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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4 06:03






    , 시작된다.

 

 

 

전우들이여 생각컨데 이번 일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추억이 될 것이다.

 

 

 
     그 종이는 지도일 때도 있으며, 암호가 되기도 하고, 유언일 수도 있고, 평범한 엽서의 주소로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며, 또 어떨 때는 사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받아.”

 

    로건은 물끄러미 자신을 꼭 닮은 뮤턴트가 테이블에서 흰색 메모장 하나에 글씨를 적는 걸 관찰한다. 사각이는 연필이 글자를 써나가며 흑연을 갉아먹는데 그의 시선은 그보다 뾰족한 얼굴에 집중한다.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해두는 것처럼 곳곳을 훑었다. 끝만 곱슬거리는 긴 머리를 뒤로 넘긴 소녀는 그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 적힌 것도 궁금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가 종이를 받았다. 하얀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도 모서리가 깔끔하게 맞물리지 않은 쪽지를 데님의 주머니에 넣자 빛이 나는 원이 열렸다.

 

    “당신은 궁금해 할 것 같았어.”

 

    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처럼 로건도 함께 수긍한다. 

    평범한 이별에는 익숙하지 않은 두 사람은 애매하고 뻣뻣하게 그러나 삼키지 못할 수많은 말들을 걸러내지 못해 그저 얼굴만 마주하고 선다. 평범한 인삿말도 이 상황에 썩 어울리긴 쉽지 않았다. 손을 흔드는 것도 부적절할 때 정적을 깨며 로라가 운을 뗀다. 

 

    “그럼 가볼게. 당신도 알겠지만 이렇게 조용히 가는 게 나아.”

 

    로건은 턱이 울룩해지도록 어금니를 깨물었다가 목울대를 넘겼다. 

 

    “그래.”

 

    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이런 면에서는 그보다 어린 뮤턴트가 낫다. 

 

    “잘 지내고.”

 

    덕분에 로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팔을 벌릴 수 있다. 어설프게 열린 두 팔을 응시하던 로라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더니 그에게 다가와 마주 안는다. 

그를 꼭 끌어안은 로라가 속삭였다. 

 

    “만일 가능하다면 과거에서 만나.”

 

 

 


 

 

 

시지프스가 달리는 차

 

 
 

 

    “야옹.”

 

    술을 싣기 위해 트렁크를 열었던 로건은 그 즉시 뚜껑을 닫았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원치 않았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이벤트로 인해 경악에 가득찬 표정으로 뚜껑에 손을 얹는다. 심란한 숨을 가다듬고 현실을 부정하며 다시 뚜껑을 벌컥 열면 기다란 몸을 한껏 구겨넣은 웨이드의 존재가 드러난다.

 

    “야옹.”로건이 반응하길 기대하며 웨이드가 양손을 오므리며 고양이 우는 소리를 냈다.

 

    “젠장 웨이드!”

 

    뻔뻔스러운 낯짝을 대면한 로건이 즉각적으로 욕설을 뇌까린다.

 

    “그러니까 겨울철 차량 본넷에는 길고양이가 들어가서 잘 수도 있으니 운전하기 전에 반드시 두드려봐야 한다는 경고문같은 걸 들어 본 적이 없어? 당연히 지금은 겨울철이 아니니까 땅콩 자기가 놓쳤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휴-, 바깥 바람을 쐬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아니 아니야, 기다려봐. 깜찍아 나 좀 도와줘. 너무 오랫동안 한 자세로 누워있었나봐.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어, 억, 나 지금 쥐난 것 같아 자기야-아악!”

 

    어디서 굴러들어온 철면피인지 뙤약볕 아래에서 같잖은 소리를 숨 쉬지도 않고 지껄이는 웨이드를 참아주던 로건은 다시 트렁크를 닫았다. “으아악! 로건 이 개새끼야!” 웨이드의 비명이 잔상처럼 남는다.

 

    “이 나쁜 새끼야, 장애인과 노약자를 배려하는데 쓰는 노력의 반의 반 만큼이라도 나를 배려해줘봐! 내 몸을 좀 보라고! 나도 표면상으로는 장애인이 되기도 하고 노약자도 되는데!”

 

    웨이드가 숫제 우는 소리를 냈다. 

    로건은 주름이 깊게 패이도록 눈을 질끈 감고 화를 다스려봤다. 그가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트렁크 안에서 뚜껑에 머리를 박은 웨이드가 쉴 새 없이 구시렁거리는 게 옹옹 울린다. 이미 들켰으니 꺼릴 것도 없는 지 차 안에서 뚜껑을 쾅쾅 두드리기마저 한다.

    로건도 뚜껑 위를 마주 내리치려다가 ‘빌린’ 지 얼마 안 된 차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며 다시 인내라는 것을 되찾으려 했다. 

 
  결국 셔츠 앞주머니에 꽂아두었던 싸구려 시가에 불을 붙이고 하늘에 도넛이 두어개쯤 느긋하게 올라갈 때가 돼서야 트렁크를 열어준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불을 붙인 건 뻔뻔스러운 빨간 마스크다. 

 

    “다 놀랐으면 내가 나가봐도 될까?”

 

    아무리 억눌렀다 해도 알량거리는 낯짝을 마주하니 폭발하는 화는 어쩔 수 없다. 삽시간에 치솟은 목소리로 로건이 고함친다. 

 

    “대체 언제 숨어든 거야 이 멍청아!”

    “네가 피터랑 렌트 계약서를 쓰러 간 사이에?”

 

    웨이드의 무한동력을 단 그 입은 꾸준히 돌아가며 로건의 속을 긁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웨이드는 옛 귀족 영애들이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올 때처럼 은근슬쩍 뻔뻔스럽게 로건에게 손을 내민다. 그 꼴을 겪자니 뮤턴트의 입에서 절로 기가 찬 바람 빠지는 소리가 터진다. 그럼에도 웨이드는 아무렇지 않게 고갯짓으로 슬쩍 제가 내민 손을 가리켰다. 로건은 마지못해 장갑 낀 손을 잡아당겨 그가 트렁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간신히 차 밖으로 발을 내밀게 된 웨이드는 쥐가 난 다리를 트렁크 밖으로 빼고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웨이드. 여기서 염병할 뭐하고 있었던 거야?”

    “땅콩아 네가 묻는 거라면 뭐든 다 대답해줄게. 그런데 잠깐 여기서 타임. 당장 걸으면 아마 뇌까지 찌릿찌릿해서 자리에 주저앉아야 할 거야. 오르가즘보다 짜르르한 게 지금 내 중추신호계로 직통 시그널을 보내왔다고.”

 

    로건이 니코틴이 말리는 기분을 견디지 못해 도저히 불을 끌 수 없던 시가를 입술 옆에 꼬나물었다. 그가 지긋지긋한 기다림을 견디며 웨이드의 답을 기다려준다. 입술 틈으로 새는 연기가 가습기에서 뿜어진 연기처럼 흐른다. 

   
    웨이드가 슬쩍 올려보며 눈치를 봤다가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으흠, 그러니까 내가 땅콩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쫓아왔지?”

 

    설득력이 한참 부족한 대답에 로건은 도넛을 하나 더 만들어 웨이드의 얼굴로 후 불었다. 빨간 마스크를 만난 구름이 장애물에 부딪혀 부숴진다. 

 

    “웃기는 소리. 날더러 그걸 믿으라고? 피차 볼 일도 다 끝난 사이에 그게 대답이 된다 생각해?”

 

    그러자 웨이드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린다. 어린애들이 말문이 막혔을 때 어쩔 줄 몰라하며 검지 끝을 톡톡 두드리고 손가락을 서로 스쳐 물레방아를 돌리는 그런 류의 제스처였다. 따가운 태양 밑에서 시가가 자글자글거리며 타들어갔다. 가슴팍 위로 재가 떨어지기 직전이 됐을 때 로건이 그걸 손가락에 끼워 털었다. 툭 하고 떨어진 도톰한 재가 둘 사이 아스팔트 위로 퍼진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 가는 줄 알고 그 빨간 라텍스를 주워 입고 온 거냐? 따라 올 거면 얌전하게 따라 오기라도 하지.”

 

    로건이 시가로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를 가리켰다.

 

    “이거? 웨이드가 제 가슴팍을 잡아 당긴다.

    “이건 네가 사고라도 칠까봐 혹시나 해서 입고 온 거야.”

    “사고라면 네 놈이 훨씬 더 많이 치는 타입이잖냐.”

    “그러고보니 옷 얘기를 해서 그러는데.”

 

    로건의 말을 그대로 무시한 웨이드가 제멋대로 제 할 말만 이어간다.

 

    “나 지금 너무 더운 것 같아. 어쩌면 열사병에 걸린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차에 타서 에어컨 바람이라도 쐬면서 말하면 안 될까?
 

    히히덕거리며 말한 웨이드가 그대로 트렁크에 쓰러진다.
 

    이번에도 그의 말이 형편 없는 농담이거나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급조한 변명 쯤으로 치부한 로건은 언제까지 이 꼴을 봐야 하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보자 같은 심산이었다. 하지만 연기를 다섯 모금쯤 삼키고 뱉었을 때도 웨이드는 드러누운 채였다. 

     고작 며칠을 지켜본 사이라지만 다른 때였다면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입을 다무는 대신 뭐라도 지껄였을 웨이드가 여전히 조용하자 로건은 이게 그의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이란 걸 인지한다. 그는 거의 꽁다리만 남은 시가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런 씨발 멍청한 웨이드 윈스턴 윌슨.”

 

    로건이 거칠게 웨이드의 목을 잡아 돌렸다.

    벨크로를 이용해 여밀 수 있는 폴리에스테르와 스쿠버 합성 소재의 가면 뒷덜미를 뜯다시피 억지로 잡아 벗기자 시뻘개진 민낯이 드러난다. 

 

    “아기 복숭아처럼 살살 다뤄줄래?”

 

    웨이드가 실없이 웃으며 중얼댄다. 

 

    “그리고 성별, 국적, 나이 불문 다들 성까지 붙여 이름을 부르는 데엔 트라우마가 있으니까 좀 조심해주고 말이야. 자기는 그런 몰래카메라 릴스를 본 적도 없어?”

    “다 죽어가는 얼굴로도 그 주둥이는 절대 다무는 법이 없군.”

 

    웨이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미소를 잃지 않는다. 

    로건은 그의 멱살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축 쳐진 양다리가 덜렁거린다. 그는 한 팔을 어깨에 감아 힘으로 웨이드를 일으켜 세워서는 차로 끌고 간다. 
 

    웨이드는 헥헥거리며 발을 질질 끌었다. 약간은 선선해진 초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그가 다급히 목덜미를 잡아 늘렸다. 보조석 문을 연 로건은 그를 차 안으로 던지다시피 집어넣었다. 맥주 번들 팩을 트렁므에 집어넣고 돌아왔을 때 웨이드는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운전석 베달을 손으로 누른 채 다른 손으로는 열쇠를 잡아 돌리는 시늉을 하며 시동을 켜기 위해 기를 쓰고있었다. 헛짓거리하는 손을 잡아 품으로 던져준 로건이 빈 운전석에 앉아 대신 시동을 켜고 에어컨 팬을 올려준다. 잠깐 시동을 꺼둔 사이에 엔진이 식어 미지근한 바람이 나온다. 하지만 웨이드는 그것이라도 간절했는 지 차가워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팬 앞으로 얼굴을 붙이고 드러눕다시피 한다. 
 

    로건이 그를 노려보자 웨이드가 입을 연다. 

 

    “이봐, 아무리 너라도 여섯 시간쯤 트렁크에 갇히면 결국 이렇게 될 걸.”

 

    로건은 콘솔박스에 쑤셔둔 시가 하나를 꺼내 앞니로 얇은 비닐 포장을 뜯었다. 

 

    “아무도 너한테 거기에 갇혀있으라고 한 적이 없어.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그가 라이터를 돌려 지지며 새로 문 시가에 불을 붙였다. 

    웨이드는 다른 찬 것을 찾아 차 유리에 얼굴을 거의 눌려 붙인 채로 창문을 열었다. 밀착된 피부에 쓸린 창문이 뜨득거리며 열렸다. 

 

    “그치만 자기야 날 좀 봐 보라니까? 온 몸의 피부가 이렇게 문드러진 덕분에 땀 배출이 잘 안 돼서 어쩔 수가 없어. 아무리 사람들이 모공을 줄이려고 레이저 시술이니 뭐니 하며 별 짓으로 애써도 막상 모공이 없으면 이렇게나 삶이 힘들어진다고. 그리고 뭣보다 오존층 파괴와 기후위기가 심각해서 태양이 너무 너무 뜨거운 걸 어떡해.”

    “그러니까 쫓아올 거면 얌전한 꼴로 쫓아오기라도 하지 왜 그런 꼴로 쫓아왔냐.”

    “땅콩이 어디로 가려는 지 말도 안 해주고 떠났잖아.”

    “네가 할 줄 아는 건 남 탓 뿐이냐?”
    "내가 그렇지 않단 건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로건이 뒷자리로 긴 팔을 뻗어 더플백을 뒤적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웨이드는 여전히 입을 쉬지 않고 놀렸다. 

 

    “대충 어디로 가는 지 알 것 같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아무래도 이 수트 없이 쫓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지.”

 

    찾는 물건이 빨리 나오질 않자 짜증스럽게 가방을 끌어온 로건은 흰색 티셔츠와 데님 팬츠 하나를 찾아 빨간 허벅지에 무심히 올려놓는다. 그가 차 문을 열며 말한다.

 

    “3분 줄 테니까 당장 갈아입어.”

    “역시 성격 급한 놈들 중에선 자기가 가장 상냥해.”

 

    웨이드가 제 앞으로 삿대질하는 검지를 보며 웃었다. 시시껄렁하게 웃는 낯짝 앞으로 문이 쾅 닫혔다. 

 

 

 

 

 

 

    로건이 돌아왔을 때도 웨이드는 그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쓴 모양새였다. 그는 낑낑대며 부츠의 끈을 묶고있었다. 빨간색 수트가 뒷자석 한편으로 여기저기 던져져 나뒹굴었다.

 

    “네가 정해준 시간내로 다 갈아입고 싶었지만 내가 변신 마법소녀는 못 돼서.”

 

    웨이드는 머리를 바닥에 쳐박고도 능청을 떨며 신발끈을 갈무리했다. 로건은 표면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 파워에이드를 컵홀더에 끼우고 옆자리에 앉아 빨간 수트를 개켰다. 실상 거의 둘둘 말아 치워놓는다는 표현이 맞았지만 적당히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정돈해 뒷자리에 올려두자 웨이드가 머리를 든다. 로건은 방금 주유소 편의점에서 사온 정체불명의 볼캡을 머리에 씌워주었다. 

 

    “쓰고있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

 

    그러자 덜컥 머리에 꽉 끼인 볼캡을 쓸어본 웨이드가 히죽 웃으며 볼캡을 벗었다. “뭐야, 이건 보리야? 밀이야” 모자에 그려진 알 수 없는 자수를 쓸어본 웨이드가 마스크 역시 벗고는 볼캡을 똑바로 쓴다. 그는 제 몫인 걸 알았다는 듯 파워에이드를 집어 단숨에 반쯤 음료를 들이키고 나서야 좀 살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신음소리를 냈다.

로건은 한심하단 얼굴로 그를 잠시 봤다가 핸들 위로 지도를 펴 위치를 확인했다. 지도는 다시 뒷자리로 던져졌고 엑셀을 밟아 핸들을 돌리면 차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간다. 

 

    “현:대 다이:너스티라 클래식한 선택지네.”

    몸이 식자 한결 기분이 좋아진 웨이드가 흥얼거린다. 

 

    “네 친구의 추천이지.”

    전방을 주시하며 부드럽게 주유소를 빠져나간 로건이 대답한다. 

 

    “차를 빌릴 돈은 어디서 나온 거야?”

    “콜로서스에게 가불 받았어.”

    “자비에 학교가 수입이 있단 말이야? 어쩐지 그렇게 오래된 건물이 아직도 삐까뻔떡하더라. 유지비가 장난 아닐텐데.”

    “찰스는 돈이 많았거든.”로건이 코웃음 쳤다. 

    “그래서 찰리는 만났어?”

    “아니. 아직.”

    “찰리가 없었으면 좀 더 빌려보지 그랬어. 조금만 더 열심히 꼬드겼다면 그 크롬 덩어리는 순진해서 달라는대로 줬을 것 같은데. 빌린 돈이 스마트폰을 살 정도는 안 됐나봐? 요즘엔 다들 스마트폰이라는 걸 쓰는데 내 스마트폰에 탑재된 GPS 지도라는 기능을 빌릴 의향이 있다면 얼마든지 빌려줄게.”

 

    어디에 꿍쳐놨는지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낸 웨이드가 흔들었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동굴 속에 갇혀 살았던 건 아니야, 웨이드. 단지 필요가 없었을 뿐이지. 그리고 커피테이블에 전화번호도 남겨두고 나왔잖아.”

 

    로건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러자 웨이드가 눈알을 굴렸다. 

 

    “어쩐지 도그풀이 숫자 같은 게 적힌 종이를 물고 다니더라. 나는 또 알이 어디서 받아온 파워볼 번호라도 적어둔 종이인 줄 알았네. 대체 어떤 양아치가 맹인에게 점자가 아닌 펜으로 적은 번호를 줬나 했어.”

    “그 개도 너를 닮아 참 저능하군.”

 

    한숨을 길게 뱉은 로건이 비아냥거리자 바로 웨이드가 반박한다. “개는 모욕하지 마! 이 무자비한 동물혐오주의자 같으니. 넌 T인 게 분명해.”

 

    그러자 로건이 웨이드의 관자놀이 옆에 주먹을 갖다댄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또 지져지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봐.”

    “악! 제발! 차 안에선 폭력 금지야. 또 오딧세이 할 거야? 이 차도 돌려줘야 하잖아. 내 피터를 좆되게 할 거냐고?!”

 

    로건은 고양이 발 앞에 삐쭉 튀어나온 발톱같은 클로를 다시 집어넣었다. 서슬퍼런 날이 들어가는 차가운 소리가 울린다. 로건의 이가 빠득거리는 게 들렸다. 그러고선 두 사람은 대화를 잃는다. 

 

    가을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아직도 달궈진 기나긴 아스팔트 도로 앞으로 아지랑이가 어렴풋이 피어올랐다. 햇빛에 지져져 색이 바랜 진회색 도로는 검은색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차는 로건이 모는대로 가야할 길로 나아간다. 목적지를 묻는 대신에 웨이드는 드물게 조용한 동승자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조용한 도로의 반대편으로 간혹 양이나 닭을 실은 축산용 트럭이나 목적지 불명의 대형 화물차가 지나친다. 그럴 때마다 두 대의 차량 사이로 몰아치는 돌풍에 거구의 남성 둘이 탄 세단형 리무진이 덜컹였다. 그럼에도 차의 뒤로 몰아치는 마파람이 비가 올 거라고 암시하는 듯 하다. 웨이드는 빠르게 지나쳐보면 뭉게어놓은 이끼 색 같은 우중충한 진녹색 풍경 속에 자리해 한적히 풀을 뜯는 말의 수를 세었다. 그는 어떻게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 지 집요하게 초속의 풍경 안에서 매번 네다섯 마리를 세는 데에 그침에도 질리지 않고 다시 숫자를 새로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마침 그들을 태운 차 머리 위로 한참만에 존재를 드러낸 방향표지판이 날아간다.

 

    “그래서 내 질문에는 언제 대답할 거냐.”
 

    창문에 입김을 불어 하트 모양을 그리던 웨이드가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본다. 

 

    “웨이드.”

 

    나직한 부름에 웨이드는 다시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라디오조차 틀어놓지 않은 차 안은 적막했고 입술을 달싹이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있잖아. 우리가 아주 중요하지만 놓친 부분이 있어. 그러니까 내가. 놓친 거지.”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던 차의 왼편으로 샛주황색 해가 저문다. 

 

    마땅히 따라올 법 한 화답이 없자 웨이드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한다. 

 

    “봐? 내가 잘 생각해봤는데 (이 때 로건이 드디어 “네가 생각이라는 것도 해?”라고 빈정댔지만 웨이드는 당연히 무시한다), 너는 2017년에 나온 2029년 배경의 영화에서 죽었어. 그런데 그 망할 패러독스 AKA. 시간선의 작은 나치는 ‘따지고 보면’미래의 네 죽음이 내 시간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내 세계를 밀어버리려고 한 거잖아? 근데 또 웃긴 건 내가 네 무덤을 부관참시한 건 현재인 2024년이고! 씨발 그러니까 나같이 배운 것 없이 텅텅 빈 머저리도 1에서부터 10까지는 셀줄 아는데 –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나조차도 한 100까지는 손가락으로도 셀 거 아냐! 손가락이야 부족하면 잘라서 줄 세워놓으면 된까! 그런데 영화 각본가 라는 놈들이 지들 좆대로 영화를 만들어놓는 바람에 캐논이고 논캐논이고 나발이고 진짜로 시간선 자체를 지들 꼴리는대로 다 뭉게어놨다니까?!”

 

    털이라곤 하나도 없이 홀랑 벗겨진 머리통에 마치 심겨진 머리카락이라도 있는 것처럼 살을 쥐어뜯는 웨이드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된다. 그가 하는 말의 절반조차 따라가지 못한 로건은 이마가 찌푸려질 정도로 눈썹을 들썩였다.

 

    “노웨:이홈의 불쌍한 거미를 봐! 소원 하나 잘못 비었다고 세상에서 존재가 지워졌잖아. 심지어 마:일즈 그 불쌍한 꼬맹이도 똑같다니까? 그 어린애의 아빠가 살아있는 게 캐논 고증에 안 맞는다고 그 놈의 신성한 고증이니 어쩌니 하면서 영화관에서 실시간 관크하는 캐논 매니악같은 놈이 갑자기 다른 시간선에서 뛰쳐나와서 그 어린애를 잡아 가두려 했잖아? 다들 아주 제정신이 아니라고. 다음 편 대본이 아직 유출된 게 아니라 어떻게 해결할 지 나도 아직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신데렐라도 자정이 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TVA 그 광신도들이 또 언제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짓을 할 지 어떻게 알아? 나 정도 정신 나간 놈도 아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게 말이 돼?”

 

     눈 안의 시뻘건 살이 보이도록 양볼을 아래로 잡아 눌러내린 웨이드가 로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런데 그런 이곳에 내가 널 데리고 온 거야. 이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깜찍아?”

 

    그가 거의 절규했다. 하지만 로건이 여전히 조용하자 웨이드가 대뜸 손을 위로 올린다. 

    “나쁜 도비! 나쁜 웨이드 윌슨!”
 

    “…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네.”

 

    숫제 참을 수 없는 화를 견뎌내는 것처럼 웨이드가 기어코 스스로 제 머리에 주먹을 마구 내리쳤다. 그가 또 한 번 이상행동을 시도하자 로건이 바로 웨이드의 손목을 잡아 내린다. 강한 아구 힘에 자해를 저지당한 웨이드 윌슨이 순식간에 스스로와 타협해 평온한 얼굴을 했다. 

 

     “죽음으로 사죄할까? 대충 상황이 나빠지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일본이란 나라의 오랜 전통을 따르도록 할게. 내가 와패니즘에 미친 오리엔탈리즘 너드들이 만든 캐릭터라는 건 너도 ‘더 울버린’ 때 충분히 경험해봤으니 잘 알고 있겠지? 물론 그 나라 사람들이 단 한 번도 제대로 사과하는 걸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내 캐릭터의 기원에 한 번 충실해볼게. 나의 경우에는 진짜로 할 수 있는 거니까.”

 

    로건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웨이드를 보며 혼란스러워진다. 안 그래도 복잡했던 심경에 웨이드까지 이런 난리를 치니 어떻게 짜증이 솟구침과 동시에 그가 내뱉는 순수한 직언에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 조금의 침묵도 참지 못한 웨이드가 잡혔던 손목을 뒤틀어 빼내고는 뒷자리에 던져놨던 수트에서 권총을 가져오려 발버둥친다. 난리법석에 로건은 재빨리 정신을 차려서 웨이드의 손목을 다시 잡아 앞으로 돌려놓는다. 운전 중에 할 짓은 못 됐다. 

 

    “차에서 유혈사태를 벌이지 말자고 했던 미친놈이 누구였지?”

    “…… 죽음의 사죄조차 허용되지 않은 입만 살아 떠벌거리는 웨이드 데드풀 윌슨.”

 

    맥 빠지는 대답 위로 지평선에 걸린 해가 눈이 부시도록 다이너스티 내부 면을 주황색으로 쪼개며 들어온다. 아페롤의 강렬한 오렌지색이 산화하며 야금야금 로건의 옆 얼굴과 어깨를 적셨다. 언제나 그랬듯이 산만한 웨이드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황홀한 광경과 꽉 잡힌 손 아래에서 웨이드가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평화를 되찾은 로건이 웨이드 대신 말한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지금 넌 내가 걱정돼서 쫓아왔단 뜻이군.” 

    “깜찍아 애초에 네가 걱정되지 않았다면 널 붙잡지도 않았어.”

 

    그가 여전히 웨이드의 손을 잡은 채로, 다른 손으로는 핸들을 틀었다. 

    “네 시간선을 뒤집어놓을 정도인 내가 걱정 되어서?”

 

    다 늙어빠진 휴 잭:맨의 얼굴로 로건이 근사하게 웃었다. 

 

    “너도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 몰라 하는 것 같지만 날 따라오고 싶다면 이번에는 그 입을 좀 다물고 따라와봐, 웨이드 윌슨.”

 

    웨이드의 숨이 턱 막힌다. 그는 마른 세수를 하며 최선을 다해 얼버무린다. 

 

    “넌 진짜 짜증날 정도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야. 너도 알지?”

 

    “장담하건데 그 누구도 내가 너보다 짜증난다고 생각하진 않을 걸.”

 

    어느 새 땅거미가 내린 도로는 헤드라이트 없이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진다. 웨이드는 그게 꼭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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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이고 로건덷풀 풀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