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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20:32
1. https://hygall.com/602936301


이연화는 다가오는 겨울에 월동 준비하느라 꽤 바빴어. 장원으로 옮겨진지 - 정확히는 쫓겨난거지만 - 햇수로는 이제 1년째지만 지난 겨울에 이 곳에 왔으니 이 계정을 맞이하는건 두번째인 셈이지. 찬바람에 옷깃을 여겼지만 허약한 몸에 스며드는 한기를 막기는 역부족이었어. 작년에 챙겨놨던 솜옷을 꺼내야겠다고 아직은 좀 이른 날씨지만 한독때문에 유독 추위를 탔기에 이연화는 차가운 손에 입김을 호호 불며 생각했어.


장원에서의 생활은 확실히 왕부보다도 못했어. 먹고 입는것도 많이 못했고 필요한 물품도 늘 부족했어. 시중들 이조차 없어 혼자 모든걸 해결해야했지만 그래도 왕부에서 생활하는것보다 훨씬 더 좋았어. 황제의 명을 받아 시집와 대놓고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지위가 높고 낮은 하인이고 시종이고 심지어 수발드는 노비 조차 적국에서 온 측비에게 때때로 적개심을 보일떄가 있었어. 게다가 늘 기침을 하며 골골 거리니 무슨 전염병이라도 퍼트리는것 마냥 한창 더 눈길이 곱지 않았지. 온통 감시하고 경계하는 시선에 둘러쌓였고 정세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처지이니 이연화는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어. 불필요한 시선을 끌어 오해라도 살까 항상 조심하고 없는듯이 굴며 쥐죽은듯이 조용히 지내야만 했어. 


그러니 창살없는 감옥에서 숨도 제대로 못쉬고 살다가 몸을 요양 시켜야한다는 핑계로 장원으로 보내졌을때 사실 너무 좋았어. 여기서도 높은 담안에 갇혀있는 신세였지만 아무도 없어 되려 눈치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낡은 가옥이지만 정원은 제법 넓은 편이라 이연화는 여기에 밭을 일구기 시작했어. 방에 갇혀 창조차 한번 마음껏 열지 못하고 멍하니 시간만 보내다가 밭을 갈던 청소를 하던 밥을 짓던 뭐든 스스로 하며 하루를 보낼수 있으니 얼마나 마음 편하고 좋은지. 반쪽짜리 자유지만 눈칫밥을 먹고 꼼짝도 못하느니 지금 상황이 훨씬 더 반가웠어. 



사실은 인질이지만 명분은 측비였기에 부족하고 늦기는 해도 어쩃든 필요한 물건은 두어달에 한번씩 꾸준히 받을수 있었어. 바깥에 나갈수도 없고 없는 살림을 꾸려나가야했지만 이연화는 전에 그랬던것처럼 충분히 하루하루를 잘 살아갈수 있었어. 이연화는 내력이 팔할이나 줄어 무공도 많이 잃었지만 조금만 용을 쓴다면 사실 탈출 하는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담외에 뭔가 다른 기관도 설치되 있다면 또 다른 말이겠지만 아무튼 그럼에도 이연화는 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눈꼽만치도 하지 않았어. 자신의 목숨은 더이상 자신만의 것이 아니니까.  



아무튼 죽을날을 받아놓고 있다지만 살아있는한 이연화는 자신의 목숨이 아직은 가치가 있다는걸 알기에 하루라도 더 살아있어야 했고 기왕에 살아있어야한다면 자신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은둔했을때처럼 밭도 갈고 이런저런 요리도 시도해 보고 청소도 빼먹지 않고 부지런히 하며 살아갔어.


그리고 완전히 혼자는 아니지. 이 털짐승은 당최 어떻게 들어왔는지 어느순간 이연화와 한집 살림을 하지 뭐야. 빈틈 하나 없는 높다랗고 두터운 담인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하루는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요 맹랑한 녀석이 자신의 소중한 무밭을 파헤치고 있지 뭐야. 처음엔 털색깔때문에 새끼여우인줄 알았는데 흙투성이 범벅인 것을 끌어내니 까만눈이 초롱초롱한 강아지였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살아있는 생명을 곁에 끼고 있고 싶지 않아 모른척 무시했는데 꼬리를 살랑살랑이며 곁에 다가오니 그러다 밥도 챙겨주고 발라당 누울때 배도 긁어주고 하다보니 같이 살고 있게 되더라. 



결국엔 불여우란 이름을 붙여주고 정을 붙이게 됬어. 팔랑팔랑 날아가는 나비 쫓느라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한껏 잔소리를 퍼부어도 알듯 말듯 고개를 갸웃거리는것에 그만 웃음이 터질때면 적막한 삶에 한번이라도 웃을수 있어 그 또한 좋았어. 불여우란 명패까지 단 개집을 지어줬지만 불여우는 늘 이연화 발치에서 잤고 날이 추우면 같이 붙어자기도 했어.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따뜻한 온기가 품에 안길때마다 이연화는 어쩐지 위안이 되기도 했어.



밤새 내내 기침에 시달려 잘 자지 못할때도 많고 벽차지독이 발작하면 이렇다할 약도 없어 그저 몸을 웅크리고 견디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매일을 하루종일 부지런히 청소하고 농사 짓고 밥 해먹고 불여우랑 놀기도 하고 한바탕 바지런 떨고 나면 어느새 높은 담장 너머로 금빛의 달이 두둥실 떠올라. 싸구려 찻잎이지만 따스하게 우린 차를 마시며 어둠속에서 빛을 차르르 흩뿌리는 달을 보고있노라면 그저 오늘도 평온한 삶을 누렸노라 조용히 하루를 마감했어. 


**


이연화는 아린손을 참으며 빨래를 했어. 땔나무가 부족하다보니 찬물로 할수밖에 없었거든. 아직은 가을이지만 낙엽이 스산하게 떨어지니 겨울도 곧 들이닥칠거야. 아무래도 또 동상에 걸릴것 같은데 자기전에 따뜻한 물로 좀 찜질해봐야겠다. 계속 물질을 해야하는지라 작년에 꽤 고생해서 이연화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빨래의 물기를 짰어. 작년에 솜을 틀어엏은 겨울옷을 잘 아껴입어서 이렇게 잘 빨고 손질만 해놓으면 금년에도 잘 버틸수 있을 있겠지. 겨울 날 준비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불여우가 드물게 왕왕 짖고있어 좀 시끄러웠어. 어디 또 날개 다친 새라도 떨어졌나?


빨래 바구니를 들고 일어나다 이연화는 불여우가 짖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버렸어. 이 곳에 발을 들리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어. 물건을 가져다줘도 문간에 둘뿐이지. 꽉 잠긴 대문이 잠시 열릴때는 그 뿐이었는데 그 대문이 열릴때도 아닌데 열려있으며 거기에 장신의 사내가 한명 서 있는데다가 그 사람이 단 한번 생각조차 못해본 사람이었어.


단촐하지만 귀한 신분임을 단번에 알수 있는 차림새에 탄탄한 몸과 꽃꽃한 자세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장도.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수 있을것 같은 압도적인 분위기. 전장에서 자주 봤던 이를 여기서 보니 약간 현실감이 없는것 같았어. 이런 존재는 단 한명뿐이지. 


왠지 그를 한번쯤은 볼거라고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것 같아. 놀랍기는 해도 당황스럽지는 않았어. 이연화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어. 


-신첩 이연화가 왕야를 뵙습니다.


적비성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굳었어.



연화루 비성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