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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03:07
많이 생각하다가 전화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전화해.

태섭이 미국 가는 날이 평일이고 오전 비행기라 그 때 시간 되는 사람 정대만 밖에 없어서 혼자 북산 대표로 오게 됨. 처음에야 선배는 수업 안 듣냐며 타박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배웅이 싫은 사람이 어딨겠어. 머쓱하고 쑥스러운 얼굴로 와줘서 고마어요... 하고 감사를 전했지. 평소의 정대만이었다면 송태섭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냐며 머리를 헝클였을텐데, 눈앞의 정대만은 그저 웃기만 하며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지. 애써 올린 머리가 망가진다고 하는 대신 태섭이는 가만히 대만이의 손길을 받았음.

어쩌면 이 순간이 선배와의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그러니 선배가 좋을대로 해주고 싶어. 게다가 착각하고 싶을만큼 손길이 너무 다정하잖아. 그런데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단 말이야. 태섭이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대만이를 보는데 사람 속 시끄럽게 만든 사람은 오히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어 뭐라고 묻지도 못했지. 대만이의 자취방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쥐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탄 태섭이었음.

미국에 온 지 반년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한국에서의 기억이 살짝 흐릿했지만 대만이가 한 말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1년이 지나도 여전히 태섭이 머리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는 서랍장의 첫번째 서랍에 들어가 한번도 나온 적 없었지만 대만이 말처럼 자주 대만이 생각을 하고는 했었어. 그러다 정말 힘들어서 다 놓아버리고 싶은 날이 오고 말았지. 멍하니 있다가 태섭이 눈에 서랍장이 들어왔고 홀린 듯 걸어가서 첫번째 서랍을 열었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쪽지를 보니 갑자기 미친듯이 대만이 목소리가 듣고싶어져서 급하게 전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지. 뚜르르 걸리는 신호를 듣다 혹시나 그냥 한 말인데 괜히 전화를 해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찰나,

- 태섭아?
"....진짜 받네?"
-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했잖아.

1년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 한 것처럼 여상한 말에 태섭이는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안심하고 말았지.

- 잠깐만, 내가 다시 걸게. 너 전화번호 가르쳐줘봐.
"네? 잠시만요."

갑작스럽게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고 조금 기다리면 전화벨이 울리고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오겠지.

"나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 기다렸으니까 알지.
"무슨...."
- 미국은 지낼만해?

1년 만에 전화인데도 전혀 어색함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 사이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음. 문득 정대만이 제 인생에 불쑥 나타났던 때를 생각함. 힘들 때 나타나고 힘든 때를 만들며 나타나고 다시 힘들 때 나타나고. 나갈 듯 나가지 않고 계속 제 앞에 나타나는 이 선배가 정말 신기하면서 계속 나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음. 그래서인가,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지.

"선배."
- 왜?
"앞으로도 계속 제 전화 받아주세요."
- 당연하지. 내가 받아준다고 했잖아.
"그런가..."
- 태섭아, 1년동안 네 전화만 기다렸어.
"네?"
- 여태 전화가 없어서 나 같은 건 잊어버리고 사는 줄 알았어.

선배 같은 사람을, 제가 어떻게 잊어요. 절대 못 잊게 했으면서. 차마 전하지 못 할 말은 목구멍 깊숙이 넣어두고 하하 웃기만 하니 건너편에서도 잔잔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지. 대만이의 웃음소리만으로도 태섭이는 두근두근거렸음.




대만태섭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