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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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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앞엔 한 줄이라도 더 기사에 싣기 위해 진을 친 기자들이 가득했다.
난 그날 당장 동오 형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무작정 떼를 쓸 만큼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내 행동 하나에 움직일 수많은 이해관계와 계약들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동오 형이 입원한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며칠이 지난 뒤였다. 자정을 한참 넘긴 늦은 새벽이었는데도 병원 앞은 복잡했고 주차장 입구로 들어서는 내 차를 알아보곤 플래시를 터뜨리며 따라붙은 카메라도 있었다.
형이 입원한 병실 앞으로 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시동이 꺼진 차 밖으로 나서는 것도, 이미 한참 전 도착해서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도, 당직 중인 간호사에게 최동오의 이름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도, 길게 늘어진 복도 끝의 병실까지 걸어가는 것도...어느 것 하나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 이 쌀쌀한 날씨에도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등이 축축했고 손에 쥔 VIP 병동 출입증은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김이 서렸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문 하나를 열 수가 없었다. 병실 안쪽에서 조용한 말소리들이 들려 왔다. 이 속에 형의 목소리도 섞여 있을까? 아니면 자고 있을까. 단순한 탈진이라면 며칠을 입원하진 않을텐데..어디가 아픈 걸까, 어쩌다 코트를 나가지도 못하고 쓰러진 거지...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들었고 초조하게 입술만 뜯고 있었다.
걱정이 됐고 보고 싶었고 이렇게 병실 문에 붙은 최동오 이름 세 글자만 봐도 마음 한켠이 욱씬거리는데...이것마저도 내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이 내 얼굴을 보고 기분 나빠할까? 당황할까?
형은 잊고 싶은 기억을 내가 자꾸 상기시키는 거라면?
내가 지금 형을 보겠다고 찾아온 게 맞는 걸까...?
나는 끝내 그 문 하나 열고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고 간접등만 몇 개 켜져 있는 어두운 복도 의자에 앉아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오래도록 숨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복도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쪽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혹여나 날 알아볼까 싶어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덩치가 그런다고 가려질 것도 아니었지만...그냥..세상 사람 그 누구도 아무도 날 보지 못했으면 하는 간절함이었다. 커브를 돌아 병실이 있는 복도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서서히 멈췄다. 최선을 다해 내 몸을 숨겨보려 애쓰던 것을 까먹고 무심코 발소리가 멈춘 방향을 바라봤다. 명헌이 형이었다.
명헌이 형은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봤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의 그 무표정이 내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형은 나를 지나쳐 복도 끝 동오 형이 입원한 병실로 걸어갔고 나는 이번에도 또 그 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난 어두운 병실 복도에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고 병원 특유의 약품 냄새와 따뜻한 온도에 가쁘게 뛰던 심장이 점점 안정이 되어 가며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았던 것 같다. 그 잠깐 동안 나는 꿈을 꿨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날의 기억이었다.
앳된 얼굴의 형들...쨍쨍 내리쬐는 햇살 아래의 수돗가.
찬 물이 뿜어져 나오는 기다란 호스를 잡고 마치 묘기를 부리듯 흔들어대는 현철이 형, 물줄기를 피하며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명헌이 형, 빨간 대야를 방패처럼 든 성구 형, 그만 하라고 짜증을 내지만 웃고 있는 낙수 형, 그리고...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로 환하게 웃고 있는 동오 형...
그건 아주 일상적이었고 별거 아니었지만 참 소중하고 그리운 어린날의 우리였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는 동오 형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낙수형이 던진 음료수 캔을 잡아내는 형의 몸짓, 쭉 뻗은 팔과 길쭉한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함께 팔락이는 티셔츠. 내리쬐는 여름 햇볕에 형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매끈하게 뻗은 몸선과 개구지게 휘어지는 웃음 가득한 눈꼬리에 시선이 집중된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내가 '동오 형' 이라고 한 마디 부르면 해사하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나를 바라보겠지?
온몸으로 꽉 끌어안고 싶다.
입에서 웅얼대며 튀어나오지 않던 소리들을 온 힘 다해 끌어모아 뱉어냈다.
형! 동오 형!
그 소리에 나를 돌아보는 형의 몸짓이 천천히 보였다. 그리고 곧 정확히 나를 향한 형의 시선, 형은...울고 있었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두 눈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고 활짝 웃던 그 입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일그러졌다.
형의 입이 열렸고 마치 울분을 토해내듯 날 원망하는 듯...무언가 말을 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말이지?
뭘 얘기하고 싶은 거에요 형.
혹시 내가 형을 울게 했어요?
내가 힘들게 한 거에요?
형..동오 형...
최동오.
-
그렇게 한참을 형에게 닿지 않는 애원으로 꿈속을 가득 채우다 번뜩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여전히 어두운 병원 복도에 앉아 있었다. 현실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고요함이 이질적이었다. 나와 조금 떨어진 의자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명헌이 형이었다.
"왜 안 들어가."
"......"
"거기도 아직 리그 진행중일텐데 어떻게 왔냐."
명헌이 형의 표정은 화가 나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에 속을 알 수 없는 음성. 밥은 먹었냐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는 물음에 난 대답하지 못했다. 명헌이 형의 눈이 마치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뻔뻔하고 미련한 놈인지 말이다.
"..최동오 지금 자. 병실엔 동오 부모님 계시고."
명헌이 형은 아무 답도 하지 않는 내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쟤 지금 평소 몸상태 아닌 거, 기사에서 하도 떠들어대서 다 봤지?"
"..."
"한동안 섭식장애랑 수면장애가 심했다."
"..."
"최동오 저렇게 실려오고선 온갖 기사들이 올라오더라고. 좀 전에 보니 국민영웅 NBA스타 정우성이 병문안 왔다는 기사도 떴더라."
"..."
"....너네 정말 형동생 사이 맞냐? 동료 맞아?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 잘 생각하고 대답해 정우성."
나는 명헌이형의 질문에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 쉬운 질문이었고, 나에게 동오 형은 뜨거운 시절을 함께 한 동료이자 선배가 분명히 맞는데...그게 아니라면 뭘 더 얼마나 가까운 관계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그 쉬운 답을 명헌이 형에게 주지 못했다.
나에게 최동오가 단순히 '형'이 맞을까...
나는 사실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한테 최동오가 그냥 형이라고 하면 더 할 말은 없고, 늬들 형동생 아니라고 한다면 따라와 보던가."
-
나는 명헌이 형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형이 익숙하게 차키를 눌러 차 문을 열고, 실내등을 켜고,
조수석에 있던 짐들을 뒷자석에 던져넣고 다시 운전석에 타는 과정을 난 그저 멀뚱멀뚱 서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해? 타."
경기를 마치고 온 건지 더플백과 백팩, 수건 등이 뒷자석에 던져져 있었고 갈아입은 듯한 티셔츠도 구겨져 있었다.
차에 타서도 명헌이 형은 시종일관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지만 형이 내게 계속해서 보내는 '나 너 마음에 안 든다 정우성.'이라는 신호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동오 형 언제부터 그랬어요?"
내 물음에 명헌이 형은 짧게 '작년 봄? 여름? 그쯤부터.'라고 대답을 했다. 계속 식사를 잘 못하고 잠을 못 자서 치료도 오래 받고 있었다고...왜일까, 정말 인터넷 기사에 나오는 내용처럼 단순히 심한 장염을 반복해서 앓으면서 컨디션 관리에 실패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넌 그게 왜 궁금한데?"
"..."
"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이 돼서 미국에서 잘 나가시는 놈이 시즌 중에 한국까지 날아왔냐?"
"..."
"뭐든, 일단 왔고 병원까지 왔으면서 왜 그러고 있었냐고."
그러게요. 나는 왜 이 새벽에 한국까지 날아와 이러고 있을까요. 동오 형을 볼 용기도 없으면서...동오 형이 아팠던 줄도 몰랐으면서...아니, 컨디션 안 좋다는 거 기사로 다 봐 놓고도 그동안 연락도 안 해봤으면서. 그런 주제에 무슨 염치로 여길 왔을까요.
"정우성. 계속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동오 형이랑..좀 서먹해진 지 몇 개월 됐어요. 제가 동오 형한테 큰 잘못을 했거든요."
숨이 턱턱 막히게 가슴이 답답해서 나는 애꿎은 손만 쥐었다 폈다,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동오는 네 얘기 거의 안 했어. 아무래도 그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이 바로 작년이었으니까 입에 올리기 조심스러웠겠지. 근데 너 알잖아, 걔는 항상 너 엄청 좋아해."
"......지금은 아닐지도요. 제가 동오 형한테 너무 큰 상처를 줬거든요. 사과도..못 했고요. 이런 동생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냥 형동생, 아니라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명헌이 형을 바라보았고, 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명헌이 형은 몸을 돌려 뒷자석에 있던 백팩 하나를 가져왔고 가방을 열어 파일 두 개와 두꺼운 노트 하나를 꺼냈다.
"동오 가방. 다른 짐들은 부모님 드렸는데 이건 도저히 못 드리겠더라."
"...이게 뭔ㄷ"
"이거 내가 갖고있는 거 불법이야. 너한테 보여주는 건 더 불법. 근데, 난 의사도 아니고 이거 들킨다 해서 최동오가 나 고소할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난 당장 저렇게 앓아누운 내 친구 살려야겠거든."
나는 명헌이 형이 건넨 그 파일들과 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은 아무 말 없이 카시트에 고개를 젖혀 기대고 눈을 가만히 감고 있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뭔가 안 좋은 예감에 잠시 망설였지만 심호흡을 크게 하고 천천히 파일 하나를 열어 보았다. 꽤 여러 장의 종이들이 끼워져 있었는데, 맨 위의 종이에 써진 환자 정보에 시선이 꽂힐 수 밖에 없었다.
최 동 오 / M / Omega(g)
뭐지?
진료 기록지엔 온갖 알 수 없는 의학용어들이 적혀 있었고 봐도 무슨 소리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암호 해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종이를 빠르게 몇 장 넘기다가 일순간 손이 멈췄다.
한 장의 사진. 동료 선수가 자기 와이프가 임신을 했다며 같은 걸 보여준 적이 있다. 그건 분명 초음파 사진이었다.
사고 회로가 멈춘 듯 멍해졌다.
이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의미하는 게 뭔지, 뭘 찍은 건지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사진이 의미하는 게 뭔지...
단 한 가지밖엔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말도 안 돼.
"임신 5주차에 찍은 거. 동오 그날 임신 사실 처음으로 알았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손이 덜덜 떨려왔고 진료 기록지를 다시 앞으로 넘겨 환자 정보란의 이름이 정말 동오 형이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진료 일자, 이 모든 일의 시작인 그날 밤으로부터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초점을 잡지 못하는 내 동공이 사정 없이 요동쳤고 벌어진 입술은 도무지 다물어 질 줄을 모른 채 덜덜 떨리고만 있었다.
이제서야 그간의 모든 일들이 이해가 됐다. 동오 형이 왜 나를 피했는지, 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잠깐의 만남조차도 함께하지 않았는지.
나 때문에 형은 원치 않는 임신을 했고 그래서 날 보고 싶지가 않았던 거야.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모든 게 나 때문인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왜 나에게 원망을 쏟아내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것들의 원흉인 나는 이제서야 이 사실을 동오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었다.
"그 애, 지금은 최동오한테 없어."
"그게 무슨...말이에요?"
"......자연 유산."
명헌이 형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전부 거짓말 같았다. 그 정도로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고 한심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진실이었다. 동오 형에게 일어났던 지난 몇 개월간의 일들은 너무도 충격적이었고 이렇게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너무 아팠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 싸늘하고 소름끼치는 느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임신 10주차를 앞두고 자연 유산, 그리고 내가 형을 페로몬으로 위협했던 일. 내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단 하루도 그날의 후회 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웠던 건 결국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손이 너무 떨려서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간신히 파일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고 진료 일자를 보고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아직도 머물러서 고통받고 있는, 바로 그 계절이었다.
나는 끝까지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람이며 더 이상 최동오에게 내 존재는 끝없는 고통만을 안겨 줄 뿐이다. 몇 달 동안이나 질질 끌며 미련을 놓지 못하고 내 주제를 모른 채 형이 입원한 병원까지 온 스스로가 역겨웠다.
구역질이 났다.
더는 내가 동오 형 곁에 있어선 안돼.
용서를 구하겠단 마음은 오만한 내 착각일 뿐이야.
단 일분일초도 이곳에 있는 내가 역겨워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차 문을 열고 몸을 움직이자 내 무릎에 놓여 있던 파일들이 와르르 밑으로 쏟아졌다.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바닥에 떨어진 그것들을 응시했다.
그래, 미련 가지지 말고 가 정우성. 다 끝났어. 이제 끝이야. 네가 그만 꺼져 주는 게 동오 형한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야.
윙윙대는 머리 속과 당장이라도 풀려버릴 것 같은 다리를 움직여 간신히 차 밖으로 몸을 빼 내었을 때, 명헌이 형이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도망가려고? 넌 너 밖에 몰라? 동오가 왜 너한테 말 안 한 지 알겠다!"
"흡...흐윽..흑..."
"넌 이렇게 미국 돌아가면 몇 달 좀 힘들다 말지, 그럼 여기 있는 최동오는. 걔는 이미 네가 모르고 있는 동안 혼자 버티다 이렇게 병이 났는데, 몸이고 마음이고 다 망가졌는데! 넌 이걸 다 알고도 그냥 간다고?"
"제가...동오 형 옆에 있을 자격이..없어요..형을 괴롭게 할 거에요..."
"....자격이고 뭐고 따지기 전에 내 친구부터 살려내고 가던지 말던지 해 정우성 이 씨발새끼야."
명헌이 형은 열린 차 문을 잡은 채 그 자리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아까 파일과 함께 받았던 노트였다. 또 내가 모르는 뭐가 더 있는 걸까, 나는 또 어떤 후회를 하게 되는 걸까...
무서웠다.
무서웠지만...그랬지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의 첫 장을 펼쳤고, 노트 안에 빼곡히 적힌 글씨들이 보였다.
너무도 눈에 익은 동오 형의 글씨체.
노트 주인의 죄책감과 아픔, 슬픔, 후회.
그 모든 것들이 담긴 글자들.
곳곳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과 번짐, 마구 지워버린 흔적들...
형의 괴로움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이 노트는 최동오가 홀로 보냈던 그 힘든 시간 속에 아직도 머물러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닿는 피부가 데인 듯 뜨거웠고 심장이 난도질 당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너무 괴로워 당장이라도 노트를 덮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 주저앉아 쉴새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흐려진 시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 한 장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오 형의 지난 시간들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아팠던 거야, 얼마나 괴로웠어요 형?
그리고 노트 속에서 어느 순간 등장한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
이게 뭐지? 이건..이거는...
나는 이 글자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노트를 계속해서 넘겨 보았다.
노트 가득 빼곡히 쓰인 동오 형의 눈물 젖은 글씨들.
그리고 나의 이름.
믿을 수가 없었다.
노트 속에서 멈춰버린 최동오의 시간들 속엔 내가 있었고, 그 아픔 속에도 내가 있었고, 그 그리움 속에도 내가 있었고 그 사랑 속에도...내가 있었다.
보고 싶어
너한테 안기고 싶어
네 냄새가 그리워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
오늘은 꿈에 네가 나왔어
이게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안아주던 네 품을 잊지 못해
내 손을 잡아주던 네 손의 온기를 아직도 기억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우성아
정우성...네가 보고 싶어
사랑해
사랑해 우성아
아주 많이 사랑해 정우성
멈춰버린 최동오의 시간들이,
아직도 그 속에 갇혀 있는 최동오의 괴로움이,
행여 밖으로 빠져나올까 꾹꾹 눌러 쓴 나를 향한 최동오의 마음이,
그 모든 아픔들이 고스란히 담긴 그 노트 한 권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는 그만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엉엉 울고 말았다.
슬램덩크
우성동오
동오텀
동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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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앞엔 한 줄이라도 더 기사에 싣기 위해 진을 친 기자들이 가득했다.
난 그날 당장 동오 형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무작정 떼를 쓸 만큼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내 행동 하나에 움직일 수많은 이해관계와 계약들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동오 형이 입원한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며칠이 지난 뒤였다. 자정을 한참 넘긴 늦은 새벽이었는데도 병원 앞은 복잡했고 주차장 입구로 들어서는 내 차를 알아보곤 플래시를 터뜨리며 따라붙은 카메라도 있었다.
형이 입원한 병실 앞으로 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시동이 꺼진 차 밖으로 나서는 것도, 이미 한참 전 도착해서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도, 당직 중인 간호사에게 최동오의 이름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도, 길게 늘어진 복도 끝의 병실까지 걸어가는 것도...어느 것 하나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 이 쌀쌀한 날씨에도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등이 축축했고 손에 쥔 VIP 병동 출입증은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김이 서렸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문 하나를 열 수가 없었다. 병실 안쪽에서 조용한 말소리들이 들려 왔다. 이 속에 형의 목소리도 섞여 있을까? 아니면 자고 있을까. 단순한 탈진이라면 며칠을 입원하진 않을텐데..어디가 아픈 걸까, 어쩌다 코트를 나가지도 못하고 쓰러진 거지...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들었고 초조하게 입술만 뜯고 있었다.
걱정이 됐고 보고 싶었고 이렇게 병실 문에 붙은 최동오 이름 세 글자만 봐도 마음 한켠이 욱씬거리는데...이것마저도 내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이 내 얼굴을 보고 기분 나빠할까? 당황할까?
형은 잊고 싶은 기억을 내가 자꾸 상기시키는 거라면?
내가 지금 형을 보겠다고 찾아온 게 맞는 걸까...?
나는 끝내 그 문 하나 열고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고 간접등만 몇 개 켜져 있는 어두운 복도 의자에 앉아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오래도록 숨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복도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쪽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혹여나 날 알아볼까 싶어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덩치가 그런다고 가려질 것도 아니었지만...그냥..세상 사람 그 누구도 아무도 날 보지 못했으면 하는 간절함이었다. 커브를 돌아 병실이 있는 복도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서서히 멈췄다. 최선을 다해 내 몸을 숨겨보려 애쓰던 것을 까먹고 무심코 발소리가 멈춘 방향을 바라봤다. 명헌이 형이었다.
명헌이 형은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봤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의 그 무표정이 내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형은 나를 지나쳐 복도 끝 동오 형이 입원한 병실로 걸어갔고 나는 이번에도 또 그 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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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난 어두운 병실 복도에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고 병원 특유의 약품 냄새와 따뜻한 온도에 가쁘게 뛰던 심장이 점점 안정이 되어 가며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았던 것 같다. 그 잠깐 동안 나는 꿈을 꿨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날의 기억이었다.
앳된 얼굴의 형들...쨍쨍 내리쬐는 햇살 아래의 수돗가.
찬 물이 뿜어져 나오는 기다란 호스를 잡고 마치 묘기를 부리듯 흔들어대는 현철이 형, 물줄기를 피하며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명헌이 형, 빨간 대야를 방패처럼 든 성구 형, 그만 하라고 짜증을 내지만 웃고 있는 낙수 형, 그리고...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로 환하게 웃고 있는 동오 형...
그건 아주 일상적이었고 별거 아니었지만 참 소중하고 그리운 어린날의 우리였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는 동오 형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낙수형이 던진 음료수 캔을 잡아내는 형의 몸짓, 쭉 뻗은 팔과 길쭉한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함께 팔락이는 티셔츠. 내리쬐는 여름 햇볕에 형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매끈하게 뻗은 몸선과 개구지게 휘어지는 웃음 가득한 눈꼬리에 시선이 집중된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내가 '동오 형' 이라고 한 마디 부르면 해사하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나를 바라보겠지?
온몸으로 꽉 끌어안고 싶다.
입에서 웅얼대며 튀어나오지 않던 소리들을 온 힘 다해 끌어모아 뱉어냈다.
형! 동오 형!
그 소리에 나를 돌아보는 형의 몸짓이 천천히 보였다. 그리고 곧 정확히 나를 향한 형의 시선, 형은...울고 있었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두 눈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고 활짝 웃던 그 입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일그러졌다.
형의 입이 열렸고 마치 울분을 토해내듯 날 원망하는 듯...무언가 말을 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말이지?
뭘 얘기하고 싶은 거에요 형.
혹시 내가 형을 울게 했어요?
내가 힘들게 한 거에요?
형..동오 형...
최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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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형에게 닿지 않는 애원으로 꿈속을 가득 채우다 번뜩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여전히 어두운 병원 복도에 앉아 있었다. 현실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고요함이 이질적이었다. 나와 조금 떨어진 의자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명헌이 형이었다.
"왜 안 들어가."
"......"
"거기도 아직 리그 진행중일텐데 어떻게 왔냐."
명헌이 형의 표정은 화가 나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에 속을 알 수 없는 음성. 밥은 먹었냐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는 물음에 난 대답하지 못했다. 명헌이 형의 눈이 마치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뻔뻔하고 미련한 놈인지 말이다.
"..최동오 지금 자. 병실엔 동오 부모님 계시고."
명헌이 형은 아무 답도 하지 않는 내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쟤 지금 평소 몸상태 아닌 거, 기사에서 하도 떠들어대서 다 봤지?"
"..."
"한동안 섭식장애랑 수면장애가 심했다."
"..."
"최동오 저렇게 실려오고선 온갖 기사들이 올라오더라고. 좀 전에 보니 국민영웅 NBA스타 정우성이 병문안 왔다는 기사도 떴더라."
"..."
"....너네 정말 형동생 사이 맞냐? 동료 맞아?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 잘 생각하고 대답해 정우성."
나는 명헌이형의 질문에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 쉬운 질문이었고, 나에게 동오 형은 뜨거운 시절을 함께 한 동료이자 선배가 분명히 맞는데...그게 아니라면 뭘 더 얼마나 가까운 관계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그 쉬운 답을 명헌이 형에게 주지 못했다.
나에게 최동오가 단순히 '형'이 맞을까...
나는 사실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한테 최동오가 그냥 형이라고 하면 더 할 말은 없고, 늬들 형동생 아니라고 한다면 따라와 보던가."
-
나는 명헌이 형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형이 익숙하게 차키를 눌러 차 문을 열고, 실내등을 켜고,
조수석에 있던 짐들을 뒷자석에 던져넣고 다시 운전석에 타는 과정을 난 그저 멀뚱멀뚱 서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해? 타."
경기를 마치고 온 건지 더플백과 백팩, 수건 등이 뒷자석에 던져져 있었고 갈아입은 듯한 티셔츠도 구겨져 있었다.
차에 타서도 명헌이 형은 시종일관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지만 형이 내게 계속해서 보내는 '나 너 마음에 안 든다 정우성.'이라는 신호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동오 형 언제부터 그랬어요?"
내 물음에 명헌이 형은 짧게 '작년 봄? 여름? 그쯤부터.'라고 대답을 했다. 계속 식사를 잘 못하고 잠을 못 자서 치료도 오래 받고 있었다고...왜일까, 정말 인터넷 기사에 나오는 내용처럼 단순히 심한 장염을 반복해서 앓으면서 컨디션 관리에 실패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넌 그게 왜 궁금한데?"
"..."
"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이 돼서 미국에서 잘 나가시는 놈이 시즌 중에 한국까지 날아왔냐?"
"..."
"뭐든, 일단 왔고 병원까지 왔으면서 왜 그러고 있었냐고."
그러게요. 나는 왜 이 새벽에 한국까지 날아와 이러고 있을까요. 동오 형을 볼 용기도 없으면서...동오 형이 아팠던 줄도 몰랐으면서...아니, 컨디션 안 좋다는 거 기사로 다 봐 놓고도 그동안 연락도 안 해봤으면서. 그런 주제에 무슨 염치로 여길 왔을까요.
"정우성. 계속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동오 형이랑..좀 서먹해진 지 몇 개월 됐어요. 제가 동오 형한테 큰 잘못을 했거든요."
숨이 턱턱 막히게 가슴이 답답해서 나는 애꿎은 손만 쥐었다 폈다,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동오는 네 얘기 거의 안 했어. 아무래도 그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이 바로 작년이었으니까 입에 올리기 조심스러웠겠지. 근데 너 알잖아, 걔는 항상 너 엄청 좋아해."
"......지금은 아닐지도요. 제가 동오 형한테 너무 큰 상처를 줬거든요. 사과도..못 했고요. 이런 동생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냥 형동생, 아니라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명헌이 형을 바라보았고, 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명헌이 형은 몸을 돌려 뒷자석에 있던 백팩 하나를 가져왔고 가방을 열어 파일 두 개와 두꺼운 노트 하나를 꺼냈다.
"동오 가방. 다른 짐들은 부모님 드렸는데 이건 도저히 못 드리겠더라."
"...이게 뭔ㄷ"
"이거 내가 갖고있는 거 불법이야. 너한테 보여주는 건 더 불법. 근데, 난 의사도 아니고 이거 들킨다 해서 최동오가 나 고소할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난 당장 저렇게 앓아누운 내 친구 살려야겠거든."
나는 명헌이 형이 건넨 그 파일들과 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은 아무 말 없이 카시트에 고개를 젖혀 기대고 눈을 가만히 감고 있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뭔가 안 좋은 예감에 잠시 망설였지만 심호흡을 크게 하고 천천히 파일 하나를 열어 보았다. 꽤 여러 장의 종이들이 끼워져 있었는데, 맨 위의 종이에 써진 환자 정보에 시선이 꽂힐 수 밖에 없었다.
최 동 오 / M / Omega(g)
뭐지?
진료 기록지엔 온갖 알 수 없는 의학용어들이 적혀 있었고 봐도 무슨 소리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암호 해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종이를 빠르게 몇 장 넘기다가 일순간 손이 멈췄다.
한 장의 사진. 동료 선수가 자기 와이프가 임신을 했다며 같은 걸 보여준 적이 있다. 그건 분명 초음파 사진이었다.
사고 회로가 멈춘 듯 멍해졌다.
이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의미하는 게 뭔지, 뭘 찍은 건지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사진이 의미하는 게 뭔지...
단 한 가지밖엔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말도 안 돼.
"임신 5주차에 찍은 거. 동오 그날 임신 사실 처음으로 알았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손이 덜덜 떨려왔고 진료 기록지를 다시 앞으로 넘겨 환자 정보란의 이름이 정말 동오 형이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진료 일자, 이 모든 일의 시작인 그날 밤으로부터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초점을 잡지 못하는 내 동공이 사정 없이 요동쳤고 벌어진 입술은 도무지 다물어 질 줄을 모른 채 덜덜 떨리고만 있었다.
이제서야 그간의 모든 일들이 이해가 됐다. 동오 형이 왜 나를 피했는지, 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잠깐의 만남조차도 함께하지 않았는지.
나 때문에 형은 원치 않는 임신을 했고 그래서 날 보고 싶지가 않았던 거야.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모든 게 나 때문인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
왜 나에게 원망을 쏟아내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것들의 원흉인 나는 이제서야 이 사실을 동오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었다.
"그 애, 지금은 최동오한테 없어."
"그게 무슨...말이에요?"
"......자연 유산."
명헌이 형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전부 거짓말 같았다. 그 정도로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고 한심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진실이었다. 동오 형에게 일어났던 지난 몇 개월간의 일들은 너무도 충격적이었고 이렇게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너무 아팠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 싸늘하고 소름끼치는 느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임신 10주차를 앞두고 자연 유산, 그리고 내가 형을 페로몬으로 위협했던 일. 내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단 하루도 그날의 후회 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웠던 건 결국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손이 너무 떨려서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간신히 파일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고 진료 일자를 보고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아직도 머물러서 고통받고 있는, 바로 그 계절이었다.
나는 끝까지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람이며 더 이상 최동오에게 내 존재는 끝없는 고통만을 안겨 줄 뿐이다. 몇 달 동안이나 질질 끌며 미련을 놓지 못하고 내 주제를 모른 채 형이 입원한 병원까지 온 스스로가 역겨웠다.
구역질이 났다.
더는 내가 동오 형 곁에 있어선 안돼.
용서를 구하겠단 마음은 오만한 내 착각일 뿐이야.
단 일분일초도 이곳에 있는 내가 역겨워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차 문을 열고 몸을 움직이자 내 무릎에 놓여 있던 파일들이 와르르 밑으로 쏟아졌다.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바닥에 떨어진 그것들을 응시했다.
그래, 미련 가지지 말고 가 정우성. 다 끝났어. 이제 끝이야. 네가 그만 꺼져 주는 게 동오 형한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야.
윙윙대는 머리 속과 당장이라도 풀려버릴 것 같은 다리를 움직여 간신히 차 밖으로 몸을 빼 내었을 때, 명헌이 형이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도망가려고? 넌 너 밖에 몰라? 동오가 왜 너한테 말 안 한 지 알겠다!"
"흡...흐윽..흑..."
"넌 이렇게 미국 돌아가면 몇 달 좀 힘들다 말지, 그럼 여기 있는 최동오는. 걔는 이미 네가 모르고 있는 동안 혼자 버티다 이렇게 병이 났는데, 몸이고 마음이고 다 망가졌는데! 넌 이걸 다 알고도 그냥 간다고?"
"제가...동오 형 옆에 있을 자격이..없어요..형을 괴롭게 할 거에요..."
"....자격이고 뭐고 따지기 전에 내 친구부터 살려내고 가던지 말던지 해 정우성 이 씨발새끼야."
명헌이 형은 열린 차 문을 잡은 채 그 자리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아까 파일과 함께 받았던 노트였다. 또 내가 모르는 뭐가 더 있는 걸까, 나는 또 어떤 후회를 하게 되는 걸까...
무서웠다.
무서웠지만...그랬지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의 첫 장을 펼쳤고, 노트 안에 빼곡히 적힌 글씨들이 보였다.
너무도 눈에 익은 동오 형의 글씨체.
노트 주인의 죄책감과 아픔, 슬픔, 후회.
그 모든 것들이 담긴 글자들.
곳곳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과 번짐, 마구 지워버린 흔적들...
형의 괴로움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이 노트는 최동오가 홀로 보냈던 그 힘든 시간 속에 아직도 머물러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닿는 피부가 데인 듯 뜨거웠고 심장이 난도질 당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너무 괴로워 당장이라도 노트를 덮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 주저앉아 쉴새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흐려진 시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 한 장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오 형의 지난 시간들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아팠던 거야, 얼마나 괴로웠어요 형?
그리고 노트 속에서 어느 순간 등장한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
이게 뭐지? 이건..이거는...
나는 이 글자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노트를 계속해서 넘겨 보았다.
노트 가득 빼곡히 쓰인 동오 형의 눈물 젖은 글씨들.
그리고 나의 이름.
믿을 수가 없었다.
노트 속에서 멈춰버린 최동오의 시간들 속엔 내가 있었고, 그 아픔 속에도 내가 있었고, 그 그리움 속에도 내가 있었고 그 사랑 속에도...내가 있었다.
보고 싶어
너한테 안기고 싶어
네 냄새가 그리워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
오늘은 꿈에 네가 나왔어
이게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안아주던 네 품을 잊지 못해
내 손을 잡아주던 네 손의 온기를 아직도 기억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우성아
정우성...네가 보고 싶어
사랑해
사랑해 우성아
아주 많이 사랑해 정우성
멈춰버린 최동오의 시간들이,
아직도 그 속에 갇혀 있는 최동오의 괴로움이,
행여 밖으로 빠져나올까 꾹꾹 눌러 쓴 나를 향한 최동오의 마음이,
그 모든 아픔들이 고스란히 담긴 그 노트 한 권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는 그만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엉엉 울고 말았다.
슬램덩크
우성동오
동오텀
동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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