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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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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시다면서요."
침대에 누워있는 허니가 제 손을 붙잡은 채로 바닥에 무릎을 꾼 채 앉아있는 그에게 말했음. 장군 무릎이 이리 가벼워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겠지.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허니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내며 중얼거렸음. 다들 이걸 감내하고 항해하는건가. 그의 말을 제대로 못들은 아카시우스가 되묻자 허니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꽤나 지친 표정으로 대꾸했음.
"속이 안 좋습니다. 토할 것 같아요."
"...멀미를 하시는 것 같군요."
"멀미가 뭡니까."
태어나서 이번이 두번째 항해인 허니는 멀미가 뭔지 제대로 모름. 첫번째 항해는 제정신도 아니었고 곁에 티모시가 있었으며 메슥거림보다 더 큰 고통에 압도되었으니 이런걸 느낄 새도 없었지만 지금은 다른거지. 허니의 질문에 그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음. 뭐라 설명해줘야 할 까 고민하는 모양새였음. 그러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기발한 비유가 떠올랐는지 미소까지 머금으며 입을 열겠다.
"숙취와 비슷한 개념이라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숙취면...과음의 부작용을 말하시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장군. 전 술을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자신이 포도주를 건네줬는데도 허니는 멀뚱히 받아 들기만 했었지. 아카시우스는 두 눈을 맹하게 꿈뻑거리다가 씩 웃음을 내뱉었음. 에이,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허니도 그를 따라 눈을 꿈뻑거리다 대꾸하겠지. 정말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겠지.
"숙취가 나을까요, 멀미가 나을까요."
"그건 갑자기 왜..."
"멀미보다 숙취가 낫다면 지금 당장 술에 취해야 될 것 같습니다."
허니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 아카시우스의 책상 위에 놓인 술병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아카시우스가 다급하게 허니의 손목을 붙잡고 도리질을 하겠지. 여기서 숙취까지 얻는다면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아질거라면서. 그 말을 들은 허니는 이제 울상까지 짓겠지. 지금도 최악입니다! 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아카시우스처럼 침대에 얼굴을 파묻겠다. 아카시우스는 힘들어하는 제 아내를 물끄러미 부르다가 시종에게 대뜸 생강에 꿀을 발라 한 조각 가져오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허니에게 입에 물고 있으라고 하겠지. 이게 멀미에 그나마 괜찮다면서.
"지금 나보고 이 쓰디쓴 것을 먹으라고..."
허니는 극구사양을 하며 생강을 쥐여주려는 아카시우스의 손길을 피했음.
"음...오늘따라 애처럼 구시는 군요."
그 말에 허니의 행동을 딱 제어하겠지. 괜스레 민망해진 허니는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가 주는 생강 조각을 순순히 받아드렸음. 근데 그걸 받아드리는 태도가 진짜 뭔 사약을 마셔야하는 죄인같은 모습이라 아카시우스가 고개를 돌려 풉 하고 웃고 말겠지.
"전 괴로우니 비웃지 마시죠."
"비웃은게 아닙니다. 그냥..."
"됐습니다...이젠 말도 못 하겠어요."
허니는 눈을 질끈 감고 입 안에 생강을 쑥 집어넣었지만 곧장 입 밖으로 튀어나왔겠지. 맵고 쓰고 또 꿀을 발라서 쓸데없이 달기까지 해 존나 최악이었음. 충격에 가까운 맛에 허니가 괴로워하니 아카시우스가 황급히 물 한 잔을 떠서 허니 손에 쥐여주겠지. 그녀는 마치 생명수를 받은 것 처럼 벌컥벌컥 마시다가 목 아래로 내려가던 물이 그대로 역류될 뻔 했음.
"악! 뭐...뭐하시는 겁니까?!"
허니는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과 함께 식겁하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고, 아카시우스가 제 한 쪽 발을 붙잡으며 마사지를 하려고 준비 중이었음. 그는 알면서 왜 묻냐는 듯이 한쪽 눈썹만 비스듬이 올리자 허니는 작은 반항을 해보겠지. 간지러우니 좀 놔달라고. 하지만 아카시우스는 단호하게 고래를 흔들고는 말했음.
"발가락을 지압하면 나아지실 겁니다."
"하, 하지만...전 싫어요!"
"그러면 계속 이렇게 앓으실 겁니까? 식사도 무르셨잖아요."
"하지만!"
허니가 뭐라 말해보려고 해도 소용 없었음. 아카시우스는 이제 바닥에 앉아 제 손바닥보다 작은 허니 발을 투박한 손으로 나름대로 꼼꼼히 마사지 하기 시작했으니깐. 허니는 이런적은 처음인데다가 하필이면 발바닥이라니 민망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겠지. 근데 또 효과가 있는 듯 해서 쉽게 멈추라는 말도 못하겠는거임.
"으..."
하지만 가장 민망한 건 그가 특정 부근을 누를 때마다 제 입에서 요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는 거임. 그래서 허니는 그 민망스러운 소리가 나올 때마다 입을 틀어막거나 이불을 꽉 깨물었음. 근데 이런 허니 반응은 모르고 마사지에 집중해있던 아카시우스는 문득 허니 발이 너무도 작다는 생각이 드는거임. 이렇게 작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부인 발이 너무 작습니다. 이 발로 어떻게 걸어다니는,"
아카시우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발갛게 물든 채로 입술을 앙 깨물며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있는 허니와 눈이 딱 마주치겠지. 손등에 핏줄까지 선 채로 이불을 꽉 쥐고 있던 허니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아카시우스의 말을 제대로 못 들었는지 살짝 풀린 눈으로 그에게 뭐라하셨냐고 되묻자 아카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손길을 조금 더 올려 허니의 발목과 종아리를 천천히 어루만졌음.
그러자 허니가 윽,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둥글게 웅크리고는 제 신음소리에 놀랐는지 두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입을 틀어막겠지. 아카시우스는 천천히 허니의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당황해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음. 하지만 끝내 허니가 두 손을 뻗어 그의 어깨 위에 올리고는 다급하게 외치겠지.
"아, 아카시우스! 그만... 너무 아파요...!"
그녀의 외침에 그는 시선을 내려 허니의 종아리를 내려다봤음. 아무래도 장군의 투박하고 굳은살이 박힌 손이여서 그런지 살살 어루만진다고 해도 허니의 여린 살결에는 꽤나 무리였는지 살가죽에 그의 손바닥 자국이 만연하겠지. 아... 장군은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사과했음. 허니는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을 홀로 진정시키며 고개를 흔들었음.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해지려는 찰나 시종이 문을 똑똑 두들기겠지. 식사를 가져왔다면서. 아무리 해상 위라해도 식사는 화려했지만 허니는 음식을 보니 또 속이 메스꺼웠음. 그러다가 과일바구니에 들어가있는 레몬 덩어리가 시선에 들어오겠지.
"저...레몬을 좀 잘라주겠습니까?"
시종과 장군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음. 시종은 잔뜩 불편한 표정으로 레몬을 내오겠다며 사라졌고 장군은 허니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웃고 말겠지.
"뭐가 웃깁니까?"
허니가 순진하게 묻자 아카시우스는 당신이 웃겨서 웃는거라고 말하겠지. 허니가 더더욱 어리둥절 해지자 그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음.
"그리 공손한 말투로 레몬을 까달라고해서 나한테 부탁하는 줄 알았는데 시선은 시종에게 가 있으니 웃을 수 밖에요."
"아..."
아카시우스의 말을 듣고 허니는 조금 심장 철렁했겠지. 혹여나 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았을까 해서.
"공주는 상냥한 사람이군요."
시종이 다시 돌아왔고 허니의 앞에 예쁘게 잘라놓은 레몬 한 접시를 놓아주었음. 허니는 습관적으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려다가도 그냥 고개만 꾸벅거렸지. 그게 더 이상하다는 걸 모른 채로. 아카시우스는 다시 웃음을 참았고 시종은 도망치듯 빠르게 밖으로 나가버렸음.
"근데 왜 레몬입니까?"
"제가 신맛에 취약합니다."
"음...그래서요?"
"레몬을 통해 고통 받으면 멀미를 조금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아...그런건데요..."
딱 들어도 한심한 생각이라고 느낀건지 아카시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을 흘렸음. 그러거나 말거나 허니는 남은 항해시간을 버티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레몬을 베어물었지. 전기로 혀를 튀기는 것 처럼 신 레몬 맛에 침이 질질 흘릴 것 같지만, 눈물이 줄줄 흐를 것 같지만 허니는 꾹 참았음. 자신은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냅다 제 옆에서 아카시우스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리겠지.
"왜...왜요?"
허니가 레몬을 머금으며 얼굴을 반쯤 찌그러뜨린 채 그를 쳐다봤음. 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웃은 후에 허니를 바라봤음. 허니가 뭐냐며 다시 물었지만 아카시우스는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음. 허니가 채근하자 그는 여전히 웃음을 꾹 참으며 말하겠지.
"공주가 괴로워하는 것 같아 안타까우면서도..."
"...서도?"
"표정이 귀여워서 계속 보고싶어서 그랬습니다."
"...네?"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계속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거 아닙니다! 허니가 버럭 꾸짖듯 내뱉었고 아카시우스는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거리며 식사를 마저하겠지. 허니는 그가 한 말이 조금 신경쓰여 몸을 살짝 비틀어 그에게 제 모습의 옆면만 보여주며 레몬을 계속 먹다가 한 접시를 다 비워나갈 때 쯤 입을 열었음.
"뭔가...효과가 있는 것 같긴합니다."
그녀의 등 뒤로 아카시우스의 웃음소리가 또다시 퍼지겠다.
/
"이번 항해는 날이 좋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짧았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병사들이 나누는 말을 들은 허니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음. 이게 짧은 항해라고? 난 송장이 되어 이 배에서 내릴 뻔 했단 말이다... 하며 비틀거린 채 아카시우스의 에스코트를 뻣뻣히 받겠지. 티모시가 머물고 있는 이 도시는 반란이 있었다는 말에 비해서 꽤나 멀쩡해보였음. 멀쩡을 넘어 아름다워 보였지. 찬란한 바다와 드넓은 하늘 그리고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거래를 하고있는 상인들까지. H국도 해안도시였기 때문에 그들을 보니 허니는 저절로 제 나라와 제 부모님을 떠올리겠지. 그녀가 아카시우스를 힐끗 쳐다보자 그는 이 소란스러운 공간 속에서 허니를 빼내고 싶은지 빨리 마차를 끌고오라며 병사들에게 명령하며 일사분란하게 경비병들을 움직였음.
마차가 오고 허니는 이곳의 아카시우스가 지내는 저택으로 향했음. 그리고 지나가다가 로마병을 훈련시키는 훈련장도 봤겠지. 허니가 그곳을 가리키자 아카시우스가 허니 귓가에 속삭였음. 그 옆에 병사 숙소가 있기도 해서 티모시가 자주 머무는 장소이기도 한다면서. 허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의 눈치를 조금 살폈음.
"저...여기서는 그 애를 볼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 부인을 이리 데려온건데요."
"아."
"그 고생을 시키면서."
허니는 본인을 챙기느라 아카시우스게 제 업무를 제대로 못한 걸 떠올렸음. 아카시우스는 허니를 힐끗 보다가 말하겠지.
"조금 쉬는게 좋을 것 같군요. 배에서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긴 할 테지만..."
"그 애는 저녁에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허니는 저도 모르게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가 이내 살짝 고장이 나겠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무 환하게 웃었나 싶은 생각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아카시우스의 표정도 평소의 그처럼 다정한게 아니라 살짝 굳어있겠지. 어쭈? 너무 좋아하는거 아니야? 라는 의미가 내포된 표정 같았음. 허니가 생각하기에는.
"시간을 길게 내어드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
"그 애는 여기서 꽤나 바쁜 아이라."
그 말을 듣자 허니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음. 몸이 바쁘면 잡생각을 못하게 되니깐. 마지막으로 티모시를 만났을 때 그 애의 모습은 썩 좋지 않았으니 꽤나 걱정하고 있었음. 허니는 기대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마차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게 열심히 입술에 힘을 주는데 노력했겠다.
허니는 저번과는 달리 자신을 향해 잔뜩 미소를 지어줄 티모시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새겨그렸음.
/
허니는 어두운 정원에 앉아 다리를 떨었음. 아카시우스가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지. 이 넓은 정원에는 오직 허니만 서 있었음. 그리고 저 멀리 어느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아 허니도 그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겠지. 허니가 들고 있던 등불을 얼굴 위로 뻗어올리자 자신이 그리워하던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
"티모시!"
"허니!"
그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제 품에 가득 끌어안았음. 얼마나 강렬한 포옹이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허니의 발이 허공에 붕 떠 있었겠다. 티모시는 장군의 말대로 어느덧 늠름한 사내로 성장해 있었음. 병사가 되어 눈에 보이는 전투의 흔적들이 보여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으니 허니는 그 상처만 어루만지며 쓰게 웃어주기만 했음.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티모시는 허니를 이곳저곳 살피며 걱정과 분노가 담긴 표정과 말투로 허니의 안부를 물었지.
"장군이 널...함부로 대하거나 그러진 않아?"
그 말에 허니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겠지.
"티모시...그러면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겠어? 그는 내게 정말,"
허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금 허니를 와락 끌어안았음. 숨이 막혀올 정도라 허니가 그의 팔을 툭툭 치자 그는 잔머리가 삐져나온 허니의 머리칼을 정돈해주며 말하겠지.
"난 이렇게 컸는데...어째 넌 더 작아진 것 같지."
"기분 탓일거야. 난 변하게 하나도 없는 걸."
"장군이 무슨 꿍꿍이로 내게 널 보여주는지 모르겠어."
티모시가 말하자 허니는 저도 모르게 장군을 두둔했음.
"그냥...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우리가,"
"뭐?"
하지만 티모시 앞에서 그를 두둔하는 것은 패착이었음. 허니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이 말도 안된다는 듯 일그러졌으니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며 따지기도 했음.
"의미가 없어?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그가 우리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뜻이야?
"아니, 난 그저...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허니...대체 저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좋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음. 티모시는 허니의 어깨를 붙잡고 마치 그녀가 적에게 회유를 당한 것 처럼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로마인들은 선행을 베풀지 않아. 그들에게 선행이란 침략의 합당한 원인일 뿐이야. 너와 나를 봐!"
".........."
"장군이 넓은 마음으로 우릴 재회시켜 줬다고? 애초에 우릴 이렇게 떨어뜨린게 누구인데!"
티모시는 격앙된 제 모습을 느끼고 허니에게 등을 돌려 낮은 숨을 내뱉었음. 그리고 곧장 사과하겠지. 소리쳐서 미안하다면서. 그러면 허니는 제 팔을 끌어안듯 쓸어내리며 괜찮다며 나긋이 대꾸하겠지. 둘은 딱딱한 돌 의자에 앉았음.
"...네 소식을 들었어. 여기서 잘 해내고 있다고..."
"응. 이 도시는 우리 고향과 비슷해서 정감이 가. 너도 그렇지 않아?"
"너도 그래? 나도 배에서 내린 순간 고향 생각이 나더라."
"이곳에서 나는 포도가 정말 맛있더라. 네가 좋아하는 맛이야. 딱! 달기만 하거든."
"그래? 기회가 되면 먹어봐야겠네."
"그럴 필요는 없고."
티모시는 허리춤에 매달린 가방에서 주섬거리다가 하얀 면으로 쌓여진 무언가를 조심스레 의자 위로 펼쳤음. 알이 큼지막하고 윤이 흐르는 청포도 알들이 가득 했겠지. 달큰한 포도향헤 허니가 그를 보며 방긋 웃자 티모시도 그녀를 따라 웃었음.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잖아, 청포도."
"와아... 내 생각해서 이렇게 가져온거야?"
"응.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허니와 티모시는 입 안에서 과즙을 팡팡 터트리며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청포도를 먹으며 옛추억에 흠씬 빠졌음. 기억나? 너 수업 듣다가 몰래 빠져나와서 나 데리고 성 뒷편으로 도망쳤던거? 허니가 말하자 티모시는 창피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웃었음. 그때도 몰래 숨어서 이렇게 간식을 먹었잖아. 뭐였더라... 빵이랑 치즈였나? 응. 블루베리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우린 왜 굳이 숨어서 먹었을까? 식당에서 먹어도 아무도 뭐라 안 했을텐데. 그러게 말이야. 허니는 어릴때 자신의 손목을 잡고 성 복도를 신나게 뛰어다니던 어린 티모시의 모습이 지금 바로 눈 앞에 그려지는 것 처럼 선명했음.
"오늘이 지나면...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허니가 물었음. 오래 걸리더라도 널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난 또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그 오랜 시간의 고독을 말이야. 이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제 손에 깍지를 껴오는 티모시의 행동에 허니가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겠지.
"이곳에서 이를 악물고 뭐든 해내려고하는 이유는...내가 이곳의 총사령관이 되기 위함이야."
"총사령관?"
"응. 로마인에게만 주는 자리이지만...장군이 날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그리고 이곳에서 나만큼 실력이 월등한 자도 없고."
"총사령관이 왜 되고 싶은건데?"
허니가 묻자 티모시는 혀로 마른 입술을 살짝 축인 뒤 허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음.
"널 위해서야."
"...날?"
"이곳의 병력은 로마에 비하면 절반도 안되지만 여러 나라에서 온 용병들로 가득해서 다들 실력이 상당해."
절반도 안 되는 병력으로 로마의 수도를 넘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지. 티모시는 허니의 손을 꼭 붙잡으며 이어 말했음.
"사람들을 모으고 있어. 로마를 박살내고 싶은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긴 자들을."
"무슨...티모시 너 설마..."
"때가 되면 전쟁을 일으킬거야."
티모시의 눈이 찬란하게 반짝였음. 지난번 자신을 바라봤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로마를 몰락시키고, 황제를 죽일거야."
허니는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음. 귀가 먹먹해져오고 하늘이 자신을 억누를 것만 같은 갑갑함이 느껴지겠지. 전쟁을...일으키겠다고? 그 수많은 죽음들을 보고나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아카시우스 장군을 죽여야 되겠지...그래야 네가 자유가 될테니깐."
"안 돼!"
허니가 소리를 외치며 그의 손을 뿌리쳤음. 허니도 당황했지만 티모시가 더 당황한 눈치였지. 순간 공기의 흐림이 멈춘 것 처럼 누구 하나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음. 정확히 말하자면 움직이지 못한거겠지. 서로 각자의 충격에 빠져있어서. 먼저 입을 연 건 허니였음.
"그러지마... 전쟁은... 티모시, 너도 봤잖아. 우리 고향이 어떻게 불 타올랐는지 말이야...우리가 뛰놀던 곳에 산처럼 쌓인 시체들과 피로 물들었던 바다까지..."
티모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허니는 그의 손을 간절히 붙잡았음.
"아카시우스에게 계획이 있어. 그도 너만큼 황제를 증오하고 있어! 황제를 몰아내는 과정 속에 피해가 생기겠지만 그게 무조건 전쟁일 필요는 없어...! 아카시우스에게 설명을 하면 그와 함께 황제를,"
"...이거 놔 줘."
티모시가 허니의 손을 떼어냈고 몸을 돌렸음. 그의 눈시울이 새빨갛게 물들어있겠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허니를 바라봤음. 허니는 그의 시선에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를 얻었겠지. 티모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제 머리를 쓸어넘겼음. 그리고 분노가 억눌린 목소리로 허니에게 말하겠다. 그래, 전쟁을 봤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거야.
"근데...너도 봤잖아, 허니야. 그 지옥같은 불길 속에서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말이야."
"........."
"나의 국민들이 개돼지처럼 화살과 창에 찔려 맞아 죽어가는 모습 또한 너도 봤잖아."
"난..."
"그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도 알잖아!!!"
티모시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음. 그는 이만 시간이 늦었다며, 내일 새벽 훈련이 있으니 이만 가봐야겠다는 말을 내뱉으며 등을 돌렸음. 허니는 어쩐지 오늘이 아니면 그를 다신 못 볼 것 같다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음. 그래서 가지말라며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는 다시금 허니의 손을 떼어놓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허니가 그의 등을 껴안았음.
"가지마,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응?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이제는 허니도 울고 있겠지. 이렇게 네가 떠나버리면 난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애원하듯 말했지만 티모시는 허니를 다시 돌아봐주지 않았음. 대신 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허니의 손을 붙잡으며 말하겠지.
"넌 내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아니야...그런게 아니야!"
"넌 변했어 허니야."
"티모시 제발..."
"아니면 로마인이 기어코 내게서 널 빼앗아 간 것일지도..."
티모시는 허니의 손을 놓은 뒤 떠났고, 허니는 한참동안이나 바닥에 주저앉아 애꿎은 잔디를 가득 움켜쥐며 몸을 벌벌 떨었겠다.
페드로너붕붕
티모시너붕붕
"...바쁘시다면서요."
침대에 누워있는 허니가 제 손을 붙잡은 채로 바닥에 무릎을 꾼 채 앉아있는 그에게 말했음. 장군 무릎이 이리 가벼워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겠지.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허니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내며 중얼거렸음. 다들 이걸 감내하고 항해하는건가. 그의 말을 제대로 못들은 아카시우스가 되묻자 허니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꽤나 지친 표정으로 대꾸했음.
"속이 안 좋습니다. 토할 것 같아요."
"...멀미를 하시는 것 같군요."
"멀미가 뭡니까."
태어나서 이번이 두번째 항해인 허니는 멀미가 뭔지 제대로 모름. 첫번째 항해는 제정신도 아니었고 곁에 티모시가 있었으며 메슥거림보다 더 큰 고통에 압도되었으니 이런걸 느낄 새도 없었지만 지금은 다른거지. 허니의 질문에 그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음. 뭐라 설명해줘야 할 까 고민하는 모양새였음. 그러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기발한 비유가 떠올랐는지 미소까지 머금으며 입을 열겠다.
"숙취와 비슷한 개념이라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숙취면...과음의 부작용을 말하시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장군. 전 술을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자신이 포도주를 건네줬는데도 허니는 멀뚱히 받아 들기만 했었지. 아카시우스는 두 눈을 맹하게 꿈뻑거리다가 씩 웃음을 내뱉었음. 에이,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허니도 그를 따라 눈을 꿈뻑거리다 대꾸하겠지. 정말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겠지.
"숙취가 나을까요, 멀미가 나을까요."
"그건 갑자기 왜..."
"멀미보다 숙취가 낫다면 지금 당장 술에 취해야 될 것 같습니다."
허니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 아카시우스의 책상 위에 놓인 술병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아카시우스가 다급하게 허니의 손목을 붙잡고 도리질을 하겠지. 여기서 숙취까지 얻는다면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아질거라면서. 그 말을 들은 허니는 이제 울상까지 짓겠지. 지금도 최악입니다! 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아카시우스처럼 침대에 얼굴을 파묻겠다. 아카시우스는 힘들어하는 제 아내를 물끄러미 부르다가 시종에게 대뜸 생강에 꿀을 발라 한 조각 가져오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허니에게 입에 물고 있으라고 하겠지. 이게 멀미에 그나마 괜찮다면서.
"지금 나보고 이 쓰디쓴 것을 먹으라고..."
허니는 극구사양을 하며 생강을 쥐여주려는 아카시우스의 손길을 피했음.
"음...오늘따라 애처럼 구시는 군요."
그 말에 허니의 행동을 딱 제어하겠지. 괜스레 민망해진 허니는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가 주는 생강 조각을 순순히 받아드렸음. 근데 그걸 받아드리는 태도가 진짜 뭔 사약을 마셔야하는 죄인같은 모습이라 아카시우스가 고개를 돌려 풉 하고 웃고 말겠지.
"전 괴로우니 비웃지 마시죠."
"비웃은게 아닙니다. 그냥..."
"됐습니다...이젠 말도 못 하겠어요."
허니는 눈을 질끈 감고 입 안에 생강을 쑥 집어넣었지만 곧장 입 밖으로 튀어나왔겠지. 맵고 쓰고 또 꿀을 발라서 쓸데없이 달기까지 해 존나 최악이었음. 충격에 가까운 맛에 허니가 괴로워하니 아카시우스가 황급히 물 한 잔을 떠서 허니 손에 쥐여주겠지. 그녀는 마치 생명수를 받은 것 처럼 벌컥벌컥 마시다가 목 아래로 내려가던 물이 그대로 역류될 뻔 했음.
"악! 뭐...뭐하시는 겁니까?!"
허니는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과 함께 식겁하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고, 아카시우스가 제 한 쪽 발을 붙잡으며 마사지를 하려고 준비 중이었음. 그는 알면서 왜 묻냐는 듯이 한쪽 눈썹만 비스듬이 올리자 허니는 작은 반항을 해보겠지. 간지러우니 좀 놔달라고. 하지만 아카시우스는 단호하게 고래를 흔들고는 말했음.
"발가락을 지압하면 나아지실 겁니다."
"하, 하지만...전 싫어요!"
"그러면 계속 이렇게 앓으실 겁니까? 식사도 무르셨잖아요."
"하지만!"
허니가 뭐라 말해보려고 해도 소용 없었음. 아카시우스는 이제 바닥에 앉아 제 손바닥보다 작은 허니 발을 투박한 손으로 나름대로 꼼꼼히 마사지 하기 시작했으니깐. 허니는 이런적은 처음인데다가 하필이면 발바닥이라니 민망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겠지. 근데 또 효과가 있는 듯 해서 쉽게 멈추라는 말도 못하겠는거임.
"으..."
하지만 가장 민망한 건 그가 특정 부근을 누를 때마다 제 입에서 요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는 거임. 그래서 허니는 그 민망스러운 소리가 나올 때마다 입을 틀어막거나 이불을 꽉 깨물었음. 근데 이런 허니 반응은 모르고 마사지에 집중해있던 아카시우스는 문득 허니 발이 너무도 작다는 생각이 드는거임. 이렇게 작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부인 발이 너무 작습니다. 이 발로 어떻게 걸어다니는,"
아카시우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발갛게 물든 채로 입술을 앙 깨물며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있는 허니와 눈이 딱 마주치겠지. 손등에 핏줄까지 선 채로 이불을 꽉 쥐고 있던 허니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아카시우스의 말을 제대로 못 들었는지 살짝 풀린 눈으로 그에게 뭐라하셨냐고 되묻자 아카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손길을 조금 더 올려 허니의 발목과 종아리를 천천히 어루만졌음.
그러자 허니가 윽,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둥글게 웅크리고는 제 신음소리에 놀랐는지 두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입을 틀어막겠지. 아카시우스는 천천히 허니의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당황해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음. 하지만 끝내 허니가 두 손을 뻗어 그의 어깨 위에 올리고는 다급하게 외치겠지.
"아, 아카시우스! 그만... 너무 아파요...!"
그녀의 외침에 그는 시선을 내려 허니의 종아리를 내려다봤음. 아무래도 장군의 투박하고 굳은살이 박힌 손이여서 그런지 살살 어루만진다고 해도 허니의 여린 살결에는 꽤나 무리였는지 살가죽에 그의 손바닥 자국이 만연하겠지. 아... 장군은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사과했음. 허니는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을 홀로 진정시키며 고개를 흔들었음.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해지려는 찰나 시종이 문을 똑똑 두들기겠지. 식사를 가져왔다면서. 아무리 해상 위라해도 식사는 화려했지만 허니는 음식을 보니 또 속이 메스꺼웠음. 그러다가 과일바구니에 들어가있는 레몬 덩어리가 시선에 들어오겠지.
"저...레몬을 좀 잘라주겠습니까?"
시종과 장군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음. 시종은 잔뜩 불편한 표정으로 레몬을 내오겠다며 사라졌고 장군은 허니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웃고 말겠지.
"뭐가 웃깁니까?"
허니가 순진하게 묻자 아카시우스는 당신이 웃겨서 웃는거라고 말하겠지. 허니가 더더욱 어리둥절 해지자 그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음.
"그리 공손한 말투로 레몬을 까달라고해서 나한테 부탁하는 줄 알았는데 시선은 시종에게 가 있으니 웃을 수 밖에요."
"아..."
아카시우스의 말을 듣고 허니는 조금 심장 철렁했겠지. 혹여나 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았을까 해서.
"공주는 상냥한 사람이군요."
시종이 다시 돌아왔고 허니의 앞에 예쁘게 잘라놓은 레몬 한 접시를 놓아주었음. 허니는 습관적으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려다가도 그냥 고개만 꾸벅거렸지. 그게 더 이상하다는 걸 모른 채로. 아카시우스는 다시 웃음을 참았고 시종은 도망치듯 빠르게 밖으로 나가버렸음.
"근데 왜 레몬입니까?"
"제가 신맛에 취약합니다."
"음...그래서요?"
"레몬을 통해 고통 받으면 멀미를 조금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아...그런건데요..."
딱 들어도 한심한 생각이라고 느낀건지 아카시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을 흘렸음. 그러거나 말거나 허니는 남은 항해시간을 버티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레몬을 베어물었지. 전기로 혀를 튀기는 것 처럼 신 레몬 맛에 침이 질질 흘릴 것 같지만, 눈물이 줄줄 흐를 것 같지만 허니는 꾹 참았음. 자신은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냅다 제 옆에서 아카시우스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리겠지.
"왜...왜요?"
허니가 레몬을 머금으며 얼굴을 반쯤 찌그러뜨린 채 그를 쳐다봤음. 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웃은 후에 허니를 바라봤음. 허니가 뭐냐며 다시 물었지만 아카시우스는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음. 허니가 채근하자 그는 여전히 웃음을 꾹 참으며 말하겠지.
"공주가 괴로워하는 것 같아 안타까우면서도..."
"...서도?"
"표정이 귀여워서 계속 보고싶어서 그랬습니다."
"...네?"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계속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거 아닙니다! 허니가 버럭 꾸짖듯 내뱉었고 아카시우스는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거리며 식사를 마저하겠지. 허니는 그가 한 말이 조금 신경쓰여 몸을 살짝 비틀어 그에게 제 모습의 옆면만 보여주며 레몬을 계속 먹다가 한 접시를 다 비워나갈 때 쯤 입을 열었음.
"뭔가...효과가 있는 것 같긴합니다."
그녀의 등 뒤로 아카시우스의 웃음소리가 또다시 퍼지겠다.
/
"이번 항해는 날이 좋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짧았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병사들이 나누는 말을 들은 허니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음. 이게 짧은 항해라고? 난 송장이 되어 이 배에서 내릴 뻔 했단 말이다... 하며 비틀거린 채 아카시우스의 에스코트를 뻣뻣히 받겠지. 티모시가 머물고 있는 이 도시는 반란이 있었다는 말에 비해서 꽤나 멀쩡해보였음. 멀쩡을 넘어 아름다워 보였지. 찬란한 바다와 드넓은 하늘 그리고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거래를 하고있는 상인들까지. H국도 해안도시였기 때문에 그들을 보니 허니는 저절로 제 나라와 제 부모님을 떠올리겠지. 그녀가 아카시우스를 힐끗 쳐다보자 그는 이 소란스러운 공간 속에서 허니를 빼내고 싶은지 빨리 마차를 끌고오라며 병사들에게 명령하며 일사분란하게 경비병들을 움직였음.
마차가 오고 허니는 이곳의 아카시우스가 지내는 저택으로 향했음. 그리고 지나가다가 로마병을 훈련시키는 훈련장도 봤겠지. 허니가 그곳을 가리키자 아카시우스가 허니 귓가에 속삭였음. 그 옆에 병사 숙소가 있기도 해서 티모시가 자주 머무는 장소이기도 한다면서. 허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의 눈치를 조금 살폈음.
"저...여기서는 그 애를 볼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 부인을 이리 데려온건데요."
"아."
"그 고생을 시키면서."
허니는 본인을 챙기느라 아카시우스게 제 업무를 제대로 못한 걸 떠올렸음. 아카시우스는 허니를 힐끗 보다가 말하겠지.
"조금 쉬는게 좋을 것 같군요. 배에서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긴 할 테지만..."
"그 애는 저녁에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허니는 저도 모르게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가 이내 살짝 고장이 나겠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무 환하게 웃었나 싶은 생각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아카시우스의 표정도 평소의 그처럼 다정한게 아니라 살짝 굳어있겠지. 어쭈? 너무 좋아하는거 아니야? 라는 의미가 내포된 표정 같았음. 허니가 생각하기에는.
"시간을 길게 내어드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
"그 애는 여기서 꽤나 바쁜 아이라."
그 말을 듣자 허니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음. 몸이 바쁘면 잡생각을 못하게 되니깐. 마지막으로 티모시를 만났을 때 그 애의 모습은 썩 좋지 않았으니 꽤나 걱정하고 있었음. 허니는 기대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마차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게 열심히 입술에 힘을 주는데 노력했겠다.
허니는 저번과는 달리 자신을 향해 잔뜩 미소를 지어줄 티모시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새겨그렸음.
/
허니는 어두운 정원에 앉아 다리를 떨었음. 아카시우스가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지. 이 넓은 정원에는 오직 허니만 서 있었음. 그리고 저 멀리 어느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아 허니도 그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겠지. 허니가 들고 있던 등불을 얼굴 위로 뻗어올리자 자신이 그리워하던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
"티모시!"
"허니!"
그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제 품에 가득 끌어안았음. 얼마나 강렬한 포옹이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허니의 발이 허공에 붕 떠 있었겠다. 티모시는 장군의 말대로 어느덧 늠름한 사내로 성장해 있었음. 병사가 되어 눈에 보이는 전투의 흔적들이 보여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으니 허니는 그 상처만 어루만지며 쓰게 웃어주기만 했음.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티모시는 허니를 이곳저곳 살피며 걱정과 분노가 담긴 표정과 말투로 허니의 안부를 물었지.
"장군이 널...함부로 대하거나 그러진 않아?"
그 말에 허니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겠지.
"티모시...그러면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겠어? 그는 내게 정말,"
허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금 허니를 와락 끌어안았음. 숨이 막혀올 정도라 허니가 그의 팔을 툭툭 치자 그는 잔머리가 삐져나온 허니의 머리칼을 정돈해주며 말하겠지.
"난 이렇게 컸는데...어째 넌 더 작아진 것 같지."
"기분 탓일거야. 난 변하게 하나도 없는 걸."
"장군이 무슨 꿍꿍이로 내게 널 보여주는지 모르겠어."
티모시가 말하자 허니는 저도 모르게 장군을 두둔했음.
"그냥...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우리가,"
"뭐?"
하지만 티모시 앞에서 그를 두둔하는 것은 패착이었음. 허니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이 말도 안된다는 듯 일그러졌으니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며 따지기도 했음.
"의미가 없어?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그가 우리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뜻이야?
"아니, 난 그저...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허니...대체 저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좋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음. 티모시는 허니의 어깨를 붙잡고 마치 그녀가 적에게 회유를 당한 것 처럼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로마인들은 선행을 베풀지 않아. 그들에게 선행이란 침략의 합당한 원인일 뿐이야. 너와 나를 봐!"
".........."
"장군이 넓은 마음으로 우릴 재회시켜 줬다고? 애초에 우릴 이렇게 떨어뜨린게 누구인데!"
티모시는 격앙된 제 모습을 느끼고 허니에게 등을 돌려 낮은 숨을 내뱉었음. 그리고 곧장 사과하겠지. 소리쳐서 미안하다면서. 그러면 허니는 제 팔을 끌어안듯 쓸어내리며 괜찮다며 나긋이 대꾸하겠지. 둘은 딱딱한 돌 의자에 앉았음.
"...네 소식을 들었어. 여기서 잘 해내고 있다고..."
"응. 이 도시는 우리 고향과 비슷해서 정감이 가. 너도 그렇지 않아?"
"너도 그래? 나도 배에서 내린 순간 고향 생각이 나더라."
"이곳에서 나는 포도가 정말 맛있더라. 네가 좋아하는 맛이야. 딱! 달기만 하거든."
"그래? 기회가 되면 먹어봐야겠네."
"그럴 필요는 없고."
티모시는 허리춤에 매달린 가방에서 주섬거리다가 하얀 면으로 쌓여진 무언가를 조심스레 의자 위로 펼쳤음. 알이 큼지막하고 윤이 흐르는 청포도 알들이 가득 했겠지. 달큰한 포도향헤 허니가 그를 보며 방긋 웃자 티모시도 그녀를 따라 웃었음.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잖아, 청포도."
"와아... 내 생각해서 이렇게 가져온거야?"
"응.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허니와 티모시는 입 안에서 과즙을 팡팡 터트리며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청포도를 먹으며 옛추억에 흠씬 빠졌음. 기억나? 너 수업 듣다가 몰래 빠져나와서 나 데리고 성 뒷편으로 도망쳤던거? 허니가 말하자 티모시는 창피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웃었음. 그때도 몰래 숨어서 이렇게 간식을 먹었잖아. 뭐였더라... 빵이랑 치즈였나? 응. 블루베리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우린 왜 굳이 숨어서 먹었을까? 식당에서 먹어도 아무도 뭐라 안 했을텐데. 그러게 말이야. 허니는 어릴때 자신의 손목을 잡고 성 복도를 신나게 뛰어다니던 어린 티모시의 모습이 지금 바로 눈 앞에 그려지는 것 처럼 선명했음.
"오늘이 지나면...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허니가 물었음. 오래 걸리더라도 널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난 또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그 오랜 시간의 고독을 말이야. 이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제 손에 깍지를 껴오는 티모시의 행동에 허니가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겠지.
"이곳에서 이를 악물고 뭐든 해내려고하는 이유는...내가 이곳의 총사령관이 되기 위함이야."
"총사령관?"
"응. 로마인에게만 주는 자리이지만...장군이 날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그리고 이곳에서 나만큼 실력이 월등한 자도 없고."
"총사령관이 왜 되고 싶은건데?"
허니가 묻자 티모시는 혀로 마른 입술을 살짝 축인 뒤 허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음.
"널 위해서야."
"...날?"
"이곳의 병력은 로마에 비하면 절반도 안되지만 여러 나라에서 온 용병들로 가득해서 다들 실력이 상당해."
절반도 안 되는 병력으로 로마의 수도를 넘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지. 티모시는 허니의 손을 꼭 붙잡으며 이어 말했음.
"사람들을 모으고 있어. 로마를 박살내고 싶은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긴 자들을."
"무슨...티모시 너 설마..."
"때가 되면 전쟁을 일으킬거야."
티모시의 눈이 찬란하게 반짝였음. 지난번 자신을 바라봤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로마를 몰락시키고, 황제를 죽일거야."
허니는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음. 귀가 먹먹해져오고 하늘이 자신을 억누를 것만 같은 갑갑함이 느껴지겠지. 전쟁을...일으키겠다고? 그 수많은 죽음들을 보고나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아카시우스 장군을 죽여야 되겠지...그래야 네가 자유가 될테니깐."
"안 돼!"
허니가 소리를 외치며 그의 손을 뿌리쳤음. 허니도 당황했지만 티모시가 더 당황한 눈치였지. 순간 공기의 흐림이 멈춘 것 처럼 누구 하나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음. 정확히 말하자면 움직이지 못한거겠지. 서로 각자의 충격에 빠져있어서. 먼저 입을 연 건 허니였음.
"그러지마... 전쟁은... 티모시, 너도 봤잖아. 우리 고향이 어떻게 불 타올랐는지 말이야...우리가 뛰놀던 곳에 산처럼 쌓인 시체들과 피로 물들었던 바다까지..."
티모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허니는 그의 손을 간절히 붙잡았음.
"아카시우스에게 계획이 있어. 그도 너만큼 황제를 증오하고 있어! 황제를 몰아내는 과정 속에 피해가 생기겠지만 그게 무조건 전쟁일 필요는 없어...! 아카시우스에게 설명을 하면 그와 함께 황제를,"
"...이거 놔 줘."
티모시가 허니의 손을 떼어냈고 몸을 돌렸음. 그의 눈시울이 새빨갛게 물들어있겠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허니를 바라봤음. 허니는 그의 시선에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를 얻었겠지. 티모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제 머리를 쓸어넘겼음. 그리고 분노가 억눌린 목소리로 허니에게 말하겠다. 그래, 전쟁을 봤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거야.
"근데...너도 봤잖아, 허니야. 그 지옥같은 불길 속에서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말이야."
"........."
"나의 국민들이 개돼지처럼 화살과 창에 찔려 맞아 죽어가는 모습 또한 너도 봤잖아."
"난..."
"그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도 알잖아!!!"
티모시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음. 그는 이만 시간이 늦었다며, 내일 새벽 훈련이 있으니 이만 가봐야겠다는 말을 내뱉으며 등을 돌렸음. 허니는 어쩐지 오늘이 아니면 그를 다신 못 볼 것 같다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음. 그래서 가지말라며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는 다시금 허니의 손을 떼어놓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허니가 그의 등을 껴안았음.
"가지마,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응?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이제는 허니도 울고 있겠지. 이렇게 네가 떠나버리면 난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애원하듯 말했지만 티모시는 허니를 다시 돌아봐주지 않았음. 대신 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허니의 손을 붙잡으며 말하겠지.
"넌 내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아니야...그런게 아니야!"
"넌 변했어 허니야."
"티모시 제발..."
"아니면 로마인이 기어코 내게서 널 빼앗아 간 것일지도..."
티모시는 허니의 손을 놓은 뒤 떠났고, 허니는 한참동안이나 바닥에 주저앉아 애꿎은 잔디를 가득 움켜쥐며 몸을 벌벌 떨었겠다.
페드로너붕붕
티모시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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