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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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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기루 밖으로 거적으로 덮인 수레들이 줄지어 나왔다. 앞선 복면을 한 남자가 주위를 살피며 손을 내리자 천천히 달리던 수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빠르게, 수레들은 관도를 지나 성문 밖으로 사라졌다.
“북 소사님, 저건 어떡할까요?”
창백한 얼굴의 시녀가 손으로 가리킨 건 백색 융단을 걷고 난 피로 얼룩진 바닥이었다. 북동아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방에 가서 돼지기름을 받아오렴. 너는 화로에서 잿가루를 더 퍼 오고.”
사방을 적신 혈흔은 시간이 지나며 더 진해지고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온갖 비명이 난무한 광란의 연회가 남긴 결과물이었다. 북동아는 창문을 활짝 열어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로 가득한 방을 환기시키고 더럽혀진 휘장을 걷어내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호군들에게는 백색 융단과 휘장은 불태우라고 명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던 궁인들도 너도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름을 섞은 잿가루로 수십 번 피가 스며든 연회장의 바닥을 밀었다. 궁인들의 손이 발갛게 아려지고 다들 피곤에 지쳤다. 어리고 고운 얼굴에 검댕이가 묻고 모두가 땀에 절여있었다.
일찌감치 식욕이 없어진 북동아는 식사를 거르고 숙소로 향했다. 뻣뻣한 다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기둥을 붙잡고 숨을 돌릴 때, 약그릇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여동들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들이 향하는 곳을 올려다봤다. 기루 최상층의 방이었다. 그곳은 사명천군이 머무는 곳이었다.
약시비의 것일까. 아니면 사명천군?
지난번 사명천군이 아꼈던 시비는 뭔가 잘못됐는지 며칠 동안 몸을 비틀다가 흰자를 드러내고 죽어버렸다. 오늘처럼 깜깜한 새벽에 나가던 수레를 북동아는 창문 밖으로 몰래 지켜봤다.
덮인 천 밖으로 나와있던 건 사람이 아닌 뱀의 꼬리였다. 용도, 이무기도 아닌 뱀...
북동아는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아이였다. 할머니는 그 성격이 궁에서 지내기에는 알맞다고 했다. 궁에 들어오면서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도 북동아는 깨달았고, 몸을 낮춰 귀를 닫고 입을 여물었다. 될 수 있는 한눈에 띄지 않도록 걷는 걸음에도 신중을 기했다.
현 황제는 웅장한 궁전을 짓고 세상의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강을 만들어 그곳에 뱃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불야궁을 지어 그곳에서 유흥에 빠져 국고를 낭비했다.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주연이 쉬지 않고 연달아 100일간이나 이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주연에 백성들은 병들고 굶어죽었다. 신하들이 간곡한 충언을 했지만 황제는 그것을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방탕무도한 나날이 계속되자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게 되었다.
이때, 황제가 묵산을 지나다 발견하고 황궁에 데려온 것이 이무기였던 사명천군이었다. 본디 이 나라가 설 때 못에 살던 용을 신수로 모시고 터를 만들었기에 수 세대가 지난 후 다시 나타난 이무기에 사람들은 새 희망을 갖고 세상이 바뀔 거라 기대를 했다.
백성들은 궁을 향해 절을 하며 나라의 번성과 풍요를 빌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바뀌는 것은 없었다.
백성들은 계속 거리에서 굶어죽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관리라는 자들은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백성들의 안위는 뒷전이어서 도둑들을 잡아넣을 자가 없으니, 도둑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여 화합을 하지 않으니, 나라는 점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선대가 이룬 찬란한 영광은 점점 퇴색되어갔다.
북동아는 그가 싫었다.
뱀이 오백 년을 살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또 오백 년을 살면 용이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명천군을 두고 승천을 앞둔 영물인 이무기라고 했다.
의아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사방에서 원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 되면, 귀신이 모습이 드러내고 원성이 들리며 원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백팔 수라귀들이 그의 뒤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북동아에게는 보였다.
이것이 진정 용이 될 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자신이 이런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걸 안다면 당장이라도 북청에 끌려나가 매를 맞으리라.
이런 날은 너무나도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북동아는 품 안에서 낡은 향주머니를 꺼내 움켜쥐었다. 자신이 궁에 들어올 때 할머니가 직접 수를 놓아준, 세상에 하나뿐인 향주머니였다. 힘이 들 때마다 향주머니를 꺼내 할머니를 떠올렸다.
벌써 일 년째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사명천군은 대외적으로는 민생을 위해 부를 마다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민간에서 백성들을 위로한다는 이유로 궁 밖을 떠돌았다. 그런 그를 따라다니느라 궁을 나오고 계절이 네 번이 바뀌었다. 할머니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움을 담은 물기 어린 눈동자가 서쪽 하늘을 향했다.
-----
두 사람은 마을에 내려왔다.
주자서가 그렇게나 가기 싫어했던 마을에 온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온객행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를 두고 가지 못하는 온객행은 구연완에게 서찰이 왔는지 확인만 하고 바로 돌아가자고 말을 했고 주자서는 한참을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위하는데 저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주자서는 걸으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온객행의 소매를 꼬옥 쥔 채 계속 땅만 보고 걸었다. 가끔 어떤 냄새를 찾는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리기도 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온객행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서찰은 오지 않았다.
주자서의 손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잠시 힘이 빠졌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온객행의 옷을 주자서가 잡아당겼다.
'걱정돼?'
온객행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연락을 끊을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오래 서찰이 오지 않은 적은 없었어."
짧게라도 근황을 적어 보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락이 끊긴지가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럼, 그 사람한테 가보면 안 돼?“
주자서가 손가락으로 온객행과 자신을 가리켰다.
너와 내가.
온객행은 놀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주자서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그 생각까지 미치지 못했다. 거기다 설마 주자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은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둘이서 떠난다고?
커진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온객행에게 주자서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사람을 찾으러 같이 가보자.'
구연완이 지내는 곳은 여기서 꽤 멀다고 했다.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스무 번의 밤이 지나야 한다고 했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주자서는 구연완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온객행 말로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고 하지만 과거의 일들은 주자서에게 안개 낀 너머의 구름 같았다. 태어나자마자 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익숙하지 못한 세상에,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반인 반사의 두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당시 주자서는 눈을 마주치지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온객행은 예민하고 사나웠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다가오는 사람들을 해하고 다치게 했고 그 소문을 듣고 온 구연완이 그들을 거두었다. 구연완이 없었다면 두 사람은 이미 죽었을 목숨이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에 업혀가며 구연완의 이야기를 들었다. 온객행의 목소리 안에서 그에 대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어질고 좋은 사람이구나.
주자서는 멀리 떠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온객행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괜찮았다. 그곳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그가 옆에 있다면.
온객행은 주자서를 엎고 산에 오르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어느 것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듣기 좋은 그의 낮은 목소리와 일정한 흔들림에 주자서는 곧 잠이 들었다.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챈 온객행은 그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허리를 좀 더 숙인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가 대신 맨 주자서의 천꾸러미 안에는, 그가 산에 내려올 때 집에서 들고 온 주전부리들이 가득했다.
잘그락 소리가 계속 나는 걸 보면 틈이 날 때마다 호수에서 모아둔 예쁜 돌멩이까지 들어있는 듯했다. 매번 이런 걸 챙겨 들고 다니는 그가 귀여워 온객행은 작게 웃었다.
수십 년 지냈던 곳을 떠나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온객행이 바지런히 따서 말리던 잎과 꽃들은 집 안으로 옮겼고 산짐승들이 집을 해하지 못하도록 바위들을 날라 집 주변에 둘렀다. 그리고 동물들이 기피하는 약초들을 사방에 매달았다. 사실 집이 무너져도 다시 짓는 일쯤은 고생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집에는 많은 추억이 있었다. 구연완을 만나지 못한다면 봄이 오기 전에 돌아올 것이었고 그를 만난다면 돌아오는 날이 뒤로 밀어질 것이다. 언제든 이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주자서가 글 연습을 하느라 집 벽에 가득 쓴 글자들을, 온객행이 애정 어린 손길로 가볍게 훑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자, 아슈."
온객행이 두 팔을 벌리자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있던 주자서가 일어나 그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너무나도 가볍게 온객행의 목에 매달렸고 온객행은 그의 엉덩이를 받치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메고 있는 등짐을 보고 물었다.
"무겁지 않아? 내가 들까?"
주자서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들어있는 건 간식과 수집한 돌 뿐이었다. 전혀 무겁지 않았다.
무거운 것은 전부 온객행의 등에 있다. 그리고 앞에는 자신이 매달려있었다.
'넌 내가 안 무거워?'
주자서가 그의 어깨에 글자를 쓰자 온객행이 답했다.
"넌 너무 가벼워서 한 열 명쯤 안고 있어야 무거울 것 같아."
그의 실없는 대답에 주자서가 픽- 하고 웃었다.
이 세상천지에 오직 둘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그랬다. 둘이 함께라면 놓을 것도 놓치는 것도 없다.
두 사람이 어디에 있다 한들 그곳을 잠시 빌려 몸을 뉘었을 뿐이었고, 떠나면서 되돌려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집을 쳐다본 후 발걸음을 뗐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목을 붙잡고 어깨너머로 멀어지는 집을 바라봤다. 이제는 잊고 싶지 않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겨두고 싶다. 모든 기억 속에 온객행이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소중한 기억들을 다 잊고 살았다. 과거를 떠올릴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잘 기억해야 했다.
이 집은, 추억이 가득한 온객행과 주자서 두 사람의 집이었다.
잘 있어야 해.
다시 올 거니까.
호수도 꼭 다시 갈 거니까.
그때까지 잘 있어. 안녕.
주자서는 마음속으로 새들에게도 나무들에게도 집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짙은 새벽빛 눈동자에 모든 것을 담으며 산을 내려갔다.
-----
“조심해.”
비탈길에 발을 헛디딘 주자서를 온객행이 잡으며 외쳤다. 놀란 주자서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온객행을 돌아봤다. 잘못하면 경사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낙엽이 잔뜩 쌓인 산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비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미안해.’
주자서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온객행의 팔을 작게 토닥였다. 놀란 마음은 그의 든든한 팔 안에서 금세 가라앉았다.
풀리지 않는 여행의 여독이 매일 쌓여갔다. 주자서는 염치를 차려 대부분 걸었지만 조금이라도 피곤한 기색이 보이면 온객행은 주저 없이 그를 업거나 안아들었다. 그것 때문에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실랑이를 벌였다. 온객행은 티를 내지 않았으나 그 역시 피곤함을 느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거니 두 사람 몫의 짐을 들었고 주위를 살피며 주자서를 데리고 이동을 하려니 힘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저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에 가까웠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주자서는 미안한 마음이 늘어났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바위 위에 두 사람이 앉았다. 온객행은 물통을 열어 주자서에게 건네고는 그가 목을 축이고 나서 나머지 물을 마셨다. 온객행은 자신을 쳐다보는 주자서의 눈빛을 읽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직 많이 남은 거지?'
"지금까지 온 것보다 더 많이 가야 해."
'거긴 추워?'
"응. 훨씬 추워. 북쪽에 있기도 하고 이제 곧 겨울이라 더 추울 거야."
'잘 됐다. 그럼 눈을 볼 수 있겠네.'
주자서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풍쟁에 그려져있던 눈이 떠올랐다. 긴 속눈썹이 깜빡이는 움직임에 따라 팔랑거리며 움직였다.
"관록지까지는 많이 추울 거야. 다음 마을에서 좀 더 따뜻한 옷을 사자."
주자서의 목 근처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온객행이 말했다.
'응. 좋아.'
"걷다가 힘들면 업을 테니까 꼭 말해."
알았다는 뜻으로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묵을 곳을 찾을 때까지, 주자서는 고집스럽게 제 발로 걸었다.
-----
가을이 깊어진 산속에 비탈길을 화려한 가마 하나가 오르고 있었다.
연목치는 가마꾼과 몇몇 병사들만 데리고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풀어둔 녹사들이 가리킨 곳은 지형이 험한 산의 구석이었다. 굴곡진 바위와 겹겹의 결계에 둘러싸여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였다. 결계는 복잡하기는 하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세운 순서대로 지우면 완벽하게 풀린다.
작은 기물을 이용해 만든 것을 보니 분명 인간을 피하기 위해서 친 결계일 것이다.
살짝 열린 가마의 창문 밖으로 하얀 손이 나왔다. 검지에 화려한 보석이 박힌 지갑투가 씌워져있었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검광이 번쩍였다. 검은 호피를 쓴 병사들이 빠르게 휘두르는 검 아래, 나무들이 어지럽게 베어졌다.
얼마 후 가마의 문이 열리며 연목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깨진 결계 사이로 엉망이 된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이런 곳과 어울리지 않는 팔보와 운룡의 문양이 수놓아진 푸른 가죽 신발이 쓰러진 나무들 사이를 지났다.
눈앞의 작은 집은 생김새는 어설펐지만 구석구석 손을 봤는지 깔끔했다. 물이 흐르는 곳 근처에 지어진 집은 경사가 있던 곳을 일부러 평평하게 다듬은 모양새였다. 쓸데없는 정성이라고, 연목치는 생각했다.
바위를 치우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안은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꽤 넓었다. 집 안은 짙은 꽃향이 가득했다. 벽마다 촘촘히 걸려있는 천주머니에서 나는 향이었다. 이 향은 그 둘을 만났을 때 나던 향과 비슷했다.
집 안은 눈에 띌 만한 것은 특별하게 없었다. 한 쪽에 놓인 침상, 나무를 다듬어 만든 듯한 책장과 탁자, 높이 매단 약재들과 육과들...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올 것만 같은.
연목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 안을 훑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이미 며칠째 그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때마침 그들을 찾기 시작할 때 사라진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인가.
연목치는 몸을 숙이며 집 밖으로 나가느라 손으로 짚은 벽이 온통 글자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란 글자가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새길 수 있는 곳이라면 전부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마치 글을 막 배운 어린아이가 쓴 듯 글자는 삐뚤빼뚤 서툴렀다. 순간 연목치는 줄곧 온객행의 뒤에 숨어있던, 자신의 얼굴을 핥았던 주자서를 떠올렸다.
’웃기는군.‘
사람도 아닌 것들이 그럴싸하게 사람 흉내를 내며 집을 짓고 불을 피우며 사는 모습에 연목치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분명 금방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냥감들이 제 시야에서 벗어난 불쾌감으로부터 오는 것이리라. 배 아래서부터 화가 스멀스멀 올라와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거나 손에 닿는다면 찢어발기고 싶었다.
감히.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보통 뱀들은 추워지면 체력이 떨어지며 겨울잠을 잔다. 그것은 반인 반사도 똑같다.
연목치가 부리는 뱀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들의 흔적을 쫓기가 어려워질 것이 자명했다.
“어디로 갔는지 빨리 찾아내야 한다. 시간이 없어.“
다정한 말투 속에는 가시가 숨어있었다.
지금까지 저 부드러운 말투에 수천 명의 목숨이 사라졌었다.
가마로 향하던 연목치가 갑자기 뒤를 돌아 집을 바라봤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진 후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태워라. 전부, 무엇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움직였다. 품에서 꺼낸 화촌을 돌로 내리쳐 불을 붙이더니 집 안에 던졌다. 불은 온객행이 정성스럽게 말린 화초들에 붙어 번지기 시작했다. 집 안을 가득 채웠던 꽃향기는 사라지고 곧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길은 순식간에 집 전체를 감싸며 활활 타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가 되어 흩어졌다.
객행자서
메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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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기루 밖으로 거적으로 덮인 수레들이 줄지어 나왔다. 앞선 복면을 한 남자가 주위를 살피며 손을 내리자 천천히 달리던 수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빠르게, 수레들은 관도를 지나 성문 밖으로 사라졌다.
“북 소사님, 저건 어떡할까요?”
창백한 얼굴의 시녀가 손으로 가리킨 건 백색 융단을 걷고 난 피로 얼룩진 바닥이었다. 북동아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방에 가서 돼지기름을 받아오렴. 너는 화로에서 잿가루를 더 퍼 오고.”
사방을 적신 혈흔은 시간이 지나며 더 진해지고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온갖 비명이 난무한 광란의 연회가 남긴 결과물이었다. 북동아는 창문을 활짝 열어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로 가득한 방을 환기시키고 더럽혀진 휘장을 걷어내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호군들에게는 백색 융단과 휘장은 불태우라고 명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던 궁인들도 너도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름을 섞은 잿가루로 수십 번 피가 스며든 연회장의 바닥을 밀었다. 궁인들의 손이 발갛게 아려지고 다들 피곤에 지쳤다. 어리고 고운 얼굴에 검댕이가 묻고 모두가 땀에 절여있었다.
일찌감치 식욕이 없어진 북동아는 식사를 거르고 숙소로 향했다. 뻣뻣한 다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기둥을 붙잡고 숨을 돌릴 때, 약그릇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여동들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들이 향하는 곳을 올려다봤다. 기루 최상층의 방이었다. 그곳은 사명천군이 머무는 곳이었다.
약시비의 것일까. 아니면 사명천군?
지난번 사명천군이 아꼈던 시비는 뭔가 잘못됐는지 며칠 동안 몸을 비틀다가 흰자를 드러내고 죽어버렸다. 오늘처럼 깜깜한 새벽에 나가던 수레를 북동아는 창문 밖으로 몰래 지켜봤다.
덮인 천 밖으로 나와있던 건 사람이 아닌 뱀의 꼬리였다. 용도, 이무기도 아닌 뱀...
북동아는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아이였다. 할머니는 그 성격이 궁에서 지내기에는 알맞다고 했다. 궁에 들어오면서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도 북동아는 깨달았고, 몸을 낮춰 귀를 닫고 입을 여물었다. 될 수 있는 한눈에 띄지 않도록 걷는 걸음에도 신중을 기했다.
현 황제는 웅장한 궁전을 짓고 세상의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강을 만들어 그곳에 뱃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불야궁을 지어 그곳에서 유흥에 빠져 국고를 낭비했다.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주연이 쉬지 않고 연달아 100일간이나 이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주연에 백성들은 병들고 굶어죽었다. 신하들이 간곡한 충언을 했지만 황제는 그것을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방탕무도한 나날이 계속되자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게 되었다.
이때, 황제가 묵산을 지나다 발견하고 황궁에 데려온 것이 이무기였던 사명천군이었다. 본디 이 나라가 설 때 못에 살던 용을 신수로 모시고 터를 만들었기에 수 세대가 지난 후 다시 나타난 이무기에 사람들은 새 희망을 갖고 세상이 바뀔 거라 기대를 했다.
백성들은 궁을 향해 절을 하며 나라의 번성과 풍요를 빌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바뀌는 것은 없었다.
백성들은 계속 거리에서 굶어죽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관리라는 자들은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백성들의 안위는 뒷전이어서 도둑들을 잡아넣을 자가 없으니, 도둑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여 화합을 하지 않으니, 나라는 점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선대가 이룬 찬란한 영광은 점점 퇴색되어갔다.
북동아는 그가 싫었다.
뱀이 오백 년을 살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또 오백 년을 살면 용이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명천군을 두고 승천을 앞둔 영물인 이무기라고 했다.
의아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사방에서 원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 되면, 귀신이 모습이 드러내고 원성이 들리며 원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백팔 수라귀들이 그의 뒤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북동아에게는 보였다.
이것이 진정 용이 될 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자신이 이런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걸 안다면 당장이라도 북청에 끌려나가 매를 맞으리라.
이런 날은 너무나도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북동아는 품 안에서 낡은 향주머니를 꺼내 움켜쥐었다. 자신이 궁에 들어올 때 할머니가 직접 수를 놓아준, 세상에 하나뿐인 향주머니였다. 힘이 들 때마다 향주머니를 꺼내 할머니를 떠올렸다.
벌써 일 년째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사명천군은 대외적으로는 민생을 위해 부를 마다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민간에서 백성들을 위로한다는 이유로 궁 밖을 떠돌았다. 그런 그를 따라다니느라 궁을 나오고 계절이 네 번이 바뀌었다. 할머니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움을 담은 물기 어린 눈동자가 서쪽 하늘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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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마을에 내려왔다.
주자서가 그렇게나 가기 싫어했던 마을에 온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온객행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를 두고 가지 못하는 온객행은 구연완에게 서찰이 왔는지 확인만 하고 바로 돌아가자고 말을 했고 주자서는 한참을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위하는데 저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주자서는 걸으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온객행의 소매를 꼬옥 쥔 채 계속 땅만 보고 걸었다. 가끔 어떤 냄새를 찾는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리기도 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온객행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서찰은 오지 않았다.
주자서의 손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잠시 힘이 빠졌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온객행의 옷을 주자서가 잡아당겼다.
'걱정돼?'
온객행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연락을 끊을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오래 서찰이 오지 않은 적은 없었어."
짧게라도 근황을 적어 보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락이 끊긴지가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럼, 그 사람한테 가보면 안 돼?“
주자서가 손가락으로 온객행과 자신을 가리켰다.
너와 내가.
온객행은 놀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주자서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그 생각까지 미치지 못했다. 거기다 설마 주자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은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둘이서 떠난다고?
커진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온객행에게 주자서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사람을 찾으러 같이 가보자.'
구연완이 지내는 곳은 여기서 꽤 멀다고 했다.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스무 번의 밤이 지나야 한다고 했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주자서는 구연완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온객행 말로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고 하지만 과거의 일들은 주자서에게 안개 낀 너머의 구름 같았다. 태어나자마자 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익숙하지 못한 세상에,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반인 반사의 두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당시 주자서는 눈을 마주치지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온객행은 예민하고 사나웠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다가오는 사람들을 해하고 다치게 했고 그 소문을 듣고 온 구연완이 그들을 거두었다. 구연완이 없었다면 두 사람은 이미 죽었을 목숨이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에 업혀가며 구연완의 이야기를 들었다. 온객행의 목소리 안에서 그에 대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어질고 좋은 사람이구나.
주자서는 멀리 떠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온객행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괜찮았다. 그곳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그가 옆에 있다면.
온객행은 주자서를 엎고 산에 오르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어느 것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듣기 좋은 그의 낮은 목소리와 일정한 흔들림에 주자서는 곧 잠이 들었다.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아챈 온객행은 그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허리를 좀 더 숙인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가 대신 맨 주자서의 천꾸러미 안에는, 그가 산에 내려올 때 집에서 들고 온 주전부리들이 가득했다.
잘그락 소리가 계속 나는 걸 보면 틈이 날 때마다 호수에서 모아둔 예쁜 돌멩이까지 들어있는 듯했다. 매번 이런 걸 챙겨 들고 다니는 그가 귀여워 온객행은 작게 웃었다.
수십 년 지냈던 곳을 떠나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온객행이 바지런히 따서 말리던 잎과 꽃들은 집 안으로 옮겼고 산짐승들이 집을 해하지 못하도록 바위들을 날라 집 주변에 둘렀다. 그리고 동물들이 기피하는 약초들을 사방에 매달았다. 사실 집이 무너져도 다시 짓는 일쯤은 고생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집에는 많은 추억이 있었다. 구연완을 만나지 못한다면 봄이 오기 전에 돌아올 것이었고 그를 만난다면 돌아오는 날이 뒤로 밀어질 것이다. 언제든 이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주자서가 글 연습을 하느라 집 벽에 가득 쓴 글자들을, 온객행이 애정 어린 손길로 가볍게 훑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자, 아슈."
온객행이 두 팔을 벌리자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있던 주자서가 일어나 그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너무나도 가볍게 온객행의 목에 매달렸고 온객행은 그의 엉덩이를 받치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메고 있는 등짐을 보고 물었다.
"무겁지 않아? 내가 들까?"
주자서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들어있는 건 간식과 수집한 돌 뿐이었다. 전혀 무겁지 않았다.
무거운 것은 전부 온객행의 등에 있다. 그리고 앞에는 자신이 매달려있었다.
'넌 내가 안 무거워?'
주자서가 그의 어깨에 글자를 쓰자 온객행이 답했다.
"넌 너무 가벼워서 한 열 명쯤 안고 있어야 무거울 것 같아."
그의 실없는 대답에 주자서가 픽- 하고 웃었다.
이 세상천지에 오직 둘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그랬다. 둘이 함께라면 놓을 것도 놓치는 것도 없다.
두 사람이 어디에 있다 한들 그곳을 잠시 빌려 몸을 뉘었을 뿐이었고, 떠나면서 되돌려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집을 쳐다본 후 발걸음을 뗐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목을 붙잡고 어깨너머로 멀어지는 집을 바라봤다. 이제는 잊고 싶지 않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겨두고 싶다. 모든 기억 속에 온객행이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소중한 기억들을 다 잊고 살았다. 과거를 떠올릴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잘 기억해야 했다.
이 집은, 추억이 가득한 온객행과 주자서 두 사람의 집이었다.
잘 있어야 해.
다시 올 거니까.
호수도 꼭 다시 갈 거니까.
그때까지 잘 있어. 안녕.
주자서는 마음속으로 새들에게도 나무들에게도 집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짙은 새벽빛 눈동자에 모든 것을 담으며 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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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비탈길에 발을 헛디딘 주자서를 온객행이 잡으며 외쳤다. 놀란 주자서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온객행을 돌아봤다. 잘못하면 경사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낙엽이 잔뜩 쌓인 산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비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미안해.’
주자서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온객행의 팔을 작게 토닥였다. 놀란 마음은 그의 든든한 팔 안에서 금세 가라앉았다.
풀리지 않는 여행의 여독이 매일 쌓여갔다. 주자서는 염치를 차려 대부분 걸었지만 조금이라도 피곤한 기색이 보이면 온객행은 주저 없이 그를 업거나 안아들었다. 그것 때문에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실랑이를 벌였다. 온객행은 티를 내지 않았으나 그 역시 피곤함을 느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거니 두 사람 몫의 짐을 들었고 주위를 살피며 주자서를 데리고 이동을 하려니 힘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저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에 가까웠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주자서는 미안한 마음이 늘어났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바위 위에 두 사람이 앉았다. 온객행은 물통을 열어 주자서에게 건네고는 그가 목을 축이고 나서 나머지 물을 마셨다. 온객행은 자신을 쳐다보는 주자서의 눈빛을 읽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직 많이 남은 거지?'
"지금까지 온 것보다 더 많이 가야 해."
'거긴 추워?'
"응. 훨씬 추워. 북쪽에 있기도 하고 이제 곧 겨울이라 더 추울 거야."
'잘 됐다. 그럼 눈을 볼 수 있겠네.'
주자서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풍쟁에 그려져있던 눈이 떠올랐다. 긴 속눈썹이 깜빡이는 움직임에 따라 팔랑거리며 움직였다.
"관록지까지는 많이 추울 거야. 다음 마을에서 좀 더 따뜻한 옷을 사자."
주자서의 목 근처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온객행이 말했다.
'응. 좋아.'
"걷다가 힘들면 업을 테니까 꼭 말해."
알았다는 뜻으로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묵을 곳을 찾을 때까지, 주자서는 고집스럽게 제 발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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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진 산속에 비탈길을 화려한 가마 하나가 오르고 있었다.
연목치는 가마꾼과 몇몇 병사들만 데리고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풀어둔 녹사들이 가리킨 곳은 지형이 험한 산의 구석이었다. 굴곡진 바위와 겹겹의 결계에 둘러싸여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였다. 결계는 복잡하기는 하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세운 순서대로 지우면 완벽하게 풀린다.
작은 기물을 이용해 만든 것을 보니 분명 인간을 피하기 위해서 친 결계일 것이다.
살짝 열린 가마의 창문 밖으로 하얀 손이 나왔다. 검지에 화려한 보석이 박힌 지갑투가 씌워져있었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검광이 번쩍였다. 검은 호피를 쓴 병사들이 빠르게 휘두르는 검 아래, 나무들이 어지럽게 베어졌다.
얼마 후 가마의 문이 열리며 연목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깨진 결계 사이로 엉망이 된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이런 곳과 어울리지 않는 팔보와 운룡의 문양이 수놓아진 푸른 가죽 신발이 쓰러진 나무들 사이를 지났다.
눈앞의 작은 집은 생김새는 어설펐지만 구석구석 손을 봤는지 깔끔했다. 물이 흐르는 곳 근처에 지어진 집은 경사가 있던 곳을 일부러 평평하게 다듬은 모양새였다. 쓸데없는 정성이라고, 연목치는 생각했다.
바위를 치우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안은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꽤 넓었다. 집 안은 짙은 꽃향이 가득했다. 벽마다 촘촘히 걸려있는 천주머니에서 나는 향이었다. 이 향은 그 둘을 만났을 때 나던 향과 비슷했다.
집 안은 눈에 띌 만한 것은 특별하게 없었다. 한 쪽에 놓인 침상, 나무를 다듬어 만든 듯한 책장과 탁자, 높이 매단 약재들과 육과들...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올 것만 같은.
연목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 안을 훑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이미 며칠째 그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때마침 그들을 찾기 시작할 때 사라진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인가.
연목치는 몸을 숙이며 집 밖으로 나가느라 손으로 짚은 벽이 온통 글자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란 글자가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새길 수 있는 곳이라면 전부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마치 글을 막 배운 어린아이가 쓴 듯 글자는 삐뚤빼뚤 서툴렀다. 순간 연목치는 줄곧 온객행의 뒤에 숨어있던, 자신의 얼굴을 핥았던 주자서를 떠올렸다.
’웃기는군.‘
사람도 아닌 것들이 그럴싸하게 사람 흉내를 내며 집을 짓고 불을 피우며 사는 모습에 연목치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분명 금방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냥감들이 제 시야에서 벗어난 불쾌감으로부터 오는 것이리라. 배 아래서부터 화가 스멀스멀 올라와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거나 손에 닿는다면 찢어발기고 싶었다.
감히.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보통 뱀들은 추워지면 체력이 떨어지며 겨울잠을 잔다. 그것은 반인 반사도 똑같다.
연목치가 부리는 뱀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들의 흔적을 쫓기가 어려워질 것이 자명했다.
“어디로 갔는지 빨리 찾아내야 한다. 시간이 없어.“
다정한 말투 속에는 가시가 숨어있었다.
지금까지 저 부드러운 말투에 수천 명의 목숨이 사라졌었다.
가마로 향하던 연목치가 갑자기 뒤를 돌아 집을 바라봤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진 후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태워라. 전부, 무엇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움직였다. 품에서 꺼낸 화촌을 돌로 내리쳐 불을 붙이더니 집 안에 던졌다. 불은 온객행이 정성스럽게 말린 화초들에 붙어 번지기 시작했다. 집 안을 가득 채웠던 꽃향기는 사라지고 곧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길은 순식간에 집 전체를 감싸며 활활 타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가 되어 흩어졌다.
객행자서
메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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