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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3 23:00
그러니까 윈솔 이후에, 물가에서 깨어난 스티브는 폭발의 잔해가 흩어진 주변을 힘겹게 둘러보았어. 그리고 큰 부상을 입고 꼼짝도 못 하게 쓰러진 럼로우를 발견하겠지. 스티브는 잠시 말없이 럼로우를 내려다보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를 들쳐업었어.

럼로우가 눈을 떴을 때는 다리가 어떤 침대에 묶여있었지. 하지만 몸은 나름대로 치료를 받은 것 같고 옷도 깨끗한 걸로 갈아입혀져 있어서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을 거야. 분명 프로젝트 인사이트는 실패했는데 눈을 씻고 봐도 제 모습은 죄인을 대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혼란 속에 발을 빼보려고 하지만 금속으로 된 구속구를 벌릴 방법을 못 찾아서 결국 체력이라도 아끼려 가만히 기다릴 거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대야와 수건을 들고 온 스티브는 눈을 뜨고 침대에 앉아있는 럼로우를 보겠지.

"...캡?"

스티브는 딱히 놀라거나 반가워하거나, 하다못해 화가 난 기색도 없이 럼로우를 보다가 방을 나갔어. 이번에는 아주 금방 돌아왔어. 다행이었어.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리다간 아주 터져버릴 것 같았거든. 스티브의 손에는 대야 대신 쟁반에 그릇을 올려 가져왔어.

"먹을 수 있겠나?"

그러면서 내민 쟁반에는 스프와 숟가락이 놓여있겠지. 럼로우는 갑자기 엄청난 허기를 느꼈어. 그는 몰랐지만 그는 벌써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를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여전히 스티브가 쟁반을 든 상태로 럼로우는 손을 뻗어 숟가락을 잡았어. 그리고 스프를 한술 뜨는데, 손이 덜덜 떨려 주륵 떨어뜨리고 말겠지. 스티브는 대수롭지 않게 럼로우의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들고 제 손으로 스프를 떴어. 그러고는 럼로우의 입술에 가져다대었지. 후후 불어주진 않아 다행이라 해야할까. 럼로우는 스티브를 아주 이상하게 쳐다봤어. 아무리 생각해도 스티브에겐 저를 돌볼 이유가 없었으니까.

"뭡니까?"

럼로우의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끔찍하게 쉬어있었어. 한참을 잠들어 있었는지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도 같았지. 럼로우는 약간의 수치를 느꼈지만 뻔뻔스레 스티브를 노려보았어.

"먹게."

럼로우는 입을 열지 않았어. 스티브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게 덧붙였지.

"독도 자백제도 없네."

별로 유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럼로우는 입을 벌렸어. 그냥, 이대로 먹지 않겠다 뻗대어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을 걸 직감한 탓이지. 스프를 삼키며 스티브를 보는데, 지난 번 사태의 여파인지 스티브의 뺨에는 아물어가는, 그러나 커다란 상처가 남아있었지. 스티브의 회복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바 있는 럼로우는 그가 아주 깊은 상처를 입었을 것임을 짐작했어.

그릇을 전부 비웠을 때, 스티브는 럼로우의 옆에 앉았어. 달리 의자가 없었으니 그랬겠지만 바로 얼마 전 그의 뒤통수를 친 부하의 곁에 앉다니. 럼로우는 상황이 좀 우스웠어. 하지만 스티브의 말에 웃을 기분은 싹 날아가버렸지.

"하이드라는 와해됐네."

럼로우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딱 다물었지. 패배자가 무슨 말을 하겠어? 스티브는 럼로우의 반응이 어떻건 담담하게 말을 이었어.

"어느 쪽이든, 하이드라의 잔당이든 해체된 쉴드의 인력이든 자네를 찾기만 하면 자네는 죽은 목숨일 거야. 듣기로는 자네도 꽤 고위인사였다고 하니. ......그래서 자네를 숨겨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가봐도 좋네. 다만, 건강은 회복한 후에."

"......당신이 왜?"

스티브는 잠시 침묵했어. 럼로우가 초조함을 느낄 때쯤 그는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지.

"아직은 묻지 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럼로우도 그간 폼으로 스티브를 보좌한 건 아니었어. 한번 마음을 굳힌 스티브를 설득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걸 잘 알았지. 그래서 럼로우는 이유를 듣기는 곧바로 포기했지. 나중에 기회가 생기겠거니 하면서.

"다리나 풀어주시죠."

"나가볼 텐가?"

"캡에겐 쓰레기로 보일지 몰라도, 저도 목숨은 소중해서요. 안 갑니다.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어야죠."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이곤 럼로우의 앞에 몸을 숙였어. 그 묘한 자세에 럼로우가 당황하기도 전, 스티브는 열쇠를 가져오지도 않고 그저 힘으로 구속구를 벌려놓았지. 럼로우는 익숙하다 생각했던 그 힘에 오랜만에 아득함을 느꼈지만, 별로 티를 내진 않고 앉은 상태로 다리를 가볍게 움직여보았어. 아직 몸상태가 좋진 않아 걷기는 힘들 것 같았지만... 살아있는 데에 감사할 처지 아니겠어.

언제든 럼로우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스티브는, 방 하나를 아예 럼로우에게 내주고 그를 보살폈어. 이상한 일이었지. 게다가 럼로우가 짚을 수 있도록 목발까지 구해다 줬는걸. 눈치를 보면 지금 럼로우가 쓰는 방이 원래 스티브의 침실이었던 것도 같고 말이야.

스티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어. 럼로우가 그의 비위를 맞추려 하이드라의 기밀을 늘어놓아도, 그를 도발하고 조롱해도 스티브는 좀처럼 표정이 변하질 않았으니까. 그나마 버키의 이야기를 하면 얼굴을 찡그리거나 몸을 기울이는 정도의 반응은 보였지만 그게 다였어. 럼로우는 오래지 않아 스티브를 떠보길 포기했지. 제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어린 상관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둘의 관계는 점점 이상해져 갔어. 스티브는 럼로우를 추궁하거나, 그를 이용하거나, 혹은 고발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으니까. 직업 정신 뛰어난 간병인처럼 럼로우를 보살피다 그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땐 그냥 내버려 두었어. 집에서 무엇을 하건 신경도 쓰지 않고.

어쩌면 그건 럼로우의 몸이 허튼 수작을 부리기에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럼로우는 아마 한동안 다리를 절어야 할테고, 오른손의 떨림은 아무리 체력이 회복되어도 나아지지 않았지. 그정도의 문제는 사람 몇 죽이는 데에 걸림돌이 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스티브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은 명백했지.

그렇지만 럼로우는, 원래부터 스티브에게 가지고 있던 미련 비슷한 감정이,

"정말 제가 나가도 상관없습니까?"

"......애석하긴 하겠지. 막지는 않겠네."

점차 애정으로 발전하는 걸 느끼고 있었어.

스티브가 무슨 의도인지는 알 수가 없었어. 하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알 수 없다면, 그냥 마음대로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것이 럼로우가 어느 늦은 밤 스티브의 침실을 찾아간 표면적인 이유였지. 심층적인 이유는 물론......,

"안됩니까?"

"상관없네."

그가 빌어먹을 배신자이던 시절부터 품어온 망할 감정 때문이었고.

스티브는 담담하게 럼로우를 받아들였어. 그렇지만 럼로우는 금방 스티브가 경험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지. 서툰 게 아니라, 아예 처음이었어. 럼로우는 그런데도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의 스티브에게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지.

저와 스티브가 같은 감정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 그저 쾌락을 위해 스티브가 저를 받아들인다 해도 괜찮았지. 그렇지만 정말 아무래도 좋아서 럼로우를 내버려둔다는 건, 그건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려있는 것 같지 않나?

럼로우는 스티브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어. 어쩌면 하이드라의 스파이로 잠입해있던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스티브는 럼로우가 입을 맞추든, 몸을 섞든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였지만 언제나 어딘가 붕뜬 반응을 보였어. 초조해진 럼로우가 눈물을 쏙 빼도록 몰아붙여도 모든 건 그 순간뿐이었지.

어쩌면 럼로우는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물어본다면 순순히 답해줄지도 모를 스티브에게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이겠지. 만약 그가, 왜 자신을 거두었는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스티브에게 다시 물어보았다면 스티브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물었을 거야.

언제 자신을 죽여줄 거냐고.

스티브가 럼로우를 거둔 이유는 오로지 언젠가 그가 자신을 죽여줄 거라고 생각해서였으면 좋겠다. 럼로우가 나중에 그거 알고 눈돌아가겠지....
2024.05.23 23:2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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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글전체에서 긴장감이 넘쳐흘러서 두근두근하며 읽다가 마지막 문단에 골이 띵하네 suicidal한 스팁 미쳣다.... 둘 관계 넘 매력적이야.....
[Code: 57cf]
2024.05.24 09:3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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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럼로우가 스팁 생각 알게되는 것까지 어나더!!
[Code: 8c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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