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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1 15:17
원작 날조 주의
빻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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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는 놀랍도록 쿠로사와와 닮았다. 마음만 먹으면 그의 흉내를 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사실을 알고 난 후 약혼자의 얼굴을 마주하기 좀 껄끄러워서 그렇지. 쿠로사와의 ‘그 명령’은 문제없이 이행되었다. 타니에겐 약간의 미안함만 남았다.

‘난 바로 아다치에게 갈 거야.’

다른 알파에게 마킹당한 약혼자는 당연히 쫓겨났다. 그는 끝까지 쿠로사와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어른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신혼집도 바로 처리되었고. 예약한 드레스도 취소했다. 타니는 빠르게 진행되는 일들이 오히려 기분 나빴다. 그러면서도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거대한 계획은 실행도 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 쿠로사와는 말한 대로 삼 일 뒤. 새 약혼자를 데려왔다.

‘아다치 키요시라고 합니다…….’

잔뜩 겁이 든 하얀 얼굴. 타니는 그때 구석에 서서 아다치를 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왜 그런 미친 짓을 벌였는지 알겠군.’

그 말은 타니가 의식하기도 전에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아쉽게도 쿠로사와의 연극에서 타니의 역할은 끝났다. 다시 정의로운 경찰이 될 시간이었다. 그러다 쿠로사와가 부르면 집안의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는 심부름을 조금 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타니는 가끔 호텔 뒤편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아다치를 떠올렸다. 그게. 뭐랄까. 다시 그 순간으로 타임 워프한 기분이랄까? 타니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살았다. 쿠로사와에게 다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오랜만이에요. 형수님.”

아다치는 한 번 더 타니를 맞이했다. 그 전엔 두려움이 가득해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단 일주일 만에 표정이 우울해졌다. 쿠로사와는 목적을 분명히 이루는 사람이다. 아다치의 마음을 상냥하게 꺾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형이 사줬어요?”

타니가 테이블 위에 있는 게임기를 가리켰다. 아다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형은 오늘 늦게 들어올 거예요. 들으셨죠?”
“네에…….”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

타니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다. 아다치도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가 차를 끓였다. 진한 차향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타니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자꾸 식욕을 자극하는 게, 입에 가득 머금고 삼키고 싶어졌다.

“몸은 좀 어때요?”
“아. 괜찮아요. 혹시 안 좋아 보여요?”
“그건 아니고요.”

얼굴이 죽을상이니 물어본 것뿐이었다. 타니는 아직 덜 식은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니 차향이 뱃속을 가득 채웠다.

“지낼 만해요?”

정말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아다치가 지낼 만할 리가 없었다. 납치당하듯 끌려와 갑작스런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기분이 괜찮다면 그것도 이상했다. 타니는 정말 지낼 만 한지를 물어본 게 아니었다. 얼른 이곳에 마음을 붙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한 것이었다. 아다치는 뜨거워진 찻잔을 매만졌다.

“여긴 어떤 곳이에요?”

아다치의 질문은 바늘처럼 타니에게 꽂혔다. 대답이 아닌 질문이 들어올 줄은 예상 못 한 타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다치를 살폈다. 그 표정이 쿠로사와와 똑같다는 걸 아다치는 보지 못했다. 아다치는 곧 푸스스 웃어버렸다.

“미안해요. 질문이 이상했어요.”

눈치 빠른 타니는 질문의 뜻을 알아차렸다. 아다치는 정말 ‘여기’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외부인의 시선은 참 오랜만이라 타니는 흥미가 생겼다.

“아버지는 권력욕이 심하고. 어머니는 그냥 꽃 같은 존재예요. 곱고. 저한테도 친절하시고.”

쿠로사와 집안은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해맑고. 아름답고. 꽃처럼 조용하고. 타니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그런 모습에 반해 타니의 엄마를 만나기 시작했다. 강하고.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 아무리 꺾으려 해도 꺾이지 않는 단단한 사람. 타니는 아다치의 동그란 머리를 시선으로 훑었다. 아다치는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꽃도 아니고. 강한 사람도 아닌…….

“그럴 것 같아요.”

타니는 안개처럼 희미한 감정을 파헤치다 아다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아다치는 여전히 찻잔을 매만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타니는 조용히 아다치에게 집중했다.

“타니씨는 붙임성이 좋으시니까…….”
“하.”

전혀 조합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비소가 섞인 코웃음이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아다치는 토끼처럼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타니의 생각이 맞았다. 아다치는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타니에게 붙임성이 좋다고 말하는 저런 입은…….

“날 언제 봤다고…….”
“아, 죄송, 죄송해요. 멋대로 말해서.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아다치는 손에서 찻잔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타니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아다치를 비아냥댈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아다치에게 전화가 걸려와 변명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아다치는 과하게 타니의 눈치를 봤다. 타니는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아다치는 조심히 서재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방음이 잘 되는 벽이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목소리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위험해……. 아니. 그건……. 알겠……. 갈게…….”

간다니. 어딜? 타니는 또 한쪽 눈썹를 스윽 올렸다. 쿠로사와가 좋아할 말은 아니었다. 아다치는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다시 소파에 앉았다. 거짓이 참 서툰 사람이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전화가 와서요.”
“누구예요?”

아다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냥 친구요. 고향 친구.”

원래대로라면 쿠로사와에게 알려야 할 내용이었다. 타니는 방금 한 코웃음을 사과하는 대신 아다치가 누구과 연락했는지 눈감아주기로 했다. 쿠로사와 집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다치가 숨 쉴 구멍은 있어야 하니까. 타니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가업을 물려받은 쿠로사와가 얼마나 바쁜지. 이 도시가 얼마나 치안이 좋지 않은 지. 날씨가 가장 추울 때 눈이 얼마나 쌓이는지. 아다치는 두 눈을 깜빡이며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오히려 점점 시선을 피하는 건 타니쪽이었다.

회사가 바쁘다는 건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다. 쿠로사와는 꽤 늦은 시간에 돌아왔다. 역할이 끝난 타니는 집으로 돌아갔다. 불빛이 반짝이는 거리를 운전하는 동안 아다치와 나눴던 대화나 차향을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아다치가 어떤 류의 사람인지 깨달았다.

“들풀이었네.”

그냥 아무렇게나 자란 들풀. 가끔 작은 꽃을 피우긴 해도 화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는 사람. 타니는 아다치가 그렇게 보였다. 앞으로 어떤 고생길이 열릴 지 잘 아는 타니는 아다치가 조금 더 불쌍해졌다. 시간은 아무렇게나 흘러갔다. 결혼식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니 집안도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꽤나 바쁠 텐데도 쿠로사와는 타니를 따로 부르거나 귀찮게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아다치가 말을 잘 듣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게 아다치에게도 좋을 것이다.

- 자료 보내니까
- 오늘 밤이 넘어가기 전까지
- 집에 데려다 놔.

그러니 쿠로사와의 ‘부탁’이 아다치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쿠로사와는 시간. 장소. 사진. 짧은 ‘부탁’만 보냈다. 특이한 이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타니는 사진 속 남자를 저급한 기사나 쓰는 기자라고 지레짐작했다. 최근 쿠로사와 유이치의 파혼. 그리고 새 약혼자를 향한 기사가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더러운 유머도 있었는데, 아다치를 향한 도 넘은 추측도 많았다. 타니는 귀찮은 일을 떠맡겼다며 중얼거린 뒤 시간 맞춰 출발했다.

- 다 죽이진 말고
- 반만 죽여.
- 이왕이면 얼굴을 때리고.

쿠로사와가 메시지를 더 보냈다. 이렇게 구체적인 명령은 오랜만이었다. 절제된 문장 안엔 꾹꾹 눌러 담은 분노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타니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몇 번이고 곱씹다가, 이런 일은 빨리 끝내버리는 게 좋겠다 싶어 서둘렀다. 남자는 일찍이 쿠로사와가 보내준 장소 근처에 있었다. 타니는 경찰 배지를 찾아 들었다. 남자는 당당했다. 경찰이 자신에게 무슨 볼일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타니는 소극적으로 반항하는 남자를 몇 대 때린 뒤 차에 태웠다. 얼굴이 좀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만. 다리가 부러진 안경을 주머니에 넣은 남자가 말했다.

“당신. 그 사람을 닮았군.”
“조용히 해. 얌전하게 굴면 금방 끝날 테니까.”
“혹시 아다치를 알아?”

타니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남자는 흐르는 코피를 아무렇게나 닦고 있었다.

“너, 뭐……. 정체가 뭐야?”
“아다치 키요시의 친구야. 아다치는 괜찮은가?”

신호등이 파란불이 되었는데도 타니는 출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경적이 울렸다. 타니는 매섭게 차를 몰았다. 도시의 불빛이 너무 화려해서 타니의 머릿속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남자의 이름은 츠게 마사토. 아다치의 고향 친구로 아다치를 구하러 왔다고 했다. 그때 타니가 모른척했던 전화 통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타니는 쿠로사와의 집 앞에 도착했는데도 문을 열지 못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쏟아졌다. 츠게는 당장 아다치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타니는 쿠로사와에게 전화를 걸었다. 쿠로사와는 냉랭하기만 했다.

- 데리고 올라와.
“형수는?”
- 같이 있어.
“미쳤어? 이 꼴을 보여주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 그럼, 뭐 때문에 이랬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나한테는 말했어야지. 나도 속이고, 형수도 속이는……!”
- 속여?

말에 온도가 있다면 타니의 귀는 얼어붙었을 것이다. 타니는 자신도 모르게 쿠로사와의 집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 사실을 알았으면 거절했을 부탁인가?
“미친놈.”
- 너도 똑같아. 데리고 올라오기나 해. 안 그러면 정말 큰일 나니까.

쿠로사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타니는 쉴 새 없이 욕을 중얼거리다 츠게를 데리고 쿠로사와의 집으로 향했다. 집은 엉망이었다. 게임기는 망가져 있고. 아다치는 거실에 앉아 울고 있었다. 츠게는 아다치를 발견하자마자 달려 나갔다. 쿠로사와는 그런 둘을 차갑게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타니가 물어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츠게는 아다치의 얼굴을 감싼 뒤 걱정스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쿠로사와가 츠게의 어깨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결혼을 앞둔 신부입니다. 그런 접촉은 삼가시는 게 좋겠네요.”
“너 이 자식. 잘도 그런 말을! 억지로 데려간 거잖아!”
“설마요. 그렇지, 키요?”

아다치는 숨넘어갈 정도로 울고 있어서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워 보였다. 보다 못한 타니가 세 사람에게 다가갔는데, 아다치는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츠게를 감싸안았다.

“미, 미안해. 미안. 미안해. 유이치. 내가 잘, 잘못했어.”
“키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츠게가 잘못 알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타니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 자리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아다치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타니씨는 붙임성이 좋으시니까…….’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을 했던 아다치가.

“츠게. 미안해. 다시 도, 돌아가 줘. 우린 결혼……. 약속했으니까. 으응.”
“아다치. 정신 차리고 똑바로 말해. 돌아가고 싶다고 했잖아.”

아다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타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쿠로사와는 그런 타니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날 밝자마자 바로 아다치의 여권. 신분증부터 막아.”

아다치는 우느라 정신없고. 츠게는 그런 아다치를 달래느라 혼이 나가 있었다. 쿠로사와의 무시무시한 말을 들은 사람은 타니밖에 없었다. 쿠로사와다운 처사에 타니는 이를 갈았다. 쿠로사와의 표정은 당당했다. 지금 이 끔찍한 상황이 정답이라는 듯이.

한밤중에 일어난 끔찍한 헤프닝은 찝찝하게 끝났다. 츠게는 아다치에게 괜찮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받아낸 뒤에 집을 나섰다. 타니는 츠게를 머물고 있는 호텔로 직접 데려다주었다. 츠게는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호텔을 가지고 있는 회사 대표가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다. 추적은 금방이다. 타니가 제일 잘 하는 것이니까.

“돌아가면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야.”

차가 호텔 주차장에 멈추고 나서야 츠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 역시 타니가 예상할 수 있는 말이었다. 타니는 눈을 질근 감았다.

”호텔에서 짐이나 빼. 내일 당장 여기 떠.”
“아다치가 괜찮은지 확인을…….”
“너 때문에 형수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니까. 뒷말은 삼킨 타니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츠게가 타니의 멱살을 잡았다.

“아다치에게도 자유 의지가 있어.”
“의지 따위가 아니야. 여권. 신분증. 다 막힐 거라고. 형수 혼자서 기차표도 못 사는 거야.”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폭력이야.”
“네가 설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져. 내가 알아서 하니까, 이것 좀 놓으라고!”

쿠로사와의 집착은 생각보다 더 강했다. 타니는 아무 계획도 없으면서 츠게의 손을 털어냈다. 츠게는 휴대폰을 꺼내 타니에게 쥐여 주었다.

“네 번호라도 줘.”
“알아서 뭐 하게?”
“아다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줘.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타니에게 그럴 의무는 없다. 무시해도 되는 부탁이었다. 그런데도 타니는 츠게에게 자기 번호를 주었다. 그건 약속과 같았다. 아다치를 위험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 츠게는 그게 진짜 번호인지 확인한 뒤 어떤 인사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기 전 들어온 찬바람이 타니의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타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쿠로사와 집안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면서 오늘만큼 기분이 더러운 날이 없었다.










쿠로아다 타니아다 마치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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