠지고 말았다.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런 결혼 생활에 대한 불안은 내가 이십 대 때 일찍이 했던 것이다. 풋내기 대학생이었던 내 눈에 영관급 장교인 남편은 당연하게도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과연 우리 두 사람이 사랑, 아니 최소한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을까? 대체 양가 어른들은 무슨 생각으로 나 같은 풋내기와 그런 사람을 결혼시킬 생각을 했으며 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한 스톤은 대체 무슨 위인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 있게 단언하건대, 우리 두 사람은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람이 싫으면서도 사람이 꼭 필요하고, 마주 앉아서 조용히 각자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고,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서로가 변하면 사랑이 식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앞에 겸손해지려고 한다. 다시금 당신이 내 남편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나 역시 마지막 담배 연기를 내쉬고서 담배를 껐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에 스톤이 있는 자리로 다가가서는 스톤의 무릎 위에 다소곳이 앉고 목을 끌어안았다. 잔뜩 침울한 얼굴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귀에 손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왜 변한 것만 생각하고 그래요. 왜 부족한 것만 생각하고 그래요. 다 늙어서도 잘하는 기특한 남편이 매일 같이 채워 주는데.”

 

 귀에 갖다 댄 손을 거두고서 스톤의 얼굴을 바라보자 일순 스톤이 눈을 껌뻑꺼렸다. 어느새 얼굴이 약간 야위고 주름이 꽤 늘었다. 그래도 온갖 인간들이 꼬여서 문제지만. 곧 내 말의 행간을 파악한 스톤도 표정을 풀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많이 컸네, 아가.”

 

 아가,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나를 놀릴 때 주로 쓰는 호칭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다. 장난스럽게 “응, 아빠.” 하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스톤이 깔깔대고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부족해도 최대한으로 잘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지, 여보?”

 

 음, 오늘은 아침부터 시작이구나. 15주년이면 역시 특별해야지. 변태 아저씨, 낙담하지 마. 가 볼 수 있는 곳까지 가 보는 거야. 당신이랑 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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