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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22:20
1편 : https://hygall.com/603043220
(요약 : 10년 넘게 소꿉친구이던 허니와 아놀드. 1군 데뷔 첫시즌에 놀드가 허니한테 고백함)
우리의 이야기 장르는 우정이어야만 한다.
“나 너 좋아해.”
고백을 받았는데,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순간 시야가 흐려지고, 숨이 가빠져오는 느낌이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그 애가 떨어트릴까 걱정되었는지 핫초코와 츄러스를 제 손으로 가져갔다.
“미안. 놀랐나보다.”
고백을 한 애가 사과할 때가 되서야, 나는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언제… 부터야?”
내가 트렌트와 나눴던 모든 것이 나에겐 우정이었지만, 그에게는 가슴 아릴 짝사랑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 쓸쓸해졌다. 차라리 얼마되지 않았길 바랐지만, 우직한 그 녀석의 대답은 내 바람을 박살내 버렸다. 중학교 끝날 쯤부터.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그 애는 나의 답을 각오한 것 같았다. 나는 슬픈 눈으로 그 애를 바라봤다. 지금 나 역시 저런 눈일까.
“트렌트, 넌 십년 넘는 시간 동안 내겐 형제나 마찬가지였어.”
“그리고… 난 너의 여자친구로는 함께할 수 없어. 미안해. 집까진 내가 혼자 갈게.”
그 애의 송아지 같은 눈망울이 더 깊은 슬픔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두고볼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들뜨고 설레어하는 사람들을 헤치며, 모두가 행복한 윈터 원더랜드 한복판에 그 애를 그렇게 둔 채로 나는 도망쳤다.
내가 트렌트의 고백을 거절한 것은 단순히 그가 나의 친구여서만이 아니었다. 나는 축구선수의 유명세가 그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얼마나 갉아먹는지 성장하면서 수도 없이 봐왔다. 성공한 선수는 달콤한 꼬드김에 넘어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그의 파트너 역시 원하지 않는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을 지역 신문에서부터 봐왔지 않은가. 그들이 날 때부터 그렇게 충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그렇게 신의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유명세가 두려웠다. 그리고…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 트렌트에게 그런 식으로 버림받는 것도, 트렌트가 그렇게 변해버리는 것도 두려웠다. 그를 정말 아끼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이 누구보다 많지만, 그래서 나는 친구로만 머물고 싶었다.
나는 언젠가 한번 이 주제로 트렌트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까, 다른 팀 간판 스타의 불륜으로 인해 세간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그가 평소에 보여줬던 리더십과 올바른 행보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트렌트는 그때 나 못지 않게 그 선수의 그런 불륜을 비판하며, 왜 선수들은 유명해지면 초심을 잃는지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안필드에서 뛸 수만 있다면, 축구만 바라보고 그런 잡생각은 하지도 않을텐데!”
축구를 사랑하는 그 애의 고백을 거절한 이유가 그 애가 유명한 축구선수이기 때문이라서,
라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찌질하게도.
그 아이의 고백을 거절했어도 그건 트렌트와 허니 비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 우리들 가족 사이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여전히 내 엄마는 트렌트의 어머니 다이애나와 하루가 멀다하고 차를 마셨고, 서로의 딸과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아버지들은 주말마다 열을 내며 축구를 보셨고, 정원 가꾸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셨다. 그리고 매년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박싱데이가 끝나고 새해가 지나면 다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 대학교도 크리스마스-연초 방학기간이라 빠질 수 있는 어떠한 핑계도 댈 수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옆집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성화로 이번엔 직접 만든 케익을 들고. 문을 두드렸더니 트렌트가 열어주었다.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밝게 웃으며 나와 부모님을 맞이했다.
“어서와. 안녕하세요! 안에서 준비하고 계세요. 거의 끝났어요.”
윈터원더랜드에서의 그 일이 있고 약 3주만에 보는 그 애는 살이 좀 빠져있었다. 박싱데이 일정이 많이 고됐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둘만 있을 상황을 피하며 그 애의 가족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다이애나는 내 어머니께 하도 소식을 많이 들어 아직도 내가 옆집에 있는 것만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창 연애중이라는 트렌트의 형은 오랜만에 집에 온 나를 반겨주며, 꼬맹이 다 컸다고 신기해 했다. 이렇게 예쁜데 찝적거리는 런던 샌님들은 없었냐는 물음에는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그 애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다.
“찝적은 무슨, 다 공부하느라 바빠.”
그 애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뒤돌아서 트리를 정리하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화기애애했던 식사시간이 지나고, 우리 가족이 준비한 술과 디저트들을 마시며 차분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나는 실내 공기가 좀 더워져 바람을 쐴 겸 언제나 가던 집앞 공원으로 나왔다. 외투를 더 두꺼운 걸 가지고 올걸.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후회를 하던 찰나, 뒤에서 오늘 저녁 내내 필사의 노력으로 피하던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추워?”
뒤돌아보니 그 애가 자신의 코트 하나를 내게 뻗은 채였다. 나는 민망해하며 받아 팔을 껴넣었다.
“춥네.”
우리는 따로 말하진 않았지만 자연스레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함께 수많은 시간을 보냈던 공터와 놀이터를 지났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내 마음이 너무 앞섰나보다.”
“사과하면 내가 더 나쁜 사람 되는거 알지? 그냥 나한테 다 뒤집어씌워.”
“부담갖지 말고… 그래도 종종 연락해. 넌 런던에 혼자 나가있잖아. 내 엄마도 입버릇처럼 걱정해. 너 런던에 잘 있는지.”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애의 고백을 거절하고 나서 몇주동안 (당연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십년 넘게 일상을 공유하던 친구가 뚝 떨어져 나가니 정말이지 적응이 되지 않았었다. 밤공기를 맞으며 그 애에게 시험 본 이야기를 했다. 생각보다 점수가 더 잘 나왔다고 하자 넌 공부는 항상 잘했잖아, 하며 나를 추켜세워줬다. 마치 학생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애에게서 듣는 축구 이야기, 내가 전해주는 학교와 공부 이야기. 일상적이고 매일 똑같은 나의 이야기가 더 재미없을텐데도, 트렌트는 항상 귀기울여 들었다. 서로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트렌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허니, 날 거절한 이유가 정말 우리가 친구여서야?”
“...뭐?”
“그날 사실 더 묻고 싶었어. 우리는 친구라서 안 되는거야?”
흔들림 없는 그 애의 눈동자에 나는 솔직히 말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입술 안쪽을 물다가 그 애의 용기에 나도 솔직해지기로 결심하고 말했다.
“나는 네가 얻게 될 유명세가 두려워. 우리가 자라면서 수없이 봐왔잖아. 축구선수들의 외도나 불륜… 또는 구설수들. 그 선수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들이 유명해지면서 얻게 되는 인기가 그들의 판단력을 흐린다고 생각해. 지금의 너는 영리하고 너의 삶을 제대로 단속하지만… 나는 네가 언젠가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축구를 가장 사랑하는 너를 거절하는 이유가, 바로 네가 축구선수이기 때문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어…”
*
이것은 그 애를 향한 나의 짝사랑이야기다.
우리의 첫만남은 그 애가 내 옆집으로 이사오면서 시작한다. 나는 그 당시 리버풀 아카데미에 막 입단해 매일매일이 날아갈듯이 신이 나 있었다. 나의 형제들과 함께 날이면 날마다 축구하는 것이 그저 행복이던 시절이었다. 어느 여름날, 집앞으로 큰 이사 차량이 오더니 하나 둘씩 가구를 내리고, 뒤따라 오는 승용차에서는 내 또래의 여자애가 내리는 걸 창문에 붙어서 지켜보았다. 그 애의 어머니가 여자애에게 무어라 말을 하니 여자애는 집앞 공원으로 가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나의 형제들이 매일같이 축구를 하는 그곳에서.
내가 축구공으로 그 여자애를 맞췄을 때는 아찔한 느낌은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실수를 한 날이었다. 그 애가 다시 눈을 떠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크게 다치지 않아 정말 안도했었다. 내 어머니는 노발대발해 우리 형제들에게 일주일 간 축구금지령을 내렸고, 형제 모두가 토달지 않고 납득했던 대형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애와 동갑이었던 나에게는 어머니께서 특별히 당부했다. 저 아이가 여기에 이사온 데다가, 런던에서 살다 왔다지만 이민자 가족이니 낯선 게 많을 거라고. 저 애가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괴롭힘 당하면 네가 나서서 도와주라고. 그 날 이후로 나는 어딜 가든 허니와 함께였다.
학교에서는 그애와 함께 밥을 먹었고, 학교가 끝나면 그 애에게 내가 연습한 축구기술을 보여줬다. 허니는 언제나 내가 보여주는 축구의 열렬한 서포터이자 관중이었다. 내가 안필드에서 뛴다면 저런 관중들의 환호를 받겠지? 이런 어린 아이의 상상을 한 적도 수번이었다. 축구에 아예 관심이 없던 허니는 나 덕분에 리버풀fc를 응원하게 되었고, 내가 알려주는 기술들도 제법 잘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우리는 같은 학교였기 때문에 늘 함께였다. 서툴지만 축구를 하는 그 애의 모습을 보며 내가 놀리기도 하고, 내가 하도 학교 공부를 안 해 수업시간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날이면 그 애가 뒤에서 킥킥대며 웃는 그런 날들이었다. 하도 이렇다 보니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나와 허니가 사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자존심 때문에 코웃음을 치며 나와 허니 모두 아무 대꾸도 안 하고 넘어갔지만,
처음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허니 정도면 사귀는 건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일상을 함께하고, 서로 제일 친한 친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고, 그 애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허니 역시 마찬가지고… 정말이지 그 애가 없는 나의 하루 단 한부분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져 형에게 물어봤다. 내가 허니를 좋아하는 건지. 형의 물음은 간단했다.
“걔랑 손 잡고 싶어?”
“평소에도 가끔 손은 잡는데?”
“그런 거 말고… 아, 그럼 뽀뽀는 하고 싶어?”
“미쳤냐?”
“그럼 아니네.”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라고. 결국 형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와 허니 모두 서로를 볼 시간 자체가 줄어들었다. 허니는 Grammar school에, 나는 구단훈련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학교인 Rainhill high에 가느라 서로의 통학시간이 말도 못하게 길어진 것이다. 학교가 끝나고 서로 만나는 것은 사치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훈련을 가고, 다시 1시간 차를 타고 저녁 늦게 집에 도착하면 저녁은 먹는둥 마는둥 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 학교 숙제들과 씨름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새 학교는 내가 사는 동네하고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는 녀석들도 없었고, 친구를 사귀기에는 내가 훈련으로 수업의 절반을 빠지다 보니 녹록치 않았다. 이러한 생활을 한달 쯤 이어가니 그 애가 보고싶어졌다. 그래서 집에 도착해서 무작정 숙제를 들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숙제를 핑계로 그 애를 보러 오길 정말 잘한 날이었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함께 앉아 공부하는 것은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힘을 내어 노력해도 다시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리버풀 사람이 무슨 오아시스 노래를 듣느냐며 괜히 핀잔을 주었지만, 그 애가 트는 노래를 들으며 샤프펜슬을 움직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어려서부터 그 애가 쓰던 샴푸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애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 손가락으로는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내가 에세이를 쓰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다닥, 타다닥, 그 애의 손가락이 리드미컬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형. 뽀뽀는 모르겠고, 손은 잡고 싶어.
그 애에게 내가 유스팀 주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자 자기 일처럼 폴짝폴짝 뛰며 기뻐해주는 모습이 고맙고 귀여웠다. 공부에 집중하는 시기인 그 애를 주말리그 경기에 초대하는 것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허니는 일주일에 한번 두시간 경기 보는 것쯤이야 신경쓰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켜줬다.
첫 주장 완장을 단 그 날 경기는 다행히 우리팀이 이기고 내가 공격 포인트를 쌓기까지 했다. 허니를 초대했는데 결과가 좋아 다행이었다. 관중석으로 가자 허니가 리버풀 스카프를 흔들며 환호해줬다.
“그렇다고 네가 첫 완장 단 경기를 빼먹을 수 있겠어?”
허니가 해주는 응원은 제법 달콤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푸흡 웃음이 나왔다. 난 경기를 이긴 도파민 때문인지 용기가 생겨 허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릴 때 잡던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얘 손이 이렇게 작았나?
“앞으로도 와줄 수 있어, 허니?”
허니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애의 손을 다시 한번 힘주어 꽉 잡은 뒤 인사를 하고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두근거렸다. 잊지 못할 하루였다.
허니는 결국 독하게 공부해 본인이 원하던 대로 런던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나대로 유스팀 감독이던 펩 코치님의 추천으로 1군 데뷔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러 주전 경쟁 끝에 리그 무대에도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리그의 전반기가 끝나는 12월 박싱데이 무렵, 런던 원정이 잡혀있길래 여느 때처럼 허니를 초대했다. 어릴 때처럼 매일 함께하지는 못 할지언정, 런던 원정 경기에는 언제나 허니가 함께였다.
연이은 경기에 우리팀도, 상대팀도 지쳐있는 것이 느껴졌다. 선제골을 넣어놓고도 수비 집중력이 흐트러져 역습을 허용해 실점하고 말았다. 그 애가 보고있는데 질 수는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후반 추가시간에 상대 진영에서 공을 몰며 올라가다가 크로스를 하는 척 상대 수비수를 맞춰 코너킥을 얻어냈다. 오른쪽 코너로 이동해 전술회의에서 했던 대로 랄라나 형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정확히 공을 차올리자, 순식간에 공이 골망을 흔들었고 멀리 원정석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동료들과 뜨겁게 축하하고, 종료 휘슬이 울렸다.
12월 중순의 런던에는 윈터원더랜드라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사실 이번 원정 경기가 끝나면 허니와 함께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려고 남몰래 준비를 해두었다. 리버풀에서만 나고 자란 나는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하기도 했고, 런던 출신 선수들이 여자친구 데려가더니 좋아하더란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이 그 날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며 허니에게 경기장 라운지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연락을 해두었다.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감독님과 코치님들, 동료들에게 인사를 한 뒤 라운지로 올라갔더니 허니가 멀리서 웬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군지 경계하며 다가가자 집요하고, 잘생겼다고 이름난 스카이스포츠의 해링턴 기자였다. 일부러 크게 이름을 부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인사를 하며 허니를 내 등뒤로 숨겼다.
“포스트매치 인터뷰가 필요하면 피치로 내려오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해드렸을텐데.”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하자 기자가 다 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젠장, 허니한테 수작을 부렸을까봐 걱정되었다.
윈터원더랜드에 허니를 데려간건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당연히 와봤을 줄 알았는데, 허니는 처음 와본다며 신이 나서 이곳 저곳을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보이는 음식 상점마다 다 먹어보고 싶다며 상기되서 말하다가, 핫초코와 츄로가 유명한거 같다며 줄을 서서는 대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종알종알 얘기해주었다. 나는 경험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내 또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허니가 보내는 이곳에서의 일상을 상상해보았다.
음식을 안 먹겠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허니가 장난스럽게 크리스마스 소원이라고 먹어보라고 매달리자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핫초코를 든 손을 겹쳐잡고 한모금 마시자 따듯하고 달달한 그 맛에 긴장했던 온 몸이 녹는 듯 했다. 그래 허니, 너와 있으면 늘 이렇게 편하고, 안정된 느낌이야. 언제나 내가 돌아갈 곳은 너라는 이 느낌. 허니, 하고 그 애를 불렀다.
“나 너 좋아해.”
용기를 내서 인생 첫 고백을 했다.
당연히 Yes를 생각했는데 그 애의 표정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눈이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허니를 보니 미안해졌다. 손을 떨길래 그 애가 잡고 있던 간식들을 옮겨 들었다.
허니는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에 연인으로서는 함께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애는 피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고, 나는 먹지도 못할 간식을 들고 그곳에 서있었다. 온통 사랑과 설렘뿐인 윈터 원더랜드에서, 나는 제일 친했던 친구에게 거절당했다.
차인 이후, 한주쯤 지나 후유증이 사라지자 형과 이 일에 대해 상의하고 싶어졌다. 훈련을 마치고 집에 와 형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고백했더니 걔가 좀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었거든? 그게 고백에 놀란건지… 뭔지 모르겠어.”
“형이 항상 말했잖아. 고백은 폭탄투하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거라고.”
“알지. 그래서 우리 사이 정도면 티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형이 보기엔 아냐?”
“나도 솔직히 너네 언젠간 사귈 거라 생각하긴 했어. 그래도 허니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너를 진짜 친구로만 생각했나봐.”
하아. 씁쓸해져 고개를 떨구었다. 옆에서 형이 어쩌냐 내 동생, Friend Zone에 갖히다니, 하며 놀려대도 대꾸할 기색도 없었다.
“계속 들이대진 말고, 일단 잠잠히 있어봐. 한번 차였다고 너네가 안 볼 사이는 아니잖아. 가족끼리 계속 만나는데. 당장 해 바뀌고 가족모임할 때 꼭 와.”
새해가 찾아오고, 두 가족의 연례 행사인 새해 맞이 가족모임을 우리집에서 열었다. 허니와는 어색하게 인사하고, 허니의 부모님과 주로 이야기를 나눴다. 내 형제들은 카우치에 앉아 허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트리를 정리해 넣는다는 핑계로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않았다. 타일러 형이 허니에게 남자친구 없느냐는 질문을 하자, 허니는 바로 없다고 했다. 입꼬리가 슬몃 올라갔다. 트리를 정리하면서도 귀는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술기운이 오른 허니는 말 없이 자기 외투를 챙겨 집 밖으로 나갔다. 쟤 또 저러다 감기 걸리지. 날이 추운데 얇은 겉옷만 입고나가는 그 애를 보며 내 코트를 한벌 챙겨 따라 나섰다. 옷을 건네주고, 우리의 역사가 깃든 집앞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든 내 고백에 대해서 사과하자 그 애는 그러지 말라며 다 자기가 뒤집어쓰겠다 했다. 허니다웠다. 그 애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 금세 전처럼 친구 사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런던 생활에 적응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서 외롭지는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대학공부는 고등학교 공부랑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섣불리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주간 나누지 못했던 일상들을 알게 되자,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나를 거절한 이유가 정말 우리가 친구라는 이유만인지.
그러자 놀랍게도, 허니는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 애는 내가 축구선수로서 얻게 될 유명세와 구설수가 두렵다고 했다.
솜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거였어, 허니?
오히려 간단한 해결책을 찾은 것처럼 여겨졌다. 마음이 가벼워져 웃으면서 그 애에게 말했다.
“내가 10년 동안 너한테 그 만큼 믿음을 못 줬나보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아니, 네가 그렇다는 건 아니구… 왜 선수들 유명해지면 그러잖아…”
허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앞으로 허니에게 믿음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럼, 그냥 나 하는 거 지켜봐 전처럼. 세상을 뒤집을 축구선수가 될게. 그치만 여전히 네가 아는 웨스트 더비의 꼬맹이 마음가짐은 간직할거야. 만약 내가 사고치고 다닌다? 네가 먼저 와서 내 뒤통수 후려줘.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하고. 내 형제들이랑 부모님보다 먼저.”
나의 장난기 어린 말에 허니가 그제서야 푸핫 하고 웃었다. 네가 나 공으로 맞춘 만큼 세게 후려도 되냐? 하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로 그 애는 완전히 기분이 풀려있었다.
“괜찮은 놈 있으면 사귀고, 나한테 숨길 필요 없어. 데리고 경기장 와도 되. 혹시 알아? 질투나서 내가 더 열심히 뛸지.”
그 애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니가 진짜로 남자친구랑 같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도 어떨지 상상은 안 갔다. 일단 데리고 와봐. 엄청난 경기를 보여줄테니까. 그렇게 후련하게 서로 마음을 터놓은 다음, 우리는 더 걷다가 추워져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의 커리어 동안 절대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좋은 선수이자 좋은 사람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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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귀는건 아니고 계속 놀드 혼자 신경쓰는 애매한 상태
놀드너뻥 강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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