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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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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베네딕트 브리저튼은 관찰력이 좋은 남자였다.

당연하다. 그는 화가니까.

하지만 직업적 소양의 수준을 넘어, 그는 항상 분위기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무난하고 어울리기 좋은 사람, 이라는 평가는 높은 사회성으로부터 나오고 그 사회성이란 건 결국 좋은 눈썰미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그가 소피 백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챈 건 그 때문인지도.





10.

소피 백은 말간 얼굴과는 다르게, 꽤 애연가였다.

베네딕트 브리저튼은 교정 구석에서 담배를 꼬나무는 그녀를 꽤 여러 번 발견했었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고, 그냥 눈에 띄었다. 말했다시피 그는 눈썰미가 좋은 남자였으니까. 그리고 소피 백은 귀신같이 캠퍼스 구석의 한가한 스팟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원래는 베네딕트의 자리였고 그가 캠퍼스에 오래오래 남아있는 동안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들렀던 곳이었다. 그런 구석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성격이야 뻔하니까, 베네딕트 브리저튼은 그동안 그중의 누구와도 알고 지내지 않았다.

아마 소피 백과도 그렇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냥 어느날, 녹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담배 연기를 흘려보내는 그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11.

소피는 서류를 들고 불만스럽게 미대 작업실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아, 들어가기 싫은데.

사유는 그냥, 익숙하지 않은 곳이니까. 소피 백은 티는 내지 않지만-하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눈치는 챌 만한-낯설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삶은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계속 격파해 오는 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질은 고쳐지지를 않았다. 하지만 어떡하랴? 해야 하는 일인걸. 소피 백은 또 해야 하는 일이 닥쳤을 때 오래 도망가지는 않는 타입이었다.

소피는 무거운 나무문을 밀고 작업실로 미적거리며 들어갔다.

작업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무언가에 열중하여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그녀의 목표물을 제외하면, 다른 학생들은 간만에 찾아온 청명한 여름날에 취해서 다 뿔뿔이 도망가버린 상태였다.

사인을 받을 인물들이 다 쥐뿔도 보이지 않는 건 큰 손실이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타겟이 남아있으니 됐겠지. 소피는 인영을 향하여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타겟, 베네딕트 브리저튼은 캔버스 앞에 서서 뭔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소피는 건장한 뒷모습을 보며 그에 얽힌 소문을 생각해 냈다. 그는 학교에서 꽤 유명인사였다. 미대의 명물, ‘그’ 브리저튼의 일원. 아무도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는데 언제 나갈지도 모른다는 살아있는 화석. 하지만 나이많은 선배들이 으레 그러듯 괴팍하지는 않고 오히려 누구와도 잘 지낸다나.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보는 얼굴을 보며 소피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생각했다. 음, 호감상의 미남자. 왜 그렇게 평판이 좋은지 알 것 같기도.


“소피?”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예상 외였다. 음, 네, 안녕하세요. 소피는 쭈뼛거리는 기색을 숨기려고 애쓰며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요. 그녀가 내민 것은 여름방학과 어쩌면 가을 학기를 포괄할지도 모르는, 미술대학 연합 세미나 참가 동의서였다. 이쪽 계열에서 네트워크랄 게 없는 소피가 우연히 잡은 괜찮은 기회였다.


아, 이거. 베네딕트는 서류를 받아들고 거리낄 것 없이 사인을 했다. 펜을 잡은 팔이 두툼했다. …진짜 의외인 점이지. 조소과도 아니고 회화 전공이면서, 체격이 왜 저렇게 좋아?


“근데 피터슨은 어디에 있고 왜…?“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소피는 불쑥 흘러들어온 질문을 캐치하느라 꽤 노력을 해야 했다.


”…아, 음. 급한 일이 있대서 부탁받았어요.“

뻥이다. 그 화상은 술병이 나서 소피한테 일을 떠넘겼다. 하지만 이 과분한 모임에 소피를 껴준 게 그였고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구구절절 하기엔 짜치니까, 그냥 이렇게만.


아, 그렇구나. 다행히 베네딕트 브리저튼은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다만 그의 이름 밑으로도 줄줄이 이어지는 리스트를 보다가 그냥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미간을 조금 찌푸렸을 뿐.


“…카벤더는 어디 있는지 알아?”

누구요? 하고 멍청하게 되물으려던 소피는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아, 그 카벤더. 아마 동아리방에 있겠죠. 여상하게 대답한 그녀는 서류를 되돌려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서명 받아줄까?”

서류 대신 베네딕트 브리저튼의 물음만 되돌려 받긴 했지만.

뻗은 손을 민망하게 쥐락펴락 하며 소피는 생각했다. 카벤더라면 그녀도 몇 가지 들은 게 있다. 어디 구석탱이에 숨어서 약만 들입다 빤다는 놈. 내키진 않긴 한데, 설마 대낮에 별일이야 있으려고. 하지만 도와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긴 하다. 소피가 머뭇거리면서 바라보기만 하자 베네딕트는 곧장 앞장을 섰다. 서류는 여전히 그의 손에 단단히 들려 있는 채였다.



***


문제의 그 동방 문앞에서 소피가 채 노크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베네딕트 브리저튼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거친 움직임이라 소피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그, 베네딕트, 잠시만요… 익숙하지도 않은 이름을 부르며 만류하기도 전에 방안에서 뭔가가 쿵 엎질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바쁜 웅성거림. 아하, 이 패거리가 또. 안 봐도 훤히 보이는 광경에 소피가 눈살을 찌푸린 사이, 베네딕트는 열까지 샜다가 문을 쾅 열어제꼈다.


“맙소사, 브리저튼!”

Fuck’s sake. 험악한 욕설이 오고가더니 카벤더가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노크 좀 하라고, 브리저튼. 그러면 그 망할 손가락이 닳기라도 하나? 툴툴거리던 남자가 용케도 문앞을 가로막고 선 거대한 인영 뒤의 자그만 여자를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그 망할 입에서 뭔가가 더 쏟아지기 전에 베네딕트는 멍청한 상판때기에 서류를 들이밀었다.

물론 놈의 시야에서 등뒤의 여자를 한번 더 확실하게 차단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



***


카벤더에게서 서명을 받아낸 뒤 능숙하게 문을 닫아버린 베네딕트는 다시 소피에게 서류를 쥐여 주었다. 그럼, 수고해. 도움은 카벤더까지뿐이었는지, 베네딕트는 제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태도였다. 하긴 여기까지만 해도 큰 도움이 된 건 맞지. 그렇긴 한데… 정말 기사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는지, 베네딕트는 서류를 건네준 뒤 산뜻하게 작업실로 돌아갔다. 담백한 태도이긴 한데. 왠지 묘하게 킹받는단 말이지… 왤까…? 소피는 뚱한 얼굴로 손 안의 서류와 멀어지는 훤칠한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12.

아무튼 그때의 일 이후로 베네딕트 브리저튼은 소피를 만나면 종종 아는체를 했다. 어쨌든 그의 태도는 신사적이었고 도움을 받은 건 맞으니까, 소피는 그가 자주 건네던 커피를 저어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뭐 이 정도의 ‘아는 사이’는 괜찮겠지.





13.

그러나 결단코 그 이상의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다.

문제의 크리스마스 연휴 이후, 베네딕트 브리저튼에게서 온 메시지를 노려보며 소피는 생각했다. …바라기는커녕, 이렇게 될 줄 예상도 못했다. 이건 그녀의 계획 외였다. 아주 의외의 돌발상황.


그리고 소피 백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컨트롤 외에 놓이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14.

녹색 니트 원피스, 결 좋아 보이는 머리카락. 커다란 귀걸이에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 한 개비.

베네딕트 브리저튼은 그 어느날, 소피 백을 보고 한 가지 감상을 떠올렸다.


…프랑스 여자 같네.

이름이 ‘소피’니까, 맞을지도.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베네딕트는 비밀장소의 불청객을 뒤로 하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이름 때문에 그런 단상을 한 거라고 자신을 애써 설득하며, 그리고 동시에, 자기에게도 하나쯤 있을 녹색 니트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