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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21:42
햇병아리가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 이는 미호크가 조로를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점이다. 그러니 몸에 패기를 둘러 섐블즈를 방어하는 법을 가르친 것 아닌가. 하지만 서로가 만만찮은 상대인지라 조로의 방어 능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다리에서 떨어질 때 폭약 파편이 박힌 몸이 증거였으니까. 그럼에도 이를 모를 리 없던 로우가 조로를 플라밍고 호에 진입토록 도운 건 이유가 있음이었다.
살랑이던 봄바람이 지금은 겨울 문턱을 넘고 있었다. 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함께 지내온 시간이었고 서로를 파악하기에도 충분한 날들이다. 때문에 로우는 조로가 행동에 나선 이상 포기하지 않을 걸 알았다. 지금은 돌아온다는 그 말을 믿어야 한다는 것도. 이를 증명하듯 별궁에는 화도일문자를 비롯한 조로의 검 세 자루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검 세 개가 아니면 안정이 안 돼.’

조로는 이 말을 버릇처럼 입에 올리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은 한몸과 같이 여기던 검을 두고 갔다. 저를 믿어달라고. 키자루를 맞으러 가기 전 들른 별궁에서 이를 확인한 로우는 특히 녀석이 애지중지하던 화도일문자를 본 순간 그것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검 손잡이에 입 맞추던 얼굴 위로는 깊은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가슴에 납덩이를 얹은 듯 숨 쉬기가 힘들고 천근만근인 양 무겁다. 로우는 벌써부터 녀석의 모든 것이 그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오ㅡ 당신이 로우 왕자로군요.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위압감을 주지 않으려 저만 먼저 온 건데 공격을 받아서 말이죠.”
“…내 궁에 무슨 용무지? 노란 원숭이.”

3미터쯤 되는 장신의 남자는 모델처럼 길쭉한 팔다리를 지닌 원숭이상이었다. 천연 곱슬머리를 짧게 친 머리는 동그란 두상에 달라붙었으며 50대 후반의 얼굴은 자글자글한 주름이 서글서글한 인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현역 해군 대장 중 가장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색 옅은 선글라스 너머의 눈웃음은 음흉함과 서늘함이 공존했다.

‘세계경찰이라 자칭하는 해군 대장은 단 세 명. 그 위로는 군 내 최고 계급인 원수뿐이니 새로 임명된 푸른 꿩의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로우야, 이 셋을 상대할 때 제일 경계해야 되는 건 웃는 녀석이다. 그놈이 가장 골치아플 테니까.’

해군의 영웅이라 불리던 가프가 올해 대장직을 사임하고 그 자리에 푸른 꿩, 쿠잔의 임명식이 있던 날이다. 도피는 테이블 위로 다른 두 대장 옆에 쿠잔의 사진을 올린 뒤 말했다. 이 중 단 하나, 웃고 있는 가운데 얼굴을 가리키며. 그리고 지금, 가운데 사진의 주인공이 로우 앞에 있었다. 왕의 대지 위에 난입해 그를 저지하던 호위대 및 병사들을 전부 박살내놓은 채로. 노란 바탕의 줄무니 양복을 입은 남자는 쓰러진 병사들 가운데서 홀로 고고하게 서있었다. 바람결에 정의 코트를 나부끼면서. 로우의 등장에 잠시 머리를 기우뚱한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품에서 종이를 꺼내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돈키호테 국왕에게 왕궁 수색 허가도 받았는데 말이죠. 정말 이상하네~. 왜 보초병은 아무 전달도 못 받은 것 같지?”

로우가 탁트로 날린 종이를 잡고 확인하던 중이다. 키자루, 볼사리노의 얘기는 혼잣말처럼 변했지만 들으라고 하는 소리나 매한가지다. 사전에 정식 허가도 받고 드레스로자 해역에 진입하기 전 담당 해군지부 및 크로커다일과의 교신도 끝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선진입한 볼사리노가 맞딱트린 건 침입자를 향한 공격이었다. 해군 대장씩이나 돼서 모양 빠지는 일 아니던가. 뒤늦게 리프트를 타고 올라온 드레스로자 일대 관할 책임자 및 휘하 해군들도 중앙 궁 앞마당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볼사리노와 대치하듯 선 로우의 청바지와 셔츠라는 러프한 차림새 또한 그러했고. 그런 로우의 뒤에는 일단의 겁 먹은 대신들이 있을 뿐 베르고를 비롯한 호위대장들은 보이지 않았다. 볼사리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볼사리노 대장님!”
“사보 대령은 왜 안 보이지?”

나이 지긋한 중장의 말을 받아친 건 로우였다. 모든 해역의 보호 및 관리감독을 도맡는 해군에서 마물 팔 하나를 찾자고 중장까지 직접 행차할 일은 아니잖은가. 마리조아 왕의 지시일 게 분명한 해군 대장은 예외로 치고 말이다.

“대령은 개별 임무로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로우 왕자님.”

그러나 합당한 물음에 대답하는 중장의 얼굴은 착잡함이 가득했다. 그도 성격, 능력 좋은 부하를 무척 아끼지만 특정 문제에 불도저처럼 굴 때는 대책이 없었다. 이때 사보는 평소와 같이 논리정연한 자세를 취하지만 그래서 더 무섭기 때문이다. 360도 돌아버려 겉보기만 멀쩡한 미친놈 같다고 할까. 일례로 훈련병 시절 에이스에게 험한 말을 일삼던 고참 하나는 사보에게 혀가 뽑힐 뻔했다. 아직 다들 훈련병이었고 피해자가 에이스를 괴롭혔다는 증언이 많았던지라 그 일은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충격으로 고참은 군을 그만둘 정도였다. 사건이 벌어진 날은 에이스도 당황해 사보를 뜯어말렸다니 상황이 어땠을지야 뻔한 것 아닌가.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사보 앞에서 에이스를 욕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두 사람보다 몇년 늦게 들어온 루피는 ‘사보 동생’이란 타이틀 앞에 더없이 평탄한 훈련병 생활을 거침이 당연했고. 그러므로 사보는 오늘 출근도 하지 않았다. 대신 중장은 쿠잔에게 연락을 받았으니 대장 직권으로 사보에게 비밀 임무를 하달했다는 말을 들었다. 함께 일한 시간이 긴만큼 사보를 잘 알고 있던 중장은 바로 수긍했고 말이다. 덕분에 당장 오늘 해군 대장을 보좌하는데 보낼 마땅한 녀석을 찾지 못해 그가 직접 오게 된 거였다. 그런 생각에 중장이 착잡한 숨을 내쉴 때 로우는 그 뒤로 도열한 해군 무리에 둘러싸인 청년을 알아봤고 말이다. 사보에 대한 건 오늘 자 신문을 본 로우도 예측 가능했으니 더 물을 것도 없었다. 그렇게 로우가 잠시 눈을 뺏긴 사이였다.

“팔지경.”

양손을 위아래로 동그랗게 모은 볼사리노가 금빛 광자로 변해 쏘아졌다. 손을 펼쳐 룸을 형성한 로우 또한 순간이동처럼 사라질 때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새 중앙궁 천장을 뚫고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공무수행을 방해할 작정입니까? 로우 왕자.”
“수색할 시간은 얼마든지 주지. 하지만 그 전에 무슨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줘야 겠어, 대장. 나는 정말 아무것도 들은 게 없거든.”

볼사리노는 번쩍번쩍 열매를 먹은 빛 인간이다. 그런 이가 황금빛을 띤 광속으로 하는 공격은 단순한 발차기도 살상무기가 된다. 속도는 곧 중량이니 광속의 파괴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빛의 특성상 무장색 패기를 두르지 않고서는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로우도 귀곡에 패기를 둘러 간신히 발차기를 막았을 정도다. 빛의 속도를 따라잡은 것 또한 아직 발정기의 잔열이 남은 덕분인지도.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자극을 받으면 겨우 유지 중인 이성이 날아갈지 모른다. 같은 알파인 볼사리노 역시 대면한 순간 로우의 상태를 알았음이다. 때문에 그 역시 공격 대신 중앙궁 지붕 위로 내려서며 로우와 거리를 벌렸다.

“시간 끌 목적으로 하는 말이라면 재미 없을 거야, 왕자.”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우리 국왕은 오늘 일에 대해 내게 아무 말도 한 게 없다.”

지붕 위에서 대치하듯 서있던 둘 사이로 차분한 대화가 이어졌다. 볼사리노는 베르고를 비롯한 분대장들의 부재를 예사로 보지 않았다. 때문에 로우가 시간을 끄는 동안 그것을 빼돌리는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한데 아무리 봐도 왕자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결국 뭐 이런 집안이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거 난감하네에….”

볼사리노는 귀찮음 가득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이 넓은 왕궁을 일일이 수색하려면 며칠은 족히 걸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볼사리노 그 자신이라면 몇초로 충분하다. 재깍 일을 마치고 돌아갈 생각이던 그가 긴 팔을 들어 뒤통수를 한차례 쓸 때였다. 방금의 소란 때문인지 중앙궁 내부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베포와 샤치, 범고래가 있었다. 그 뒤로 한발 늦게 베르고와 펭귄도 모습을 보였다. 이를 확인한 로우의 눈빛이 바뀌었다.

“베포! 도망친 왕세자비는 어떻게 됐지?”
“음? 어, 어, 그게…….”
“죄송합니다, 대장! 놓쳤습니다!”

베포, 샤치, 범고래는 해군 대장 소식에 잠수함 인양을 맡기고 먼저 돌아온 참이다. 그에 아직 상황판단이 안 된 베포가 어물쩍거릴 때 대답을 한 건 샤치였다. 그는 눈치코치에 강했다. 이로써 뒤늦게 도착한 분대장들의 이유가 뭉뚱그려져서 해결되니 그제야 볼사리노의 표정도 조금 달라졌다.

“로우 왕자는 며칠 전부터 발정기를 보내느라 별궁에 틀어박혀 있었다, 해군 대장!”
“들었지?”

밑에서 베르고의 목소리가 들리니 로우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악당을 연상케하는 미소에는 볼사리노도 움찔할 정도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수색해도 될까요? 왕자.”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고픈 생각은 그 또한 눈곱만큼도 없었다. 때문에 제 일을 빨리 마치고자 했던 볼사리노가 나름 정중히 허락을 구했으나 로우는 더욱 입끝을 비틀어올릴 뿐이었다.

“아니, 그전에 먼저 당신이 우리 국왕한테 연락을 해줘야 겠어.”
“…….”
“궁 수색은 얼마든지 해도 좋아. 무슨 정보를 들었든 적극 협조해주지.”

여기서 로우는 해군에 둘러싸인 청년을 힐끗 내려다봤다. 그는 지난날 코끼리 인형으로 변했던 마리조아 첩자였다. 한데 녀석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으니 로우는 지하선착장에서 키자루 얘기가 나왔을 때 슈거의 신병을 걱정하던 베르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로우는 앞서 베르고에게 펭귄을 붙여 슈거의 피신을 돕도록 했다.

“그러니 당신이 먼저 날 도와줘야 겠어. 이쪽은 왕세자비가 국왕의 배에 몰래 승선해 달아났다는 문제가 생겼거든.”

협박처럼 들린 그 말에 볼사리노는 또 한번 답지 않게 당황했다. 이 나라 왕실은 어떻게 돌아가는 집안인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조로가 부축을 받아 도착한 곳은 배의 최하층 바로 위에 자리한 방이었다. 창문도 없고 두 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방은 기름 냄새와 밑에서 가동되는 기계음이 소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작업반장이라는 직함 덕에 가진 개인실이었다. 그곳의 간신히 몸 하나 누일 침대에 걸터앉은 조로는 어깨 한쪽이 피로 흥건했으니 험한 일은 다 겪어봤다 싶던 남자도 당황함이 당연했다.

“이거 상처가 꽤 깊어 뵈는데… 어깨에 박힌 철조각도 당장 빼내야 할 것 같고.”

침대와 마주닿은 벽에 기대앉은 조로의 옷을 벗겨 한쪽 어깨를 드러낸 남자의 얼굴이 심각했다. 그는 조로의 고집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환부를 살폈는데 점프수트 형식의 호위대 제복 사이로 드러난 한쪽 어깨에는 상처 말고도 생긴 지 얼마 안 된 멍과 잇자국이 살벌하게 나 있었다. 이제 남자는 조로가 무슨 짓을 당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봐, 정말 의사한테 안 가봐도 되겠어? 이렇게 피를 흘리다간 정말 큰일난다고. 그러지 말고 의사를 찾아가는 게 어때? 젊은이. 이 배에 탑승한 의사는 궁정의지만 우리 왕은 그래도 인심이 후한 분이시거든! 항해 중에는 우리같은 사람도 치료받게 해주시니까 말이야! 세계 어디를 봐도 우리 폐하만큼 인자한 분이 없다니까?”
“하아… 그보다 아저씨 지난 번에 약속한 술, 지금 줄 수 있을까?”
“뭐?! 이런 몸을 하고 무슨 술타령이야?”
“그리고 철조각은 아저씨가 빼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젊은 사람이 죽으려고 환장했어??”
“괜찮아. 체력은 자신 있으니까. 하아… 박힌 것만 빼주면… 이 정도는 한숨 자면 나아.”

안 그래도 체력이 엉망인데 피를 많이 흘렸다. 손발끝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조로는 입술도 파랗게 질렸다. 자꾸 멍해지는 머리에 조로는 뒷걸음치는 남자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수염이 까칠하게 난 남자의 얼굴을 순간 로우로 착각한 그가 머리를 한차례 털어냈다.

“부탁할게, 아저씨.”

간절한 목소리에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본 조로는 목덜미와 입가에도 멍울을 달고 있었다. 필시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리라. 이쯤되면 조로가 호위대원이 아니라는 건 남자도 눈치챘다. 당한 몰골을 보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도망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남자는 비록 거칠고 투박할지나 불쌍한 사람을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하… 그럼 전처럼 사라지지 말고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내 뭐라도 좀 가져올 테니.”

결국 머리를 벅벅 긁은 남자가 잠시 뒤 들고 온 것은 싸구려 럼주와 구급상자였다. 이어 나무 박스를 의자 대용으로 삼은 남자는 침대 한쪽을 침범해 가로 놓인 책상에서 머그컵을 들어 럼주를 가득 부었다.

“이거부터 한잔 마셔. 맨정신에 살을 쑤시는 것보다는 낫겠지.”

조로가 받아든 컵을 들어 술을 원샷할 때 남자는 구급상자에서 꺼낸 의료용 핀셋에 남은 럼주를 들이부었다. 바닥 위로 부어지던 술과 함께 남자에게서도 착잡한 한숨이 연거푸 이어졌다. 제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나 하는 생각에서다. 남자는 평소에도 동료에게서 오지랖 좀 고치라는 말을 듣고는 했다. 그러다 신세 망칠 거라며.

“준비 됐어?”

내 신세 내가 말아먹는구나 생각하면서도 결국 남자는 럼주를 들이부은 핀셋 두 개를 들고 조로 앞에 섰다. 확인하듯 묻는 말에 조로가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는 책상 위, 기름때 묻은 수건을 집어들었다. 조로는 제게 내밀어진 수건을 군소리 없이 입에 물었고 남자가 핀셋 하나로 환부를 벌리자 피가 울컥 쏟아져나왔다.

“……!!!”

경직된 조로의 이마 위로 화수분처럼 식은땀이 흘러내리던 순간이었다. 살 속 깊이 박힌 철조각을 찾으려 핀셋으로 환부를 헤집는 감각이 끔찍했다.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철조각을 뺀 환부에 남은 럼주를 들이부었을 때는 조로도 깜빡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환부를 단단히 감아놓은 붕대를 봤는데 그 모습에 식겁했던 남자도 진이 풀린 듯 나무 박스에 엉덩이를 붙였다. 식은땀에 전신이 흠뻑 젖은 조로가 힘없는 미소로나마 남자에게 고마움을 전할 때였다. 돌연 굳게 닫혀 있던 철제 문이 뜯기듯 날아간 것은.

“히익!”

큰고비를 넘긴 두 사람이 한번 마주 웃어보기도 전이었다. 뻥 뚫린 문너머 존재의 위압감에 남자가 거품을 물고 기절하니 조로는 바로 남은 검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상대는 제게 휘둘러진 검을 맨손으로 움켜쥘 뿐이었다.

“헉!”

패기를 두른 손의 휘두름에 조로가 검과 함께 패대기쳐졌다. 복도 벽에 부딪힌 그 앞으로 날듯이 도착한 이는 발끝으로 조로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제야 마주친 시선에 보인 것은 분홍빛 깃털 코트를 걸친 젊은 왕이었다.

“찾았다.”

그는 귀 밑까지 끌어올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도 글도 모르는 드레스로자 장난감들의 규칙은 간단했다. 왕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를 것, 그 외는 이 나라 국민에게 봉사할 것. 이들은 두 가지 규칙을 바탕으로 도플라밍고가 왕좌에 오른 뒤 가장 낮은 곳에서 나라를 떠받치는 노역자가 됐다. 그리고 로우가 별궁에 칩거할 때 도피가 불러들인 녀석이 있었으니 바로 지난날 조로가 뒤를 쫓던 남시종이었다. 슈거에 의해 코끼리 장난감으로 변한 녀석은 종일 크로커다일의 집무실과 지하를 오가며 기밀 문서를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다 도피와 크로커다일이 철제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걸 보게 됐고 인형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는 왕의 방에서 나오던 슈거와 마주쳤다. 직후 씩 웃어보인 슈거가 울어보라며 녀석을 툭툭 건드리다 장갑이 벗겨진 손으로 터치했던 것은 실수였을까. 사람으로 변하기 무섭게 달아난 녀석은 제가 다시 여기 오게 될 걸 예상했을까. 로우는 이렇듯 자세한 사정은 몰랐을지나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있었다. 놈이 사람으로 돌아온 건 실수가 아니며 지금 상황은 도피가 전부 예상한 일이라는 것. 적어도 도피는 제가 아는 전부를 로우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때문에 도피의 계획을 청사진처럼 그릴 수 있던 로우는 보기 좋게 흔들어 놓기로 했다. 도피의 가르침대로 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기로 말이다.

‘해군 대장이 무슨 일이지? 궁 수색에 필요한 재가는 다 내줬을 텐데?’
‘나다, 도피.’
‘…….’
‘끊지 말고 들어! 급한 일이니까! 지금 그 배에 조로가 올라탔어! 상처를 입었으니까 당장 찾아서 치료부터 해줘!’
‘훗… 도망친 녀석을 찾아 치료까지 해달라…….’
‘그러게 아까 우리 연락을 받았어야지! 멋대로 무시해서 이 사달을 낸 게 누군데!’

로우는 도피가 해군의 연락은 받을 거라 확신하고 행동한 거였다. 이는 도피가 눈에 불을 켜고 배를 이 잡듯이 뒤지기 수십분 전의 일이었다. 도피는 플라밍고 호의 내부 구조를 전부 완벽히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조로를 제 침실로 끌고와 침대에 던져넣은 도피는 드물게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궁정의를 불러 조로를 살피게 했으니 덕분에 제대로 된 처치도 받을 수 있었다. 뿐일까, 별궁에서와 같이 필요한 약을 받았고 각종 영양제를 비롯한 수액까지 팔에 꽂은 상태였다. 말도 없이 도망친 신세치고는 참으로 융숭한 대접일지나 침대 발치에서 저승사자처럼 서있던 젊은 왕의 공포는 절대 무시 못함이었다.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불려온 궁정의들은 왕의 기백에 눌려 심장이 오그라들 지경이건만 조로는 어느새 코까지 골며 잠들고 말았다. 실로 오늘 하루가 고되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 그에 궁정의들이 처치를 끝내고 방을 나선 뒤 대자로 뻗어 자던 조로를 보노라면 아무리 도피라도 기가 찰 따름이었다.

‘조로를 무사히 데리고 와, 도플라밍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는 건 베르고 따위가 아니라 나일 테니까.’

해군까지 전부 듣고 있는 상황에서 도피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하니 일방적으로 말을 들어줘야 했던 상황에 로우는 제가 가진 가장 큰 패를 사용키로 한 거였다. 조로를 살리기 위해.

‘로시가 네 말을 듣고 슬퍼하겠구나, 로우야.’

역시나 잠시 텀을 두고 나온 도피의 음성은 전에 없이 묵직했다. 그리고 많은 뜻을 내포한 말에 로우는 어떠했던가.

‘아니, 코라씨라면 내 선택을 기뻐할 거야.’

이번엔 네가 틀렸어. 단호한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도피가 모를까. 결국 그대로 연결을 끊은 도피는 배 안을 샅샅이 뒤져 조로를 찾았다. 이때 크로커다일은 도피와 달리 침실 한쪽에 연결된 작은 방으로 직행해 내내 박혀 있다가 지금에야 그곳을 나왔다. 닫히던 문 안쪽에는 대형 전보벌레 옆으로 책상과 의자, 탁상용 전보벌레와 간단한 필기구가 있을 따름이었다.

“믿을만 한 정보통한테서 롤로노아가 이러는 이유를 찾았다, 도피. 베르고에게도 얘기해뒀어. 로우는 지금 볼사리노를 상대하느라 정신없다더군.”

평소라면 로우의 얘기를 들었을 때 도피의 독주를 말리기 위해 따라나섰을 크로커다일이다. 한데 오늘 그는 도피를 막지 않았을 뿐더러 내내 통신방에 박혀 있었다. 크로커다일이 방금 나온 곳은 방 전체에 방음 및 도청 방지 설계가 돼 있었고 내부에는 거리에 상관 없이 세계 각지로 통신 가능한 거대 전보벌레가 상주했다. 때문에 그는 온종일 그곳에서 필요한 정보를 모은 거였다. 이때 도피는 ‘믿을만 한 정보통’이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자필로 정리한 종이를 넘긴 크로커다일이 침대로 향하는 것에 그를 붙잡는 일부터 해야 했다.

“뭘 하려고?”
“깨워야지.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였는지 직접 들어야 겠어.”
“그래서? 만일 녀석이 진짜 도망칠 생각이라면 어쩔 테냐?”

도피에게도 조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었다. 때문에 그런 놈을 깨우기 전에 의견합일을 먼저 보려는 생각이었는데 앞을 가로막은 도피와 마주한 크로커다일은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숨 쉬듯 피워대던 시가도 물지 않았다는 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로시의 유산인 로우를 싸고도는 쪽은 크로커다일이 아니던가. 도피는 이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정말 롤로노아가 이대로 밀짚모자와 함께 달아나려 한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어.”
“무슨 생각?”
“…토트랜드 왕국의 여제 샬롯 링링은 너도 잘 알겠지? 그의 수많은 자식들 중에 기억 조작이 가능한 능력자가 있어. 기억을 제거하거나 원하는 대로 편집도 가능하지. 롤로노아의 대답여하에 따라 녀석을 토트랜드로 데려간다.”
“가서 밀짚모자에 대한 기억을 삭제해달라 의뢰할 거냐? 간단한 기억이라면 몰라도 인생 전반에 걸친 조작은 어떤 부작용을 불러올지 모르는데도?”
“그래. 백치가 된다 해도 상관없다. 최악의 수로는… 미스터 투도 있겠지.”

복사복사 열매 능력자인 미스터 투, 봉쿠레는 조로의 모습과 목소리마저 그대로 배낄 수 있다. 하니 크로커다일은 조로가 회생 불능 상태에 빠진다면 그에게 평생 대역을 강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도피는 한치 거짓 없는 말에 크로커다일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줬다. 도피가 생각한 최악의 수라면 조로를 로우의 앞에 데려간 뒤 죽이는 것이었다. 그가 눈을 떼지 않는 한 어차피 로우는 죽을 수도 없을 테니까. 이런 뜻에서 도피는 크로커다일과 전혀 의견이 맞지 않음에 탄식했다. 애당초 마물의 팔을 가지고 에니에스 로비에서 판을 벌려 CP 9과 그 수장인 스팬담을 궁지에 몰아넣을 계획이던 도피는 크로커다일이 먼저 돕겠다고 나설 때도 딱히 내키지 않았었다. 악어는 로우를 보호하는 일이라면 차분하게 눈이 뒤집히는 쪽이었으니까. 한데 그 잔잔한 심연을 태평하게 퍼질러 자는 녀석이 제대로 분탕질 쳐놨으니 도피라도 두통이 몰려오지 않겠는가. 그 역시 크로커다일을 막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이런 생각에 도피의 이마 위로 실핏줄이 튈 때 크로커다일은 붙잡힌 팔을 미련없이 빼냈다. 이번만큼은 아무리 너라 해도 방해하면 용서치 않겠다는 듯이. 파도마저 잔잔한 밤바다 위로 고요한 폭풍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숨막힐듯한 모래 폭풍이.








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