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604674415
view 498
2024.09.14 16:23
‘샹크스, 당신을 만났다고 루피한테 말해도 돼?’
‘얼마든지.’

그린비트 해변가에서의 일이다. 조로는 개돌이가 지키고 선 그린비트 해변가에서 발목까지 닿았다 사라지는 파도를 맞으며 서있었다. 그런 조로의 물음에 백사장에 느긋이 앉아 있던 샹크스의 대답은 흔쾌하기만 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붉은머리와 개구진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얼굴이 청량하고 푸른 하늘과도 같아서 조로는 무심코 둔 눈을 떼지 못했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사람. 샹크스는 첫사랑이란 단어를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에 조로가 눈을 빼앗긴 듯 쳐다본 지 얼마나 됐을까, 청량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내가 라프텔에서 검은수염을 다시 만났을 때 녀석은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어. ‘놈’이 어디서 왔는지를.’

바람처럼 흩어지던 이야기는 혼잣말과 같았다. 조로가 들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도 했고. 그 묘하게 공허한 음성에 조로는 샹크스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존재같이 느껴졌다. 그는 우연히 세상에 내려왔지만 금방 거두어질 신의 총아 같았다. 조로는 이것에서 루피가 필사적인 이유를 찾았다. 저 치의 위태로움을 어린 루피는 느꼈으리라. 녀석의 감은 타고난 것이었으니. 이렇게라도 자신이 매달리고 붙잡지 않는다면 샹크스는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를 정말 모르겠거든. …왜 녀석이 내게 핵의 절반을 넘겼을까?’

그순간 샹크스가 조로와 눈을 맞춘다.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던 남자에 조로는 굳은 듯 서있었다. 파도가 조로의 발목을 훑고 붉은머리는 잔잔한 바람을 따라 반지르르하게 휘날렸다.

‘궁금해?’

샹크스의 말이 허를 찔렀다. 핵이란 게 뭘 뜻하는지 모르던 조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섬의 반대편에서 나무가 쓰러지고 지축이 울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조로의 머리가 돌아가려니 샹크스가 먼저 한 팔을 뻗어 손짓했다. 꼭 강아지를 부르는 모양새였다.

‘이리 가까이 와볼래?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알려줄게.’

귀여운 강아지를 대하듯 혀차는 소리까지 내는 샹크스에 조로의 주의가 바로 그에게 돌아왔다. 생글생글 대는 얼굴이 자유분방한 미남의 전형이다. 덕분에 동네 똥개 취급하는 샹크스에도 조로는 화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분명 생김새를 두고 평가하는 천박한 짓은 않지만 미인을 아니라고 하지도 않는다. 인정할 것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니 샹크스가 미남이며 미호크는 미남의 정석이라는 걸 인정했지 않은가. 다만 붉은머리가 제 얼굴을 알고서 적재적소에 써먹는지 아니면 모르고 그러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였다. 덕분에 샹크스에게 순순히 다가갔던 조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 섬 반대편에서 로우가 미호크에게 호된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샹크스는 큰소리가 나기 전에 먼저 눈치챘음이 분명했겠지만 말이다.




실수했다. 크로커다일이 약을 준다고 방심하다니. 조로가 수면제를 눈치챈 건 지난 밤이었다. 그는 항해 내내 대여섯시간 간격으로 복용한 약에 사지가 늘어졌고 의식은 물 밑에 가라앉은 듯 몽롱했다.

‘내가 요리사 놈에게 한 말을 네게도 그대로 해주마. 밀짚모자를 구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라.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야.’

약에 취한 조로의 등에 팔을 두르고 일으킨 도피의 음성에는 웃음기가 어렸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싸늘함도 같이. 침대 시트에는 입에 넣어주기 무섭게 뱉어낸 수면제가 있었고 조로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꼴 좋다는 표정이었더랬다. 내가 안 먹겠다는데 이제 어쩔 테냐는. 그에 대한 답으로 도피가 조로를 제 팔에 기대앉힌 거였다. 한쪽에서 서류를 보던 크로커다일을 침대 상황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도피의 행동을 예상했음이라.

‘읍ㅡ!’

아니나 다를까, 새 약을 하나 집어든 도피가 보란 듯 제 입에 넣더니 조로의 턱을 잡아올리지 않았나. 입 안을 가득 채운 혓바닥은 채찍과도 같아서 목구멍 깊숙이 파고드니 조로는 속이 울리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도피는 기어코 식도까지 대령된 약을 꿀꺽 삼키는 걸 느낀 뒤에야 입을 떼니 삼키지 못한 타액이 조로의 목을 타고 흘렀다. 곧게 빠진 목선을 지긋이 내려다보던 도피는 손수건을 빼들어 닦아주는데 그 손길이 매우 섬세했다.

‘이제부터는 복용 간격을 더 줄여야 겠어. 약에 내성이 생긴 모양이야.’

조로의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도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여전히 도피의 품에 안긴 채였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크로커다일이 도피에게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조로에게는 지금이 직후나 다름없었다.

“약 먹을 시간이다.”
“읍……!”

겨우 의식이 돌아왔는데 다시 또 입 안을 침범하던 폭군에 조로는 화가 났다. 겨우 손을 뻗어 저지해보려 하지만 약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에 다시 밑으로 가라앉으려던 의식이 가까스로 수면에 걸친 건 어떤 이름 덕분이었다.

“오오, 나미씨!!!”

적어도 상디가 큰소리로 외친 이름만큼은 조로가 잠시나마 약기운을 이길 정도의 유예 시간은 만들어줬다.




에이스의 바다열차 습격사건 기사를 본 나미의 혼란은 우솝이 가져온 단편적인 정보로 풀리게 됐다. 우솝은 통신기를 만지던 중 우연히 혼선됐다는 변명을 늘어놨지만 훈련병 시절부터 알라바스타 내전에 라프텔까지 함께한 동료로서 나미가 모를 리 있겠나. 손재주가 남달랐던 우솝에게 자신의 무기 제작을 부탁하기도 한 그였는데. 때문에 나미는 우솝이 도청용 통신기를 제작 중이었고 시범삼아 그것을 돌렸다가 얘기를 엿들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물론 내용을 들은 그는 조금의 추궁도 없이 잘했다는 한마디를 했고 말이다.

‘루피가 에니에스 로비에 있대, 나미! 마리조아 왕녀 시해 죄라는데 이거 뻥이겠지? 하핫! 누군지 몰라도 목소리가 참 경박스러운 놈이었어. 그러니까 백프로 뻥일 거야.’
‘잘했어, 우솝. 우리는 당장 에니에스 로비로 경로를 바꾼다.’
‘뭐? 자, 잠깐! 이게 백프로 뻥이라는 건 너도 알잖아! 루피라면 절대 그럴 리 없어! 걔가 왜 뜬금없이 마리조아 왕녀를 살해하냐? 루피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라고!!’

양머리 선수대가 순하게 웃음 짓던 갑판 위에서 풍성하고 긴 곱슬머리를 하나로 가지런히 묶은 우솝이 방방 뛰었다. 그는 피노키오처럼 길지만 각지지 않은 코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해군모를 뒤집어쓴 나미는 우솝을 향해 들고 있던 신문을 던진 뒤 키를 잡으려 움직였다.

‘누가 그따위 헛소리를 믿는대? 내 말은 루피가 거기 있는 게 확실하다는 거야. 그러니 에이스가 실패한 루피 구출 작전을 우리가 실행해야지. 그래서 말인데 로빈, 일의 결과에 따라 어쩌면 우리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
‘물론. 나미 선장님 말이라면 나는 지옥이라도 기꺼이 따르기로 했으니까.’
‘로빈……!’

우솝의 호들갑에 뒤이어 나타난 로빈의 대답은 산뜻하기만 했다. 이번 일로 제 평생의 꿈인 포네그리프 해독의 완성이 멀어진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로빈에게 나미와 같은 동료란 꿈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이런 마음이 통한 듯 나미 역시 감동한 얼굴로 로빈을 바라볼 때 우솝은 스스로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그러다 나미가 키를 시원하게 돌리고 고잉 메리 호가 방향을 트니 다급한 우솝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나미! 너 방향은 알고 가는 거야?! 지금 네 손목에 찬 건 드레스로자 영구지침이잖아!’
‘나 못 믿어, 우솝? 영구지침은 우리가 어느 방향을 가든 드레스로자를 가르키니까 그 기울기를 고려해서 바다 열차의 선로를 찾으면 돼. 그 선로를 따르다 보면 이삼일 내로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다고. 음… 물론 사법 섬을 직접 들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 그 직전 역에 들러서 바다 열차를 타는 게 좋겠지만.’
‘사법 섬 전에 열차가 서는 곳은 온천 섬이야.’

바다열차 경로가 표시된 지도를 찾은 로빈이 나미의 설명에 덧붙였다. 꽃꽃 능력을 이용해 손으로 된 길을 만들어 지도를 가져온 거였다. 그에 적어도 바다에서 미아는 안 되겠구나 싶던 우솝은 돌연 가슴을 부여 잡으며 몸을 떨었다.

‘헉! 나 사법 섬에 들어가면 죽는 병이 있는데…….’

이때만 해도 세명 다 일의 심각성이 어느정도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때다. 그래서 우솝도 루피라면 알아서 잘 빠져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꾀병을 부렸는데 그 또한 할 때는 하는 남자였다.

“어이, 시종! 너 짐 안 나르고 뭐해?”
“예이ㅡ 시종 우솝, 바로 짐을 나르겠습니다요!”

경박한 목소리의 욘디가 열차 밖에서 소리치니 흰색과 검은색으로 매치된 시종 복장의 우솝이 머리를 조아리며 움직였다. 종종걸음으로 열차에서 내린 그가 캐리어를 들고 오르는데 오직 나미만 보고 직진하던 상디의 눈에 뒤따르던 여성이 보였다. 직모로 된 검은색 긴 머리를 찰랑이며 들어선 이는 역시 늘 보던 해군복 대신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니코 로빈이었다.

“아아니, 로빈양까지!!! 오 마이 레이디즈! 가슴 깊이 흘러넘치는 사랑과 정열을 나미씨와 로빈양에게! 메로린!”

상디는 통상적으로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열차 내부 통로를 재빠르게 움직여 나미와 로빈의 손등에 무례함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입을 맞췄다. 덕분에 두 사람 다 예상치 못한 데서 본 상디의 행동에 살풋 웃었을 뿐이다. 그 속내는 비록 상디가 손등에 입맞출 때의 예의범절이 레이주와 똑같다는 데서 오는 재미였지만. 이런 부분에서 상디는 특히 레이주와 판박이였다.

“이봐, 상디. 너 나는 안 보이냐?”

바로 옆에서 투명인간 취급당한 우솝이 손가락으로 대놓고 찔러보지만 상디는 아랑곳 않았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우솝이 진짜 안 보이는 양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다른 두 사람을 보기 바빴다.

“그런데 나미씨랑 로빈양은 무슨 일로 이곳에?”
“내 애인들이란다, 상디.”
“뭐라고??!!”

대답은 레이주에게서 나왔다. 순식간에 커진 상디의 외침이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때 약기운에 다시 잠식당할 뻔한 조로가 눈을 떴다. 도피와 크로커다일 역시 저쪽에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조로가 도피에게 파고들며 잔기침을 한 것도 이때였다. 그 움직임에 도피와 크로커다일의 시선이 집중된다. 목에 뭔가 걸린 듯한 소리가 이어질쯤 먼저 손을 쓴 건 도피였다. 물 없이 약을 삼키게 한 게 원인임을 짐작한 그는 조로의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 부러 구토를 유발했으니. 긴 손 가락이 멋대로 목구멍 깊은 곳을 유린하는 감각은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이에 조로가 헛구역질을 하니 알약이 올라왔다. 도피가 그것을 자연스레 손에 받아 펼쳤을 때 알약은 원형태를 거진 유지했다. 맞은편에 있던 크로커다일이 혀를 한번 차고는 약병을 다시 꺼내려 하지만 그 너머의 레이주 일행을 본 도피가 턱짓을 했다. 이런 이유로 크로커다일이 꺼내든 건 자켓에 꽂아둔 행커치프였다. 이를 건내받은 도피가 먼저 조로의 입가를 훔친 뒤 약과 함께 손을 닦아냈다. 직후 조로를 의자에 눕히고 일어섰다.

“손 좀 씻고 오지.”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깔끔 떨었다고.”
“훗. 금방 돌아올 테니 나 보고 싶어도 참고 있어. 그리고… 지금 다시 약을 먹이는 건 괜히 시선끌기밖에 안 되니까 참아라.”

도피의 코트에 싸인 조로는 여전히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피는 크로커다일을 지나기 전에 몸을 숙여 은밀한 지령을 내렸다. 로시의 유산에 관해서라면 때로 그보다 더 앞뒤 안 가리는 게 크로커다일이다. 하니 거의 녹지 않은 약을 본 녀석이 그새를 못 참고 약을 먹일 수도 있음을 직감한 도피의 훈수는 정확했다. 실로 크로커다일은 그럴 생각이 만만했으니까. 때문에 도피는 구역을 벗어나기 전 상대의 어깨를 묵직하게 움켜쥐는 것으로 제 말을 지킬 것을 강요했다. 내내 약에 절여진 조로가 방금 한번 토한 정도로 쉽게 정신을 차리지는 못할 것이며, 지금은 레이주 일행에게 녀석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게 더 우선이라는 걸 알아서다. 그렇게 도피가 자리를 비우고 기다렸다는 듯 열차에 오른 욘디는 윤기 자르르한 흑단머리를 단번에 알아봤다. 드물게 정장을 차려입은 욘디가 말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와 옷매무새를 급히 다잡더니 통로를 비집고 크로커다일의 뒤로 다가왔다.

“크로커다일 경! 나 보고 싶었어?”
‘제길! 하필 이런 때에!’

성큼성큼 질주하는 구둣발 소리에 크로커다일이 벌떡 일어나 돌아섰다. 찰나에 제 코트를 벗어 조로 위를 다시금 덮어둔 그가 열차 등받이에 팔을 기대며 비스듬히 선 채 욘디를 마주했다. 입에 문 시가의 불꽃이 타들어가는 사이로 크로커다일을 올려다보는 욘디는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최근 마리조아 국왕은 대대적으로 궁 내의 사람들을 물갈이했다. 이 기습적인 행사는 크로커다일이 심어둔 사람 대부분을 쳐냈는데 문제는 그들 대부분 행적이 묘연하다는 거다. 이말인즉 살해됐을 거라는 게 확실시되는데 문제는 이뿐 아니었다. 물갈이라면 새 시종을 들이는 게 맞을진대 이번에는 기회가 매우 희박하다는 것. 이유는 마리조아가 물갈이 전에 제3세계에서 사냥을 했기 때문이었다. 제3세계란 세계정부에 가입하지 않은 비가맹국을 일컫는 말로 가맹국의 왕족 또는 귀족이 이곳에서 사냥, 즉 노예 사냥을 하는 건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이때 왕족이라면 해군의 비호까지 받을 수 있으니 이런 실태를 보다 못해 결성된 게 신분제 철폐를 외치는 노예해방군이자 혁명군이었다. 몽키 D. 드래곤을 주축으로 결성된 혁명군은 이를 위해서라면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정신에 입각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노예를 해방하는데 힘쓰고 있었다. 때문에 지난 마리조아의 노예 사냥도 혁명군의 방해를 받아 급히 마무리됐다는데 그 수가 부족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물갈이 후로 궁에 사람을 들인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이로 인해 겨우 궁에 남아 있던 몇도 한동안은 연락을 삼가기로 했으니 크로커다일이 루피의 일을 알게 된 건 믿을만 한 정보원, 즉 욘디의 덕이었다. 이는 지난날 샤를리아 왕녀를 마리조아에 직접 바래다준 레이주가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손을 써둔 덕분이었다. 샤를리아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시종 하나를 제 편으로 끌어들였으니까. 샤를리아는 늙은 왕이 자식들 중 가장 아끼는 존재로 그 시종조차 허투루 뽑은 이가 없었다. 때문에 크로커다일도 샤를리아의 쪽에는 사람을 붙이지 못했고. 그러니 때마침 레이주가 상냥한 태도와 달콤한 말로 꼬드긴 시종의 존재가 빛을 발한 것 아니겠나. 그녀로서는 세상물정 모르고 천진난만한 샤를리아가 걱정되는 마음에 행한 일이라지만.

“루피가 시해하려 한 왕녀는 샤를리아래. 지금 그 왕녀는 중태에 빠져서 사경을 헤매는 중이고. 레이주는 정말 루피의 짓인지 알고 싶댔어. 그리고… 하… 나는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지만 범인이라고 가정해본다면 루피는 반드시 레이주 손에 죽어.”

크로커다일은 조로를 들키지 않으려 욘디에게 순순히 끌려가면서 찰나에 상디와 눈을 맞췄다. 덕분에 조로와 단둘이 얘기할 틈이 생긴 상디는 크로커다일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연신 담배를 피워무는 가운데 찌푸린 미간을 풀릴 줄 모른다. 그는 코트 두 겹에 휩싸인 놈이 제 얘기를 듣고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야, 마리모. 너 내 말 듣기는 했냐?”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던 상디가 구둣발로 맞은편 의자를 찼다. 아직 출발 전인 열차는 모든 문이 개방된 상태다. 때문에 옆 량으로 이동했으나 이쪽을 주시하던 크로커다일이 소리를 따라 머리를 돌릴 때 강직한 손끝이 손등을 훑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덕분에 크로커다일의 주의는 다시 돌아갔고 그는 다시 저를 꼬실 생각이 다분한 욘디를 상대해야 했다. 상디가 레이주에게 간단히 들어버린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의자를 걷어찬 울림에 드디어 코트가 움직이더니 그새 열이 오른 잔디머리가 상디와 눈을 맞췄다.

“하아… 수면제야… 나한테 먹이는 거…….”
“뭐? 아ㅡ 역시!”
“알았으면 각성제든 뭐든 구해와, 에로 요리사.”
“꼭 너까지 움직일 필요 없어. 나미씨랑 로빈양도 루피 일을 알고 왔으니까. 괜히 네가 움직여봐야 이쪽은 폭탄만 두 개 더 끌어안는 꼴이라고. 그러니까 너 아직 말 안 한 게 있으면 지금…….”
“내가 아니면 안 돼. …너희들은 우솝 얼굴도… 모르잖아…. 루피가 감금된 곳까지 안내해준 댔어. 그러려면…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하아, 하… 너희만으로는 우솝도 믿지 않을 거야.”
“잠깐만, 우솝? 우솝이라면 저기 있는데? 나미씨, 로빈양이랑 같이.”

상디가 엄지로 뒤쪽을 가리킬 때였다. 개방된 문을 통해 옆 량에서 이치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시종! 심심한데 개인기 좀 보여봐!”
“예이ㅡ 시종 우솝이 개인기를 선보이겠습니다요! 로빈 아씨 흉내! 나미, 심해어에게 잡아먹힌 거 아닌지 몰라.”
“으하하하! 이녀석 진짜 웃기네!”

니디의 큰 웃음소리가 들림에 상디는 한심함의 긴 숨을 내쉰다. 그는 저놈들과 형제라는 게 좀 창피해졌다. 상디의 형제들은 변죽 좋은 우솝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지만. 그리고 여기 또 하나 인상이 일그러지는 잔디머리가 있지만 사정은 전혀 달랐다.
자고 있을 때면 모를까, 깨어 있으려니 다시 심한 몸살이라도 앓는 듯한 발열과 격통이 이어졌다. 그에 괴로워하던 조로는 옆 량의 소란을 아랑곳 않은 채 할 말만 했다.

“그 우솝 말고 있어 또.”

지금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루피 일을 알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정된 시간과 체력에 우선 순위를 둬야 했으니까.

‘만일 네가 직접 온다면 밀짚모자가 있는 곳까지 안내하겠지만 여기까지구먼.’

카쿠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었다. 본디 통화한 이가 로우였다면 루피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까지였을 뿐. 둘의 거래는 이것까지였다. 이를 토대로 카쿠와 동료들은 위기상황에서 한번의 은신처를 제공받는다. 도피라면 언제든 분명 로우에게 위협이 된 CP9에게 본보기를 보일 터, 그때 한번의 목숨 값을 지불해준다고 했었다. 로우는. 하지만 막상 연락이 닿은 건 조로였고 그렇다면 카쿠도 밀짚모자와의 의리를 지키고자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위험은 차고넘쳤으니 카쿠는 조로가 없다면 절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조로는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도피가 돌아왔을 때 열차는 막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바다 열차는 두 량 가운데 위치한 입구 하나뿐이으니 초대된 왕족 및 귀빈들은 각기 한 량씩 쓴다고 봐야 했다. 이 열차는 어제오늘 온천 섬에 귀빈이 도착할 때마다 수시로 움직였고 말이다. 때문에 현재 레이주 일행도 전부 옆 칸에서 자리를 잡았음이며 개방된 문도 전부 닫혀 있었다. 이로써 화장실 위치가 출입구 맞은편이라는 걸 고려할 때 도피가 돌아온 열차 량이 적막한 것은 당연했다. 각 열차 량마다 호위 목적으로 배치되는 해군을 거절한 것 또한 이쪽이었으니까. 때문에 지금 도피의 눈에 보이는 건 중간 자리에 위치한 분홍 코트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 지점에서 피어오르던 담배연기였다. 톤 다운된 검붉은 수트에 검은색 드레스 셔츠를 매치한 도피는 겅중한 걸음을 하면서도 열차 안의 묘한 공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중앙에 섰을 때 상디는 담배를 문 채로 도피를 힐끗 쳐다본 게 다였다.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린 도피는 코트 두 개에 둘러쌓인 조로를 만족스레 보며 다가갔다. 녀석을 코트째 가뿐히 한 팔에 들어올린 도피가 의자에 앉았다. 검은색 정장 코트를 맞은편 빈 자리에 던진 도피는 깃털 코트에 감싸인 녀석을 이번에도 제 다리 위에 올려뒀다. 그 손길이 살뜰하기 그지없음에 상디가 혀를 찼다. 돌아온 건 피식 비웃는 소리였다.

“녀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뻥끗하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제가 입 다물지 않으면 비비 공주와의 협정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겠다 겁박하신 덕분입니다.”

대놓고 삐딱선을 타는 음성에도 도피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난 여행에서 상디가 비비와 급격히 친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에는 비비가 여성이라는 게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둘은 루피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실로 비비가 도피에게 조로를 돌려달라 말했던 결전의 날에 루피 고기를 똑같이 재현해준 것이 상디 아니던가. 상디는 비비의 말만 듣고 루피의 주머니에 처박혀 굴렀던 고기의 모래맛까지 완벽하게 재현했었다. 그래서 더 의욕적으로 고기에 칼질을 했던 비비의 찬사를 여전히 도청 중에 듣게 된 도피는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게 몇시간을 주머니 속에 방치된 쿰쿰한 냄새라든가, 식어빠진 고기의 찐득함이라던가, 그 사이사이 스며든 흙맛이 완벽하다는 등의 말은 공주와 괴리감이 있지 않은가. 기품 있고 의연한 모습만이 알고 있는 전부였던 도피에게 도청 당시의 비비는 동네 천덕꾸러기 소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날 오후 독대에 응했던 도피는 다시 평소와 같은 공주를 보고 혼란이 가중됐다. 오죽하면 공주에게 저와 비슷한 가정사라도 있지 않을까 고민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크로커다일의 뒷조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네펠타리 왕실이나 알라바스터에 대한 도피의 배경지식 또한 완벽했다. 이로써 비비의 가정사에도 변수란 없다. 이것이 결국 도피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 주제를 안다니 다행이군. 먼저 협정을 위반한 건 이녀석이야. 그런데도 나는 특별히 관용을 베풀었으니 백번 감사해도 모자라지.”

비비에 관해서는 결국 그날의 깨름칙함을 떨치지 못한 도피가 애써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며 말했다.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상디가 미심쩍은 시선을 할 때 도피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눌렀다.

“크흠! 크로커다일은?”
“믿을만 한 정보원에게 고물을 얻으러 갔습죠. 그 대가로 열심히 유혹에 응해주고 있지 않겠습니까?”

주제를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함에 상디는 순순히 뜻에 따라줬다. 바라던 얘기 아니던가. 물론 상디는 죽었다 깨도 욘디의 취향을 이해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순간만은 욘디를 열렬히 응원한다. 젊은 왕을 이리 대놓고 짜증나게 할 만한 존재는 그밖에 없을 것이다. 덕분에 쌤통이다 싶은 상디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비록 그 품에 갇힌 녀석이 눈에 들어오면서는 한숨이 차오른다지만 젊은 왕이 의자 팔걸이를 으스러트리는 걸 보면서 이번에 웃는 건 상디였다. 그는 진심으로 제 형제를 응원했다.











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