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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2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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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화는 연화루를 몰고 여기저기 유랑할때도 한가롭게 살았지만 지금만큼 게을러본적이 없었어.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들때까지 먹고 누워있고 먹고 자고 꼭 한마리의 돼지가 된것 같았지. 그 돼지는 기르는 보람도 없이 뼈만 앙상할 뿐이지만.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노고에 비해 이렇다할 발전도 결과도 없어 안달하는 방다병과 적비성에게 너희들이 능력이 없는게 아니라 애초에 종자가 영 글러먹은거라고 흐릿한 머릿속으로 생각했어. 회수할수 있는 건덕지가 없을텐데 밑빠진 물독에 물 붙는거 마냥 온갖 진귀한 음식과 약재를 쏟아붙는걸 보면 하당주가 투자의 기본도 모른다고 화내지 않을까? 어질한 머리속에 삐쩍마른 돼지 한마리와 무거운 금덩어리와 묵직한 저울이 울렁울렁 스쳐지나가는데 누가 자길 일으키는 바람에 정신이 조금 들었어. 정원에 나가자고 자길 안아들으려는 방다병에게 발길질 한번 하고 - 그 발길질에 힘이 하나도 안들어가 더더욱 울망한 방다병의 표정을 무시하며 - 이연화는 기어코 자기 발로 걸어나갔어. 물론 반쯤은 기댄 상태이긴 하지만.
이연화는 정원에 앉아 햇볕을 쬐었어.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속을 늘 메스껍고 어지러웠지만 이렇게 바깥 공기를 마시니 머리속이 조금 개운해졌어. 몸이 쇠약해지기도 했고 아이도 결국 들키고 말았으니 이연화는 도망갈 생각은 잠시 접어뒀지만 그래도 계속 이렇게 있을순 없었어.
이연화가 원체 기력이 없으니 방다병과 적비성의 감시가 좀 느슨해진듯 했어. 일단 이연화가 주변을 살펴보기만 해도 두 눈에 쌍심지가 켜지던게 많이 사라졌거든. 하루에 많아봤잔 차 한잔만큼의 죽을 먹는 정도가 다인 사람이니 그런 이연화에게 족쇄를 채우겠어 뭘 하겠어. 둘이 여전히 이연화곁에 밥풀처럼 찰싹 달라붙어있긴했지만 태도는 좀 더 너그러워졌지. 허리뒤로 방석을 챙겨주는것에 얌전히 몸을 맞기며 이연화는 의자에 기대었어. 흘러가는 구름에 멍하니 시선을 던졌지만 틈틈히 거처의 구조와 담의 높이를 외우며 확인하고 은신처의 위치를 더듬어봤어. 그러다가 깜빡 졸았던것 같기도 해.
그 사람을 연모했어?
방다병의 물음이 귓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어. 연모라, 감긴 눈꺼풀 아래로 제일 먼저 떠오른건 교완만이었어. 그녀를 정말로 좋아했어. 교완만은 봄날의 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했어. 민들레 솜털처럼 마음 한켠이 간질간질하고 풋풋한 정이 절로 샘솟곤했어. 정의를 세우겠다며 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쁜 이상이에게 교완만은 하나의 안식처였어. 정작 그 안식처는 홀로 힘겹게 버티고 있었는데.
어디 완만뿐이랴.
강호를 누비며 자신만만하게 사고문을 세우고 많은 형제들을 이끌었어. 그들이 기댈수 있는 든든하고 정정당당한 문주라고 여겼어. 하늘을 찌를듯한 자신감으로 가득찬 있었고 뭐든지 다 할수 있다고 믿었지. 그 그늘아래 초자금의 숨겨진 감정도, 운피구의 감춰진 마음도 알지 못했고 늘 이상이를 향해 찬사를 보내며 호형형제 하던 이들의 내면도 헤아리지 못했어. 종래엔 잘못된 선택으로 쉰여섯의 목숨이 새벽의 이슬처럼 허망하게 사라졌어.
그리고 단고도.
이상이의 인생에 있어서 기억이 생긴이후 최초의 형제이자 가족이자 사형이고 동료였어. 언제나 의지하고 등을 맞길수 있는 존재. 단고도에게 자신 또한 그런한 존재일거라고 단 한번도 의심조차 해본적이 없었어. 강호를 누비면서 이상이는 자신을 싫어하고 척을 지는 여러 적을 만나왔어. 그런 적중에 가장 이상이를 가장 증오하는 적이 바로 자신의 목숨조차 맞길수 있던 이였다니. 몇번이고 자문했어. 어디서부터 틀어졌을까, 단고도는 처음부터 자신을 싫어했을까, 혹시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겸손하고 단고도를 존중했다면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단고도를 위한답시고 부러 져줬던 일, 몇번이고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문주랍시고 단독으로 결정을 내렸던 일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어.
사실 사부인 칠목산도 이상이만 아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갔을리가 없었을텐데. 단고도를 원망했지만 그것이 정말로 그만의 잘못이었던가.
바람이 불어 피풍의에 달린 털이 턱밑을 간질여 이연화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어. 사실 이연화는 방다병와 적비성이 나누는 이야기를 다 들었어. 몸이 힘들어 눈을 감고 있었지만 머리를 어느정도 깨어있었거든. 살며시 눈을 뜨니 방다병의 울적한 눈망울과 적비성의 굳게 닫은 입매가 보였어. 걱정과 근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두 얼굴을 보고있노라면 가슴 한켠이 아려왔어. 연민이겠지. 방다병은 다정한 아이니까, 적비성은 의외로 곧은 사람이니까.
이연화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어 보았어. 배가 슬슬 부풀어 오르긴 하는데 아주 미세한 차이라 겉으로는 여전히 전혀 태가 나지 않았어. 정수리를 내려쬐는 햇살은 따뜻한데 마음은 헛헛하기만했어. 문득 사형은 처음부터 자신을 원치 않았던게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어.
정을 주었던 이들은 모두가 떠나갔지. 이 손으로 떠나보냈지. 그런데 애초에 정이 있긴 했던걸까. 머리속에 안개가 자욱한테 그 위로 흐릿한 잔상이 스쳐지나갔어. 손을 뻗어보아도 잡히지 않는, 본디 처음부터 그런것은 없었다는 듯이. 넌 연모를 운운할 자격이 없어.
이연화는 소리없이 웃었어. 단고도가 곧잘 쥐어주곤 했던 사탕은 참으로 달았는데.
연화루 비성연화 다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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