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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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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덥다. -그래, 그래.”
방다병은 발굽을 차며 재촉하는 말들에게 물을 먹여주며, 햇빛에 뜨끈해진 목덜미를 두들겼음.
해를 가리고 멀리 바라보니 숲에 가려 마을은 보이지 않아도 인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음.
“멀지 않았는데, 왜 멈추는 건가?”
딱히 시비조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방다병이 째릿 흘겨보았음.
“인정머리 없기는. 말이 힘들어하는거 안 보여?”
적비성이 외면해버리자, 이때다 싶었는지 방다병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따박거렸음.
“맘에 안들면 돌아가! 애초에 너는 왜 따라온 거야?”
“너를 따라가는 게 아니니까 신경 꺼라.”
“같이 가는 거면 너도 뭔가 돕든지!”
이연화는 멀찍이 떨어진 그늘에서 차를 마시며 티격태격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음.
얼마 전. 이연화가 답답해 하는 것 같자, 방다병이 인근의 도시로 휴양이라도 가자고 제의하여 오랜만에 연화루가 움직이기 시작했음.
다만 이연화의 우려대로, 근래 연화루에서 꿈쩍도 않고 있는 적비성과 방다병이 사사건건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쟁글거렸음. 
이연화가 몸져 누웠을 때에는 신기할 정도로 협력을 잘 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현재는 방다병이 부지런히 애를 쓰는 일에 적비성은 손끝 하나도 까닥하지 않고 있었고, 성을 내는 방다병에게 네가 없을 때 적비성이 얼마나 세심하게 돌봐주었는지 설명해봐야 믿을 것 같지도 않아서 손을 놓고 구경만 하는 참이었지. 
그러면서 이연화는 살짝 즐거워지는 기분을 시큰둥한 얼굴 한편에 숨겼음.
그들과 갓 만났을 때에는 마음이 무겁고 성가시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어느새 그들 하나, 혹은 둘이 있는 정경이 포근함을 넘어서서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어서. 어느 날에는 적비성조차 떠나고 홀로 남겨졌을 때 달을 보고 앉아 있다가 쓸쓸하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어.
“적맹주, 심술부리지 마.”
마침 안으로 들어오는 적비성을 보고, 방다병이 아직 말을 먹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연화가 슬쩍 경고했음.
그러나 듣지도 않는 듯 적비성은 거침없이 탁자를 짚으며 타박을 주는 이연화에게 몸을 굽혔음.
할말이 많은 듯 무방비하게 벌려져 있던 입술을 덮고 혀를 내어 핥아올리자 허를 찔린 이연화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음.
이연화가 재빠르게 물러나며 반사적으로 바깥에 시선을 던지자, 방다병은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 있겠지.
그 사이 적비성은 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이연화의 찻잔을 집어서 마시고 있었음.
“...아비! 조심하기로 했잖아!”
이연화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적비성이 뻔뻔하게 빈 찻잔을 내밀며 말했음.
“찻잔을 집으려다 스친 거다.”
“!!!!”
네가 어린애야!!!
이연화가 금방이라도 물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쏘아보기만 하자, 적비성이 스스로 잔을 채우며 내뱉았음.
“쓸데없이 긴장하지 마라. 저런 애송이한테 들킬 것 같나?”
“무시하지 마. 요즘 방소보가 많이 예민해졌다고.”  
“흥.”
이연화가 음인이 되고 몸이 회복이 되자 방다병은 아주 철저하게 내외를 했음. 
그래서 밤이 되면 이연화는 2층에서 혼자 잠을 잤어. 
적비성이 밤마다 덮치던 걸 생각하면, 그것도 방다병과 좁은 1층에 함께 구겨져 있어야 하는 상황을 얼마나 못마땅해하고 있을지 알만했지.
그런데도 적비성이 이연화와 어떻게 될 거라는 생각만은 절대로 못 하는 것이 방다병다운 건지, 아니면 적비성을 그야말로 적비성답게 보고 있는 것이라 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음.
하긴 이연화도 제가 음인이 됐다고 해서 적맹주가 그토록 몸이 동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내 몸이 그렇게 좋은가?”
이연화가 느슨하게 뺨을 고이고 던진 질문에 적비성이 매우 드물게도 크흡, 소리를 내며 찻물을 튀기자, 이연화는 다소나마 재미있게 느끼며 그간의 분풀이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음.
이번에는 적비성이 험상궂은 눈빛으로 이연화를 노려보았고, 이연화는 그답게 능글한 표정으로 구슬리듯 하는 미소를 지었음.


느긋하게 말-연화루-을 몰아 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지고 있었음.
이 곳에 오기 전에 꽤 상세하게 알아보았는지, 방다병이 지목한 여관은 연화루를 통째로 대어 놔도 될 정도로 규모가 컸음.
“방소보, 나는 늙은이처럼 관절이 녹슨게 아니라고.”
이 곳의 온천이 매우 효험이 좋다는 말에, 이연화는 타박을 주면서도 기분 좋게 온천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음.
방이 아니라 커다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렸는지 거처는 양인과 음인이 함께 머물러도 좋을 정도로 방이 넘쳐났고 시원하게 트인 거실과 정원까지 딸려 있었음. 
무척이나 호화롭고 좋기야 하지만, 이녀석 요즘 돈을 물쓰듯 쓰는구나. 싶은 이연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둘러보았음. 한때 쪼들리던 기억이 사무친 건지 원. 돈도 돈이지만, 한참 청춘일 사내녀석의 시간을 자꾸 저에게다 낭비하는게 편치 않았어.
그런데 그런 감정이 하늘에 닿기라도 했는지 시장에 나갔던 방다병이 사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음.


세 사람은 대청마루에 상을 차리게 하고 둘러앉았음.
방다병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지쳤는지, 적비성도 귀찮은 일을 가져왔느니 하고 꼬집는 일 없이 조용히 팔짱을 끼고 듣고 있었음.
방소보는 근래에 갑자기 크게 이름을 알리게 됐어. 그래서인지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를 알아본 사람이 곧장 마을의 유지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고, 그 주인이 부랴부랴 방다병을 찾아왔음.
“살인사건...?”
“안 그래도 백천원에 수사를 요청하려고 했었대. 그런 김에 내가 보이니까...”
방다병이 흘끔 이연화의 눈치를 보더니 얼른 말을 덧붙였음.
“거절해도 괜찮아. 대단한 사건인 것 같지도 않으니까, 하려던 대로 백천원에 청하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올 거야.”
“그래도 되겠어? 우연히 만났다 해도 너에게 청한 거고, 너 역시 백천원의  사람인데. 책임을 전가하는 행동을 하면 안되지.”
“그건 그래도...”
이연화는 말끝을 흐리는 방다병을 보다가 피식 웃었음.
벽차지독을 해독하기 전이나 후나, 방다병은 이연화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며 강호를 누비고 다니기를 무척 바랬지. 
하지만 벽차지독을 해독하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그런 얘기를 통 하지 않았어.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라, 다시 한번 고생을 하고 앓다 나은 이연화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었지.
그리고 이연화는 그 순진한 속을 잘 꿰뚫어보고 있었음.
그래, 하나뿐인 제자가 아닌가.
그러니까 그만한 어리광쯤은 받아줄 수도 있지.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다함께 가보자.”
“그럴까?”
이연화의 말에 방다병의 얼굴이 환해지자, 반대로 적비성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음.
그날 밤.
이연화는 오늘이야말로 적비성이 쳐들어올거라고 예상했어.
연화루처럼 얇은 마루 한 장으로 나뉜 방도 아니거니와, 벌써 며칠이나 방다병과 함께하며 매일 그의 인내심이 깎여나가는 양상이 그림처럼 잘 보였거든.
갑자기 자다 깨서 놀라는 건 사양이라 이연화는 깬 채로 기다렸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밤만 고요하게 깊어갔음.
은근히 놀라웠음.
일방적으로 너혼자 지껄인 소리지 약속따윈 한 적이 없다느니 하며 밀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을 잘 들어주고 있잖아.
긴장이 풀리자 이연화는 자리에 누웠어. 그리고 창 밖으로 번지는 달빛을 바라보던 가슴 속에 되레 아쉬운 감정 같은 것이 느껴지자, 그만 눈을 감으며 옆으로 돌아누웠어.  




***




다음날 아침을 먹은 후 세 사람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으로 향했음.
사건은 이러했음.
살인 사건을 의뢰한 남자는 마을에서도 부유하고 학식도 있는 존경받는 사람으로, 유가의 성을 지니고 있었음.
그런데 그가 애지중지하는 딸이 갑자기 자다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음.
딸은 얼마 전에 다른 마을의 청년과 혼약을 맺었다는 사실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음. 의젓한 집안의 자식답게 아무데나 돌아다니거나 하지 않고 친우도 별달리 없다고 했음.
살인이 일어난 건 바로 이틀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집안은 완전히 초상 분위기였음. 이미 그 마을의 관아에서 사람이 다녀갔고,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한 채 유씨 주인이 백천원에 의뢰하여 범인을 잡겠다 하니 장례도 유보하고 있는 상태였음.
세 사람이 유 가문에 들어서자 어수선하면서도 불안, 우울한 사건 현장 특유의 공기가 느껴졌음.
하인의 말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나오는 주인이 보였어.
“아이고, 나으리!”
어느 분이 백천원의 형탐이시냐고 물은 주인은 방다병이 나서자, 으레 그가 너무 젊은 바람에 뿌리는 의혹도 없이 덥석 손을 잡으며 딸애를 죽인 범인을 잡아달라고 애원했음.
방다병이 당황하며 진정시키려 하자 적비성은 소란통을 외면하고 비스듬히 섰고, 이연화도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
그런데 방다병을 붙들고 그를 잡은 손을 눈물로 적시던 유씨가 이연화에게 언뜻 눈길을 보내더니 갑작스럽게 몸을 떨며 말을 멈춤.
범상치 않은 반응에 방다병이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리니, 의아한 얼굴의 이연화가 있을 뿐이겠지.
방다병이 과민한 반응의 이유를 묻는 듯 쳐다보자, 유씨는 이연화를 빤히 보더니 금세 침착해지는 듯하다가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한사발이나 쏟아내기 시작했음.
그렇게 울더니 그는 도저히 제정신을 붙들지 못하고, 곁에 서 있던 하인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버렸음. 그리고 곁에 있던 집사가 나서서 안내를 하겠다고 말했음.
집사는 이미 세사람이 들었던 사건 내용을 다시 설명하면서 사망한 여자의 방으로 안내했음.
방은 품위 있는 여인의 방답게 깔끔했고 언뜻 보아서는 사람이 죽은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침상의 휘장을 들추자 흐트러진 이부자리 한가운데에 시커멓게 변색된 피웅덩이가 드러났음.
이연화가 침상을 살피는 사이에 방다병과 적비성은 방안을 구석구석 탐색했음.
“시신을 보아야겠습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방다병도 아닌 이연화가 그렇게 말하자 집사는 탐탁치 않은 얼굴로 답을 미루었음.
연배나 태도로 봐서는 이 집안에 충실한 사내인 듯한데, 시집도 못 간 아가씨의 시신을 사내 셋이서 보겠다니 아무래도 거부감이 들 수밖에.
떨떠름한 기색을 눈치챈 이연화가 부드럽게 말했음.
“걱정 마십시오. 방형탐이 유능하나 의원은 아니지요. 하지만 저는 의원입니다. ---저 분도 마찬가지구요.”
이연화는 방다병이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적비성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음. 집사는 겉으로 유약하게 보이는 이연화는 그렇다치고, 의원보다는 강도에 가까워보이는 기골이나 얼굴을 지닌 적비성이 무척 마음에 걸리는 듯했어. 하지만 결국은 따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음.
다시 안내를 받아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석실에 도착하자, 집사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문만 열어주며 고개를 숙였음.



석실 안에는 단 두 개의 초만 켜져 있어서 어두웠음. 
방다병이 재빨리 다른 초에 불을 붙이자 방 안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음. 그러나 어둠을 몰아낼수록 석실 가운데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은 더욱더 납빛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음.
충분한 빛을 확보하자 이연화는 잠시 미안한 듯 죽은 여인의 앞에서 묵묵히 서 있다가 수의를 벗기기 시작했음.
방다병도 이미 이런 일은 충분히 겪었을 거고, 적비성이 시체를 보고 그 시체가 남자든 여자든 검시 따위로 놀랄 일은 없겠지.
그런데...
“방소보, 뭐해. 이것 좀 도와-”
이연화는 벌써 굳어버린 시체의 옷을 벗기다가 팔이 밖으로 밀려나가자 나무라듯 불렀음. 그리고는 그때서야 목석처럼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을 깨달았어.
시체의 얼굴이 수많은 촛불빛으로 밝혀졌을 때부터 적비성과 방다병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음.
여식의 부친이 이연화를 보고 왜 놀랐던 건지.
그 이유를 두 사람은 시체를 보고 깨달았어.
불길한 빛깔로 굳어 있는 어린 규수의 얼굴. 그 얼굴형과 입술이, 흉묘하게도 이연화와 닮아 있었던 거야.
그러나 제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일이 없는 이연화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채근했음.
“왜 그래? 얼굴에 뭐라도 있어?”
이연화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자 적비성과 방다병은 동시에 움찔 놀라며 진짜로 신경쓰이는, 살아있는 얼굴을 돌아보며 다시 싸늘한 전율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음.
그렇게 보고도 본인은 깨닫지를 못하는 것 같으니, 방다병은 차마 설명하지 못하고 다만 불편한 기분을 나누려는듯 적비성을 쳐다보았어.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얼굴 표정이 너무 험악한데 놀라서 말문을 잃어버렸음.
어째서인지, 적비성의 표정은 분노를 넘어서서 무척 흉악해 보인다는 표현이 알맞게 보일 정도였음.  
그것은 일단 마음이 움직이면 행동하는데 거침이 없는 성격의 사내가 가질법한 얼굴이 아니었어.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적비성은 죽은 여인의 얼굴을 뚫어져라고 노려보고 있었지. 
그러다가 문득, 무언으로 정신 차리라고 재촉하는 것 같은 방다병의 눈빛과 마주치자 그는 휙하니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나가 버렸음.
“어이, 갑자기 어딜 가는 거야?”
그때까지도 시체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느라 적비성의 얼굴을 보지 못한 이연화가 멀뚱하게 묻자, 방다병이 어물어물 얼버무리며 뒤늦게 시체의 팔을 받쳐들었음.
“...흥, 시체나 뒤지는게 좀스럽다던가 뭐 그런 삐딱한 생각이라도 했겠지...”
방다병은 이연화의 작업을 돕는 내내 애써 시체의 얼굴 쪽을 보지 않으려 했음.
조금 과민한 반응이다 싶긴 했지만, 그도 적비성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어. 시체가 단순히 친한 사람과 닮았다고만 해도 마음이 불편할 텐데, 그 대상인 이연화는 벌써 그들의 눈앞에서 몇 번이나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넘긴 인간이니까.
방다병도 아까 먹은 음식이 뱃속에서 요동을 치는 것처럼 기분이 불쾌했어.



비성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