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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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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대신 이연화는 극렬한 기침이 터져나왔어. 한독이 또 몰려와 한바탕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바람에 방다병의 질문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소리없이 사라졌어. 이연화는 오한에 시달리며 숨을 쉬기 힘들정도로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연모라는 단어가 머리속에 계속 맴돌았어. 흐릿한 시야에 저를 붙잡고 있는 둘의 모습이 보였어. 연모...누구를...? 감히...?

머리속이 아득해지면서 이연화는 문득 누군가의 존재가 떠올랐지만 곧 정신을 잃고 말았어. 



******



- ...해서 지금 이연화의 몸은 폭풍속과 같습니다.


며칠동안 머리를 맞대던 관하몽과 약마는 변한 형질과 태아때문에 이연화가 여즉 살아있는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어. 벽차지독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어도 형질을 변화를 일으킨 무언가를 거드는 역활을 했을거라고. 이상이는 우성 양인에 양주만까지 수련해서 극양성이었던지라 극음기인 벽차지독에 중독되었어도 목숨을 연장시킬수 있었어. 만약 양주만이 없는 양인이 음인으로 변하게 된다면 갑자기 바뀐 양과 음에 오히려 목숨을 잃었을거라고.  이연화는 이미 음기가 잠식한 몸이고 양주만으로 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양인으로서의 형질이 극도로 옅어져 몸이 음양의 변화를 받아들인거지. 


하지만 양에서 음으로 바뀐것일뿐 이연화의 내부는 여전히 독 음기를 빈약한 양주만으로 누르며 간신히 지탱하는 수준인데 태아가 이 대치 상태의 관건인것 같다고 덧붙였어. 사방에서 강풍이 불어대면 갈대는 이리저리 휘둘리지만 뿌리가 단단하면 뽑히지 않는듯 태아가 지금 이런 뿌리인 상태인것 같다고 했어. 그래서 여전히 목숨이 붙어있는것 같다고 말이야.


- 그렇다면  이연화가 살 수 있다는 말이에요?


방다병이 두 눈을 반짝반짝이며 물었어. 계속 침울하기만 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낯이 밝아졌어. 목숨이 붙어있는 이유도 찾았으니 치료법도 찾을수 있는것 아닐까. 요 근래에 이연화에 대해서는 계속 죽음이란 말만 들어왔기에 관하몽의 말이 한줄기 빛과 같았어. 


관하몽은 여전히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어.


-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린 결론도 사실 확실치 않아요.  임신은 건강한 산모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문... 이선생의 몸은 애초에 임신에 적합한 몸이 아니었어요. 태아가 자랄수록 모체에 해가 될겁니다. 특히 출산하고나면 팔구할은 죽을 확률이 높아요.

- 아이를 지운다면?


적비성의 말에 방다병은 약간 움찔했어.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없앤다는 선택에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어. 하지만 적비성의 표정은 적을 마주하는것처럼 차갑기만 했어. 그에게 있어 무고한 아이도 이연화의 목숨엔 그저 걸림돌일 뿐이었으니까. 관하몽은 얼굴을 찌푸리며 쓴웃음을 지었어.


- 지금 죽겠죠.


낙태하는것도 출산과 비슷하게 산모에게 부담이 되며 현재는 아이가 이연화의 생명줄을 잡고 있는거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어. 아이를 낳을때까지 살아있을지 죽을지 모르는데 거기다가 낳아도 죽고 안낳아도 죽는다니. 지금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 시간 차이일 뿐 죽음은 기정 사실같았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사방이 벽에 둘러쌓인것같아 방다병과 적비성은 가슴이 답답해졌어. 적비성이 되물었어.

 
- 확실한건가?
-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것도 기적이에요. 사실 내일 바로 죽을 수도 있고 아이를 낳고도 좀 더 살아있을수도 있겠죠.. 이런 선례는 없어 예측을 하기가 힘듭니다. 


관하몽의 자신 없는 말투에 방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 앉았어.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연화가 불쑥 입을 열었어.


- 관협의, 아이는... 독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 역시 확신할수 없습니다만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것 같네요


이연화의 얼굴은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것처럼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어. 다만 손을 찬찬히 배 위로 올리니 방다병과 적비성의 시선도 무심코 그 손길을 따라갔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평평한 배 위에 느릿하니 내려앉았어. 어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매우 조심스럽고 부드러웠어. 


- 그렇습니까


그저 짧게 대꾸하고 이연화는 제 목숨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어. 또다시 누구도 말이 없자 방다병은 숨이 막힐것 같이 갑갑했어. 이연화에게 뭐라고 해봤자 딴소리나 늘어놓겠지. 방다병은 관하몽에게 무슨 방도가 없냐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묻고 또 묻고 약마까지도 닥달해댔어. 


- 방소보


방다병은 못들은척 부러 시끄럽고 어수선하게 관하몽과 약마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어. 필요한 약재나 의서가 있냐고. 혹시 다른 의원을 부르면 도움이 되겠냐고. 이연화의 부름을 무시하며 관하몽에게 필요한게 있으면 온세상을 뒤져서라도 다 찾을거라고, 망천화도 다시 찾고 있다고 부산스럽게 굴었어. 이연화가 다시 한번 나지막하게 부르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지만 방다병은 쉽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어.


- 방소보, 사람은 언젠가 다 죽어 


방다병은 고개를 휙 돌리며 이연화를 쏘아보았어. 이연화의 파리한 얼굴에 걸린 담담한 미소에 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어. 이연화는 언제나 기가 막히게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어. 방다병이 뭐라 한마디 하려다 어깨를 가볍게 잡는 적비성의 손에 입을 다물었어.


적비성은 지긋이 이연화를 바라봤어. 이연화의 메마른 시선이 적비성을 마주했어. 초췌한 낯에 핏기라고는 찾아볼수 없어 지금이라도 눈만 감고 있다면 산 사람이 아닌것 처럼 보일정도였어. 검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는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질 마른 나뭇가지처럼 갸냘프고 추워보였어. 몸에 생기라고는 단 한톨도 찾아볼수 없는데 시선을 피하지 않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수 없는 늪처럼 어떤것도 빛추지 않았어. 이연화는 삶은 거부하고 있고 역설적으로 지금 그것이 이연화가 붙잡고 있는 생의 마지막 한자락이야. 적비성은 속으로 깊에 숨을 들이마셨어.


- 이연화 지금은 네가 죽을때가 아니다


적비성은 결코 길게 말을 늘어놓지 않아. 그는 결심한것이 있으면 그저 통보했고 행하였지. 지금이라고 바뀔것은 없었어. 적비성은 어떻게해서라도 반드시 이연화를 살리고 말거니까. 적비성의 흔들림 없는 단단한 모습에 방다병은 조금 진정한듯 했고 이연화는 그저 무성의하게 눈을 깜빡였어. 

관하몽은 안타깝다는듯 말했어.


- 일단 약마와 제가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각인이라도 했었다면 도움이 되련만...

- 뭐라고요? 
- 뭐?


방다병과 적비성이 동시에 누가 먼저라고도 할것 없이 반문했어. 방다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연화와 관하몽을 번갈아봤어. 그러다 적비성과 눈이 마주쳤어. 적비성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여실했어. 이연화가 남해에서 누굴 만났다는 말은 하나도 안믿었어. 하지만 임신까지 했을 정도면 꽤 깊은 사이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각인조차 없다니. 방다병은 이연화를 향해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질 했어. 이연화가 마치 타락하고 파렴치한 도덕개념 없는 소인배 같다는듯이.


- 너..너 어떻게...
- 에헤이, 버릇없게 너 어디서 자꾸 손가락 질이야


이연화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어. 천역덕스럽게 정색을 하며 방다병이 아주 예의없이 굴어 어처구니가 없다며 잔소리를 했어. 방다병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어. 아마 화가 나서일거야. 예전에도 저 늙은 여우같은 태도가 얼마나 얄미웠어? 심장이 이유없이 방망이로 두들기듯 쿵쾅거리는건 그런 이유에서이겠지? 그게 괘씸해서 일거야. 방다병은 벌컥 화를 냈어.


- 자긴 더 발랑 까졌으면서!!!


방다병은 기본적으로 좋은 가문에서 제대로 예의범절을 배우고 자란 도련님이야. 그냥 놀아나는거야 이해한다 쳐도 임신이란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에 각인 상대가 없어? 지금 사생아를 품고 있다는거야? 음인에, 임신에 더 놀랄일도 없다고 여겼거만  각인 상대도 없다는 폭탄이 여이어 터지자 방다병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입만 뻐끔뻐끔거리다 마치 이르기라도 하는듯 적비성을 쳐다봤어.


적비성의 얼굴은 미묘하게 입술이 비틀려 있었어. 놀라워 하는것 같기도 하고 웃는것 같기도 하고. 거칠것 없던 이상이는 17명의 여인들에게 꽃을 꺾어다주며 잘난척을 할지언정 절대 하룻밤 불장난을 하지 않아. 하지만 그 동안 보아왔던 이연화라면....적비성은 우습기도 하고 묘하게 속이 뒤틀렸어. 


이연화는 그게 뭐 대수냐는듯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어. 적비성에게 이상이는 원래 거슬리던 존재였어. 그런데 이연화의 말간 얼굴이 손톱끝의 가시처럼 심장 한켠을 쿡쿡 쑤시기 시작했어. 


연화루 비성연화 다병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