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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3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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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는 츠지무라가 마련해 줬다는 마치다의 진짜 집에 데려다주고 서둘러 냉장고를 열어봤다. 마치다가 조직에서 구해 준 맨션에서 살 때 그 맨션의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노부는 마치다가 요리에 관심이 없거나 요리 솜씨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치다의 진짜 집에 처음 왔을 때 보자 냉장고에는 신선한 식재료가 가득했고 각종 절임반찬이 갖춰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방 옆에 달려 있는 작은 팬트리에는 각종 파스타면과 소스류, 건어물이나 향신료가 가득했다. 그리고 마치다는 놀라울 정도로 요리도 잘했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몇 달만에 집에 왔기 때문에 냉장고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마치다가 오른팔을 다친 상태라 요리를 맡길 수 없어서 간단하게 할 게 없나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마치다가 냉장고 옆쪽에 기댄 채 웃었다.
"미안한데 뭐 만들 거면 죽이나 뭐 카레나 이런 거 해야 할걸. 카레는 채소가 없어서 안 되려나."
"카레 먹고 싶습니까?"
"아니..."
마치다는 깁스를 한 오른팔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젓가락을 못 쓰는데 네가 일일이 먹여 주려고?"
"아... 먹여 드려도 괜찮아요."
"그럼 넌 언제 먹으려고. 밥 다 식은 다음에 먹으려고?"
카레는 잘 못하는데... 팬트리에 카레는 있었지만 몇 달이나 집을 비운 터라 어차피 채소는 없어서 만들기 애매하기도 하고... 노부가 고민하고 있자 마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웃었다.
"카레 잘 못해?"
"네..."
"카레 싫어하나 봐?"
"그건 아니고 운동을 오래 해서 집안 일을 잘 못 도와드렸어요. 저녁까지 운동하다가 밥 시간 직전에야 집에 오고 그랬으니까..."
"그래? 그럼 다음에 내가 가르쳐줄게. 카레 만드는 건 쉬우니까. 어차피 오늘은 카레 재료도 제대로 없고. 장 봐야겠다."
노부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치다는 초밥과 피자 중에 골라 보라고 했다.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걸 고른 모양이었다. 마치다는 오늘 일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을 텐데 피자 같은 무거운 음식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 초밥을 선택하자 마치다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곤란한 얼굴로 얇은 니트 셔츠를 한손에 들고 나왔다.
"츠지무라 녀석, 나 엿먹으라고 일부러 이런 거지, 이거."
마치다는 딜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킷 없이 깔끔하게 드레스 셔츠와 베스트를 입고 있었는데 드레스셔츠의 단추는 왼손으로 풀었는지 다 풀고 셔츠에서 팔을 못 뺀 상태였다. 깁스 때문에 소매가 빠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날 부르지 그랬어요."
"신세 좀 져야겠다. 미안."
"미안하긴요. 작전 때 다친 건데."
노부가 서둘러 다가가서 왼팔의 소매를 먼저 빼고 오른팔을 빼 주려고 했으나 드레스 셔츠의 통이 그리 여유가 없어서 깁스에 거의 딱 맞을 것 같았다. 게다가 셔츠 단추를 다 풀고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는 날씬하고 매끈한 가슴이 자꾸 어른거려서 집중을 하기 힘들었다. 노부가 최대한 가슴을 안 보려고 노력해 가며 깁스에 거의 꼭 맞는 소매를 찢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천천히 소매를 빼 내고 겨우 드레스셔츠를 다 벗겨냈을 때였다. 마치다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리며 한 마디 했다.
"바지 허리띠랑 지퍼만 좀... 바지 갈아입는 건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아, 네..."
마치다의 바지 허리띠를 푸는 순간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쓸데없이 크게 울려서 노부의 어깨가 펄쩍 뛰자 마치다의 몸도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 탓에 바지 단추를 푸는 손가락이 계속 미끄러져서 단추를 풀지 못하자 마치다도 긴장했는지 납작한 배가 더 쏙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걸 보자 손가락이 더 굳어서 허둥지둥하다 겨우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을 때였다. 바지가 컸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치다가 긴장해서 배에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허리띠의 무게 때문인지 바지가 아래로 슥 내려가 버리며 날씬한 근육이 예쁘게 붙어 있는 마치다의 늘씬한 두 다리와 검은색 브리프가 눈 앞에 갑자기 드러났다. 마치다도 갑자기 바지가 벗겨져서 당황했는지 허둥지둥하며 뒤로 물러나다가 바지 끝단을 밟았다.
뒤로 넘어가는 마치다를 받치며 끌어안은 건 본능적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받쳐주느라고 노부도 균형을 잃은 게 문제였다. 노부는 눈 앞에서 넘어가는 마치다를 보면서 본능적으로 마치다의 뒤통수를 받쳤다. 그리고 노부의 손등이 바닥에 닿기 직전 마치다가 다치지 않은 팔로 노부를 확 끌어안으면서 머리를 들어서 노부의 손등이 바닥에 살짝 닿기만 할 뿐 충격은 없었다.
"어... 고맙..."
그러나 놀랐는지 노부의 목덜미로 마구 쏟아지는 마치다의 따뜻한 숨결을 느낀 노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괜... 괜찮아요?"
고개를 들어서 머리는 부딪치지 않았지만 바닥에 찧은 허리와 엉덩이는 아플 것 같아서 묻자 마치다는 그제야 머리를 젖히면서 제대로 바닥에 머리를 댔다. 노부가 손바닥에 느껴지는 마치다의 머리카락과 머리통을 느끼면서 다시 말을 얼버무렸을 때. 마치다는 아무 말도 없이 노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노부는 속옷만 입고 있는 마치다를 품 안에 끌어안고 있다는 걸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 한참이나 이어진 뒤, 노부가 자신의 심장 그리고 맞닿아 있는 마치다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만 느끼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 번 침을 삼킨 마치다가 입술이 마르는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 순간 머리에 번개가 내려꽂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마치다의 뺨으로 손이 가던 순간.
딩동딩동-
놀란 노부가 허둥지둥 일어나자 마치다도 당황하며 일어나려 해서 노부가 얼른 마치다를 잡아주었다. 마치다는 넘어지면서 같이 떨어뜨렸던 니트와 거의 다 벗겨진 바지를 같이 손에 들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고, 노부는 멍한 정신으로 서 있다가 다시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서둘러 문으로 향했다. 계산을 하고 초밥을 받아서 부엌으로 돌아오자 마치다는 오버핏의 면 스웨터와 조거 바지를 입고 나오고 있었다.
초밥이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도 않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초밥을 집어먹고 있을 때, 말없이 초밥을 집어먹고 있던 마치다가 갑자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노부가 고개를 들자 마치다가 피식 웃었다.
"나 이 집에서 오래 살았는데 초인종 소리가 저렇게 방정맞다는 거 처음 알았어."
"아..."
그제야 노부도 피식 웃자 마치다는 무슨 초밥을 좋아하냐고 물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덕분에 긴장이 풀려서 노부도 어떤 초밥을 좋아하는지 이야기하고 마치다는 뭘 좋아하는지도 물으며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했다. 한껏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 차오른 건 초밥 용기를 정리해 놓고 돌아서다가 마치다의 깁스를 봤을 때였다. 그제야 마치다가 혼자서 목욕 준비를 하거나 목욕하기 힘든 상황이란 게 떠올랐다.
"어... 목욕...."
멀쩡한 팔로 식탁을 닦고 있던 마치다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노부의 빨개진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물만 받아줘. 씻는 건 내가 대충 씻을게."
"... 괜찮으시겠어요?"
"어, 뭐 대충 씻지 뭐."
물을 받으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손으로 제대로 씻는 게 무리였기 때문에 노부는 소매를 걷어올리며 마치다에게 다가갔다.
"그... 들어가서 허리에 수건을 감고 계시면 머리 감는 거랑 세수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건 한 손으로 하기 힘드니까."
"뭐... 어떻게 대충 하면 되지 않을까?"
"힘드실 거예요. 머리 감는 거랑 세수만 도와 드릴게요."
"... 알았어."
한 손으로 허리에 수건을 감는 게 영 힘들었는지 마치다는 욕실에 들어간 뒤로 한참이나 있다가 문을 열었다. 얼굴도 잔뜩 지쳐 보이는 게 정말로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수건을 감는 것까지 도와주기는 좀...
노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츠지무라에게 받아온 방수커버를 오른손에 씌워주고 가방을 내려놓다 보니 안에는 어린애들이나 쓸 것 같은 캡이 들어 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기들 머리 감길 때 눈에 거품 들어가지 말라고 머리에 씌우는 캡? 노부가 그걸 들고 마치다에게 보여주자 마치다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머리 잘 젖히고 있을게. 그건 하지 말자."
"...네."
귀여울 것 같았지만 마치다가 싫어했기 때문에 얼굴로 거품이 내려가지 않도록 머리를 잘 감겨주고 나자 마치다가 푸-하고 한숨을 쉬며 웃었다.
"고마워. 나 때문에 네가 고생하네."
"우리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 이건 수당 받아내야 해요. 내가 부장님한테 얘기할게요."
"그래, 여러 모로 고맙다."
목욕탕에는 습기가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 묘한 분위기였고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 사이로 달콤한 샴푸 향기까지 퍼지고 있었다. 그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에서 거의 벗은 마치다가 눈을 감고 노부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있는 걸 보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이제야 제대로 본 마치다의 상체에는 오래 전 다쳤던 상처가 남긴 흉터들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어서 가슴이 떨리는 와중에도 지끈거렸다. 그 흉터가 너무 속상했기 때문에 마치다는 머리만 감겨주면 된다고 했지만 노부가 우겨서 비누질까지 해 주었다. 그리고 마치다와 교대해서 노부가 씻고 나오자 마치다가 낑낑거리며 사모예드 인형 '노부'를 끌어안고 침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노부가 얼른 다가가서 '노부'를 받아안자 마치다가 이미 '노' '부' '유' '키'가 나란히 앉아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저기 내려놔 줘."
노부가 일단 '노부'를 '노' '부' '유' '키' 옆에 앉혀 준 다음에 왜 '노부'와 '노부유키'를 내놨냐고 묻자 귀여운 사모예드들이 콕콕 박혀 있는 잠옷을 입고 있던 마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노짱이랑 부짱, 유짱, 키짱은 머리맡에 재우면 되는데 노부짱은 너무 커서 노부짱을 침대에서 재우면 우리가 잘 자리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노부짱만 소파에 내놓으면 외로울 테니까. 한동안 다 같이 소파에서 재워야겠어."
마치다를 돌봐주기 위해서 같이 지내겠다고 하긴 했지만 설마 같은 침대에서 잘 줄은 몰랐기 때문에 노부가 뺨을 긁적이고 있자 마치다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 집에 누구를 데리고 온 게 처음이라 손님용 침대가 없어. 그렇다고 너를 바닥에서 재울 수도 없잖아. 여분 이불도 없어."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노부도 말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신난 것 같아서 머쓱했는데 마치다도 느꼈는지 키득키득 웃더니 멀쩡한 팔로 노부의 가슴을 툭 쳤다.
"맞아, 어쩔 수 없지."
전에 호텔에서 같이 잤을 때도 더블베드에서 잤었지만 그때는 중간에 선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잤었는데 '노부'와 '노부유키'를 소파에 전부 내놓은 마치다는 노부와 함께 침대에 올라간 뒤 노부의 팔을 베고 품에 쏙 들어와서 누웠다. 깁스를 하고 있는 마치다의 팔을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조심스럽게 마치다의 몸 위로 팔을 올리는 동안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러나 마치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낮에 잠깐 외출해서 너 잠옷 좀 사자."
"잠옷이요?"
"어, 나는 이거 사모예드인데, 이거 살 때 보니까 다른 동물들도 귀여운 거 많더라고. 다른 강아지 종류들도 있고, 고양이나 다람쥐도 있고, 양도 있었어."
마치다는 전치 8주가 나왔기 때문에 두 달은 돌봐줄 생각이었다. 두 달이나 집 밖에 나와 있어야 하니 어차피 집에 가서 갈아입을 옷들을 좀 챙겨와야 하니까 내일 낮에 잠깐 집에 가서 옷을 싸들고 올 때 잠옷도 가지고 오려고 했었지만. 마치다의 잠옷을 보며 마치다가 이야기하는 각종 잠옷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굳이 잠옷을 사 와야 되나 싶어졌다.
"어... 그럼 저도 사모예드 잠옷을 사야 되지 않을까요? 저는 마치다 상의 사모예드를 해 주기로 했으니까."
마치다가 노부가 마치다의 사모예드라고 했으니까... 굳이 커플 잠옷을 입고 싶은 게 아니라... 사모예드니까...
그렇게 합리화를 하려고 해 봐도 본심이 뭔진 자신이 제일 잘 아니까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그래, 좋지. 그런데 다른 잠옷도 귀여운 거 많으니까 내일 같이 가서 직접 보고 고르자. 귀여운 거 진짜 많아."
노부만 쑥스럽고 설레는지 마치다는 담담하기만 해서 노부의 얼굴이 더 뜨거워질 때였다. 이불을 올려덮어주던 노부의 손이 마치다의 귀 끝을 스쳤다. 손 끝에 닿는 유난히 따뜻한 온도에 시선을 내리자 담담하게 잠옷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마치다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빨간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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