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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6 16:13
녹는점
1.
―……매브, 오늘은 또 누굴 괴롭힐 예정이야?
피트 “매버릭” 미첼의 완벽한 보금자리, 모하비 사막, 격납고, 트레일러 안에 비치된 투박한 유선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기 섞인 아이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괴롭히다니, 말이 심하네.”
매버릭은 구불구불한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으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금 아이스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자신과 통화를 하고 있을지 상상했다. 전화선에 감긴 매버릭의 손가락은 어느새 희게 질렸다.
그들이 처음 만난 86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화기는 거추장스러운 줄을 벗고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이제 집 밖으로 뛰쳐나가기에 이르렀다.
언제든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도 매버릭이 매일 아침 유선 전화기를 고집하는 까닭은 돌돌 말린 전화선을 꼬았다가 풀며 수화기 너머 상대를 그리는 각별함 때문일 것이다.
―난 네가 활기차서 좋아, 매브.
“그래?”
거짓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매버릭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응.
“뜻밖이네.”
무언가 원망이 담긴 듯한 매버릭의 말에 아이스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버릭은 그의 침묵이 조마조마했다. 요즘 들어 아이스는 자주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나면 선선했던 그의 사랑은 차갑게 식어 무미건조한 일상의 대화만이 이어지고는 했다.
“있잖아, 아이스. 할 얘기가 있는데…….”
매버릭은 아이스가 자신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응, 말해 봐.
아이스는 자상한 말씨로 말했다. 매버릭은 부드럽게 휘어진 그의 눈꼬리와 입매, 그리고 서글서글한 미소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가슴 벅찬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한 달 전이다. 아이스는 매버릭의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면 한나절 거리도 마다하고 달려오던 사람이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 그 얘기 하고 싶었어.”
“그래. 너도.”
매버릭은 도망치듯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달아오른 수화기를 꼭 쥔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늘도 아이스에게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연인이 된 이후로 줄곧 바라왔던 아이다. 막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서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가지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매버릭의 호르몬이 불안정해서 번번이 실패했다.
초조해하는 매버릭에게 종래는 아이스가 먼저 아이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누구보다도 자신과 매버릭을 닮은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그가 말이다. 그러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버릭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기쁘게 아이스에게 알렸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2.
뙤약볕 아래, 부대 내 시설 보수로 차출된 운전병과 수병들이 구슬땀을 빚어내며 분주히 움직였다.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는 자신의 RIO인 슬라이더와 함께 그들을 감독하는 중이었다. 중령이 나서서 할 일은 아니었지만, 아이스는 요즘 의도적으로 일거리를 만들어 바쁘게 지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슬라이더가 움직임이 굼뜨고 어설픈 수병에게 고함을 지르며 다그치는 사이, 아이스는 정복 상의 주머니에 간직한 반지를 몰래 꺼냈다.
아이스가 그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고전적인 디자인의 반지가 바로 그가 일부러 궂은일을 자처하며 매버릭을 피하는 이유였다.
1986년, 아이스가 매버릭을 처음 만난 운명적인 여름으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이미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상 부부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두 사람에게 있어 인생의 결말은 서로의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아이스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자 자신과 매버릭의 관계에 새로운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사건이 바로 결혼이었다.
아이스가 매버릭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하겠다고 결심한 지 벌써 석 달이 흘렀다. 아이스는 매버릭의 구미를 동하게 할만한 F1 경기장에서 멋진 경기를 관람하고 프러포즈하겠다는 첫 번째 계획을 뒤엎고, 지금까지 무려 네 번이나 계획을 변경했다.
…지중해의 새파란 바다가 아름다운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목가적인 스코틀랜드의 고성에서, 휘황찬란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프러포즈하리라는 계획까지 전부 취소한 지금, 아이스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답답한 마음만큼이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자신의 모든 결정에 확신을 품은 남자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없는 대상이 바로 그의 연인이었다. 매버릭을 떠올릴 때면 아이스는 기분 좋은 두통에 빠졌다.
매버릭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연 현상처럼 자신의 인생에 침입했고, 영원히 지우지 못할 흔적을 남겼다. 위대한 현상을 일으킨 매버릭에게는 어떤 의도도 없었다. 매버릭은 단지 탄생했고, 존재했고, 살아 숨 쉬었고, 그 격정적인 생명력에 이끌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내가 매버릭을 위해서라 생각했던 일이 결과적으로 매버릭을 구속하는 건 아닐까.’
아이스는 매버릭이 남몰래 염원하던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이 도리어 그에게 족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매버릭은 손에 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 같은 사람이다. 바람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매버릭이 정 붙일 곳을 찾아 정착한 모습이 도무지 연상되지 않았다. 그것이 아이스가 프러포즈를 망설이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생각에 잠긴 나머지 아이스는 자신을 지나치는 트럭에 실린 적재물이 엉성하게 고정한 탓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이스!” 슬라이더가 자신을 부르는 고함에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적재물을 고정한 줄이 끊어져 그를 향해 화물이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3.
오후 1시, 아이스의 사고 소식을 전하는 슬라이더의 전화 한 통에 매버릭은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자신과 같으리라 생각했다. 사랑했던 모든 것은 재가 되고, 추억의 잔상에 매달려 조용히 절규하는 그런 삶.
―아이스가 다쳤어. 지금 병원이야.
그 말에 매버릭은 퓨즈가 끊어진 전구처럼 사고가 꺼져버렸고, 병원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엘리베이터 앞이었고, 뛰어오느라 숨이 차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허억…… 헉.”
매버릭은 고개를 떨어트린 채 무릎을 거머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안색을 보고 붙임성 좋아 보이는 어떤 여자가 “저기, 괜찮으세요?”하고 걱정스레 물었다. 매버릭은 대답할 힘도 남지 않아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리 기다리던 엘리베이터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사이에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고, 네 대의 엘리베이터 앞은 사람들의 체취와 숨결로 혼탁해졌다. 매버릭은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초조하게 엘리베이터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사이에 기다리는 사람이 더 늘어났다. 결국, 매버릭은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미그기와 교전했을 때도, 파병을 나가 격추될 뻔한 위기에 빠졌을 때도, 테스트 기체의 결함으로 큰 사고를 당할 뻔했을 때도 지금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달린 매버릭은 마침내 도착한 병실에 도착했다. 그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문지르며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아이스는 의식을 되찾고 슬라이더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이스! 허, 허억… 헉, 괘, 괜찮아?”
“…….”
“아, 아이스?”
“누구시죠?”
“……아이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아이스의 차가운 시선에 매버릭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무심한 아이스의 목소리가 꼭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매버릭은 선뜻 아이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이스, 무슨 소리야. 매버릭이잖아.”
당황한 슬라이더가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매버릭?”
아이스는 미간을 좁히며 매버릭의 이름을 읊조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매버릭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조금 전보다 더 차가워졌다. 매버릭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이스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기뻤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누구시죠.”
아이스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는 느닷없이 들이닥쳐 울음을 참고 있는 낯선 남자가 성가시기만 했다. 자신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것을 보니, 아는 사이인 듯한데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슬라이더가 말한 매버릭이라는 이름도 생소했다.
“아이스, 장난치지 마라.”
슬라이더가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난이라니, 슬라이더.”
아이스는 슬라이더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아이스의 서먹한 태도에 매버릭은 가슴이 욱신거려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이스의 서늘한 시선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와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했다. 뒤이어 눈앞이 아찔해지며 현기증이 일었는데, 아무래도 숨이 끊어지도록 뛰어서인 것 같았다. 매버릭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삭막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아이스는 천천히 매버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매버릭은 비늘처럼 자신을 파고드는 그의 시선에 무력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는 말없이 침대의 안전 가드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가드를 가볍게 두드렸다. 신원을 밝히라는 재촉이었다.
“저기, 나는…….”
매버릭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아무튼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까 나는 일단 가볼게.”
“매버릭.”
슬라이더가 매버릭 쪽으로 몸을 돌렸다.
“슬라이더, 네 연락받고 급하게 와서…… 다시 부대에 복귀해야 해.”
매버릭은 출입구를 향해 뒷걸음질 치며 애써 태연하게 웃었다. 그는 거짓말과 변명에 서툴렀다. 남들처럼 미소를 꾸며낼 줄도 몰랐다. 입꼬리를 억지로 당긴 탓에 뺨이 위태롭게 경련했고, 축축하게 젖은 두 눈은 상실감으로 가득했다.
“이제 막 왔는데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이리 와. 와서 아이스랑 얘기 마저 해.”
“아냐, 정말 바빠서. 나중에 연락하자, 슬라이더. 푹 쉬어, 아이스.”
슬라이더는 도망치듯 병실 문을 박차고 나서는 매버릭을 붙잡으려다가 “슬라이더.”하고 자신을 부르는 아이스의 무미건조한 음성에 발이 묶였다. 그사이에 매버릭은 사라져버렸고, 그가 떠난 빈자리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있었다.
“아이스,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요즘 매버릭이랑 아무리 소원하게 지냈다지만, 너 때문에 만사 제쳐두고 달려온 사람을 이딴 식으로 대해?”
기어이 슬라이더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언성을 높였다.
“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슬라이더. 장난 아니야.”
아이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방금 저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지?”
“너…….”
슬라이더는 맥이 탁 풀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해리성 기억상실증.
의사가 아이스에게 내린 진단이었다. 사고는 아이스에게서 매버릭에 대한 추억을 전부 앗아갔다. 하지만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이스가 아닌 매버릭이었다. 아이스는 증발해버린 추억에 어떤 감흥도 없었다. 애당초 매버릭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매버릭은 매일 저녁 아이스의 병실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와 마주하며 신선한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이제야 아이스가 본래 무자비할 정도로 냉혹한 사람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애정이 사라져버린 아이스를 점점 더 견디기 힘들었다.
“……참, 오늘 끝내주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매버릭은 부상 중인 아이스에게 부담이 될까 봐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아이스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알고 있다. 아이스 덕분에 오늘날까지 마음껏 비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모른 체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간 전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이렇게나마 전하고 싶었다.
“무슨 일?”
아이스는 매버릭이 던진 뜬구름 같은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매버릭이 무슨 말을 하든 호응해주었고,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이스의 천성이 주위의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는 주도면밀한 사람이어서지, 매버릭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으나 그가 자신과 연인 관계였다고 하니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여태 테스트 기체 진전이 없어서 초조했는데, 드디어 목표 달성에 성공했거든.”
매버릭은 씩 웃으며 우쭐거렸다.
“고무적인 성과군.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아이스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테스트 파일럿인 매버릭의 성과가 곧 군의 성과이니 기쁜 소식이었다. 오랜만에 본 아이스의 미소에 가슴이 설렜던 매버릭은 곧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았고, 걷잡을 수 없이 침울해지고 말았다.
“퇴원은 언제 해?”
“글쎄.”
매버릭의 질문에 아이스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매버릭은 입을 우물거리며 부산스레 몸을 들썩거렸다. 이 어색함을 깨트리고 싶은데, 화젯거리는 진작 떨어졌다. 지난 일주일 동안 빈약한 상상력을 짜내며 아이스와 대화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이제 한계다. 아이스에게 무어라 말을 붙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목이 따갑고 귀가 뜨겁다. 어쩐지 수치스럽다. 그래서 목이 멨다.
“검사상으로는 이상이 없는데,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
아이스는 겸연쩍어하며 말을 아끼는 매버릭에게 무심히 덧붙였다. 꼭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너를 기억하지 못해서 이 답답한 병실에 꼼짝없이 갇혔다고 말이다. 매버릭은 왼손을 등 뒤로 숨기고 아이스 몰래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지. 넌 늘 바빴잖아. 진급할수록 책임질 일도 늘어나서 걱정거리도 덩달아 늘었고.”
매버릭은 눈을 내리깐 채 웃었다. 아이스는 혀를 찼다. 매번 자신의 눈치를 보며 가슴 졸이는 주제에 꾸역꾸역 찾아오는 매버릭이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며 약자를 자처하는지도 모르겠다. 늘 주눅이 든 그의 모습에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이만 가야겠다. 내일 또 올게.”
매버릭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아이스와 같은 공간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억지로 버티다가는 그에게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 줄 것 같았다. 가뜩이나 아이스가 자신을 골치 아파하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랬다가는 이 메마른 호의마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가.”
아이스는 업무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매버릭을 배웅했다. 매버릭은 마지막까지 웃었다. 악착같이 버텼다. 그가 끝끝내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면, 적어도 새롭게 쓰이는 기억이라도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어서였다.
점차 희미해지는 매버릭의 발소리를 들으며 아이스는 그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답답한 표정을 짓는 대신에 애새끼처럼 시건방지게 웃는 얼굴이 더 보기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내 얼굴만 나오는 건 부당하잖아.
―매버릭, 너 요즘 부당하다는 말에 꽂혔구나?
―시끄럽고, 너도 같이 찍어.
화면이 흔들리더니 아이스의 얼굴이 쑥 드러났다.
―자, 이제 됐어?
아이스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신의 등 뒤에 선 매버릭에게 곁눈질했다. 매버릭은 대답 대신에 아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힘껏 비틀었다. 아이스가 온몸을 뒤틀며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병원에서 돌아온 매버릭은 자정이 지나도록 불 꺼진 거실에서 아이스가 촬영한 홈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홈비디오 속 아이스는 자상했다. 병원에서 본 남자와는 딴판이었다.
10분 남짓 홈비디오가 끝나고, 매버릭은 다른 홈비디오를 재생했다. 여름이 훌쩍 다가온 무더운 낮, 자신은 아이스의 집 정원의 잔디를 깎고 있었다. 아이스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게 해주었다.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 자동차 엔진 오일 교체, 지하실 배선을 손보는 일 등등.
―매브, 키스해주면 주말에 바비큐 파티 열어줄게.
아이스가 매버릭을 불렀다.
―고기는 내가 굽고 싶은데!
잔디를 깎다 말고 아이스에게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매버릭은 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몰랐다. 아이스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이렇게 바보처럼 어리숙하게 굴 줄이야. 아이스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긴 편했나 보다.
―안 돼. 넌 매번 태우잖아. 저번에 브리스킷 만든다고 나섰다가 석탄 만들었던 거 기억 안 나?
―키스해주면 브리스킷 만들어 줄 거야?
아이스가 짐짓 무게를 잡으며 나무라는 투로 말하자, 매버릭은 눈을 흘기며 물었다.
―응, 제대로 된 텍사스식 브리스킷을 만들어줄게.
―좋아.
가까이 다가오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매버릭은 절망적인 마음에 홈비디오를 일시 정지했다. 더는 못 보겠다. 속이 울렁거렸다.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입덧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홈비디오 속 아이스라면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겠지만, 병원의 낯선 남자는 의사에게 검진을 받아보라며 냉정한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매브, 색다른 방법으로 기분 전환을 시도해보면 어때. 네가 무엇보다 전투기를 조종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잘 알지만, 때로는 새로운 환경과 낯선 사람들이 자극을 주기도 하거든.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던 중에 문득 언젠가 아이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버릭은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는 언제나 자신이 다양한 경험을 하길 바랐다. 소중한 것을 하나 잃어버려도, 그 상실감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소중한 것이 생기길 바라면서 말이다.
‘환경이 바뀌면 좀 나으려나.’
매버릭은 충동적으로 휴가를 결심했다.
그 무엇도 아이스를 대신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기억의 저편,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스가 기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카잔스키 씨.”
창문 너머로 일몰을 감상하던 아이스는 자신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등을 돌렸다.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온 간호사는 아이스에게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내일 퇴원하신다고 들었어요. 병원 생활 그렇게 지겨워하셨는데, 정말 잘 됐어요.”
“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이스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고, 호감이 가는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입원 생활 동안 아이스는 병원의 여러 사람과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퉁명스럽게만 굴었던 담당의부터 시작해서 밤마다 삑삑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그를 좋은 사람으로 알았다.
글쎄, 자신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아이스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으면서도 내심 회의적이었다. 대부분 사람은 지루했다. 상대방이 자신과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친밀감을 쌓는 쪽이 자신에게도 이로우므로 굳이 벽을 세우진 않았지만, 즐거웠던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 잠에서 깨어나면 빠르게 사라지는 꿈속의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정신이 맑아지며 설렘이 사라져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손에 쥐고 싶은 감정인 것은 분명했다. 그 얼굴이 좀처럼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아 아이스는 몹시 답답한 상태였다.
“퇴원하실 때 배우자도 오시죠?”
“배우자요?”
“아, 파트너분이요. 매일 오셨잖아요.”
간호사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스는 한숨을 삼켰다. 실은 매버릭이 오기를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병실이 답답해서라고 자기 자신에게 변명했는데, 아니었다. 저녁마다 매버릭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습관이 됐는지, 아니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의식이라도 됐는지 그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통 안 보이시네요. 일이 바쁘신가 봐요.”
“예, 일이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스는 어물쩍 둘러댔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침부터 안부 전화를 걸어오며 묻지 않은 시시콜콜한 일까지 자신에게 말하던 매버릭이 사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매버릭은 테스트 파일럿이다. 그의 부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능성은 사고다. 테스트 파일럿은 항상 목숨을 내걸고 있으므로 어느 날 불쑥 별처럼 사라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매버릭에게 사고가 났다면, 슬라이더든 누구든 자신에게 그 소식을 전할 것이므로 다행스럽게도 사고는 아닐 것이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따 다시 올게요.”
사정을 알 리 없는 간호사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아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고, 그는 저녁 식사를 본체만체하며 다시 창가로 향했다. 어느새 밖은 완벽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저 멀리, 온기를 잃어버린 지평선이 창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흔치 않은 혼란에 휩싸인 아이스는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짚었다. 내일이면 그토록 기다리던 퇴원이고, 그동안 충분히 휴식한 덕분에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곧 진급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후우…….”
매버릭. 그래, 매버릭. 자존심도 없는지 자신의 무심한 태도에 그렇게 상처받은 티를 역력히 내면서도, 매일 꾸역꾸역 찾아오다가 며칠째 연락 한 통 없는 게…… 괘씸한지, 걱정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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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1.
―……매브, 오늘은 또 누굴 괴롭힐 예정이야?
피트 “매버릭” 미첼의 완벽한 보금자리, 모하비 사막, 격납고, 트레일러 안에 비치된 투박한 유선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기 섞인 아이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괴롭히다니, 말이 심하네.”
매버릭은 구불구불한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으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금 아이스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자신과 통화를 하고 있을지 상상했다. 전화선에 감긴 매버릭의 손가락은 어느새 희게 질렸다.
그들이 처음 만난 86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화기는 거추장스러운 줄을 벗고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이제 집 밖으로 뛰쳐나가기에 이르렀다.
언제든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도 매버릭이 매일 아침 유선 전화기를 고집하는 까닭은 돌돌 말린 전화선을 꼬았다가 풀며 수화기 너머 상대를 그리는 각별함 때문일 것이다.
―난 네가 활기차서 좋아, 매브.
“그래?”
거짓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매버릭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응.
“뜻밖이네.”
무언가 원망이 담긴 듯한 매버릭의 말에 아이스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버릭은 그의 침묵이 조마조마했다. 요즘 들어 아이스는 자주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나면 선선했던 그의 사랑은 차갑게 식어 무미건조한 일상의 대화만이 이어지고는 했다.
“있잖아, 아이스. 할 얘기가 있는데…….”
매버릭은 아이스가 자신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응, 말해 봐.
아이스는 자상한 말씨로 말했다. 매버릭은 부드럽게 휘어진 그의 눈꼬리와 입매, 그리고 서글서글한 미소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가슴 벅찬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한 달 전이다. 아이스는 매버릭의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면 한나절 거리도 마다하고 달려오던 사람이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 그 얘기 하고 싶었어.”
“그래. 너도.”
매버릭은 도망치듯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달아오른 수화기를 꼭 쥔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늘도 아이스에게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연인이 된 이후로 줄곧 바라왔던 아이다. 막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서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가지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매버릭의 호르몬이 불안정해서 번번이 실패했다.
초조해하는 매버릭에게 종래는 아이스가 먼저 아이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누구보다도 자신과 매버릭을 닮은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그가 말이다. 그러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버릭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기쁘게 아이스에게 알렸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2.
뙤약볕 아래, 부대 내 시설 보수로 차출된 운전병과 수병들이 구슬땀을 빚어내며 분주히 움직였다.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는 자신의 RIO인 슬라이더와 함께 그들을 감독하는 중이었다. 중령이 나서서 할 일은 아니었지만, 아이스는 요즘 의도적으로 일거리를 만들어 바쁘게 지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슬라이더가 움직임이 굼뜨고 어설픈 수병에게 고함을 지르며 다그치는 사이, 아이스는 정복 상의 주머니에 간직한 반지를 몰래 꺼냈다.
아이스가 그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고전적인 디자인의 반지가 바로 그가 일부러 궂은일을 자처하며 매버릭을 피하는 이유였다.
1986년, 아이스가 매버릭을 처음 만난 운명적인 여름으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이미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상 부부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두 사람에게 있어 인생의 결말은 서로의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아이스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자 자신과 매버릭의 관계에 새로운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사건이 바로 결혼이었다.
아이스가 매버릭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하겠다고 결심한 지 벌써 석 달이 흘렀다. 아이스는 매버릭의 구미를 동하게 할만한 F1 경기장에서 멋진 경기를 관람하고 프러포즈하겠다는 첫 번째 계획을 뒤엎고, 지금까지 무려 네 번이나 계획을 변경했다.
…지중해의 새파란 바다가 아름다운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목가적인 스코틀랜드의 고성에서, 휘황찬란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프러포즈하리라는 계획까지 전부 취소한 지금, 아이스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답답한 마음만큼이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자신의 모든 결정에 확신을 품은 남자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없는 대상이 바로 그의 연인이었다. 매버릭을 떠올릴 때면 아이스는 기분 좋은 두통에 빠졌다.
매버릭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연 현상처럼 자신의 인생에 침입했고, 영원히 지우지 못할 흔적을 남겼다. 위대한 현상을 일으킨 매버릭에게는 어떤 의도도 없었다. 매버릭은 단지 탄생했고, 존재했고, 살아 숨 쉬었고, 그 격정적인 생명력에 이끌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내가 매버릭을 위해서라 생각했던 일이 결과적으로 매버릭을 구속하는 건 아닐까.’
아이스는 매버릭이 남몰래 염원하던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이 도리어 그에게 족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매버릭은 손에 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 같은 사람이다. 바람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매버릭이 정 붙일 곳을 찾아 정착한 모습이 도무지 연상되지 않았다. 그것이 아이스가 프러포즈를 망설이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생각에 잠긴 나머지 아이스는 자신을 지나치는 트럭에 실린 적재물이 엉성하게 고정한 탓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이스!” 슬라이더가 자신을 부르는 고함에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적재물을 고정한 줄이 끊어져 그를 향해 화물이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3.
오후 1시, 아이스의 사고 소식을 전하는 슬라이더의 전화 한 통에 매버릭은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자신과 같으리라 생각했다. 사랑했던 모든 것은 재가 되고, 추억의 잔상에 매달려 조용히 절규하는 그런 삶.
―아이스가 다쳤어. 지금 병원이야.
그 말에 매버릭은 퓨즈가 끊어진 전구처럼 사고가 꺼져버렸고, 병원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엘리베이터 앞이었고, 뛰어오느라 숨이 차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허억…… 헉.”
매버릭은 고개를 떨어트린 채 무릎을 거머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안색을 보고 붙임성 좋아 보이는 어떤 여자가 “저기, 괜찮으세요?”하고 걱정스레 물었다. 매버릭은 대답할 힘도 남지 않아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리 기다리던 엘리베이터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사이에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고, 네 대의 엘리베이터 앞은 사람들의 체취와 숨결로 혼탁해졌다. 매버릭은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초조하게 엘리베이터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사이에 기다리는 사람이 더 늘어났다. 결국, 매버릭은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미그기와 교전했을 때도, 파병을 나가 격추될 뻔한 위기에 빠졌을 때도, 테스트 기체의 결함으로 큰 사고를 당할 뻔했을 때도 지금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달린 매버릭은 마침내 도착한 병실에 도착했다. 그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문지르며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아이스는 의식을 되찾고 슬라이더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이스! 허, 허억… 헉, 괘, 괜찮아?”
“…….”
“아, 아이스?”
“누구시죠?”
“……아이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아이스의 차가운 시선에 매버릭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무심한 아이스의 목소리가 꼭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매버릭은 선뜻 아이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이스, 무슨 소리야. 매버릭이잖아.”
당황한 슬라이더가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매버릭?”
아이스는 미간을 좁히며 매버릭의 이름을 읊조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매버릭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조금 전보다 더 차가워졌다. 매버릭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이스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기뻤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누구시죠.”
아이스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는 느닷없이 들이닥쳐 울음을 참고 있는 낯선 남자가 성가시기만 했다. 자신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것을 보니, 아는 사이인 듯한데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슬라이더가 말한 매버릭이라는 이름도 생소했다.
“아이스, 장난치지 마라.”
슬라이더가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난이라니, 슬라이더.”
아이스는 슬라이더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아이스의 서먹한 태도에 매버릭은 가슴이 욱신거려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이스의 서늘한 시선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와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했다. 뒤이어 눈앞이 아찔해지며 현기증이 일었는데, 아무래도 숨이 끊어지도록 뛰어서인 것 같았다. 매버릭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삭막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아이스는 천천히 매버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매버릭은 비늘처럼 자신을 파고드는 그의 시선에 무력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는 말없이 침대의 안전 가드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가드를 가볍게 두드렸다. 신원을 밝히라는 재촉이었다.
“저기, 나는…….”
매버릭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아무튼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까 나는 일단 가볼게.”
“매버릭.”
슬라이더가 매버릭 쪽으로 몸을 돌렸다.
“슬라이더, 네 연락받고 급하게 와서…… 다시 부대에 복귀해야 해.”
매버릭은 출입구를 향해 뒷걸음질 치며 애써 태연하게 웃었다. 그는 거짓말과 변명에 서툴렀다. 남들처럼 미소를 꾸며낼 줄도 몰랐다. 입꼬리를 억지로 당긴 탓에 뺨이 위태롭게 경련했고, 축축하게 젖은 두 눈은 상실감으로 가득했다.
“이제 막 왔는데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이리 와. 와서 아이스랑 얘기 마저 해.”
“아냐, 정말 바빠서. 나중에 연락하자, 슬라이더. 푹 쉬어, 아이스.”
슬라이더는 도망치듯 병실 문을 박차고 나서는 매버릭을 붙잡으려다가 “슬라이더.”하고 자신을 부르는 아이스의 무미건조한 음성에 발이 묶였다. 그사이에 매버릭은 사라져버렸고, 그가 떠난 빈자리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있었다.
“아이스,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요즘 매버릭이랑 아무리 소원하게 지냈다지만, 너 때문에 만사 제쳐두고 달려온 사람을 이딴 식으로 대해?”
기어이 슬라이더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언성을 높였다.
“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슬라이더. 장난 아니야.”
아이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방금 저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지?”
“너…….”
슬라이더는 맥이 탁 풀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 *
해리성 기억상실증.
의사가 아이스에게 내린 진단이었다. 사고는 아이스에게서 매버릭에 대한 추억을 전부 앗아갔다. 하지만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이스가 아닌 매버릭이었다. 아이스는 증발해버린 추억에 어떤 감흥도 없었다. 애당초 매버릭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매버릭은 매일 저녁 아이스의 병실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와 마주하며 신선한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이제야 아이스가 본래 무자비할 정도로 냉혹한 사람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애정이 사라져버린 아이스를 점점 더 견디기 힘들었다.
“……참, 오늘 끝내주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매버릭은 부상 중인 아이스에게 부담이 될까 봐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아이스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알고 있다. 아이스 덕분에 오늘날까지 마음껏 비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모른 체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간 전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이렇게나마 전하고 싶었다.
“무슨 일?”
아이스는 매버릭이 던진 뜬구름 같은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매버릭이 무슨 말을 하든 호응해주었고,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이스의 천성이 주위의 작은 실마리 하나 놓치지 않는 주도면밀한 사람이어서지, 매버릭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으나 그가 자신과 연인 관계였다고 하니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여태 테스트 기체 진전이 없어서 초조했는데, 드디어 목표 달성에 성공했거든.”
매버릭은 씩 웃으며 우쭐거렸다.
“고무적인 성과군.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아이스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테스트 파일럿인 매버릭의 성과가 곧 군의 성과이니 기쁜 소식이었다. 오랜만에 본 아이스의 미소에 가슴이 설렜던 매버릭은 곧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았고, 걷잡을 수 없이 침울해지고 말았다.
“퇴원은 언제 해?”
“글쎄.”
매버릭의 질문에 아이스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매버릭은 입을 우물거리며 부산스레 몸을 들썩거렸다. 이 어색함을 깨트리고 싶은데, 화젯거리는 진작 떨어졌다. 지난 일주일 동안 빈약한 상상력을 짜내며 아이스와 대화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이제 한계다. 아이스에게 무어라 말을 붙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목이 따갑고 귀가 뜨겁다. 어쩐지 수치스럽다. 그래서 목이 멨다.
“검사상으로는 이상이 없는데,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
아이스는 겸연쩍어하며 말을 아끼는 매버릭에게 무심히 덧붙였다. 꼭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너를 기억하지 못해서 이 답답한 병실에 꼼짝없이 갇혔다고 말이다. 매버릭은 왼손을 등 뒤로 숨기고 아이스 몰래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지. 넌 늘 바빴잖아. 진급할수록 책임질 일도 늘어나서 걱정거리도 덩달아 늘었고.”
매버릭은 눈을 내리깐 채 웃었다. 아이스는 혀를 찼다. 매번 자신의 눈치를 보며 가슴 졸이는 주제에 꾸역꾸역 찾아오는 매버릭이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며 약자를 자처하는지도 모르겠다. 늘 주눅이 든 그의 모습에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이만 가야겠다. 내일 또 올게.”
매버릭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아이스와 같은 공간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억지로 버티다가는 그에게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 줄 것 같았다. 가뜩이나 아이스가 자신을 골치 아파하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랬다가는 이 메마른 호의마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가.”
아이스는 업무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매버릭을 배웅했다. 매버릭은 마지막까지 웃었다. 악착같이 버텼다. 그가 끝끝내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면, 적어도 새롭게 쓰이는 기억이라도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어서였다.
점차 희미해지는 매버릭의 발소리를 들으며 아이스는 그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답답한 표정을 짓는 대신에 애새끼처럼 시건방지게 웃는 얼굴이 더 보기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내 얼굴만 나오는 건 부당하잖아.
―매버릭, 너 요즘 부당하다는 말에 꽂혔구나?
―시끄럽고, 너도 같이 찍어.
화면이 흔들리더니 아이스의 얼굴이 쑥 드러났다.
―자, 이제 됐어?
아이스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신의 등 뒤에 선 매버릭에게 곁눈질했다. 매버릭은 대답 대신에 아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힘껏 비틀었다. 아이스가 온몸을 뒤틀며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병원에서 돌아온 매버릭은 자정이 지나도록 불 꺼진 거실에서 아이스가 촬영한 홈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홈비디오 속 아이스는 자상했다. 병원에서 본 남자와는 딴판이었다.
10분 남짓 홈비디오가 끝나고, 매버릭은 다른 홈비디오를 재생했다. 여름이 훌쩍 다가온 무더운 낮, 자신은 아이스의 집 정원의 잔디를 깎고 있었다. 아이스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게 해주었다.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 자동차 엔진 오일 교체, 지하실 배선을 손보는 일 등등.
―매브, 키스해주면 주말에 바비큐 파티 열어줄게.
아이스가 매버릭을 불렀다.
―고기는 내가 굽고 싶은데!
잔디를 깎다 말고 아이스에게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매버릭은 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몰랐다. 아이스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이렇게 바보처럼 어리숙하게 굴 줄이야. 아이스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긴 편했나 보다.
―안 돼. 넌 매번 태우잖아. 저번에 브리스킷 만든다고 나섰다가 석탄 만들었던 거 기억 안 나?
―키스해주면 브리스킷 만들어 줄 거야?
아이스가 짐짓 무게를 잡으며 나무라는 투로 말하자, 매버릭은 눈을 흘기며 물었다.
―응, 제대로 된 텍사스식 브리스킷을 만들어줄게.
―좋아.
가까이 다가오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매버릭은 절망적인 마음에 홈비디오를 일시 정지했다. 더는 못 보겠다. 속이 울렁거렸다.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입덧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홈비디오 속 아이스라면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겠지만, 병원의 낯선 남자는 의사에게 검진을 받아보라며 냉정한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매브, 색다른 방법으로 기분 전환을 시도해보면 어때. 네가 무엇보다 전투기를 조종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잘 알지만, 때로는 새로운 환경과 낯선 사람들이 자극을 주기도 하거든.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던 중에 문득 언젠가 아이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버릭은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는 언제나 자신이 다양한 경험을 하길 바랐다. 소중한 것을 하나 잃어버려도, 그 상실감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소중한 것이 생기길 바라면서 말이다.
‘환경이 바뀌면 좀 나으려나.’
매버릭은 충동적으로 휴가를 결심했다.
그 무엇도 아이스를 대신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기억의 저편,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스가 기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 * *
“카잔스키 씨.”
창문 너머로 일몰을 감상하던 아이스는 자신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등을 돌렸다.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온 간호사는 아이스에게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내일 퇴원하신다고 들었어요. 병원 생활 그렇게 지겨워하셨는데, 정말 잘 됐어요.”
“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이스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고, 호감이 가는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입원 생활 동안 아이스는 병원의 여러 사람과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퉁명스럽게만 굴었던 담당의부터 시작해서 밤마다 삑삑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그를 좋은 사람으로 알았다.
글쎄, 자신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아이스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으면서도 내심 회의적이었다. 대부분 사람은 지루했다. 상대방이 자신과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친밀감을 쌓는 쪽이 자신에게도 이로우므로 굳이 벽을 세우진 않았지만, 즐거웠던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 잠에서 깨어나면 빠르게 사라지는 꿈속의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정신이 맑아지며 설렘이 사라져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손에 쥐고 싶은 감정인 것은 분명했다. 그 얼굴이 좀처럼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아 아이스는 몹시 답답한 상태였다.
“퇴원하실 때 배우자도 오시죠?”
“배우자요?”
“아, 파트너분이요. 매일 오셨잖아요.”
간호사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스는 한숨을 삼켰다. 실은 매버릭이 오기를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병실이 답답해서라고 자기 자신에게 변명했는데, 아니었다. 저녁마다 매버릭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습관이 됐는지, 아니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의식이라도 됐는지 그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통 안 보이시네요. 일이 바쁘신가 봐요.”
“예, 일이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스는 어물쩍 둘러댔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침부터 안부 전화를 걸어오며 묻지 않은 시시콜콜한 일까지 자신에게 말하던 매버릭이 사흘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매버릭은 테스트 파일럿이다. 그의 부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능성은 사고다. 테스트 파일럿은 항상 목숨을 내걸고 있으므로 어느 날 불쑥 별처럼 사라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매버릭에게 사고가 났다면, 슬라이더든 누구든 자신에게 그 소식을 전할 것이므로 다행스럽게도 사고는 아닐 것이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따 다시 올게요.”
사정을 알 리 없는 간호사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아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고, 그는 저녁 식사를 본체만체하며 다시 창가로 향했다. 어느새 밖은 완벽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저 멀리, 온기를 잃어버린 지평선이 창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흔치 않은 혼란에 휩싸인 아이스는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짚었다. 내일이면 그토록 기다리던 퇴원이고, 그동안 충분히 휴식한 덕분에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곧 진급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후우…….”
매버릭. 그래, 매버릭. 자존심도 없는지 자신의 무심한 태도에 그렇게 상처받은 티를 역력히 내면서도, 매일 꾸역꾸역 찾아오다가 며칠째 연락 한 통 없는 게…… 괘씸한지, 걱정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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