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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08:23
지금 라쳇은 다른 행성에서 온 메크들도 알정도로 뛰어난 의사지만 그가 아카데미에 있을때는 그저 내 친구일 뿐이었다. 물론 그는 내가 아무리 이기려고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최고를 달리는 학생이었고, 내가 한발 늦게 성공하는 것들도 그는 미리 척척 성공시켜버린 뒤라 난 사실 그를 많이 질투했다. 그가 한발 내딛으면 나는 열걸음을 걸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 역시도 내 실력과 능력에 자부심이 있었으므로 그를 이기려고 애써봤지만, 라쳇은 그걸 눈치채고서도 눈도 깜빡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길 질투하는 이들에게 익숙해져버린건지 그는 나름 친구의 탈을 쓴 내가 시기심과 질투를 속에 감추고 행동해도 고고함을 버리지 않았다. 난 그게 너무 싫었다. 가끔은 그가 나만큼이나 진창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랬다. 이게 친구 맞나 싶겠지만 우린 보통은 꽤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그때 프라임들이 쿠인데슨들의 습격에 사망했다는 비보가 울렸다. 행성 전체가 슬픔으로 물들었다. 매트릭스는 사라지고 에너존은 말랐으며, 세상에는 갑자기 코그가 없는 메크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마른 에너존을 채굴하기 위해 코그없는 메크들은 광산으로 끌려들어갔다. 센티넬 프라임은 자기 형제자매들을 기린다고 했지만 그는 말로는 그들을 기리는 행사라면서 레이싱 경주나 열고 자기가 매트릭스를 찾는데 실패한 날은 교묘하게도 새로운 행사나 축제등을 열어 시민들을 우롱했다. 나는 왜 이 행성이 저 거짓말하는게 뻔한 광대놈에게 넘어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택권이 없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뒤, 가장 뛰어난 메딕이었던 라쳇은 당연하게도 새로운 프라임에게 호출되었다고 했다. 센티넬 프라임에 대한 찝찝함과는 별개로 그가 당연하게 밟게될 탄탄한 성공대로를 질투했다. 하지만 겉으론 좋은 친구를 연기했다.
"축하해, 프라임에게 불려갔으면 이제 네 앞길은 창창하겠네."
"이미 안간다고 했어."
"뭐?!"
"난 코그리스 광부들쪽에서 사고가 많다고 해서 거기서 일하려고. 프라임에게 불려가면 괜히 결심 흐트러질까봐 미리 거절했어."
아, 라쳇은 그런 부류였던거다. 신념을 위해 돈과 명예정도는 버릴 수 있는 종류의 의사. 당장의 성공보단 자기가 남을 돕는게 더 중요하다고 믿는 종류의 의사들 말이다. 난 내심 그가 앞으로 성공할 일 없을거라는데 안심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게 뭘까, 질투심은 아닐텐데. 이건 자기 자신에 대한 저열함의 바닥을 본 탓일까.

센티넬 프라임은 그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학생을 호출했다. 바로 나를. 결국 라쳇이 거절해서 대신 날 불렀다는 느낌에 찝찝하기 짝이 없었으나 라쳇은 이제 겨우 광부들 돕겠다고 제일 밑바닥에서 계속 일하게 될거고, 난 앞으로 프라임을 돕는 의사가 될거다. 아카데미에서 내가 그를 실력으로 이긴 적은 없지만 앞으로 우리 사이에는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할거고 언젠가는 라쳇도 따라잡을 수 없는 실력이 되겠지. 그렇게 합리화하며 센티넬에게 불려갔을때, 그는 나에게 아직 온라인되지 않은 신생아들을 보여줬다. 코그리스가 태어나는 문제를 알아보려고 날 불렀나 싶었지만 여기 있는 신생아들중에 코그가 없는 신생아는 없어보였다.

"신생아들의 코그를 적출해."
"...무슨 말씀인지 이해 못했습니다, 프라임님."
"지금까지 나한테 협조했던 의사들은 결국 못하겠다고 해서 말이야..."

그는 방 한켠에 있는 폐기물 창고에 문을 열고 의사들의 시체를 보여주었다. 마치 쓰레기처럼 쌓인 시체의 산에는 아카데미에서 만났던 교수님들도, 먼저 졸업한 선배님들도 많이 보였다. 몇몇은 살해당한듯 했고, 몇몇은 자살한듯한 흔적이 보였다.

"자네는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할 의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아니면, 내가 자네 친구를 불러야겠나?"
"아뇨,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그는 겁에 질린 내 얼굴을 재미있어했다. 나는 납작 엎드려서 빌었다.
"그 친구는 어차피 미래가 없는 친구입니다, 제발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더 잘 할 수 있으니 다른 이들은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전부 하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도 내가 왜 널 위해 그렇게 빌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건 내가 하지 않았으면 넌 이런 것에 협조할리가 없다는 사실과, 그렇게 되면 너도 저 창고에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될거라는 사실 뿐이었다.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한 첫 수술은 푸른색과 붉은색의 도장으로 예쁘게 칠해진 갓 태어난 메크의 동체에서 코그를 적출하는 일이 되었다. 신생아들의 가슴에서 적출된 코그들은 비콘병사들을 생성하는데 쓰였고, 순식간에 장애아가 되어버린 그 메크들은 광부 말고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거라는 세뇌를 들으며 광산으로 보내졌다.



나는 센티넬 프라임의 신뢰를 받아 편한 삶을 보장받았지만 내가 코그를 적출한 광부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 코그리스 광부들을 돌보겠다고 가버린 라쳇 역시도. 계속해서 할당된 예산이 줄어서 오히려 라쳇이 의료용품을 구하기 위해 자기가 번 돈들을 털어넣고 있다고 했다. 서로 위치가 다르다보니 만나는 날도 적어졌다. 그는 밑바닥에서 제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우며 의사의 명예를 지키는 동안, 나는 위에서 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밑바닥으로 보내는 짓을 반복했다. 광산에선 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죽는 광부들은 계속해서 나왔고, 인원이 필요할때마다 난 불려가서 신생아들의 코그를 적출하는 일을 했다. 가끔은 의원들이 나와서 현장을 지켜보거나 특정 개체의 코그부터 제거하라고 명령하곤 했다. 배틀프레임으로 태어났거나, 멀쩡한 사회였다면 하이가드가 되거나 과학자가 되거나 하는 센티넬이 하는 잘못된 짓을 깨닫고 움직일 수 있는 개체들은 전부 미리 코그를 적출당하고 광산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나는 수 많은 신생아들의 가슴에서 미래를 빼앗았고, 수 많은 메크들이 미래를 빼앗긴채 광산 아래서 목숨을 잃었으며, 나는 이 행성에서 벌어진 일중에 제일 저열한 짓에 동조한 의사가 되었다.

센티넬은 오만함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런 사회가 오래 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수가 장애를 입은채 광산으로 보내지는데 이 세상을 뒤엎을 혁명이 일어나는건 필연적인 일이다. 센티넬이 집권하는 사회는 오래갈 사회가 아니었다. 나는 처음 코그를 적출하는 수술을 한 순간 그걸 눈치챘다. 사회를 유지시킬 중요한 메크들을 전부 장애아로 만들고 자기에게 거슬리는 자들은 전부 죽이는데 사회가 유지 될리가 없었다. 그런데 난 왜 협조했을까.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내가 도망가면 네가 여기 끌려올거라는 생각이 왜 날 그렇게 슬프게 만들었을까. 만일 네가 왔다면 너에겐 죽임 당하거나, 혹은 더 끔찍하게도 수 많은 생명을 구해야할 네 뛰어난 의술로 신생아들에게서 미래를 빼앗는 짓에 협조하게 되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사회가 뒤집어지는 날이 온다면 과연 코그를 빼앗긴 광부들이 목숨을 위협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해 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미래를 위해선 너 만큼은 이 더러운 짓에서 보호하고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 찾아올 나은 미래에서 넌 네가 가져 마땅한 자리에서 살기를...

하지만 내가 지금 당장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예산이 줄어들어 고역을 겪고 있는 너에게 몰래 지원금을 보내주는 일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난 어느 순간 널 만나지조차 않게 되었다. 넌 아마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 자길 더 보고싶어하지 않는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사실 널 볼 낯이 없었다. 제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계속해서 도우며 의사의 소명을 다하는 너는 그런 진창에서도 똑같이 흔들림 없었다. 동체는 점점 더러워지고 스크래치가 늘어나고, 많은 일과 적은 예산에 발버둥치느라 지쳐하면서도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흔들림 없는 눈빛을 한 네 눈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센티넬 프라임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가 한 모든 짓까지도 온 행성에 밝혀졌다는 사실과 함께. 그리고 그 부역자인 나는 당연히 처형 수순에 올랐다. 센티넬 프라임의 곁에 붙어서 그를 돕던 의사를 잊어버릴 이는 없었다.

내가 코그를 처음으로 적출했던 그 메크가 재판장에 앉아있었다. 비록 더 커지고 달라진 모습이었으나 난 내가 처음으로 코그를 빼앗았던 신생아의 모습을 잊은적이 없으므로, 난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양 옆에는 똑같이 내가 코그를 빼앗았던 메크들이 자기 코그를 되찾고 그들에게 맞는 자리에 서서 나의 업보를 똑바로 마주하게 했다. 나는 나를 죽여 마땅한 이들의 손으로 의료를 실행할 권리를 박탈당한채 감옥으로 보내졌다.


감옥에 갇히고 얼마 뒤 라쳇이 면회를 왔다. 그는 새로운 프라임의 의사가 되어 가장 큰 의료센터를 운영중이며, 드디어 그가 가져 마땅한 것들을 손에 넣은 듯 했다.
"센티넬에게 목숨이 위협당했다고 하면 처벌을 경감해줄지 몰라. 센티넬 치하에서 실력 있던 의사들이 많이 죽어서 현재 정권엔 네가 더 필요하니까..."
"내가 그럴 자격 없는거 알잖아."
"왜 재판장에서 항의도 하지 않았던거야? 자기 변호라도 했어야지..."
"모든 의사가 전부 센티넬에게 협조한것도 아니고, 난 선택권이 있었는데도 결국 협조한거야. 난 처벌을 경감받을 자격이 없어."
라쳇의 눈에서 배신감과 슬픔이 떠올랐다.
"대체 왜?"
"센티넬은 오래 갈 놈이 아니었어. 보는 시야가 좁았고 미래를 제대로 예측할 줄 몰랐지. 난 그에게 처음으로 협조하는 순간부터 센티넬이 오래가지 않을거라는 것도, 내가 끔찍한 짓을 하는 것도 알았어. 난 전부 알면서도 협조했으니 항의가 받아들여질 구석따윈 없어."
"그럼 대체 왜 협조했던건데?"

스스로 한 짓을 합리화하고 변명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수년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래야 너에겐 미래가 생길테니까."
"...파르마."
"난 수감기간이 끝난다고 해도 앞으로 영원히 다시 의료계에 들어갈 수 없겠지. 그래도 싸. 만일 그때 네가 끌려갔다면 협조하거나 협조하지 않고 죽임당하는 것 뿐이였을텐데 그렇게 되면..."

난 널 질투하고 시기했지만 동시에 네가 가장 높은 자리에서 빛나는 것을 동경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길 수는 없어도 네가 끝까지 고고함을 유지하는 걸 보고 싶었고, 널 이기고 싶었지만 네가 불합리한 방법으로 꺾이는 장면은 보고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아마 생각보다 네 고고함을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꼭 프라임께 이야기 해볼게."
라쳇의 결심이 선 눈빛이 쓰렸다.
"그러지마."
항의할 자격은 억울한 상황에서도 맞서 싸우려 애써본 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처럼 재빨리 모든 걸 내던져 버린 이에겐 그런 자격은 주어져선 안되는 것이다.

두꺼운 유리벽 사이를 놓고 갈라진 우리는 두 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친구였던 기간은 너무나도 짧고 그 뒤로 오랜 세월을 그 짧은 시간을 추억하며 되씹으며 보내는 것 밖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 안전을 위해 내 미래를 버린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라쳇이 유리벽에 손을 올리자, 나는 그 반대편에서 마치 손을 맞잡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그의 손에서부터 퍼져나올 동체의 온기를 느낄 수 있기라도 한듯이 손을 맞댔다.

"...그냥 앞으로도 계속 고집불통 의사로 살아주겠다고 약속해줘. 그거면 충분해."

때론 사랑한다는 말로는 그 마음을 다 전할 수 없는 순간도 있는 모양이다. 그냥 난 네가 너다운 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영원히 널 쫒아가고 싶어지도록, 계속해서 넌 나아가길. 그래서 언젠가 나같은 것을 완전히 떨치고, 더 높은 곳으로 가기를.







파르라쳇
2024.11.20 08: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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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일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하...이쪽도 ㅈㄴ 순애다..이 미친로봇들 왜캐 열렬하게 순애를 하는거야
[Code: d375]
2024.11.20 08:52
ㅇㅇ
모바일
첫줄 보자마자 파르마라고 생각했지만 자기를 망가뜨리면서까지 상대를 지키는 선택을 한 순애에 눈물나요 센세....
[Code: 9db8]
2024.11.20 08: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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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망가지기 전에 속죄양으로 센티넬 옆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ㅠㅠㅜㅠ
[Code: 9db8]
2024.11.20 08: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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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를 예상했지만 알기에 아침부터 죽을것같은 심정 아시나요 센세의 글에는 수많은 메크의 삶과 선택과 그만큼 수많은 사랑이 담겨있어서 볼 때마다 내가 이 글을 이렇게 쉽게 읽어도 되는게 맞나싶다 센세 사랑해
[Code: b4a3]
2024.11.20 09: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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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가 처음으로 집도한 수술의 대상이 오라이온이였고 그걸 재판장에서 한눈에 알아봤다는것도 참...
[Code: 5160]
2024.11.20 09:3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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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 로봇들의 절절한 사랑이야기 맛있다.. 이 시리즈에는 삶이 담겨있다.. 파라쳇 정말 좋아하는데 이런 식으로 보게되니까 가슴 찢어질거 같음 살기위해 택했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라쳇이 살아갈 미래 또한 생각했다는게 가슴을 정말 답답하고 괴롭게 해.....
[Code: 500c]
2024.11.20 10: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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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요즘 파르라쳇 관심 생기고 있었는데 센세 글 보고 오열 중ㅠㅠㅠㅠㅠㅠ 순애 미쳤다ㅠㅠㅠㅠㅠ
[Code: 79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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