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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화는 요 며칠 너무나 피곤했다. 방다병과 적비성이 하릴없이 하루 종일 바둑을 두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적비성이 내리 지기만 하더니 밤마다 이연화의 침상을 파고든 것이다. 뭐 그것까지도 좋았다. 얌전히 잠만 자면 좁기는 해도 이불속이 따뜻하니 손해만 보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대마두가 밤늦게까지 손장난을 치는 것이 문제였다.

은근히 종아리며 허벅지, 팔뚝을 쓰다듬으며 ‘근골이 좋다.’는데 이연화는 달리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귀찮아서 팔을 찰싹 쳐내면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만 들릴 뿐 손은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근육과 근육 사이를 만지작거리는데 열중한 적비성을 내버려두고 밀려오는 수마에 의식을 맡길 때면 진실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깝군, 아까워.’

그렇게 며칠 밤을 헤매던 손이 어젯밤엔 맨살에 닿았다. 옷깃 사이로 시나브로 들어온 손가락이 따끈하게 데워진 살갗을 가만히 눌렀다. 이연화는 몸을 뒤척이며 완전히 돌아누웠다. 가슴께를 간질이던 손길은 사라졌지만 귓가에 뜨거운 숨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뭐 하나만 묻지. 네 가슴에 흉터를 남긴 사람은 누구지?”

묻는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기가 실려있었다. 이연화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또 언제 봤대.”
“첫날에. 네가 정신 없이 자고 있을 때.”
“아.”

이연화가 투덜거렸다.

“무방비한 사람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한 거야?”
“글쎄, 네 손발이 차가우니 심장도 차가울까 궁금해서 만져봤어. 상처가 꽤 깊었나 보던데. 누구와 대결을 한 거지?”
“왜 꼭 내가 대결을 했다고 생각해? 자다가 칼침을 맞은 걸 수도 있지. 너 같은 인간한테.”

이연화는 어물쩍 넘어가고 싶었으나 적비성은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흉터로 봐선 자다가 당했으면 죽었을 거다. 그만한 칼을 맞고 살은 걸 보면 대결 중에 일어난 일이겠지.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맞아. 나처럼 무공이라고는 하나도 못하는 사람이었어. 손님과 약값을 주네마네 시비가 붙었는데 아차하는 사이에 칼로 찌르고 도망갔지 뭐야. 난 다행히 살았지만 몇 달간 고생 좀 했지.”

이연화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비, 잠 좀 자자.”
“복수해 줄까?”

복수는 무슨, 네가 너 스스로를 찌르려고? 이연화는 피식 웃었다.

“걱정 마. 나도 그냥 보내준 건 아니야. 상대방도 칼에 찔렸으니까.”
“흐음.”

실망한 듯한 한숨을 뒤로 드디어 적비성이 잠잠해졌다.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슬그머니 이연화의 가슴 위를 더듬었다.

“사실 나도 보니 가슴 밑에 칼에 찔린 흉터가 있더군. 이거야말로 막상막하로 실력을 다퉜던 것이겠지. 당시에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누군지 기억을 찾게 되면 꼭 찾아가서 다시 겨뤄볼 것이다.”

이연화는 숨이 턱 막혔다. 그만둬줘. 제발. 

“혹시 그가 누군지 알고 있나?”
“아니 난 전혀 몰라. 우리가 만나기 전 얘긴 거 같은데. 어휴, 간밤에 무슨 그런 살벌한 이야기를 해.”

이연화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독사굴에 자신을 내던지던 적비성의 고집스러운 얼굴이 떠올라 오싹해진 이연화는 부르르 떨며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그 꼴을 보고 오해한 적비성이 그를 이불째로 감싸 안았다.

“추운가?”
“그래, 추워.”

적비성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이연화를 감싼 채로 꼼꼼하게 이불을 여며주면서 도닥였다. 이연화는 머리만 내놓은 만두소처럼 이불에 꽁꽁 싸였다. 별안간 적비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을 잃은 대마두는 즐거우면 웃는 얼굴에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그 누가 금원맹 맹주가 저렇게 아이처럼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이연화는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둘은 한참을 마주 보고 있었다. 적비성이 고개를 내려 입을 맞출 것을 이연화는 알고 있었다.

이연화는 적비성을 주운 첫날에 그가 잠꼬대하던 것을 떠올렸다.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느냐고 괴롭게 호소하던 모습을 보고 그의 어두운 지난날을 추측할 수 있었다. 십 년 전 그를 조사했을 때 서남의 무사양성소에서 지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몰랐었다. 그런데 그 잠꼬대를 떠올려보면…. 그가 어떻게 마교 맹주가 되었는지, 왜 그렇게 잔인한 성정을 지니게 되었는지. 이연화는 머릿속에 어떤 명백한 그림이 그려졌다. 

적비성이 기억을 잃은 채 거짓 없는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조금씩 타이르며 잘 이끈다면 쓸모없는 살상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착각하게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연화는 입안을 훑는 말캉한 것을 살짝 깨물고 놔주었다. 적비성이 흠칫하더니 입술을 떼고 이연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데 다행히 이불에 묶인 두 팔 덕에 충동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제 자자. 나 너무 졸린데.”

적비성은 드디어 순순히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한쪽 팔은 이연화의 허리에 둘러졌지만 힘을 빼고 편안한 자세였다. 둘은 그대로 잠들었다.


그것이 간밤의 일이다. 이연화는 조금 늦잠을 잤고 적비성은 아침 일찍 자리를 뜬 것 같았다. 밤새 꽁꽁 묶인 채 불편한 잠을 잔 이연화는 온몸이 쑤셨다. 찌뿌둥한 팔로 기지개를 켜며 연화루 밖으로 나오는데 이번엔 불퉁한 방다병을 마주해야 했다.

“좋은 아침.”

이연화가 인사하는데도 방다병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를 등진 채 불여우를 하릴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좋은 아침은 무슨. 해가 중천에 떠서 불여우는 아침 먹은 지가 언젠데. 그치~ 불여우.”

이연화가 둘러보니 부엌에 국수를 끓일 준비가 이미 다 돼있었다. 방다병이 저를 기다리느라 아침을 거른 것이 분명했다. 미안해진 이연화는 얼른 불을 올려 국수를 2인분 끓여냈다. 밑준비는 방다병이 다 했기에 그다지 파멸적인 맛은 나지 않았다. 말없이 국수를 후루룩 먹는 방다병에게 이연화가 물었다.

“아비는?”

탕! 방다병이 젓가락을 쥔 채로 탁자를 내리쳤다. 

“아침부터 그게 궁금해?”

생각만 해도 화가나 죽겠는지 쳐진 눈꼬리가 발갛게 물들었다. 씩씩거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놀란 이연화가 국수 그릇을 든 채로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그래? 아비랑 싸웠어?”
“아니! 내가 왜?!”
“그런데 왜….”

방다병은 국수를 우악스레 한입 가득 떠먹더니 다 씹지도 않고 콧김을 뿜었다. 

“나 오늘부터 1층에서 잘 거야. 이 몸이 이 가을에 사방이 다 뚫린 곳에서 이슬 맞고 자야겠어? 노숙이나 다름없잖아.”

과장하기는. 2층이 뻥 뚫려있기는 하지만 4면으로 대나무발을 끝까지 내리면 꽤 쓸만한 잠자리였다. 촘촘히 짜인 대나무발은 습기도 바람도 어느 정도 막아주어 1층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방소보. 애초에 바둑으로 내기한 건 너랑 아비잖아. 둘이 합의를 봐.”
“...너!”

할 말이 없어진 방다병은 씩씩거리다 다시 국수를 흡입했다. 커다란 두 눈에 억울함이 한가득 고여있었다. 

“다음부턴 장사 나갈 때 꼭 나 데리고 가. 무공도 못하면서 사기 치고 다니니까 칼침이나 맞는 거 아니야.”

이연화는 방다병을 흘긋 보면서 웃었다. 어떻게 나갈 때 마다 너를 꼬박꼬박 데리고 다니겠니. 방다병이 기특했지만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연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국물을 들이켰다. 방다병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더 칭얼거리지는 않았다.

이연화는 술을 사러 잠시 저잣거리에 갔다 왔다. 애를 달래는 데는 먹고 마실 것이 최고다. 간만에 저녁에 약주나 같이 하면서 방다병을 잘 구슬려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연화루가 세워진 곳까지 왔더랬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두 남자가 뒤엉켜 싸우며 연화루의 살림이 박살 나고 있었다. 마당의 탁자는 다리 네 짝이 몸통과 이별한 채 풀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불여우가 컹컹 짖어대는 가운데 연화루 입구부터 지푸라기가 사방에 흩어져있었다. 1층 바닥에 깔아놓은 이부자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내가 잘 거야!”
“허튼소리.”

완전히 개싸움이었다. 방다병은 어리니 그렇다 치고, 대마두는? 적비성은 어째서 어린애를 상대로 매번 진심이란 말인가. 이연화는 골이 지끈지끈 울리는 것을 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너네끼리 2층에서 껴안고 자!”

방다병과 적비성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싫어!”
“싫어!”


연화루 이연화 방다병 적비성