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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6 07:58
스피어스가 흡혈귀에게 물린 건 17살 여름 무렵이었을듯. 처음에는 송곳니에 목을 뚫리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자각조차 하지 못 했을 거임. 무슨 싸구려 B급 잡지에 주간 연재되는 가상세계 소설도 아니고, 하다 못해 중세시대도 아닌 20세기에 뱀파이어라니. 그것도 아무리 야심한 새벽이라지만 무슨 몬태나나 와이오밍 같은 저 먼 촌구석도 아니고 보스턴 한복판에서. 스피어스의 목을 문 남자는 아직 어리던 스피어스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다 못 해 마침내 바닥으로 주저앉을 때까지 정도도 모르고 그 신선한 피를 쭈욱 빨아들이다 동이 트기 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기묘한 꿈이라도 꾼 것처럼 온통 몽롱하던 스피어스의 정신은 다음날, 다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이 될 때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잇자국에 그게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거임. 얼마 후 보름달이 뜨던 밤에 스피어스는 피에 굶주려 반쯤 이성이 날아간 상태로 거리를 활보하며 제 또래의 어린 청소년들을 찾았을 것 같음. 입술 새로 주룩주룩 흐르는 핏방울에 턱이 새빨갛도록 물들고 나서야 그 날 자신을 물었던 남자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자신도 뱀파이어라는 것을 머리보다 가슴으로 먼저 실감하고 조금 울었던 스피어스겠지.
그래도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17살의 스피어스는 기어코 저 지하 깊숙한 곳에서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던 뱀파이어 조직 사회의 위치를 자신의 힘으로 알아내 그 곳에 제 발로 찾아가 조직의 우두머리와 협상을 했을 것 같음. 사실은 협상이라기보단 협박에 가까웠겠지. 달마다 혈액팩을 주세요. 안 그러면 기자한테 연락해 동네방네 여기에 흡혈귀들의 본거지가 있다 소문내겠습니다. 이 대범하다 못해 발랑 까진 열일곱 뱀파이어 소년에게 담배를 귀 뒤에 꽂은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한편으로는 당당하게 딜을 요구하면서도 대충 둘러입고 나온 교복 자켓 주머니에서 피 부족 현상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고 있던 스피어스가 안쓰러웠는지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마지못해 받아들여줬을 것 같음. 알겠으니까 그만 떨어. 나가기 전에 명부에 이름이랑 혈액형 적고 가고.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스피어스는 반신반의했지만, 남자는 정말로 그 날 이후로 매달 보름 전날이 될 때면 스피어스의 집 앞 우체통에 신선한 A형 피를 두 팩 놔두고 가줬을 것 같음. 덕분에 스피어스는 피가 부족해 언젠가의 그 밤처럼 본능에 눈이 멀어 제 또래 아이들을 공격하는 그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됐겠지.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적어도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적어도 스물 세살이 되던 해에 군대로 끌려가 한 공수부대의 소대장으로 낙점이 되기 전까지는.
훈련 캠프에서 보낸 2년도 충분히 고달팠는데 (아니 무슨 배달 온 우편물까지 하나하나 뜯어서 소지품 검사를 하나, 그래도 옆 동네 중대장은 관물함까지 탈탈 털어 검사한다던데 이 정도면 양반이군) 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고 진흙탕을 구르면서부터는 차원이 다른 공포였을 것 같음. 당장 보급이 부족해 내일 먹을 식량도 부족한 상황인데 자진해서 어디 한 군데 총상이라도 입지 않는 이상 매달 보름을 무사히 넘길 만한 양의 혈액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겠지. 그래도 널린 게 시체일테니 피가 부족할 일은 없겠군, 생각했던 예전의 자신이 우습도록 뱀파이어의 몸은 이미 죽은 시신의 굳어버린 피 따위는 영양분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을 것 같음. 그렇다고 제 옆에 있는 부사관의 피를 억지로 빨아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스피어스는 달에 한 번 입을 틀어막고 꾸역꾸역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시체 밭을 누비며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아직 피가 식지 않은 비교적 생생한 몸을 찾아 무슨 혈액형인지도 모를 누군가의 피를 소리 없이 빨아먹었을듯. 잊을 만하면 온몸에 피냄새를 가득 묻히고 나타나는, 기척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드나들고 기이하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으면서도 마치 운명이 기어이 숨통을 붙여놓는 것마냥 그 흔한 부상마저 도통 입지 않는 도그 중대의 소대장에게 블러디 스피어스라는 별명이 붙은 건 어떻게 보면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 같음.
그리고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달려와 곤경에 처한 이지 중대를 죽음의 수렁에서 건져낸 스피어스가 마침내 E중대 중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날, 스피어스는 모어를 만나게 됐을 거임. 언젠가 토코아 캠프에서 한두 번 스쳐 지난 적이 있던, 기다랗고 억센 몸을 가진 잘생긴 얼굴의 기관총 사수였겠지. 온갖 흉흉한 소문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스피어스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병들은 많았지만 모두들 속으로만 의문을 삭힐 뿐 면전에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못 했는데, 모어는 유일하게 스피어스가 아직 도그 중대의 소대장일 시절부터 장교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 대원이었을듯. 스피어스가 이 삐딱하고 재수없는 대원을 신경 쓰는 이유는 많았지만, 개중 가장 큰 이유는 모어가 누군가와 놀랍도록 닮아 있기 때문이었을 것 같음. 그러니까, 자신이 열일곱일 적부터 매달같이 혈액 팩을 집 앞으로 보내준 그 거만하고 자비로운 중년의 남자와 판박이 수준으로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가 남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모어는 꿈에도 몰랐겠지만, 스피어스는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모어를 최대한 신경써줬을 거임. 헤게나우에서 포로 사냥을 나갈 정찰대를 뽑을 때에도 모어는 언제나 배제하고 선택했고, 그가 멀라키와 손잡고 또 무슨 골때리는 사고를 쳐서 윗선에서 경고가 들어올 때에도 그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고, 자신만큼이나 전리품에 열심인 이 눈엣가시가 기어코 히틀러의 앨범을 훔쳐갔을 때에도 형식상의 추궁만 했을 뿐 토코아 캠프에서 소블이 했던 것처럼 그의 소지품을 탈탈 털어버린다거나 별다른 징계를 내리지도 않았겠지. 가끔 늦은 밤에 한 잔 하려고 들른 주점에서 동료 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맥주를 마시고 있는, 담뱃대를 귀 뒤에 꽂은 옆모습을 발견할 때면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떠올라 어쩐지 빚진 마음이 드는 것과 함께 괜한 의문들이 목끝까지 차오르고는 했을 거임. 자네는 자네 아버지가 피 빨아먹는 괴물인 것 알고 있나? 내가 자네 아버지에게 6년이나 신세 진, 그보다 더한 괴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나? 자네의 총알 자국이 있는 왼쪽 어깨 흉터에서 달큰한 냄새가 나는 거 알고 있나? 자네가 나같은 존재들에게 얼마나 시련을 주는지 알고 있나? 자네 아버지와 놀랍도록 똑닮은 거 알고 있나? 목소리는 자네가 더 듣기 좋은 거 알고 있나? 자네가 나와 같은 A형이라는 거 알고 있나? 어젯밤 내 꿈에 나온 거 알고 있나?... 차마 입 밖에 낼 수 있는 그 모든 질문들을 목구멍 너머로 누른 채 그대로 발길을 돌려 주점을 빠져나가면, 그의 뒤로 재빠른 모어의 시선이 순간 분명하게 꽂혔다는 사실을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는 스피어스는 끝끝내 알지 못 했겠지. 모어 역시 스피어스가 그날 밤 자신의 꿈을 꾸면서 밤새 미열에 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을 거임.
하루하루를 죽어가는 이들의 몸에서 공급책을 찾으며 수명을 연장하던 스피어스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인지했을 것 같음. 이젠 종전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쩌면 자신의 몸은 종전까지 버티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이성의 목소리가 자신의 안에서 엄습했겠지. 그러니까, 피가 필요했을 거임. 자신과 똑같은 혈액형에, 따뜻한 피와 팔딱팔딱 뛰는 맥박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의 신선한 피가. 하지만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양심을 배반하고 이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해보자 싶다가도 핏줄이 도드라진 사람의 목선이나 팔뚝만 봐도 그 옛날 17살 여름에 이성을 잃고 물어뜯었던 이름 모를 소년의 뒷목이 생각나면서 차마 본능적인 갈망을 채우지 못 하는 스피어스였을듯. 사람도 죽이고, 부하도 총으로 쏴죽이고, 포로들도 싹 쓸어버린 마당에 이제와 뭐 대단한 도덕을 추구하나 싶다가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다시 한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못 할 것 같았을 거임. 그래서 통제력을 잃고 저도 모르게 으슥한 새벽 거리를 기척 없이 활보하다가도 어느 순간 보름달 아래 이성이 돌아오면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는 스피어스였겠지. 완전히 이기적이지도, 그렇다고 이타적이지도 못 하는 자신의 모호함을 있는 힘껏 비웃어주면서.
결국 마침내 몸에 무리가 와 한밤중에 발작을 일으킨 스피어스는,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기 편을 해치는 것만은 막아보겠다고 굳어버린 두 다리를 질질 끌고 외딴 골목길로 와 제 입에 재갈을 물렸을 것 같음. 머리 위 달빛은 빌어먹게 눈부시고, 전날 밤 비가 내린 땅바닥은 시리도록 차갑고 축축한데, 열이 끓는 이마와 뺨에서는 그와 대조되는 뜨끈한 열기가 났겠지. 죽음은 차가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뜨겁다는 사실을 스피어스는 흐릿해져가는 정신 사이로 체감했을 거임. 잔뜩 웅크린 몸을 끌어안고 모순적인 오한과 고열에 덜덜 떨면서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면 다음 날 자신의 시신은 누가 수습하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스피어스였겠지.
"Sir?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이성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순식간이었을 거임.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스피어스는 알았겠지. 직전까지 잠이 안 오는 새벽을 틈타 담배라도 피우고 있었던 듯 익숙한 연초 냄새가 주저없이 성큼성큼 저를 향해 다가오고,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달빛을 등진 채 까맣게 드리우면, 차마 얼굴을 들지 못 하는 스피어스의 이마 위로 따뜻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내려앉아 가만히 그의 열을 쟀을 것 같음. Shit... 이마가 불구덩이 같습니다, 닥 불러올까요?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이성이 날아가는 것은 너무도 쉬웠을 거임. 한순간에 몸이 통제력을 잃고 동물처럼 움직였겠지.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어의 목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겁도 없이 이를 박고 있는 스피어스였을 것 같음.
뜨끈한 피가 혀끝과 잇새에 스며들고 식도를 타고 내렸을 거임.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차가운 몸에 한순간에 혈기가 돌면서 모어의 목을 둘러싼 팔에도 서서히 생동감이 돌아왔겠지. 자신한테 매달리다시피 상체를 붙잡아 껴안고 목에 송곳니를 꽂은 스피어스의 몸을 반사적으로 받아든 모어가 무게를 따라 고개를 앞으로 기울이며 스피어스의 귓가에 떨리는 숨결을 내쉬었을듯. 멈춘 것만 같던 심장이 살갗을 뚫고 나올 것처럼 세차게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피가 쭉 빠져나가면서 몰려오는 현기증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각할 새도 없이 가슴이 온통 울렁거렸겠지. 이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을 모어는 전에 받아본 적이 있었을 거임. 카랑탕에서 그에게 비꼬듯이 질문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못마땅하다는 듯 뒤돌아보며 시선을 맞추던, 철모 아래 살짝 찡그린 눈빛과 기어코 눈이 마주쳤을 때 울컥 치밀던 그 때의 울렁거림을 닮은 느낌이었을듯.
자신의 목을 뚫은 스피어스의 송곳니 아래로 축축한 혀가 피부 위를 배회하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겠지. 목덜미에 달라붙은 스피어스의 입술을 느끼며 더운 숨을 고르던 모어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끝에 마침내 흡혈이 멈추자 핏기가 가셔 저릿저릿한 고개를 들어 풀린 눈으로 스피어스를 가만히 내려다봤을 거임. 그토록 갈망하던 것만큼 실컷 피를 빨아먹고 나서야 이성이 돌아온 스피어스는 멍하니 숨을 고르다 내리깔린 모어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도망가듯 몸을 뒤로 옮겼을 것 같음. 그리고 그런 스피어스의 머리가 등 뒤의 벽에 부딪치려는 순간 팔을 뻗어 손으로 스피어스의 머리를 받쳐주는 모어... 그가 식은땀에 젖어 말없이 스피어스를 내려다보면 스피어스 역시 모어의 팔에 갇힌 채 상기된 두 뺨과 작게 헐떡이는 호흡으로 모어의 시선을 받아냈겠지. 이내 나직이 고개를 꺾은 모어가 스피어스의 귀와 뺨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 그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포근하게 몸을 끌어안으면, 어느새 모어의 품에 안겨서는 순하게 어깨에 고개를 묻는 스피어스였을듯. 맞닿은 가슴 사이로 심장 박동이 뚫을 듯이 둘의 몸을 관통하며 마구 뜀박질했을 거임. 모어의 심장소리와 체온과 살냄새에 둘러싸인 채 스피어스는 차마 아무것도 묻지 못 하고 그저 모어의 이름이 새겨진 군복 위로 정신없이 입술을 묻기만 했을 것 같음. 자네 지금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알기는 하나...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떨리는 숨을 갈무리하다가 호흡이 진정되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모어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려다가 아직 피냄새가 배어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고개를 물리는 스피어스였을듯. 그러면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모어가 손을 들어 스피어스의 귀와 턱을 한 번에 감싸쥐고 고개 꺾어 부드럽게 입을 맞춰줬겠지. 그 순간 스피어스는 자신의 남은 영원을 이 남자와 함께하게 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 같음.
비오비 모어스피어스
그래도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17살의 스피어스는 기어코 저 지하 깊숙한 곳에서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던 뱀파이어 조직 사회의 위치를 자신의 힘으로 알아내 그 곳에 제 발로 찾아가 조직의 우두머리와 협상을 했을 것 같음. 사실은 협상이라기보단 협박에 가까웠겠지. 달마다 혈액팩을 주세요. 안 그러면 기자한테 연락해 동네방네 여기에 흡혈귀들의 본거지가 있다 소문내겠습니다. 이 대범하다 못해 발랑 까진 열일곱 뱀파이어 소년에게 담배를 귀 뒤에 꽂은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한편으로는 당당하게 딜을 요구하면서도 대충 둘러입고 나온 교복 자켓 주머니에서 피 부족 현상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고 있던 스피어스가 안쓰러웠는지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마지못해 받아들여줬을 것 같음. 알겠으니까 그만 떨어. 나가기 전에 명부에 이름이랑 혈액형 적고 가고.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스피어스는 반신반의했지만, 남자는 정말로 그 날 이후로 매달 보름 전날이 될 때면 스피어스의 집 앞 우체통에 신선한 A형 피를 두 팩 놔두고 가줬을 것 같음. 덕분에 스피어스는 피가 부족해 언젠가의 그 밤처럼 본능에 눈이 멀어 제 또래 아이들을 공격하는 그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됐겠지.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적어도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적어도 스물 세살이 되던 해에 군대로 끌려가 한 공수부대의 소대장으로 낙점이 되기 전까지는.
훈련 캠프에서 보낸 2년도 충분히 고달팠는데 (아니 무슨 배달 온 우편물까지 하나하나 뜯어서 소지품 검사를 하나, 그래도 옆 동네 중대장은 관물함까지 탈탈 털어 검사한다던데 이 정도면 양반이군) 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고 진흙탕을 구르면서부터는 차원이 다른 공포였을 것 같음. 당장 보급이 부족해 내일 먹을 식량도 부족한 상황인데 자진해서 어디 한 군데 총상이라도 입지 않는 이상 매달 보름을 무사히 넘길 만한 양의 혈액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겠지. 그래도 널린 게 시체일테니 피가 부족할 일은 없겠군, 생각했던 예전의 자신이 우습도록 뱀파이어의 몸은 이미 죽은 시신의 굳어버린 피 따위는 영양분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을 것 같음. 그렇다고 제 옆에 있는 부사관의 피를 억지로 빨아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스피어스는 달에 한 번 입을 틀어막고 꾸역꾸역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시체 밭을 누비며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아직 피가 식지 않은 비교적 생생한 몸을 찾아 무슨 혈액형인지도 모를 누군가의 피를 소리 없이 빨아먹었을듯. 잊을 만하면 온몸에 피냄새를 가득 묻히고 나타나는, 기척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드나들고 기이하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으면서도 마치 운명이 기어이 숨통을 붙여놓는 것마냥 그 흔한 부상마저 도통 입지 않는 도그 중대의 소대장에게 블러디 스피어스라는 별명이 붙은 건 어떻게 보면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 같음.
그리고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달려와 곤경에 처한 이지 중대를 죽음의 수렁에서 건져낸 스피어스가 마침내 E중대 중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날, 스피어스는 모어를 만나게 됐을 거임. 언젠가 토코아 캠프에서 한두 번 스쳐 지난 적이 있던, 기다랗고 억센 몸을 가진 잘생긴 얼굴의 기관총 사수였겠지. 온갖 흉흉한 소문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스피어스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병들은 많았지만 모두들 속으로만 의문을 삭힐 뿐 면전에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못 했는데, 모어는 유일하게 스피어스가 아직 도그 중대의 소대장일 시절부터 장교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 대원이었을듯. 스피어스가 이 삐딱하고 재수없는 대원을 신경 쓰는 이유는 많았지만, 개중 가장 큰 이유는 모어가 누군가와 놀랍도록 닮아 있기 때문이었을 것 같음. 그러니까, 자신이 열일곱일 적부터 매달같이 혈액 팩을 집 앞으로 보내준 그 거만하고 자비로운 중년의 남자와 판박이 수준으로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가 남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모어는 꿈에도 몰랐겠지만, 스피어스는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모어를 최대한 신경써줬을 거임. 헤게나우에서 포로 사냥을 나갈 정찰대를 뽑을 때에도 모어는 언제나 배제하고 선택했고, 그가 멀라키와 손잡고 또 무슨 골때리는 사고를 쳐서 윗선에서 경고가 들어올 때에도 그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고, 자신만큼이나 전리품에 열심인 이 눈엣가시가 기어코 히틀러의 앨범을 훔쳐갔을 때에도 형식상의 추궁만 했을 뿐 토코아 캠프에서 소블이 했던 것처럼 그의 소지품을 탈탈 털어버린다거나 별다른 징계를 내리지도 않았겠지. 가끔 늦은 밤에 한 잔 하려고 들른 주점에서 동료 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맥주를 마시고 있는, 담뱃대를 귀 뒤에 꽂은 옆모습을 발견할 때면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떠올라 어쩐지 빚진 마음이 드는 것과 함께 괜한 의문들이 목끝까지 차오르고는 했을 거임. 자네는 자네 아버지가 피 빨아먹는 괴물인 것 알고 있나? 내가 자네 아버지에게 6년이나 신세 진, 그보다 더한 괴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나? 자네의 총알 자국이 있는 왼쪽 어깨 흉터에서 달큰한 냄새가 나는 거 알고 있나? 자네가 나같은 존재들에게 얼마나 시련을 주는지 알고 있나? 자네 아버지와 놀랍도록 똑닮은 거 알고 있나? 목소리는 자네가 더 듣기 좋은 거 알고 있나? 자네가 나와 같은 A형이라는 거 알고 있나? 어젯밤 내 꿈에 나온 거 알고 있나?... 차마 입 밖에 낼 수 있는 그 모든 질문들을 목구멍 너머로 누른 채 그대로 발길을 돌려 주점을 빠져나가면, 그의 뒤로 재빠른 모어의 시선이 순간 분명하게 꽂혔다는 사실을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는 스피어스는 끝끝내 알지 못 했겠지. 모어 역시 스피어스가 그날 밤 자신의 꿈을 꾸면서 밤새 미열에 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을 거임.
하루하루를 죽어가는 이들의 몸에서 공급책을 찾으며 수명을 연장하던 스피어스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인지했을 것 같음. 이젠 종전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쩌면 자신의 몸은 종전까지 버티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이성의 목소리가 자신의 안에서 엄습했겠지. 그러니까, 피가 필요했을 거임. 자신과 똑같은 혈액형에, 따뜻한 피와 팔딱팔딱 뛰는 맥박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의 신선한 피가. 하지만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양심을 배반하고 이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해보자 싶다가도 핏줄이 도드라진 사람의 목선이나 팔뚝만 봐도 그 옛날 17살 여름에 이성을 잃고 물어뜯었던 이름 모를 소년의 뒷목이 생각나면서 차마 본능적인 갈망을 채우지 못 하는 스피어스였을듯. 사람도 죽이고, 부하도 총으로 쏴죽이고, 포로들도 싹 쓸어버린 마당에 이제와 뭐 대단한 도덕을 추구하나 싶다가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다시 한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못 할 것 같았을 거임. 그래서 통제력을 잃고 저도 모르게 으슥한 새벽 거리를 기척 없이 활보하다가도 어느 순간 보름달 아래 이성이 돌아오면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는 스피어스였겠지. 완전히 이기적이지도, 그렇다고 이타적이지도 못 하는 자신의 모호함을 있는 힘껏 비웃어주면서.
결국 마침내 몸에 무리가 와 한밤중에 발작을 일으킨 스피어스는,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기 편을 해치는 것만은 막아보겠다고 굳어버린 두 다리를 질질 끌고 외딴 골목길로 와 제 입에 재갈을 물렸을 것 같음. 머리 위 달빛은 빌어먹게 눈부시고, 전날 밤 비가 내린 땅바닥은 시리도록 차갑고 축축한데, 열이 끓는 이마와 뺨에서는 그와 대조되는 뜨끈한 열기가 났겠지. 죽음은 차가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뜨겁다는 사실을 스피어스는 흐릿해져가는 정신 사이로 체감했을 거임. 잔뜩 웅크린 몸을 끌어안고 모순적인 오한과 고열에 덜덜 떨면서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면 다음 날 자신의 시신은 누가 수습하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스피어스였겠지.
"Sir?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이성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순식간이었을 거임.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스피어스는 알았겠지. 직전까지 잠이 안 오는 새벽을 틈타 담배라도 피우고 있었던 듯 익숙한 연초 냄새가 주저없이 성큼성큼 저를 향해 다가오고,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달빛을 등진 채 까맣게 드리우면, 차마 얼굴을 들지 못 하는 스피어스의 이마 위로 따뜻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내려앉아 가만히 그의 열을 쟀을 것 같음. Shit... 이마가 불구덩이 같습니다, 닥 불러올까요?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이성이 날아가는 것은 너무도 쉬웠을 거임. 한순간에 몸이 통제력을 잃고 동물처럼 움직였겠지.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어의 목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겁도 없이 이를 박고 있는 스피어스였을 것 같음.
뜨끈한 피가 혀끝과 잇새에 스며들고 식도를 타고 내렸을 거임.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차가운 몸에 한순간에 혈기가 돌면서 모어의 목을 둘러싼 팔에도 서서히 생동감이 돌아왔겠지. 자신한테 매달리다시피 상체를 붙잡아 껴안고 목에 송곳니를 꽂은 스피어스의 몸을 반사적으로 받아든 모어가 무게를 따라 고개를 앞으로 기울이며 스피어스의 귓가에 떨리는 숨결을 내쉬었을듯. 멈춘 것만 같던 심장이 살갗을 뚫고 나올 것처럼 세차게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피가 쭉 빠져나가면서 몰려오는 현기증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각할 새도 없이 가슴이 온통 울렁거렸겠지. 이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을 모어는 전에 받아본 적이 있었을 거임. 카랑탕에서 그에게 비꼬듯이 질문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못마땅하다는 듯 뒤돌아보며 시선을 맞추던, 철모 아래 살짝 찡그린 눈빛과 기어코 눈이 마주쳤을 때 울컥 치밀던 그 때의 울렁거림을 닮은 느낌이었을듯.
자신의 목을 뚫은 스피어스의 송곳니 아래로 축축한 혀가 피부 위를 배회하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겠지. 목덜미에 달라붙은 스피어스의 입술을 느끼며 더운 숨을 고르던 모어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끝에 마침내 흡혈이 멈추자 핏기가 가셔 저릿저릿한 고개를 들어 풀린 눈으로 스피어스를 가만히 내려다봤을 거임. 그토록 갈망하던 것만큼 실컷 피를 빨아먹고 나서야 이성이 돌아온 스피어스는 멍하니 숨을 고르다 내리깔린 모어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도망가듯 몸을 뒤로 옮겼을 것 같음. 그리고 그런 스피어스의 머리가 등 뒤의 벽에 부딪치려는 순간 팔을 뻗어 손으로 스피어스의 머리를 받쳐주는 모어... 그가 식은땀에 젖어 말없이 스피어스를 내려다보면 스피어스 역시 모어의 팔에 갇힌 채 상기된 두 뺨과 작게 헐떡이는 호흡으로 모어의 시선을 받아냈겠지. 이내 나직이 고개를 꺾은 모어가 스피어스의 귀와 뺨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 그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포근하게 몸을 끌어안으면, 어느새 모어의 품에 안겨서는 순하게 어깨에 고개를 묻는 스피어스였을듯. 맞닿은 가슴 사이로 심장 박동이 뚫을 듯이 둘의 몸을 관통하며 마구 뜀박질했을 거임. 모어의 심장소리와 체온과 살냄새에 둘러싸인 채 스피어스는 차마 아무것도 묻지 못 하고 그저 모어의 이름이 새겨진 군복 위로 정신없이 입술을 묻기만 했을 것 같음. 자네 지금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알기는 하나...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떨리는 숨을 갈무리하다가 호흡이 진정되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모어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려다가 아직 피냄새가 배어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고개를 물리는 스피어스였을듯. 그러면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모어가 손을 들어 스피어스의 귀와 턱을 한 번에 감싸쥐고 고개 꺾어 부드럽게 입을 맞춰줬겠지. 그 순간 스피어스는 자신의 남은 영원을 이 남자와 함께하게 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 같음.
비오비 모어스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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