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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19:18


 

왜 여기에...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오랜만이야 십 육년만인가? 오랜만에 만난 벗에게 인사보다 연유를 먼저 묻다니 여전하군

 

슬며시 웃는 노인을 보는 솔의 얼굴이 복잡했음 대체 타국의 태자가 제국에, 그것도 노인의 분장을 하고 있을 일이 뭐가 있단 말임

 

너무 오랜만이라 내 이름도 잊었는가

 

어찌 감히 태자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올리겠습니까

 

그대는 이 제국의 황후지 않나 자격은 차고 넘치지

 

솔은 어이가 없어 노인을 바라보았음 빙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솔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음

 

예전처럼 버릇없게 굴어보게 나는 그런 그대가 참 좋았어

 

입술을 꾹 닫은 채 끝내 이름을 올리지 않자 노인이 김샜다는 듯이 혀를 찼음

 

, 이름 하나 불러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서

 

태자 전하시잖습니까

 

내가 태자인 건 맞지만 그대에겐 벗이지 않나 그것도 제법 오래 같이 수학한

 

...

 

우리 사이에 그딴 딱딱한 잣대는 들이대지 말게나 내가 말했지 않아 자네가 나를 가벼이 불러주는 것이 좋다고 살면서 내 이름을 듣는 일이 얼마나 있겠어 여기저기서 태자 전하, 태자 전하 하는데

 

계속해서 회유했지만 솔이 듣지 않자 포기한 듯 한숨을 폭 내쉬었음 꼭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과장된 작태에 솔이 슬쩍 태자를 보았다가 시선을 내렸음 십 육년이나 지났는데 눈앞의 남자는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지 그래서 원, 고집도 하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있는 건 착각이 아니었을 거임

 

그보다 혹시 아이를 보지는 못하셨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어찌 되셨고요?

 

아이라면...?

 

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음 선황의 유복자라는 걸 솔직하게 말해야할지 선뜻 판단이 되질 않았지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려고 해도 자신이 쓰러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 곧이곧대로 말하기도 어려웠음 눈앞의 남자가 만약 조금이라도 불미한 일에 관련되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선 안 됐지

 

제가 어쩌다 구한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어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때 곁에 황제 폐하께서 함께 계셨는데...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점점 가슴이 거세게 뛰었음 어째서 황제가 보이지 않는 거지? 궁으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아무도 없이 저 혼자만 남겨진 것일까 설마 요드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렇다면 이 남자는 어디까지 보았으며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불안함이 꺼지질 않았음

 

아이라면 무사하네 다친 곳 하나 없어 그대가 잘 보호했기 때문이겠지

 

그럼... 황제 폐하께선... 설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니시지요?

 

뜸들이며 대답하지 않는 태자에게 겨우 묻자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음

 

그 치도 별일 없네 지금은 일이 있어 궁으로 돌아간 것뿐이야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겨우 마음을 놓은 솔이 긴장했던 몸에서 힘을 뺐음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당장 뛰쳐나갈 것처럼마음을 놓은 탓인지 불안해보이던 표정도 한결 편해졌음 제대로 운신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누굴 구하러가? 솔의 작태가 못마땅해 거슬렸던 태자가 툭 내뱉었음

 

그대는 그것만 궁금한가? 어찌하여 내가 이곳에 있는 건지는 묻지 않는가?

 

어찌된 일입니까

 

숨을 들이마신 솔이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았음 태자는 오랫만에 받아보는 올곧은 시선이 달가워 히죽 웃어버렸음

 

그대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야

 

...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발이 좀 넓잖은가 들리는 소문에 그대의 황제를 누군가가 해치려고 한다기에 걸음해 보았지 그대마저 휩쓸려 잃게 될까 봐 저어되어...

 

정말 그것뿐입니까?

 

솔이 노인의 말을 끊었음 사실 태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을 칠 일인데 심지어 그의 말허리를 끊어버리는 건 크나큰 불경죄에 해당했음 하지만 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묘한 표정으로 눈썹만 으쓱하고 말았지

 

실은 그대가 황제와 혼인한다기에 데리러 온 거였어

 

...?

 

솔은 당황해 되묻고 말았음 노인은 여상한 투로 그대를 데리러 왔다네 했지 머리가 어질어질했음 황후로 내정된 사람을 데리러 왔다니 별일 아닌 듯 쉽게 얘기했지만 그렇게 가볍게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음

 

솔은 다른 권문세가의 여식도 아니었고 황후임 황제의 아내 남의 아내를 탐내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데 하물며 황제의 아내를 탐하다니 당장 반역죄를 뒤집어써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사안이었음 거기다 타국의 인사가 황후를 빼돌리려고 했다? 바로 양국이 전쟁을 벌여도 할 말 없는 일이었지

 

언젠가는 일을 칠 줄 알았지만 그 미친놈이

 

선황폐하십니다

 

솔이 담담한 어투로 정정하자 태자가 픽 웃었음 저 고리타분한 면도 참 재밌단 말이야 노인은 입맛을 다셨음

 

나랏님이 안 계실 땐 나랏님 욕도 한다는데 뭐 어떤가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이니 걸릴 것도 없지 않나

 

태자 전하

 

어쨌든 미친 게 맞지 않아 하는 짓거리가 영 성군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앞에서는 잠잠했지만 뒤에선 다들 그놈을 미친놈이라며 욕했을걸? 그대는 그런 적 없나?

 

없습니다 그분은 미치지 않으셨고, 선황폐하십니다 예를 다해주십시오

 

! 그래 그러지 그대가 그러라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그래 그 빌어먹을 놈의 선황놈이

 

태자를 바라보는 솔의 눈에 질책하는 빛이 떠올랐음 태자는 어느새 편안하게 무릎에 팔을 걸친 채로 풀어진 자세로 빙글거렸음 세월이 흘렀는데도 솔을 자극하는 건 꽤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었지

 

평생 그대를 탐내더니 훼까닥 돌아서 일을 치를 줄은 몰랐지

 

...

 

그놈 아니지 그대의 선황이 어렸을 때도 제법 걱정스러운 놈이었지 않나

 

그래서 태자 전화와 두 분이 아주 잘 어울리셨겠지요

 

솔의 대꾸에 태자가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음 얌전한 것 같아도 절대 지는 법이 없지 암 이래야 나의 솔이지 태자는 몸을 웅크린 채 끅끅거리며 웃었음

 

그대와 대화를 나누니 이제야 사는 것 같네 그동안은 재미가 없어 무료하기 그지 없었거든

 

그런 말은 그만두시고 이곳에 계신 진짜 연유가 무엇입니까 한 나라의 태자나 되시는 분이 이렇게 비밀스럽게 국경을 넘어오시다니요

 

내 말했지 않아 그대를 구하러 왔다고

 

...

 

선황의 손에 떨어질 그대가 무척 괴로울 듯하여 도와주려고 말이야 듣자하니 그대가 정을 준 것이 그 빌어먹을 놈이 아니라 오늘내일하는 황자였다던데

 

...정을 준 것은 맞으나 태자 전하께서 생각하셨던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입술을 꾹 다물며 손을 마주쥔 솔은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음 조금 과장되기는 했지만 그가 말한 대로 요드의 처지가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었음 황제의 자녀들 중 누군들 자리가 위태롭지 않았겠느냐마는 유독 황제의 미움을 산 요드의 처지가 좋지 않았다는 건 솔도 잘 아는 바였음

 

그래서 더 요드에게 정성을 쏟았고 자신이 요드가 성장할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었음 그 때문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미끼 삼아 선황에게서 요드를 지킬 수 있었지 모든 것이 솔이 이룬 것은 아니지만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임은 분명했음

성장했지만 여전히 입지가 불안한 요드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음 불행하게도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뒷배가 되어줄 수 없었고 그게 내내 솔의 가슴에 남아있었을 거임 조금 더 일찍 선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조금은 요드가 편해졌을까 그런 생각을 아예 안했던 것도 아니었음

 

하지만 그에게 홀려 이렇게 남지 않았나 그리고...

 

태자의 시선이 솔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근하게 솔의 배를 훑었음 만약 솔이 그 자신의 생각에 빠지지 않았거나 태자를 기민하게 살폈다면 알 수 있었을 거임 안타깝게도 솔은 혼잡한 속을 다스리느라 그렇지 못했음 그래서 솔은 자신이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음 영원히

 

그대의 황제는 무척이나 솔직한 인사더구만 그대를 제 목숨보다 아끼고 귀히 여기는 게 아주 보기 좋았어

 

가슴이 옥죄어 솔은 맞잡은 손을 더 꼭 잡았음

 

하지만 군주가 시도 때도 없이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만천하게 드러내면 좋지 않지 그를 흔들기 위해 그대를 위험에 빠지게 할 것들이 많을 테니까

 

저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약해

 

단박에 솔의 말을 자른 노인이 쯧쯧 혀를 찼음

 

믿었던 벗에게 배신당해 사경을 헤매고서도 그런 말을 하는가

 

그이도 사정이 있었던 게지요

 

사정이 있었다? 그게 죽을뻔했던 사람이 할 소린가 난 참 그대가 알다가도 모르겠어 대체 그 같잖은 자애로움은 누굴 위한 것인가? 그대는 자신이 잘못되면 황제가 누구보다 슬퍼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

 

아니면 멍청하게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그대가?

 

어리석어 미처 생각지 못한 거겠지요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던 솔이 시선을 떨어뜨렸음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에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음 어쩌면 벗에게 달려오는 동안 정말 노인의 말대로 안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몰랐음 불안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벗이니 그럴 리가 없다고

 

다 제 불찰입니다

 

그래 다 그대 탓이지 그러니 자, 어떠한가

 

...?

 

이제 좀 그대에게 묻고 싶은데

 

노인이 허리를 펴며 빙그레 웃었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살피듯 바라보던 솔은 문득 닫혔던 문이 열리는 걸 발견했음 낯익은 복장을 한 호위군이었는데 그의 품 안에는 작은 포대기에 싼 아이가 들려있었지

 

아이를 발견한 솔의 눈이 커다래졌음 벌떡 일어나 아이에게 달려가려다가 주저앉으며 숨을 헐떡이자 끌끌 혀를 찬 노인이 호위군에게서 아이를 건네 받았음 다가가 솔에게 아이를 내밀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로 솔이 조심스럽게 아이를 받아들었음 낯선 손을 탄 것이 불편할 텐데도 아이는 칭얼거리거나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음 정신을 잃은지 며칠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잘 챙겨먹였는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게 무척 사랑스러웠음

 

내 제안 하나 하지

 

무슨...?

 

그 아이를 살려주겠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아이를 어찌 하시려고...

 

노인은 말을 하다 말고 천장을 올려다보았음 낯선 기척을 느낀 탓이었음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솔도 노인을 따라 천장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금세 사색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았음 무기로 쓸만한 것이 있는지 재빨리 훑던 시야에 노인이 쓰고 버려둔 부지깽이가 보였을 거임 솔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부지깽이를 들었음 쇠막대기일뿐인 것이 묵직했음 솔은 그만큼 자신이 약해진 걸 깨달았음 혼자서는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것과 제 목숨도 부지할 수 없다는 걸

 

태자 전하!

 

왜 그러나

 

도와주십시오 이 아이를...

 

여유로운 작태로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이 날카로운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음 순식간에 침입한 자객이 곧바로 솔에게 검을 휘둘렀음 솔은 부지깽이를 들어 겨우 검을 막아냈지만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음 솔은 손에 쥐었던 부지 깽이를 놓고 온몸으로 아이를 보호하려고 웅크렸음 등을 내보인 솔을 자객이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음

 

카이미르!

 

 

남일 보듯 보던 카이미르가 갑자기 훌쩍 다가와 바닥에서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음

 

휘두를 줄도 모르면서 위험하게

 

역정이 나 괜한 말을 했지 거칠게 움직인 탓에 상처가 터진 솔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갔음 그걸 본 카이미르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음 단번에 자객을 해치운 카이미르가 뒤이어 공격해오는 둘을 상대하며 솔에게서 자객을 떨어뜨려 놓았음

 

황후마마!

 

소란을 감지한 호위군 둘이 안으로 뛰어들어왔음 숨어있던 자객들이 일제히 아래로 뛰어내려왔고 순식간에 약재상 안은 혼전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되었음 솔은 웅크린 채 아이를 보호하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음 카이미르가 지키고 있는 한 위험해질 일은 없었지만 사고는 늘 예상을 깨고 일어나니

 

!

 

뒤에서 뻗은 손이 솔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음 팽팽하게 당겨진 목줄기를 베어버리려던 검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가고 솔의 머리채를 잡은 손목이 잘려나갔음 고통에서 해방된 솔을 카이미르가 낚아채며 거칠게 말했음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대답하기도 전에 카이미르가 쏜살같이 튀어나가 부지깽이를 휘둘렀음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난무했음 솔은 자신을 올려다보다가 소란에 울음을 터트리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제키를 품에 꼭 안고 귀를 막아주었음 울지 말거라 너는 무사할 거란다 라고 속삭인 게 제키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겠지

 

혼전은 제법 오래 이어졌음 솔을 보호하며 싸워야 하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을 거임 검 대신 부지깽이로 자객을 후드려패는 것도 한몫했음 검이었으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을 불필요한 낭비가 계속되고 있었지 카이미르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부지깽이를 바닥에 내팽겨치고는 죽은 자객의 검을 들어 적들을 도륙하기 시작했음 솔은 야차같은 모습으로 적들을 쓸어버리는 카이미르를 바라보며 그의 살기에 제키가 겁먹지 않도록 소중하게 품에 안고 숨죽였음

 

탱그렁 카이미르가 집어던진 검이 바닥에 떨어졌음 단단히 화가 난 카이미르가 마지막으로 죽인 것은 요드가 남기고 간 호위군이었음 노인의 모습을 한 카이미르가 엄청난 실력으로 검을 휘두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호위군이 검을 들이밀었기 때문임 아마 카이미르를 제압한 뒤 정체를 캐물을 셈이었을 거임 아마 궁에서 한참 추국장을 연 요드에게도 기별을 하려 했겠지 그건 안 될 일이었음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수하에게 카이미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았음 섬뜩한 살기를 마주한 수하는 말없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음 도중에 난입한 카이미르의 수하들은 총 다섯이었음 그 많은 사람들이 작은 약재상을 둘러싸고 있었는데도 몰랐다는 사실이 놀라웠음 물론 카이미르는 알고 있었지 기감이 약한 솔에게 말하지 않았을뿐

 

, 이제 대답해보게 나와 함께 떠날 텐가

 

카이미르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솔 앞에 털썩 주저 앉았음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흥분과 열기가 위험하게 일렁거리는 눈은 살육에 미친 야차 같았음 그런데도 솔은 떨기는커녕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음

 

괜찮으십니까

 

내가 원한 건 그런 대답이 아니었네만

 

말투는 차갑지만 서서히 살기가 누그러졌음 어릴 때부터 그랬음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용납 못 해도 솔이 끼어드는 건 무르게 받아주었었지 그걸 기억하는 솔은 품에 안은 제키를 꼭 끌어안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카이미르를 살폈음 아무리 제게 무른 카이미르라고 해도 흥분한 그에게 무턱대고 다가가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있다면, 봐주기라도 할 건가?

 

저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솔이 가리킨 것은 카이미르의 상태를 묻던 수하였음

 

직접 할 게 아니면 묻지 마

 

그럼 다치셨습니까?

 

다치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카이미르는 바닥에 쓰러진 호위군에게서 눈을 못 떼는 솔에게 물었음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이에게 시선을 두는 걸 참을 수가 없었음

 

모르는 척하는건 통하지 않아 솔

 

저는...

 

잠시 망설였던 솔이 품 안의 제키를 내려다보았음 사실 황후 된 입장으로 갈 수 없음을 떠나 카이미르의 제안을 수락할 이유는 없었음 요드가 여기 있었고 이제는 지켜야 할 제키도 생겼지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찾아와 줄 요드와의 아이들도

 

가지 않겠습니다 방금 일어났던 일과 같은 위험에서 제키를 보호해주시겠다는 뜻이었다면 정식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제키를 보호해주세요 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으니

 

...!

 

카이미르는 실소했음 아이에게 약한 솔이니 협박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었음 그 애송이에게 저렇듯 온 마음을 빼앗겼다고? 용납할 수 없었지

 

그럼 이건 어떤가

 

...?

 

살게해주겠네 자네를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대를 살려주겠다는 말이야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말이지

 

제가...

 

입술을 달싹이던 솔이 뭔가 생각에 빠진 것처럼 침묵했음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솔이 카이미르와 눈을 맞추었음

 

제가 마신 독이 무엇입니까?

 

그걸 알면, 해독할 수 있을까 봐?

 

...

 

다행히도 귀비가 먹인 독은 내가 해독했네

 

그럼 끝난 일이 아닙니까

 

그 독을 해독하는데 다른 독을 썼어

 

농을 건네듯 가볍게 건넨 말에 솔이 눈만 깜박였음

 

그 독은 아직 해독하지 않았지 자네는 아직 회복된 것이 아니야

 

대체 그게 무슨... 태자 전하께서 쓰신 독이 무엇이기에...

 

가문의 비술을 잠시 빌려왔지

 

솔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음 솔은 카이미르가 속한 황실이 독에 대해 해박했던 걸 떠올렸음 실제로 조제한 독을 가져와 시연을 보이던 카이미르도 떠올랐지 카이미르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슬픔에 차 말했음

 

자네가 마신 독을 해독하려면 어쩔 수 없었네

 

윤이...

 

눈앞이 어질어질했음

 

윤이 그 독을 구한 것이 당신이었습니까?

 

 

당신이 윤에게 그 독을 주신 겁니까? 십 육년 전에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셨지요 황실에 비술로 전해지는 독이 두 개 있는데 하나의 독을 해독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써야 한다고요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역시 그대는 대단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음 카이미르가 말한 독은 보통 쓰는 약재나 해독제로는 해독할 수 없었음 제조하는 데 쓰이는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웠고 정확한 배율과 배합 순서를 지키며 완성시키기까지 어려웠기에 그만큼 만들기도 까다롭고 해독제를 만들기도 어려웠음 그래서 지상에 해독제는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봐야했음 비술에 정통한 카이미르조차도 몇 번 시도했지만 재료만 버리고 번번이 실패했었으니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지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 그래서 내 제안하지 않아 자네를 살려주겠다고

 

솔은 가라앉은 눈으로 카이미르를 바라보았음 카이미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쥐여주고 싶었음 요드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지 하지만 카이미르의 입에서 나온 조건은 솔의 모든 기대와 각오를 무너지게 했을 거임

 

그대를 주게

 

...

 

나를 따른다면 해독제를 줄 의향이 있어

 

태자 전하를 따른다니 그 무슨...

 

그대의 황제를 버리고 나를 선택하란 말이야 버린다는 말이 싫으면 다른 말을 써볼 수도 있네만 내가 말을 바꿔봐야 그대는 그렇게 느끼겠지?

 

솔은 손을 꼭 말아쥐었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봐 목숨을 건지는 일이야 실상을 알게 된다면 그대의 황제도 그러라고 할 걸세 자네를 살리는 일이잖은가

 

솔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음 카이미르의 말이 맞았음 요드는 자신을 살릴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었음 설령 제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솔은 살리려고 하겠지 하지만 요드가 좋다고 해도 이젠 솔이 싫었음 오래도록 요드의 곁에서 그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면 죽더라도 그의 곁에서 죽고 싶었지

 

그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 독이 발작해 죽는다니까?

 

압니다

 

그런데도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

 

저는 황제 폐하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진정한 성군으로 거듭나실 때까지 곁에서 벗이 되어주기로 했어요 그 외로운 분을 혼자 둘 수야 없지 않습니까

 

도중에 죽어 나자빠지면 소용없는 일 아닌가 만약 지금 내 제안을 거절하면 자네는 서서히 중독되어 죽어갈 거야 이 년 마다 발작하던 게 점점 더 발작하는 시간이 빨라지고 더 빨리 쇠약해지겠지 어떤 약을 써도 회복할 수 없고 서서히 죽어가는 그대를 지켜볼 수 밖에 없어 그런데도 거절하겠다고? 그대의 황제를 슬프게 할 셈인가?

 

그래도 황제 폐하를 배신하고 돌아서는 일보다는 백배, 천배 낫습니다

 

자네는 가끔 일의 경중을 착각할 때가 있는 듯해 세상에 목숨만큼 중한 것이 뭐가 있지?

 

태자 전하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니오나 제게는 미천한 목숨보다 제 부군이 더 중요하여서요

 

?

 

처음엔 참 안쓰러운 분이셔서 눈이 갔었답니다

 

솔은 담담한 어조로 숨겼던 마음을 드러냈음 은은하게 머금은 미소나 부드러워진 표정은 솔이 일부러 지은 게 아니었음 요드를 생각하면 저절로 그렇게 나오는 것이었지 그게 솔의 진심이었음 카이미르는 솔이 진심으로 요드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음

 

홀로 견디시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워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런 분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어 황송했지만 변치 않고 보여주시는 마음이 어찌나 달고 어여쁜지... 저는 평생 그런 마음은 모른 채 살 거라고 생각했었답니다

 

그런 거라면 나도 네게 줄 수 있어

 

솔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음 카이미르의 말을 부정하는 게 아니었음 만약 요드와 연을 맺기 전에 카이미르와 먼저 연이 닿았다면 그 역시 솔에게 진심을 다했을 터였음 하지만 카이미르가 보여주는 진심은 달지도 않고 언제나 불안할 거였음 그게 카이미르의 본질이었으니까

 

그런 연유로 태자 전하께서 주신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황송합니다

 

내게 그대가 필요하다고 하여도?

 

전하께서는 제가 필요치 않으십니다 그저 마음 둘 곳을 아직 찾지 못하셨을 뿐이지요

 

그렇게 똑 부러지게 거절하면 다시 내밀기도 어렵지 않나

 

하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뭘 말인가

 

오늘 있었던 일은 황제 폐하께서 모르게 해주세요 그분의 마음이 다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옘병 저 죽을 것보다 그 치의 마음을 더 생각한다니 어이가 없군

 

카이미르는 체통없이 말하고는 손에 얼굴을 묻었음 이렇게 확실하게 거절당하다니 아니지 사실은 십 육 년 전에도, 몇 년 전에도 거절은 당했었음 그걸 거절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뿐 카이미르는 뒤틀릴 대로 뒤틀려 쓰라린 속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음

 

자네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군

 

너그럽게 봐주시니 황공합니다

 

솔은 품에서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제키를 얼렀음 천천히 등을 두드리며 진정시키자 가슴에 얼굴을 묻은 제키가 자리를 찾듯 몇 번 비비더니 눈을 감았지 솔은 난장판 속에서도 꿋꿋한 제키를 보며 흡족해 미소 지었음 그걸 지켜보는 카이미르는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음 이제나저제나 제 마음을 빼앗아가버린 사람이었으니까

 

 

 

 

애콜라이트 요드솔 약 카이미르솔

 
2024.06.29 19:3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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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친 카이미르일까 생각하긴 했는데 ㄹㅇ이었어 갈수럭 미친 존잼에 도라버릴 존맛이 되가고 있어 센세 이건 진짜 노벨문학상 타야돼 사랑해
[Code: 1e92]
2024.06.29 19: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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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걍 셋이서 행복하면 안될까 독도 해독하고 만수무강해 제발
[Code: 1e92]
2024.06.29 19:3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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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은 요드뿐이구나 존나 순애 그자체다 자기 목숨보다 요드의 마음이 먼저라니 ㅠㅠㅠㅠㅠㅠ 아니 근데 좋아한다면서 독약 먹여놓고 목숨으로 흥정하시는 건가요 태자...
[Code: 0443]
2024.06.29 20: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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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 요드솔 존나 행복해야한다고 ㅠㅠㅠㅠㅠㅠㅠ 솔이 요드생각하는거 그와중에 너무 순애라 존좋 ㅠㅠㅠㅠㅠㅠㅠ
[Code: 29cd]
2024.06.29 20: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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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이 요드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예쁘고 애틋해 ㅠㅠ 카이미르 이놈아 빨리 해독제 내놔 ㅠㅠㅠ 요드랑 솔 빨리 만나게 해주세요 우리 천재만재 센세여
[Code: bfb4]
2024.06.29 20: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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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나라 태자라면서 왜 남의나라 와가지고 약초나 캐고있어ㅠ 지가 독 주고 협박하네 ㅅㅂㅠ 빨리 솔 치료해주고 니네나라나 다스리러 가
[Code: ae9c]
2024.06.29 20: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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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를 사랑해 센세의 요드솔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Code: f081]
2024.06.29 21:09
ㅇㅇ
헐 헐 너무 좋아 헐 헐
[Code: 7a2f]
2024.06.29 22: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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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솔아 진짜 1부터 10까지 요드만 생각하는게 너무 절절하게 느껴져서 제 마음이 다 찢어지면서도 뭉클하고 벅차올라요 이번 편에 요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솔이 말하는 요드의 모습과 마음만으로도 이미 같은 장소에 있는 것 같다고 느껴져요 자기가 마음에 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는걸 알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는 카이미르도 참 마음이 끓겠어요 함께하고싶은데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다르니... 솔이 요드를, 요드가 솔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계속해서 저 둘을 응원하게 되요ㅜㅜ 얘들아 영사해...
[Code: 87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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