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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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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여기는 어디일까.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을 때, 흐릿한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코끝까지 내려앉은 검은 안개였다. 주변은 온통 어둠이었다. 영원한 현재에 함몰되는 넋처럼,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크윽.....!"
갑자기 폐부에 갇혔던 숨이 탁 막혔다. 늘어진 안개가 전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양 팔을 버둥거리며 그것을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검은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그에게 몰려들었다.
눅눅한 그림자가 사방에 포진했다. 뒤이어 몰려든 그늘속에서 이제는 낯설기만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그녀에게 빼놓지 않고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전에 앞서, 앙다문 잇새로 숱한 의문들이 새어 나왔다.
".....너는 누구지? 무녀의 몸을 빌려 감히 내게 무슨 계교를 부리는거냐?"
[계교라니. 넌 참으로 재밌는 소릴 하는구나.]
여자의 입술을 타고 어울리지 않는 냉랭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녀의 머리 위로 새파란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막 속에서 파랗게 튀어 오르는 그 빛은 영험하고 초연함이 뒤엉킨 빛이었다.
[그래, 내 정체가 궁금하겠지. 어떤자는 날 심연이라 부르기도 하고, 어떤자는 날 하늘이라 부르기도 하더구나.]
여태껏 남에게 굽혀 본 일이 없는 결곡하게 생긴 눈매가 유유히 휘어진다. 기연한 모습을 아득히 하늘 가운데 두고, 그보다 더 장대한 얼굴에서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리었다. 무녀의 몸에 현신하여 나타난 천지신명이라도 된다는건가? 남자는 그렇게 납득할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죽어가고 있는 건가...."
[찢겨지고 조각난 혼백이 사그라들다 사라지는 건 당연지사. 안타깝게도 본래의 육신까지 빼앗겼으니, 이제 영영 소멸하겠지.]
"소멸이라......"
[정말 소멸이라도 하길 원하는것은 아니겠지?]
"이제와서 다 무슨 소용이야. 이깟 목숨까지도 귀찮아져 버릴 정도인데."
남자는 제 목을 죄는 현실을 타개할 마음이 없었다. 수차례 시도했던 맹목적인 미련과 집착이 어떤 끔찍한 방식으로 돌아오는지를 오랜 시간을 들여 학습한 탓이다. 마치 무기력을 배운 가축과도 같았다.
그는 그저 생을 갉아먹는 권태와 증오를 잠시라도 잊게 해 주는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삶에 대한 확고한 목적이나 어떤 의지 따위 아무런 생각도 없는듯, 남자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곤 거추장스러운 넋 따위 소멸시켜 보라는 듯, 빤히 상대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괘씸한 놈... 네 녀석을 봉인에서 구제한것도, 이렇게 죽어가는 혼백을 가호한 것도, 모든 흐름과 변수를 이용하여 이 상황을 끈질기게 흔든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게냐? 나의 노고를 전부 헛수고로 돌릴 참이야?]
"하늘의 개입이 있었다는 미친 소리마. 이건 크고 작은 선택들이 얽혀서 내 스스로가 만들어 낸 시궁창일 뿐이니까."
[과연 그러 할까? 내 신력이 네 놈에게 깃들여져 있는 한, 너는 신의 간섭과 예속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짐승일 뿐이다.]
"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남자의 매서운 시선은 고요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껍데기를 덮어쓴 듯 허공을 초연히 내다볼 뿐이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사물을 빤히 꿰뚫어 보려는 행동엔 여유가 느긋했다.
[먼 옛날 나는 그저 영험한 자들의 눈을 통해 조용히 이 세상을 지켜보길 원했단다. 그리하여 수천년 전, 내 신성을 초대 신수에게 세습했고, 용은 신의 대리인이자 왕으로 군림하여 인간들을 통치하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 무렵쯤에 생긴 약간의 문제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가 될줄은.]
".....신이 풀지 못한 영원한 문제라니?"
[강대한 힘을 가질수록 용은 살육과 파괴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특히 반려에 대한 소유욕과 독차지하고 싶은 열망은, 더더욱 위험하지. 자신 안의 짐승이 미쳐 날뛰고, 닥치는 대로 누군가를 죽이고, 욕보이고, 부수고, 노략질한 결과가 오늘 날 네놈을 이곳까지 이르게 했으니까.]
"이런 흉귀를 만든 것에 대한 회의감이라도 들었나?"
좋은 답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저를 귀찮게 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짜증날 정도로 우스웠다. 바라보는 남자의 무감한 눈이 붉게 충혈되어 여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어떤 화려한 껍데기도 남자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나는 단지 내게 종속된 계승자가 필요했다. 그 시절 반려를 잃고 상심하던 황제 노부유키가, 자신 안의 신수를 떼어내 영영 인간이 되길 원했지만, 나는 내 신성을 나눈 자를 그리 쉽게 놓아줄수가 없더구나.]
안 그래도 신경질 가득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결국 당신은 신수인 나를 제멋대로 봉인에서 깨워내 용신의 대를 잇게 할 생각이었던거군. 자신의 입맛대로 움직여줄 수족이 필요했을 뿐, 그로인해 희생받는 사람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었던 거야."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하, 꼴좋군! 결국 하늘이 선택하여 만든 아집과 독선도 인간인 노부유키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
꺼져가는 영혼 주제에 건방진 소리였다. 신이 주워 온 혼백은 말 그대로 훈련되지 않은 개에 불과했다. 대번에 삐뚤어진 답이 돌아오자 그녀는 깊게 한숨 쉬었다.
[네 놈의 불손함과 방만함을 누가 따라갈까. 그래, 인정하마. 이미 '저 쪽' 노부유키는 스스로 수많은 이변을 만들어 내며 완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선택을 했어. 게다가, 마치다 케이타 안에 심어 두었던 신수의 후계자 또한 다섯개로 쪼개져 태어났기 때문에 용신의 각성을 크게 기대하긴 힘든 상황이지. 결국 후계를 잃은 내 입장만 곤란해졌다.]
고뇌에 빠진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한참 생각한 그녀는 이내 그런 제 모습이 낯설어 조용히 실소를 흘렸다. 이미 노선에서 엇나갔다고 자각하면서도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이 모든 운명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뱀의 찢겨진 혼백을 살려두는 것도 변덕의 일환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또 다시 악용하시겠다?"
[너는 생각보다 가치가 많은 아이니까.]
통로는 멀리서 봐도 사람 키만 한 높이였다. 그러나 통로 앞의 문은 하늘과 맞닿을 듯이 우뚝 솟아 있었다. 허공에 펼쳐진 기나긴 통로는 끝이 없는 하늘길처럼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의 흥망성쇠가 그 손에 달렸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너는 내가 세운 세상이 허망하게 스러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살피고 공로를 바치게 될터이니.... 하늘에게 헌신하는 생애를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윽고 굽이굽이 휘어진 하늘색 통로가 돌연 형태를 바꾸더니 무한한 미지 속으로 뻗어나갔다.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와 눈을 맞추던 그녀는 아쉬울 것 없이 돌아섰다. 그는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쫓았다. 뒤이어 뱀의 찢겨진 혼백이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천명에 순종하는 개가 되거라. 그러기 위해 널 살려두는 것이니까. 자, 내가 해줄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란다.]
신의 일방적인 통보이자 선포였다. 그러한 요구는 치욕적인 속박과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천명을 수락할 생각따윈 없었지만, 애초에 묵인할 권리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 하늘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깨어진 넋 조각 하나가 혼란스러운 듯 여러 번 눈을 깜박거렸다.
"젠장! 내가 순순히 응할 거라 속단하지마-!"
[아니. 결국 너는 그렇게 될수밖에 없을거다.]
그녀가 점점 멀어져 문과 가까워졌다. 문이 열리자, 그녀가 열린 문 사이로 사라졌다. 열린 문틈으로 침전된 구름이 무거워 보였다. 약간의 충격만 있으면 빗물을 우수수 쏟아낼 것 같은 묵직한 구름들을 보다, 그는 정신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의식했다.
[신수의 존속을 기약한다는 증표로서, 삶의 보람이 될 의미 하나쯤 네 놈에게 자애롭게 베풀어 줄터이니-. 잊지말거라. 이것이 내가 만든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높낮이가 없는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희망인가. 또는, 그것조차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 *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헤아릴 수 없으니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시간이다. 멈춰 서있는 지금에서야 그 흐름이 퇴색 되어 진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거뭇하게 말라붙은 피처럼, 시간은 뇌리 안에 눌러 붙어 있어 빛이 바랜 듯하고, 안개 속을 보는 것처럼 희미했다. 오직 이 찰나만이 이토록 명료하여,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저 망연해졌다.
어느덧 야음이 먹물처럼 캄캄하게 내리 덮었다.
가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노부유키의 신경은 점차 예민해져 갔다. 어둑한 습기 밑에 깔려 있는 작은 화로와 아늑한 침상, 기억 속에 낯익게 새겨져 있는 방 안이 고스란히 노부유키의 눈에 들어오고 다음 순간 사라져 버렸다.
-휘이이잉-!
찬기운이 제법 세차게 분다. 엇지게 엮인 댓살마저 어스름에 잠겨 창호지와 구별이 희미했고, 문풍지가 파닥거리며 떨어 댔다. 휘이잉, 차가운 바깥 바람이 다시 훅 끼쳐 들어왔다. 확연한, 새벽의 바람이었다. 살갗에 수십 개의 얇은 바늘을 꽂아 넣듯, 따끔따끔한 감각이 얼굴과 손등을 스쳤다.
그때였다.
"......날도 쌀쌀한데 감모들면 어쩌시려고 창을 죄다 열어놨담?"
그것은 모두 창가 앞에 자리한 남자가 저를 돌아본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열려 있는 창의 틈새는 누군가에 의해 닫혔고, 바람 소리도 이미 멎었음에도, 혼란한 마음은 자꾸만 흔들거렸다. 침상에 퍼특 일어나 그 모습을 바라본 순간, 노부유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제 눈 앞에 나타난 저 자는 누구인지 당장 확인 해야만 한다.
그는 묵직해진 몸을 바삐 가누어 바지런히 발을 움직이며 새로운 생을 향해 밟아 나갔다. 가까웠던 죽음은 이미 그림자 밑에 밟혔다. 복잡하게 엉켜든 그리움을 짓밟으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듯 한발 한발 내딛자, 잡념과 불안을 떨쳐 내듯 밑바닥이 마른 잡음을 냈다.
조금만 더, 앞으로 조금만 더...
무릎에 힘이 쭉 빠지고 그의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그에 맞추어 천 자락이 격렬하게 허공을 가른다. 공중에서 나부끼는 천은 마치 해일에 휩쓸린 인간처럼 무력하게 팔랑대었다. 이렇게 처절하게 휘청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달려가 마치다를 끌어안은 노부유키의 입에서 처음으로 큰 소리가 나왔다.
"하아, 커헉.....흐! "
연달아 거친 숨이 샌다. 알 수 없을 만큼 숨이 턱턱 막혔다. 물에서 건져진 사람처럼 이제껏 막혔던 숨을 처음 쉬는 헐떡임이 터졌다.
".......폐하?"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그리운 이의 냄새였다. 그 다음은 얼굴에 닿은 서늘한 체온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소슬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그는 그제야 바싹 마른입을 다물고 제 위액이 시큼한 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크흐, 흐....!"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얼굴을 바라본다.
노부유키는 마치다가 무사한 것만으로 몸서리칠 만큼 안도하다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공포에 사로잡혀 떨고 있었다. 품에 안긴 몸을 느끼고 그리워한 체취를 느끼고 뺨에 눌리는 머리카락을 느끼는 이 순간이 되려 너무나도 두려웠다.
"흡, 흐으, 허억.....!"
"폐-, 왜 이러는거야? 정신차려! 노부-!!"
상대가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침을 한 번 삼키니 가슴의 응어리가 걸렸고, 그것은 곧 목구멍 위로 올라오더니 오열로 터졌다. 그러자 그리운 향을 풍기는 품이 자신을 보듬어 안았으며 그는 절벽 위 동아줄처럼 정신없이 붙잡아 매달렸다.
그는 그렇게 한참 속엣것을 토해 냈다. 입술이 찢어지고 목에서 피비린내가 나도 멈출 수 없었다. 손톱이 뒤집어 지도록 상대의 옷을 움켜쥐었고, 짐승처럼 부르짖으며 몸이 뻣뻣해지도록 발광했다. 나중에 가선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눈물 대신 피가 흐를 지경이었다.
[삶의 보람이 될 의미 하나쯤 네 놈에게 자애롭게 베풀어 줄터이니, 잊지말거라. 이것이 내가 만든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혼자 미쳐 가던 그의 깊은 마음속에, 신에게 복종 할수 밖에 없을 유일한 이유를 찾아냈다.
자신의 짝을 지킬수 없었던 수천년 전의 과거가, 물감에 찍은 듯이 복제되어 다시 새롭게 펼쳐친다. 그러나 전생과는 확연히 달랐다. 스즈키 노부유키는 높고 고귀한 하늘이 만든 두번째의 세계로 이끌려 온 것이다.
비로소 동전의 양면처럼 초침의 속도가 같은 두개의 세계가 평행처럼 흘러간다.
저 반대쪽 어디선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을 노부유키와 마치다의 삶처럼, 뱀 또한 자신의 반려와 함께 이 곳에서 터를 잡고 오랫동안 살아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부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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