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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7 17:07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 않는 게 매버릭 인생에 딱 하나 있었다면 바로 그건 아이스맨이었다. 연애를 하기 전부터 은근히 유혹하던 아이스맨을 밀고 밀어댔으나 그걸 들이밀고 들어와 붙잡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일이년이면 헤어지겠거니 했던 매버릭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마냥 5년차쯤에 프로포즈를 한 것도 그였고, 프로포즈를 거부하겠답시고 저 멀리 밀어낸 걸 결국 혼인신고서류에 도장찍게 한 것도 그 사람이었다.

매버릭 인생에서 가장 뿌리깊게 박힌 그 남자.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완벽했던, 아니 완벽한 사람.
해사 출신, 그 중에서도 파일럿.
정석적인 비행으로 온갖 전쟁에 승리를 이끌어 온 주인공.
그의 앞에 깔린 비단길이 당연한, 여전히 장래가 촉망받는 남자.


그런 그의 곁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프로포즈받을 쯤엔 어느 상원의원이 카잔스키 중령을 사위로 맞이하고 싶어한다는 소문이었고, 신혼 초엔 카잔스키 대령이 결혼을 후회하고 몇년 있다가 재혼시장의 매물로 나올 거란 이야기였고, 지금은...


"제독에게 흠결이 없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뭐, 이런 말들. 매버릭은 스스로 꽤 낯짝이 두꺼워졌다고 생각해왔으나 이번 말을 듣곤 표정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저런 말들을 듣고 태연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매버릭이 떨리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놓으려 애썼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걸 그의 눈 앞 모든 이들은 알 수 있었다. 하하호호,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댔고 쨍그랑 울리는 와인잔 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매버릭은 매너있는 사람마냥 잠시 바람을 쐬겠다는 말을 겨우 남기고 가빠오는 숨을 삼킨 채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 전체를 감싼 매버릭은 쭈그려 앉은 채로 아주 조금, 작은 눈물 방울을 흘렸다.


-


"제독님, 아까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급해서요."
"뭐지?"
"미첼 중령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비행장에 있을 시간일텐데."
"할 말이 있으시답니다. 런던 쪽과 회의중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됐네, 들여보내."



왔어?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매버릭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넌 내가 뭐가 그렇게 좋아?



"회의 있다는데 미안. 근데 지금 하고 싶어서."
"뭘 하셔야 할까? 집에서 해도 되는 얘기일 거 같은데."
"아, 집. 집에 관한 얘기기도 해."
"집? 내가 모르는 일이 있나?"
"아이스."
"응?"
"이거, 내 건 도장 찍었어."



한 장의 종이가 나풀, 나풀, 제독의 집무실 책상 위로 떨어졌다. 이혼합의서. 제일 위에 써있는 글자 조합이 이,혼, 합, 의, 서. 라는 게 맞다는 건가? 아이스가 미간을 찌푸리고 종이를 한 쪽으로 밀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네 '무슨 일'이야."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은데."
"합의 안 할거면 소송할 수 밖에 없어."
"피트, 내가 너 이번 테스트 파일럿 관련 미션 보류해서 그래? 2년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그거 곧..."
"그딴 거 아니야. 우리 이제 그만 하자. 그럴 때야."
"우리 사이에 그만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있었나, 중령?"



쨍그랑, 제독이 바닥으로 집어 던진 유리잔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큰 소리에 집무실로 들어온 비서들 앞에서도 매버릭은 준비해온 말을 이었다.



"모든 관계엔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있어, 카잔스키."
"그러면 하나 묻자. 무슨 귀책사유로 소송할건데?"
"변호사가..."
"부정행위? 내가 너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온 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 거니 아닐테고. 경제력 부족? 이라기엔 내가 돈을 너무 잘 벌어왔고. 아니면 가정폭력? 내가 너한테 손 올린 적이 있긴 한가? 다른 새끼들한테 손댄 것도 적은 내가? 피트, 애초에 이런 소송은 나에게 무의미한 거 알지?"



냉정하게 말하던 아이스맨은 말을 마치며 매버릭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거친 호흡, 그리고 꽉 쥔 주먹까지. 무슨 이유일진 모르지만 저렇게 반응하는데엔 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비서에게 뒷조사를 하라는 명령을 손짓 한 번에 끝내고 난 뒤 매버릭에겐 세상 다정히 웃음을 지어보였다. 제독의 눈엔 사랑이, 중령의 눈엔 발악이 비쳐보였다.




아이스매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