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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7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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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ㅈㅈㅇ















그 뒤로 아이는 더 뻔질나게 찾아오곤 했음. 제 얘기며 형 누나라는 사람들 이야기를 조잘거리기도 하고 주변 상인들 소문을 들려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루키랑 뛰어나가고는 했지. 그런 모습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라, 알렉스는 주전부리를 나눠주기도 하고 루키랑 아이가 노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음.



이건 아이가 좋아할 만한 파이네.
문득 든 생각에 알렉스는 일부러 파이를 남겨두었다가 다음날 찾아온 아이에게 나눠주었어. 하지만 파이를 받아 든 아이는 예상보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 딱히 취향이 아니었나. 괜히 멋쩍어서 아이가 먹는 걸 살펴보니, 평소보다 유달리 말수가 적은 기분이야. 기분이 안 좋은가. 슬쩍 보니, 볼이 울긋불긋하고 숨도 쌕쌕대고 있었음.
영락없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지. 속으로 쯧 혀를 차며 스윽 손을 이마에 올려보았어. 아이가 움찔했지. 하지만 알렉스는 손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더 신경이 쓰였음.


"몸도 안 좋은데 왜 왔어."

걱정 섞인 타박에도 아이는 말이 없었지.







혹시나 약이 있는지 집안을 뒤져보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음. 남자 혼자 사는 집인 데다, 여름 한철만 머문다고 그럴싸한 상비약조차 갖춰놓질 않았어. 자신의 허술함에 혀를 찼지. 아픈 애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 한참 뒤적거리다, 가정부가 직접 만들어 놓았다는 레몬차를 발견했지. 그땐 필요 없는데 굳이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궁여지책으로 따뜻한 레몬차를 끓여 내놓았음.

"이거라도 마셔."



고개를 꾸벅하는 게 감사 인사를 하는 건가봐. 따뜻한 잔을 두 손 꼭 쥐고 찬찬히 마시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평소보다 영 맥이 없어 보였어.





"오늘은 일찍 가서 좀 쉬어."
"안 돼요.. 일 해야 돼요..."
"...하루 쉰다고 큰일 안 나. 그냥 쉬어."
"큰일 나요... 하루 쉬면 제 앞에 빚을 얼마나 더 달아 놓는지 알아요? 절대 못 쉬어요..."


목이 부었는지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오면서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모습이 영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 그런데 알렉스라고 딱히 말릴 재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어. 루키도 조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아는지, 옆에 얌전히 앉아 얼굴만 부빌 뿐이야. 루키의 애교가 마음에 드는지 아이는 먹던 빵을 루키에게 나눠주며 히히 웃지. 그러더니 루키가 따뜻하다며 루키를 안고 가만히 늘어져 있었어. 여전히 볼이 발갛지만, 웃는 얼굴을 보니 알렉스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어. 레몬차와 간식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는지, 아이는 루키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한참 손장난을 치다가 해질녘에 돌아갔음.










아파서 골골대던 아이가 눈에 밟힌 걸까. 평소보다 맘이 싱숭생숭하고 생각이 많아져서 쉽사리 잠자리에 들 수 없었음. 본가의 공사가 어찌 되고 있는지 뻔히 다 알면서도, 괜히 서재에서 서류를 뒤적이다가 늦게나마 잠자리로 향했어.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눈을 붙이려 애를 써도 오래지 않아 눈이 떠졌지. 새벽녘에 떠진 눈은 쉽사리 잠에 들지 않았음. 멀리서 동이 터 오는 게 보였어.


오늘 잠은 다 잤군. 혀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지. 아침 커피를 내리려고 부엌으로 향하는데, 루키가 현관 앞에 가만히 앉아 있더라고.



"루키. 거기서 뭐 해."

주인의 목소리에 루키가 귀를 쫑긋하며 반응했음. 신나 하며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어달라고 애교를 부리지. 꼬리를 흔드는 게 퍽 귀여워서 잠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났어.

"벌써 나가고 싶어?"







루키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지만, 정작 문을 열고서 알렉스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어.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야.



"너..."





알렉스를 올려다 본 아이는 어제보다 훨씬 붉어진 얼굴로 숨만 몰아쉬고 있었어. 차마 제가 왔다고 알릴 생각도 못했는지, 현관 앞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쪼그려 앉아 있잖아.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어.

"아픈 애가 왜 이러고 있어...!"


얼마나 오래 앉아 있던 건지 몸이 얼음장같이 차가웠음.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지. 끌어당기는 손길에 비틀거리면서 따라 들어오는 게, 아무래도 무리한 거 같았어.





밝은 불빛 아래서 본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음. 얼굴이며 목까지 열꽃이 붉게 오르고, 입가도 다 터져서 피를 보이지. 피곤 때문이라 치부하기엔 아무래도 손찌검을 당한 것 같은 모양새야. 심지어 얼굴과 팔엔 할퀸 자국이며 손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었어.

거실 불빛 아래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몰골을 보니 도저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알렉스는 입술을 깨물고 방안에서 담요를 꺼내왔을 거야.





"그 꼴로 기어코 일을 했어."



말하면서도 이게 걱정 섞인 염려인지, 비아냥인지 알렉스 본인도 모르겠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속없이 대답해.

"말했잖아요, 쉬면 빚이 또 엄청나게 는다니까요."







다 큰 어른인데도 아이 앞에서는 자꾸 할 말을 잃게 되는 자신에게 화가 나. 적막을 깨기 위해서 뭐라도 말을 꺼낼 뿐이었음.

"그럼, 일 마쳤으면 그냥 쉬지. 왜 또 왔어."

아이가 얌전히 앉아서 눈치를 보는 게 속이 쓰려서, 낮에 꺼냈던 레몬차를 다시 건넸을 거야.

"대체... 그렇게 빚 다 갚아서 대체 뭘 하려고."



"....음,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이는 차를 홀짝거리며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지. 사실 딱히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어서, 알렉스도 말을 삼키며 찬 수건을 적셔왔음. 마시던 차가 바닥을 드러낼 무렵, 아이가 말을 꺼냈지.





"어디론가.. 가고 싶어요."
"어디로."
"음... 밝고 탁 트인 곳? 지금 사는 덴 창도 손바닥만 하고... 너무 답답해요."







알렉스도 이제는 쥐어짜 낼 말이 없었음. 알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지. 다 마신 잔을 치우고 수건을 이마에 얹어주고. 그러고 나서도 아이가 눈에 밟혀 괜히 자리를 서성이다, 좀 쉬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뒤돌았지. 그런데 예기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어.





"사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을 거 같아요."

등 뒤에서 나릿하게 답변하는 목소리는 여태까지 아이한테서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어. 지친 기색이 완연한 소리.



처음으로 아이의 속내를 마주한 기분이야. 어떤 방식으로 위로를 꺼내야 할지 몰라서, 아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수많은 이유로 그저 입을 닫은 채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거실을 나왔어.












알슼조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