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로 시작했던 거 2.5부 9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당신은 원래 양연처럼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속내와 달리 그 타고난 생김새와 음성은 듬직하여, 사람들이 당신의 주변에서는 쉽게 경계의 끈을 놓았으니까요."
"뭐라고요? 호명이?"
"마, 말도 안 돼. 어디서 모함입니까!"

생정과 호명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궁지에 몰린 당신이 바로 장물아비를 찾았겠습니까? 갑자기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이 나타나 네 죄를 자백하라 하니, 누군가가 자신의 행적을 들추려 작정하였나 염려되었겠지요. 날이 밝자마자 오래도록 거래한 이에게 달려가선 누가 내 뒤를 캐지는 않았는지, 지금껏 내가 넘긴 물건에 대한 장부 따위를 도난당한 것은 아닌지 이래저래 묻더군요."

이연화가 고개를 까딱하자, 적비성이 곧 밖에서 누군가의 뒷덜미를 잡아 데려왔다.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멀쩡한 얼굴과 머쓱한 태도로 헛기침을 했다. 자신을 고발하지 않는 대가로 입을 열었으니, 오래된 고객을 마주하기가 영 껄끄러울 법도 했다. 벌게진 얼굴로 이를 갈다가, 호명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난 저 사람을 모릅니다. 어떻게 저 범법자의 말만 믿고 나를 의심할 수가 있소?" 장물아비가 당황한 얼굴로 적비성과 이연화를 돌아보았다. 옥에 갇히고 전재산을 빼앗기는 것보다야 호명을 팔아넘기는 편이 나을 터였다.

"아, 아닙니다. 저 사람이 확실합니다. 객잔이 폐업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이나 제게 장물을 갖다주었습니다. 지배인의 신뢰를 얻은 터라 부자들이 있는 곳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다고 했어요. 들키지 않게끔 작은 물건을 훔치면,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말입니다. 장부도 다 있다고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절 오래 두고 보시지 않았습니까?"

사색이 된 호명이 생정을 향해 외쳤다. 작은 코웃음 한 번으로 그 행태를 무시하고, 이연화는 차갑고도 얄미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당신이 객잔에서 오래 일했던 까닭이야 명백하지요. 이 객잔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 자주 묵어, 알게 모르게 도둑질을 하기가 좋았을 테니까요. 당신이 하는 짓을 짐작했지만, 양연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당신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당신 역시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5년 전의 그날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혼례가 열리던 날, 당신은 취화탕 근처의 숙소에서 도둑질을 하다 양연을 만났어요. 양연이 당신의 죄를 밝히겠다 하자 다툼이 일어났지요. 도망치는 여자를 쫓다가, 당신은 취화탕에 다다랐을 때 양연을 목 졸라 죽였습니다."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퍼뜨리려는 거요? 5년 전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외친 호명이, 이연화의 멱살을 잡으려는 듯 다급히 다가왔다. 방다병이 냉랭한 얼굴로 그 어깨를 떠밀어 멈추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어본 다음 반박해도 늦지 않소. 그것도 반박할 말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일 테지만." 청년이 무정히 건넸다. 짧은 냉소로 그 말에 동의한 이연화가 태연하게 이었다.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양연이 아끼던 비녀가 취화탕에 깊이 박혀버렸지요. 계획된 살인은 아니었던지라, 당신도 꽤나 놀랐을 겁니다. 시체가 탕에서 발견된다면 그곳을 청소하던 당신이 의심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일단은 시신을 옮겨야 했습니다. 당신은 양연을 취화탕과 떨어진 마굿간까지 운반했지요. 당시 마굿간 주변의 바닥에 끌린 자국 따위가 없었다니 시신을 들쳐메거나 업고 왔다는 것인데, 양연이 무거운 편은 아니라 해도 그런 식으로 운반하려면 꽤 힘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조롱과 경멸이 배인 눈으로, 이연화는 호명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비록 볼품없이 떠는 데다 다리 사이까지 젖어 있어 매우 흉했지만, 호명은 어쨌든 건장한 체격의 장정이었다. 이연화가 상대를 차갑게 놀리듯이 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혼비백산해서 시신을 옮기고 나니, 덜컥 걱정이 들었겠지요. 몸이 잔뜩 젖어 있어 누가 봐도 온천에서 죽은 것인데. 이 모습이 드러나면 탕을 수색하게 될 테고, 취화탕의 비녀가 발견되면 분명 자신이 의심받을 테니까요. 하지만 도술을 부리는 신선도 아니고, 어찌 젖은 몸을 단번에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시신을 훼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물을 날려버릴 수 있는 불의 힘을 빌어 말입니다."
"아, 아니야. 아니오. 무슨 말도 안 되는...!"
"뭐라고요? 그날의 불도...그날의 화재를 낸 게 호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생정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며 물었다. 근처에서 구경하던 이들도 동그래진 눈으로 숙덕거렸다. 이연화가 미소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를 띠었다. "사람이 죽고 불과 일각 후에, 누군가가 방화를 저질렀습니다. 두 사건이 무관하다 여기는 편이 더욱 이상하지 않습니까? 또한 양연의 몸이 젖어 있던 것은 직접 관을 열어 확인한 사실이니, 믿어도 좋습니다." 생정이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눈동자가 경악과 혼란을 담고 호명을 돌아보았다.

"그날, 그날 가장 먼저 불이 났다고 소리친 사람이 자네였지만...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이에요, 우연이 맞습니다! 절대 아, 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그런 흉악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불과 어젯밤에 살인을 자백한 사람이 하는 말이라 조금 믿기 어렵네요. 아, 이런 사실은 당신도 잘 알고 있었지요? 전과가 있는 자의 말에는 설득력이 별로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그날 불을 내기 전, 자신이 훔쳤던 물건들을 양연의 품에 쑤셔넣었겠지요."
"아냐!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시오!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어. 난 계속 방에 있었다고!"

이연화가 비웃듯이 지적하자, 호명이 발악하듯 외쳤다. 방다병의 얼굴이 엄해졌다. 명백한 멸시의 표정을 짓고, 청년은 호명의 어깨를 떠밀듯 짚었던 손으로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우리는 천기당의 하 당주가 보낸 사람들이오. 당신은 물론이고 고인과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소. 사건을 조사한 결과가 당신을 가리켜 그대로 말할 뿐인데, 어찌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시오?" 그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천기당의 당원들이, 갑작스레 객잔의 일꾼을 모함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신빙성이 떨어졌다. 코웃음을 친 이연화가 매끄럽게 이었다.

"객잔이 버려지고 폐가가 되었을 땐 당신도 한시름 놓았을 테지. 하지만 천기당주가 이곳을 사서 단장한다 하니, 마음 한편에 불안이 자라기 시작했을 겁니다. 비록 양연이 힘있는 사람은 아니나, 만일 취화탕의 그 비녀가 발견되면 옛 사건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를지도 모르니까요. 꺼림칙한 마음을 평안히 만들기 위해, 당신은 다른 이들의 평안을 위협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취화탕에 흉한 소문을 붙여 없애버리는 거지요."
"취화탕의 물이 붉게 변하던 게...그것마저 자네가...?"

생정은 이제 놀랄 기력도 다 떨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짧은 사이에 오 년 정도는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호명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차 부정하기 전, 방다병이 제사상 한편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들고 왔다. 이연화가 그편을 향해 살짝 고갯짓하며 건넸다. "당신이 놀라 장물아비를 만나러 간 사이에, 당신의 거처를 뒤져봤습니다. 여기 있는 공자는 기관에 통달하여, 웬만큼 잘 숨겨진 장소나 물건이라도 놓치지 않고 찾아내지요." 방다병의 손에서 그 상자가 열렸다. 모든 이들이 두어 발짝씩 다가와 고개를 빼고 그 안을 보았다. 약첩처럼 생긴 꾸러미와 흰 옷가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방다병이 건조하게 말했다.

"방 한편의 나무를 썰어서는, 그 뒤에 붉은 색소와 흰 옷을 숨겨놨더군요."
"맞아, 저거야! 나 전에 저거 봤어. 저 옷이야!"

미아가 옆의 동료를 탁탁 때리며 손가락질했다. 호명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여러 가지 이유로 번들거리는 낯을 하고, 남자는 턱을 약간 든 채 허세를 부렸다.

"이건 모함이오. 서, 설령 내가 그 소동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만으로 내가 양연을 죽였다 말할 수 있소?"
"참으로 뻔뻔하군. 이리 앞뒤 상황이 확실한데, 아직도 저런 소리를 하다니."

사람들 중 누군가가 수군거리자, 호명이 핏발 선 눈으로 홱 돌아보았다. 꽤 흉흉한 기세였으나 남자가 궁지에 몰린 짐승 꼴이라는 사실이 자명했으므로, 수군거린 사람도 고개를 돌리는 대신 마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짐짓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있는 공자는 기관에 조예가 깊어, 웬만큼 잘 숨겨진 장소나 물건이라도 놓치지 않고 찾아낸다고요."

방다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년은 결정적인 증거를 찾은 기쁨보다도, 비극을 향한 침중함이 더욱 짙게 배어난 얼굴로 상자를 뒤졌다. 흰 옷가지 아래에서, 아주 작은 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명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고, 바라보던 이들의 얼굴은 어리둥절해졌다. "큰 상자 뒤편의 공간에, 이 함이 꼭꼭 숨겨져 있더군요. 복잡한 장치로 잠겨 있었지만, 사람이 만든 이상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열 방도가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말한 방다병이 뚜껑을 열었다. 호명이 기겁해 달려들려 했지만, 이번에는 이연화의 손이 그 몸을 막았다.

함 안에는 몇 개의 보석이 들어 있었다. 귀한 것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덜한 것도 있었으나, 세공된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독특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 바닥에는 쌀알 정도의 크기로 깎은 홍옥들이 모래처럼 깔려 있었다. "대협, 이게 뭐예요?" 미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대답하는 대신, 이연화는 고개를 돌려 한 점을 응시했다. 구석에 시커먼 그늘처럼 선 채 이연화의 이야기를 듣던 비영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함의 보석들을 빤히 응시했다.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으며, 비영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양연의 비녀를 장식했던 보석들입니다."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흘리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생정이 둥그레진 눈으로 비영을 보았다.

"아니, 자네는...."
"저는 비영입니다. 공예품을 만드는 일을 하며...양연의 배우자 되는 사람입니다. 제가 만든 비녀를 주며 청혼했지요. 똑똑히 기억합니다."

비영이 벌겋게 젖은 눈으로 호명을 노려보았다. 호명의 얼굴에서는 혈색이라고 보일 만한 빛이 모두 빠져나가 있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함과 비영을 번갈아 보다가, 남자는 곧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 아닙니다. 이보게, 아니야. 내가 어찌 그런...이것들은 화재가 난 이후에 바닥에서 주웠습니다. 결코 그런, 그런 일에 관한 게 아닙니다."
"적당히 하시오. 탕 속에 깊이 박힌 비녀를 장식하던 보석들이, 하필 당신의 발치에 굴러다니고 있었다고요? 그걸 지금 믿으란 말입니까? 그리고, 보통 사람이 정말 이런 보석을 주웠다면 바로 팔려고 들었겠지요. 당신은 이게 살인의 증거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정교한 함에 철저히 숨기고 함부로 내보이거나 버리지 못한 겁니다. 아마 비녀를 빼려 용을 쓰다가, 거기서 뜯겨나온 장식들을 모아 두었겠지요."

방다병이 뾰족하게 따지고 들었다. 호명의 얼굴이 흘러내리듯이 젖었다. 

"그, 그런 게...그런 게 아니오. 이건 그...그 비녀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러니까...."
"제작한 사람이 그렇다 인정했는데, 끝까지 추하기 그지없군. 그렇다면 보시오!"

침을 뱉듯 말한 방다병이 눈짓하자, 비영이 품에서 비녀를 꺼냈다. 적비성이 바위를 쪼개어 꺼낸 물건이었다. 그 비녀의 빈 자리에, 비영이 보석 알을 하나하나 대어 맞추며 말했다. "이건 양연이 좋아하는 빛깔이라 골랐고, 이것은 양연이 좋아하는 꽃과 닮아 골랐습니다. 또 이건 양연이 좋아하던 과일과 비슷하게 깎았고, 또 이것은...." 비영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작은 함 안으로 눈물 방울이 뚝 떨어졌다. 호명은 비영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지, 마치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얼이 나간 얼굴로 비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그게 빠졌다고...?"

호명이 얼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입에서 발작적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비녀를 만지려던 그 손길을, 비영이 매섭게 때려 쳐냈다.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지, 호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그렇게 오래도록 용을 써도 빠지질 않았는데...." 호명의 얼굴이 점차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릎에 힘이 풀렸는지, 남자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더니 양손으로 바닥을 움켜쥐었다. 그 얼굴의 근육이 정말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뒤틀렸다. 딱딱 부딪치는 이빨 사이로, 패배감과 좌절에 일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년 때문에...그 비녀 하나 때문에...죽을 거면 그냥 죽을 것이지, 괜히 그걸 빼앗기지 않겠다고 용을 써서는!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작은 음인의 힘으로 박은 그 비녀가 당최 꿈쩍도 하질 않아서...빌어먹을, 그 년이 다시 꿈에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이런 쓸데없는 짓도 안 했을 텐데...."

치미는 울분을 이기기 어려운지, 호명은 바닥을 쿵쿵 내리치며 토하듯이 이야기했다. 이마를 짚으며 현기증에 휘청거리는 생정을, 근처에 섰던 몇 사람이 얼른 잡아주었다. 이연화의 한쪽 눈썹이 가만히 올라갔다. 배우자의 꿈을 꾸던 비영처럼, 호명 역시 양연이 관련된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결국 그 안에도 실낱 같은 죄책감 정도는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일신의 안녕을 너무 염려한 나머지 벌어진 현상인 걸까? 호명의 다음 말을 들으며, 이연화는 아마도 후자에 가까웠겠다는 생각에 무정하고도 한심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그러게, 그러게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화를 부른단 말이냐? 네가 날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그런 짓까지는 안 했다고...!"
"비록 사람들의 앞에 형상을 갖고 나타나지는 못했으나, 어쩌면 고인의 원혼이 항시 당신과 함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연화가 호명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건넸다. 형편없이 쭈그러든 남자는, 짙은 원망과 적의가 배인 눈으로 이연화를 올려다보았다. 상대가 또 자신에게 달려든다면 걷어차버릴 요량으로 호명을 살피다, 이연화는 갑작스레 움직인 큰 인영에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비영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호명을 넘어뜨리고는 그 목을 틀어쥐었다. 억지로 누르던 복수심이 폭발한 듯, 그 눈동자가 증오에 번들거렸다. 평소의 양순한 인상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만둬요. 이리 증거가 확실하고 자백까지 했으니, 분명 죗값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방다병이 그 팔을 잡고는 외쳤다. "그래도...그래도, 양연은 이미 죽었잖아요." 비영이 호명에게서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호명이 컥컥거리며 버둥댔으나, 이미 기진한 채로 숨통이 졸려서인지 그 저항은 비영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연화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비영의 반대편 팔을 잡은 이연화가 낮고 빠르게 건넸다.

"살인은 도망칠 수 없는 죄입니다. 아경이 홀로 자라도록 두고 싶습니까?"

비영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희게 변할 만큼 힘이 들어갔던 손마디에서 힘이 조금 빠졌으나, 비영은 여전히 호명의 기도를 막고 있었다. 호명의 눈동자가 까뒤집히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일단 혈도를 짚어 제압해야겠어. 그렇게 결심한 이연화가 움직이기 전, 작은 바람과 함께 나타난 사람이 호명의 뒷덜미를 확 잡아당겼다. 하도 세게 당긴 탓에, 어딘가에서 우득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비영에게서 뜯어낸 호명을 대충 바닥에 내던지고, 적비성은 별다른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호명을 슥 보았다. 길가의 벌레를 마주한 듯한 태도였다.

호명이 헐떡이며 정신없이 목을 만졌다. 비영의 손톱에 긁힌 피부에서 피가 흘렀다. 뻔뻔하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남자를 향해, 비영이 피를 뿜어내듯 외쳤다.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대체 악귀와 뭐가 달라?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서, 어떻게 감히 장례식에 와 아경과 인사하고 날 위로할 수 있어!" 물론 호명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입을 꾹 다문 호명이 힐끗 문을 돌아보았다. 달아날 기회를 보는 듯한 꼴에, 적비성이 짜증스럽게 건넸다.

"사지를 보존하고 싶다면, 허튼 생각은 마라."

호명이 흠칫했다. 남자는 덫에 갇힌 짐승처럼 안달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을 둘러싼 비난의 시선만을 마주하고는 이를 갈며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에는 죄의식이나 후회보다, 피해자나 가질 법한 원통함이 서려 있었다. 왜 크든 작든, 악인들은 자신의 죄가 폭로되었을 때 이다지도 억울한 낯을 하는 것일까? 이연화가 어쩐지 씁쓸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새삼 울분이 치밀었는지, 험악한 표정을 지은 비영이 재차 상대에게 달려들려 했다. 방다병이 얼른 팔을 잡아 만류하자, 비영은 몇 차례 그 손을 떨쳐내려다 실패하고 이내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큰 등을 쓸어주며, 방다병이 간절하게 건넸다.

"부디 진정하세요. 상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하나, 이것은 부인을 기리는 옳은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공자는...공자는 반려가 있으십니까? 공자가 하나뿐인 반려를 잃으셨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비영이 시뻘건 눈으로 방다병을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 갈 곳 없는 원망이 넘쳐흐르는 눈이었다. 방다병은 절절한 안타까움이 어린 얼굴로 비영을 응시하다, 이내 한숨과 함께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게도 마음에 깊이 품은 정인이 있습니다만, 만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저는 사적인 복수에 스스로를 쉽게 내던지지 못할 겁니다." 이연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고개를 숙인 채, 비영은 회의감과 자괴감이 어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대협은 협객이시니...저와는 달리 강인한 마음으로 정의로운 판단을 하시겠지요."
"아뇨, 그래서가 아닙니다. 저라고 무엇이 그리 다르겠습니까?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면, 저도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어려울 만큼 고통받을 겁니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을 직접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버리고 싶겠지요."

방다병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비영이 퉁퉁 부은 눈을 의아하게 깜박였다. 어젯밤부터 계속 운 것이 분명한 그 얼굴을 바라보며, 청년은 잠시 주저하다가 천천히 이었다. "다만...그대의 반려는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지 않았습니까? 비록 과거에 흠결이 있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바른 길을 향해 나아가려 최선을 다했지요." 양연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비영의 얼굴에서 살기와 독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비영을 바라보며, 방다병이 슬픈 미소를 엷게 띠었다.

"제 정인도 그런 사람이거든요. 아마도 끝까지 그런 이일 텐데...제가 이성을 잃고 날뛰어 흉한 일을 벌인다면, 그가 노력하여 쌓아올린 삶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훌륭히 살아갔던 사람을 눈먼 피로 기리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원수를 그냥 두지는 않겠으나, 저는 제 정인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나은 추모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부인도 그렇지 않습니까?"

방다병이 부드럽게 덧붙인 질문에, 비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비영은 오랫동안 참았던 말을 어렵사리 꺼내놓았다. "맞아요. 양연은...정말 강하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도둑이 아냐...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요. 그러다 죽은 게...그런 게 아니에요." 비영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자는 큰 몸을 웅크린 채 오래도록 울었고,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일꾼들 몇은 소매나 손등으로 눈가를 찍었다. 방다병은 비영이 눈물을 그칠 때까지 그 어깨를 잡은 채 위로했으며, 적비성은 자꾸 딴 마음을 품으려는 호명을 몇 대 후려쳐 이빨을 두어 개 날려버렸다.

이후의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일꾼들이 어질러진 식당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동안, 방다병은 호명과 비영을 데리고 관을 향했다. 이연화는 혼이 나가 어쩔 줄 모르는 생정에게 심신을 안정시키는 환을 먹이고, 그 안색이 나아지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거처에 돌아왔다. 자리에 풀썩 앉으며 한숨을 돌리자, 맞은편에 앉은 적비성이 말없이 찻잔을 채워주었다. "아이고, 지친다. 긴 저녁이었어." 어깨를 두드리며 중얼거리고, 이연화는 찻잔을 들어 적비성의 잔에 건배하듯 부딪쳤다.

차를 두어 모금 마시자니, 문득 탁자 위의 꽃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방다병이 자신의 머리에 꽂아주었던 것이었다. 꽃송이는 이제 말라 있었으나, 그 가지의 형태는 여전했다. 꽃송이를 살살 만지던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아비. 오늘 방소보가 비영에게 했던 말 들었지."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만."

적비성이 덤덤히 대꾸했다. 이연화가 조금 의외로운 눈으로 상대를 보았다.

"어디가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복수는 해야 한다. 좋은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는다면, 그건 부당한 일이지 않나?"

적비성이 날카로운 눈으로 꺼낸 말에, 이연화는 한쪽 입매를 슬쩍 올렸다. 상대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이연화는 늦된 학생을 가르치듯 천천히 건넸다.

"범죄자를 그냥 놔둔다는 뜻이 아니라, 잔혹하고 사적인 복수를 되도록 지양한다는 뜻이지. 단죄에도 법도와 절차라는 게 있잖아. 그렇지 않다면, 그저 물고 뜯는 짐승과 인간이 다를 게 뭐겠어."
"나는 그 절차가 돈과 힘에 의해 막히는 꼴을 너무 많이 봤다. 만일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나는 마냥 기다리거나 용서하지 못해."

적비성이 냉소와 함께 단언했다. 이연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적비성은 이연화나 방다병보다 세상의 어두운 면에 강제적으로 노출당하며 자란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금원맹주는 불의에 예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폭력에 둔감했다. 자신과 영판 다른 상대에게 무작정 원칙을 얘기해봐야 별 소용이 없으리란 사실쯤은 알고 있었기에, 이연화는 잠시 눈가를 만지며 고민하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타이름보다는 부탁에 가까운 어조였다.

"아비. 만일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1년 정도는 기다려 줘." 
"갑자기 웬 쓸데없는 소리냐."

적비성이 팩 대꾸했다. 그 눈으로 위기감에 가까운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지 않아. 너도 알잖아. 너나 나는 물론이고, 방다병도 마냥 조용히는 못 살아. 이런 얘기는 미리미리 해두는 편이 좋다고. 설령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어떤 세력과 전쟁을 벌이겠다거나 하는 결정 따위를 함부로 내리지는 마. 난 내 목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명이 쉽게 스러지길 원하지 않아. 그런 일은 동해대전으로 충분해. 그러니, 멧돼지처럼 돌진하지 말고 최소한 1년은 참아."

적비성의 미간 골이 한껏 깊어졌다. 침묵하는 남자를 똑바로 마주보다가, 이연화는 곧 혀를 차며 그 어깨를 탁 때렸다. 적비성이 움찔했다. "왜, 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말할 셈이야? 그럼 넌 쏙 빼고 방다병하고만 혼인할 줄 알아." 삿대질하며 협박조로 건네자,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금원맹주는 퍽 흉흉한 눈으로 이연화를 노려보다가-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공격 직전의 표정이라고 오해했을 터였다-홱 고개를 돌렸다. 그 입에서 무뚝뚝하다 못해 경직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 1년이다." 이연화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 사이에 일이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못하면, 그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그땐 알아서 해. 방다병을 너무 힘들게 만들지는 말고."
"너야말로 그런 상황이 곧 닥칠 것처럼 말하지 마라."
"미리 논의해두는 것뿐이야. 그래야 만일의 상황에서도 내가 안심하고 눈을 감지 않겠어."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말란 뜻이다."

금원맹주가 지극히 못마땅한 눈으로 타박했다. 이연화는 대충 알았다고 대꾸하며 웃어버렸다. 적비성은 흰소리로 넘기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자신뿐 아니라 그들 역시 만일의 상실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살기에, 세 사람은 너무나 한창 때의 강호인이었으며 여러모로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이었다. 가만히 시선을 내리깐 이연화의 귀로, 곧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활짝 열린 문 너머에서, 방다병의 후련한 얼굴이 나타났다.

"증거와 증인이 워낙 확실해서, 관아 사람들도 놀라긴 했지만 잘 받아줬어. 당시에 불성실하게 근무하던 자들이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라서 더 그랬던 것 같고. 다행이지 뭐야. 방화 건에 대해서는 아직도 발뺌하고 있지만, 철저히 조사하고 심문하겠다 약조했으니 시간 문제일 테지."

방다병이 밝게 이야기하며 들어왔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연화는 이내 오른손을 들어 상대의 등을 툭툭 쓸어주었다. 방다병이 동그래진 눈으로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이 녀석, 왜 그 질문을 하면서 아비를 보는 거야."
"그야, 네가 혼자 있을 때 이상한 짓을 한 적이 많았으니까...그게 아니면 갑자기 왜 이래?"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방다병은 이연화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순수함을 간직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연화가 부드럽고도 낮은 말을 건넸다. "그냥, 방소보. 네가 새삼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지. 잘했어."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연화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리라 짐작하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럼...귀신 소동은 대략 마무리된 듯하니, 이젠 혼례 준비에 집중해도 되겠지?"

청년이 슬쩍 이연화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이연화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했다.

"그래. 다만 나는 내일부터 다녀와야 할 곳이 있으니, 이곳을 어떻게 꾸밀지는 네가 알아서 해줘."
"뭐? 어디를 다녀오려고?"

방다병의 눈이 종전보다 훨씬 휘둥그레졌다. 적비성 역시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가운데, 이연화가 방다병의 등을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멀리 간다는 게 아니야, 얼마간 저자를 좀 다녀야겠어. 저녁엔 들어올 테니 걱정하지 마."
"왜? 무슨 일인데? 필요한 게 있으면 사람을 시켜도-."
"내가 다녀와야 해. 나름대로 혼례 준비의 일환이니까, 적당히 모른 척 해줘. 응?"

이연화가 설핏 웃으며 건넨 말에, 방다병은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으나 함부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엷은 미소와 함께 그 모습을 응시하다, 이연화는 문득 고개를 돌려 반쯤 열린 문간을 향했다. 취화탕의 꽃나무에서 떨어진 듯한 꽃잎 몇 개가, 서늘한 밤바람을 타고 방 안으로 날아들던 참이었다. 희고 붉은 꽃잎과 은은한 향기가 마치 고인의 인사 같다고 생각하다가, 이연화는 오른손을 들어 방다병의 머리에 붙은 꽃잎 하나를 떼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