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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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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 아닌 궁중물


과거의 이야기 1




야심한 시각 승건궁의 상궁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주인이 사라진것을 알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승건궁 곳곳을 뒤지고 다녔음. 도대체 뭐가 그리 신기한건지 입궁을 하자마자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이곳저곳을 쏘다니던 것을 어르고 달래서 겨우 발을 묶어두었거늘. 그 사이를 못참고 또 어디론가 사라지다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음. 잠시후에 승건궁을 모두 뒤졌는데도 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으니 눈앞이 캄캄했음. 아직 황궁의 지리도 모르는 어린 후궁이 야심한 시각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니 무슨 사고라도 나면 저는 물론이고 승건궁의 노비들 모두 죽은 목숨이었지. 만약 무슨 일이 없더라도 이 시각에 승건궁 밖을 벗어난 사실을 황제나 태후가 알면 크게 경을 칠 일이었음. 상궁이 불침번을 서고 있는 태감들은 물론이고 잠을 자던 궁인들까지 깨워서 사라진 주인을 찾으러 나섰음. 지금으로부터 일각전에 강징은 자고 일어났는데 가족들이 보이지 않아 엉엉 울며 밖으로 나섰어. 궁에 들어온지 겨우 이레밖에 되지 않은터라 궁에 입궁했다는 사실을 잊을때가 있었거든. 얼마전에 봐두었던 후전의 담벼락에 난 구멍으로 나와 정처없이 걸어다니다가 황궁의 정원에 다다름.




강징은 한참을 서럽게 울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궁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냄. 커다란 정원석에 걸텨앉아서 훌쩍이는데 울어서 기운이 빠진터라 금방 허기가 짐. 그래서 전낭에 넣어둔 간식을 꺼내 야금야금 먹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 호기심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니 웬 사내 하나가 돌산에 몸을 숨긴채로 애처롭게 울고 있는게 보임. 강징은 그 사내의 울음소리가 너무 애달프고 안쓰러워서 저도 모르게 그 곁으로 가 소매를 잡아당겼음. 사내가 급히 눈물을 닦고는 표정을 갈무리하곤 짐짓 위엄이 있는 체하며 누구냐고 물어봄. 강징은 누구냐는 말이 몹시 이상한듯 징이는 징인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림. 사내가 말이 통하지 않자 몇살이냐고 물어보는데 강징이 일일히 손가락으로 꼽아보곤 열셋이라고 대답함. 사내가 갑자기 뜬금없이 열셋이면 궁녀가 되기엔 너무 이른것이 아니냐고 하더니 지금 어디에 기거하냐고 물어봄. 강징이 어디에 사냐는 말에 운몽의 연화오라고 하려다가 저기 승건궁이라고 상궁이 가르쳐준대로 말함. 사내가 승건궁이라는 말에 전빈의 궁인가? 중얼거리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보라고 함. 강징이 대답을 하는 대신에 사내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는 전낭에 넣어놓은 간식을 꺼내서 내밀며 말했음. 형아, 울지마. 징이가 이걸 줄게. 사내가 당황해서 형? 하고 되묻더니 엉겁결에 간식을 받음. 강징이 방긋 웃자 그게 신기하고 낯설었는지 이리 순해서야 궁 생활을 어찌하겠냐고 걱정을 함. 아직 젖살이 덜빠져 통통한 볼살을 살짝 꼬집고는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가보라고 윗사람이 알면 경을 칠거라고 등을 떠밀었음.





강징은 돌산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딛어 철푸덕 넘어졌는데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니 넘어져도 울면 안된다는 부모님 말씀이 생각나서 끕하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음. 사내가 따라내려오다가 강징이 넘어진걸 보고 일으켜 세우는데 넘어질때 다리를 삐긋했는지 제대로 움직이질 못함. 강징이 다리가 너무 아파서 울상을 짓다가 사내에게 형아 업어줘라고 소매를 잡아당김. 사내가 강징의 업어달란 말에 생전 그런 말은 처음 듣는 사람처럼 당황스러운 내색을 함. 그렇다고 이 야밤에 어린 아이를 정원에 두고 올수도 없어서 일단 업긴 했는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승건궁으로 향하는 내내 종알종알거림. 사내는 강징을 승건궁 후전의 담벼락 앞에 내려놓고는 앞으로는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따끔하게 훈계를 하고 돌아섬. 강징이 자기가 지니고 있던 옥패를 떼서 손에 쥐어주면서 부친이 항상 도움을 받았으면 사례를 해야 한다고 했다고 말함. 딱봐도 명문 귀족들이나 가지고 다닐법한 값비싼 옥이라 부친이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인기척이 들려서 급히 자리를 피했음. 강징은 그날 상궁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고 한동안 승건궁에 갇혀서 예법과 기예 수업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어. 그래서 그날 만난 정체불명의 사내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겠지.






그러던 어느날 황제는 정무를 보다가 승건궁의 상궁이 들었다는 말에 안으로 들임. 승건궁의 상궁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전빈께서 나무에 올라갔다가 못내려오고 있다고 폐하께서 와보셔야 할것 같단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 황제를 보필하는 총관 태감이 도대체 마마를 어찌 모셨기에 이런 망측한 일이 벌어진거냐며 질타를 하는데 승건궁의 상궁이 마마께오서 워낙 개구쟁이셔서 소인들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신다고 우는 소릴함. 그리고 그 시각 강징은 호기롭게 나무에 올라갔다가 막상 내려오려니 겁이 나서 못내려오는 중이었음. 잔뜩 겁에 질린채로 벌벌 떨고 있는데 주위에서도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볼뿐 아무도 나서지 않음.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여인이 아니라고 해도 황제의 후궁이라 시위와 태감들도 존체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해 다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어. 잠시후에 황제가 행차하고 우여곡절 끝에 황제가 직접 나무에 올라서 강징을 데리고 내려왔음. 그리고 그날 강징은 얼마전 정원에서 만난 사내가 황제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황제 역시 그때 보았던 순진한 꼬마가 말썽꾸러기로 소문이 자자한 전빈 강씨라는 것을 알게 됨.





그리고 그로부터 반년후에 황제가 모후인 태후의 궁에 문안 인사차 들었다가 승건궁의 전비에게 희소식이 있으니 축하도 해줄겸 다녀오라는 등쌀에 못이겨서 승건궁에 행차함. 승건궁의 궁인들이 앞뜰에 몰려있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상궁이 와서 전비께서 초경을 시작하셨단 말을 듣고 당황스러워함.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건지 침전밖으로는 한발자국도 안나온다는 말에 침전안으로 들어감. 아징하고 애칭을 부르니 이불더미에서 강징이 빼꼼 얼굴만 내밀고는 아무런 말도 안함. 황제가 짐이 왔는데도 계속 그러고 있을거냐니 침상 밖으로 나오는데 안색이 영 좋지 않음. 몸이 많이 안좋은거냐고 물으니까 도리도리 많이 놀랐냐는 말엔 끄덕끄덕함. 황제가 한숨을 쉬면서 이리 가까이 오라고 하는데 쭈볏쭈볏거리며 눈치만 살핌. 갑자기 짐과 내외라도 하는거냐고 물으니 그제야 다가와서 옆자리에 앉음. 황제가 상궁이 뭐라고 했냐고 물으니 징이가 하다가 신첩이라고 호칭을 고치고는 이제 아이를 가질수 있는 몸이 된거라고 했다고 말함. 황제가 웃으며 그건 부끄러운게 아니고 축하받을 일이라고 하자 안심이 됐는지 평소처럼 활짝 웃는데 그게 귀여워서 볼을 살짝 꼬집음. 강징이 배시시 웃다가 그럼 자기도 폐하의 아이를 가질수 있냐고 물어보았어. 그 말에 황제가 난처한듯 웃으며 아직 나이가 어린데 아기가 가지고 싶냐고 함. 강징이 부끄러운지 고개만 끄덕이는데 아직 어려서 안된다고 조금 더 자라거든 그때 생각해보자며 머리를 쓰다듬음. 강징이 뾰로통해져서 어린 아이 취급하지 마시라고 툴툴거림. 강징보다 열두살이나 많은데다가 이미 슬하에 아홉살짜리 장자가 있는 황제로선 강징이 마냥 어린애처럼 보이는건 당연했음. 황제는 이제 기운이 좀 난건지 강징 종달새처럼 쉴새없이 종알거리는 것을 가만히 들어줌.






강징이 열다섯이 되던 해에 황궁에 역병이 돌았는데 발병하면 인체에 매우 치명적인 병이라 황제와 태후 그리고 비빈 몇명이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음. 강징은 어릴때 그 병을 앓은적이 있어서 황궁에 남아있으면서 궁중의 일을 돌보았어. 그러길 벌써 몇달째 강징은 황제를 못본지 석달이 넘어가자 몹시 우울해했음. 그날도 배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황제가 환궁했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궁을 재촉하기 시작함. 서역에서 들어온 비단으로 만든 의복을 가져오게 해서 입어보고 장신구도 이것저것으로 대어보고 향합에 든 향을 꺼내 조향해서 맡아보기도 하다가 아주 정성을 들여 탕욕을 함. 곱게 단장을 하고 황제가 오길 기다렸는데 해시가 지나도록 오질 않음. 상궁이 오늘은 정무가 바쁘셔서 못오시는것 같단 말에 괜시리 서러워져서 눈물을 뚝뚝 흘림. 자신이 보고 싶어서라도 열일을 제쳐두고 올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실망감이 무척 컸어. 침상에 웅크리고 누워서 한참을 울다가 잠이 들려는 찰나 상궁이 들어와 황제가 승건궁으로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고 하자마자 맨발로 뛰어나감. 침전앞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다가 황제가 궁문을 넘어서자마자 달려가서 냅다 품에 안김.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마냥 너른 품에 얼굴을 마구 부비다가 아까 속상했던게 생각나서 훌쩍훌쩍 울었음. 황제가 당황해서 아징하고 이름을 부르는데 강징이 신첩이 보고 싶지도 않으셨냐고 왜 이리 늦게 오셨냐고 원망을 함. 그러고는 품에서 빠져나와 안으로 들어가버리는데 따라서 들어온 황제가 달래려고 하니 토라진척 등을 돌림.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소맷자락을 꾹 쥐고는 오늘밤은 승건궁에서 침수드시고 가라고 올려다보는데 침수라는 말에 황제가 조금 난처한듯 웃었어. 강징이 금세 시무룩해져서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니라 폐하와 함께 있고 싶은거라고 하니 못이기는척 그러겠노라고 함.





강징이 황제의 품에 안겨서 잠을 청하다가 자세가 불편했는지 뒤척임. 그리고 황제를 올려다보는데 많이 고단했던건지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음. 강징이 가만히 잠든 얼굴을 보다가 뺨에 손을 슬쩍 가져다댐. 헌앙한 내 낭군. 고소에서 제일 가는 미남자가 제 낭군이라니 화안을 볼때마다 어찌나 가슴이 설레는지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기분이었음. 낭군과 함께 밤을 보내고 그를 닮은 아이를 가진다면 더 바랄것이 없을거야. 얼른 그런 날이 오기를. 강징이 조용히 웃다가 눈을 감는데 그때까지 자는 척을 하고 있던 황제가 슬그머니 눈을 뜸. 그리고 잠이 든 강징을 쳐다보다가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싶어 기특한 마음이 듬. 몇달 못본 사이에 키가 훌쩍 자라서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음. 사실 올해 들어서 태후가 몇번이고 이제 시침을 들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거라며 합궁을 권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많아서 선뜻 결정을 못내리고 있었음. 강징이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곧 성년이 될거고 육궁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귀비라 언제까지고 시침 명단에서 제외시킬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황제는 자식이 없는 후궁의 삶이 어떤지 알기에 앞으로는 어찌해야 하나 생각이 많았음. 제 치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데 혹 제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 아이는 어찌될까 하고. 황제가 제 품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강징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쉼.




이튿날 강징이 문앞에서 황제를 배웅하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까치발을 들어 입술에 입을 맞췄음. 황제는 난데없는 강징의 행동에 놀란듯 몸이 굳어버리고 그 모습을 본 궁인들은 고개를 푹 숙이거나 몸을 급히 돌려버림. 황제가 어디서 이런걸 배웠냐니까 책에서 보았다고 하더니 신첩이 입을 맞춘게 싫으시냐고 물음. 그 말에 싫지는 않다고는 했더니 배시시 웃고는 이젠 뺨에 입을 맞추는게 아니겠음. 다른 비빈이 그랬다면 부끄러움도 모르느냐며 야단을 쳤겠지만 강징이 하는 짓은 귀엽기만 했음. 황제가 콧등을 톡치고는 이만 가보아야겠다고 저녁에 다시 들르겠다고 함. 강징이 웃으며 배웅을 하고 소일거리를 하다가 총관 태감이 들었단 말에 자리에서 일어남. 폐하께서 하사품을 내리셨단 말에 감사 인사를 올리고 받아드는데 태감 하나가 작은 강아지를 안고 있었어. 강징이 웬 강아지냐고 했더니 마마의 사가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낳은 새끼를 데려온것이라고 대답함. 강징이 강아지를 받아서 이리저리 살피더니 말리와 생긴게 꼭 닮았다고 좋아함. 폐하께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곤 하곤 강아지를 안고 침전 안으로 들어왔어. 상궁에게 양젖을 가져다달라고 해서 먹이고 하루종일 끌어안고 있다가 잠깐 잠이 듬. 자다가 목이 말라서 잠시 깼는데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정신이 아득해짐. 황제의 후궁중 하나가 회임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 태후가 회임 소식을 듣고선 몹시 기뻐하고 황제 역시 기뻐했다는 말에 다시 눈을 감음. 총애를 받으면 무엇을 하나. 나날이 품계가 높아져 귀비이면 무엇을 하난 말이야. 그저 관상용 꽃에 불과한 것을. 강징을 한참동안 숨죽여 울다가 상궁이 폐하께서 오셨다는 말에 지금은 몸이 좋지 않으니 그냥 돌아가시라고 말하곤 계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어.







청형군강징 망기강징 망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