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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9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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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치꼬치 물어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강징은 그 쪽에서 답을 줄 때까지 재촉도 하지 못했다.
이제나저제나, 어찌되려나 하고 속을 앓는 동안 두 달이 끈적하게 흘러갔다.
그간 모임 따위로 우연히 만날 때마다 남희신은 어쩐지 강징을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뭔가가 있는가보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 취소하는 게 낫겠다고, 기다리다 못해 지친 강징이 포기하려는 마음을 먹을 때쯤 불쑥 그가 찾아왔다.
연화오에서도 가장 좋은 객실에서 마주앉은 남희신은 강징이 놀랄 정도로 심각한 얼굴이었다.
역시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폐를 끼쳤던 건가, 이미 소심해져 있던 강징이 못 들은 일로 하라고 말하려는 찰나, 남희신이 입을 열었다.
“강종주. 약으로 각성하게 되면, 정상적인 각성이 아니기 때문에. 이후에는 색사를 치를 때마다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될 겁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비밀을 알리고 부탁을 했던 부담감이 컸던 강징은 막 그 부담을 내던져버리려는 참이었다. 그럴 때 남희신이 거두절미하고 말을 쏟아내며 무척 껄끄러운 단어까지 내뱉자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남희신은 마치 처방을 내리는 의원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반각성에는 약을 쓰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시간은 걸리지만 자연스럽게 풀 수 있는 방법입니다.”
뜻밖의 말이지만, 강징에게는 그다지 달갑게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단 두 번을 개인적으로 만나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성가시게 하란 말인가?
강징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약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후계자만 얻을 수 있으면 되니, 다른 일은 상관없습니다.”
“쉽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반려자와의 관계에 대한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다가 그에 대한 마음을 잃을 수도 있는데, 어찌 상관없다고 말하십니까?”
남희신이 그답지 않게 강경하게 말하자, 강징은 반감과 함께 오히려 마음이 편해져서 피식 웃었다. 
씨를 줄 사람 따위는 고려해본 적도 없었다. 필요한 건 후계자 뿐이니, 씨와 밭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부분은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남희신은 냉철하게 잘라 말하며 심술궂을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강징을 맞받아보았다.
이윽고 남희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소 부드러워진 말투였다.
“인간이 예기치 않은 고난을 당하면 극복하고 이겨내려 노력함이 마땅하지만. 일부러 고통을 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도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강징에게 남희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약을 드리면, 당신의 심신을 망치게 됩니다. 제 손으로 당신을 가시밭길에 밀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강징은 그의 말을 들으며 점점 미간에 골이 패였다. 나에게 누가 생긴들, 앞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만큼도 가까워지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가시밭길 아닌 관계가 이 나에게 있긴 했던가?
“택무군. 우리가 꽤 오래 알아온 사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저는 당신의 친우도 아니고, 혈연도 아닙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약만 주시면...”
거침없이 말하던 강징이 문득 말끝을 흐렸다.
어느새 부드럽게 달래던 남희신의 얼굴이 무척 굳어져 있었다.
몇 년 전 꼭 한 번, 관음묘에서 화를 내는 그를 보았지만. 그 때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차갑고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바늘로 찌를 틈도 없어 보이는 모습.
온화하며 여유있던 택무군, 혹은 요 몇년간 방황하며 가끔씩 실수도 하던 그와도 딴판이었다.
“드릴 수 없습니다.”
마침내 그가 축객령처럼 냉정하게 자르는 말에, 강징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잘 알겠습니다.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공연히 이까지 걸음을 하시게 했으니, 오늘은 유람을 온 셈 치시고 편히 쉬다 가십시오.”
어쩐지 끓어오르는 분을 누르면서도 마지막까지 예의를 차리고 떠나려는 강징의 뒤에 대고 남희신이 말했다.
“약으로 어찌해 볼 생각일랑 마시고, 저에게 치료를 받으십시오, 강종주.”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엄한 말투에 강징이 어이없는 얼굴로 돌아보며 내뱉았다.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남희신은 반항이라도 하듯이 비꼬는 말을 듣다가, 유수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수인이 반각성 상태라고 소문을 퍼뜨리겠습니다.”
“!!!나, 남종주...!!!”
강징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을 넘어서서 경악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택무군이 남의 약점을 가지고 협박을 하다니?!
강징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성질대로라면 자전부터 날아갔겠지만, 상대가 상대니만큼 마구잡이로 솟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큰 일을 겪고 났더니 마음자리가 사납게 변한 건가. 강징은 황당한 상황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윽고 남희신이 일어나 다가오자 강징은 움찔하며 발을 물렸다.
그러나 남희신의 걸음이 더 확고하고 빨랐기에, 삽시간에 강징은 그늘을 드리우는 것처럼 앞에 선 장신을 마주했다.
“왜냐고요?”
희게 질린 강징이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악령이라도 들린 듯, 불처럼 타오르는 눈빛의 남희신이 강징을 굽어보며 말했다.
“위공자가 다시 절벽에 매달리게 된다면, 지금의 당신은 그를 내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지요. 바로 그와 같은 이유입니다!”

 




저녁이 되자, 반쯤 열어놓은 창을 통해 선선한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강징의 부사가 정리를 하는 척 애꿎은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택무군께서는, 어찌 바로 돌아가버리신 겁니까?”
강징은 흘긋 눈길을 준 다음에는 말이 없었다. 
사실은 아무 연줄도 없었던 고소 남씨의 주인이 왜 단신으로 왔던 건가, 그것이 궁금한 거겠지만 조심하느라고 둘러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흉흉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말문이 트일 것 같지 않아서 부사는 얼른 챙길 것을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 강징도 제자리걸음만 하던 일을 내려놓고 눈 위를 문질렀다.
몇 시각 전 그 때.
강징은 남희신의 분위기에 눌려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했다.
“이틀 후면 운심부지처에서 청담회가 열리니. 하루 일찍 오십시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여전히 답을 하지 못하는 강징을 두고, 남희신은 곧바로 나가버렸다.
답을 하지 못했지만 강징은 결국 자신이 진 것을 알았고, 남희신도 그 사실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물론 설득당한게 아니라 기세에 눌린 것이었다.
강징은 생각 없이 찻잔을 들어올렸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매우 오랜만에, 웃어른에게 야단이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제는 세상 무서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택무군도 역시 고소 남씨답게 꽉 막히고 엄격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강징은 워낙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가만 앉아 중얼중얼하며,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했다. 그래. 일부러 사서 고통을 당할 필요는 없는 거지.
게다가 본인이 자청해서 도와주겠다는데 뭘.
하지만 그 치료의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가 세상에 알리는 게 아니라 삭월을 목에 들이댄다 해도 결단코 거부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바로 다음날-청담회가 이틀 후였으니- 운심부지처로 날아간 강징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남희신은 잠시 보였던 새파란 분노를 잘 갈무리했는지 예의바르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나마 남희신이 안내한 객실이 중앙으로부터 뚝 떨어져 있어 인적이 드문 것에 안심이 되었다.
이윽고 남희신이 수인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여, 민망함을 무릅쓰고 보여 준 다음. 
치료를 바로 시작하자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아까 말해 뒀으면 옷을 두 번이나 벗고 입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게 아닌가 하고.
밤톨만한 괭이새끼 모습을 보인 수치심은 이미 가셨고. 그의 말대로 내친 김이니 더는 거리껴할 것도 없었다.
강징은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수인화를 했고, 제 몸집에 비하면 산더미 같은 의복의 잔재를 헤치고 나왔다.
그리고는 앉은 상태에서도 작은 고개가 꺾어질 정도로 키가 큰 남희신을 우러러보며, 그가 주문을 읊으려는지 아니면 향이라도 피우려는지 궁금해 하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별안간 남희신이 손을 뻗어, 무례하게도 뒷덜미를 잡고 들어올릴 것만은 예상하지 못하여, 강징은 콩콩 뛰던 작은 가슴이 바싹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
심지어 그가 무게도 없는 것 같은 털뭉치 몸을 가슴에 끌어안자, 말 못하는 작은 머릿속이 경악의 감정으로 가득 차버렸다.
크게 당황한 강징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톱을 세우며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남희신은 작아도 날카로운 발톱에 박박 할퀴면서도 의연하게 누르며 숫제 소동물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다독거렸다.
있는 힘껏 줄행랑을 놓기에는 옷을 다 벗은 상태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고, 그 전에 남희신이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남희신은 놀란 감정이 하악질과 발버둥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강징을 붙들고 흥분에 터질 것 같은 몸을 끈기 있게 쓰다듬었다.
목덜미를 꼭 잡은 두 손가락이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별 수 없는 고양잇과 동물의 생리로 강징은 눈 앞이 깜박깜박하며 밀물같은 안정감이 덮쳐드는 것을 느꼈다. 
쌕쌕 하는 숨소리가 점차로 잦아들자, 남희신은 강압적으로 덮고 있던 힘을 풀었다.
마침내 나긋나긋하게 풀어진 몸이 품 속에 안착하는 것이 느껴지자 그때부터는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강징은 한순간 까무룩 잠이 들려다가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남희신이 자신을 옷무더기 옆에 조심스레 놓아주고 있었다.
“그럼,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그로부터 한 식경쯤 후.
남희신은 자리에 앉아 차를 끓였고, 그 앞에 앉은 강징은 금방이라도 칼로 찔러버릴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남희신은 마치 보지 못하는 것처럼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윽고 김이 오르는 주전자를 누르며 말했다.
“화내지 마십시오. 각성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서 한 일이니까요.”
“그... 그게 치료라고요?!”
거의 뻔뻔하게 들리는 말에 말문이 터진 강징이 삿대질을 하듯 외쳤다.
남희신은 담담한 태도로 강징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강종주. 당신이 굉장히 폐쇄적인 성격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폐쇄?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의 육체는 항시 너무 긴장된 상태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몸에 힘을 풀고 평정심을 느끼는 작업이 꼭 필요합니다.”
강징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뾰족한 눈으로 남희신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영 이해 못할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어렸을 때 오만 가지 일을 겪었고, 그 다음에는 팍팍한 세가들 사이에서 정신적인 싸움을 이어가야 했으니.
자신이 긴장감에 가득 차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스스로 느끼기에도 여유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강징은 불만스러운 빛을 다 지우지 못한 채로, 복잡한 감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그건, 혹시, ...제가... 그...”
“?”
“옛날에 이런 저런... 사건들을 겪어서 그런 겁니까?”
하지만 남희신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건 아닙니다.”
순간 자신의 문제를 과거의 암흑과 결부시킬뻔한 강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윽고 잠시 동안 바닥에 놓인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휙 고개를 쳐들며. 
“그럼 혹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순간 욱하는 빛을 안면에 띄우며, 그럼 이 낯뜨거운 짓을 계속하자는 건가! 하는 불만은 속으로만 삭혔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택무군의 고집도 보통은 아닌 듯하니 말해봐야 소용 없을 것 같았다.
하긴 그만한 강단도 없이 이 큰 가문을 이끌어 가고 있었을까. 
강징은 홧술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찻물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한숨을 쉬다가 부글부글하고, 또 체념하고. 끔찍해하고. 다양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강징을, 남희신은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각성은 매우 희귀한 증상이었다.
세간에는, 성장기에 고생을 하거나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반각성상태가 되는 거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남희신은 고소 남씨의 주인답게 보다 정확한 설명을 알고 있었다. 
짐승의 본능에 가까운 수인화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고, 보호받는다고, 사랑받는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성체가 된다.
일반적으로는 양친이 평범하게 돌보아 주기만 해도 당연하게 각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독성수는...
남희신은 강징이 관음묘에서 내뱉았던 말들로 그의 어린시절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래도 이상했다.
가족은 못해 주었다 치자.
그러나 누군가는 목숨보다도 중요한 금단까지 빼 주었는데.
그래도 이 사람은 사랑받는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것을,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닌데.
심통이 난 것을 뒤집어씌우려는 듯 난폭하게 내미는 찻잔을 채워 주며, 남희신은 부드러운 가면 뒤에 심란한 마음을 숨겼다.
아무튼 앞이 보이지 않는 그 길을 가겠다고 이미 결심해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반각성 상태로 남는다면 모를까, 약으로 각성하게 되면 강만음이 진정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들일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 되어버린다면, 또다시 나만이 알 수 있었던 일을 방치한 나의 죄가 아닌가.
오히려 가시밭길에 들어선 사람은 남희신이었지만.
입술을 삐죽거리는 강징이 끝까지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지자, 그는 여상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희신강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