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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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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협이 과거 날조 주의

 




대협의 고향은 도시가 아니다.
그곳은 외딴 바닷가다. 어쩌면 진짜 고향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협은 그곳을 고향이라 여긴다.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항상 그곳을 떠올린다. 몇 안 되는 집들과 딱 그 가구 수만큼의 노인들만 있는 외딴 바닷가 마을, 대협은 그 마을의 유일한 어린 아이였다. 그리고 대협의 집은 얼마 안 되는 집 중에서 가장 좋은 집이었다. 까마득한 바닷가 절벽 위의 아주 멋진 집, 대협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기억은 흐려지지 않는다. 그 집이 좋았다. 언제나 그랬다. 그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은 더 좋았다. 대협을 세상에서 가장 예뻐해주던 할아버지의 품 속을 기억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바닷가를 걷고 낚시를 하고 마을의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착하고 의젓하다고 칭찬을 들으며 보내던 하루하루. 유치원 같은 건 있지도 않고 학교는 옆집 할머니 차를 얻어 타고 한참을 가야 했던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했다.
가끔, 아주 가끔씩 할아버지가 혼자 울고 있을 때만 빼면.-
대협 몰래 어떤 사진을 보며 울던 할아버지를 처음 봤던 건 5살 때였다. 대협은 기억한다. 잊었던 적이 없다. 어린 대협은 그 슬픔이 싫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울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울고 있는 할아버지 방문을 열고 들어가 왜 울어요? 하고 물었다. 울지 말아요, 하고 말했다. 놀라 보였던 할아버지는 뭐라 대답하지 못 했고 대협은 그런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대협과 놀랍도록 닮은, 아주 예쁜 여자의 사진을. 그리고 그 순간 할아버지는 뭐라 말을 못 하고 눈물을 더 쏟아냈다. 그러면서 더듬더듬 대협의 엄마가 보고 싶어 그랬다고, 딸이 보고 싶어서 울었다고 했다. 큰 소리로 울면서 그러는 바람에 대협도 같이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할아버지가 정말 훨씬 더 슬퍼 보였다. 왠지 그 순간 대협은 그게 더 마음 아팠다. 그래서 조금 나온 자신의 눈물을 닦고선 할아버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주 열심히 닦아주었다. 할아버지, 울지 마요. 울지 말아요. 하고 말하면서. 간혹 할아버지가 우는 날이 또다시 오면, 그런 모습을 보게 될 때마다 그랬다. 할아버지의 주름진 눈가를 꼭꼭 닦아주며 말했다.
할아버지, 울지 말아요.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그런 나날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이어졌다. 그 속에서 대협은 학교에 가서 엄마나 아빠 같은 것에 대해 배워도 할아버지에게 뭔가를 묻지 않는 속 깊고 다정한 손자이자, 그런 친구에 그런 학생으로 자랐다. 당장 1학년 때부터 가만히 있어도 또래들보다 압도적으로 어른스럽고 성숙해 보였으며 실제로 그랬다.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 학교에서 그런 아이는 대단히 눈에 띄는 법이라 자연스럽게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되어도 단 한번도 젠채하지 않고 필요하면 뒤로 물러나 다른 사람을 도와줄 줄 알았다. 천성이었다. 사람들을 대협에게 끌리게 하고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축복과도 같은 천성. 그리하여 정말 모두가 대협을 무척 좋아했다. 대협 또한 그랬다. 그들이 좋았다. 모두 다 좋았다. 그 애정과 호의가 고맙고 기뻤다. 무난무난하게 잘 지내다가도 종종 자신에게는 엄마 아빠가 없다는 생각에 할아버지의 우는 얼굴이 떠오르고, 애초에 알지도 못했던 빈 자리에 뭔지도 모를 상실감이 느껴져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주변 사람들의 상냥한 관심과 따뜻한 눈빛에 어린 대협은 언제나 다시 웃을 수 있었다. 허전함도 쓸쓸함도 슬픔도 할아버지와 친구들과 선생님과 마을 어른들과 있다 보면 어느새 잊을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완전한 세계였다. 또한, 행운이 따르는 세계이기도 했다.
“와, 대협이가 네잎 클로버 찾았다!”
1학년 때 처음으로 소풍을 간 날이었다. 클로버가 가득한 언덕이었고 누군가 네잎 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가 네잎 클로버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협은 그날 유일하게 네잎 클로버를 찾은, 심지어 아주 쉽게 찾은 단 한 명이었다.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바로 눈에 보였었다. 너무 금방 찾는 바람에 대협은 보고서도 한참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주 열심히 뒤졌는데도 찾지 못 했다. 오로지 대협의 눈에만 들어온 그 네잎 클로버는, 그 행운은 대협이 크게 애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협의 몫이 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대협은 그 네잎 클로버를 소중히 간직해서 집에 가져가 할아버지에게 선물하고 소풍 때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대협이는 운이 좋구나.”
운이 좋다, 그 말의 뜻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던 어린 대협은 곧 그 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대협의 삶이 가르쳐주었다. 그런 일이 잦았다. 딱히 구하지 않아도, 어쩔 때는 원하지조차 않아도 자잘한 행운들이 저절로 대협의 삶에 굴러들어왔다. 타고난 외모 역시 그런 행운 중 하나였다. 허나 그것 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일도 많았다.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가 대협을 자꾸만 바라보는 건 그렇다 쳐도 가위바위보나 자리 뽑기, 시험지 답을 찍는 사소한 것이나 놀러 가는 날마다의 화창한 날씨처럼 초자연적인 것들까지. 아주 많은 것들이 유달리 대협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낚시가 있었다. 마치 대협의 행운을 증명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마냥. 아주 처음부터 그랬다. 그냥 던지기만 하면 되는 날이 수두룩이었다. 정말 괴상할 만큼 운이 따랐다. 그런 일상 속에서 대협은 불안이라는 감각을 잘 모르고 지냈다. 늘 여유가 있었다. 행운의 신이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또 감사히 받아들였던 어린 날의 대협은 그 포근한 세계 안에서 행복하게 잘 지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12월 20일. 수요일이었다. 대협은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조금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조금만 하고, 늘 타던 옆집 할머니 차를 얻어 타고 할아버지! 하고 외치며 집에 들어왔다. 대답이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 시간에 자지 않았고 어디로 나가지도 않았다. 대협이 돌아오는 시간이면 언제나 집에 있었고 언제나 바로 대답했다. 그래서 대협은 조금 놀란 채 할아버지를 찾아 집 안을 돌아다니다 곧 바닥에 쓰러져있는 할아버지를 부엌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6학년이었던 대협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고함을 질러 할아버지를 깨우려다 실패한 후 119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대협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학교에서 배운 인공 호흡이란 걸 하고 울며 소리를 쳤다. 제대로 하는 지 안 하는 지도 모른 채 필사적으로 했다. 멀리 있는 마을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대협의 집에 구급차가 도착한 건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사실 대협이 도착했을 때도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떠났다. 할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13살의 대협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도 전에, 모든 일들이 폭풍처럼 진행되었다.



“너구나.”
그 남자는 그렇게 키가 크지 않았다. 할아버지보다는 한참 작았고 5학년 때 이미 170을 넘어 더 자라버린 대협과도 눈높이가 그렇게 많이 차이 나지 않았다. 마을 할머니들의 도움으로 단정히 상복을 차려입고 있던 대협의 얼굴엔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런 대협의 얼굴을 보고서도 인사도 없이 대뜸 그 말부터 했던 남자에게도 대협은 예를 갖춰 인사를 했었다. 장례식을 도와주던 마을 어른들이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은 다 할아버지의 손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할아버지의 손님이 아니라는 걸, 자신을 보러 왔다는 걸.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뭔 짓이야, 인사부터 해. …예의 좀 지켜”
그리고 그 남자 옆에서 입술을 짓씹으며 그렇게 말하던 여자가 있었다. 눈에 온통 핏발이 서있던, 몹시 성나보이던 여자. 가방을 들고 있던 손톱 끝이 하얬다. 가방을 너무 세게 쥐어서 그런 거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등을 떠밀자 남자가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할아버지의 사진에 절을 했고 여자는 그 뒤에서 무섭게 남자를 노려보다가 남자가 일어나자 자신도 절을 했다. 그제서야 대협은 그 남자와 여자 뒤에 서있는 아저씨들 두 명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절도 안 하고 앉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뒤에 서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절을 하고 나서 식당 쪽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제멋대로 대협을 데리고 장례식장 뒤에 있던 작은 방으로 갔다. 남자와 여자, 대협 셋만 그 작은 방에 남고 아저씨들은 문을 닫고 나갔다. 당연히 대협은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몰랐다.
“대협이라고 했지?
딱히 친절하지 않던 남자의 물음에 대협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옆을 한번 돌아보았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 옮겨진 대협의 시야에 시뻘게진 여자의 눈이 들어왔다. 삼일 동안 장례식장을 지키며 대협은 우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슬픔에 젖어 들어가는 수많은 눈동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달랐다. 그건 슬픔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꽉 깨문 잇새 사이로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고 당황한 대협과 달리 남자는 놀란 시늉조차 않았다. 한번 슥 보고 그만이었다. 그러고선 열린 남자의 입술에서 나온 말에 대협이 놀란 걸 보고도 그랬다. 남자는 태연했다.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모조리 날려버리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내가 네 아빠다.”
그 느닷없는 말에 대협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흐으흑, 하고 여자의 숨소리가 사나워진 게 먼저였다. 결국 눈물이 한 방울 여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눈도 입도 둥그래진 대협의 시선이 불안하게 남자와 여자 사이를 오가든 말든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여기는 네 엄마고.”
그 말에 여자의 눈에서 본격적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남자를 죽일 듯 노려보곤 이를 악물고 울었다. 허나 대협은 더 이상 거기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자신이 방금 들은 엄청난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빠? 엄마? 아빠라니? 엄마라니? 자신의 엄마라니? 대협은 자신의 엄마를 알았다. 할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똑닮은 엄마의 사진을 할아버지에게 받아 수 십장도 넘게 가지고 있었고 침대 맡 예쁜 액자에 넣어둔 것도 여러 장이었다. 이 여자는, 이 서럽게 울고 있는 여자는 자신의 엄마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착각의 여지조차 없었다. 머리가 멍해져 무슨 말도 안 나왔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고 갑자기 너무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할아버지가 쓰러져버린 순간부터 계속 그랬지만 그 순간 더할 수 없이, 미치도록 할아버지가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어졌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엄마 이야기나 듣고 싶었다. 그러나 대협과 여자가 그러든 말든 남자는 상황 파악을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이런저런 말을 더 해댔는데, 그때부터는 진짜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입도 뻥긋 못 하고 바닥만 쳐다봤다. 당연히 대협이라고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친아빠가, 하늘나라에 있다는 엄마가 나타나는 상상을 안 해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지금 눈앞의 상황은 자신의 상상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풍경이었다.
-탁
그 소리는 장례식 뒷방의 작은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넋이 나가 있던 대협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그 소리가 어느 순간 귀에 들어와 바보처럼 고개를 드니 남자의 나가는 뒷모습만 보였다. 그 작은 뒷방에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여자의 울음소리와 대협만 남겨둔 채로, 남자는 무책임하게 잘도 나갔다. 여자는 벌벌 떨리는 주먹을 바닥에 내려꽂은 채 토하듯이 울고 있었다. 남자가 나가버린 문을 바라보며 분노를 넘어선 고통과 슬픔에 일그러진 얼굴로 울었다. 그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던 얼굴을 대협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는 것이 느껴지던 순간, 대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여자의 얼굴에 할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여자랑 할아버지는 하나도 안 닮았는데 할아버지가 우는 걸 처음 봤던 그날이, 그날 할아버지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그 여자의 얼굴 위에 얹혀졌다. 이유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젖은 뺨에 대협의 손이 닿자 흠칫하곤 고개를 돌린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두 쌍의 눈 모두 슬픔과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대협은 알 수 있었다.
“…”
“…”
침묵은 짧았고 곧 두 사람 모두 눈물이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볼이 젖는 것을 느끼며 대협은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자꾸만 그날을 떠올리며 멈추지 않는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여자의 눈썹이 형편없이 흔들리더니 곧 구겨져 있던 미간이 아래로 풀렸다. 그리고선 흔들리며 요동쳤다. 여자의 뺨을 감싸주던 대협은 그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깊은 곳까지 함께 흔들리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여자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길을 잃은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울음소리가 모든 것을 가득 채워 여자의 눈물이 대협의 뺨으로 뚝뚝 떨어져 자신의 눈물과 뒤섞였다. 그 눈물이 이상하게 따뜻하고 촉촉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대협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둑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그때부터 눈물이 넘치듯 흘러내렸다. 막을 수도 참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여자가 자신을 끌어안아, 대협은 그 품 속에 갇힌 듯 숨은 듯 몸을 웅크리고 함께 울었다. 나오는 눈물을 참지 않고 모조리 흘려보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만큼 소리내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울음 중간중간 여자가 말했다. 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했다. 끊기지 않는 울음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대협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이는 잘못이 없어, 넌 잘못이 없어, 나도 아는데, 아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대협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말은 마치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의미가 아닌데,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랬다. 그래서 그 말이 대협의 가슴 속에 남았다. 쏟아지는 눈물로도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가 되어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와 함께 깊어지던 장례식의 밤이 할아버지의 발인과 함께 끝나자마자, 대협은 잘 모르는 어른들과 잘 모르는 장소에 있게 되었다. 한 곳에만 머무르지도 않았다. 여기 좀 있다가 저기 좀 있는 날들이 이어졌다. 가끔은 어디론가로 가서 작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사진도 찍었다. 친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따뜻하지도 않았던 어른들에게 집에 언제 가냐고, 왜 사진을 찍냐고 열심히 묻다가 이제 다른 집에 간다, 다 필요해서 그런다는 대답만 열 번째쯤 듣고 나서 대협은 뭔가 묻는 걸 포기했다. 6년 동안 다니던 초등학교의 졸업식조차 참여하지 못했다. 그나마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과 짧게나마 작별 인사를 하고 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챙겨올 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모르는 어른들이 함께 앉아있는 큰 차를 타고 마을을 떠나며, 대협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할아버지와 살았던 집은 너무 멀어 조그맣게 보였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던 풍경이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차 안이 조용해지자 대협은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이 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 다시 이 아름다운 세계로 돌아와 살아갈 수 없다, 자신에게 그 삶과 이 세계는, 완전히 끝났다. 대협은 알았다. 알 수 있었다.
“사모님, 도착했습니다.”
자신의 옆에 앉은 아저씨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몇 번이나 들었을까. 종종 대협은 그렇게 자신이 엄마라고 불러야 된다는 여자와도 만나야 했다. 다행히도 여자는 대협에게 그런 호칭 같은 걸 강요하지는 않았다. 사실 여자는 그게 뭐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결코 살갑다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절대 대협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 한번 더 봤던 남자는 그랬다. 같이 있으면 분위기를 숨막히게 만들며 자신이 아빠라는 사실을 대단히 강조했다. 대협은 거기에 고개를 숙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으로 답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얼마나 더 지났을까, 어느 날 대협은 여자와 같은 차를 탔고 뒤에 나란히 앉았다. 차가 평소보다 오래 달린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약간 수척해져 있던 여자는 좀 홀가분해 보였다. 눈가의 그늘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 봤던 것 중에 제일 괜찮은 얼굴이었다.
“대협아.”
“네.”
“우리, 한동안 미국 가서 좀 지낼까? 여기 말고?”
당시의 대협은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대협이 제대로 아는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묻는 것을 포기했던 대협은 그 사실 역시 받아들였다. 받아들여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할아버지, 엄마, 아빠라는 남자,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 혼자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상상해본 몇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협은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그만 두었다. 모든 것이 힘겨웠고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변하지 않았다. 진실을 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몰아치는 일들을 겪으며, 대협은 자연스레 깨달았다. 느낄 수 있었다. 어른들이 말하지 않는 숨겨진 진실에서 나는 악취가 이미 대협에게도 와닿고 있었다. 나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아주 끔찍하고 더러운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알아도 몰라도 비정상적일 게 뻔했다.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국…”
대협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고, 그 순간 어른들의 말 속에서 둥둥 떠다니던 추한 냄새에서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막연하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텔레비전으로만 본 게 전부고 영어도 하나도 모르지만 그랬다. 어차피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저 먼 곳으로, 아예 다른 곳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더 나아가기도 전에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대협을 향해 여자는 힘없이 웃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땠다.
“…대협아, 지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혼란스러울 거란 거 알아. 사실 나도 그렇거든… 있잖아, 대협아. 지금은 해줄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아. 나중에 네가 나이가 좀 더 들면, 그때 말해줄게.”
나중에, 나중에 말해 줄게. 꼭 그럴게.
지쳐버린 작은 목소리,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쓰는 자신을 향한 마음. 그 작은 위로. 사실 그 순간은 일이 이렇게 되고 처음으로 대협에게 누군가 납득할 만한 말을 해준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협은 살짝 열렸던 입술을 닫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요, 말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여자를 향해 희미하게 한번 웃고 말았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삶은 여자와 대협 둘 다 딱히 괜찮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굴러갔다. 어찌된 일인지 남자는 남고 여자와 대협 둘만 바다 너머에서 지내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언어 문제부터 인종차별까지 모든 것이 쉽지 않았고 대협이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주어진 일정을 소화하며 그 곳에서의 삶에 적응해 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 농구는 수단이었다. 아시안답지 않은 큰 키와 체격을 부각시키며 부족한 영어는 적당히 감추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유용한 수단. 하얀 피부와 단아한 이목구비 때문에 그 체격으로도 여자로 오인받고 비웃음 당할 때가 있던 대협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어 주던 강력한 수단. 허나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던 딱딱한 갈색 공의 세계는 깊고도 높아서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협은 그 자체에 빠져 있었다. 다양한 기술을 다른 이들보다 훨씬 빠르게 익히며 능숙해지는 것, 이어지는 경기 내내 모든 걸 잊고 오로지 림을 향해 뛰는 것, 거기서 주어진 승리가 주는 쾌감이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것까지. 그때가 진정한 사춘기였다. 이유없이 화를 내고 싶고 불쑥불쑥 뭔가를 부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르면 저만 아는 곳에 숨겨놓았던 할아버지와 진짜 엄마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농구에 더 집중했다. 이기는 것에, 더 많은 골에 탐욕스럽게 집착했다. 자신의 플레이로 상대팀을 파괴하는 것이 좋았다. 부정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이 좋았다. 우위를 점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좋았다. 대협은 즐기고 있었다. 가끔씩은 야만적일 정도로 그랬다. 이겨야겠다고 생각한 후에 져본 적이 없던 나날이 이어지다 180을 넘기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라던 키가 기어이 190을 찍은 해, 여자가 말했다.
“대협아, 우리 다시 들어가야 될 것 같아.”
대협은 그 말을 듣고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항이나 저항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생각을 좀 했다. 다시 들어간다, 돌아간다, 어디로? 반사적으로 떠오른 바닷가 마을의 풍경에 갑자기 울컥하는 것이 있어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그런 대협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 답을 기다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대협아, 넌 여기 계속 있고 싶어?”
“…”
“네가 정말 원하면 그렇게 해줄 순 있어.”
내가 정말 원하면, 정말로,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 단서는 대협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여자는 해줄 수 있다. 대협은 알았다. 자신이 말한다면 해줄 사람이었다. 정말 원하면, 내가 미국에 계속 있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미국에 온지 2년이 좀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대협은 어느 정도 적응했다. 여기서 살아야 한다면 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 순간 대협은 사실 이제 자신에게는 무엇이든 크게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와의 관계도 그랬고 몇 번 미국 집에 왔던 아빠라는 남자와의 관계 역시 그랬다. 모든 것이 자신과 그렇게까지 관련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어떻게 되든 말든,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의 인생인데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낚시 생각이 났다. 물론 여기서도 낚시를 못 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아니요. 같이 들어가요.”
정말 낚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떤 충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협은 그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는 여자를 보고선, 할아버지와 낚시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돌아간 곳은 본국의 가장 큰 도시에 있는 가장 비싼 동네였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대협은 아주 값비싼 교복을 입고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완전히 뒤바뀐 분위기에 대협은 적응할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그렇지만 농구부는 좀 끌렸다. 3학년 1학기는 새롭게 부활동을 시작하기에 전혀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으나 대협은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았다. 주변에서 수근거리든 말든 입부 신청서를 내고 뻔뻔하게 미소 지으며 체육관에 나갔다. 그리곤 순식간에 주전 자리를 따내고 나갈 수 있는 모든 경기에 다 나갔다. 다들 어떻게든 자기가 공을 쥐고 림을 향해 달려들던 미국과 달리 점수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 패스를 집중시키는 분위기에 대협은 정말 마음껏 림에 공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지지 않는 나날들이 다시 이어졌다. 그건 팀이 진 적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팀은 져도 대협은 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대협은 알 수 있었다. 코트 위에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정성우를 만났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차마 비겼다고도 말할 수 없는 상대, 그 완전한 패배. 대협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농구로 완벽히 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뭘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다는 건 어떤 걸까. 실제로 겪은 후, 대협은 농구로 졌다는 사실 그 자체와 생생하고도 강렬한 패배의 감각에 일단 놀랐다. 그리고 곧 다가온 깨달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나 이거 알아.
잘게 쪼개져 마음 속 곳곳에 박히는 패배의 모든 순간, 그 상처를 뒤따라오는 이후의 많은 것들. 순간의 분함과 충격이 가시고 난 후의 고통과 비참함이 마침내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이어지는 것까지.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다 익숙했다. 다 이미 아는 것들이었다. 모두 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하다가 잊을 만하면 수면 위로 형태를 비추는 것들이었다. 피가 식는 것 같았다.
[우리 대협이는 운이 좋구나.]
왜 그 말이 생각났을까.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여자의 목소리로, 남자의 목소리로, 같은 반 아이들의, 농구부원들의 목소리로. 자신에게 행운이 따르는 세계는 이제 끝났는데. 그 자잘한 행운들은 거대한 불행에 잡아먹혀 의미가 없어졌는데. 행운의 신은 더 이상 자신의 편이 아니고 이 세상은 온통 서늘할 뿐인데. 나는 그냥 그런 곳에 내던저져 이 끝없는 패배감과 함께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 뿐인데, 왜 머리 속에서 그 말이 자꾸만 울려서 잠들지 못했던 걸까. 대협은 알 수 없었다. 정말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꾸만 이상한 충동이 들었고 정해진 것이 무엇이든 그저 따르고 싶지 않아졌다. 가끔씩은 농구마저 싫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 후로 다시 경기를 나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기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정성우는 정말 특별한 예외였다.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어서 정작 농구공을 손에서 내려놓은 적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제 발로 체육관으로 향하는 날은 급격히 줄었다. 농구부에도 수업에도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조퇴도 마음대로 했다. 선생님이나 코치님께 불려가면 죄송해요, 하고 슬픈 듯 미안한 듯 웃었다. 여자와 살면서 자신에게 화내려는 어른에게는 그러면 된다는 걸 알게 된 대협이었다. 그러면 어지간해서는 그냥 다 넘어갔다. 그 상태로 집과도 학교와도 거리가 있는 공터에서 낡은 농구대 하나를 두고 혼자서 그 어떤 규칙도 없는 농구나 하곤 했다. 그리고 뭐든 다 싫어질 때는 낚시하던 예전을 떠올리며 낮잠이나 잤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렀다. 그 패배 이후 여름이 지나고 가을마저 지나 겨울이 가까워질 때 즈음이었다. 점심 시간에 선생님이 부르길래 또 지각한 걸로 뭐라 하려나 생각하며 따라갔는데 교무실 옆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왠 아저씨가 있었다.
“유명호라고 하네.”
자기 이름을 그렇게 말한 아저씨는 처음부터 좀 웃겼다. 입고 있던 남색 블레이저 앞 부분이 희한하게 뒤집어져 있던 것부터 엄청 들뜬 거 빤히 보이는데 안 들뜬 척 하면서 폼을 잡는 것까지 다 그랬다. 뭐지 생각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대협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허허 웃더니 자기가 팔을 쭉 뻗어서 대협의 손을 마음대로 가져갔다. 그리곤 악수를 하는데 좀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유감독님은 그랬다.
“대협아, 이 분은 능남고등학교 농구부 감독님이신데-”
그렇게 운을 띄운 농구부 담당 교사가 뭘 말할 때도 그랬다. 유감독님은 자꾸 끼어들려고 했다. 무례해보이지는 않았지만 말하고 싶은 걸 못 참는 모습이 약간 주책맞아 보이긴 했다. 그리고… 상당히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능남고라는 곳이 어떤 곳이고 자신의 농구 철학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아주아주 열심히 하는 모습이 그 자체로 뭐랄까, 행복해보였다.
“이 녀석은 작년 신입생인데, 우리 덕규가 말이야-”
대협이 집중해서 듣는 것 같으니 신이 나선 무슨 사진까지 보여주는데 인상까지 쓰고 있어 더 험악해보이는 덩치가 보였다. 2m는 되어 보였는데 말하는 걸 계속 들어보니 정말 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대로 5교시 종이 칠 때까지, 심지어 치고 나서도 한참을 붙잡혀 이야기를 듣다가 농구부 선생님이 중간에 말을 끊어서 교실로 가게 된 대협의 손에 유감독님은 명함을 하나 쥐어 주었다.
[유명호 -능남고등학교 농구부 감독- ]
용맹과감이라는 한자 사자성어 아래, 유감독님의 성함과 직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전화번호가 상당히 낯설었다. 대협은 잘 모르는 지역번호가 앞에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번호 아래의 깨알 같은 글씨를 자세히 보니 주소도 그랬다.
“여기서 차 타고 2시간은 가야 될 학교야. 농구부가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그 근처로 갈 거면 해남 정도나 되면 모를까.”
유감독이 가고 난 후, 농구부 선생님은 그리 말했다. 그리고는 농구로 산왕공고를 갈 게 아니라면 우리 고등학교 농구부로 가는 거라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때는 대협을 포함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 엘리베이터식으로 진학하는 게 당연한 중학교였다. 사실 전학으로 들어오기도 대단히 어려운 학교라 대협의 전학은 엄청난 농구 실력과 심각하게 나태한 태도가 드러나기 전부터 뒷말이 많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서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역시 대협을 움직이게 한 이유 중에 하나 쯤은 됐을 터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날 밤, 대협은 자신이 잠자리에 누워 점심 시간을 자꾸 상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농구 이야기를 하던 그 아저씨의 얼굴에서 보이던 즐거움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뭘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대협은 잠들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아침에 학교 대신 명함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다. 농구부 선생님이 차로 2시간 걸린다고 했는데 차가 없던 대협은 대중교통으로 물어물어 길을 가고 중간에 잘못 가기도 하는 바람에 도착했을 땐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도착한 능남고는 지나가는 전차 아래로 푸른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하필이면 그런 곳에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그 곳에.
“…”
오래 전의 기억을 꺼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에 대협은 교문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눈을 감지 않으면, 이 눈앞의 풍경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눈을 꾹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바로 찾을 수 있었던 체육관 쪽에 불빛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농구공이 튀는 소리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협은 몇 걸음 더 걸어가면 체육관 안이 보일 거리에 멈춰서 가만히 그 소리를 들었다. 작은 창 너머 연습하는 사람들의 윤곽만 보이는 곳에 서서 소리만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돌아서 발이 시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대로 바닷가를 향해 걸어갔다. 해변에 도착해선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하는 밤바다의 풍경과 저 멀리 낚시대를 기울인 사람들의 조그마한 인영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차가 끊기기 직전이 되어서야 역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 여기 갈래요.”
12월 20일, 일요일이었다. 그런 말을 할 생각도 딱히 안 했으면서 대협은 덜컥 말했고 여자는 대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대협은 그런 여자의 앞에 유감독님의 명함을 내려놓았다. 여자는 그 명함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더니 혹시 학교에서 괴롭히는 애들이 있냐고 물었다. 그래서 대협은 아니라고 답했다. 뜬 소문이나 무성한 뒷담화는 대수롭지 않았고 무난하게 지내는 애들도 많았기에 거짓이 아니었다. 다니려면 다닐 수도 있었다. 미국에서처럼, 사실 지금도 그랬다. 그런데 입이 저절로 열렸다.
“제가 가고 싶어요.”
“…”
“제가 여기 가고 싶어요.”
그냥 말이 자꾸 그렇게 나왔다. 눌러 놓았던 뭔가가 통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막 튀어나왔다. 어쩌면 이게 내 진심인 걸까, 하고 사실 대협은 말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 보내주세요.”
어머니, 대협은 단 한번도 여자를 그렇게 불렀던 적이 없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대협도 말하고 나서 놀랬다. 그 말이 그런 순간에 그렇게 처음 나올 줄은 자신도 몰랐다. 그리고 당연히 여자도 놀랐다. 여자는, 어머니는 놀람을 숨기지 못 한 얼굴로 대협을 쳐다보았다. 대협은 자신도 그런 얼굴로 어머니를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다 먼저 침착해진 건 어머니였다.
“그래, 알았다.”
그리 말하던 어머니의 얼굴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었다. 대협은 그 얼굴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우물쭈물하다 고맙습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답하는 게 다였다. 그런 대협을 향해 옅은 한숨을 내쉰 어머니가 작게 웃는 것을 보고 대협은 이상하게 부끄러워져 고개를 수그렸다.




너무 심하게 오랜만에 와서 할 말이 없고...
사실 기억하는 사람이나 있을까 싶다;;
진짜진짜 대협백호 맞는데 당분간 대협이 이야기 좀 나옴. 

대협백호 슬덩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